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히스 중장의 실수


1941년 12월 18일에 영국, 미국, 네덜란드, 호주 및 뉴질랜드 대표가 싱가포르에 모여 싱가포르 지역상 더프 쿠퍼의 사회로 연합군의 향후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더프 쿠퍼는 이 회의의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영국참모본부에 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에 전개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1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제9 및 제11사단의 보충병, 경전차 50대, 1개 대전차포대, 대량의 야포탄 및 소화기탄, 3개 경대공포연대, 2개 중대공포연대, 4개 전투비행대대, 4개 폭격비행대대가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하며 일본군의 예비대가 투입되면 추가 증원이 필요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일본기가 증원군을 실은 수송선단을 공격하는데 말레이 중부의 비행장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을 최대한 북쪽에서 막아야 한다는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의 의견을 승인했다.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방어를 위하여 윌리엄 글래스포드 소장의 미함대를 중심으로 연합함대를 꾸려 마카사르 해협과 셀레베스 해를 초계하도록 결정했다. 


더프 쿠퍼는 별도로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의 민방위 체제가 불만족스럽다며 여러 기관에 나누어진 민방위 권한을 통합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12월 31일에 싱가포르 전쟁회의는 말레이 사령부의 공병사령관 이반 심슨 준장을 민방위 사령관(Director General Civil Defense=DGCD)으로 임명했다. 민방위 사령관은 전쟁회의에 직속되어 조호르 주와 싱가포르의 민방위 업무에 관하여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 민방위 사령관 임명은 실패였다. 조호르 주정부가 민방위 사령관의 권한을 거부함에 따라 심슨 준장의 권한은 싱가포르 섬으로 한정되었다. 더 큰 문제는 심슨 준장 자신이었다. 심슨 준장은 싱가포르같은 대도시가 상습적으로 공습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방위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민방위 문제는 던져두고 말레이 사령부의 공병 사령관으로서 싱가포르의 방어시설 건설에 공병대의 한정된 역량을 집중시켰다.


(페락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27)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으로부터 페락강 방어를 명령받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은 크리안강 방어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따라서 크로 방면에서 큰 피해를 입은 상태로 셀라마를 지키고 있던 제3/16펀자브대대는 20일에 일본군과 접촉했을 때 이미 철수허가를 받아둔 상태였다. 20일 저녁에 보병제9여단(가와무라 사부로 소장) 중심의 가와무라 지대가 제3/16펀자브대대의 측면을 포위하려 하자 대대장 헨리 무어헤드 중령은 울루사펜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28여단도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기 위하여 다리를 끊고 니봉테발과 바간세라이를 잇는 도로를 침수시킨 후 바간세라이로 후퇴했다. 이로써 크리안강 방어선도 무너졌다.


그동안 제12여단은 그릭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일본군 안도지대와 싸우고 있었다.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19일에 아길대대에 1개 야포중대(troop)를 붙여 쿠알라캉사르로 파견했다. 또한 아길대대의 연락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5/2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를 코타탐판에 파견했다. 19일 오후에 아길대대와 제1독립중대는 섬피탄 북쪽에서 안도지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저녁이 되자 렝공까지 밀려났다.

 

(그릭도로 전투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37)


20일에 안도지대는 아길대대의 전면에 공격을 가하면서 일부 병력을 뗏목에 태워 코타탐판에 상륙시켜 포위하려고 했다. 펀자브중대의 분전으로 포위는 면했지만 렝공이든 코타탐판이든 오래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20일 저녁에 그릭도로의 영국군은 모두 방죽길을 통해 55이정표 지역으로 철수한 다음 방죽길을 폭파했다. 파리스 준장은 일본군이 강이나 호수를 이용하여 우회하지 못하도록 제5/2펀자브대대를 첸데로 호수 동안의 발전소로 파견했다. 제5/2펀자브대대는 20일 밤늦게 발전소에 도착했다.


21일 오전에 히스 중장은 페락강 서쪽 및 북쪽의 모든 영국군 부대는 자정을 기하여 제11사단 휘하에 들어간다는 명령을 내렸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작전 협의를 위하여 카티로 가서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과 회담했다. 파리스 준장은 아길대대를 카티로 후퇴시키고 케란탄에서 막 도착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를 플러스강을 건너 승게시풋에 이르는 도로에 전개했다고 보고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이제 페락강의 서쪽 및 북쪽에 있는 모든 부대를 페락강 너머로 철수시킬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날밤 제28여단은 라윈 지역으로 철수했으며 제3기병연대가 페락강 서안을 따라 블란자에 이르는 도로를 감시했다. 제2/1구르카소총대대는 1개 산포대 및 1개 대전차중대의 지원을 받아 부교가 설치된 블란자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22일 오전에 다시 제12여단을 방문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첸데로 호수 동안의 발전소를 지키던 제5/2펀자브대대가 밤새 캄퐁사욱으로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일본군이 강을 따라 우회해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22일 하루종일 전선이 조용하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일본군이 제12여단을 우회한 후 플러스강을 건너 바로 승게시풋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하고 페락강 서쪽 및 북쪽의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22일 밤에 제12여단이 승게시풋으로 철수했고 이어서 라윈 지역에 있던 제28여단이 이스칸다르 다리를 건너 철수했다. 23일 동이 트기 전에 블란자를 지키던 제2/1구르카대대를 제외한 모든 영국군이 페락강 너머로 철수했고 이후 이스칸다르 다리와 엥고 다리를 폭파했다. 블란자를 지키던 구르카대대도 23일 밤에 폰툰으로 만든 부교를 건너 철수한 후 부교를 폭파했다. 영국군이 페락강 너머로 철수하면서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일본제25군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페락강 도하시 상당한 저항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폭이 수십m에 달하는 페락강은 개전 이래 일본군이 만난 가장 커다란 자연장애물이었으므로 영국군이 페락강 도하를 팔짱끼고 바라보기만 할 리가 없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태국에서 남하하여 23일에 타이핑에 도착한 근위제4연대를 쿠알라캉사르 방면에 배치하고 제5사단을 블란자 방면에 배치했다. 차기 작전을 위하여 근위제4연대는 쿠알라캉사르 부근의 페락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히스 중장이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애당초 캄파르까지 후퇴하기를 원했던 히스 중장은 페락강 방어선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는 제11사단을 페락강에 배치하여 일본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대신 강에서 떨어진 승게시풋-시푸테 사이의 도로에 전개하여 휴식 및 재편성을 실시했다. 말레이항공사령부는 일본군의 페락강 도하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일본군은 저항없이 페락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일본군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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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무다강 철수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은 1941년 12월 16일 아침에 자신의 사령부에서 제11인도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과 회의를 가진 후 제11사단을 현재 배치된 무다강 전선에서 50km 후방의 크리안 강까지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제11사단은 지트라와 구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으며 파타니에 상륙한 일본군이 발링을 거쳐 무다강 전선의 옆구리를 위협할 수 있었다. 반면 크리안 강은 주변의 늪과 함께 일본전차에 대한 좋은 방어선이 되어줄 것이었다.


크리안 강 방어선은 제28여단이 제88야포연대 및 2개의 대전차포대와 함께 지킬 것이었다. 제6 및 제15여단은 타이핑으로 가서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크로부대는 해체되었다. 제3/16펀자브대대는 셀라마에 주둔하여 방어선의 우익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제5/14펀자브대대는 타이핑으로 철수했다. 제12여단은 무다강 철수시 후위부대를 맡아  카란간-셀라마 도로를 따라 남하한 후 제3/16펀자브대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타이핑으로 철수, 제11사단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안 쪽에는 제137야포연대장 홈스 중령 지휘 아래 소부대를 편성하여 다리를 파괴하고 무다강 남안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기로 했다. 이 소부대는 제137야포연대, 제22산포연대의 1개 반(section), 제80대전차연대의 1개 중대, 제1독립중대, 제1레스터셔대대의 1개 중대, 제3기병연대의 1개 대대, 그리고 장갑열차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후위 전투를 위하여 휘하 부대를 무다 강의 교량에 배치했다. 제5/2펀자브대대가 바투페카카에,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를 티티카란간에 배치되어 다리를 지켰다. 16일 오후에 구룬에서 남하한 일본군이 말레이 인과 백인 민간인 복장을 한 선발대를 내보내어 바투페카카의 다리를 점령하려 했으나 제5/2펀자브대대는 속지 않고 다리를 파괴한 후 철수했다. 17일 오전 10시에 일본군 보병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가와무라 지대가 티티카란간을 지키던 아길대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오전 11시 30분에 아길대대장 이안 스튜어트 중령에게 철수 허가가 떨어졌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가와무라 부대는 오후 2시 45분에 티티카란간을 점령했다. 아길 대대는 자정에 셀레마에 도착하여 제11사단 휘하에 들어갔다. 아길 대대의 철수와 함께 해안 쪽을 지키던 홈스 분견대도 크리안 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18일 아침까지는 모든 영국군이 크리안 강  남쪽에 있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그동안 영국군은 사이공에서 남서쪽으로 항진하는 커다란 일본수송선단을 발견했다. 일본선단이 쿠안탄과 메르싱에 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하여 남하하면 근거리에서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기 위하여 영국군은 싱가포르의 모든 항공력을 모으고 일본선단의 예상접근로를 정찰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송선단은 영국군의 예상과 달리 북쪽으로 향했다. 12월 16일에 제25군의 증원병력을 실은 41척의 수송선이 아무런 피해없이 싱고라와 파타니에 도착했다.


히스 중장은 크로를 통과하여 그릭을 거쳐 페락 강을 따라 전진하려는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아길대대의 1개 중대와 1개 장갑차 소대로 분견대를 만들어 그릭으로 파견했다. 분견대는 16일에 그릭 북쪽에서 일본군 보병제42연대(안도 타다오 대좌)를 주축으로 한 안도지대의 공격을 받아 가벼운 전투 끝에 쿠알라케네링으로 후퇴했고 다음날에는 섬피탄까지 밀려났다.

크로를 점령한 안도지대는 영국군의 예상과 달리 발링을 거쳐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릭을 지나 쿠알라캉사르까지 진출하여 제11사단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폭우와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에 전차는 동행할 수 없었다.

히스 중장은 안도지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1독립중대를 렝공에 파견하여 아길분견대를 증원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던 히스 중장은 17일 오후에 제12여단을 군단 직속으로 돌린 다음 쿠알라캉사르로 파견하여 그릭 도로를 따라 전진하는 안도지대를 막도록 했다. 하지만 페락 강 방어선이 방어에 불리하다고 본 히스 중장은 캄파르까지 후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상황을 평가했다. 여기에 따르면 일본군은 서해안에 1개 사단, 파타니-크로-그릭 도로 상에 1개 사단, 그리고 동해안에 1개 사단을 전개하고 인도차이나에 최소한 1개 사단의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영국군은 서해안에 1개 사단, 동해안에 2개 여단이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남쪽 조호르에는 2개 여단으로 이루어진 호주사단이 있었고 싱가포르에 따로 수비대가 있었다. 일본군은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비대가 조호르나 싱가포르에 상륙할 수 있었다. 따라서 퍼시발 중장은 호주군 1개 여단을 북쪽으로 보내자는 건의를 물리쳤다. 일본군의 상륙 위협이 아니더라도 호주군은 편제를 유지한 채 지형을 익힌 조호르에서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싱가포르는 증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는데 증원군은 아무리 빨라도 1942년 1월이 되어야 도착할 것이었다.  증원군을 실은 선단은 공습의 위협에 노출되는데 일본군이 말레이 중부의 비행장을 장악하면 위험이 커질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군은 최대한 북쪽에서 가급적 오래 일본군을 막아야 했다. 당시 극동항공사령부가 보유한 비행기는 네덜란드에서 증원된 기체를 합쳐 100 대 정도였는데 이 정도 세력으로는 자신의 비행장과 증원군을 실은 선단의 상공을 지키는 것이 한계로 지상군을 지원할 여력은 없었다.

일본군이 초기에 버마 최남단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인도로부터의 비행기 증원 루트가 막혔다. 북부 수마트라의 사방 비행장을 통해서는 항속거리가 긴 폭격기의 증원만 가능했다. 가장 필요한 전투기는 수송선으로 실어오든지 아니면 호주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통하여 증원해야 했는데 호주에도 전투기 여분이 없었으므로 전투기 증원은 당분간 어려웠다. 결국 퍼시발 중장은 연이은 전투와 후퇴로 기진맥진한 제3인도군단에게 항공기와 전차의 지원없이 충분한 전차 및 항공지원을 받는 일본군을 최대한 북쪽에서 저지하라고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퍼시발 중장은 12월 17일 오후에 이포로 가서 병력들을 시찰한 후 18일에 제3군단장 히스 장군과 회담했다. 캄파르까지 후퇴해야 한다는 히스 중장의 의견을 물리친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에게 페락 강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라고 명령했다. 제9사단은 동해안의 쿠안탄을 지키면서 동시에 제11사단의 동쪽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본군이 주정을 사용하여 페락 강 남쪽에 상륙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구축함 스카우트와 몇 척의 경비정으로 페락 전대(Perak Flotilla)를 만들었다. 또한 50명의 호주군과 영국해군의 무장 주정대로 이루어진 장미부대(Roseforce)를 만들어 페락 강 서부 및 북부의 일본군 후방지대를 교란하기로 했다. 제11사단은 재편성되었다. 제12여단이 군단 직속에서 제11사단으로 다시 배속되었고 큰 피해를 입은 제6여단은 제15여단에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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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영령 보르네오(2) - 함락


12월 22일에  일본군 보병제124연대 주력(2개 대대)은 수송선 6척에 타고 미리를 떠나 쿠칭으로 남하했으며 와타나베 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는 북상했다.


 

(영령 보르네오. http://www.s-s-s.org.uk/sss.htm?sssintro.htm)


일본군 주력을 태우고 남하하던 선단은 12월 23일 아침에 쿠칭에서 240km 떨어진 해상에서 네덜란드 정찰기에 발견되었다. 싱카왕2 비행장에서 네덜란드 공군의 B-10 폭격기들이 폭격 준비를 시작했다. 폭격기가 이륙하기 전인 오전 10시 40분에 일본기 24대가 싱카왕2 비행장을 공격하여 활주로에 구멍을 뚫었다. 일본군이 싱카왕2 비행장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공군은 폭격을 포기하고 비행기를 수마트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24일에 극동항공사령부가 동의함으로써 싱카왕2 비행장의 네덜란드기들은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일본선단은 23일 오후 6시에 산투봉 강어귀에 접근했으며 2시간 후에 사라왁 부대장 레인 중령은 싱가포르로부터 쿠칭 비행장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켜야 할 비행장이 사라지자 레인 중령은 네덜란드령 보르네오로 철수할 권한을 요청했다.

비행장에 주력을 모은 레인 중령이 철수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전방분견대가 18파운드 야포와  3인치 박격포로 산투봉 강의 수로를 방어했으며 사라왁 레인저와 해안의용대의 지원을 받은 펀자브 포정소대가 쿠칭 북쪽을 초계했다. 23일 밤에 퍼시발 중장은 쿠칭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킨 후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네덜란드 해군이 반격을 가했다. 23일 오후 10시 40분부터 네덜란드잠수함 K-14 함이 산투봉 강어귀에 정박한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카토리마루(9,848톤)와 히에마루(4,943톤)를 격침하고 호카이마루(8,416톤)와 니치란마루(6,503)톤에 피해를 입혔다.


(네덜란드 잠수함 K-14. 배수량 865톤(수상) 1,045톤(수중), 길이 74m, 폭 6.5m, 흘수 3.9m, 속력 17노트(수상) 9노트(수중), 항속거리 12노트로 19,000km(수상) 8.5노트로 48km(수중), 잠항심도 80m, 승조원 38명, 무장 21인치 어뢰발사관 전방 4문, 후방 2문, 외부발사관 2문, 어뢰 14발. https://en.wikipedia.org/wiki/HNLMS_K_XIV)


일본선단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24일 오전 9시부터 20척의 주정을 내보내어 공격을 시작했다. 소규모의 펀자브 포정소대가 저항을 포기하고 철수하자 일본군 주정은 그대로 산투봉 강에 진입하여 쿠칭으로 향했다.

오전 11시에 전방분견대가 일본군과 교전했다. 분견대는 야포와  박격포로 주정 4척을 격침했지만 상륙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중과부적으로 전멸했다.

다시 주정을 타고 쿠칭으로 접근하던 일본군은 24일 이른 오후에 영국군의 포격으로 3척을 더 잃었다. 하지만 나머지 13척은 상륙에 성공했고 일본군은 오후 3시 30분까지 쿠칭 시가지를 점령했다. 잠시 숨을 고른 일본군은 해가 떨어지자 비행장을 향하여 남하하다가 영국군의 방어선에 부딪혀 진격을 멈추었다.


그동안 바다에서는 네덜란드 해군이 다시 전과를 올렸다. 24일 오후 4시에 네덜란드 잠수함 K-16 함이 쿠칭에서 북쪽으로 65km 떨어진 해상에서 병력을 상륙시키고 돌아가던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K-16 함은 일본구축함 사기리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으며 사기리의 승조원 241명 중 1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리를 거두고 수라바야로 돌아가던 K-16 함은 다음날인 25일에 일본잠수함 I-66 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으며 승조원 36명은 모두 사망했다. 25일 저녁에는 싱가포르를 이륙한 블레넘 5대가 항속거리 한계까지 날아와 일본선단을 폭격했으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일본구축함 사기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Sagiri)


쿠칭에서는 레인 중령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부상자와 함께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의 싱카왕2 비행장으로 철수시켰다. 그동안 일본군은 1개 중대를 선착장이 있는 바투키탕으로 보내어 사라왁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오후가 되어 일본군의 의도를 깨달은 레인 중령이 철수 명령을 내리자 일본군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후위를 맡은 2개의 펀자브 중대에서 4명의 영국인 장교와 약 230명의 인도병사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단지 1개 소대만이 탈출하여 정글을 뚫고 100km 를 남하한 후 31일에 네덜라드령 보르네오의 싱카왕2 비행장에서 주력과 합류했다. 후위부대의 희생 덕분에 사라왁 부대 주력은 무사히 바투키탕에서 강을 건넜으나 그 과정에서 자동차를 대부분 잃었다.


(쿠칭 부근)


사라왁 부대 주력은 계속 남하하여 26일에 크로콩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없었으므로 남은 자동차를 모두 버렸다. 또한 레인 중령은 사라왁 주 방위대를 포함한 현지 병력들을 임무에서 해제하여 귀가를 허용함으로써 사라왁 부대는 해체되었다.

현지 병력을 털어내 버린 제2/15펀자브 대대는 27일 아침에 국경을 넘었으며 29일에 750명의 네덜란드 군이 지키던 싱카왕2 비행장에 도착했다. 제2/15펀자브대대는 이제 네덜란드 군 휘하로 들어가 싱카왕2 비행장  방어에 투입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제2/15펀자브대대에게 비행기로 보급을 해주려고 했으나 싱카왕2 비행장의 활주로 상태가 나빠 이착륙이 불가능했다.  결국 31일에  3대의 블레넘 폭격기를 동원하여 낙하산으로 400kg 의 보급품을 떨어뜨려 준 것이 모두였다.


한편 사라왁을 점령한 일본군은 3주 이상 점령지 정비에 주력하면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미리를 떠나 북으로 향한 와타나베 대대는 영령 보르네오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했다. 와타나베 대대는 1942년 1월 1일에 라부안을 점령하고 8일에 제셀톤을 점령했다. 1월 17일에는 와타나베 대대의 2개 중대가 영령북보르네오의 행정청이 있던 산다칸에 상륙하여 19일에 영령북보르네오 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와타나베 대대가 영령 보르네오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자 사라왁에 눌러 앉아 있던 일본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합군 정찰기가 1월 24일에 남하하는 일본군을 발견하자 네덜란드군 사령부는 싱카왕2 비행장의 연합군에게 철수 허가를 내주었다. 연합군은 우선 영령 브로네오에서 피난와 있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자동차에 태워 해안에 위치한 폰티아낙으로 철수시켰다. 이들은 다음날인 25일에 배편으로 폰티아낙을 탈출했으며 폰티아낙은 4일 후에 함락되었다.


1월 25일에 5개 중대의 일본군이 싱카왕2 비행장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마을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다음날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철수허가를 받아 둔 연합군은 보급품을 불태우고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연합군은 27일 저녁에 재차 일본군을 공격하여 움찔하게 만든 후에 철수를 시작했다. 일본군의 추격은 재빨라서 후위를 맡은 2개 펀자브 소대가 포위되었다. 인도군 장교가 이끄는 70명의 병사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싸워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간 3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후위 부대의 희생 덕분에 연합군 주력은 무사히 삼바스 강을 건너 싱카왕2 비행장에서 남서쪽으로 25km 떨어진 레도의 고지에 방어선을 폈다.


한편 일본군 3개 중대는 25일 저녁에 주정을 타고 쿠칭을 떠나 27일 아침에 싱카왕2 비행장 서쪽의 페망카트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저항을 받지 않고 해안을 장악한 다음 벵카장으로 진격하여 레도의 연합군을 포위하려고 했다. 연합군은 후위 전투를 통하여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27일에 응가방을 통과하여 31일에 낭가피오로 후퇴했다.


2월 4일에 제2/15펀자브대대는 네덜란드 군의 동의를 얻어 낭가피오에서 정글을 뚫고 보르네오 남해안까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대대는 동부 및 서부부대로 나뉘어 보르네오 남해안의 삼핏과 팡칼란보에오엔으로 향했다. 거기서 배편을 찾아 자바로 철수하려는 계획이었다.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어 지도조차 없는 정글을 통과하는 과정은 힘들었다. 병사들은 굶주림을 참아가며 정글 속의 소로를 따라 걷다가 강이 나오면 뗏목을 만들어 타고 건넜다. 열대의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내려쬐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병사들을 흠뻑 젖게 만들었다.


짧은 길을 택한 서부부대는 2월 24일에 팡칼란보에오엔에 도착하여  해안을 뒤졌으나 주정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를 통한 탈출은 불가능했으므로 서부부대는 그 지역의 비행장을 지키던 소규모의 네덜란드 수비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그들을 실어갈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동부부대는 3월 6일에 삼핏에 도착했는데 전날 일본군이 강어귀에 상륙하여 해안으로 나갈 수 없었다.


1942년 3월 8일에 자바의 네덜란드 군이 항복했다. 다음날 일본군은 방송을 통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모든 연합군 병사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만일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하면 무서운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3월 9일 아침부터 영국군은 앞으로의 행동을 논의했다. 일부 병사들은 보르네오 섬의 내륙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글을 통과해 온 지난  몇 주 간의 경험은 정글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제2/15펀자브대대는 미리에 파견된 이래 10주 동안 정글로 뒤덮인 험한 지형을 1,300km 이상 주파했다. 싱가포르에 있던 말레이 사령부는 3주 전에 이미 항복했으며 전날에는 자바의 네덜란드 군마저 항복했다. 제2/15펀자브대대에게는 더  이상 싸울 명분이 없었으며 그럴 기력도 없었다. 병사들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원화기는 기관총 몇 정이 모두였으며 탄약도 약간 밖에 없었다. 결국 3월 9일 오후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지형이 험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항복에도 시간이 걸렸다. 보르네오 섬에서 연합군 병사의 항복이 마무리된 것은 1942년 4월 1일이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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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영령 보르네오(1) - 상륙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의 관할구역에는 영령 보르네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르네오는 원시의 섬이었다. 해안은 맹그로브와 늪으로 덮였고 섬 면적의 90% 는 빽빽한 정글로 섬 내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린란드, 뉴기니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큰 섬으로 면적이 75만 ㎢ 가 넘었으나 1941년 당시 인구는 300만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도시라고 부를만한 시가지는 10여곳에 불과했다. 도로망도 빈약하고 철도도 짧은 노선 하나뿐이라 섬 내부의 교통은 주로 수로나 정글 속의 오솔길에 의지했다.


보르네오 섬의 대부분은 네덜란드 령이었으며 영령 보르네오는 섬의 북쪽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다. 영령 보르네오는 2개의 주(영령북보르네오, 사라왁), 1개의 보호국(브루네이), 그리고 왕령식민지(Crown Colony)인 라부안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르네오의 가치는 석유에 있었다. 1940년에 영령 보르네오에서 106만톤, 네덜란드령 보르네오에서 186만톤, 합계 292만톤이 산출되었는데 이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영령 보르네오를 합친 생산량 887만톤의 33% 에 해당했다. 보르네오에서 산출되는 석유만으로 평화시 일본의 석유 수요량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영령 보르네오에는 유전이 2개 있었다. 사라왁 주 북쪽에 미리 유전이 있었고 50km 북쪽으로 올라가면 브루네이의 세리아에 또다른 유전이 있었다. 채굴된 원유는 해안가에 위치한 루통의 정유공장에서 정제된 다음 파이프를 통하여 유조선에 실렸다.


(영령 보르네오. http://www.s-s-s.org.uk/sss.htm?sssintro.htm)


보르네오 섬은 남진하는 일본군이 말레이 및 수마트라, 셀레베스, 그리고 자바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보르네오를 지키면 말레이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은 말레이와 자바를 지키기에도 병력이 빠듯하여 보르네오 방어에 충분한 병력을 할애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말레이 침공군의 측면을 보호하고 향후 수마트라 및 서부 자바 침공을 지원하기 위하여 보르네오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주력은 제18사단 제35여단 제124연대였다. 여기에 보병제35여단사령부, 제2요코스카해군육전대, 제4해군설영대, 공병제12연대의 1개 소대, 사단통신대 및 의무대의 분견대, 제4야전병원 및 제11방역급수부의 분견대가 추가되었다. 보르네오 침공부대의 전투병력은 약 4,500명이었으며 지휘는 보병제35여단장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맡았다. 영령 보르네오에 대한 공격은 말레이 침공 8일 후에 시작되었다.


1941년 5월에 말레이 사령부는 영령 보르네오 방어를 위하여 찰스 레인 중령의 제2/15펀자브대대에 6인치 야포 1개 포대와 공병 1개 소대를 붙여 1,050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레인 중령은 이외에도 사라왁 주의 잡다한 현지 병력들을 지휘했는데 여기에는 무장경찰, 해안수비대 그리고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사라왁 레인저 등이 포함되어 1,515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인 중령의 지휘를 받는 펀자브 대대와 현지 병력을 합쳐 사라왁 부대(Sarawak Force = Sarfor)라고 불렀다.


사라왁 부대의 주임무는 일본군이 보르네오의 비행장을 사용하여 말레이 전투를 지원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따라서 방어의 중심은 사라왁 주의 주도로서 비행장을 가진 쿠칭이었다. 쿠칭은 해안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으며 해안으로 통하는 도로는 없었고 대신 사라왁 강과 산투봉 강을 통하여 연락선이 다녔다. 사라왁 강에서는 흘수가 4.8m, 산투봉 강에서는 흘수가 3.6m 인 선박까지 운항이 가능했다. 쿠칭에서 북서쪽으로 마탕, 그리고 남쪽으로 펜딩을 거쳐 65km 떨어진 세리안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비행장은 쿠칭 시가지에서 세리안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1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비행장에서 서쪽으로 도로가 뻗어 바투 키탕에서 사라왁 강과 만났다. 자동차 운반선으로 강을 건너면 도로는 네덜란드 국경에서 24km 떨어진 크로콩까지 연결되었다. 처음에 영국군은 쿠칭 북쪽에서 일본군을 저지할 생각이었으나 1941년 9월에 시가지는 포기하고 비행장만 방어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쿠칭 부근)


1941년 12월 8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말레이에 상륙하자 퍼시발 중장은 미리에 주둔 중이던 제2/15펀자브대대에게 미리 유전과 루통의 정유소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펀자브 대대는 유전과 정유소를 그날 안으로 폭파했으며 다음날에는 선착장도 폭파했다. 13일에 펀자브 대대는 유전 기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쿠칭으로 철수했다.


같은 날 보병제35여단장 가와구치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제35여단사령부와 제124연대가 10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타고 베트남의 캄란 만을 출발했다. 선단은 하시모토 신타로 소장이 승좌한 경순양함 유라와 제12구축대(무라구모, 시노노메, 시라구모, 우수구모)의 직접 호위를 받았으며 , 제7전대 사령관 구리다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2척(구마노, 스즈야)와 구축함 2척(후부키, 사기리)이 뒤따랐다. 제7호 구잠함과 수상기 모함 카미카와 마루도 동행했다.


일본선단은 발각되지 않고 남중국해를 건너 자정이 막 지난 15일 새벽에 미리 앞바다에 닻을 내렸고 1척은 세리아로 파견되었다. 거친 날씨 때문에 상륙이 힘들었지만 영국군의 저항이 없었으므로 해가 뜰 때까지는 상륙을 마치고 오전 중에 유전을, 오후에는 루통의 정유소를 점령했다.


일본군의 상륙 소식이 싱가포르의 극동항공사령부에 도달한 것은 16일 오후 9시가 되어서였다. 17일 날이 밝자 싱카왕2 비행장에서 네덜란드 정찰기가 떠서 일본군의 상륙을 확인했다. 보르네오 동해안의 타라칸에서 이수한 네덜란드 해군의 비행정과 쿠칭 남쪽의 싱카왕2 비행장에서 이륙한 네덜란드 공군의 B-10 폭격기가 17일 오후부터 19일까지 3일간 일본선단을 공습했다.

17일 오후에 타라칸을 이수한 네덜란드해군항공대 소속 도르니에 Do-24 비행정 3대가 역시 선단을 공습했는데 이중 1대가 구축함 시노노메에게 200kg 짜리 폭탄 2발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일본구축함 시노노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destroyer_Shinonome_(1927)


쿠칭의 영국군은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19일에 일본폭격기 15대가 쿠칭 시가지와 비행장을 공습했다. 실제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석유저장고가 직격을 받아 화염이 솟아오르자 놀란 주민들이 달아나 버렸다. 그 결과 방어진지를 건설할 노동력을 구할 수 없어서 방어태세에 차질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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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페낭 함락

 

말레이 북서쪽 케다 주를 지키던 제11인도사단이 급속히 후퇴하면서 페낭 섬이 위험해졌다. 페낭 섬은 말레이와 인도 및 실론을 잇는 해저전선의 종착지로서 항구와 고정방어시설을 갖추고 막대한 양의 탄약과 보급품을 쌓아둔 요충지였다.

영국군은 페낭 섬 방어를 위하여 정규대대 2개를 주둔시켰고 필요하면 증원할 예정이었으나 현실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자 페낭 섬을 지키던 2개 대대는 크로부대로 차출되어 페낭 섬을 떠났으며 이후 제11사단의 후퇴로 인하여 페낭 섬에 병력을 투입하는 문제는 현실성이 없어졌다.

 

페낭 섬은 12월 8일부터 공습을 받았으나 본격적인 공습은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일본제3비행집단은 전투기의 엄호를 받는 중폭격기 41대를 보내어 페낭 섬의 유일한 도시인 조지타운을 공습했다. 이때 아시아계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는데 주로 거리에 나와 공습 장면을 구경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일본군은 다음날인 12일도 공습했으나 중폭격기는 빼고 습격기와 경폭격기로 공습을 가하여 폭장량은 줄었으며 피해도 적었다. 일본기는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 이때쯤 영국전투기는 북부 말레이에서 사라졌으며 페낭 섬에는 대공포가 없었다.

 

(Ki-51 99식 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a/Mitsubishi_Ki-51-1.jpg

 

13일에 제3인도군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453호주전투비행대대가 싱가포르에서 날아와 페낭 섬 대안의 버터워스  비행장에 전개했다. 이날 일본군은 전투기 호위없이 중폭격기 26대를 내보내어 페낭을 폭격했는데 버팔로 8대가 요격하여 5대를 격추했다. 격추된 버팔로는 1대였다.

버팔로의 요격에도 불구하고 13일의 폭격은 조지타운 시가지와 부두에 큰 피해를 입혔다. 시가지 절반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행정 체계가 마비되었다. 경찰관이 대부분 도망쳤고 당국에서 고용한 일꾼도 사라졌다. 페낭 요새(Penang Fortress) 사령관 시릴 라이언 준장은 페낭 행정관과 상의한 후 백인 여자와 어린이들을 13일 밤에 싱가포르로 철수시켰다.

제3비행집단은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전투기 27대, 습격기 9대, 경폭격기 42대, 중폭격기 67대, 총 145대를 내보내어 페낭을 폭격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14일에 싱가포르 전쟁회의는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페낭 섬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일 페낭 섬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수비대는 최대한 많은 보급품과 함께 해상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15일에 제11사단이 무다 강 남안으로 철수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페낭 요새 사령관 라이언 준장에게 16일 밤을 기하여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낭 섬을 지키던 2개 대대는 이미 말레이 반도로 파견되어 남아있던 수비대는 소수였다.

 

보급품은 수송이 불가능했으므로 파괴해야 했다. 고정방어진지, 탄약, 연료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발전소와 민간비행장의 건물 및 장비를 비롯한 민간 기계와 장비들도 최대한 파괴했다.

그러나 시간 부족으로 일부는 파괴하지 못했는데 라디오 방송국이 남아 나중에 일본이 선전방송에 이용했다. 항구에는 모터달린 주정 24척을 포함하여 많은 주정과 바지가 남았다. 일본군은 여기에 다른 곳에서 노획한 주정 및 자신들이 가져온 주정을 합쳐 말레이 반도 서해안을 남하하며 상륙작전을 펼쳤다. 항구 이용을 막기 위하여 기뢰도 설치할 예정이었지만 시간 부족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페낭 철수는 16일 밤과 17일 밤에 기선 4척을 이용하여 실시했다. 뒤에 남기로 한 소수의 공무원을 제외한 백인 전원이 승선하여 싱가포르로 향했으나 선박 부족으로 해협식민지의용대의 아시아계 병사 500명을 포함하여 아시아계 주민들은 뒤에 남았다.

 

페낭 섬에는 53명의 일본인이 있었는데 전쟁이 벌어지자 억류되었다가 16일 저녁에 석방되었다. 이들 중 2명이 18일 새벽에 쪽배를 타고 페낭 섬을 탈출하여 대안에 상륙, 정오 경에 일본군을 만나 페낭 섬의 영국군이 이미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일본군은 황급히 계획을 바꾸어 페낭 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19일 오전 11시 30분에 보병제41연대 제3대대가 페낭 섬 대안의 버터워스에 진입하여 영국군이 남기고 간 주정을 끌어모았다. 제3대대는 이렇게 모은 영국주정을 타고 버터워스를 출발, 오후 4시 30분에 조지타운에 상륙하여 저항없이 페낭 섬을 점령했다. 이어서 징발한 민간선박 7척을 타고 오전 11시에 알로스타를 떠난 군정요원과 해저전선운용요원이 상륙했다.

 

때이른 페낭 섬의 무혈점령은 제25군사령부를 놀라게 했다. 일본군은 개전 당시 영국군이 페낭 섬에서 최후까지 저항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페낭 섬은 싱가포르 섬과 함께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처절한 격전을 벌인 다음에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뜻밖에도 페낭 섬을 손쉽게 얻은 일본군은 말레이를 지키려는 영국의 의지가 약하다고 확신했으며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 한층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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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케란탄 철수

 

말레이 북서쪽 지트라에서 제11인도사단이 사에키 정진대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 말레이 북동쪽 케란탄 주에서는 제8인도보병여단이 다쿠미 지대에게 코타바루를 내주고 마창 남쪽에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11일 저녁에 제9인도보병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공군이 케란탄 주의 비행장들을 포기했으므로 제8여단도 케란탄 주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스 중장은 동의했지만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불허했다. 그러자 히스 중장은 발끈하여 케다 주의 부킷 메르타잠에 있는 군단 사령부를 떠나 열차를 타고 싱가포르로 갔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히스 중장은 12일 아침부터 퍼시발 중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히스 중장은 일본군의 주공이 서부해안을 따라 내려오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제8여단을 철수시켜 서부해안 방어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스 중장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퍼시발 중장은 마음이 바뀌어 제8여단에게 저장 물자를 최대한 이송하거나 파괴한 후 철도를 이용하여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북부 말레이)

 

다쿠미 지대는 12월 9일 오후에 코타바루 시가지를 점령한 후 3일간 진격을 멈추고 정비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은 탄약을 보충하고 사상자를 수용하며 장비를 수리하고 포로를 처리했다. 이때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대량의 군수품과 장비를 각 부대에 분배하여 전력이 충실해졌다.  점령 정책도 펴서 코타바루의 왕궁, 행정기관, 은행, 우체국 등을 장악하고 수도시설, 차량공장 등을 수리하며 식량을 징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포고령도 내고 선무 활동을 펴는 한편 일본에 적대적인 주민들을 소탕했다.

 

정비를 마친 다쿠미 지대는 12일 아침부터 보병제56연대 제3대대를 선두로 남하했다. 제3대대가 방어선에 접근하자 영국군 야포가 불을 뿜어 진격을 저지했다. 제3대대는 일단 멈추었다가 밤이 되자 진격을 재개하여 13일 새벽 1시 30분에 영국군이 포기한 타나메라 비행장에 진입했다. 제3대대는 13일 날이 밝자 마창 남쪽에 펼쳐진 영국제8여단의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돌파에 실패했다. 13일 오후가 되자 보병제56연대 주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56연대는 밤이 되면 공격할 계획었으나 직전에 영국군이 철수했다. 

 

퍼시발 중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제8여단은 신중하게 철수를 시작했다. 우선 보급품과 장비들을 수송하고 수송이 불가능한 보급품이나 장비는 파괴했다. 그동안 마창 방어선에 배치된 부대는 12일과 13일에 실시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13일 오후에 일본군이 증강되자 일몰 직후 철수한 후 마창 남쪽 사트 강의 다리를 파괴했다. 

제8여단의 철수는 조직적이었다. 강을 건널 때마다 다리를 파괴하고 강력한 후위부대를 두어 일본군이 마음놓고 쾌속으로 추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5일에 영국군 후위부대는 마창 남쪽 15km 지점의 고지에서 일본군에 총격을 퍼부어 진격을 저지했다. 16일 날이 밝은 후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영국군은 오후 1시에 후퇴했다. 영국군은 이런 방식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다쿠미 지대가 마창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쿠알라크라이까지 전진하는데 1주일이 걸렸다.

 

그동안 후방에서는 철수를 서둘렀다. 보급품 수송은 15일까지 끝났다. 병력의 철수는 일시적으로 제8여단에 배속되었던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가 서해안의 제12여단으로 돌아가면서 시작되었다. 병력들이 차례로 쿠알라크라이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 쿠알라리피스로 철수했으며 쿠알라크라이의 철도 종점은 19일에 폐쇄되었다. 마지막 부대가 쿠알라리피스의 새로운 진지에 배치된 것은 22일이었다. 이로써 영국군은 케란탄 주에서 물러났다. 제8여단은 철수 과정에서 많은 수의 차량, 기관총, 박격포 및 대전차총을 상실했으며 개전 이래 인명피해는 사상자 및 행방불명을 합쳐 533명이었다. 장비의 상실은 뼈아픈 일이었으나 병력 손실은 많지 않았으며 제8여단은 전투력을 갖춘 상태로 철수에 성공했다.

 

다쿠미 지대는 영국군의 반격에 유의하면서 신중하게 남하하여 18일 오후에 쿠알라크라이 북방 10km 지점에서 날 강을 건넜다. 이날 다쿠미 소장은 제25군사령부로부터 쿠알라크라이를 점령한 이후에는 남쪽으로 영국군을 추격하지 말고 방향을 바꾸어 동해안의 쿠안탄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일 오전에 일본기들이 쿠알라크라이를  공습했다. 정오경 일본군이 주민 몇 명을 발견하여 영국군에 대해 물어보자 대부분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군은 오후 5시 30분에 쿠알라크라이 북동쪽 1km 지점에 도달하여 시내로 정찰대를 보냈다. 정찰대는 영국군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일본군은 신중을 기하여 19일 밤을 그대로 지낸 다음 20일 날이 밝자 대오를 맞추어 쿠알라크라이 시내로 진입했다. 

 

영국군이 대부분의 물자를 이송하거나 파괴했지만 다쿠미 지대는 남아있던 약간의 식량과 피복을 노획했다. 또한 수백대의 자동차를 발견했는데 대부분 망가졌으나 일부는 사용이 가능했다. 다쿠미 지대는 부대를 정비한 후 18일자 명령에 따라 22일에 1개 중대를 수비대로 남겨두고 주력은 노획한 차량을 타고 쿠알라크라이를 떠나 쿠안탄으로 향했다.

 

한편 보병제56연대 제7중대는 코타바루 비행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12월 17일에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토렝가우 부근의 비행장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7중대는 노획한 차량을 타고 남쪽으로 달려 18일 오후에 저항을 받지 않고 토렝가우에 입성했다. 당시 토렝가우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억류되었는데 이때 해방되었다.

 

이로써 다쿠미 지대는 말레이 북동부의 케란탄 주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다쿠미 지대는 화포 27문, 기관총 73정, 비행기 7대, 철도화차 32대를 노획했다. 노획한 자동차는 512대에 달했으나 쿠알라크라이에서 노획한 자동차는 대부분 망가진 상태였으므로 사용가능한 숫자는 157대였다. 연료로 사용할 휘발유도 50톤을  노획했다. 병력 피해는 전사 320명, 부상 538명으로 영국군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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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구룬 전투

 

구룬은 알로스타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방어선은 구룬 시가지에서 5km 정도 북쪽에 있었는데 이곳의 지형은 알로스타로 통하는 도로의 서쪽에 해발 1,350m 의 케다 산이 있었고 철도의 동쪽 3km 부터는 정글로 막혀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영국군은 전쟁 전부터 이곳에 방어진지를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인력부족과 일본군의 빠른 진격 때문에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제11인도보병사단의 방어선 배치를 보면 도로와 철도를 포함한 좌익은 제6인도보병여단이 맡았고 우익은 제28인도보병여단이 담당했다. 병력이 600명으로 줄어든 제15인도보병여단은 예비대였다. 지트라 전투에서 실종되었던 제15여단장 케네스 가렛 준장이 복귀하여 임시로 제15여단을 통합지휘하던 제28여단장 윌리엄 카펜데일 준장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했다. 화력지원은 제88야포연대가 담당했다. 제11사단장 데이비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사단에 남아있던 야포와 대전차포를 모두 끌어모아 제88야포연대에 배치했다. 따라서 제88야포연대는 정수보다 야포 1개 포대와 대전차포 3개 포대를 더 보유했다.

구룬 방어선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부대는 후위를 맡은 제1/8펀자브대대였다. 제1/8펀자브대대는 14일 정오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하여 쉬지도 못하고 방어선 구축에 매달렸다. 잠시 후 일본군이 나타났다.

 

알로스타를 점령한 일본군은 추격을 서둘렀다. 12월 14일 아침에 자전거를 탄 선견대가 출발했다. 알로스타에서 구룬까지는 도로 상태가 좋고 사방이 논으로 지형이 평탄하여 자전거 운용에 유리했으므로 일본군은 알로스타 시내에서 대량의 자전거를 징발하여 선견대에 지급했다. 일본군 주력은 14일 오후 1시 30분에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출발했다.

 

선견대는 14일 오후 2시에 구룬 북쪽에서 영국군의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으면서 진격이 좌절되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약 10대의 트럭에 분승한 일본군이 전차 3대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일본전차를 본 영국군은 놀랐다. 영국군은 케다 강의 다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다리를 끊어버렸으므로 며칠 동안은 전장에서 일본전차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공병의 능력은 영국군의 예상보다 뛰어났다. 영국군 대전차포가 불을 뿜어 선두 전차를 파괴하자 일본군은 일단 물러났다.

오후 6시에 일본군이 증강된 전력으로 재차 공격을 가하여 제1/8펀자브대대의 동쪽 방어선을 뚫었다. 그 순간 제6여단장 윌리엄 레이 준장이 억지로 쥐어짜낸 예비대를 직접 지휘하여 반격을 실시했다. 반격은 성공을 거두어 일본군을 몰아내고 20이정표(Milestone 20) 지역을 탈환했다. 

 

(구룬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16)

 

14일 오후에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이 구룬 남쪽 7km  지점에 있던 제11인도사단사령부에 찾아왔다. 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자신의 부하들이 짧은 간격으로 반복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서 트럭이나 열차를 이용하여 장거리 후퇴를 한 다음 재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스 중장은 내심 동의했지만 그럴 권한이 없었으므로 일단 구룬 방어선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저녁에 히스 중장은 밀레이 사령관 퍼시벌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11사단을 철도나 트럭을 이용하여 페락 강까지 단번에 후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퍼시벌 중장은 거부하고 구룬 남쪽에 있는 무다 강 남안까지의 후퇴만 허락했다.

 

구룬 방어선에서는 반격에 성공한 제6여단장 레이 준장이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레이 준장은 15일 아침에 제2이스트서레이대대의 1개 중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이 선수를 쳤다. 15일 새벽 1시 30분에 기습적인 박격포 사격과 함께 일본군이 제1/8펀자브대대를 공격하여 대대의 우익 방어선을 돌파했다. 돌파에 성공한 일본군은 후방을 휩쓸고 다니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제2이스트서레이 대대본부가 공격을 받아 대대장을 포함한 6명의 장교가 전사하면서 대대 지휘부가 절딴났다. 제6여단사령부도 공격을 받아 장교들이 몰살당했으나 레이 준장은 사령부를 떠나 아침 공격에 투입할 중대를 시찰하던 중이었으므로 목숨을 건졌다.

 

이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제1/8펀자브 대대장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오른쪽에 있던 제2이스트서레이대대가 전멸하고 자신의 대대가 고립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대대를 이끌고 해안을 향하여 서쪽으로 도망쳤다.

대대 하나가 통째로 도망치면서 방어선의 좌익 절반이 휑하니 비었으나 일본군이 이런 엄청난 행운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11사단은 파국을 면했다. 일본군이 상황을 파악하고 텅 빈 방어선을 통해 병력을 투입하기 전에 사단예비대인 제15여단이 달려와 좌익의 위기를 감지한 제28여단에서 억지로 쥐어짜 보내준 병력과 함께 일본군을 막았다.

 

15일 날이 밝자 일본군은 제28여단과 케다 산 사이를 돌파하려고 여러번 시도했으나 영국군은 그때마다 야포의 화력지원을 받아 저지했다. 저녁이 되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보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제11사단은 15일 밤에 구룬 방어선을 떠나 16일 아침에 무다 강 남안에 도착했다. 이로써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진 구룬도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이제 제11사단에서 그나마 전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제28여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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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알로스타 상실

 

개전 이래 제11인도사단의 지휘 아래 있던 크로부대는 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의 요청에 따라 1941년 12월 13일 0시를 기하여 제3인도군단의 직접 지휘 아래 들어갔다. 동시에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은 케란탄에 파견된 제4/19하이드라바드 대대를 제외한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의 제12인도보병여단을 제3군단에 배속한 후 철도를 이용하여 이포로 수송했다. 이안 스튜어트 중령의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가 13일 오후 4시에 이포에 도착했고 24시간 후에 여단사령부와 제5/2펀자브대대가 도착했다.

크로부대의 철수로 크로가 일본군에게 개방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13일 오후에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의 1개 중대에 장갑차 몇 대를 붙여 크로와 도로로 연결된 페락 강 북안의 그릭으로 파견하고 14일 오후 4시에는 대대 주력을 크로 서쪽의 발링에 파견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14일에 크로부대는 제12여단 지휘 아래 들어갔다. 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14일 밤에 크로부대를 발링을 거쳐 서쪽으로 철수시키고 제5/2펀자브대대는 메르바우 풀라스에 주둔시켰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지트라에서 철수한 제11인도보병사단은 13일 오전 9시에 케다 강 남안에 도착하여 재편성에 들어갔다. 제28여단이 알로스타에, 제6여단이 심팡암팟에 주둔했으며 제15여단은 예비대로서 알로스타 동쪽의 랑가에 주둔했다. 오후 늦게까지 지트라에서 철수한 병력들이 개별적으로 도착하면서 재편성 작업은 혼란을 겪었는데 여기에 말레이 복장을 한 일본군까지 섞여들어 저격을 가함으로써 혼란을 부추겼다.

알로스타 북쪽의 도로교와 철교에 대한 폭파준비는 13일  아침에 끝났다. 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공병대장 존 스티드맨 중령과 함께 강가에 나와 다리를 건너 철수하는 부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의 오토바이 2대가 다리로 접근하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폭파명령을 내렸다. 다리가 폭파되면서 제2이스트서레이대대의 브렌건캐리어 8대가 강 북안에 버려졌다. 연기가 가라앉자 도로교는 무너졌으나 철교는 상처를 입은 채 서 있었다.

이때 철수 중이던 영국군 장갑열차가 북쪽으로부터 도착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철교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장갑열차를 철교에 진입시키라고 명령했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인원이 모두 내려 철교를 건넌 다음 기관사가 마지막으로 열차를 출발시키고 뛰어내렸다. 철교는 무너지지 않았다. 모두 놀라서 바라보는 가운데 장갑열차는 유유히 철교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타지 않은 장갑열차는 남쪽으로 150km 떨어진 타이핑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13일 아침에 다리로 접근했던 오토바이는 일본군 보병제41연대 제1대대의 정찰대였다. 제1대대는 오전11시에 케다 강 북안에 도착하여 철교로 몰려갔다가 영국군의 총격을 받고 물러섰다. 이어서 보병제9여단이 도착하여 부대를 정렬하기 시작했다. 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은 이때 보병제5사단장 마츠로 다쿠이 중장의 명령에 따라 휘하 부대를 여단주력(가와무라부대)과 4개 부대(제1, 제2, 제3 및 제4제단)로 재편했다.

그동안 일본군의 일부 병력은 철교를 탈취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3일 오후에 소수의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철교를 건너 케다 강 남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다행히 부대 정렬에 정신이 없던 일본군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일본군의 증원이 늦어지는 사이 제2/9구르카소총대대가 반격을 가하여 교두보를 쓸어버리고 일본군을 철교 너머로 쫓아냈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부하들이 본격적인 전투를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3일은 어떻게 막아내었지만 14일에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면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제11사단은 13일 밤에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알로스타를 떠나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구룬으로 철수했다. 후위를 맡은 제6여단의 제1/8펀자브대대가 구룬에 도착한 것은 14일 정오였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케다 강을 건너 알로스타를 점령했다. 이로써 북부 말레이에서 가장 큰 비행장을 보유한 알로스타도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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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지트라 전투(3) - 분석

 

지트라의 패배는 말레이의 영국군에게 치명적었다. 일본제5사단의 주력은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전차 1개 중대와 산포 1개 중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대대 2개로 이루어진 사에키 정진대는 준비된 방어선에 포진하고 있던 제11인도사단을 36시간 만에 패배시켜 몰아내었다.

제11인도사단의 피해는 심각했다. 제15보병여단의 병력은 1/4 이하로 줄었으며 제6여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제28여단의 1개 대대는 중대 규모로 쪼그라들었고 2개 대대는 각각 100명 정도의 병력을 상실했다. 영국군 보병여단의 정수가 3,010명, 보병대대의 정수가 786명, 보병중대의 정수가 124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최소한 3,000 명 이상, 아마도 4,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것이다.

일본의 공식전사인 전사총서는 포로 심문 결과를 토대로 영국군이 1,000 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제11인도사단이 상실한 병력의 대부분은 사상자나 포로가 아니라 탈주병임을 알 수 있다. 사에키 정진대의 피해는 전사 27명, 부상 83명으로 합계 110명이었다.

야포와 차량을 비롯한 장비 손실도 막심했다. 일본군이 노획한 장비만도 야포, 박격포 및 대전차포 51문, 기관총 50정, 브렌건캐리어를 포함한 각종 차량 210대에 달했다. 상실한 병력 및 장비의 보충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11사단의 전투력은 크게 저하되었다.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져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사단이 제풀에 붕괴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투우사 작전이 지트라 패배의 한 원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투우사 작전 준비 때문에 지트라 방어선의 건설이 부진해졌고 병사들은 가뜩이나 모자라는 훈련 시간에 방어전이 아닌 이동과 공격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지휘관들 또한 케다 주 방어에 대한 주의가 흐트러졌다.

개전 초반에 지휘체계의 무능과 혼란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병사들은 개전과 동시에 싱고라로 진격할 것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석연찮은 지연 후에 지트라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게다가 폭우로 인하여 참호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지트라 방어선 전방에 2개 대대를 배치한 것도 실수였다. 강행정찰대가 사다오에서 일본전차를 만난 덕분에 적에게 전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전차를 본 적도 없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미숙한 2개 대대를 제한적이나마 대전차호를 갖춘 지트라 방어선 전방으로 보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결국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에 의하여 초반에 2개 대대를 상실함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사단예비대가 사라졌다.

 

(지트라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8-209)

 

영국군의 훈련도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말레이의 영국군은 지속적인 우유짜기로 경험많은 장병을 대부분 빼앗기고 그 빈자리를 미숙한 장병으로 채웠다. 부대의 도착 시기가 제각각이라 훈련도 힘들어 사단훈련은 커녕 여단훈련도 해보지 못한 채 개전을 맞았다. 각급 지휘관과 참모들 또한 경험과 훈련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실전에서 잘못된 보고가 난무하고 지휘관이 보고의 진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가뜩이나 부족한 예비대를 엉뚱하게 전개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반면 일본군의 기동 속도, 장애물 극복 능력, 그리고 전차의 과감한 사용법 등은 영국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비록 숫적으로는 우세하지만 훈련이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영국군이 강력한 기갑전력이나 항공력의 도움없이 버텨내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영국군의 대전차포는 일본전차에게 치명적이었고 숫자도 충분했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지트라에서 제11인도사단은 방어선을 너무 넓게 폈다. 일본군이 전차를 활용하려면 도로를 따라 남하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11사단은 11km 가 넘는 정면에 포진하여 병력밀도가 떨어졌다. 게다가 초반에 2개 대대를 잃으면서 사단 예비대가 사라졌다. 따라서 일본군이 동쪽의 제15여단을 집중 공격하자 여단장들은 사단장에게 예비대를 요청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병력을 융통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태에서 방어선이 뚫리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병사들 사이에 공포와 혼란이 발생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돌이켜보면 12월 12일 아침에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이 구룬으로의 철수를 요청했을 때 허가했어야 했다. 비록 잘못된 정보로 인한 요청이었지만 12일 오전에 허가가 나서 저녁이 되기 전에 철수를 시작했으면 제11인도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12일 저녁부터 일본군 주력이 전장에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11사단의 전력으로 버텨봐야 13일 오전까지가 한계였다. 실제로 일본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은 12일 정오경 지트라에 도착했고 오후 1시 35분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르면 그날 밤을 기하여 보병제41연대는 동쪽, 보병제11연대는 서쪽방어선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준비가 늦어져서 12일 밤에 제11인도사단이 철수할 때까지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늦어도 13일 아침부터는 일본군 2개 보병연대가 공격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제11사단이 13일 오후까지 지트라 방어선에서 버텨냈을 확률은 거의 없다.

 

12일 저녁에 철수허가가 떨어지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통신 문제 때문에 야간 철수는 많은 혼란과 손실을 가져올 것이었다. 그렇다고 13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는 일본군의 추격과 공습으로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특히 케다 강의 다리에서 교통체증이 일어난 상태에서 일본군의 공습과 추격을 받게되면 사단 자체가 괴멸할 수 있었다. 머레이-라이언 사단장은 결국 야간철수를 결심했고 철수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영국군 공식전사는 당시 상황에서 야간철수가 그나마 손실을 줄인 옳은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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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지트라 전투(2) - 철수

 

지트라 방어선에 대한 사에키 정진대의 공격은 1941년 12월 12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새벽 3시 30분에 일본군 선두가 도로 교차점을 지키던 제1레스터셔대대의 우익 중대를 공격하자 영국군은 야포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오전 5시에 수색제1중대가 제1레스터셔대대와 제2/9자츠대대 사이를 뚫고 들어와 영국군의 포병전방관측소를 점령했는데 그 직후 영국군 야포 사격으로 수색제1중대장을 비롯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진격이 좌절되었다. 그러자 사에키 중좌는 수색제2중대와 전차, 이어서 제41연대 제2대대까지 정진대의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교두보를 강화했다. 오전 9시에는 일본제5사단의 포병 1개 대대가 전선에 도착했다. 일본군 포병대대는 곧 대포병사격을 실시하여 영국군 야포를 침묵시켰다.

 

일본군이 제15여단의 방어선을 파고들자 임시로 제15여단을 지휘하던 제28여단장 카펜데일 준장은 다시 제6여단장 레이 준장에게 요청하여 제1/8펀자브대대의 본부중대와 2개 중대를 빌려 반격에 투입했다. 제1/8펀자브대대는 반격을 위하여 기동하다가 제2/9자츠대대본부를 일본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아군끼리 교전이 벌어졌다. 혼란을 수습한 제1/8펀자브대대는 오전 10시에 반격을 실시했으나 이미 늦었다. 반격을 결심했을 당시 일본군 1개 중대가 장악하고 있던 교두보에는 이제 전차를 포함하여 2개 대대 규모인 사에키 정진대의 대부분이 들어앉아 있었고 화력지원을 담당해야 할 영국군 야포는 일본군의 대포병사격으로 침묵한 상태였다. 결국 제1/8펀자브대대의 반격은 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

 

(지트라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8-209)

 

제11인도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아침에 제15여단을 사찰하러 갔다가 일본군이 이미 제15여단 방어선의 우익을 우회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들었다. 일본군이 제15여단을 포위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구룬으로 철수하겠다며 허가를 요청했다. 당시 싱가포르에 있던 히스 중장은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과 의논한 후 철수를 불허하고 지트라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12일 오전에 제15여단 방어선 중간에 교두보를 만들고 틀어박혀 있던 사에키 정진대는 영국군의 포격에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 포병대대가 도착하여 영국 야포를 침묵시키고 이어서 오전 10시에 실시된 제1/8펀자브 대대의 반격까지 물리치자 정진대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사에키 정진대는 12일 정오부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격을 시작하여 도로 동쪽을 지키던 제2/9자츠대대의 좌익 중대를 남동쪽으로 밀어냈다. 이어서 제1레스터셔대대의 우익을 공격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진대는 남쪽으로 빠져 오후 2시 30분에 바타 강 남안에 포진하고 있던 제2/2구르카소총대대와 총탄을 주고 받았다. 구르카대대의 눈앞에서 바타 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걸 깨달은 일본군은 방향을 꺾어 바타 강의 북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다. 레스터셔대대를 포위하려는 생각이었다. 위험을 깨달은 제6여단장 레이 준장의 긴급명령에 따라 제2이스트서레이 대대에서 브렌건캐리어 소대를 파견했다. 사에키 정진대는 오후 3시에 브렌건캐리어 소대의 날카로운 반격을 받고 약 1.6km 서쪽으로 진출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일본군이 레스터셔대대를 포위할까봐 걱정이 된 카펜데일 준장은 오후 3시 15분에 레스터셔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림바와 파당을 거쳐 바타 강 남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레스터서 대대장은 반발했다. 그때까지 대대의 사상자는 약 3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후방을 위협하던 일본군은 이스트서레이 대대에서 파견한 브렌건캐리어 소대에 막혀 멈추어 있었다. 무엇보다 대대가 철수해야 할 바타 강 남쪽, 제2/2구르카대대의 좌익은 그냥 논일 뿐 아무런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펜데일 준장의 강경한 명령에 따라 레스터셔대대는 오후 4시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6시에 완료했다. 새로 도착한 곳에는 전화선도 없어서 대대본부는 휘하 중대 및 여단사령부와 전령을 통하여 연락해야만 했다. 

레스터셔대대의 철수에 맞추어 우익의 제2/9자츠대대도 철수명령을 받았다. 자츠대대도 오후 6시까지 바타 강 남쪽으로 철수했는데 우익 중대에는 철수 명령이 도달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대대본부는 우익 중대가 전멸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전선 시찰을 마치고 승게파타니 부근의 사령부로 돌아가던 제11인도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오후 6시에 바타 강 남쪽의 탄종 파우 부근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일본군 전차가 이미 바타 강을 건넜다는 것이었다. 6시 30분에 사령부에 돌아와 보니 더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터셔대대와 자츠대대가 철수 중 공격을 받아 전멸했으며 일본군은 바타 강 남쪽의 케루비에 주둔한 제2/16펀자브대대의 2개 중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서쪽 멀리에서는 아직까지 제11사단 관할이던 크로부대가 약 350명으로 줄어든 채 크로를 내주고 발링으로 통하는 도로를 방어 중이라는 소식도 들어왔다. 이 중 크로부대를 제외하고 모두 잘못된 보고였으나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철수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다시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철수허가를 요청했다. 히스 중장은 퍼시발 중장과 상의한 후 주저하면서 철수를 허락했다. 12일 오후 10시에 알로스타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자정부터 억수같이 퍼붓는 비 속에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철수는 무질서하게 실시되었으며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전령이  퍼붓는 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제1레스터셔대대의 2개 중대, 제2/9자츠대대의 1개 중대 그리고 제2/1구르카 소총대대 분견대가 철수 명령을 듣지 못했다. 이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삼삼오오 황급히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장비를 거의 다 잃었다. 철수 행렬로 도로가 막히자 일본군에게 따라잡힐 것을 두려워한 부대들이 도로를 벗어나 야지를 횡단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장비를 상실했다. 2개 중대는 해안으로 나아가 주정을 타고 남하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정 일부가 침몰했고 일부는 조류에 밀려 수마트라까지 떠내려 갔다. 야포와 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장비가 진흙에 빠진 채 버려졌다. 

 

영국군의 철수를 알아차린 일본군은 추격하기 위하여 자정이 막 지난 13일 새벽에 바타 강의 다리로 접근하다가 후위를 맡은 제2/2구르카소총대대의 사격을 받고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일본군이 움찔하는 사이 구르카대대는 13일 오전 2시에 바타 강의 다리를 폭파하고 오전 4시 30분에 일본군과의 접촉을 끊고 남하했다. 이로써 지트라 방어선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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