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남부 필리핀 항복

남부 필리핀을 담당한 비사야-민다나오군의 항복을 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것이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지휘관 중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회복이 불가능할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따라서 항복할 생각도 없었다.

일본군은 남부 필리핀에서 3개의 섬(세부, 파나이, 민다나오)에 상륙했을 뿐이었다. 세부와 파나이의 현지 지휘관은 일본군에게 패했지만 주력을 보존하여 안전한 산악지대로 철수했고 언제까지라도 게릴라전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세부와 파나이에 상륙했던 병력을 포함하여 남부 필리핀에 파견된 일본군은 민다나오에 집결하여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관 샤프 장군의 부대를 격파했지만 주력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샤프 장군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아직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이미 지역 지휘관들은 샤프 장군의 명령에 따라 게릴라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샤프 장군은 1942년 5월 6일 오전에 2개의 명령을 받았다. 하나는 웨인라이트 장군으로부터 온 것으로 비사야-민다나오군을 필리핀주둔미군사령부의 지휘에서 빼내어 맥아더의 직접 지휘 아래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맥아더로부터 온 것인데 웨인라이트의 항복이 임박한 것은 알았으나 그가 샤프 장군에게 보낸 명령은 모르는 상태에서 작성한 것으로 내용은 동일했다. 즉 앞으로는 웨인라이트의 명령을 받지말고 맥아더 자신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비사야-민다나오군은 맥아더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7일 밤늦게 웨인라이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지휘권을 다시 행사하면서 항복하라고 명령하자 샤프 장군은 맥아더 사령부에 문의했다. 호주로부터 날아온 회신은 명확했다. 웨인라이트의 명령은 근거가 없으며 샤프 장군은 맥아더의 명령을 따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회신에서 맥아더는 샤프에게 휘하 부대를 잘게 나누어 게릴라전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코레히도르 수비대를 처형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일본군이 그런 위협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다. 전후에 벌어진 혼마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퓨 중령과 드레이크 장군은 처형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웨인라이트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이 없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이미 항복한 병사들을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처형 위협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물론 혼마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웨인라이트의 공포가 단순히 개인의 과잉반응이었다고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많은 장교들도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코레히도르에 억류된 장교들 사이에는 일본군이 지정한 날짜까지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하루에 10명씩 항복할 때까지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일본군이 그런 계획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없고 그 소문을 일본군이 퍼뜨렸다는 증거도 없지만 적어도 당시 처형에 대한 공포를 웨인라이트만이 가지고 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5월 8일이 되자 샤프 장군은 고민에 빠졌다. 공식적으로는 웨인라이트의 방송을 무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그랬을 경우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운명에 관해 웨인라이트와 같은 처형의 공포를 느꼈다. 결국 그는 웨인라이트가 파견한 트레이윅 대령을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트레이윅을 기다리는 동안 샤프는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휘하의 섬사령관들에게 자신의 지휘를 벗어나 게릴라전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샤프 장군은 10일 오후에 사어 하이웨이 상의 말라이발라이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에서 트레이윅 대령과 하바 중좌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트레이윅은 샤프에게 웨인라이트의 명령문을 전달하면서 만일 항복을 거부한다면 코레히도르 수비대 11,000명은 처형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샤프는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샤프 장군은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웨인라이트와 같은 처지에 빠졌다. 그는 이미 포기한 지휘권을  다시 확립하고 휘하 지휘관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해야 했다. 샤프는 트레이윅과의 회견을 마친 직후 휘하 사령관에게 무전을 보내어 이틀 전의 지휘권 포기 명령을 철폐하고 휘하 지휘관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이미 암호기를 파괴했기 때문에 이 명령은 평문으로 발신했다. 샤프는 오후 7시 15분에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어 대단히 심각한 이유 때문에 항복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다음날인 11일에는 섬지휘관에게 보내는 샤프의 명령문을 가진 전령이 출발했다.
웨인라이트는 5월 11일에 돌아온 트레이윅으로부터 샤프가 항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처형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샤프의 부하들은 널리 흩어져 있었으며 결정적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 필리핀 사람인 그들은 일본군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다.  만일 위험하고 고된 게릴라전을 펼 생각이 없을 경우 대부분 현지에서 징집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므로 구태여 항복하여 일본군의 자비를 구하면서 자유를 박탈당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에게 샤프의 항복명령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민다나오의 지휘관들은 대체로 항복명령을 따랐으나 필리핀인 장교와 병사들은 대부분 항복보다는 탈영을 택하여 집으로 돌아가거나 게릴라전을 펼쳤다.

세부에 주둔하던 치노웨스 장군의 항복은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치노웨스는 5월 7일 밤에 웨인라이트의 항복방송을 들었고 8일에는 샤프 장군으로부터 그의 지휘를 벗어나 게릴라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더니 10일 오후에 샤프로부터 이틀 전의 명령을 철회하고 항복하라는 무전이 들어왔다. 그 직후  세부의 일본군 지휘관이 목숨이 아까우면 항복하라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내왔다.

일련의 사태를 돌아본 치노웨스는 10일 들어온 샤프의 무전이 일본군의 조작이거나 아니면 샤프가 협박당하여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1일과 12일에 민다나오와 조심스럽게 무전을 주고받은 결과 상대가 샤프 장군이 아니거나 만일 맞다면 일본군의 총검 앞에서 떨면서 통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3일에 네그로스군 사령관인 힐스먼 대령이 보내온 무전이 그의 판단을 뒤집었다. 힐스먼은 샤프 장군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면서 곧 세부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이 가짜로 무전을 치거나 샤프 장군을 협박하여 무전을 보내도록 강요할 순 있어도 속임수로 전령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치노웨스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켰다. 샤프가 맥아더와 통신한다는 걸 알고 있던 그는 항복명령이 맥아더의 뜻이라고 착각했다. 치노웨스는 15일에 세부에 도착한 전령을 만나 샤프가 보낸 사람이 맞다는 걸 확인하자 다음날인 16일에 항복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던 시절은 물론 종전 이후인 1949년 2월까지도 자신이 맥아더의 뜻에 따라 항복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크리스티 대령이 지휘하는 파나이군은 게릴라전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었다. 병력은 잘 조직되었고 훈련 상태도 양호했으며 식량은 풍족했고 근거지는 안전했다. 파나이군은 이미 몇번의 치고 빠지는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일본군의 반격 시도를 맞받아쳐 큰 피해를 입히면서 좌절시켰다. 일본군은 해안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륙으로는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크리스티 대령은 언제까지라도 게릴라전을 지속할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5월 10일에 샤프 장군으로부터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크리스티 대령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샤프에게 답신을 보내어 자신에 대한 샤프의 지휘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크리스티는 오직 맥아더의 명령에 의해서만 항복할 것이며 그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내리는 항복명령은 모두 반역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문장으로 통신을 끝냈다.

샤프 장군은 11일에 다시 통신을 보내어 자신의 항복결정을 맥아더도 알고 있다면서 사이어 대령이 자신의 편지를 들고 파나이로 갈테니까 그를 만나라고 말했다. 크리스티 대령은 12일에 다시 강경한 답신을 보냈다. 그는 샤프가 자신에게 항복명령을 내리는 것은 반역행위라고 재차 주장하면서 과연 항복명령을 내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맥아더나 전쟁부에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 대령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말로 통신문을 끝맺었다. 그뒤로도 둘은 매일같이 무전기로 날선 공방을 벌였다.

무전기를 통해 샤프와 크리스티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5월 12일에 민다나오를 떠난 사이어 대령이 18일에 파나이에 도착했다. 그는 크리스티 대령을 만나 샤프 장군의 편지와 웨인라이트가 샤프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건넸다. 샤프 장군은 편지에 통신과는 전혀 딴판인 정중하고 간곡한 어조로 섬사령관들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웨인라이트는 물론 샤프 자신의 항복도 받아들여진 상태가 아니라고 적었다. 사이어 대령은 만일 섬사령관들이 항복을 거부하면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처형될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는 샤프와 같은 고민에 빠졌다. 항복을 거부하고 파나이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코레히도르 수비대 11,000명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있는 일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크리스티는 19일 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많았던 그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21일에 항복하겠다고 말한 다음 만 하루 이상을 아무런 명령없이 내버려 두었다. 부하들은 그의 뜻을 알아챘다.  21일 아침에 크리스티 대령이 항복했을 때 부하들의 90% 가 게릴라전을 펴거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탈영한 상태였다.

레이테와 사마르를 관장하던 코넬 대령도 5월 10일자 항복명령을 거부했다. 그가 책임진 섬에는 일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따라서 패배한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20일에 샤프 장군의 전령이 도착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코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또한 항복하기 전에 부하들에게 탈영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5월 26일에 코넬 대령이 항복했을 때 2,500명에 달하던 그의 병력 중에서 항복한 인원은 그를 포함한 미국인 장교 11명, 필리핀인 장교 40명, 그리고 필리핀인 부사관 및 병 20명 뿐이었다.

네그로스를 책임진 힐스먼 대령은 섬을 5개 지구로 나눈 후 각 지구마다 1개 대대를 배치했다. 대대마다 식량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이 균등하게 배분되었으며 대대장들은 게릴라전 수행을 위하여 연대 지휘로부터 벗어났다.
힐스먼 대령은 5월 10일의 항복명령을 거부했고 13일에 전령을 만난 이후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샤프 장군은 찰스 험버 중령에게 편지를 들려 다시 네그로스에 보냈다. 18일에 험버 중령이 네그로스에 도착하여 샤프의 편지를 건네주면서 간곡히 요청하자 힐스먼은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샤프의 명령에 따르면 힐스먼은 5월 20일에 인접한 파나이의 일로일로에 가서 항복해야 했으나 불가능했다. 이미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던 대대장들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힐스먼은 네그로스에 남아서 대대장들을 설득하기로 하고 부사령관인 카터 매클레넌 대령이 험버 중령과 함께 일로일로에 가서 일본군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매클레넌 대령이 20일 밤에 일로일로에 도착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일본군 지휘관 오타 구마타로 대좌가 자신이 직접 항복을 받겠다면서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네그로스 서해안에 상륙했다.  맥클레넌 대령과 동행한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나 오타 대좌는 기선을 제압한답시고 상륙하면서 사방에 총질을 했다.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일본군의 오만방자한 행동은 네그로스 주민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항복을 강요당해 기분이 나빴던 네그로스 주민들은 일본군이 상륙하면서 함부로 총질을 해대자 격분하여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지금까지 용인해오던 일본인의 상점을 때려부수고 200명에 달하는 네그로스의 일본민간인을 몽땅 구금했다. 필리핀군은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일부는 가세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오타 대좌도 당황했지만 더 놀란 것은 미군이었다. 일본군의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필리핀인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일본민간인이 살해당한다면 일본군이 어떤 보복을 가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다급해진 힐스먼 대령과 대대장들의 노력으로 구금된 일본민간인이 해를 입는 일은 막았지만 소요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필리핀에서 케손 대통령을 대리하던 마누엘 로하스 준장이 직접 네그로스에 가서 간곡히 호소하고 샤프 장군이 일본군의 동의를 얻어 이번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어떠한 처벌도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이후에야 소요사태는 진정되었으며 구금되었던 일본민간인들도 석방되어 일본군에 인계되었다.

소요사태는 가라앉았지만 힐스먼 대령은 여전히 휘하 대대장들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번이나 연장된 항복시한의 마지막날인 6월 3일에 힐스먼 대령이 이끌어 낸 결과는 1개 대대의 병력 95%, 그리고 다른 2개 대대의 병력 30%가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2개 대대는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따지고 보면 전체 병력의 30% 남짓만이 항복하는 셈이었으나 소요사태로 혼쭐이 난 오타 대좌는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후 1주일에 걸쳐 남아있던 수비대가 차례로 항복하면서 6월 9일이 되자 고립된 소규모 병력을 제외한 필리핀의 모든 병력이 항복했다. 일본군이 이날 필리핀을 점령했다고 선포하면서 필리핀주둔미군사령부는 소멸했으며 웨인라이트 장군도 이날을 기하여 공식적으로 전쟁포로의 신분이 되었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 장군들. 1942년 7월에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무어 장군, 킹 장군, 웨인라이트 장군, 일본장교 2명, 파커 장군, 존스 장군. 뒷줄 왼쪽부터 일본군 전령, 로우 장군, 풍크 장군, 위버 장군, 브라우어 장군, 비브 장군, 블루멜 장군, 드레이크 장군, 맥브라이드 장군, 피어스 장군, 호프먼 대령(통역), 일본군 2명.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2.html#32-3 P.583

 

이로써 필리핀을 둘러싼 6개월 간의 전투가 끝났다. 원래 1942년 2월 중순까지 끝마치기로 되어 있었지만 4달을 더 끌었으며 그 결과 일본군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손실을 입었다. 실망한 대본영은 혼마 장군을 제14군사령관에서 해임하여 도쿄로 소환했다. 이후 혼마는 한직으로 밀려났으며 1943년 8월에 예편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극동 제일의 양항인 마닐라항을 얻었다. 또한 필리핀은 그 자체로 남방자원지대와 일본본토 사이의 항로를 보호하는 강력한 기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140,000명에 달하는 미-필리핀군을 격파했고 미극동항공대와 아시아함대를 말레이 방벽에서 쫓아내었다.

필리핀 전역에서 제14군이 획득한 포로는 83,631명이며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 12대, 전차 및 장갑차 77대, 평사포 314문, 곡사포 63문, 야포 및 산포  152문, 대공포 83문, 대전차포 23문, 기타 경포 116문,  중기관총 443정, 경기관총 871정,  소총 58,500정.

물론 여기에는 댓가가 따랐다. 제14군은 필리핀 전역에서 전사 및 행방불명 2,772명, 부상 5,3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환자도 18,000명에 달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패배했지만 6개월에 걸친 저항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싸우면서 중요한 전쟁 초반기에 다른 곳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일본군 전력을 붙잡아 두고 소진시켰다. 실제로 필리핀은 남방작전에서 부차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필리핀 점령을 위하여 다른 어떤 전역보다도 많은 전력을 투입해야 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6개월 동안 일본이 마닐라항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이는 원래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으며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들이 패배한 것은 6개월 내로 그들을 구해야 할 태평양함대가 전쟁 첫날에 진주만에서 대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수비대의 분투가 1942년의 전략 상황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1942년 6월 초까지 일본군은 필리핀을 봉쇄한 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버마를 장악하고 비스마르크 제도를 넘어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까지 도달했으며 동쪽으로는 길버트 제도까지 진출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포트모르즈비와 미드웨이에서 막혔는데 일본군을 저지한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의 의미가 필리핀 전투보다 크다.

그러나 필리핀 전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전투였다. 전쟁 초기의 6개월 동안 연합군은 질풍같은 일본군의 진격 앞에 낙엽처럼 스러졌지만 필리핀 수비대만은 꿋꿋이 버텨내었다. 필리핀 수비대는 일본이 맹위를 떨치던 그 엄혹한 시기에 일본군은 결코 무적이 아니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뛰어난 지휘를 받는 군대는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일본군과 싸워야 할 태평양 지역의 미군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 참고 도서 및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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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사>제러드 L. 와인버그 지음, 홍희범 옮김, 길찾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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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웨인라이트의 항복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항복해야 했던 킹 소장과는 달리 웨인라이트 중장은 항복을 결심할 당시 상부로부터 항복할 권한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루손군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웨인라이트에게도 킹과 마찬가지로 항복할 권한이 없었다. 항복을 막는 명령은 맥아더 장군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도 내려와 있었다. 루스벨트는 1942년 2월 9일에 당시 극동미육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저항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맥아더의 권한과 책임을 이어받은 웨인라이트도 이 명령의 구속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바탄반도의 병력이 항복하자 루스벨트는 전쟁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4월 10일에 웨인라이트에게 전문을 보내어 기존의 항복금지명령을 철회하고 항복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서 맥아더가 14일에 루스벨트의 명령에 의거하여 자신의 항복금지명령을 철회함으로써 웨인라이트는 항복할 권한을 완전히 인정받았다.

1942년 5월 6일 오전 10시 30분에 웨인라이트의 참모장 비브 장군은 자유의 소리 채널을 통하여 항복하겠다고 방송했다.
비브 장군이 항복방송을 하는 동안 코레히도르의 무선통신사들은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관 샤프 장군에게 보내는 웨인라이트의 마지막 명령을 암호로 송신하고 있었다. 웨인라이트는 명령문에서 샤프 장군을 항만방어부대를 제외한 필리핀의 모든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에 임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휘에서 빼내어 맥아더 직속으로 옮겼다. 이로써 웨인라이트는 자신의 항복을 코레히도르와 마닐라만 해상요새로 한정지으려 했다.
항복방송은 10시 30분, 11시 그리고 11시 45분에 영어와 일본어로 반복하여 송출되었으나 일본군은 듣지 못했다.

그동안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파괴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소총을 제외한 모든 화기를 파괴했고 암호를 비롯한 기밀서류와 지도는 불태웠으며 통신기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부쉈다. 재무장교 존 반스 대령은 부하들과 함께 몇 시간에 걸쳐 이백만 페소가 넘는 지폐를 모두 잘랐다. 파괴작업이 끝난 정오가 되자 말린타 터널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말린타 터널 안의 사람들은 한계에 달했다. 더럽고 굶주리고 피곤에 찌든 사람들은 항복소식을 듣고서도 멍한 표정을 지을 뿐 분노나 슬픔을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보급장교는 식량창고를 활짝 열었고 사람들이 몰려가 식량을 가져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가 터지도록 먹은 다음 그 자리에서 곯아 떨어졌다.

정오가 되자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백기가 걸렸고 해상요새들은 포격을 멈추었으며 병사들도 사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일본군도 사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오후 12시 30분에 다시 한번 항복방송을 송출했음에도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의도를 알아들었다는 어떠한 반응도 없자 웨인라이트는 당황했다. 만일 전투가 다시 시작되면 이미 무장해제한 자신의 부하들은 속절없이 학살당할 것이었다. 이제 방법은 항복사절이 일본군을 만나 직접 항복의사를 전하는 것 뿐이었다. 골랜드 클라크 해병대위가 이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통역을 포함하여 4명으로 이루어진 클라크 대위 일행은 침대보를 막대에 묶은 백기를 든 채 지프를 타고 오후 1시에 말린타 터널을 나섰다. 일본군은 클라크 일행이 전선을 통과할 수 있게 허용했다.  잠시 후 클라크 대위는 제14군의 제1과 고급참모 나카야마 대좌와 통역을 만났다. 나카야마는 항복을 하고 싶다면 웨인라이트 장군이 직접 와야한다고 말했다.

클라크 대위가 말린타 터널로 돌아와 나카야마 대좌의 말을 전하자 오후 1시 30분에 웨인라이트가 세단을 타고 터널을 나가 나카야마를 만났다. 웨인라이트가 자신의 항복은 코레히도르와 해상요새에 한정된 것이라고 말하자 나카야마는 화를 벌컥 내면서 필리핀에 있는 모든 병사의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웨인라이트는 그런 문제는 혼마 중장과 직접 담판할 것이며 그 아래 계급과는 논의하지 않겠다고 받아쳤다. 나카야마의 보고를 받은 혼마는 바탄 반도로 데려오라고 말했다.

웨인라이트는 항만방어사령관 무어 소장을 자신의 대리로 지명하여 코레히도르에 남겨두고 참모장 비브 준장, 선임보좌관 존 퓨 중령, 사무보좌관 윌리엄 로렌스 소령, 보좌관 토머스 둘리 소령, 당번병 허버트 캐럴 병장과 함께 보트를 타고 코레히도르를 떠나 오후 4시에 바탄반도 동해안의 캅카벤에 도착했다.

웨인라이트 일행은 오후 4시 30분에 회담장으로 지정된 집에 도착했는데 혼마 중장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현관문 앞에 서서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일본병사 1명이 다가와 물 한잔씩을 건네 주었고 잠시 후 일본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댔다.
혼마 중장은 5시 정각에 도착했다. 번쩍거리는 캐딜락을 타고 나타난 혼마 중장은 부하들의 경례에 절도있게 답례한 후 현관에 놓아둔 기다란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혼마의 막료들이 좌우에 앉았고 웨인라이트 일행은 건너편에 앉았다.

혼마는 최대한 신경써서 잘 차려입고 나왔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새하얀 와이셔츠 위에 깨끗하게 세탁한 짙은 녹색의 정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훈장을 주렁주렁달고 군도를 찼다. 키가 180cm 에 가까워서 당시 일본인 중에서 키가 큰 편인 혼마는 가슴둘레도 컸으며 몸무게도 90kg 에 달해 당당한 풍채를 하고 있었다.

반면 웨인라이트는 키가 180cm 를 넘었으나 원래부터 별명이 '깡마른'(skinny)일 정도로 마른 체형으로 몸무게는 70kg  남짓했다. 그는 자신의 옷 중 상태가 가장 좋은 카키색 군복을 입고 나왔으며 가슴에는 아무 장식도 달지 않았다.

혼마의 오른쪽에는 제14군참모장 와치 장군이 앉았고 왼쪽에는 통역과 나카야마 대좌가 앉았다. 웨인라이트는 혼마의 맞은편에 앉았고 왼쪽에는 비브 장군과 둘리 소령이, 오른쪽에는 퓨 중령과 로렌스 소령이 앉았다. 일본인 뒤에는 종군기자, 사진사, 그리고 뉴스영화 촬영기사들이 있었다.

(웨인라이트-혼마 회담.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2.html#32-2 P.568)

 

회담은 의례적인 덕담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웨인라이트가 미리 작성한 항복문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혼마에게 내밀었으나 혼마는 가만히 있었고 참모장 와치 장군이 대신 받아 건네주었다. 혼마는 영어를 읽고 말할 줄 알았으나 문서에는 눈길도 안주고 바로 통역에게 넘기면서 방안의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본어로 번역하여 크게 읽으라고 말했다. 그는 회담 내내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통역이 읽기를 마치자 혼마는 전 필리핀의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는 남부 필리핀의 병사들은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관인 샤프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샤프 장군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는다고 대답했다. 혼마는 이 설명을 받아들지 않고 미국 라디오가 웨인라이트를 필리핀의 모든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웨인라이트의 지휘권을 보장한 공개 명령문을 신문에서 보았다고 반박했다.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은 며칠 전에 자신의 지휘로부터 벗어났으며 지금은 연락도 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혼마는 비행기를 하나 내줄테니 장교를 파견하여 명령을 전하면 된다고 응수했다.

이후 몇분동안 말씨름이 이어졌으나 웨인라이트는 자신이 비사야-민다나오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혼마는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킹 장군이 항복할 때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소. 당신이 일개 부대의 지휘관에 불과하다면 당신 또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소. 나는 같은 급인 총사령관과 협상하길 원하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회담장을 떠날듯한 시늉을 했다. 웨인라이트는 당황했다. 만일 혼마가 항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무장해제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기다리는 건 대량학살 뿐이었다. 웨인라이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혼마가 못 이긴 척 다시 자리에 앉자 웨인라이트는 비브 참모장 및 퓨 중령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필리핀의 병력 전체가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혼마는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지휘권이 없다고 말했소. 코레히도르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래도 항복하고 싶다면 상륙한 부대의 지휘관에게 항복하시오."

그러고는 회담장을 떠나 버렸다. 웨인라이트는 남아있던 나카야마에게 비행기를 하나 내주면 장교를 파견하여 비사야-민다나오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말했지만 나카야마는 그런 이야기는 코레히도르에 돌아가서 그곳의 현지 지휘관에게 항복할 때 하라고 말했다.  코레히도르로 돌아오는 보트 안에서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을 거부할 경우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만일 맥아더의 구상대로 동격인 4개의 사령부가 미-필리핀군을 분할 지휘하는 체제를 갖추었다면 웨인라이트가 직면한 문제는 피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웨인라이트, 마셜, 그리고 루스벨트까지 반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맥아더의 구상은 비현실적이었다. 만일 맥아더의 구상대로 했다면 지휘체계의 모순 때문에 5월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웨인라이트가 코레히도르를 떠나 있는 동안 일본군이 말린타 터널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우선 말린타 언덕을 포위한 다음 통행을 금지했다. 웨인라이트를 배웅하고 돌아온 무어 소장마저 말린타 터널로 들어갈 수 없었다.
웨인라이트와 무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널을 지휘하던 보급사령관 찰스 드레이크 준장은 자신의 보좌관으로서 러시아계인 시어도어 칼라쿠카 중령을 터널 밖으로 내보내어 일본군을 만나보게 했다. 칼라쿠카는 일본군 지휘관을 만났으나 그는 일본어를 몰랐고 일본군 중에서는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다. 하지만 다행히 일본군 중에 러시아어를 아는 중위가 있었다.  칼라쿠카는 일본군 소좌 및 러시아어를 아는 중위와 함께 말린타 터널로 돌아왔고 이어서 미군과 일본군이 러시아어로 협상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일본군 소좌는 말린타 터널을 10분 내로 비우라고 요구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결국 입원환자, 의료진, 각 사령부의 참모, 그리고 터널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오후 4시까지 터널의 중앙통로에 모이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오후 4시가 되자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들어와 중앙통로에 모인 사람들을 터널 밖으로 쫓아내었다. 밤에 웨인라이트가 터널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터널을 차지하고 있었다.
6일 자정에는 예정대로 제4사단의 우익대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머리 부분에 상륙했다.

웨인라이트는 말린타 터널에 도착하자마자 코레히도르 현지 지휘관에게 항복하기 위하여 나카야마를 따라 길을 나섰다. 나카야마는 웨인라이트 일행을 코레히도르의 현지 지휘관인 보병제61연대장 사토 대좌가 본부를 차린 산호세 마을로 데려갔다.

협상은 없었다. 사토는 제14군사령부로부터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웨인라이트를 보자마자 미리 만들어 두었던 문서를 내밀었다. 혼마가 불러주는대로 작성한 그 문서에는 미-필리핀군 전체가 항복해야 하며 모든 장비와 무기의 파괴를 금한다고 적혀 있었다. 미-필리핀군의 현지 부대는 4일 내로 일본군이 지정한 곳에 집결하여 부근의 일본군 사령관에게 항복해야 했다. 마지막 부분에는 일본군은 필리핀의 미-필리핀군이 모두 항복한 이후에야 전투를 중지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웨인라이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6일 자정에 그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밀란타 터널에 돌아와 일본군이 보초를 서는 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웨인라이트는 7일 아침부터 항복조건을 이행하기 위하여 제14군의 정보참모 하바 히카루 중좌와 협의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사야-민다나오군에 대한 지휘권을 다시 확립하고 샤프 장군을 항복시키는 일이었다. 웨인라이트는 샤프 장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문을 작성했다. 작전참모인 제시 트레이윅 대령이 하바 중좌와 함께 이 명령문을 가지고 민다나오로 가서 샤프 장군을 만나 항복하라고 설득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웨인라이트에게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부하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할 것을 요구했다. 웨인라이트는 7일 오후 5시에 마닐라로 가서 오후 11시 50분에 KZRH 라디오 채널을 통하여 샤프 장군, 존 호란 대령 그리고 길레르모 나카 중령에게 항복하라고 방송했다. (호란 대령과 나카 중령은 북부 루손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펴고 있었다.) 이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의 민간방송국이 청취하여 전쟁부에 전달했다.


 (KZRH 채널을 통하여 항복명령을 내리고 있는 웨인라이트 장군.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2.html#32-2 P.573)

 

다음날인 8일 아침에 트레이윅 대령은 하바 중좌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민다나오로 떠났다. 웨인라이트의 보급장교인 니콜 갤브레이스 대령은 호란을, 그리고 칼라쿠카는 나카를 찾아 나섰다.

갤브레이스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호란 대령은 웨인라이트의 방송을 들었고 갤브레이스를 만난 후 14일에 항복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을 거부하고 도망쳐서 북부 루손에서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칼라쿠카도 마찬가지였다. 나카 중령의 부대를 찾아낸 칼라쿠카는 실제 지휘관은 에버렛 워너 중령이고 나카 중령은 부지휘관임을 알았다. 워너 중령은 항복하기로 했으나 나카 중령은 거부했다. 결국 나카 중령은 제14보병연대(PA) 중심의 부하를 이끌고 도망쳐서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팔라완과 남부 루손에서도 소규모 병력들이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은 5월 12일에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이들을 항복시키라고 요구하면서 필리핀의 모든 병력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이미 항복한 병사들을 전쟁포로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퓨 중령을 레가스피로 파견하여 남부 루손에서 게릴라전을 펴고 있던 병력들을 항복시켰다. 팔라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필리핀경찰대 병력도 웨인라이트가 파견한 필리핀인 경찰대 간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항복했다.

이로써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해상요새와 루손의 항복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남부 필리핀을 지키던 비사야-민다나오군의 항복은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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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코레히도르 상륙

코레히도르 상륙을 책임진 제4사단장 기타노 겐조 중장은 상륙병력을 좌익대와 우익대로 구성했다.
보병제61연대장 사토 겐파치 대좌가 지휘하는 좌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61연대
전차제7연대 일부
산포병제51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
독립구포제2대대의 1개 중대(2문)
독립구포제15대대
박격제3대대의 1개 중대
공병제4연대(2개 소대 감편)
사단무선 1개 분대
위생대의 절반
제1야전병원의 절반
방역급수부의 1/4 

좌익대는 5일 밤에 코레히도르 꼬리 부분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며 미군이 항복할 경우에 대비하여 킹 소장의 항복을 받았던 제14군의 제1과고급참모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가 동행했다.

제4보병단장 다니구치 구레오 소장이 지휘하는 우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4보병단사령부
보병제8연대의 1개 대대
보병제37연대
전차제7연대의 일부
독립산포병제3연대(제1대대의 제3소대 감편)
독립구포제2대대의 1개 중대(2문)
독립구포제14대대
박격제3대대(1개 중대 감편)
공병제16연대(1개 중대 감편)
사단무선 1개 분대
위생대의 절반
제1야전병원의 절반
방역급수부의 1/4


우익대는 6일 밤에 탑사이드의 제임스 협곡 부근에 상륙할 것이었다.

 

(코레히도르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1)

4월 27일에 제14군 사령부에서 제4사단, 제22비행단, 제14군포병대 그리고 해군이 참가하는 회의가 열려 협조 방안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에 따라 제22비행단의 정찰기와 폭격기들은 공중에서 관찰한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상황을 제4사단에 전해 주었다.
제14군포병대는 원활한 화력지원을 위하여 60명으로 이루어진 관측대를 좌익대에 동승시켰다. 일본군이 말린타 언덕을 점령하는 즉시 이들이 포병관측소를 설치할 것이었다.

좌익대를 지휘하는 보병제61연대장 사토 대좌의 상륙 계획은 단순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5일 밤11시에 코레히도르 꼬리 부분의 북해안에 있는 인펀트리 포인트와 카발리 포인트 사이에 나란히 상륙할 것이었다. 서쪽에 상륙한 제1대대는 상륙 직후 서쪽으로 선회하여  말린타 언덕을 향하여 진격하고 동쪽에 상륙한 제2대대는 남하하여 킨들리 비행장을 점령할 것이었다.

 

(일본군의 코레히도르 상륙상황.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1.html P.554)

6일 밤에는 다니구치 소장이 이끄는 우익대가 머리 부분에 있는 제임스 협곡 부근에 상륙하여 꼬리 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꼬리에 상륙한 좌익대와 머리에 상륙한 우익대가 중간에서 만난 이후 잔당 소탕에 들어갈 것이었다. 좌익대 상륙 이틀 후인 5월 7일까지 코레히도르 전투를 끝낸다는 것이 일본군의 계획이었다.

좌익대는 4일에 캅카벤 부근의 라마오강 계곡에 집결한 후 5일 아침에 라마오로 행군하여 해가 지자 상륙주정에 올랐다. 혼마 장군이 승선장에 나왔다. 그는 좌익대 지휘관 사토 대좌를 격려하고 승선하는 병사들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상륙주정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좌익대를 실은 100 척 이상의 상륙주정이 코레히도르에 접근하자 제14군 포병대는 10시 45분부터 11시까지 상륙예정지인 카발리 포인트와 인펀트리 포인트 사이를 집중격으로 포격했다.

좌익대의 상륙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륙주정이 라마오를 떠날 당시 조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코레히도르 부근의 조류도 서쪽으로 흐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코레히도르에 접근하자 조류가 동쪽으로 바뀌어 상륙주정들을 동쪽으로 밀어붙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예정된 상륙해안보다 1km 정도 동쪽으로 떨어진 카발리 포인트와 노스 포인트 사이에 상륙했다.

여기에 더하여 항행 도중 대대의 위치가 바뀌는 바람에 2개 대대가 동시에 상륙하려던 계획도 어긋났다.  제1대대와 함께 행동하던 사토 대좌는 자신의 동쪽에 있어야 할 제2대대가 반대로 서쪽에서 항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상륙하면 제1대대는 남하하는 제2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상륙 직후의 야간 전투 현장에서 이러한 기동은 극심한 혼란과 아군 사이의 오인 사격을 불러올 위험이 컸다. 따라서 사토 대좌는 제1대대를 앞서 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제1대대가 먼저 상륙하고 제2대대를 실은 주정들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 원래 계획대로 제1대대의 동쪽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대의 상대적인 위치는 복구되었지만 대신 병력이 분산되어 상륙했다. 그결과 먼저 상륙한 제1대대는 피해없이 기습적으로 상륙했으나 나중에 상륙한 제2대대는 방어태세를 갖춘 미군에 의하여 상륙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제4사단참모장 요시다 모토히코 대좌는 3가지로 정리했다. 

1. 조류 관계
2. 주정부대의 미숙
3. 상륙지점의 서쪽에 떨어지고 있는 저지사격 때문에 서쪽은 위험하다는 심리상태

상륙해안에 대기 중이던 미군 수비대는 하루종일 이어진 포격으로 얼이 빠졌다가 일본군의 상륙을 앞두고 포격이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따라서 제1대대의 상륙은 얼떨결에 허용했지만 제2대대를 태운 주정이 접근하자 반격을 가했다. 노스 포인트 바로 동쪽에는 75mm 야포 2문을 가진 포대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모르는 포대였다. 상륙주정이 접근하자 75mm 야포가 포격을 시작했고 제2대대의 선두 주정이 해안에서 270m 까지 접근하자 37mm 포 1문이 불을 뿜었다. 탐조등 1개도 잠시 켜졌으나 곧 일본군 포탄이 쏟아지자 황급히 껐다. 하지만 탐조등 없이도 해안에 접근한 일본군 주정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히 밝았기 때문에 수비대는 몇 척의 주정을 격침하고 거기에 탔던 일본군을 수장시켰다.

이때 보름달이 뜨면서 해안을 향하는 일본주정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자 웨이 포대에 남은 마지막 12인치 박격포를 포함하여 사격 가능한 모든 3인치 해안포 및 75mm 야포가 제2대대를 싣고 해안으로 향하는 주정에게 포격을 가했다. 주정에 타고 있던 일본종군기자 우노 가즈마로는 수백문의 포가 시뻘건 강철의 비를 쏟아부었다고 적었다.

2,000명으로 이루어진 좌익대가 상륙 과정에서 입은 피해는 극심했다. 5월 5일에서 7일까지 일본군이 입은 인명피해는 전사 및 행방불명 435명, 부상 및 환자가 428명으로 합계 863명인데 대부분 상륙과정에서 발생했으며 특히 동쪽에 상륙한 제2대대에서 심했다. 상륙주정도 절반 이상이 부서졌다. 보고를 받은 혼마 중장은 제1차 바탄공격 때처럼 실패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상륙 후 일본군의 상황은 혼마 중장의 상상보다는 좋았다. 코레히도르의 동부 지구를 맡은 제4해병연대제1대대가 지켜야 할 해안선은 9km 가 넘었기 때문에 북해안은 A중대만이 지키고 있었으며 상륙해안에 배치된 병력은 1개 소대에 불과했다. 따라서 오후 11시 10분에 피해없이 기습적으로 상륙한 보병제61연대제1대대는 해안에서의 짧고 격렬한 전투 끝에 해병대를 제압하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1개 중대는 남하하여 6일 새벽 1시에 남해안의 몽키 포인트에 도달했으며 대대 주력은 서쪽으로 꺾어 말린타 언덕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1대대의 주력은 1시 30분까지 덴버 포대를 점령하고 바로 동쪽에 남북해안을 잇는 연속된 방어선을 형성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덴버포대선이라고 불렀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과 말린타 터널 사이에는 2개 소대 밖에 없었으므로 무어 소장은 제59해안포연대의 병력들을 포대에서 빼내어 하워드 대령 휘하에 넣어주었다. 하워드 대령은 이 병력들을 반격에 투입했는데 말린타 터널에서 덴버포대선까지 가는 통로에 일본군이 포격을 집중시키고 있어 병력 투입이 어려웠다. 따라서 병력 집결이 늦어지자 미군은 충분한 병력이 모이기 전에 반격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덴버포대선의 일본군은 2시부터 4시까지 3번에 걸쳐 실시한 미군의 반격을 막아내었다. 오전 4시에 제2대대가 덴버포대선에 도착함으로써 덴버포대선은 크게 강화되었다.

하워드 대령은 오전 4시 30분에 예비대를 모두 덴버포대선 공략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정예병력인 제4해병연대의 제2 및 제3대대는 일본군의 추가 상륙에 대비하여 방어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반격의 주력은 프랜시스 윌리엄스 해병소령이 지휘하는 제4임시대대가 되어야만 했다. 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4임시대대는 비록 대대장과 장교의 절반은 해병대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해군이었으므로 보병으로서는 약체였다. 한 해병대 장교는 제4임시대대가 소총을 든 500명의 수병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덴버포대선을 공격할 미군의 북쪽과 중앙은 제4임시대대가 맡았으며 남쪽은 제4해병연대의 본부 및 근무중대 병력 300명이 맡았다. 예비대는 허만 하우크 대위가 이끄는 제59해안포연대의 60명이었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하여 병력 투입이 늦어져 윌리엄스 소령의 반격은 오전 6시 15분에야 실시되었다.

반격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800명을 동원하여 일시에 일본군을 때리자 강한 일격을 얻어맞은 덴버포대선의 남쪽과 북쪽은 무너졌고 중앙에서만 덴버포대의 기관총좌에 거치한 중기관총 1정에 힘입어 이쪽 방면을 맡은 T 중대의 진격을 막았다. T  중대장 베델 오터 해군대위는 5명의 자원자와 함께 기관총좌 제거에 나섰다. 이들은 30m 전방까지 포복으로 접근한 다음 동시에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정확하게 목표에 떨어져 기관총좌의 일본군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보병전투 훈련이 부족한 수병들이 기관총이 침묵하는 순간 즉시 돌격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일본군이 돌아와 기관총을 다시 거치하고 기관총좌를 제거한 6명 중 오터 대위를 비롯한 5명을 사살했다.  

북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Q중대는 병력을 실은 채 암초에 걸린 일본군의 상륙주정 2척을 발견했다. 중대는 상륙주정 2척을 격침하고 타고있던 일본군을 몰살시켰으나 미숙한 수병들은 이 간단한 임무에 매달려 수천발의 총탄을 소모하고 귀중한 시간을 30분이나 허비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의 처지는 절망적으로 보였다. 일본군은 말린타 언덕을 점령하기는 커녕 반격을 받아 밀려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탄약이 부족했다. 원래 제4사단은 좌익대를 실은 주정군에 24시간 동안 전투하기에 충분한 양의 탄약을 함께 실어 보냈다. 그러나 탄약을 실은 주정의 승조원들이 미군의 포화에 겁을 먹고 탄약을 주변의 바다에 대충 던져버린 후 돌아가 버렸다. 게다가 상륙 과정에서 주정을 많이 잃어서 추가 보급에 투입할 주정이 모자랐다. 혼마 장군은 추가 보급에 사용할 수 있는 주정이 21척 밖에 남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상륙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륙은 실패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반격의 충격에서 깨어나 방어선을 재편했으며 산포가 상륙하여 진격하는 미군의 머리 위에 포탄을 쏟아 부어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하워드 대령이 마지막 예비대인 제59해안포연대 60명을 투입했음에도 오전 8시가 되자 미군의 진격은 멈추었으며 여기에 일본군 전차 3대가 결정타를 먹였다. 일본군 전차가 실제로 가한 손해는 대단치 않았으나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그 자리에 못박힌 상태에서 적의 전차가 출현하자 대전차 무기가 없는 미군은 크게 놀랐으며 특히 훈련이 부족한 수병들의 동요가 심했다. 장교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우르르 도망치는 사태만은 막았으나 만일 적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면 그대로 와해될 가능성이 컸다.

이제 미군의 처지는 절망적이었다. 덴버포대선을 공격하던 부대는 일본군의 전차와 방어선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 채 일본군의 산포로부터 지속적으로 포격을 받고 있었다. 이 부대와 말린타 터널  사이는 제14군 포병대가 포격을 가하고 있어서 부상자도 후송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미군 전사자는 이미 800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가장 큰 문제는 6일 밤에 일본군의 추가 상륙이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제임스 협곡 부분에 집중 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일본군이 추가로 상륙할 것이 확실했는데 이제 웨인라이트에게는 예비대가 없었고 해안포도 거의 파괴되었다. 억지로 버티자면 하루는 버틸 수 있겠지만 일단 일본군이 추가로 상륙하고 나면 채 몇 시간을 버티기 어려웠다. 만일 끝까지 버티다가 일본군이 전투 끝에 말린타 터널에 도달한다면 그 결과는 대규모 학살이었다. 터널 안에는 1,000명이 넘는 환자도 있었다.

1942년 5월 6일 오전 10시, 웨인라이트는 상황을 평가한 후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브 참모장은 자유의 소리 채널을 통하여 항복하겠다는 방송을 내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어 장군은 정오까지 45구경 권총보다 구경이 큰 모든 화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동안 웨인라이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항복사실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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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공격준비사격

1942년 5월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야포와 항공기는 공격준비사격 단계로 옮겨갔으며 제4사단은 상륙정에 승선할 준비를 시작했다.

5월 1일의 포격 및 공습은 여태까지 최대 규모였던 4월 29일의 규모를 넘어섰다.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된 포격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는데 포격은 상륙 예정 지점인 코레히도르의 꼬리 부분과 제임스 협곡에 집중되었다.
일본기들도 오후 3시 15분부터 5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23회, 비행제60전대는 45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와 포트 드럼에 50kg 짜리 폭탄 36발, 100kg 짜리 폭탄 180발, 250kg 짜리 폭탄 60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떨어뜨렸다.

제14군이 공식적으로 공격준비사격의 시작으로 인정한 2일의 포격은 전날보다 더 심했다. 야포들은 오전 7시 30분에 일본기의 공습과 함께 포격을 시작하여 오후 7시 30분까지 지속했다. 도중에 3번에 걸쳐 2시간 30분의 휴식을 가졌는데 그 동안 군정찰기 5대가 코레히도르 상공을 정찰하여 표적의 파괴상황을 확인했다. 이날 24cm 유탄포는 5시간 동안 포격에 참가하여 3,600발을 발사했는데 이건 5초에 1발 꼴이었다.  일본기는 13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20회, 비행제60전대는 35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와 카발로섬에 100kg 짜리 폭탄 159발, 250kg 짜리 폭탄 45발, 500kg 짜리 폭탄 12발을 떨어뜨렸다.

(코레히도르 상공의 일본폭격기.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0.html#30-3 P.548)

이날 12인치 박격포 8문을 보유한 기어리 포대의 탄약고에 일본군의 24cm 포탄이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와 명중했다. 코레히도르 전체가 흔들리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10톤짜리 포신이 성냥개비처럼 하늘을 날았다. 포신 하나는 140m 를 날아가 골프장에 떨어졌으며 무게가 6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는 1km 를 날아가 지름이 1.2m 가 넘는 나무를 싹뚝 자르면서 떨어졌다. 27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낳은 이 폭발로 12인치 박격포 8문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기어리 포대는 폐허가 되었다.

2일 저녁이 되었을 때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방어시설은 큰 피해를 입었고 꼬리 부분에는 여러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때마침 불어온 서풍을 타고 화재가 크게 번지는 바람에 코레히도르의 가용 인원을 모두 투입한 후에야 겨우 불길을 잡았다.

일요일인 5월 3일에도 일본군은 하루종일 포격을 지속했으며 일본기들도 5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16회, 비행제60전대는 44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에 100kg 짜리 폭탄 150발, 250kg 짜리 폭탄 57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떨어뜨렸다.

그날 저녁 남중국해를 초계하던 잠수함 스피어피시가 마지막으로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여 어뢰와 함께 25명의 인원을 싣고 떠났다. 이때 떠난 인원은 작전참모 콘스턴트 어윈 대령, 재정감 로열 젱크스 대령, 감찰감 밀튼 힐 대령을 포함하여 육군장교 6명, 해군장교 6명, 그리고 간호사 13명이었다. 어윈 대령은 당시까지 생존한 모든 육군, 해군, 그리고 해병대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젱크스 대령은 회계 장부를 들고 있었다. 스피어피쉬는 이외에도 코레히도르에서 보내는 마지막 우편물과 함께 대량의 극동미육군사령부 및 필리핀미군사령부의 기록과 명령문을 싣고 호주로 탈출했다.

5월 4일의 포격은 또다시 이전의 기록을 갱신했다. 이날 하루동안 일본군 야포는 16,000발을 발사하여 코레히도르에서는 하루종일 포탄으로 기관총 사격을 받는 느낌이었다. 포격은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제임스 협곡과 꼬리 부분의 노스포인트와 카발리포인트 사이에 집중되었다.
일본기들도 6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25회, 비행제60전대는 36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에 50kg 짜리 폭탄 74발, 100kg 짜리 폭탄 95발, 250kg 짜리 폭탄 48발, 500kg 짜리 폭탄 11발을 떨어뜨렸다.

이날 탑사이드의 경계병이 북상하는 일본군주정 15척을 발견했다. 상륙부대의 승선을 위하여 바탄반도 동해안에 주정이 집결하고 있었다. 상륙이 임박했다.

상륙에 대항하는 코레히도르의 방어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4월 9일 이래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6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살아남은 병사의 체력은 크게 떨어져 있었다. 막강하던 해안포 세력도 많이 위축되었다. 5월 3일 저녁 현재 가용한 해안포는 12인치 해안포 4문, 12인치 박격포 1문, 155mm 평사포 16문, 3인치 해안포 7문이었는데 155mm 평사포 16문 중 9문, 3인치 해안포 7문 중 4문만이 바탄 방향으로 포격할 수 있었다. 정상 작동하는 대공포는 1개 포대 뿐이었고 기관총도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탐조등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해안방어시설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쯤에는 코레히도르의 반격능력도 거의 소진되어 4일 하루 동안 155mm 평사포 3문만이 간간이 반격을 가했을 뿐이었다. 코레히도르 남쪽의 포트 드럼과 프랭크의 14인치 해안포도 반격을 가했다. 포트 프랭크는 간헐적으로 사격할 수 밖에 없었고 포트 드럼은 꾸준히 사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공격준비사격의 마지막날인 5일에 일본군 야포는 얼마 남지 않은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방어시설을 파괴하는데 주력했다.
일본기도 아침부터 공격에 가세했다. 비행제16전대는 25회, 비행제60전대는 45회 출격하여 제4사단의 상륙예정지를 중심으로 100kg 짜리 폭탄 195발, 250kg 짜리 폭탄 56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떨어뜨렸다.

코레히도르의 북해안은 폐허가 되었다. 해안선을 지키던 야포는 철수하거나 파괴되었고 탐조등은 파괴되거나 켜지지 않았다. 지뢰는 폭발했고 철조망은 끊어졌으며 기관총좌가 있던 자리는 커다란 탄공이 되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전화선이 모두 절단되었다. 한 포대에서 대대본부까지 전화선을 복구했지만 3분 만에 다시 끊겼다. 무전기는 거의 없었으므로 이제 지휘관들은 포탄이 작렬하는 지표면을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다니는 전령을 통해서만 상황보고를  받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오후가 되자 자욱한 연기와 먼지 때문에 탑사이드에서 꼬리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저녁이 되자 코레히도르의 북해안을 지키는 방어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날은 보름달이었으므로 상륙에 적당했다.

오후 9시에 코레히도르 동쪽 끝에 있던 청음반이 접근하는 상륙주정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이 소식은 H 스테이션을 거쳐 말린타 터널로 전달되었고 무어 소장은 경계령을 내렸다. 1시간 후에는 남하하는 일본군 주정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무어 소장은 오후 10시 30분을 기하여 적의 임박한 상륙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정이 되기 직전에 일본군의 포격이 잠시 멈추더니 꼬리 쪽에서 요란한 소화기 사격소리가 터졌다. 잠시 후 전령이 달려와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노스포인트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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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코레히도르의 마지막 한달

코레히도르에서는 야외에서 지내던 병사들이 안전한 말린타 터널 내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불평을 터뜨렸다. 그러나 1942년 4월이 되자 말린타 터널 안도 점차 지내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어디에나 먼지, 오물이 있었고 파리, 벼룩, 이가 득실거렸다. 씻지못한 사람에게서 나는 악취가 공기에 가득했으며 참기 힘들만큼 더웠다. 공습이나 포격이 잠깐 멈추면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를 쐬려고 출입구 근방에 몰렸다.

과밀, 부족한 식사, 그리고 계속되는 긴장에 시달린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화를 내었고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사람들 사이의 온갖 갈등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꼬박꼬박 지급되는 급료를 쓸 곳이 없었으므로 사방에서 주사위던지기, 브리지, 포커판이 벌어졌다. 자포자기한 간호사 중 일부는 우연히 눈이 맞은 남자와 하룻밤 사랑을 위하여 밤에 터널 밖으로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다. 말린타 터널 안의 장교식당에서 매일 아침 열리는 천주교 미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물론 터널 밖의 생활은 훨씬 불편하고 위험했다. 터널 밖에서는 과밀에 시달릴 필요없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포격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대피호로 달려가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행운을 빌면서 꼼짝없이 엎드려 있어야 했다. 적의 관측으로부터 도로를 감추어주던 나무가 사라지면서 도로 위를 다니는 일은 위험천만한 행동이 되었다. 낮에 차량이 도로에 나타나면 어김없이 일본군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배식을 위하여 모이는 일은 일본군의 포격을 부르는 자살행위였다. 따라서 병사들은 꼭꼭 숨어있는 취사병에게 한명씩 다가가 배식을 받은 다음 멀찍이 떨어진 은폐된 곳으로 가서 따로 먹었다. 어차피 식사래야 쌀죽에 빵 몇 조각 넣은 것이 전부였다. 여기에 힘들게 구한 잼을 가끔씩 섞어주는 정도가 취사병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본군의 포격이 심해진 4월 14일에 웨인라이트의 작전참모인 콘스턴트 어윈 대령이 병사들의 배식량을 정량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포격과 폭격의 강화로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늘었으므로 사기를 유지하고 일본군이 상륙할 때 제대로 싸우려면 정량 배식이 필요하다는 논지였다. 그럴 경우 코레히도르에는 1달간 버틸 식량만이 남아 있었으므로 웨인라이트 장군은 어윈의 주장을 물리쳤다. 결과적으로는 어윈이 옳았지만 웨인라이트로서는 한달 내로 일본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면 식량이 떨어져 5월 중순에 항복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코레히도르의 배식량은 계속 정량의 절반으로 유지되었다.

이때쯤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식량도 떨어졌다. 일부 병사는 마지막으로 가진 것을 털어서 술을 담갔다. 건포도와 자두를 으깨어 엿기름과 섞은 걸 양동이에 넣고 깨끗한 물을 부은 다음 열대의 날씨에 놓아두면 그럭저럭 마실만한 술이 만들어졌다.

4월 말이 되면서 코레히도르에도 영양실조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기병과 괴혈병이 발생했으며 비타민 A 부족에 따른 야맹증도 나타났다. 한 대공포대장은 군의관을 찾아가 부하들이 야맹증으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라면서 대구 간유를 얻어 부하들에게 먹였다.

일본군의 포격과 폭격이 강화되면서 부상자가 크게 늘었다. 말린타 터널 내의 병원에는 복도마다 부상자와 환자가 누워서 치료를 기다렸다. 부상자가 늘면서 말린타 터널 내의 병원은 4월 25일에 3개의 분지를 더 차지하면서 1,000병상을 확보했다. 공간이 모자라 환자들도 2층 침대나 심지어 3층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 환자들은 리넨천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세탁한 리넨천을 빨래줄에 널기 위해 터널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자살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제4해병연대를 비롯한 일부 부대는 자체 병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수술이 필요한 큰 부상이나 심각한 질병은 말린타 터널의 병원으로 이송해야만 했다.
환자의 후송도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코레히도르에서는 구급차가 2대 있었으나 한대는 전역 초기에 파괴되었고 한대만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급차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가야 했고 걸을 수 있는 환자나 부상자는 걸어야 했다. 열이 40도에 이르는 말라리아 환자도 걸어서 병원으로 가야 했다.

끊임없는 포격으로 인한 긴장과 수면부족, 식량 결핍은 병사들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4월 말이 되자 지휘관들은 부하들이 생기가 없고 만사를 귀찮아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정신적 문제로 인한 전력 약화는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였으나 치료받은 병사는 극소수였다. 이유는 바탄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적의 포격을 피할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병사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병원에 가길 싫어했으며 군의관과 지휘관들도 같은 이유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병사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치료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한 가장 실질적인 위협은 발전기의 피해였다. 발전기는 양수기와 탐조등, 해안포를 올리고 내리는 승강기, 말린타 타널의 환풍기와 전등에 공급할 전기를 생산했다. 4월 말이 되자 바텀사이드에 있는 주발전기는 피해가 누적되어 발전 용량의 일부 밖에 가동하지 못했다. 해안포대에는 자체 발전기가 있었으나 발전기를 돌릴 경유가 부족했다. 말린타 터널과 병원에도 자체 발전기가 있었으나 정전 사태는 가끔씩 일어나 손전등으로 수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 부족은 4월 말이 되자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때는 건기로서 몇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코레히도르의 저수지는 수위가 많이 내려간 상태였다. 여기에 일본군의 포격으로 양수기가 부서지고 수도관에 구멍이 나고 발전기가 피해를 입으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급기야 4월 말이 되자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이 수통 1개로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의 양은 낮에 38도까지 올라가는 기온에서 활동하는 병사에게는 너무 부족했다. 이제 물부족은 단지 불편한 정도를 넘어 건강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물부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장교들도 1컵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 그 물에 자신의 속옷과 양말까지 빨아야 했다. 한 장교는 빨래 순서를 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으며 깜빡하여 러닝 셔츠를 빨기 전에 더러운 양말을 먼저 빨기라도 하는 날에는 낭패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코레히도르에서 샤워를 한다는 것은 버섯을 듬뿍 곁들인 스테이크,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 아삭거리는 샐러드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갖추어진 만찬에 맞먹는 엄청난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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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예비 포격

루손군 항복 이후 일본군은 코레히도르에 대하여 27일 간의 포격을 가했다. 포격의 위력은 가공할 수준으로 단 하루만에 지난 3달간의 공습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정도였다. 해를 가릴 정도로 울창했던 코레히도르의 나무는 그을린 그루터기만 남기고 모두 쓸려나갔다. 깊은 탄공, 포탄의 탄피, 그리고 구조물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이 코레히도르의 풍경이 되었다. 27일간의 포격으로 해안방어선은 파괴되었고 거대한 해안포는 침묵했으며 대공포 또한 사용불능이 되었다.

루손군이 항복한 4월 9일에 캅카벤 부근에 전개한 일본군의 7.5cm 야포가 코레히도르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예비포격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군이 포격을 시작하자 코레히도르 북쪽 해안에 있는 카이저 포대의 155mm 평사포가 대포병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바탄반도에 있는 병원, 민간인, 그리고 아군이 피해를 입을 것을 염려한 웨인라이트 장군은 12일까지 대포병사격을 금지했다.

일본기도 코레히도르 공격에 가세했다. 제22비행단은 9일 오후 4시 30분부터 8시 30분에 걸쳐 경폭격기 44대와 중폭격기 35대를 투입했고 해군도 육상공격기 20대를 보내어 폭격을 가했으나 피해는 가벼웠다.

제14군포병대장 기타지마 중장은 코레히도르를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눈 다음 세분하여 휘하의 18개 포대별로 할당했다. 아부케이에서는 관측기구가 떠올라 포격의 정확도와 표적의 파괴여부를 확인했으며 정보연대도 4월 13일부터 전개하여 코레히도르에서 반격을 가할 경우 섬광과 소음으로 포대의 위치를 파악했다.

4월 12일 오전 6시부터는 기존의 7.5cm 야포에 더하여 10cm 야포가 포격에 가세했다. 일본기들도 9번에 걸쳐 공습을 가했다. 이날 웨인라이트 장군이 대포병사격 금지명령을 철회하면서 미군 포대가 대포병사격을 가했으나 그때마다 일본군으로부터 더 많은 포격을 얻어맞았다.

일본군의 15cm 유탄포가 포격에 가세하면서 코레히도르는 실질적인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14일 저녁까지 155mm 평사포 2문을 보유한 포대 3개와 3인치 대공포 4문을 가진 대공포대 1개가 파괴되었다. 탑사이드에 있던 조준기와 고도탐지기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미군은 필사적으로 수리하여 최소한 하나는 작동 상태로 유지했다.

일본군은 탐조등 파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밤에 탐조등을 15초 이상 밝히면 당장 일본군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격이 강해지면서 인명피해도 늘었다. 15일에는 일본군의 포탄이 방공호에 명중하여 콘크리트로 된 지붕이 무너지면서 필리핀군 70명이 죽었다.

16일에 일본군의 포탄 파편이 탑사이드 연병장에 있는 국기게양대 부근에서 터지면서 파편이 국기를 매단 밧줄을 끊었다. 이 광경을 본 제60해안대공포연대 B 포대의 아서 허프 대위가 자원자 3명과 함께 달려가 성조기가 땅에 닿기 전에 손으로 받아내었고 사방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 밧줄을 교체하여 다시 게양한 다음 대피호로 정신없이 뛰었다.

18일부터 카비테에서 옮겨온 24cm 유탄포가 포격에 가세하면서 이제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튼튼한 포대도 위험해졌다.
24일에 24cm 유탄포의 포탄이 크로켓 포대에 명중했다. 크로켓 포대에는 승강기에 올려져 포격 시에만 나타났다가 포격을 마치면 지하로 숨을 수 있는 12인치 해안포 2문이 있었다. 일본군의 포탄은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와 승강기를 부수고 화재를 일으켰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장약에 인화하기 전에 겨우 불을 껐다. 그러나 크로켓 포대는 완전히 전투력을 잃었다.

일본군의 포탄에 맞은 크로켓 포대.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0.html#30-1 P. 539

 

다음날인 25일 저녁에는 24cm 포탄이 말린타 터널 출입구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일단의 사람 사이에 떨어졌다. 13명이 즉사하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는데 중상자 일부는 며칠 내로 죽었다.

일본군은 규칙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해뜨기 직전부터 시작된 포격은 정오가 되면 일단 멈추었다가 오후 3시부터 다시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코레히도르의 전화선은 오전 10시쯤 되면 끊어졌다. 밤새 통신병이 수리를 했지만 다음날 10시가 되면 다시 끊어졌다.

공습도 계속되었다. 4월 9일부터 30일까지 코레히도르에는 108회 공습경보가 울렸다. 일본기들은 처음에는 대공포 사정거리  바깥인 6,000m 이상의 고공에서 폭격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하여 조준기와 고도탐지기, 그리고 대공포가 피해를 입어 정확한 대공사격이 어렵게 되자 대담해져서 점점 더 낮은 고도로 날아와 정확하게 폭격했다. 어떤 날은 작동하는 고도탐지기가 하나밖에 없어서 전화로 대공포대에 적기의 고도를 불러줘야 했다.
4월 12 일에서 28일까지 제22비행단의 폭격 상황은 다음과 같다

비행제16전대 33회 출격  50 kg짜리 폭탄 125발 100kg 짜리 폭탄 36발
비행제60전대 68회, 비행제62전대 65회 합계 100kg 짜리 폭탄 390발, 250kg 짜리 폭탄 208발

포격과 공습은 천장절인 4월 29일에 절정에 달했다. 오전 7시 30분에 일본폭격기가 날아와 포트 휴이를 폭격했고 경폭격기 3대가 코레히도르의 남쪽 부두와 말린타 터널 입구를 폭격했다.  동시에 캅카벤에서는 관측기구가 떠오르고 주로 바텀사이드를 목표로 포격이 시작되었다.
오전 8시에 폭격기 6대가 더 날아와 말린타 언덕을 폭격했고 야포들은 목표를 말린타 터널의 입구와 북쪽 부두로 옮겼다.
8시 20분이 되자 정찰기가 코레히도르 상공을 맴도는 가운데 야포들은 탑사이드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일분군 야포는 미들사이드를 포격했다. 오전 10시에 포탄이 2개의 탄약고에 명중하여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날의 포격은 쉬는 시간 없이 지속되었다. 저녁이 되자 코레히도르는 검은 연기와 먼지에 휩싸였다. 숲이란 숲은 모두 불길에 휩싸였고 탄약고는 계속 폭발하고 있었다.  말린타 언덕 표면의 구조물은 일소되었다.
관측소는 파괴되었고 해안의 대형 탐조등에 전원을 공급하던 발전소는 불타버렸다. 해안방어용 75mm 야포 3문과 4연장 1.1인치 대공포 1문도 파괴되었다. 이날 제14군포병대는 약 5,000발을 사격했다.
이날 제22비행단의 폭격상황은 다음과 같다.

비행제16전대 : 6차에 걸쳐 33회 출격. 50kg 짜리 폭탄 198발 투하. 1대가 미군 대공포에 대파
비행제60전대 : 50회 출격. 100kg 짜리 폭탄 211발, 250kg 짜리 폭탄 30발, 500kg 짜리 폭탄 16발 투하.
 
그날 저녁에 호주로부터 카탈리나 비행정 2척이 약간의 의약품과 기계식 신관 740개를 싣고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물량과 대비되는 초라한 보급이었다.

코레히도르에서도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4월 18일에 155mm 평사포대들은 노출된 진지를 벗어나 견인차 1대와 평사포 1문이 짝을 이룬 체제로 변환했다. 평사포는 한곳에서 포탄을 몇발 날린 다음 반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20일에는 탐조등 2개에도 견인차를 붙여 이동식으로 바꾸었다.

포트 프랭크와 드럼도 반격에 가담했다. 포트 프랭크의 14인치 해안포는 승강기에 설치된 방식이었는데 몇발 발사하고는 반격을 피해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포탑에 들어있는 포트 드럼의 14인치 해안포는 그럴 필요없이 계속 발사했다. 포트 드럼에서는 항복하는 순간까지도 5분 간격으로 14인치 포탄을 계속 발사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격한 것은 12인치 박격포 8문을 보유한 기어리 포대와 3문을 보유한 웨이 포대였다. 문제는 일본군 야포를 공격하는데 효율적인 순발신관을 장착한 304kg 짜리 고폭탄이 400발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은 지연신관을 장착한 철갑탄이었는데 지연신관은 지상 목표물에는 효과가 없었다.  병기부에서 지연신관을 개조하여 착탄하는 순간 터지게 만들었으나 전 인원이 달려들어도 하루에 25개 밖에 개조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가장 위협적인 12인치 박격포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웨이 포대는 일본군의 집요한 대포병사격으로 24일에 12인치 박격포 1문을 잃었고 이후 1문을 더 잃어 일본군 상륙 당시 1문만이 살아남았다. 기어리 포대는 4월 말까지 용케 피해를 면했으나 5월 2일에 포격을 받아 파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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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코레히도르의 방어태세


1941년 12월 말까지 코레히도르의 지상방어병력은 포병에서 차출한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포병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적이 상륙하면 보병으로서 싸우게 되어 있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적의 상륙에 대비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맥아더 장군은 12월 29일에 제4해병연대가 코레히도르에 상륙하자 연대장 새뮤얼 하워드 대령을 해안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대로 된 해안방어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4해병연대는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 크게 증강되었다. 1941년 11월에 상하이를 탈출할 당시 연대는 766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는 2개 대대로, 대대는 소총중대 2개와 기관총중대 1개로, 소총중대는 2개 소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연대는 올롱가포 해군기지의 해병분견대를 흡수하여 소총중대의 3번째 소대를 만들었고 이후 필리핀 내의 해병분견대를 흡수하여 2개의 소총중대를 창설했다. 코레히도르에 도착한 이후 연대는 카비테에서 철수한 해병을 모아 제3대대를 창설했다. 이로써 연대의 병력은 장교 66명, 부사관 및 사병 1,365명으로 늘어났으며 항복때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제4해병연대는 코레히도르에 도착했을 때 2,000명의 6개월치 식량, 10단위 이상의 탄약, 2년치 피복, 그리고 100병상짜리 병원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충분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갖추고 있었다.


해안방어사령관이 된 하워드 대령은 코레히도르를  3개의 방어지구로 나누었다. 꼬리 끝에서 말린타 터널을 포함하는 지역은 동부지구로서 제1대대를 배치했다. 부두, 미들사이드와 탑사이드의 막사와 건물 대부분을 포함하는 중부지구에는 제3대대를 배치하고 서쪽의 서부지구에는 제2대대를 배치했다.


제4해병연대는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자마자 기존 방어시설을 개선하고 새로운 방어시설을 만들었다. 그들은 동부지구에서만 34km 가 넘는 철조망을 새로 쳤으며 지뢰를 묻고 대전차호와 참호를 파고 사계청소를 실시하고 포좌를 만들고 최종 방어선을 설정했다.


4월 9일에 바탄반도가 함락되면서 일부 병력이 코레히도르로 탈출하여 항반방어부대의 병력이 늘어났다. 1942년 4월 15일 현재 항만방어부대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1942년 4월 15일 현재 항만방어부대의 병력현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9.html#29-2 P.529)


이중에서 해안방어사령부의 병력은 약 4,000명이며 그중 해병대원은 1.352명이었다. 829명은 해군으로부터 왔고 929명은 필리핀 육군으로부터 왔으며 나머지 약 800명은 육군과 필리핀 스카우트로부터 왔다. 이러한 잡다한 병력을 통솔하는 일은 어려운 임무였다. 이들중에는 필리핀인 식당급사, 필리핀육군항공대의 지상병력, 잠수모함 카노푸스의 생존자, 스카우트 포병이 섞여 있었다. 대부분 보병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바탄에서 온 병력은 체력이 떨어져 전투에 부적합했다.


방어의 핵심은 해병대원이었다. 동부지구에는 제1대대 약 400명을 중심으로 1,115명을 배치했다. 중부지구에는 제3대대 약 500명을 중심으로 동부지구와 비슷한 병력을 배치했다. 서부지구는 제3대대 약 600명을 중심으로 915명을 배치했다. 각 지구에 배치된 병력은 이웃 지구에 적이 상륙하더라도 이동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적이 상륙한 지구에 대한 증원은 예비대의 몫이었다.


예비대는 약 800명으로 사령부 및 근무중대 약 300명과 임시제4해병대대 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월 10일에 창설된 임시제4해병대대는 해병대 소령이 대대장을 맡았지만 장교는 해군과 해병대가 반반이었으며 부사관 및 사병은 대부분 해군이었다. 해군수병은 자기 분야의 베테랑이었으나 보병전투에 대해서는 기본도 몰랐다. 하지만 애당초 오래 복무한 군인들이고 또한 열심히 배웠으므로 훈련 시간이 짧고 여건이 나빴다는 점을 감안하면 급히 실시한 보병훈련의 효과는 좋은 편이었다.


해안방어에 배정된 4,000명 이외에도 하워드 대령은 필요하면 거의 모든 병력을 해안방어에 동원할 수 있었다. 유사시 보급병, 공병, 헌병으로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병력을 해안방어에 동원할 계획이 세워져 있었으며 심지어 민간인에게도 방어구역이 할당되어 있었다.


해안방어에 대한 화력지원은 155mm 평사포 1문, 75mm 야포 23문, 그리고 3인치 해군포 2문이 맡았으며 야간상륙에 대비한 탐조등은 11개였다. 동부지구에는 75mm 야포 10문과 탐조등 6개가 배치되었다. 중부지구에는 155mm 평사포 1문, 75mm 야포 7문, 3인치 해군포 1문, 탐조등 3개가 배치되었다. 서부지구에는 75mm 야포 6문, 3인치 해군포 1문, 그리고 탐조등 2개가 배치되었다.


비록 개전 이래 3개월에 걸친 공습으로 코레히도르의 목조 건물은 거의 불타고 섬 전체에 폭탄 구덩이가 생겼지만 해안포와 대공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m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탄약고는 폭탄의 직격에도 버텨내었고 포대를 둘러싼 콘크리트는 대부분의 폭격으로부터 해안포와 대공포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카비테의 일본군 야포로부터 포격을 받은 포트 드럼과 프랭크의 경험은 공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곧 코레히도르도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야포사격이 단 하루만에 3달 동안의 공습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사기는 높은 편이었다.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믿는 병사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일본군이 코레히도르를 점령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건강상태도 4월 초까지는 양호했다. 공습에 의한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으며 배식량 감소로 인한 영향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습하고 먼지가 많은 터널에서 생활함으로서 생기는 가벼운 호흡기 질환이 입원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설사와 배탈 또한 흔했으나 바탄에서 골칫거리였던 이질이나 말라리아는 드물었다. 터널 안의 병원은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바탄의 병원보다는 훨씬 시설이 좋았으며 환자 수에 비하여 충분한 의약품을 보유했다.


(말린타 터널 속의 병원 모습.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9.html#29-2 P.533)


말린타 터널은 여전히 코레히도르의 핵심이었으며 바탄 점령 이후 수용인원이 늘어났다. 따라서 2층 침대와 3층 침대가 많아졌고 공기는 더 나빠졌으며 이와 벼룩도 더 기승을 부렸다.


코레히도르의 발전소는 핵심 시설로서 냉동창고와 양수기 가동에 필수적이었다. 말린타 터널에도 전기가 꼭 필요했으나 그곳에는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디젤발전기가 있었고 연료도 6월말까지 사용할 양이 있었다.


전기에 의존하는 코레히도로의 급수체계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다. 폭격으로 급수관이 부서지면 해당 구역의  병사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취수원으로 가서 물을 받아와야 했다. 물은 주로 직경 60cm, 길이 170cm 에 달하는 12인치 포탄의 장약통에 받았다. 장약통은 대량의 물을 저장하기 좋았으나 크고 무거워서 다루기 어려웠다. 병사들에게 물을 받아오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코레히도르에서 물이 충분했던 적은 없었으며 사람이 늘어나면서 급수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4월 3일에 바탄반도 함락에 대비하여 물을 최대한 비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때 확인된 섬의 최대 저수용량은 1100만 리터였는데 이 정도로는 발전소가 작동을 멈추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코레히도르에서는 하루 두끼를 먹었다. 아침은 해뜨기 전에 먹었으며 저녁은 해가 진 후 8시 전후로 먹었다. 아침 메뉴는 커피가 떨어지기 전에는 주로 토스트와 커피였으며 가끔씩 베이컨이나 소시지가 나왔다. 저녁은 주로 연어, 통조림 야채, 쌀푸딩이 나왔으며 가끔씩 신선한 소고기나 스튜가 나왔다. 많은 병사들이 아침으로 나온 토스트를 절반만 먹고 나머지를 아껴 두었다가 낮에 먹음으로써 저녁까지의 긴 시간을 견뎠다.


바탄에서와 마찬가지로 코레히도르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쌀이 식사에서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미군 병사들은 대체로 쌀을 싫어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일본군의 공습은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축내었다. 3월 28일에 냉동창고가 폭탄에 맞자 병사들은 그날과 다음날 대량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나 대신 이후 며칠간 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4월 3일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모든 식량을 말린타 터널 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옮길 수 없는 분량은 휘하 부대에 배분했다. 따라서 많은 부대가 여분의 식량을 받아 저장해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추가로 보급했다. 이후로 공습에 의한 식량손실은 사라졌다.


바탄반도의 병사들이 코레히도르에서는 호화판으로 먹는다고 의심했듯이 코레히도르에서는 해군이 잘 먹는다는 불만이 있었는데 이는 근거가 있었다. 해군 또한 식량배급을 절반으로 삭감당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자체적인 식량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해군 식탁에는 커피, 설탕, 잼, 통조림 과일 등이 더 자주 올라왔다. 이런 불평등은 웨인라이트 장군이 육군의 불만을 받아들여 3월 21일에 해군이 관리하던 식량을 전체 식량풀에 통합함으로써 사라졌다.


코레히도르에서는 바탄같은 기아 현상은 없었다. 바탄반도가 함락되었을 때 코레히도르에는 정량의 절반으로 10주 동안 먹을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4월 초까지는 2배 가까이 더 많은 식량이 있었는데 이는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나면서 항만방어사령관 무어 소장에게 20,000명이 정량의 절반으로 6월 30일까지 먹을 식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엄명한데 따른 것이었다. 4월 초에 바탄에서 일본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웨인라이트는 맥아더에게 20,000명이 아니라 현재 코레히도르에 있는 인원이 6월 30일까지 먹을 식량을 비축할 수 있도록 조건을 완화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에 따라 바탄반도의 병사들은 마지막 1주일 동안 코레히도르에서 보내온 식량으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었으나 대신 코레히도르의 식량 비축량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웨인라이트의 계산에 의하면 바탄이 함락되었을 당시 코레히도르에는 11,000명이 정량의 절반으로 먹을 경우 1942년 6월 20일까지 버틸 식량이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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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코레히도르 공격계획


1942년 4월 9일에 루손군이 항복하자 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즉시 코레히도르 공격을 준비했다. 혼마 중장은 루손군이 항복한 당일인 9일 정오에 제4사단장 기타노 겐조 중장에게 코레히도르 상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레히도르 상륙은 5월 이전에는 실시할 수 없었다. 상륙주정을 모아야했고 무기와 장비는 재정비해야 했다. 바탄전투로 지친 병력은 휴식을 취하고 재편성한 다음 상륙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야포와 비행기는 코레히도르의 방어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상륙의 주력을 맡은 제4사단은 캅카벤 부근에 집결하여 상륙훈련에 몰두했다. 제4사단은 보병 9개 대대, 야포병 3개 대대, 산포병 및 구포 각 1개 대대, 박격 1개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기에 제16사단으로부터 전차제7연대, 산포병제51연대제3대대, 나가노지대로부터 독립구포제2대대, 그리고 제14군으로부터 독립구포제14대대, 박격1개 중대를 배속받았다.

제16사단은 남쪽 카비테로 가서 엘프레일섬과 카라바오섬에 위장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쪽으로 떠나기 전에 제16사단은 제4사단에게 전차제7연대, 산포병제51연대제3대대를 넘겼고 군포병대에 15cm 유탄포 1개 대대와 제22야포연대를 넘겼다. 또한 바탄반도의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보병단장이 지휘하는 보병제20연대를 제14군에 넘겼다. 대신 수색제16연대가 복귀했으며 10cm 캐넌포를 장비한 야전중포병제8연대의 1개 중대도 복귀하여 카비테  부근의 터네이트에 방열했다.

제65여단은 북부 루손 및 중부 루손 동부지역에 대한 치안확보 임무를 맡았으며 제21보병단(나가노지대)은 중부 루손 서부지역에 대한 치안확보임무를 맡았다.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항공기와 야포가 코레히도르의 방어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제22비행단은 재정비를 위하여 코레히도르에 대한 정찰을 제외하고 2주간 활동을 중지했다. 다만 해군은 이 기간에도 육상공격기를 내보내어 꾸준하게 폭격했다.

기타지마 중장의 제14군 포병대도 코레히도르를 포격했다. 기타지마 중장은 야포들을 캅카벤 주변과 마리벨스 북쪽의 고지대에 전개했다. 대포병사격을 피하기 위하여 야포는 분산배치했으며 주의깊게 위장했다.


제14군포병대는 24cm 유탄포 5개 중대, 15cm 캐넌포 3개 중대, 15cm 유탄포 5개 중대, 10cm 캐넌포  3개 중대, 10cm 유탄포 5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여기에 제16사단으로부터 15cm 유탄포 1개 중대와 야포병제22연대(제1대대의 1개 중대 감편)가 배속되었다. 군포병대에는 이외에도 기구중대, 포병정보연대, 그리고 견인중대가 있었다. 기구중대는 병력 150명, 차량 25대, 그리고 관측용 기구 1개로 이루어졌다. 중좌가 지휘하는 포병정보연대는 본부, 음향 및 섬광분석반, 측량반, 9개팀으로 이루어진 제도반, 그리고 6개 청음초를 가진 청음반으로 이루어져 675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14군포병대의 야포 수는 116문으로 상세는 다음과 같다.


24cm 유탄포 10문

15cm 캐넌포 10문

15cm 유탄포 36문

10cm 캐넌포 16문

10cm 유탄포 12문

7.5cm 야포 32문


공격준비 기간중 혼마 장군을 괴롭힌 2가지의 문제는 상륙주정 확보와 말라리아였다.


제14군의 상륙주정은 주로 링가옌만과 올롱가포에 있었는데 소형주정만 육지로 수송이 가능했고 대형 주정은 코레히도로와 마리벨스 사이의 북쪽 수로를 통해 마닐라만으로 들여와야 했다. 낮에는 코레히도르의 해안포가 주정의 통과를 막을 것이었다. 밤에는 사정이 나았으나 소음은 숨길 수 없었다.

제14군이 고민하고 있던 4월 11일에 해군이 대낮에 발동정을 북쪽 수로를 통해 마닐라만에 진입시키려고 시도했다. 오후 6시에 코레히도르의 해안포가 불을 뿜자 주정은 대파되어 철수했다. 이로써 대낮에 북쪽 수로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혼마 장군은 해군의 경거망동 때문에 적이 주정 통과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크게 화를 냈다.


제14군은 야간에 야포사격과 공습으로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주의를 분산시키면서 소수의 주정을 북쪽수로를 통하여 마닐라만으로 진입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다. 4월 13일에 독립공병연대가 북쪽 수로의 양안에 대해 지형과 해면상황을 면밀히 관찰한 후 14일 밤에 첫 시도가 있었다. 제14군포병대, 제4사단포병대, 그리고 제22비행단의 비행기들이 코레히도르를 공격하여 주의를 분산시키는 사이 공병제22연대 소속의 대발 5척이 북쪽 수로를 통하여 무사히 마닐라만에 진입했다. 이후 같은 방식으로 다수의 주정이 같은 방식으로 마닐라만에 진입했다.

북쪽 수로를 통하여 마닐라만에 진입한 주정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4월 14일 대발 5척

16일 대발 10척

17일 대발 5척, 특대발 5척, 장갑정 3척

27일 대발 5척,

5월 3일 대발 10척


올롱가포에 있던 소발 22척은  4월 12일에서 21일에 걸쳐 제14군포병대의 견인차량을 이용하여 바탄반도 동해안의 오라니로 수송되었다. 


혼마 장군 입장에서는 말라리아도 골칫거리였다. 일본군의 입원환자는 4월 3일 현재 15,500 명이었다. 그런데 의약품과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루손군의 항복으로 일본군이 말라리아가 득실대는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입원환자가 30,600명으로 급증했는데 28,000명이 말라리아 환자였다. 특히 코레히도르 상륙을 담당한 제4사단이 가장 큰 피해를 입어 4월 중순이 되자 전투 가능한 병력이 사단의 1/3로 줄어들었으며 1개 연대가 상륙훈련을 하는데 250명만이 참가한 적도 있었다. 혼마 장군이 거듭 요청한 끝에 4월 말에 퀴닌 300,000정이 비행기에 실려 필리핀에 도착했다. 이로써 5월 초로 예정된 공격에 맞추어 말라리아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제14군은 4월 28일에 코레히도르 상륙을 위한 야전명령을 하달했으나 날짜는 확정하지 않았다. 날짜를 정하지 않은 이유는 보안문제도 있었지만 상륙주정의 확보가 느려지고 말라리아가 창궐하면서 4월 28일의 시점에서는 언제 공격이 가능할지 혼마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5월 초가 되어 상륙주정이 확보되고 일본에서 보내준 퀴닌으로 말라리아도 잦아들자 혼마 장군은 5월 2일에 명령을 내려 공격일을 5월 5일로 확정했다.


일본군은 포로를 심문하여 코레히도르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 그들은 중요한 해안포대의 위치를 2개 빼고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근접전용 포대의 위치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중요 시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섬의 급수시설, 통신시설, 도로망과 철도망, 발전소, 저장소, 막사의 위치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사용한 지도는 정확도와 자세함에서 미군의 지도와 거의 비슷했다.


일본군은 보병의 방어태세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며 말린타 터널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말린타 터널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여 코레히도르와 바탄반도를 잇는 해저터널이 있다고 믿었다. 심문관은 바탄반도에서 잡은 포로에게 해저터널 입구의 위치를 대라고 윽박질렀으나 포로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해저터널의 입구가 어딘지 알려줄 수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일본군은 바탄반도 쪽의 입구 찾기를 포기했지만 코레히도르를 점령한 후 다시 한번 해저터널의 입구를 찾아 코레히도르를 샅샅이 수색했다.


코레히도르 상륙 계획의 골자는 야포와 비행기의 지원 아래 전차와 보병으로 이루어진 상륙부대가 기습적으로 야간 상륙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상륙지점은 2곳으로 첫날에는 코레히도르의 꼬리 부분에 선발대가 상륙하고 다음날 밤에 주력이 머리 부분에 상륙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두 부대는 서로를 향하여 전진하여 목 부근에서 합류함으로써 코레히도르 점령을 완수할 것이었다. 이후 필요하다면 제4사단이 카발로를 점령하고 카비테에서 대기 중인 제16사단이 엘프레일 및 카라바오섬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바탄반도에서 바라본 코레히도르의 모습. 화살표는 일본군의 상륙예정지점이다.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9.html#29-1  P.520)


상륙을 위하여 혼마 장군은 제4사단에게 2개의 해상작업대를 배속시켰다. 독립공병제23연대로 이루어진 제1해상작업대는 상륙주정으로 병력을 수송하여 상륙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독립공병제21연대로 이루어진 제2해상작업대는 코레히도르 부근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제1해상작업대를 보호하고 상륙시 화력지원을 맡았다. 제2해상작업대는 포정 또는 무장한 어선 2-4척으로 이루어진 11개 편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의 무장을 위하여 제65여단에서 독립속사포 중대 1개, 독립산포병제3연대의 1개 대대, 제16사단에서 독립속사포 1개 중대 그리고 마닐라 방위대에서 야포병제22연대의 2개 중대, 야전고사포제47대대의 고사포 1개 소대가 차출되었다.


제4사단이 상륙준비를 하는 동안 포병대는 4월 10일부터 코레히도르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포병대는 제4사단이 상륙하기 전에 코레히도르의 해안포, 대공포, 탐조등, 근접전용 야포, 방어시설과 해안의 장애물을 파괴할 것이었다.

공습도 실시했으나 해군의 육상공격기가 주로 담당하고 제22비행단에서는 폭격기 1개 중대만 참가했다. 제22비행단의 주력은 4월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참가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상륙 직후에 코레히도르가 항복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혼마 장군은 만일 백기를 가진 사절이 도착할 경우 즉시 자신에게 알려야하며 군사령부로부터 전투중지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했다.


제14군은 공격의도를 숨기기 위하여 노력했다. 공격부대가 주둔하는 곳의 민간인은 모두 내쫓았고 코레히도르에 뿌리는 전단에는 공격하겠다는 위협은 피하고 봉쇄로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의도를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는 필리핀의 전투가 이미 끝났으며 앞으로 일본군은 군정 실시와 잔당 소탕에 주력하겠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혼마 장군은 4월 29일에 열리는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떠들썩하게 마닐라에 입성했으며 행사장에서는 시종 느긋하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행사가 끝나자 그는 마닐라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소탕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민다나오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혼마 장군과 참모들은 즉시 바탄반도로 돌아와 코레히도르 공격을 위한 막바지 준비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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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민다나오 함락(3) - 카가얀 지구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 델몬테 비행장, 그리고 샤프 장군의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부가 있는 중요한 카가얀 지구의 방어를 위하여 샤프 장군은 제102사단(PA)과 민다나오군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102사단은 제103보병연대와 제61 및 제81야포연대(보병으로 전환)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02사단장이자 지구사령관인 윌리엄 모스 대령은 주력을 타골론과 카가얀 사이의 마칼라자만 해안선에 투입했다. 타골론과 사어 하이웨이에 이르는 6.4km 길이의 우익은 존 우드브리지 중령의 제81야포연대가 맡았다. 우드브리지 중령에게는 제30폭격비행대대(US) 요원 65명이 증원되었다. 사어 하이웨이에서 커그만강 사이의 6.4km에 이르는 중앙은 하이럼 타킹턴 중령의 제61야포연대가 맡았고 커그만강에서 카가얀강에 이르는 좌익은 조셉 웹 소령의 제103보병연대가 담당했다.


(민다나오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3 P.509)


가와무라 지대는 제15구축대(오야시오, 구로시오)의 호위를 받으면서 1942년 5월 1일에 일로일로를 출항했다.

2일 오후에 미군정찰기가 가와무라 지대를 싣고 남하중인 일본선단을 발견했다. 병사들에게는 비상이 발령되었고 그날 밤에 선단이 마칼라자만에 진입하자 폭파계획이 실행되었다. 일본군은 오야시오, 구로시오의 화력지원 아래 3일 새벽 1시부터 방어선의 동쪽 끝인 타골론 부근에 상륙을 시작했다. 주력은 타골론에서 5km 정도 남쪽인 타골론강 하구에 상륙했고 일부는 타골론에 직접 상륙했다. 타골론을 지키던 필리핀군은 방어선 정면에 상륙을 감행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남쪽으로부터 일본군 주력이 달려오자 철수해야 했다. 일본군은 오전 중에 타골론과 사어 하이웨이 사이의 해안을 확보했다.


샤프 장군은 사어 하이웨이를 지키기 위하여 민다나오군에 남은 마지막 야포인 2.95인치 산포 3문을 보유한 폴 필립스 소령의 분견대와 제62 및 제93보병연대(PA)를 파견했다. 2.95인치 산포 분견대는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에 자리잡고는 포격으로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압력에 밀려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을 내어주고 640m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방어선을 폈다. 3일 오후가 되자 제93보병연대의 선두가 도착했으며 해가 질 때까지 연대 주력이 도착했다. 제61보병연대는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2개 보병연대는 2.95인치 산포 분견대의 화력 지원 아래 사어 하이웨이를 가로막는 강력한 방어선을 폈다.


해안의 상황은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안을 방어하던 제61및 제81야포연대와 제102보병연대는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제81야포연대는 철수 과정에서 80% 의 병력을 잃었으며 제102보병연대는 일본군의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탈출하다가 편제가 무너졌다. 3일 저녁이 되자 제103사단은 해안에서 10km 를 후퇴하여 사어 하이웨이를 따라 방어선을 폈다. 


3일 저녁에 샤프 장군은 모스, 우드브리지, 그리고 웹과 회의를 한 후 방어에 유리한 망기마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사어 하이웨이는 탱쿨란에서 2개로 갈라져 북쪽 가지는 달리리그, 남쪽 가지는 푼티안을 거쳐 다시 합류하는데 달리리그와 푼티안의 전방에는 망기마 계곡과 망기마강이 있어 강력한 자연장애물이 되었다.

 

방어해야 할 지점이 둘이었으므로 샤프 장군은 휘하 병력을 나누어 달리리그 지구과 푼티안 지구를 설정했다. 제102사단장 모스 대령이 지휘하는 달리리그군은 제62보병연대, 제81야포연대, 2.95인치 산포 분견대, 그리고 제43보병연대(PS) 소속의 필리핀스카우트 중대 2개로 이루어졌다. 윌리엄 달튼 대령이 지휘하는 푼티안군은 제61야포연대와 제93보병연대로 이루어졌다. 해안에서의 철수 과정에서 편제가 무너진 제102보병연대의 잔존병은 몇 개의 소부대로 재편되어 망기마 계곡 방어에 투입되었다.


망기마선으로의 후퇴는 3일 밤11시에 시작되어 4일 아침에 끝났다. 망기마선으로 후퇴함으로써 샤프 장군은 델몬테 비행장을 포기했다.

달리리그 지구에서는 앨런 세이어 중령의 제62보병연대가 망기마 계곡에 배치되었고 2.95인치 산포 분견대가 화력지원을 맡았다. 제43보병연대(PS)의 C 및 E중대와 제81야포연대는 예비대로서 달리리그에 주둔했다. 제81야포연대의 병력은 일본군 상륙 당시 1,000명에 달했으나 이때쯤엔 2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남쪽 푼티안 지구에서도 병력들이 참호를 파고 방어준비를 마쳤다.


일본군은 5월 4일과 5일 이틀을 소비하여 공격준비를 한 후 6일 아침부터 진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선두는 6일 오전에 탱쿨란을 통과하여 북쪽 가지를 따라 진격하다가 달리리그 전방의 망기마 계곡에서 제61보병연대의 방어선을 만나 멈추었다. 남쪽으로 향한 일부 병력도 역시 푼티안 전방에서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만나 멈추었다.


가와무라 장군은 남쪽 가지의 푼티안은 소수 병력으로 견제만 하고 주력을 북쪽 가지에 투입하여 달리리그를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일본군은 서둘지 않고  먼저 포격으로 방어선을 약화시켰다. 일본군 포병대가 6일 저녁에 탱쿨란에 도착하여 포격준비를 마쳤으며 포격은 7일과 8일 이틀 동안 공습과 함께 지속되었다. 충분히 포격을 가했다고 생각한 가와무라 장군은 8일 저녁 7시부터 보병을 내보내어 방어선에 침투를 시도했다. 침투에 성공한 일본군이 뒤에서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밤새 크고 작은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연대 주력은 이틀간의 포격과 공습에 시달린 후에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일본군이 총공격을 가하자 더이상 견뎌내지 못했다. 9일 오전 11시 30분에 제62보병연대는 방어선을 떠나 달리리그를 거쳐 동쪽으로 도망쳤다. 달리리그를 지키던 필리핀스카우트 중대 2개는 앨런 펙 소령의 지휘 아래 제62보병연대가 빠져나갈 때까지 시가지를 지키다가 포위당하기 직전에 철수했다.


필리핀군이 도망치는 길은 탁 트인 도로였다. 일본군의 야포와 공습, 그리고 추격하는 일본군의 소화기 사격을 받아가며 도망치던 달리리그군은 와해되었다. 저녁이 되자 2.95인치 산포 분견대 150명을 제외한 모든 부대의 편제가 무너졌다. 이제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가지는 일본군에게 개방되었다.


남쪽의 푼티안군은 여전히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으나 북쪽 가지를 통과한 일본군이 뒤쪽에서 공격하면 속절없이 포위되어 궤멸될 것이었다.  이제 망기마선을 지킬 희망은 사라졌으며 샤프 장군에게 남은 길은 항복 아니면 게릴라전 뿐이었다. 이로써 민다나오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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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민다나오 함락(2) - 라나오 지구


1942년 4월 29일 아침에 코타바토 북쪽의 파랑에 상륙한 가와구치 지대의 주력은 해안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파랑을 지키던 부대는 칼릭스토 드쿠 대령의 제1사단제2보병연대(PA)로서 총 병력은 880명이었으나 약 300명은 말라리아로 입원중이었다. 해안에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던 필리핀군은 일본군이 상륙하려 하자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일본군은 파랑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이곳을 지키던 필리핀군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코타바토에 상륙한 1개 대대와 연결했다. 드쿠 대령의 부대는 오전 11시까지 파랑을 지켰으나 이후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내륙으로 3km 들어가서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이로써 파랑이 개방되었으며 그날 오후에 일본군이 돌아와 파랑을 점령했다.


(민다나오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3 P.509)

 


파랑을 점령한 가와구치 지대의 다음 목표는 북쪽으로 35km 떨어진 말라방이었다. 말라방을 지키던 부대는 유진 미첼 대령의 제61보병연대(PA)였다. 유진 대령은 말라방 북쪽을 흐르는 마탈링강의 북안을 따라 방어선을 폈다. 2.95인치 산포 2문을 가진 제81포병연대(PA)가 화력지원을 맡았다. 


가와구치 장군은 병사의 피로를 덜기 위하여 도보로 행군하지 않고 파랑에서 수송선에 병사를 태워 북상한 후 30일 새벽 3시에 말라방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날이 밝자 마탈링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리핀군은 힘껏 싸웠으나 정오경에 일본군이 마탈링선의 좌익을 점령하여 돌출부를 만들었다. 유진 대령은 오후 2시에 좌익을 탈환하기 위하여 반격을 실시했으나 실패했고 일본군은 더 많은 병력을 돌출부에 투입했다.


이제 좌익 돌출부가 전투의 초점이 되었다. 좌익을 되찾지 못하면 마탈링선을 지킬 수 없었다. 유진 대령은 예비대는 물론 우익을 지키던 병력까지 모두 투입하여 좌익을 점거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하자 마탈링선을 포기해야 했다. 오후 8시에 필리핀군은 마탈링선을 떠나 1번도로를 따라 6km 떨어진 후방진지로 후퇴했다. 후퇴 과정에서 좌익을 맡았던 대대는 일본군에 막혀 1번도로로 나가지 못하고 작은 오솔길을 따라 후퇴함으로써 본대와 헤어졌다.


일본군은 5월 1일 아침 7시 30분에 새로운 방어선을 공격했다. 필리핀군은 다시 패하여 오전 10시 30분에 방어선을 버리고 8km 떨어진 새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철수 과정에서 1개 중대를 잃었으나 새로운 방어선에 도착하자 제84임시보병연대로부터 2개 중대가 증원되었으며 마탈링선에서 철수할 때 헤어졌던 대대의 생존자 120명도 도착하여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라나오지구사령관 가이 포트 준장은 유진 대령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선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1일 오후 1시에 방어선에 도달했다. 보병이 공격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군의 야포와 박격포가 공격준비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수시간 동안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후 해질녘에 총공격을 실시했다. 필리핀군은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오후 11시에 방어선이 점령되었을 때 제61보병연대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유진 대령은 90명의 부하를 데리고 1번도로를 따라 몇 km 철수한 후 도로봉쇄점을 설치하려 했다. 그러나 오전 2시 30분에 트럭을 탄 일본군이 들이닥쳐 참호를 파고 있던 필리핀군을 쫓아버리고 유진 대령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일본군은 라나오군의 2개 보병연대 중 하나인 제61보병연대를 와해시키고 연대장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제1대대장 야마다 소좌를 포함하여 약 30명이었다.


이제 라나오군에 남은 전력은 로버트 베시 중령의 제73보병연대(PA) 뿐이었다. 베시 중령은 휘하의 2개 대대와 남쪽으로부터 도망쳐 온 제61보병연대의 패잔병을 모아 라나오 호수 서쪽의 바콜로드에 방어선을 폈다. 나머지 1개 대대는 라나오지구의 북해안을 방어하고 있었다. 필리핀군은 라나오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얕은 강의 북안에 방어선을 폈으며 다리는 폭파했다. 연대의 유일한 야포인 2.95인치 산포 1문이 화력지원을 맡았다.


5월 2일 아침에 라나오 호수 남안의 거내시에 도착한 일본군은 휴식과 재정비를 마치고 3일 새벽에 경전차들을 앞세운 채 트럭을 타고 바콜로드를 향하여 출발했다. 3일 오전 8시에 전차는 폭파된 다리에 도달했다. 선두전차가 얕은 강물로 뛰어들자 2.95인치 산포가 포탄을 명중시켜 파괴했다. 그러자 나머지 전차는 감히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 기고만장하여 트럭을 타고 거침없이 진격하던 일본군 보병은 선두에 섰던 전차대가 갑자기 멈추자 필리핀군 방어선 바로 앞에서 황급히 트럭에서 내렸고 그 과정에서 필리핀군의 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야포가 도착하자 상황은 변했다. 야포가 필리핀군을 그 자리에 못박아두는 동안 일본정찰기가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유심히 살펴 방어선의 서쪽 끝을 확인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방어선의 서쪽으로 우회하여 제73보병연대를 포위하려고 했다. 결국 정오에 베시 중령은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다.


제73보병연대는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3일 밤에 라나오 호수 북쪽의 마라위에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일본군은 추격하지 않고 그날 마카잘라만에 상륙한 가와무라 지대와 연결하기 위하여 북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트럭에 올라탄 가와구치 지대는 민다나오 북해안의 일리간을 거쳐 6일에 카가얀에 도착함으로써 가와무라 지대와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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