58. 주롱방어선 상실
서부지구사령관 벤넷 소장은 주롱방어선을 최소한 며칠간 지킬 생각이었다. 그는 2월 9일 저녁에 주롱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련의 명령을 내렸다. 주롱방어선 전면의 불림방어선을 지키던 제22호주여단(테일러 준장)은 10일 오전 6시에 철수하여 주롱방어선의 제12여단(파리스 준장)과 제44여단(발렌타인 준장) 사이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부지구사령부의 예비대가 된 제15여단(코츠 대령)은 10일 아침까지 제22호주여단의 동쪽에 도착하여 제22호주여단의 후방을 받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4여단은 조금 남쪽으로 이동하여 자와 마을에서 제1말레이여단(윌리엄스 준장)과 연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10일 새벽 4시 45분에 제12여단사령부로 가서 파리스 준장과 회담했다. 그 결과 제2/29호주대대(폰드 중령)와 특별예비대대((새거스 소령)를 주롱방어선에 배치하고 여단의 나머지 병력은 주롱방어선 동쪽에 예비대로 대기하기로 했다. 원활한 지휘를 위하여 제2/29호주대대는 주롱방어선에 도착하는대로 제12여단에 배속하기로 했다.
10일 오전 6시에 제22호주여단은 불림방어선으로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후위를 맡은 제2/18호주대대의 브렌건캐리어들이 추격하는 보병제21연대제3대대에 매복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움찔하는 사이 제22호주여단은 주롱방어선까지 후퇴했다. 후퇴하던 도중 제2/29호주대대의 4개 중대 중 A 중대를 제외한 3개 중대는 대대본부와 연결이 끊어졌다. 부대대장 호어 소령이 인솔하는 이들 3개 중대는 주롱방어선에 도착하자 제12여단에 배속되어 아길 대대의 남쪽에 배치되었다. 원래 아길대대 남쪽에 있던 하이드라바드 대대는 아길대대의 동쪽으로 물러나 제12여단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휘하의 3개 중대와 연락이 끊어진 제2/29대대장 폰드 중령은 3개 중대를 찾는데 실패하고 A 중대와 함께 제22호주여단사령부로 가서 후속 명령을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주롱방어선의 포기를 가져온 혼란이 시작되었다. 최종방어선의 위치를 명기한 퍼시발 중장의 명령서는 10일 오전 중에 여단장들에게 도착했다. 명령서에는 언제 최종방어선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최종방어선의 존재를 알게 된 지휘관들은 통신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압력을 받게 되자 현재 위치를 지키기보다 쉽게 철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오전 9시에 최종방어선의 위치가 표시된 퍼시발 중장의 명령서를 보았다. 그는 이 명령이 제22호주여단에게 즉시 지도에 표시된 소년원 도로 - 울루판담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으로 착각했다. 테일러 준장은 제2/18호주대대와 메렛부대(제2/19 및 제2/20호주대대의 잔존병을 합친 부대)를 이끌고 10일 오전 중에 소년원도로로 가서 미리 와 있던 X 대대(보이스 중령)를 흡수했다. 제2/15야포연대도 테일러 준장의 요청에 따라 울루판담 지역으로 이동했다. 최종방어선에 도착하자 테일러 준장은 서부지구사령부에 보고했다. 벤넷 소장은 이 보고를 듣고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제22호주여단에게 굳이 주롱방어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사실 제22호주여단의 주력이었던 제2/29호주대대와 특별예비대대가 주롱방어선에 남아있는 한 방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최종방어선에서 테일러 준장은 점호를 실시했는데 당시 제2/18호주대대와 메렛부대를 합친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제12여단의 우익을 맡은 아길대대는 오전 8시부터 일본군의 박격포 사격을 받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격이 심해지더니 기관총 사격이 뒤따랐다. 이어서 보병제11연대제3대대의 일부가 아길대대의 북쪽을 돌아 후방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제12여단사령부와 통신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길대대장 스튜어트 중령은 일본군의 우회 기동을 차단하기 위하여 직권으로 자신의 대대와 제2/29호주대대에게 동쪽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정오가 되자 제12여단은 초아추캉 도로의 12마일 이정표 지역 부근에 방어선을 폈다. 초아추캉 도로를 따라 진격하던 보병제21연대제3대대는 박격포 사격을 가하면서 제12여단을 서서히 따라왔을 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제2/29호주대대를 이끌던 호어 소령이 박격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자 지휘를 보우링 대위에게 넘기고 오토바이를 타고 여단이나 사단사령부를 찾아 떠났다.
10일 오후에 자신의 여단에 돌아온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북쪽에 있는 제27호주여단을 찾기 위하여 정찰대를 파견했다. 정찰대는 간선도로와 크란지 도로의 교차점까지 북상하여 일본군이 교차점을 점거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도중에 호주군과 접촉하지 못했다. 그러자 파리스 준장은 크란지에 상륙한 일본군이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요충지 부킷티마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부지구사령부와 연락이 닿지 않았으므로 그는 직권으로 부킷티마 북쪽에 있는 부킷판장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병력을 다시 철수시켰다.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는 초아추캉도로의 11마일이정표 지역에서 부킷판장마을의 서쪽을 지켰다. 제2/29대대는 부킷판장 마을을 지켰고 아길대대는 부킷판장 마을의 남쪽에 주둔하여 예비대 역할을 했다. 진드 대대는 부킷판장 마을의 남서쪽인 437고지를 지켰다. 이로써 주롱방어선의 북쪽 절반이 비었다.
제2/29호주대대를 지휘하던 보우링 대위는 부킷판장 방어를 위하여 제15대전차포대를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아직 일본군이 전차를 양륙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파리스 준장은 거부했다. 보우링 대위는 그렇다면 제2/10호주야포연대의 1개 포대라도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주롱방어선의 남쪽을 맡은 제15여단과 제44여단은 10일 아침에 지정된 위치에 도착했다. 두 여단의 병사들은 몹시 피곤한 상태였는데 전날 오후부터 12시간 동안 행군한 제44여단의 경우 특히 그랬다. 오전 9시 30분에 제44여단장 발렌타인 준장은 최종방어선의 위치를 표시한 퍼시발 중장의 명령서를 보았다. 명령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발렌타인 준장은 제15여단장 코츠 대령과 대대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으나 언제 최종방어선으로 후퇴하라는 소리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주롱방어선에 남아있던 제15 및 제44여단, 그리고 특별예비대대는 10일 오전 내내 심한 폭격을 받았다. 오후 1시 30분이 되자 일본제18사단이 주롱 도로를 따라 전진해 왔다. 제44여단의 우익인 제6/1펀자브대대는 주로 보병제114연대제3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15여단의 좌익인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 는 주로 보병제56연대제2 및 제3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중압에 눌린 영국대대의 1개 중대가 차량을 타고 도망쳤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본 제6/1펀자브대대가 제44여단장 발렌타인 준장에게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발렌타인 준장은 부분적 철수를 포함한 방어선 조정을 명했다. 하지만 방어선 조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대장들은 오전에 보았던 최종방어선을 떠올렸다. 일단 병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고 병사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발렌타인 준장은 최종방어선으로 설정된 울루판담 남쪽에서 겨우 여단을 재편성할 수 있었다. 난리통에 제6/1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와 제7/8펀자브대대의 2개 중대는 대대에서 떨어져 제15여단 지역으로 후퇴함으로써 제15여단에 배속되었다.
오전에 북쪽을 지키던 제12여단이 철수하더니 오후에 남쪽의 제44여단마저 철수해 버리자 제15여단도 주롱 도로를 따라 서서히 철수하여 오후 6시에 9마일이정표 지점까지 후퇴했다. 제12여단과 제15여단의 철수로 양쪽 옆구리가 비어버린 특별예비대대도 후퇴하여 제15여단에 합류했다. 주롱방어선의 최남단을 지키던 윌리엄스 준장의 제1말레이여단도 서쪽으로 물러나 제44여단의 남쪽인 파시르판장 지역에 주둔했다.
이로써 10일 저녁까지 서부지구사령부 여단들은 주롱방어선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물러나 간선도로를 따라 남북으로 엉성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1942년 2월 10일 오후 7시 현재 싱가포르섬 서부전선.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44)
비교적 손쉽게 주롱방어선을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 집결을 서둘렀다. 10일 저녁까지 제5사단은 텡가 비행장 서쪽에 전차의 지원을 받는 3개 보병연대를, 제18사단은 주롱도로의 13마일이정표 지역 부근에 3개 보병연대를 집결시킨 후 진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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