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후기
1942년 2월 15일 오후 6시 10분에 퍼시발 중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직후 일본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우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하여 일본군에게 2월 16일 날이 밝을 때까지 부대 이동을 금했다. 일본항공부대는 영국군의 해상탈출에 대비하여 해상을 감시했다.
천황은 다음날인 2월 16일에 시종무관을 보내어 야마시타 중장을 치하했다.
16일 아침이 되자 일본제2야전헌병대가 싱가포르 시내에 들어가 치안확보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군 전투부대는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주둔한 자리에서 휴식, 재편성 및 정비를 실시했다. 그 동안 시내에서는 영국과 일본위원들이 합동으로 중요 지점을 접수하고 별다른 충돌이나 불상사없이 영국군의 무장해제를 완료했다.
정부대본영연락회의 결과에 따라 2월 17일에 싱가포르는 소남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2월 18일부터 23일에 걸쳐 중대 및 대대 규모의 일본군이 싱가포르 주변의 작은 섬들에 상륙하여 주둔군의 무장 해제를 실시했다.
야마시타 중장은 2월 21일에 휘하 부대의 점령 지역을 확정했다. 제5사단 보병제9여단장인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이 싱가포르 경비대장이 되어 싱가포르 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가와무라 소장은 제2야전헌병대를 주축으로 보병제11 및 제41연대의 일부 병력을 지휘했다.
근위사단은 싱가포르 시를 제외한 싱가포르 섬의 치안을 맡았다. 제18사단은 조호르로 이동하여 치안을 담당했고, 제5사단은 싱가포르와 조호르를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의 치안을 맡았다.
비전투원을 보호하겠다던 야마시타 중장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 점령 직후인 1942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에 걸쳐 헌병대 주도로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 전역에서 중경 정부에 호의적인 중국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싱가포르 초대 수상 이광요의 주장에 따르면 약 70,000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싱가포르 함락은 일대 재앙이었다.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복은 영연방과 연합진영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영연방 국민 사이에 싱가포르는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인도를 지키는 보루로서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났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상실로 영국해군은 태평양에서 밀려났다. 동양함대는 재건되었으나 1942년 4월에 일본해군이 인도양에 진출하자 다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밀려났다. 이로써 동부 인도양의 제해권이 일본에게 떨어졌으며 실론 섬과 인도 동해안이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말레이 점령으로 일본의 버마 침공이 쉬워졌다. 침공군의 남쪽 측면이 안전해졌으며 랑군을 통하여 해상보급이 가능해졌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싱가포르가 자국 안보의 주춧돌이라는 인식 하에 싱가포르의 건재를 바탕으로 방어 계획을 세웠던 두 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영국에 대한 신뢰를 잃은 두 나라는 이제 미국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급속도로 친미 경향을 띄게 된다.
중국 또한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중국 정부와 국민은 이제 강력한 서방연합군이 일본을 무찌를 것이고 따라서 1937년부터 4년 이상 이어지던 지리한 전쟁도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불과 3달 만에 말레이,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무너지고 이어서 버마까지 함락되면서 중국이 고립되어 버리자 중국인들의 환호는 환멸과 냉소로 바뀌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20개 사단이 넘는 일본육군의 주력을 상대로 4년 이상 항전하고 있는 자신들과 겨우 3개 사단을 상대하면서 불과 70일 만에 말레이를 상실한 영국의 무능함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경제적인 의미도 컸다. 일본은 말레이 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함으로써 주석, 고무, 석유 등 귀중한 전략물자를 획득하여 전쟁 지속 능력이 크게 늘어났다.
싱가포르 함락의 가장 큰 의미는 영국을 위시한 유럽제국의 위신이 실추된 것이다. 일본군이 불과 3개월만에 동남아시아를 휩쓰는 걸 지켜본 아시아인은 백인에게 품고있던 오랜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자각은 4년후 일본이 패배하여 물러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오랜 식민 지배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말레이 전역에서 연합군의 병력 손실은 영국군 38,496명, 호주군 18,490명, 인도군 67,340명 , 말레이 의용대 14,382 명 등 총 138,708명으로 영국공식전사는 이들 중 13만명 이상이 포로라고 기술했다. 포로 중 장성급 주요 지휘관은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 요새사령관 프랭크 시몬스 소장, 제18보병사단장 벡위스-스미스 소장, 제11인도보병사단장 베르톨트 키 준장, 제8호주사단장 세실 캘러헌 준장 등이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싱가포르 상륙 이전까지 말레이 반도 전투에서 일본군이 확인한 영국군 시체는 약 7,000구이다.
제25군 정보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의 진술에 따르면 포로는 약 11만명으로 영국공식전사의 기술과 2만명 정도 차이가 나는데 대부분은 탈영병으로 그냥 인파에 섞여 사라진 경우이다. 일부는 싱가포르 함락을 전후하여 바다로 탈출하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인데 정확한 숫자는 불명이다. 10만이 넘는 포로들 중 많은 수가 버마를 비롯한 각지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혹사당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영국군 공식전사에 따르면 싱가포르 상륙을 앞둔 1942년 2월 8일 현재 일본군의 전력은 전투병력 67,660명, 지원 병력 33,000명, 그리고 육군항공대 10,000 명으로 110,660명이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말레이 전역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전사 3,507명, 부상 6,150명으로 합계 9,657명이다.
노획품도 상당했다. 1942년 2월 말 현재 일본군의 노획품은 야포 약 300문, 대공포 약 100문, 요새포 54문, 대전차포 108문, 박격포 180문, 중기관총 2,500정 이상, 대전차총 63정, 기관단총 약 800정, 소총 약 60,000정, 소총탄 약 3361만발, 기관차 및 화차 약 1,000대, 자동차 약 10,000대, 전차 및 장갑차 200대, 군용전화기 600개, 비행기 10대, 기타 탄약, 연료, 피복, 양식 등 다수이다.
소남도로 이름이 바뀐 싱가포르는 1942년부터 종전까지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는 엄격한 지배를 받았다. 싱가포르는 점령 기간 동안 일본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동남아시아 지배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그 결과 1945년 들어서는 연합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일본이 항복한 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나 말레이 반도는 1957년에 말레이 연방으로 독립했다. 싱가포르는 영국령으로 남았다가 1963년에 말레이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독립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2년 후인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을 탈퇴함으로써 독립국가가 되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1942년 7월 17일에 만주국의 동부 지역을 책임진 제1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싱가포르를 떠났다. 1943년 2월에 대장으로 승진한 야마시타 장군은 1944년 9월 25일에 미군의 침공으로부터 필리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제14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창이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42년 8월에 창이 수용소를 떠나 대만을 거쳐 만주국 지안에서 웨인라이트 등 다른 연합군 고위 포로들과 함께 종전시까지 포로 생활을 했다. 종전 이후 석방된 그는 미주리 함상에서 거행된 항복조인식에 참석했다. 이후 필리핀 바기오로 건너가 자신을 패배시켰던 야마시타 장군의 항복조인식에 참석했고 이어서 싱가포르의 부킷티마에서 열린 싱가포르 주재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에도 참석했다. 1945년 9월 말에 영국으로 귀국한 퍼시발 장군은 1946년에 퇴역했으며 1966년 1월 31일에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45년 9월 2일에 미주리 함상에서 열린 항복조인식에서 맥아더 장군의 서명 순간을 지켜보는 퍼시발 중장. 퍼시발의 오른쪽은 필리핀에서 포로가 된 미육군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Percival)
- 참고 도서 및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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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이프북스 - 회오리치는 일장기> 한국일보-타임라이프사,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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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대하소설 태평양전쟁 1 -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해전> 이호원 지음, 한림출판사, 1975년
<휴맨카인즈 승리와 패배 야마시타 병단> 베리 피트, 백조출판사, 1982년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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