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히스 중장의 실수
1941년 12월 18일에 영국, 미국, 네덜란드, 호주 및 뉴질랜드 대표가 싱가포르에 모여 싱가포르 지역상 더프 쿠퍼의 사회로 연합군의 향후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더프 쿠퍼는 이 회의의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영국참모본부에 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에 전개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1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제9 및 제11사단의 보충병, 경전차 50대, 1개 대전차포대, 대량의 야포탄 및 소화기탄, 3개 경대공포연대, 2개 중대공포연대, 4개 전투비행대대, 4개 폭격비행대대가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하며 일본군의 예비대가 투입되면 추가 증원이 필요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일본기가 증원군을 실은 수송선단을 공격하는데 말레이 중부의 비행장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을 최대한 북쪽에서 막아야 한다는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의 의견을 승인했다.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방어를 위하여 윌리엄 글래스포드 소장의 미함대를 중심으로 연합함대를 꾸려 마카사르 해협과 셀레베스 해를 초계하도록 결정했다.
더프 쿠퍼는 별도로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의 민방위 체제가 불만족스럽다며 여러 기관에 나누어진 민방위 권한을 통합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12월 31일에 싱가포르 전쟁회의는 말레이 사령부의 공병사령관 이반 심슨 준장을 민방위 사령관(Director General Civil Defense=DGCD)으로 임명했다. 민방위 사령관은 전쟁회의에 직속되어 조호르 주와 싱가포르의 민방위 업무에 관하여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 민방위 사령관 임명은 실패였다. 조호르 주정부가 민방위 사령관의 권한을 거부함에 따라 심슨 준장의 권한은 싱가포르 섬으로 한정되었다. 더 큰 문제는 심슨 준장 자신이었다. 심슨 준장은 싱가포르같은 대도시가 상습적으로 공습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방위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민방위 문제는 던져두고 말레이 사령부의 공병 사령관으로서 싱가포르의 방어시설 건설에 공병대의 한정된 역량을 집중시켰다.
(페락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27)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으로부터 페락강 방어를 명령받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은 크리안강 방어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따라서 크로 방면에서 큰 피해를 입은 상태로 셀라마를 지키고 있던 제3/16펀자브대대는 20일에 일본군과 접촉했을 때 이미 철수허가를 받아둔 상태였다. 20일 저녁에 보병제9여단(가와무라 사부로 소장) 중심의 가와무라 지대가 제3/16펀자브대대의 측면을 포위하려 하자 대대장 헨리 무어헤드 중령은 울루사펜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28여단도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기 위하여 다리를 끊고 니봉테발과 바간세라이를 잇는 도로를 침수시킨 후 바간세라이로 후퇴했다. 이로써 크리안강 방어선도 무너졌다.
그동안 제12여단은 그릭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일본군 안도지대와 싸우고 있었다.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19일에 아길대대에 1개 야포중대(troop)를 붙여 쿠알라캉사르로 파견했다. 또한 아길대대의 연락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5/2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를 코타탐판에 파견했다. 19일 오후에 아길대대와 제1독립중대는 섬피탄 북쪽에서 안도지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저녁이 되자 렝공까지 밀려났다.
(그릭도로 전투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37)
20일에 안도지대는 아길대대의 전면에 공격을 가하면서 일부 병력을 뗏목에 태워 코타탐판에 상륙시켜 포위하려고 했다. 펀자브중대의 분전으로 포위는 면했지만 렝공이든 코타탐판이든 오래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20일 저녁에 그릭도로의 영국군은 모두 방죽길을 통해 55이정표 지역으로 철수한 다음 방죽길을 폭파했다. 파리스 준장은 일본군이 강이나 호수를 이용하여 우회하지 못하도록 제5/2펀자브대대를 첸데로 호수 동안의 발전소로 파견했다. 제5/2펀자브대대는 20일 밤늦게 발전소에 도착했다.
21일 오전에 히스 중장은 페락강 서쪽 및 북쪽의 모든 영국군 부대는 자정을 기하여 제11사단 휘하에 들어간다는 명령을 내렸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작전 협의를 위하여 카티로 가서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과 회담했다. 파리스 준장은 아길대대를 카티로 후퇴시키고 케란탄에서 막 도착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를 플러스강을 건너 승게시풋에 이르는 도로에 전개했다고 보고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이제 페락강의 서쪽 및 북쪽에 있는 모든 부대를 페락강 너머로 철수시킬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날밤 제28여단은 라윈 지역으로 철수했으며 제3기병연대가 페락강 서안을 따라 블란자에 이르는 도로를 감시했다. 제2/1구르카소총대대는 1개 산포대 및 1개 대전차중대의 지원을 받아 부교가 설치된 블란자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22일 오전에 다시 제12여단을 방문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첸데로 호수 동안의 발전소를 지키던 제5/2펀자브대대가 밤새 캄퐁사욱으로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일본군이 강을 따라 우회해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22일 하루종일 전선이 조용하자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일본군이 제12여단을 우회한 후 플러스강을 건너 바로 승게시풋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하고 페락강 서쪽 및 북쪽의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22일 밤에 제12여단이 승게시풋으로 철수했고 이어서 라윈 지역에 있던 제28여단이 이스칸다르 다리를 건너 철수했다. 23일 동이 트기 전에 블란자를 지키던 제2/1구르카대대를 제외한 모든 영국군이 페락강 너머로 철수했고 이후 이스칸다르 다리와 엥고 다리를 폭파했다. 블란자를 지키던 구르카대대도 23일 밤에 폰툰으로 만든 부교를 건너 철수한 후 부교를 폭파했다. 영국군이 페락강 너머로 철수하면서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일본제25군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페락강 도하시 상당한 저항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폭이 수십m에 달하는 페락강은 개전 이래 일본군이 만난 가장 커다란 자연장애물이었으므로 영국군이 페락강 도하를 팔짱끼고 바라보기만 할 리가 없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태국에서 남하하여 23일에 타이핑에 도착한 근위제4연대를 쿠알라캉사르 방면에 배치하고 제5사단을 블란자 방면에 배치했다. 차기 작전을 위하여 근위제4연대는 쿠알라캉사르 부근의 페락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히스 중장이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애당초 캄파르까지 후퇴하기를 원했던 히스 중장은 페락강 방어선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는 제11사단을 페락강에 배치하여 일본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대신 강에서 떨어진 승게시풋-시푸테 사이의 도로에 전개하여 휴식 및 재편성을 실시했다. 말레이항공사령부는 일본군의 페락강 도하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일본군은 저항없이 페락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일본군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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