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총평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은 승전국이었으나 인명과 경제력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영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의 군사력을 묶어놓고 미국의 협조를 얻어 해군군축조약으로 일본의 해군력 확장을 저지하면서 군축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군수공장은 민수용 산업으로 전환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숙련공들이 공장을 떠났다.
영국군은 1932년의 상하이 사변과 뒤이은 히틀러의 등장을 계기로 재군비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영국 정부는 망설였다. 처칠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이 본격적으로 재군비를 시작한 것은 1938년이 되어서였다. 민수용 공장을 군수공장으로 되돌리는 것은 몇 년에 걸친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나마 힘들게 생산한 장비 대부분을 1940년 6월 초의 됭케르크 철수에서 대부분 상실했고 이후 영국본토는 독일의 침공 위협에 시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본토가 침공 위협에서 벗어나고 육군이 재건되었으나 이번에는 그리스에서 참패를 당한데 이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과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다. 따라서 영국에게는 1941년 12월 초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머나먼 말레이까지 충분한 장비와 잘 훈련된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고 방어준비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할 여력이 없었다.
말레이 현지에서는 육해공군 및 민간행정기구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아 그나마 주어지는 빈약한 자원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에는 말레이의 육해공군 모두와 민간행정기구까지 완전하게 장악하는 1명의 총사령관을 두어 방어준비를 총괄케 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군에 대한 근거없는 경시 풍조가 있었다. 주로 중국 측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보내온 이러한 잘못된 정보는 인종차별적인 기존 관념과 맞물려 사실인 양 여겨졌으며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보내온 사람들은 친일파 내지는 패배주의자로 몰려 그들의 정보는 무시당했다.
잘못된 정보에 홀린 영국은 일본이 허약한 군대를 가지고 말레이를 침공할 확률이 적다고 보았으며 설사 침공하더라도 막아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침공을 받을 당시 영국군은 스스로가 판단했던 적정 숫자의 1/3밖에 안되는 낡은 항공기와 훈련이 부족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운명은 이때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격군인 일본제25군의 상태는 양호했다. 일본군은 말레이에 심어둔 간첩을 통하여 영국군 수비대의 규모와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격군으로 중국에서 실전경험이 있는 부대를 골랐으며 정글전투를 비롯하여 말레이 전투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여 추가 훈련을 실시했다. 사기 또한 높았다. 총사령관으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무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일본군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제25군은 영국공군의 4배에 달하는 신형기와 유능한 조종사를 보유한 육군항공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해군항공대는 해상보급선을 위협하는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단번에 제거하는 실력을 과시했다. 결론적으로 말레이 전역의 일본군은 비록 숫적으로는 다소 열세였으나 실제 전력은 영국군보다 강했다.
1941년 4월에 말레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퍼시발 중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의 지원을 받아 훈련과 방어진지 건설에 노력했으나 전쟁이 터지기 전에 방어 준비를 마치기에는 인원, 자금, 권한 그리고 시간이 부족했다.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Percival)
말레이 전역은 시작부터 파멸적이었다. 공군은 개전과 동시에 제압되어 일본군이 24시간 내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육군의 경우 투우사 작전이 문제였다. 투우사 작전은 개전과 동시에 태국으로 진격하여 싱고라를 점령함으로써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작전이었다. 제대로 실행된다면 주요 보급항인 싱고라 사용을 거부하여 말레이 전역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작전은 애당초 성공하기 힘들었다. 성공의 관건은 일본군이 싱고라에 상륙하기 24시간 이전에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 태국 국경을 넘는 것이었는데 태국의 중립을 존중하면서 국경을 넘을 타이밍을 잡기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1941년 12월 6일에 일본선단을 발견했을 때가 투우사 작전을 발동할 마지막 기회였으나 국경을 침범하면 일본 측으로 참전하겠다는 태국의 기세에 눌려 영국은 투우사 작전을 발동하지 못했다. 결국 태국의 중립을 무시할 배짱이 없는 한 투우사 작전은 세우지 말았어야 할 계획이었다.
투우사 작전의 존재와 발동 실패는 초기 전투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북부 말레이에 전개한 부대는 방어보다 이동에 적합하게 편성되어 열차와 트럭에 탑승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가뜩이나 부족한 자금은 방어선을 강화하기보다 이동 수단과 연료 등의 보급품을 확보하는데 돌려졌다. 병사들은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방어보다는 이동과 공격 훈련을 받았다. 개전과 동시에 공격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병사들은 석연찮은 지연 후에 공격이 취소되고 폭우로 참호에 물이 들어찬 부실한 방어선에서 방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기가 꺾였다.
일본군이 싱고라에 상륙했다는 소식은 즉시 보고되어야 했으며 이에 따라 즉각 투우사 작전의 취소와 방어태세 전환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정보가 늦게 전달되고 수뇌부가 허둥대면서 8일 오후 1시 30분에야 투우사 작전의 취소와 함께 방어 명령이 떨어졌다. 따라서 일본군은 침공 초기에 천금같은 10시간을 얻었다. 이 지연이 결국 지트라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경우 상황은 단순하다. 영국은 다분히 정치적인 제스처로서 일본이 겁먹기를 바라고 신형전함을 포함한 2척의 주력함을 싱가포르로 파견했다. 포커 게임에서 허풍을 친 셈이었는데 영국의 예상과 달리 스스로가 쥔 패에 자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허풍을 그대로 받아버렸다. 결국 패를 열어야 할 상황이 되었고 결과는 일본해군항공대의 승리였다.
만일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머무를 수는 없었을 것이며 말레이 전투에 큰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2척의 주력함이 자바로 탈출하여 네덜란드 해군 및 미해군 아시아 함대와 합류하였다면 일본군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침공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1941년 12월 13일이 되자 벌써 말레이 전역은 패배의 기운이 높아졌다. 말레이 전투의 승패는 이제 싱가포르로 얼마나 많은 증원군이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에 달렸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증원군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북부 말레이에서 2달 이상 일본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제3군단은 이 임무를 위하여 제9사단을 동원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말레이 상공의 제공권과 주변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요충지 조호르를 포함한 말레이 동해안에 제2의 상륙을 감행할 수 있었으므로 제9사단을 뺄 수 없었다. 따라서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지연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 http://www.unithistories.com/officers/indianarmy_officers_h01.html)
이런 식의 지연 작전에는 미리 만들어진 방어선이 큰 역할을 한다. 만일 간선도로를 따라 요충지마다 대전차 장애물을 포함한 방어선이 미리 건설되어 있었다면 지친 여단이 도착하여 재편성하고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방어선에 의지하여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동안 버티다가 적이 시간을 들여 전력을 정비한 후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려 하면 다시 후퇴하여 다음 방어선에서 버티는 식으로 차츰 적의 힘을 빼면서 효과적으로 시간을 끌어 증원군이 도착하고 전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전쟁 전 몇 달간 공병대와 민간 기술자의 합작으로 간선도로를 따라 축차적인 철수에 필요한 방어선을 건설할 시간이 있었으나 아까운 시간을 활용하지 못했다. 미리 만들어진 후방 방어선이 없는 상황에서 히스 중장은 보충없이 소모되기만 하는 제11사단의 전멸을 막기 위하여 계속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사정없이 추격했다. 접전 지역에서 병력의 우위를 누리고 있던 일본군은 선발 부대가 지치면 뒤따르던 부대를 초월시켜 전진시키는 방법으로 싱싱한 병력을 계속 공세에 투입하여 주도권과 전진 속도를 유지했다. 보병의 체력 소모를 막고 진격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민간에서 대량의 자전거를 징발하여 보급했다.
제25군은 대규모 공병대를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공병대는 영국군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부서진 다리를 수리하여 빠른 진격을 뒷받침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전쟁 전에 입수한 정보를 통하여 다리의 특성과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간에 쫓긴 영국군이 다리만 파괴하고 수리용 자재를 파괴하지 않은 것도 큰 이유였다. 일본군은 전쟁 전의 정보 수집을 통하여 다리 부근에 보수용 목재를 쌓아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영국군과 달리 민간인 동원에 거리낌이 없던 일본군은 필요하면 주변 마을에서 민간인들을 끌고와서 다리 수리에 투입했다. 일본공병대는 싱고라 상륙에서 조호르바루 점령까지 55일 동안 약 250개의 다리를 수리했다.
일본군은 마지막으로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히면 주정을 타고 바다를 통하여 우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11사단은 가끔씩 전투를 치르면서 끝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휴식이나 보충 및 재편성의 기회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후퇴 속에서 병사들은 지쳤고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사기 저하가 슬림강 참패의 일부 원인이었다.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마친 군대라면 후퇴를 하는 도중이라도 어떤 시점에 큰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끝까지 싸울 기회를 주는 것이 끝없는 후퇴보다 사기 유지에는 오히려 낫다.
개전 이후 싱가포르 증원 계획은 제3군단이 최소한 2달 이상 북부 말레이에서 버텨준다는 가정 아래 세워졌다. 그러나 개전 5주일 만에 제3군단은 480km 를 후퇴하여 중부 말레이의 요충지 쿠알라룸푸르를 잃었다. 이제 조호르까지의 후퇴는 불가피했다. 결국 영국군은 충분한 숫자의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1월 중순에 조호르에서 결전을 치러야 했다.
개전과 동시에 인도 및 중동에 산재해 있던 병력이 싱가포르로 향하기 시작했고 무기고에 있던 장비들도 항해를 시작했으나 일본군의 진격이 너무 빨랐다. 결국 증원군은 전세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전장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많은 장비들은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을 때 아직도 인도양을 건너는 중이었다.
항공기의 증원도 난항을 겪었다. 일본군은 침공 초기에 버마 최남단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의 증원 경로를 막았다. 따라서 전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전투기는 항공모함에 싣고 말레이 반도 근처까지 가서 날리거나 수송선에 실려가야 했는데 항모는 다른 곳에서 바빴고 수송선은 너무 느렸다. ABDA 사령관 웨이벌 대장은 말레이 전투는 처음부터 시간과의 싸움이었다며 만일 1달만 더 버틸 수 있었다면 충분한 숫자의 항공기를 전개하여 말레이 상공의 제공권을 되찾고 일본군의 해상보급선을 자른 다음 반격을 가하여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2년 1월 16일에서 24일에 걸쳐 벌어진 조호르에서의 결전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영국군은 가뜩이나 부족한 전력을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결시키지 못한 채 무아르-용펭-바투파핫 삼각형 지역에서 각개격파당하면서 참패했다.
조호르 참패 이전인 1월 초부터 런던의 전쟁내각에서는 싱가포르에서 발을 빼고 제18사단과 기타 증원부대를 버마로 보내자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옳은 판단이었으나 당시에는 실행이 불가능했다. 싱가포르가 자국 안보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믿고 있던 호주와 뉴질랜드는 절대로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때 영국정부가 싱가포르를 포기하고 증원선단을 버마로 돌렸다면 이후 추축국에 대항하는 영연방의 공동 전선이 붕괴했을 가능성도 있다. 처칠로서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조호르에서의 참패로 해군기지의 사용은 불가능해졌다. 이제 남은 길은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하여 최대한 오래 버팀으로써 일본군의 해군기지 사용을 거부하고 말레이에 전개한 일본군을 최대한 오래 붙잡아 두어 다른 방면에 사용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이것 또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었으나 퍼시발 장군의 판단 착오로 일본군의 상륙을 허용했고 이어진 영국군 수뇌부의 잇단 실책으로 1주일 만에 항복했다.
(싱가포르 섬 전투에 대한 분석은 여기로)
웨이벌 대장은 항복 이틀 후에 싱가포르 섬에서 장기 항전을 하려면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어서 민간인을 주저없이 작업에 투입하면서 동시에 강철같은 의지와 신념을 가져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에게 섬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자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퍼시발 중장이 그런 인물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누구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면 장기 항전이 가능했을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해군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할 때부터 싱가포르가 함락될 때까지 20년 간의 비극적 이야기에서 일관된 점은 협조 부족이다.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 미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가 1930년대 후반에 협조를 잘 했다면 일본이 침공할 생각을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4개국의 이해관계는 늘 어긋났고 일본의 위협이 가시화된 후에도 행동이 통일되지 않았다. 시야를 말레이 내부로 좁혀봐도 마찬가지이다. 말레이 행정 당국과 군 당국, 그리고 군대 내에서도 육해공 삼군 사이, 또한 백인 지배층과 말레이 인, 그리고 말레이의 중국인 사이에는 해군기지 건설부터 싱가포르 함락에 이르는 전 기간에 걸쳐 항상 일본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자세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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