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주롱방어선 상실


서부지구사령관 벤넷 소장은 주롱방어선을 최소한 며칠간 지킬 생각이었다. 그는 2월 9일 저녁에 주롱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련의 명령을 내렸다. 주롱방어선 전면의 불림방어선을 지키던 제22호주여단(테일러 준장)은 10일 오전 6시에 철수하여 주롱방어선의 제12여단(파리스 준장)과 제44여단(발렌타인 준장) 사이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부지구사령부의 예비대가 된 제15여단(코츠 대령)은 10일 아침까지 제22호주여단의 동쪽에 도착하여 제22호주여단의 후방을 받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4여단은 조금 남쪽으로 이동하여 자와 마을에서 제1말레이여단(윌리엄스 준장)과 연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10일 새벽 4시 45분에 제12여단사령부로 가서 파리스 준장과 회담했다. 그 결과 제2/29호주대대(폰드 중령)와 특별예비대대((새거스 소령)를 주롱방어선에 배치하고 여단의 나머지 병력은 주롱방어선 동쪽에 예비대로 대기하기로 했다. 원활한 지휘를 위하여 제2/29호주대대는 주롱방어선에 도착하는대로 제12여단에 배속하기로 했다.


10일 오전 6시에 제22호주여단은 불림방어선으로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후위를 맡은 제2/18호주대대의 브렌건캐리어들이 추격하는 보병제21연대제3대대에 매복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움찔하는 사이 제22호주여단은 주롱방어선까지 후퇴했다. 후퇴하던 도중 제2/29호주대대의 4개 중대 중 A 중대를 제외한 3개 중대는 대대본부와 연결이 끊어졌다. 부대대장 호어 소령이 인솔하는 이들 3개 중대는 주롱방어선에 도착하자 제12여단에 배속되어 아길 대대의 남쪽에 배치되었다. 원래 아길대대 남쪽에 있던 하이드라바드 대대는 아길대대의 동쪽으로 물러나 제12여단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휘하의 3개 중대와 연락이 끊어진 제2/29대대장 폰드 중령은 3개 중대를 찾는데 실패하고 A 중대와 함께 제22호주여단사령부로 가서 후속 명령을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주롱방어선의 포기를 가져온 혼란이 시작되었다. 최종방어선의 위치를 명기한 퍼시발 중장의 명령서는 10일 오전 중에 여단장들에게 도착했다. 명령서에는 언제 최종방어선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최종방어선의 존재를 알게 된 지휘관들은 통신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압력을 받게 되자 현재 위치를 지키기보다 쉽게 철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오전 9시에 최종방어선의 위치가 표시된 퍼시발 중장의 명령서를 보았다. 그는 이 명령이 제22호주여단에게 즉시 지도에 표시된 소년원 도로 - 울루판담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으로 착각했다. 테일러 준장은 제2/18호주대대와 메렛부대(제2/19 및 제2/20호주대대의 잔존병을 합친 부대)를 이끌고 10일 오전 중에 소년원도로로 가서 미리 와 있던 X 대대(보이스 중령)를 흡수했다. 제2/15야포연대도 테일러 준장의 요청에 따라 울루판담 지역으로 이동했다.  최종방어선에 도착하자 테일러 준장은 서부지구사령부에 보고했다. 벤넷 소장은 이 보고를 듣고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제22호주여단에게 굳이 주롱방어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사실 제22호주여단의 주력이었던 제2/29호주대대와 특별예비대대가 주롱방어선에 남아있는 한 방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최종방어선에서 테일러 준장은 점호를 실시했는데 당시 제2/18호주대대와 메렛부대를 합친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제12여단의 우익을 맡은 아길대대는 오전 8시부터 일본군의 박격포 사격을 받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격이 심해지더니 기관총 사격이 뒤따랐다. 이어서 보병제11연대제3대대의 일부가 아길대대의 북쪽을 돌아 후방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제12여단사령부와 통신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길대대장 스튜어트 중령은 일본군의 우회 기동을 차단하기 위하여 직권으로 자신의 대대와 제2/29호주대대에게 동쪽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정오가 되자 제12여단은 초아추캉 도로의 12마일 이정표 지역 부근에 방어선을 폈다. 초아추캉 도로를 따라 진격하던 보병제21연대제3대대는 박격포 사격을 가하면서 제12여단을 서서히 따라왔을 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제2/29호주대대를 이끌던 호어 소령이 박격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자 지휘를 보우링 대위에게 넘기고 오토바이를 타고 여단이나 사단사령부를 찾아 떠났다.


10일 오후에 자신의 여단에 돌아온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북쪽에 있는 제27호주여단을 찾기 위하여 정찰대를 파견했다. 정찰대는 간선도로와 크란지 도로의 교차점까지 북상하여 일본군이 교차점을 점거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도중에 호주군과 접촉하지 못했다. 그러자 파리스 준장은 크란지에 상륙한 일본군이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요충지 부킷티마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부지구사령부와 연락이 닿지 않았으므로 그는 직권으로 부킷티마 북쪽에 있는 부킷판장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병력을 다시 철수시켰다.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는 초아추캉도로의 11마일이정표 지역에서 부킷판장마을의 서쪽을 지켰다. 제2/29대대는 부킷판장 마을을 지켰고 아길대대는 부킷판장 마을의 남쪽에 주둔하여 예비대 역할을 했다. 진드 대대는 부킷판장 마을의 남서쪽인 437고지를 지켰다. 이로써 주롱방어선의 북쪽 절반이 비었다.

제2/29호주대대를 지휘하던 보우링 대위는 부킷판장 방어를 위하여 제15대전차포대를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아직 일본군이 전차를 양륙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파리스 준장은 거부했다. 보우링 대위는 그렇다면 제2/10호주야포연대의 1개 포대라도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주롱방어선의 남쪽을 맡은 제15여단과 제44여단은 10일 아침에 지정된 위치에 도착했다. 두 여단의 병사들은 몹시 피곤한 상태였는데 전날 오후부터 12시간 동안 행군한 제44여단의 경우 특히 그랬다. 오전 9시 30분에 제44여단장 발렌타인 준장은 최종방어선의 위치를 표시한 퍼시발 중장의 명령서를 보았다. 명령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발렌타인 준장은 제15여단장 코츠 대령과 대대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으나 언제 최종방어선으로 후퇴하라는 소리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주롱방어선에 남아있던 제15 및 제44여단, 그리고 특별예비대대는 10일 오전 내내 심한 폭격을 받았다. 오후 1시 30분이 되자 일본제18사단이 주롱 도로를 따라 전진해 왔다. 제44여단의 우익인 제6/1펀자브대대는 주로 보병제114연대제3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15여단의 좌익인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 는 주로 보병제56연대제2 및 제3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중압에 눌린 영국대대의 1개 중대가 차량을 타고 도망쳤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본 제6/1펀자브대대가 제44여단장 발렌타인 준장에게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발렌타인 준장은 부분적 철수를 포함한 방어선 조정을 명했다. 하지만 방어선 조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대장들은 오전에 보았던 최종방어선을 떠올렸다. 일단 병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고 병사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발렌타인 준장은 최종방어선으로 설정된 울루판담 남쪽에서 겨우 여단을 재편성할 수 있었다. 난리통에 제6/1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와 제7/8펀자브대대의 2개 중대는 대대에서 떨어져 제15여단 지역으로 후퇴함으로써 제15여단에 배속되었다.


오전에 북쪽을 지키던 제12여단이 철수하더니 오후에 남쪽의 제44여단마저 철수해 버리자 제15여단도 주롱 도로를 따라 서서히 철수하여 오후 6시에 9마일이정표 지점까지 후퇴했다. 제12여단과 제15여단의 철수로 양쪽 옆구리가 비어버린 특별예비대대도 후퇴하여 제15여단에 합류했다. 주롱방어선의 최남단을 지키던 윌리엄스 준장의 제1말레이여단도 서쪽으로 물러나 제44여단의 남쪽인 파시르판장 지역에 주둔했다.

이로써 10일 저녁까지 서부지구사령부 여단들은 주롱방어선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물러나 간선도로를 따라 남북으로 엉성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1942년 2월 10일 오후 7시 현재 싱가포르섬 서부전선.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44)


비교적 손쉽게 주롱방어선을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 집결을 서둘렀다. 10일 저녁까지 제5사단은 텡가 비행장 서쪽에 전차의 지원을 받는 3개 보병연대를, 제18사단은 주롱도로의 13마일이정표 지역 부근에 3개 보병연대를 집결시킨 후 진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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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근위사단 상륙


둑길 지역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맥스웰 준장)은 9일 새벽에 인접한 제22호주여단 구역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2/29호주대대를 서부지구사령부에 빼앗겨 2개 대대만 가지고 있던 맥스웰 준장은 일본군이 서쪽으로부터 여단을 공격할까봐 두려워했으나 공격은 없었다.

맥스웰 준장은 9일 오후 1시 30분에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과 제2/30호주대대장 갈레간 중령을 여단사령부로 불러 회의를 가졌다. (옥스 소령은 원래 제2/29호주대대의 부대대장이었으나 제2/26호주대대장 보이스 중령이 싱가포르로 가서 행정병을 모아 만든 X대대의 지휘를 맡게 됨에 따라 중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제2/26호주대대장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2개 대대는 크란지 강과 둑길 사이의 해안방어선을 떠나 남쪽의 제12인도여단과 연결하여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방어선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제2/30호주대대는 철수하기 전에 자신의 작전구역 안에 있는 기름탱크의 석유를 방류한 후 폭발시켜 일본군에게 화공을 가하는 임무도 맡았다. 

당시 갈레간 중령은 일시적으로 난청이 와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희의가 끝난 후 맥스웰 준장은 치료를 위하여 갈레간 중령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제2/30호주대대의 부대대장이었던 램지 소령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대대장 2명이 모두 바뀌었는데 램지 소령은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아서 회의 내용을 대대 정보장교인 이튼 중위로부터 전달받았다.


일본군의 야포가 9일 하루종일 제27호주여단 지역을 포격하여 오후 6시가 되자 해안방어선으로 통하는 전화선이 모두 끊기고 방어시설이 파괴되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근위사단은 스쿠다이 강에서 승선을 마쳤다. 오후 8시 30분이 되자 포격이 멎더니 오후 9시부터 일본군이 둑길과 크란지강 사이의 해안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은 4개 제대로 나뉘어 상륙했다. 좌익을 담당한 좌측엄호대(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는 제2/30호주대대 구역인 둑길과 만다이 강 사이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의 주력인 보병단은 3개 제대로 나뉘어 크란지 강과 만다이 강 사이의 제2/26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했다. 보병단의 좌익인 좌공격대(근위보병제4연대제1대대)는 제2/26호주대대 B 중대가 지키던 만다이 강 서쪽에 상륙했다. 보병단의 중앙인 근위보병제3연대제3대대는 제2/26호주대대 A 중대가 지키던 크란지 마을 서쪽에 상륙했다. 보병단의 우익이자 주공인 우공격대(근위보병제4연대제2 및 제3대대)는 역시 제2/26호주대대 A 중대가 지키던 크란지 강 동쪽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은 상륙주정이 모자라 고생했다. 전날 상륙을 실시한 제5사단과 제18사단으로부터 많은 주정를 받아야 했으나 상륙 과정의 소모로 인하여 약속된 분량이 도착하지 않았다. 가령 우공격대의 경우 원래 제18사단으로부터 75척의 절첩주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도착한 것은 25척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제1파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제한되었으며 추가 병력의 투입에도 지장을 받았다.


제27호주여단의 화력지원을 담당한 것은 제2/10야포연대의 2개 포대였는데 제2/26호주대대에 배정된 1개 포대는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여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해가 진 이후에야 북상 명령을 받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상륙이 시작되었을 때 가용한 포대는 제2/30호주대대에 배정된 1개 포대 뿐이었다.


(근위사단 상륙 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28)


제27호주여단의 좌익을 맡은 제2/26호주대대의 탐조등은 이번에도 작동하지 않았고 병사들은 접근하는 일본군 주정을 발견하고 일제히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나 야포 지원도 없었다. 기관총의 반응도 늦어 첫 주정이 상륙한 지 20분이 지나서야 사격을 시작했다. 그나마 박격포들이 제 역할을 하여 상륙하는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나 계속 몰려드는 후속부대의 상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곧 제2/26호주대대의 선두 소대와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일선에 배치된 A 및 B 중대와 바로 후방에 있던 C 중대는 크란지 마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펴고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자정까지 버텼다.


제2/30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는 만다이케칠 강 하구에 상륙했는데 제2/30호주대대는 일본군의 상륙지점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는 방법으로 느슨한 포위망을 만들었다. 이때 일본군 교두보 내로 야포 사격을 가하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나 램지 소령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포탄이 떨어진 후였으며 추가 공급도 없었다. 포위망 내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는데 실패하자 일본군이 포위망의 약한 곳을 뚫고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상륙하자 제2/30호주대대 B중대장 더피 대위는 폭파반에게 기름탱크를 폭파하여 일본군에게 화공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와천 중위가 이끄는 폭파반이 폭약을 실은 트럭에 접근하는 순간 트럭이 적의 포탄에 맞아 부서졌으나 다행히 폭약은 터지지 않았다. 폭파반은 폭약을 들고 6km 를 걸어서 10일 새벽 3시에 기름탱크에 도착한 후 폭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일본군이 들이닥쳤으나 폭파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폭파반은 일본군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작업을 계속하여 폭약 설치를 마쳤다. 폭발시간을 새벽 4시로 설정한 폭파반은  밸브를 열어 기름을 방류하고는 무사히 탈출했다. 끈적거리는 기름이 강을 따라 해협으로 흘러들자 해안의 일본군은 영국군이 화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질렸다. 새벽 4시가 되자 900만 리터의 석유를 저장하고 있던 기름탱크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눈이 멀듯한 섬광이 밤하늘을 밝혔고 귀를 찢는듯한 폭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불타는 기름이 강으로 쏟아져 이미 강을 따라 해협에 흘러들어가고 있던 기름띠에 불을 붙였다. 불타는 기름은 오전 4시 50분에 만조가 된 밀물을 타고 해안가의 맹그로브 숲을 덮쳐 미처 해안을 벗어나지 못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같은 시각 제3인도군단의 공병과 해군공병대가 해군기지에 설치한 폭약도 폭발하면서 혼란을 부채질했다.


크란지 마을에서 저항하던 제2/26호주대대의 3개 중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자정이 되자 제2/26대대는 해안에서 460m 정도 떨어진 크란지 반도의 목을 이루는 좁은 지형까지 밀려났다. 대대는 이곳에 방어선을 펴고 거듭되는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때 제2/26호주대대와 제27호주여단사령부와의 통신이 반짝 가능해졌다. 맥스웰 준장은 옥스 중령에게 제2/30호주대대까지 통합 지휘할 권한을 부여하면서 옥스 중령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면 9일 오후에 설정한 방어선으로 물러서도 좋다고 허가했다.

맥스웰 준장은 제2/10야포연대에게도 남쪽의 경주로(Racecourse) 지역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은 9일 새벽 4시가 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침 그때 기름탱크와 해군기지가 동시에 폭발하면서 일본군이 동요하자 그는 제2/30호주대대와 자신의 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양 대대는 일본군의 혼란을 틈타 쉽게 철수했다. 제2/30호주대대는 만다이 도로의 14마일이정표 지역으로 철수했고 제2/26호주대는 제2/30호주대대의 남쪽에서 부킷판장 마을의 북쪽에 이르는 지역으로 철수했다. 제27호주여단이 둑길 지역을 포기함으로써 동쪽의 제11사단과 약 3,700m 에 달하는 공간이 생겨났다. 제2/30호주대대는 철수하기 전에 인접한 제2/2구르카대대에게 자신들이 서쪽으로 철수한다는 사실과 새로 배치될 지역을 적어 전달했다. 이 메모는 제2/2구르카대대가 소속된 제18여단사령부까지 도달했으나 제11사단과의 통신이 불량하여 한참을 지체한 후 제3인도군단으로 바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제11사단사령부는 제27호주여단의 철수 소식을 제3인도군단사령부로부터 들어야 했다.


이때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은 상황 판단에 착오를 일으켰다. 전방으로부터 고전하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는 데다가 영국군의 화공까지 겹치자 그는 그만 자신감을 잃었다. 니시무라 중장은 제25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영국군의 화공으로 제1선 부대가 대손해를 입었다며 공격을 취소하고 다음날 제5사단 구역에 상륙할 승인을 요청했다. 야마시타 중장은 상황 파악을 위하여 제25군 참모인 케라 중좌를 파견했다. 케라 중좌는 상황을 파악한 후 야마시타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근위)사단의 손해는 근소하며 제1선 부대는 목하 공격전진 중" 이라고 보고했다. 따라서 근위사단은 공격을 속행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을 마뜩잖게 생각하던 야마시타 중장의 불신감을 더욱 키웠다. 물론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이나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말레이 사령부는 근위사단의 상륙을 늦게 알았다. 둑길 구역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은 10일 새벽 5시에야 말레이사령부에 도착했고 5시 30분에는 제27호주여단이 후퇴한 것 같다면서 확인을 요구하는 보고가 제3인도군단으로부터 들어왔다. 오전 6시에 서부지구사령부는 제2/30호주대대가 크란지 해안을 떠나 만다이 도로의 14마일 이정표 지역에 있다고 말레이 사령부에 확인해 주었다.


제27호주여단의 동쪽을 지키던 제11사단장 키 소장이  제3인도군단사령부로부터 제27호주여단의 후퇴 소식을 들은 것은 오전 6시 30분이었다. 졸지에 사단의 왼쪽 옆구리가 열려버리자 키 소장은 즉시 사단예비대인 제8여단에게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간선도로 서쪽으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또한 오전 8시에는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에게 통신을 보내어 만다이 마을을 점령함으로써 간선도로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이로써 근위사단의 상륙도 성공했다. 이제 일본군 도항부대는 후속부대와 장비 및 보급품의 수송에 전력했다.

일본제25군의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 및 중장비 수송은 예정보다 늦어졌다. 주정들은 8일 밤에는 제5 및 제18사단을 상륙시켜야 했고 9일 밤에는 근위사단을 상륙시켜야 했다.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중화기 및 중장비의 도항이 이루어졌는데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수송순서에 혼란이 생겼으며 작업대와 도항부대의 연계는 부족했고 작업대는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결국 야포 일부가 도항하여 전투에 참가한 것은 2월 12일부터였고 군포병대를 비롯한 중화기가 모두 도항하여 전투준비를 완료한 것은 2월 14일이 되어서였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1942년 2월 8일에 조호르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조호르 왕궁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원래 제25군 사령부는 9일 아침에 도항하려 했으나 주정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9일 저녁으로 연기했다가 다시 10일 새벽으로 연기했다. 야마시타 중장은 10일 새벽 4시에 조호르 왕궁을 떠나 싱가포르 섬에 상륙하여 일선부대를 둘러본 후 10일 저녁에 텡가 비행장 부근에 사령부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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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상륙(3)-제2/19호주대대구역


제22호주여단의 좌익은 로버트슨 소령의 제2/19호주대대가 맡았다. 대대본부는 베리강 북쪽의 언덕에 있었으며 해안방어선은 페르감강을 경계로 우익은 B중대(키건 소령), 좌익은 D중대(빈센트 소령)이 맡았다. A중대(커즌 대위)는 남쪽의 초아추캉 마을을 지켰으며 C중대(토머스 대위)는 대대예비대로서 대대본부의 바로 서쪽에 주둔했다. 일본군 상륙 당시 대대는 약 370명의 미숙한 신병을 받아들여 전투력이 저하된 상태였다.(대대 정원은 786명이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제2/19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18사단의 우익대였다. 보병제56연대제1대대가 우제1선이었으며 보병제55연대제1대대가 좌제1선으로 상륙했다.

좌제1선인 제55연대제1대대는 B중대의 북쪽 구역에 상륙했다. 이곳을 지키던 소대는 약 50척의 일본군 주정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지원포격을 요청하는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나 야포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이 상륙하면서 중대의 방어구역 전체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55연대제1대대는 큰 피해를 입은 B중대의 우익을 밀어내면서 무라이 강을 따라 진격하기 시작했다.

B중대장 키건 소령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9일 오전 3시에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대대본부를 향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B중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대대본부 서쪽에 주둔 중이던 C중대와 만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B중대의 좌익을 지키던 D중대는 우제1선으로 상륙한 제56연대제11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철수 명령을 떨어졌고 D중대는 대대본부 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앞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후퇴한 D중대는 오전 6시 30분에 대대방어선에 도달했으나 그 과정에서 2개 소대를 잃었다. D중대와의 교전은 제56연대제1대대 입장에서도 상당한 격전으로 대대부관과 제1중대의 제3소대장이 전사하고 제1소대장이 중상을 입었다.

제2/19호주대대장 로버트슨 중령은 A중대에게도 철수명령을 내리기 위하여 정찰대를 파견했으나 접촉하는데 실패했다.


제22호주여단과 제44인도여단의 경계는 초아추캉 도로였다. 제44인도여단은 베리강과 포얀강 사이의 어귀에 일본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여기에 야포의 조준을 맞추고 강력한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실제로 베리강 하구로 진입하려던 일본군은 제56연대제1대대 소속의 주정 5척 뿐이었다. 이 주정들은 제2/15야포연대의 집중사격을 받아 모두 격침되고 타고있던 병사들은 펀자브 대대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제44인도여단의 나머지 전선은 밤새 조용했다.


(싱가포르 섬 상륙.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84

 

 

9일 새벽 2시까지 제18사단의 예비대인 보병제56연대의 제2 및 제3대대가 상륙을 마침으로써 제18사단도 상륙에 성공했다.

일본제25군은 야포 160문을 가진 군포병 및 사단포병을 북서해안에 집결시켜 그 화력지원 아래 싱가포르섬 상륙을 성공시켰다. 상륙한 병력은 13개 대대, 예비대는 5개 대대에 달했다.


말레이 사령부는 벤넷 소장의 요청에 따라 오전 6시에 모든 항공기(허리케인 10대, 소드피쉬 4대)를 이륙시켜 상륙한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허리케인들은 이륙하자마자 조호르에서 날아온 84대의 일본기와 싸워야 했다. 치열한 공중전 끝에 1대를 잃은 허리케인 부대가 칼랑 비행장에 착륙하여 재급유를 받는 동안 다시 84대의 일본기가 들이닥쳐 허리케인들은 재차 요격에 나서야했다. 따라서 상륙한 일본군에 대한 공습은 불가능했다. 


9일 아침에 북부지구 사령부로부터 전선이 조용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비로소 퍼시발 중장은 북서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이 주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전 9시 30분에 말레이 사령부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12인도여단(파리스 준장)을 서부지구에 배속시켰다.


9일 오전 9시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일본군에게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아마켕을 떠나 텡가 비행장 서쪽의 불림으로 여단사령부를 옮겼다.


그동안 제22호주여단의 일선 대대들은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아마켕 북쪽의 나마지에 농원을 지키던 제2/20호주대대(애쉬톤 중령)는 주로 일본제5사단의 좌익대인 보병제11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2/20호주대대는 북쪽으로 1개 소대를 내보내어 고립된 D중대(리처드슨 대위)의 퇴로를 열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너무 많아 불가능했다. 

일본군의 압력이 점점 가중되자 제2/20호주대대는 오전 9시 15분에 아마켕 부근에 있던 제2/18호주대대(발리 중령)와 연결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마켕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이미 일본군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남하 도중 대대의 좌익을 맡았던 에와트 대위의 B중대가 매복공격을 받아 대대정보장교 레논 중위가 전사하고 에와트 대위가 부상을 입었다. A 중대로부터에서 콘포스 소위가 지휘하는 1개 소대가 달려가 매복했던 일본군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못박혀 있던 B 중대의 잔존병을 구출했다. 그러나 잠시 후 더 많은 일본군이 달려와서 교전이 벌어졌고 B중대와 콘포스 소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A중대(메렛 소령)는 콘포스 소대가 B중대를 구하는 동안 자리를 지켰으나 가중되는 일본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오전 10시부터 다시 남하했다. 그때 북쪽 고지에서 쏘아대는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자 A중대는 여러 소부대로 흩어져 버렸다.

북쪽에 고립되어 있던 D중대는 오전 10시 30분부터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많은 일본군과 쉴새없이 교전하면서 남하하던 D중대는 아마켕 부근에서 2개로 갈라졌고 이어서 늪지로 들어서면서 완전히 흩어졌다. 

이로써 제2/20호주대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대대원 중 소수만이 불림에 있던 제22호주여단 사령부에 도착했는데 일부는 무기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제2/20호주대대의 장교 중 대대장 애쉬톤 중령을 포함한 7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고 이외에도 다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영연방 보병대대의 장교는 33명이다.)


아마켕 마을에 주둔한 제2/18호주대대(발리 중령)는 주로 제5사단의 우익대인 보병제42연대의 맹공을 받았다. 보병제42연대는 림추캉 도로 서쪽의 언덕을 지키고 있던 A중대(존스턴 대위)와 C중대(오케이 대위)를 공격하여 도로 서쪽으로 몰아내었다. 이후 제2파로 상륙한 보병제21연대의 1개 대대가 보병제42연대를 추월하여 A 및 C중대 남쪽에 있던 D중대(치점 대위)의 배후를 통하여 텡가 비행장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A중대장 존스턴 대위는 A 및 C중대 80명에 제2/10공병중대 병력 50명을 포함하여 130명의 병력으로 반격을 가했다. 존스턴 부대는 일본군에 접근하여 사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돌격했으나 황급히 편성한 일본군 방어선 20m 앞에서 저지당했다. 이때 야포가 지원사격을 해주거나 아니면 바로 남쪽에 있던 D중대가 일본군의 배후를 찔렀다면 승리할 수 있었겠지만  포대나 D중대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전선에서는 전령이 뛰어다니면서 정보와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이런 여건에서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합동 작전을 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존스턴 부대의 반격은 실패했고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이제 버틸 재간이 없어진 A, C 및 D중대는 텡가 비행장으로 후퇴했다. D중대의 남쪽을 지키던 제2/10공병중대(로렌스 소령)는 전선을 지키면서 후퇴를 엄호한 다음 9일 오전 10시 30분에 텡가 비행장으로 후퇴하여 조호르 의용공병대와 연결했다. 제2/18호주대대는 제22호주여단에서 그나마 편제를 유지하면서 철수한 유일한 대대였다. 


남쪽을 지키던 제2/19호주대대(로버트슨 소령)는 제18사단 주력의 공격을 받았다. 제18사단은 3개 대대(보병제114연대제2대대, 보병제56연대제2 및 제3대대)를 동원하여 9일 오전 6시에 제2/19호주대대를 포위했다. 오전 7시에 제2/19호주대대는 6대의 브렌건캐리어를 앞세우고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이때 보병제114연대제3대대까지 달려와 전투에 가세했다. 결국 제2/19호주대대의 탈출 시도는 일본군 속사포에 브렌건캐리어 4대를 잃으면서 약 180m 를 전진하고 실패했으며 후위를 맡았던 C중대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이제 전멸을 피하는 방법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방법 뿐이었다. 삼삼오오 흩어져 늪으로 들어간 병력 대부분이 사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로버트슨 소령이 키건 대위와 함께 9일 오전 10시에 텡가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이끌던 병력은 40명에 불과했다. 이후 일부 병력이 추가로 합류했으나 이 시점에서 제2/19호주대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쪽 초아추캉에 배치되었던 A중대(커즌 대위)와 1개 기관총 소대는 테일러 준장의 명령에 따라 방어선을 지키다가 오전 9시 30분에 텡가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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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상륙(2) - 제2/18호주대대 구역


제22호주여단의 중앙을 지키던 제2/18호주대대의 우익은 A 중대(존스턴 대위), 좌익은 C 중대(오케이 대위)가 지키고 있었다. 제2/18호주대대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18사단의 좌익대였다.


제18사단의 좌익대는 보병제114연대제2대대와 보병제114연대제1대대, 우익대는 보병제56연대제1대대와 제55연대제1대대였다. 좌익대에서 보병제114연대제2대대가 우제1선을, 보병제114연대제1대대가 좌제1선을 맡았다.


제2/18호주대대의 A중대는 제7 및 제8소대를 전방의 두 언덕에 1개 소대씩 배치했다. 이 언덕은 밀물이 되면 섬으로 변했는데 일본군이 상륙할 당시에는 밀물이었다.

A중대를 공격한 것은 제18사단 좌익대의 좌제1선으로 상륙한 보병제114연대제1대대였다. 상륙이 시작되자 제8소대(버넌 중위)가 지키던 섬에 2척의 주정이 접안하여 약 80명의 일본군을 상륙시켰다. 제8소대가 사격을 퍼붓자 일본군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흩어졌다. 그러나 곧 더 많은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반격을 받은 제8소대도 크게 약화되었다. 소대장 버넌 중위는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썰물이 되지 않아 바다를 건너야 했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부상자가 문제였으며 수영을 못하는 병사도 있었다. 버넌 중위는 기지를 발휘하여 소총 멜빵끈을 풀어 여러 개를 연결했다. 이걸 섬의 나무에 묶고 헤엄 잘치는 병사가 반대끝을 잡고 헤엄쳐 건너가 육지 쪽의 나무에 묶었다. 그리하여 부상자들과 수영을 못하는 병사들은 이 멜빵끈을 잡고 육지로 나올 수 있었다. 

제7소대가 지키던 섬에는 일본군이 상륙하지 않았다. 제7소대는 아침까지 섬을 지키다가 날이 밝자 철수하려 했으나 사방이 일본군 천지였다. 결국 제7소대원들 중 소수만이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그동안 A 중대본부에서는 전방 소대와 연락이 끊어진 데다가 최소한 2개 중대가 넘는 일본군이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9일 오전 3시 30분에 A 중대장 존스턴 대위는 중대방어선 편성을 포기하고 급조한 예비소대와 함께 아마켕 북쪽에 있던 대대본부로 철수했다. A 중대에서 장교 3명을 포함한 43명만이 대대방어선에 도달했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제2/18호주대대의 좌익을 지키던 C 중대 구역에는 제18사단 좌익대의 우제1선을 맡은 보병제114연대제2대대가 상륙했다.

C 중대 방어선의 좌익인 무라이 강 하구 북쪽의 조그만 반도에는 2개 기관총반으로 이루어진 제2/4기관총대대의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기관총 소대는 접근하는 일본군 주정 6척을 향하여 사격을 시작한 이후 2시간 동안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일본군이 속속 상륙하면서 반도 밑둥이 차단되었다. 이어서 일본군의 수류탄이 날아들고 총탄마저 떨어지자 소대장 미클존 중위는 1개 기관총반을 이끌고 탈출했다. 탈출 도중 나무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던 일본군 2명과 맞닥뜨리자 미클존 중위가 1명을 리벌버로 사살했고 나머지 1명은 다른 병사가 삼각대를 휘둘러 쓰러뜨렸다. 미클존 중위는 기관총반의 탈출을 엄호하다가 전사했다.

다른 기관총반은 탈출 도중 일본군에게 포위당했다. 일본군 장교 1명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스팩맨 이병이 총검으로 쓰러뜨린 후 일본도를 집어들고 다른 일본군을 공격했다. 스팩맨 이병을 포함한 기관총반은 대부분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전사자 없이 전원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제2/18호주대대장 발리 중령은 9일 오전 1시 30분에 전방 중대들을 아마켕 마을 부근의 대대방어선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심하고 테일러 준장의 허가를 받았다. 테일러 준장은 또한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제2/10공병중대(로렌스 소령)을 제2/18호주대대에 배속시켜 주었다. 발리 중령은 B 중대장 오브라이언 소령에게 C 중대의 퇴로를 확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B 중대는 전장으로 달려가던 도중 우세한 세력을 가진 일본군과 만났다. 치열한 전투 끝에 B 중대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중에 일부만이 대대방어선으로 돌아왔다. 


B 중대가 퇴로를 확보하는데 실패함에 따라 C 중대는 그야말로 일본군의 바다를 헤치고 대대본부로 철수를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쉴새없이 전투를 치르며 후퇴하던 C 중대는 결국 대부분의 전력을 잃고 장교 4명을 포함한 45명만이 대대방어선에 도달했다.

 

발리 중령은 9일 오전 3시 30분에 대대방어선을 편성했다. 45명으로 이루어진 C 중대는 43명으로 이루어진 A 중대와 함께 림추캉 도로 서쪽의  언덕을 지켰다. 장교 5명을 포함하여 136명으로 이루어진 치점 대위의 D 중대는 아마켕 마을의 북쪽을 지켰다.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제2/10공병중대는 A 및 C 중대의 남쪽을 지켰다.


제18사단 입장에서도 좌익대의 상륙은 혼란스러운 격전이었다. 실제로 제3회 주정을 타고 좌익대 구역에 상륙한 제18사단장 무다구치 렌야 중장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제18사단사령부는 내륙으로 진입하다가 철수 중이던 호주군 소부대와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호주군이 던진 수류탄 1발이 사령부 요원 한가운데 떨어졌다. 이 수류탄의 폭발로 사령부의 장교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무다구치 중장도 파편이 가슴을 스치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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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상륙(1) - 제2/20호주대대 구역


1942년 2월 8일 오전부터 일본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일본기들은 제22호주여단의 방어선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벤넷 소장의 서부지구 사령부도 폭탄 1발을 맞아 1명이 죽었다.

제25군 포병대는 8일 오전 9시부터 일본기의 탄착수정을 받아가며 만다이 산의 영국군 관측소와 텡가 비행장을 포격하고 영국군 포병에 대하여 대포병전을 실시했다. 정오부터는 사단포병이 포격을 시작하여 주로 해안의 방어진지와 철조망, 지휘소, 그리고 보급로를 집중적으로 때렸다. 그 결과 저녁이 되자 전방으로 통하는 전화선이 모두 끊겼다. 제22여단의 무전기는 점검 및 수리를 위하여 모두 싱가포르로 가져갔다가 8일 오전에 여단사령부에 도달했고 오후에 겨우 대대본부까지 도달했다. 따라서 무전기들은 상륙 초기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8일 저녁이 되자 포격이 더욱 거세져 제2/18호주대대 D 중대 지역에는 1분 만에 80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제22여단의 전방 대대는 대대장부터 참모들을 포함하여 전원 개인호를 파서 엄폐하고 있었으므로 포격의 격렬함에 비하여 인명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포격 때문에 통신병들이 끊어진 전화선을 연결할 수 없었다.

말레이사령부와 서부지구사령부는 이날의 포격이 임박한 상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포격이 며칠에 걸쳐 방어선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보았으며 다음날에는 포격이 둑길과 북동해안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국군 포병이 제22호주여단 및 제44인도여단의 대안에 자리잡은 일본군에게 실시한 대응 포격은 산발적이고 규모가 작아서 일본군의 승선을 방해할 수 없었다.


8일 오후 10시에 일본군 공격제1파가 출발했다. 잠시 후 호주군이 접근하는 일본군 주정을 발견했으며 이어서 탄종불로에서 탄종무라이에 이르는 해안지역이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조호르 해안과 사림분섬에 배치한 박격포, 그리고 야포로 공격을 지원했다.


(싱가포르 섬 상륙.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84)


해안에 배치된 제5탐조등 연대는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으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없는 한 절대로 탐조등을 켜지 말라는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테일러 준장은 섣불리 탐조등을 켰다가 위치가 발각되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탐조등이 파괴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화선이 끊어지면서 막상 일본군이 상륙했을 때 탐조등을 켜라는 명령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정적 순간에 탐조등이 눈을 감는 바람에 주정을 타고 취약한 상태로 해안에 접근하던 일본군이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방어선의 포격 요구는 베리식 신호조명탄으로 전달하게 되어 있었는데 막상 신호탄이 올랐을 때에는 지형 때문에 포대에서 보지 못했다. 해안에서 계속 신호탄이 오르는데도 야포가 침묵을 지키자 대대본부에 파견된 포병연락장교가 포대로 달려가 포격 요청을 전달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야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포대의 위치가 나빠 화력지원은 주로 제2/20호주대대 정면에만 이루어졌다. 제2/18 및 제2/19호주대대는 야포의 화력 지원없이 일본군과 맞서야했다. 


호주군의 기관총은 위력을 발휘했다. 탐조등 불빛이 없었으므로 기관총은 접근하는 주정의 모터 소리를 향해 사격했다. 탐조등 없이도 호주군은 상륙하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만일 탐조등이 제때 밝혀지고 야포의 화력지원이 적절히 이루어졌다면 일본군의 피해는 훨씬 컸을 것이다.

살아남은 일본군 주정들은 기관총좌 사이의 빈틈을 찾아 필사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보통 2-3번의 시도 끝에 상륙했다. 일단 상륙한 일본군은 다시 전투의 주도권을 쥐었다. 일본군은 방어선의 빈틈을 통하여 내륙으로 진출한 다음 고립된 호주군 방어진지를 포위공격했다. 호주군은 백병전까지 불사하며 저항했으나 곧 진압되거나 아니면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


8일 오후 11시 30분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서부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사령관 벤넷 소장에게 자신의 여단이 6개 대대에 달하는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날이 밝는 즉시 반격을 가할 필요가 있으나 자신에게는 예비대가 없다고 말했다. 벤넷 소장은 자정이 막 지난 9일 새벽에 폰드 중령의 제2/29호주대대를 제22호주여단에 배속하고 텡가 비행장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제2/20야포연대는 조호르 해안의 스쿠다이 강 하구를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벤넷 소장은 또한 말레이 사령부에 날이 밝는대로 모든 항공기를 동원하여 일본군 상륙지점을 공습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전 4시 45분에는 특별예비대대와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예비중대가 역시 제22호주여단에 배속되어 텡가 비행장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싱가포르 섬에 상륙한 제25군의 우익은 제18사단, 좌익은 제5사단이었다. 제5사단의 우익은 스기우라 부대(보병제21여단), 좌익은 가와무라 부대(보병제9여단)가 맡았으며 보병제41연대는 사단예비대였다. 스기우라 부대는 페르팟강과 무라유강 사이에서 발진하여 해협을 건넜다. 가와무라 부대의 제1회 상륙부대는 스쿠다이강 상류 약 4km 지점에서 승선하여 강을 따라 내려온 다음 해협을 건너 림추캉 도로 종단에 있는 불로강 유역에 상륙하고 제2회 상륙부대는 무라유강과 당가강 사이에서 승선하여 해협을 건넜다.


가와무라 부대의 제1파는 보병제11연대제3대대, 제2파는 제1대대였으며 제2대대는 여단예비대였다. 제1파인 제3대대는 스쿠다이 강 상류 약 4km 지점에서 소발동정에 승선하여 스쿠다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도중에 발동정들이 흩어졌으나 대형을 정비할 시간이 없었다. 제3대대를 실은 발동정들은 흩어진 상태로 스쿠다이 강을 나와  불로강 유역을 목표로 해협을 가로질렀다. 소발동정들이 스쿠다이강 하구를 벗어나자 대안의 호주군 기관총이 사격을 시작했다.


보병제11연대제3대대가 상륙한 불로강 유역은 제2/20호주대대 D 중대(리처드슨 대위)가 방어하고 있었다. D 중대에 배속된 제2/4기관총대대 소속의 기관총 1정이 림추캉 도로의 끝자락에 접근하던 일본군 주정에 사격을 가하자 불이 붙었다. 그러자 주변의 주정이 발각되었고 집중 사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더많은 주정들이 해안의 늪지대에 도달했다. D 중대의 기관총 사격으로 많은 주정이 피해를 입고 일부가 침몰했으나 다른 구역과 마찬가지로 D중대의 전력으로는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제1파인 보병제11연대제3대대가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스쿠다이강과 무라유강 사이에서 대기하던 제2파인 제1대대가 해협을 건너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제3대대가 확보한 해안에 상륙했다.


제2파의 상륙으로 숫자가 크게 늘어난 보병제11연대는 제2/20호주대대D중대의 우익을 압박했다. 이곳을 담당한 호주군 기관총은 연속적인 사격으로 냉각수가 끓어올랐다. 철조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이 철조망에 걸려 멈칫거리는 사이 기관총이 불을 뿜어 진격을 막았다. 일본군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실은 문교를 해안에서 90m 정도 떨어진 곳에 박아놓은 그물고정용 말뚝에 묶어놓고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호주군 기관총좌를 공격했다. 9일 오전 1시 30분이 되자 호주군 기관총의 총탄이 떨어졌다. 각 기관총은 이때까지 약 10,000발씩 발사했다. 소대장 웬키 소위는 기관총을 파괴한 다음 부상자를 이끌고 중대본부로 후퇴했다. 웬키 소위는 25명을 태운 일본군 주정이 20척 이상 접안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로써 가와무라 부대는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 과정에서의 일본군 사상자는 60명 정도였다. 


중대방어선으로 물러선 D 중대는 9일 오전 5시 30분까지 브렌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때로는 총검으로 백병전을 벌이면서 방어선을 지켰다. 이후 제2/20호주대대장 애쉬톤 중령의 명령에 따라 아마켕 마을 북쪽 3.2km 지점의 나마지에 농장에 설정된 대대방어선으로 철수하려 했으나 이미 퇴로가 막힌 상태였다. D 중대는 어쩔 수 없이 방어에 유리한 언덕에 눌러앉아 사방에서 공격하는 일본군과 맞섰다.


D중대의 우익을 지키던 메렛 소령의 A중대도 대대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대의 우익에서 림추캉 도로의 종점을 지키던 공병 및 군악대로 이루어진 혼성소대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후퇴했다.


D중대의 좌익을 지키던 카터 대위의 C중대는 일본군의 사전포격과 사림분섬에서 쏘아대는 박격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C중대 구역을 공격한 일본군은 스기우라 부대로 대안에서 쏘아대는 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했다. 상륙에 성공한 보병제42연대제2대대 및 제3대대는 C중대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제2/18호주대대와의 경계선인 사림분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격했고 이어서 예비대인 제1대대도 상륙했다.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 처한 C중대는 명령에 따라 대대방어선으로 후퇴했다.


9일 오전 2시가 되었을 때 제2/20호주대대의 방어선에는 본부중대(코헨 소령), B중대(에와트 대위), C중대, 그리고 대대수송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 후 달포스의 2개 소대가 도착했으며 오전 7시에 A중대가 도착했다. D중대는 적에게 둘러싸여 도착하지 못했다.

보병제11연대는 경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밤새 제2/20호주대대의 방어선을 거세게 공격했다. 제2/20대대는 3인치 박격포의 화력 지원을 받아가며 아침이 될 때까지 수류탄을 던지고 백병전까지 불사하면서 버텼다.


이로써 제5사단은 상륙에 성공했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은 9일 오전 4시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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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일본군의 상륙준비


일본제25군은 1941년 12월 8일에 싱고라, 파타니 및 코타바루에 상륙한 이래 55일 만에1,100km 를 진격하여 말레이 반도를 장악했다. 해상기동 거리는 650km 였다.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에서 95회의 교전을 치렀으며 250개 교량을 수리했다.

제25군이 확인한 영국군 시체는 약 5,000구, 포로는 약 7,800명이었으며 기관차 4대와 화차 55대, 자동차 299대를 파괴했다. 노획품은 비행기 23대, 장갑차 및 브렌건캐리어 235대, 각종 화포 340문, 기관총 551정, 소총 3,222정, 기관차 17대, 화차 및 객차 795대, 자동차 2,723대에 달했으며 이외에도 대량의 휘발유를 포함하여 막대한 보급품을 노획했다.

제25군의 전사자는 장교 102명을 포함하여 1,535명, 부상자는 장교 135명을 포함하여 2,257명이었다. 제5사단이 전사, 병사 및 행방불명 699명, 부상 1,292명으로 합계 1,991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제18사단의 사상자는 약 1,100명,  근위사단의 사상자는 약 900명이었다.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3비행집단의 전사자는 장교 26명을 포함하여 185명이었으며, 부상자는 장교 15명을 포함하여 180명이었다. 항공기 손실 상황은 격추 및 불시착 등으로 66대를 잃었고 영국기의 공습으로 23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21대였다.

격침된 수송선은 2척, 피해를 입은 수송선은 7척이었다.


일본대본영은 전쟁 전부터 조호르 해협의 폭이 넓고 해군기지와 창이 요새를 비롯하여 강력한 방어진지가 많은  싱가포르 섬의 북동해안보다 해협의 폭이 좁은 북서해안이 상륙에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제공권을 장악하면 일본군은 영국군의 눈에 뜨이지 않게 주정에 승선한 다음 기습적으로 해협을 가로질러 상륙할 수 있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정찰을 통하여 영국군이 북동해안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대본영 계획대로 북서해안에 상륙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륙해안은 탄종불로와 탄종무라이 사이였으며 제18사단이 우익, 제5사단이 좌익을 맡을 것이었다. 근위사단은 주력의 뒤를 따라 둑길 바로 서쪽에 상륙할 것이었다.


(1942년 2월 8일 밤 일본군의 상륙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Initial_Japanese_landings)


우익을 맡은 제18사단은 2개 연대와 1개 대대를 공격에 투입하고 2개 대대를 예비로 보유할 것이었다. 좌익을 맡은 제5사단은 3개 연대를 공격에 투입하고 1개 연대를 예비로 보유할 것이었다. 7km 에 걸친 전선에 투입될 대대가 16개, 예비대대가 5개로서 대단한 병력 집중이었다. 전차제1연대는 제5사단에 배속되었다. 공격대는 1942년 2월 8일 오후 8시에 승선할 계획이었다. 첫번째 목표는 텡가 비행장으로 9일 아침에 점령할 계획이었다. 두번째 목표는 부킷판장마을이었다.

2개 연대와 1개 대대로 이루어진 근위사단은 영국군의 주의를 북동해안으로 돌리는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하여 테브라우 강 서쪽에 가짜 숙영지를 만들고 트럭들이 낮에는 병력과 보급품을 가득 싣고 요란하게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밤에는 몰래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2월 7일 저녁에는 근위사단의 일부가 창이 곶 대안의 우빈섬에 상륙했다. 근위사단의 주력은 주공이 상륙한 후 24시간 후에 둑길 바로 서쪽에서 해협을 건너 상륙할 것이었다. 이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싱가포르 시가지와 창이 곶 사이에서 해안에 도달하여 영국군이 창이 곶으로 철수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차제14연대가 근위사단에 배속되었다.


제25군은 남방군의 요청에 의하여 필리핀을 공격하던 제14군에게 240mm 유탄포 1개 연대, 독립산포병제3연대, 박격제3 및 제5대대를 할애했다. 그리하여 야포 세력은 사단포병과 제25군 직속의 야전중포병제3연대(96식 150mm 유탄포 24문) 및 제18연대(92식 100mm 캐논포 16문), 독립중포병제2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5군의 전력은 보병 28개 대대, 전차 3개 연대 135대, 야포 14개 대대 160문이었다.


(92식 105mm 캐논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Type_92_10_cm_Cannon)


싱가포르 공격을 위하여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의 집적이 이루어졌다. 쿠알라룸푸르에 모인 보급품은 철도를 이용하여 하루에 1,000톤씩 게마스에 도착했다. 트럭이 이 보급품을 바투아남에 만들어진 집적소로 옮겼으며 거기서 다시 조호르 해협까지 운반했다. 당시 제25군이 보유한 자동차는 약 3,000대였다.  싱가포르 상륙 이후인 2월 12일에는 철도가 조호르바루역까지 연결되었고 싱가포르 함락 후인 2월 21일에는 싱가포르 섬과 말레이 반도가 철도로 다시 연결되었다.


싱가포르 상륙에 필요한 주정 숫자를 계산하기 위하여 대본영에서 1월 21일에 제25군 사령부로 좌관급 공병장교 2명을 파견했다. 3일 간의 연구를 거쳐 도출된 숫자는 절첩주(접이식보트) 300척, 중문교 12척, 철주문교 20척, 소발동정 30척이었다. 실제로 확보한 숫자는 95식 절첩주 423척, 노획한 보트 36척, 99식 중문교 18척, 대부양주 5척, 중부양주 20척, 소발동정 35척, 대발동정 1척이었다.


(문교. https://i.ytimg.com/vi/PpHg8OZNWJw/maxresdefault.jpg)


영국고속정이 상륙을 방해를 할 경우에 대비한 계획도 수립했다. 제18사단의 우익에 탐조등을 배치하고 속사포 1개 중대 및 산포 1개 소대를 배치하여 적의 고속정이 나타나면 포격을 가하기로 했으며 제18사단 주정군의 우익에 배치될 주정 몇 척에 기관총을 장비했다.


항공지원을 두고 제25군과 남방군이 대립했다. 남방군은 싱가포르의 적 항공력을 무력화시켰다고 보고 제3비행집단의 중점을 팔렘방 공수작전을 비롯한 수마트라 방면에 두었다. 여기에 대하여 제25군은 제3비행집단이 남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싱가포르 섬 공격에 전념해 주길 원했다. 결국 1942년 1월 29일에 타협이 이루어져 2월 7일까지 전투기, 경폭격기 및 중폭격기 각 60대, 합계 180대가 지원하고 7일 이후로는 전투기 및 경폭격기 각 40대, 중폭격기 60대, 합계 140대가 지원하기로 했다. 제25군은 빈약한 항공지원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으나 당시 제25군의 보급능력으로 대규모 항공작전을 뒷받침할 여력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실제로 2월 13일이 되자 제25군의 지원능력은 140대의 항공기를 지원하는 데에도 한계를 보여 제3비행집단이 자체의 자동차를 사용하여 필사적으로 보급품을 실어날라 겨우 항공작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일본제5사단과 제18사단은 제25군의 명령에 기초하여 2월 3일에 사단명령을 내리고 공격부대 편성, 도하작업대 배속, 자재 정비 및 도항 준비에 들어갔다. 2월 5일에는 도항 세부사항을 확정하고 도항점으로 기재, 자재 및 탄약 등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하작업대는 6일 밤까지 주정들을 도하점으로 옮겼다. 이어서 제1및 제2도항부대의 보병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여 8일 아침까지는 승선 장소에 집결을 마쳤다.


일본군 야포는 2월 1일부터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간헐적으로 교란사격을 실시했으며 2월 5일부터는 섬 북부의 비행장, 해군기지, 도로교차점, 포대, 전방방어선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의 야포도 대응사격을 가하여 제25군 포병대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기도 했으나 포탄 부족으로 주력 야포인 25파운드 포는 하루에 20발씩만 사격하도록 엄격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2월 5일 밤에 일본군이 섬의 북동해안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자 상륙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영국제3군단은 조호르 해협을 건너 정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집결 중인 일본군을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말레이 사령부는 북서해안을 담당한 호주군에게 정찰을 명했다.

7일 밤이 되자 전선이 혼란스러워졌다. 약 30명의 일본군이 주정을 타고 둑길 바로 서쪽에 상륙하려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아 주정은 침몰하고 병력들은 사살되었다. 창이 곶 대안의  우빈섬에는 야전중포병제18연대제1대대의 화력지원 아래 근위사단의 일부가 상륙했다. 섬을 지키던 제4노퍽대대의 분견대는 창이 곶으로 철수했다.


제22호주연대는 2월 7일 밤에  말라유 강과 펜다스 강 사이에 정찰대를 파견했다. 내륙으로 2.4km 까지 정찰하고 돌아온 정찰대는 놀라운 소식을 가져왔다. 일본군 대부대가 고무농장에 집결하고 있었으며 도로는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로 가득했다. 정찰대는 상륙주정이 보관된 곳까지 침투하지 못하여 주정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서부지구 사령관 벤넷 소장은 일본군이 북서해안에 상륙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소식은 통신의 미비로 8일 오후 3시 30분이 되어서야 퍼시발 중장에게 도달했다. 벤넷 소장은 해협 너머에 집결 중인 일본군을 포격하기 위하여 항공정찰을 요청했으나 이제 영국군에는 그런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행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부지구 포병대는 정찰대가 보고한 8일 새벽의 위치를 근거로 8일 오후에 해협 너머의 일본군에 대하여 맹목사격을 실시했다. 일본군의 상륙이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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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싱가포르 섬 방어(3) - 병력 배치


1942년 2월 5일에 4척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증원선단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제18사단의 나머지 병력과 인도군 보충병, 그리고 차량을 비롯한 장비가 실려 있었다. 선단은 5일 오전 11시에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일본제3비행단에게 공습을 받았다. 수송선 엠파이어오브아시아가 폭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했고 결국 침몰했다. 타고 있던 병력들은 대부분 호주수송선 라라에 구조되었으나 제125대전차연대의 대전차포를 비롯한 장비들은 모두 잃었다. 엠파이어오브아시아는 말레이 증원 과정에서 공습으로 상실한 유일한 수송선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은 케펠항에 대규모 공습을 반복하여 창고의 70% 를 파괴했다. 공습으로 인하여 선박들은 분산해야 했으며 일부만 부두에서 선적하고 대부분 항구 앞에 정박한 채 거룻배로 선적해야 했다. 민간인 노동자가 대부분 사라져 버려 주로 공군병력들이 선적을 담당헀으나 아무래도 숙련도가 떨어졌다. 어떤 수송선은 선적을 하다말고 공습을 피하여 출항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원과 물자의 반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마트라의 폭격기 부대가 꼭 필요로 하는 장비들이 아예 선적되지 못했다. 일단 출항한 수송선들도 일본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수마트라와 자바에서 꼭 필요로 하는 대량의 부품과 차량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수마트라에 전개한 제225폭격비행전대는 1942년 2월 첫째주에 평균적으로 허드슨 20대와 블레님 15대를 작전가능상태로 보유하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폭격기들은 기회가 닿는대로 일본군이 점령한 말레이의 비행장, 페낭 항 및 싱고라 등을 공격했으나 공습의 규모가 작아 일본군의 싱가포르 섬 공격을 방해하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싱가포르의 대공방어는 한줌밖에 남지 않은 전투기 세력과 대공포가 담당했다. 가끔 수마트라에서 전투기들이 날아와 도와주기도 했으나 팔렘방에 대한 공습이 강화되면서 그쪽 방면으로 돌려졌다. 초반 주력이었던 버팔로가 소진되면서 허리케인이 주력이 된 싱가포르의 전투기 부대는 요격을 위하여  주간에는 거의 공중에 머물러야 했다. 조기 경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본기들은 18대 내지 27대씩 떼를 지어 몰려와서는 마을과 부두를 폭격하고 영국군이 반격하기 전에 물러갈 수 있었다. 일부는 섬 북부의 영국군 진지에 급강하 폭격을 가하기도 했다. 2월 4일과 5일에 걸쳐 셀레타, 셈바왕 및 텡가 비행장이 적의 야포 사거리 내로 들어가 이착륙이 불가능해졌으므로 전투기들은 칼랑 비행장에 집결했다. 그러자 일본군이 칼랑 비행장을 집중적으로 공습하여 6일부터는 칼랑 비행장 이착륙이 어려워졌다.


(호커 허리케인.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Hawker_Hurricane)


일본군이 싱가포르 섬에 상륙할 당시 영국군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북부 지구 : 히스 중장은 창이에서 셀레타 강에 이르는 11km 구간에 제18사단을 배치했다. 제18사단은 우익에 제54여단, 우익에 제55여단을 배치했다. 셀레타 강에서 둑길까지의 11km 구간에는 제11인도사단을 배치했다. 셀레타 강에서 해군기지까지는 제53여단이, 해군기지에서 둑길까지는 제28인도여단이 담당했으며 제8인도여단이 사단예비대를 맡았다. 제15인도여단은 군단 예비대였다. 

남부 지구 : 케이스 시몬스 소장은 창이 곶에 제2말레이여단, 싱가포르 시가지 및 케펠 항에 해협식민지의용여단, 싱가포르 시가지에서 주롱 강 사이에 제1말레이여단을 배치했다. 제2/17도그라스대대는 풀라우테콩베사르를 지켰다. 


(1942년 초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서부 지구 : 실제로 일본군이 상륙한 구역으로 벤넷 소장이 지휘했다.  벤넷 소장은 서부 지구의 해안선을 3개 구간으로 나누었다. 둑길에서 크란지 강에 이르는 2.4km 길이의 둑길 구간은 제27호주여단이 담당했다. 크란지 강에서 베리 강에 이르는 13km의 북서구간은 호주군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한 제22호주여단이 맡았다. 베리 강에서 주롱 강에 이르는 16km 의 남서 구간은 공격받을 위험이 적다고 판단하여 경험이 부족한 제44인도여단을 배치했다. 좁은 구간을 담당한 제27호주여단의 제2/29대대는 서부지구 예비대가 되었다. 벤넷 소장은 애당초 제27호주여단 전체를 예비대로 보유하려 했으나 해안 방어를 중시하라는 퍼시발 중장의 명령에 따라 제2/29대대만을 예비대로 보유했다.


둑길 구간을 담당한 제27호주여단은 제2/30호주대대를 우익에 배치하고 제2/26호주대대를 좌익에 배치했다.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1개 중대가 해안선에 배치되었으며 제2/10야포연대와 제13대전차포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북서구간의 해안선은 작은 강에 의하여 3개의 반도 모양으로 나뉘어 좁은 육지를 통하여 아마켕 마을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서구간을 책임진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여단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하고 3개 대대를 모두 해안선 방어에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달포스의 1개 중대를 지원받은 제2/20호주대대가 크란지 강과 사림분 강 사이의 6,400m 를 담당했다. 제2/18호주대대가 사림분 강과 탄종무라이 사이의 3,200m 를 지켰으며 제2/19호주대대가 탄종무라이와 베리 강 사이의 3,200m 를 책임졌다. 각 대대는 3개 중대를 해안선에 배치하고 1개 중대를 예비대로 두어 해안선과 아마켕 마을을 잇는 좁은 육지를 지키도록 했다.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1개 중대가 해안선에 배치되었으며 제2/15야포연대와 제15대전차포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북서구간에 포함된 텡가 비행장을 방어하는 인도의용대대인 진드보병대대도 테일러 준장의 지휘를 받았다.

제22호주여단의 방어전술은 특이했다. 해안선에 배치된 병력들은 만일 방어선이 뚫리거나 포위당할 것 같으면 중대본부로 후퇴해서 중대 방어선을 편성해야했다. 만일 중대방어선도 뚫리거나 포위될 것 같으면 다시 후퇴하여 아마켕 마을로 통하는 좁은 육지를 막는 형태로 대대방어선을 형성해야 했다. 이런 비정통적인 방어전술은 잘 훈련된 부대가 실시하기에도 위험했는데 대대마다 미숙한 보충병들을 많이 받아들인 당시 상황에서는 더욱 위험했다.


남서구간을 담당한 조지 발렌타인 준장의 제44인도여단(제6/1펀자브대대, 제6/14펀자브대대, 제7/8펀자브대대)은 2.5개 대대를 해안선에 배치하고 2개 중대를 예비대로 보유했다.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1개 중대가 해안선에 배치되었으며 제5야포연대와 제16대전차포대가 화력지원을 맡았다.


서부지구의 해안선에는 제5탐조등연대가 배치되어 탐조등과 자동차에서 떼어낸 전조등으로 상륙작전시 해협을 비출 채비를 갖추었다.

벤넷 소장은 인접한 북부 및 남부 지구 사령관들과 협조하는 일을 게을리했다. 벤넷 소장의 참모들은 주롱 강 부근에서 일본군이 침투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주롱 강 유역에 정기적으로 정찰대를 파견하면서도 주롱 강 방어선을 책임진 시몬스 소장과는 협의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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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싱가포르 섬 방어(2) - 지상군의 상황


1942년 1월 31일에 싱가포르 섬으로의 철수가 완료되면서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이 섬의 모든 병력에 대해 작전지휘권을 장악했다. 수비대의 총 병력은 약 85,000 명이었으나 약 15,000 명은 기지 요원이나 행정 요원을 비롯한 비전투 병력이었다.

보병은 영국대대 13개, 호주대대 6개, 인도대대 17개, 말레이대대 2개로서 4.3개 사단에 해당했다. 여기에 더하여 기관총대대 3개(영국대대 2개, 호주대대 1개), 정찰대대 1개, 해협식민지의용대대 3개, 그리고 비행장 방어를 위하여 모집한 인도의용대대 4개가 있었다.


수비대는 서류상으로 강력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영국군의 경우 제18사단(제54 및 제55여단) 소속의 6개 대대는 얼마 전에 도착했으며 나머지 7개 대대는 병력이 심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영국기관총대대와 정찰대대는 2월 5일에야 도착했다.

호주군의 경우 충분히 훈련받은 병사로 완편된 부대는 제2/4기관총대대 뿐이었으며 나머지 부대는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제2/19대대는 370명, 제2/29대대는 무려 500명의 보충병을 받아들여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영연방군 보병대대의 정원은 786명이다.) 벤넷 소장은 보충병을 사용하여 6개 호주대대의 중대마다 1개 소대씩 증설하고 호주군 행정병을 비롯한 지원병력 440명으로 특별예비대대를 편성했다.

인도군의 경우 제2/17도그라스대대와 제44여단의 3개 대대가 완편상태였으나 제44여단은 훈련을 마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 도착한 상태였다. 말레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급히 재편성한 9개 대대는 신병의 비율이 높고 장교가 크게 부족했으며 4개 대대는 재편성 중이었다.

2개 말레이대대의 전투력은 의심스러웠으며 3개 해협식민지의용대대는 고정방어전 이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말레이반도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무기를 잃어 무기가 모자랐다. 개전 이래 패전과 후퇴를 거듭한 병사들의 사기는 낮았으며 싱가포르 섬의 항공기와 해군기지가 철수한 것을 알고나서 더욱 떨어졌다.

해군성은 1942년 1월 21일에 말레이 해군사령관 어니스트 스푸너 소장에게 해군병력 및 해군공창 기술자들의 철수계획을 작성하라고 비밀리에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스푸너 소장은 1월 28일에 해군기지를 폐쇄하고 해군병력과 기술자들을 싱가포르 시내로 빼돌린 후 1월 31일에  배에 태워 실론으로 보냈다. 스푸너 소장은 해군기지 폐쇄 사실을 퍼시발 중장에게까지 비밀에 부쳐 퍼시발 중장은 2월 초가 되어서야 철수 사실을 알았다.


싱가포르 섬을 방어하는 데는 두가지 방식이 있었다. 첫번째는 해안방어에 중점을 두어 일본군의 상륙을 거부하고 만일 상륙을 허용할 경우 최대한 빠른 시간에 반격을 가해 바다로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두번째는 주력을 내륙에 두고 해안에는 가벼운 방어선만 유지하다가 일본군이 상륙하면 주력을 투입하여 내륙에서의 대규모 전투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일단 일본군이 상륙하면 사기가 추락하여 이어질 대규모 회전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기 때문에 첫번째 방식을 채택했다. 문제는 싱가포르의 해안선이 울창한 맹그로브로 덮이고 곳곳에 작은 강들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서 연속된 방어선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퍼시발 중장이 일본군이 상륙할 확률이 큰 북해안 뿐 아니라 모든 해안선을 지키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정적인 장소에 병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해안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결정하면서 퍼시발 중장은 일선사령관에게 지휘 권한을 넘기고 자신은 전투가 벌어진 지역에 추가로 병력을 지원하는데 주력하면서 직접 명령을 내리는 일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퍼시발 중장은 1월 24일에 웨이벌 대장에게 보고한 대로 싱가포르 섬을 북부, 서부 및 남부의 3개 지구로 나누고 섬 중앙에는 자신이 직접 통제하는 예비 지구를 설정했다.

북부 지구는 창이 곶에서 둑길에 이르는 북동해안을 포함했으며 제18영국사단과 제11인도사단으로 이루어진 제3군단이 담당했다. 제9사단은 제22여단을 잃고 제8여단만 남아 전력이 감편된 1개 여단 규모로 감소했다. 따라서 제9사단은 해체되었으며 제8여단은 제11사단에 흡수되었다. 북부 지구의 화력 지원은 야포 5개 연대와 3개 포대, 대전차포 1개 연대가 담당했다.

남부 지구는 창이 곶에서 주롱 강에 이르는 남해안을 포함했으며 요새사령부가 담당했다. 요새사령부는 제1 및 제2말레이대대와 해협식민지의용보병여단을 지휘했으며 화력 지원은 야포 1개 연대와 대전차포 1개 포대가 담당했다.

서부 지구는 주롱 강에서 둑길에 이르는 북서해안을 포함했으며 제8호주사단과 제44인도보병여단을 지휘하는 벤넷 소장이 담당했다. 화력 지원은 야포 3개 연대와 대전차포 3개 포대가 담당했다.

섬 중앙의 예비 지구를 담당한 말레이 사령부는 제12인도보병여단(파리스 준장)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다. 제12여단은 2개 대대로 이루어져 약 900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1942년 초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싱가포르 섬 주변의 작은 섬들에는 소규모의 수비대만 주둔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중국인으로부터 자원을 받아 2,000 명 규모의 달포스(Dalforce)를 만들었다. 중국인 자원자들이 영국인 장교의 지휘를 받는 달포스는 훈련과 무장이 부족했다. 이들은 지구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맹그로브 지대의 정찰을 담당했다.

행정요원 중 무장한 병력들은 자신의 기지를 지켰다. 행정요원이 15,000 명이나 되었으나 이를 기반으로 방대한 예비병력을 만들려는 시도는 일본군이 상륙한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싱가포르 섬에는 간첩들이 득실거렸다. 2월 4일에 북해안에서 1.6km 내의 민간인들을 소개시켰으나 간첩의 활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주군통합병원은 일본군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어느날 오후 포격을 받았다. 깜짝 놀란 호주군이 통합병원을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이동시켜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날 밤에 통합병원이 있던 건물이 일본군의 집중포격을 받아 크게 부서졌다.


싱가포르 섬의 민간인 노동력이 부족하여 병사들이 방어진지를 건설해야 했다. 해안가에는 참호를 파기가 어려워서 대부분 흉벽을 쌓고 철조망과 대전차 지뢰로 보강했다. 몇몇 진지와 포좌는 사주방어 태세를 갖추었다.이런 방어시설은 공습을 피하여 밤에 만들어야 했다. 전방에는 10일치 탄약과 보급품을 비축했다.


해군기지를 필두로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작전이 실시되었다. 해군기지 폐쇄사실을 알게된 말레이 사령부는 우선 해군기지에 남아있던 보급품을 반출했는데 트럭 120대가 20번씩 왕복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 이어서 제11사단 공병대가 뒤에 남은 해군파괴반과 함께 파괴작전을 실시했다. 커다란 부유선거는 사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해협에 침몰시켰다. 작은 부유선거와 항행이 가능한 함정들은 모두 케펠항으로 옮기고 그렇지 못한 경우 파괴했다. 해협의 양쪽에 걸쳐 주정들을 모아 파괴했으나 주정 주인들이 숨기는 바람에 많은 주정이 파괴를 면했다.나중에 일본군이 이 주정들을 찾아내어 상륙에 사용했다. 전함을 수용할 수 있는 건선거의 펌프와 갑문도 파괴했다. 제11사단 공병대는 해군파괴반의 지원을 받아 최대한 노력했으나 드넓은 해군기지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더군다나 2월 3일부터 일본군이 해군기지를 포격함에 따라 파괴작업은 밤에만 실시해야 했다.


싱가포르 섬의 다른 육군기지들도 말레이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파괴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박용 중유와 항공유는 말레이해군사령관과 극동공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폐기했다. 일본군은 상륙작전시 영국군이 항공유를 해협에 흘리고 불을 지를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막대한 양의 항공유를 헛되이 강에 버렸을 뿐 그런 사용법을 고려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섬 최대의 탄약창은 부킷티마 부근에 있었는데 이걸 파괴할 경우 주변에 밀집한 병원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하여 퍼시발 중장은 파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대량의 탄약이 일본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반드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외에 크란지, 니순 및 셀레타에도 탄약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상륙하면 일찍 상실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탄약을 반출해야 했으나 노동력이 부족한 데다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야간에만 반출이 가능하여 일본군이 상륙할 때까지 일부만 옮길 수 있었다. 따라서 전투 초기에 야포탄 대부분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민방위사령관은 민간시설의 파괴를 책임졌다. 여기에는 부두, 발전소, 기계, 기관차, 보관 중인 고무 및 주석, 그리고 창고나 호텔에 저장된 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품목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물품의 소유자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들의 저항이 예상되어 민간 부문의 파괴 계획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상하수도, 가스, 전기같은 기반시설은 파괴대상에서 제외했다.


비밀유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섬의 주민들은 파괴계획을 눈치챘다. 이는 항공기 철수와 맞물려서 광범위한 공황상태를 몰고 왔다. 영국이 싱가포르 방어를 포기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특히 중국인 공동체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퍼시발 중장은 공황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신문에 싱가포르를 끝까지 방어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공황상태가 진정되지 않자 그는 2월 5일 오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오후에는 주민 대표들을 만나 싱가포르를 끝까지 방어할 것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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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싱가포르 섬 방어(1)-해안포와 대공방어


싱가포르 섬은 길이가 50km인 조호르 해협으로 말레이 반도와 분리되어 있는데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1km 가 채 되지 않는다. 영국은 가장 좁은 곳에 방죽길을 만들어 섬과 말레이 반도를 연결했다. 해협의 서쪽 입구로 진입하는 것은 만조시 작은 배만 가능했고 그나마 위험했으나 동쪽에서는 해군기지까지 전함도 진입이 가능했다. 

섬의 크기는 동서로 43km, 남북으로는 21km 정도이다. 지형은 울퉁불퉁한 편이며 중앙에는 해발 164m의 부킷티마를 비롯한 몇 개의 고지가 있다. 이 고지에 올라서면 섬 대부분을 볼 수 있다. 고지 남쪽에는 길이 6.4km 의 파시르판장 능선이 있어 서쪽으로부터 싱가포르 시로 통하는 접근로를 감제했다. 

싱가포르 시는 남해안에 있었다. 도시의 북쪽으로는 수 km 에 걸친 주택지가 있었으며 해안에는 약 10km 에 걸쳐 상업항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동해안을 제외한 해안선으로 시내와 강이 흘러 들어가며 1940년대에는 대부분 맹그로브 습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섬 내에는 몇 개의 훌륭한 도로가 있었으며 대부분 싱가포르 시로 연결되었다.

싱가포르 시의 인구는 1941년 당시 약 55만이었으나 개전 이후 피난민이 몰려들어 함락 당시에는 약 2배로 늘어나 있었다. 대부분의 인구가 싱가포르 시와 주변에 몰려 있었으며 나머지는 도로 교차점에 형성된 큰 마을을 비롯하여 섬의 다른 지역에 비교적 균등하게 분포했다.

 

(싱가포르 섬. https://en.wikipedia.org/wiki/Singapore#Geography)


평화시 싱가포르 섬의 일일 물 사용량은 약 1억 1000만 리터로서 이들 중 7700만 리터는 섬 중앙에 있는 3개의 저수지에서 공급받았다. 모자라는 양은 둑길을 통과하는 송수관을 통해 말레이 반도로부터 하루 최대 4500만 리터까지 공급받았다. 1942년 1월 중순이 되자 섬의 인구가 2배로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레이 반도로부터의 물 공급이 끊기고 섬의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물 공급량이 하루 약 6800만 리터로 줄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싱가포르 섬의 영구방어시설은 모두 바다에서의 공격으로부터 해군기지를 지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섬의 북해안에는 방어시설이 없었다. 이는 당연한 일로 싱가포르 방어의 목적이 구원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해군기지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종방어선은 남부 조호르였다. 따라서 안 그래도 빠듯한 예산은 싱가포르 섬의 북해안 대신 남부 조호르에 방어시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다. 영국원정군이 프랑스에서 대패한 직후인 1940년 7월에 유사시 극동에 함대를 파견하는 안이 사실상 폐기되었을 때 싱가포르 북해안에 대한 방어시설 건설을 서둘러야 했으나 아무도 그런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놀라운 점은 일본군이 1941년 12월 8일에 말레이를 침공한 이후에도 싱가포르 섬 북해안의 방어시설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ABDA 최고사령관 웨이벌 대장의 거듭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퍼시벌 중장은 싱가포르 시민들의 사기 저하를 이유로 섬의 북해안에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일본군 상륙 이후 실로 6주 이상이 지난 1942년 1월 23일에야 섬의 북해안에 방어시설 건설을 위한 정찰을 실시했고 그로부터 5일이 지난 28일에야 싱가포르 섬 방어계획을 웨이벌 대장에게 제출했다. 이후 2월 초부터 방어시설 건설에 들어갔으나 이미 늦었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훗날 싱가포르 섬의 방어시설은 육군성의 계획에 따라 건설하게 되어 있었고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싱가포르의 행정기구나 해군이 말레이 사령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따랐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의 상륙 이후로는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싱가포르 식민상 더프 쿠퍼의 지원을 받아 싱가포르 섬 북해안에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당시 퍼시발 중장이 처했던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개전 이후에도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건설되지 않은 사태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현장 지휘관이었던 그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말레이 반도로부터 영국군의 주력이 철수하기 전까지 싱가포르 섬의 방어는 싱가포르 요새 사령관(singapore Fortress Commander)인 케이스 시몬스 소장이 책임지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를 상실한 후 퍼시발 중장은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를 재편했다. 해안방어는 계속 요새사령관이 맡았으나 대공방어는 말레이 사령부가 직접 지휘했다.


(싱가포르 섬의 15인치 해안포. https://en.wikipedia.org/wiki/Johore_Battery)


해안포대는 해군기지와 해협의 동쪽 입구를 지키는 창이화력사령부(Changi Fire Command)와 케펠 항 및 해협의 서쪽 출구를 지키는 페이버화력사령부(Faber Fire Command)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사령부가 가진 해안포는 15인치 5문, 9.2인치 6문, 그리고 6인치 16문이었다. 일본군이 북쪽으로부터 침공했기 때문에 이들 해안포는 원래 예상했던 바다가 아닌 북쪽으로 포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우선 해안포 중 15인치 포 1문을 포함한 일부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 또한 해안포는 대부분 함정에 효과적인 철갑탄을 보유했고 지상군에 효과적인 고폭탄은 부족했다. 그나마 고폭탄을 많이 가진 9.2인치 해안포가 1문당 약 30발의 고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측이 어려웠다. 관측병과 포대를 연결할 통신장비가 부족했으며 제공권을 빼앗겨 항공관측도 불가능했다.


(싱가포르 해안포대의 위치. http://www.avalanchepress.com/GunsOfSingapore.php)


섬의 남해안에는 적의 상륙에 대비한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창이로부터 약 32km 에 걸친 방어선에는 약 550m 마다 콘크리트 특화점이 있었으며 대전차 장애물 및 나무로 만들어진 대주정 장애물, 18파운드 야포, 지뢰와 철조망이 해안을 지켰다.


(1942년 초 싱가포르 섬의 방어태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말레이 반도에서 대량의 대공포가 철수했다. 그리하여 1월 말이 되자 싱가포르 섬의 대공포는 중대공포 4개 연대, 경대공포 2개 연대에 달하여 총 150문에 달했으며 탐조등 1개 연대가 밤하늘을 밝혔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를 잃으면서 조기경보기능이 쇠퇴하여 대공포의 효율은 크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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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말레이 반도 상실


1942년 1월 26일 저녁에 퍼시발 중장은 ABDA 최고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서해안에서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고 동해안에 일본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1주일 이내로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24시간 후인 27일 저녁에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에게 개인적으로 전문을 보내어 서해안에 전개한 부대의 주력이 포위되어 제압당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어 3-4일 이내로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또한 전투기는 9대만이 살아 남아 싱가포르의 비행장을 유지하기가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웨이벌 대장은 그날로 답신을 보내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하라고 허가했다.


28일 아침에 제3군단 사령부에서 퍼시발 중장, 히스 중장, 그리고 벤넷 소장이 참가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퍼시발 중장은 기존의 철수 계획을 하루 앞당겨 30일 밤에 모든 병력을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철수를 앞당긴 결정은 현명했다. 실제로 일본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스쿠다이를 일찍 점령하여 제3군단 주력을 포위격멸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제3군단 주력을 조호르에서 격멸하면 조호르 해협을 가로질러 위험한 상륙작전을 실시하지 않고도 싱가포르의 소규모 수비대를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영국군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섬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서 도로와 철도가 지나는 둑길(Causeway)을 거쳐 철수해야 했다. 따라서 둑길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다. 남부 조호르로부터 대공포들이 둑길로 집결하여 공습에 대비했다. 둑길의 말레이 반도 쪽 입구인 조호르바루는 제2고든대대를 배속받은 제22호주여단이 야포의 지원을 받아 지키고 둑길 입구 자체는 250명으로 줄어든 제2아길대대가 지켰다. 제말루앙을 지키던 제22호주여단이 조호르바루 방어명령을 받고 제말루앙을 떠남에 따라 일본군이 29일에 제말루앙을 점령했다.

 

(남부 조호르.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262)


제9사단은 빨라진 철수 시간표에 따라 세데낙에 있던 제8여단을 29일 밤에 450.5 마일 철도이정표 지역, 쿨라이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까지 철수시켰다. 이것으로 제22인도보병여단의 운명이 확정되었다.

간선 도로 상의 나마지에 농원을 떠나 31마일 이정표 지역의 아예르벰반으로 철수한  제27호주여단은 29일 아침에 일본보병제21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저공비행하는 항공기와 야포의 지원을 받아가며 거세게 몰아 붙였다. 호주군은 제29 및 제30야포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백병전까지 불사하는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의 맹공을 막아내었다. 하루 종일 격전이 이어진 끝에 저녁이 되자 결국 지친 일본군이 공격을 중단했다. 호주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25명으로 전투의 격렬함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29일 저녁에 제27호주여단은 사전 계획에 따라 방어선을 떠나 쿨라이 서쪽 5km 지점인 23마일 이정표 지역으로 철수했다. 호주군의 기세에 눌린 일본군은 철수 행렬에 간간이 포격을 가할 뿐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 30일 오후에 제27호주여단은 쿨라이 부근의 21마일 이정표 지역으로 이동했고 제8여단은 쿨라이 시내로 들어가서 자전거를 타고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 정찰대를 쫓아내었다. 30일 밤에 서부부대는 세나이를 거쳐 테브라우 환상도로를 따라 둑길로 향했다. 따라서 제11사단은 스쿠다이에서 둑길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를 따라 철수할 수 있었다.

서해안을 지키던 제11사단도 철수를 시작했다. 베눗을 지키던 제53여단은 29일 아침에 이동을 시작하여 그날 밤에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했다. 폰티안케칠을 지키던 제28여단은 29일 저녁에 스쿠다이로 이동한 다음 30일에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했다.


1월 31일 오전 5시 30분까지 제3군단 주력은 싱가포르에서 징발하여 조호르바루로 파견한 버스를 타고 둑길을 건너 싱가포르 섬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교통통제는 훌륭하여 조호르바루의 병목지점에서 적체 현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철수를 24시간 앞당긴 덕분에 일본군의 추격은 아직 닿지 않았으며 달이 밝았음에도 철수 행렬에 대한 일본기의 공습도 없었다. 제3군단의 주력이 철수를 마치자 후위를 맡아 조호르바루를 지키던 제22호주여단이 오전 7시부터 철수했으며 이어서 둑길 입구를 지키던 아길대대마저 철수하여 오전 8시 15분에 마지막 병사가 둑길을 건넜다.


이어서 둑길을 파괴했다. 둑길의 길이는 약 1km 이고 폭은 20m 정도였다. 대량의 폭약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병대는 해군의 폭뢰까지 사용하여 폭파시켰다. 그 결과 둑길의 약 50m 구간이 사라지고 바닷물이 들어찼다. 사실 썰물시에는 끊어진 부분의 깊이가 1.2m 정도였기 때문에 걸어서 건널 수 있었으나 공격로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영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일본제5사단이 남하했다. 철도를 따라 남하하면서 제22여단을 분쇄한 일본보병제9여단은 31일 새벽 1시에 쿠라이 시가지 북쪽에 도달했다. 간선도로를 지키던 제27호주여단을 남쪽으로 쫓아낸 보병제21여단은 30일 새벽 2시에 아예르벤밤을 점령했고 다음날 쿠라이에서 제9여단과 만났다. 이후 제9여단은 철도를 따라, 제21여단은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두 부대 모두 31일 저녁에 조호르바루에 도착했다.

서해안의 근위사단도 진격을 시작했다. 근위보병제4 및 제5연대가 29일에 베눗, 30일에 폰티안케칠을 점령했으며 31일 저녁에 싱가포르 섬의 서북방에서 조호르 해협에 도착했다.

제18사단은 30일 저녁까지 제5사단의 북쪽인 클루앙에 집결하여 싱가포르 공격을 준비했다.

이제 영국군은 말레이 반도를 완전히 빼앗겼으며 일본군이 조호르 해협에 도달하면서 싱가포르 해군기지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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