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항공작전(1941년 12월 후반기)


제3군단이 무다강에서 페락강으로 철수하는 동안 일본기들은 영국기들이 북부말레이의 비행장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이포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 결과 19일이 되자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비행장이 영국기가 작전 가능한 가장 북쪽 비행장이 되면서 다른 비행장에서 철수한 인원, 장비, 그리고 보급품이 집결했다.


영국군의 계획은 비행장을 포기할 때 건물을 파괴하고 활주로에 구멍을 뚫고 수송이 불가능한 보급품, 탄약, 연료는 폭파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 폭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종간 의사소통의 혼선으로 인하여 연료를 남겨두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옥탄가 90의 항공유 90만 리터가 승게파타니 비행장에서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계획대로 활주로에 구멍을 뚫어도 일본군은 빨리 수리했다. 활주로 옆에는 수리용 자갈이 쌓여 있었는데 이것은 옮기거나 폭파하기가 곤란했으며 활주로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도 충분했다. 영국군과 달리 노동력을 징발하는데 제약이 없는 일본군은 현지 주민을 총칼로 위협하여 활주로 복구에 투입했다. 20일 아침에 영국군 정찰기가 찍은 승게파타니 비행장 사진에는 약 50대의 일본전투기가 전개해 있었다. 극동항공사령부는 21일 새벽에 싱가포르에서 블레넘 폭격기들을 이륙시켜 승게파타니 비행장을 폭격하려 했으나 날씨가 나빠 포기했다. 다음날인 22일에 일본제3비행집단 사령부는 프놈펜을 떠나 승게파타니로 이동했다.


(나카지마 ki-43 1식 전투기 하야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Nakajima_Ki-43)

 

 

12월 22일에 비행제64전대의 하야부사 18대가 쿠알라룸푸르 비행장을 공격했다. 15대의 버팔로를 장비한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가 3.7인치 대공포 6문, 3인치 대공포 4문과 함께 용감하게 싸웠으나 11대가 격추되고 1대가  지상에서 파괴되는 피해를 입으면서 참패했다. 그리하여 22일 저녁이 되자  비행가능한 버팔로가 3대로 줄어들었다. 격추된 하야부사는 1대였다. 결국 살아남은 버팔로는 싱가포르로 후퇴했으며 23일 아침을 기하여 쿠알라룸푸르 비행장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극동항공사령부는 증원군을 실은 선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마트라의 비행장을 활용하기로 하고 1942년 1월 초에 싱가포르에 파견되어 있던 네덜란드 전투기들을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으로 보냈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당시 말레이의 영국공군은 일본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항공기 숫자도 형편없이 밀릴 뿐 아니라 버팔로 전투기의 성능도 제로기에 밀렸다. 조종사의 숙련도 또한 중일전쟁에서 이미 실전을 겪은 일본군 조종사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원 및 정비체계도 부실했고 북부 말레이의 비행장에는 조기경보체계도 없었다. 게다가 유색인종에 대한 근거없는 우월감 탓에 개전 당시까지도 일본군 항공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1941년 6월까지 일본군 항공력에 대한 연구는 영국해군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 측의 인식이 공군보다는 조금 나았다. 1941년 4월 25일에 런던에서 열린 합동참모회의에서 해군참모차장은 허리케인 전투기를 말레이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군참모차장은 버팔로 전투기로 일본기를 충분히 이길 수 있다면서 반대했다. 1941년 5월에 중국에서 격추된 제로기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노획되었다. 충칭에 파견되어 있던 공군무관이 이 제로기의 성능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합동정보부는 1941년 9월 29일에 이 보고서를 극동항공사령부에 건네주었다. 그러나 극동항공사령부는 이 보고서의 가치를 모른 채 산같이 쌓인 보고서 더미에 처박아 두었다.


(미츠비시 A6M 제로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A6M_Zero)


싱가포르의 전투기 세력은 쿠알라룸푸르의 비행장을 전방 기지로 삼아 제3군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재편성되었다. 버팔로의 기동성을 높이려고 무장과 연료를 제한하여 무게를 450kg 이상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로기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인도차이나에 대기중인 일본군 예비병력이 메르싱이나 쿠안탄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매일 남중국해에 대해 강도높은 정찰비행이 이어졌다. 네덜란드 비행기들은 수마트라의 해안선에 대한 기습 상륙에 대비하여 정찰했다. 이러한 정찰에서 말레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 주정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본군이 낮에는 주정을 숨겼다가 밤에만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버팔로를 일본군이 장악한 북부 말레이에 보내어 귀중한 정보를 수집했다. 12월 26일에 버팔로는 싱고라에서 34척의 수송선이 정박한 광경을 찍어왔고 27일에는 승게파타니 비행장에 120대 이상의 일본기가 전개한 사진을 찍어왔다. 그날밤 싱가포르에서 6대의 블레넘 폭격기가 이륙하여 승게파타니 비행장을 폭격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인 28일 밤에도 폭격을 가했는데 이번에는 1대가 격추되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대단치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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