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전투준비(2) - 일본군
미-필리핀군과 마찬가지로 일본군도 휴지기를 이용하여 전투준비를 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은 지친 병사들을 휴식시킨 후 새로 도착한 증원군과 함께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1942년 2월말 현재 제14군의 상황은 심각하여 전투에 적합한 병력이 3,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보급상황도 풍족하지는 않았다. 일본군의 배식 정량은 하루에 1.8kg정도였으나 본토로부터의 보급량이 부족하여 1월부터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14군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현지주민에게서 쌀을 사들였고 거부할 경우 훔치거나 약탈했으나 그래도 부족하여 2월 중순이 되자 하루 배식량이 쌀 790g에 약간의 야채, 고기, 생선에 불과할 정도로 떨어졌다.
의약품도 부족했다. 퀴닌이 모자라서 1월부터 후방 병력에 대한 예방적 투여는 중단되었고 3월 10일 이후로는 일선병력에 대한 예방적 투여마저 중단되고 오직 발병하여 입원한 환자에게만 투여되었다. 디프테리아, 파상풍, 괴저, 이질약도 부족했다.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13,000명의 일본군이 질병으로 입원했다.
설상가상으로 문책성 인사이동까지 있었다. 대본영은 제14군의 성과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필리핀에 병력과 보급품을 보내주는 대신 제14군의 참모장, 작전참모 및 보급참모를 경질했다. 경질된 마에다 장군을 이어 제14군 참모장이 된 와치 다카지 소장이 3월 1일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문책과는 별도로 제14군의 전력은 강화되었다. 2월 말부터 일본군 증원병력이 필리핀에 쇄도했다.
2월 26일에 제21사단의 보병단장 나가노 가메이치로 소장이 이끄는 나가노지대가 필리핀에 도착했다. 나가노지대는 제21보병단사령부, 보병제62연대, 산포1개 대대, 공병1개 중대로 이루어져 약 4,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제14군에 증원된 가장 큰 단일부대는 기타노 겐조 중장의 제4사단이었다. 사단 및 보병단사령부, 보병1개연대, 그리고 포병 및 지원부대로 이루어진 제4사단의 선두가 2월 27일에 링가옌만에 상륙했으며 이후 추가 상륙이 이어져 3월 15일까지 대부분 상륙을 마쳤고 마지막 병력은 4월 3일에 도착했다.
제4사단은 강력한 사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장비는 열악했으며 병력은 11,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연대는 3개 대대와 보병포중대로 이루어졌다. 대대의 경우 소총중대 수는 4개가 아닌 3개였으며 기관총중대와 대대포소대가 있었다. 대전차포가 모자랐으며 야전병원도 4개가 아닌 2개였다. 혼마 중장은 제4사단이 일본군 사단 중에서 가장 장비가 열악하다고 평가했다.
제14군의 기존부대들은 병력을 받아 소모된 병력을 보충했다. 제65여단은 3월 1일에서 4일에 걸쳐 약 60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약 3,500명의 병력을 보충받았다. 제16사단도 3월 8일과 9일에 제65여단과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받았다.
4월 2일에는 경비부대인 제10독립수비대(이쿠타 도라오 대좌)가 도착했다.
이외에도 말레이와 보르네오에 전개했던 제5 및 제18사단의 일부가 4월 초에 링가옌만에 상륙했다. 제14군은 이 부대들을 2개 지대로 편성하여 비사야 및 민다나오 점령에 투입했다.
포병도 증강되었다. 지휘체계도 개편되어 제4사단, 제16사단, 제65여단, 그리고 나가노지대에 소속된 포병을 제외한 포병세력은 제14군포병대가 되어 홍콩에서 건너온 기타지마 기시오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3월 29일 현재 현재 제14군의 포병세력은 다음과 같다.(야포 = 7.5cm 야포, 산포 = 7.5cm 산포)
제4사단(야포 24문, 10cm 유탄포 12문)
제16사단(야포 24문, 10cm 유탄포 12문)
제65여단(야포 12문)
나가노지대(산포9문)
제14군포병대(사령관 기타지마 중장)
독립산포병제3연대(산포 24문)
야전중포병제1연대(15cm 유탄포 24문)
야전중포병제8연대(10cm 유탄포 16문)
독립구포제2대대(15cm 구포 12문)
독립구포제14대대(98식 구포 8문)
독립구포제15대대(98식 구포 8문)
중포병제1연대(24cm 유탄포 8문)
독립중포병제2중대(24cm 유탄포 2문)
독립중포병제9대대(15cm 캐넌포 10문)
박격제3대대(경박격포 36문)
포병정보제5연대
제3트랙터대
기구제1중대
야포 60문, 산포 33문, 10cm 유탄포 24문, 15cm 유탄포 24문, 10cm 캐넌포 16문, 15cm 구포 12문, 98식 구포 16문, 24cm 유탄포 10문, 15cm 캐넌포 10문, 경박격포 36문으로 합계 241문이었다. 1문당 준비한 포탄은 3월 29일 현재 41식산포 620발, 94식산포 1,300발, 개조38식야포 1,900발, 91식 10cm 유탄포 3,060발, 96식 15cm 유탄포 588발, 92식 10cm 캐넌포 1,044발, 98식 구포 8발, 45식 24cm 유탄포 640발, 96식 24cm 유탄포 200발, 89식 15cm 캐넌포 891발, 96식 15cm 캐넌포 375발, 94식 경박격포 780발이었다. 일본군은 공격 시작 후 2주 내에 사용할 1문당 포탄량을 10cm 캐넌포 720발, 15cm 캐넌포 540발, 10cm 유탄포 900발, 45식 24cm 유탄포 200발, 96식 24cm 유탄포 60발로 정했다.
항공세력도 증강되었다. 합계 중폭격기 60대로 이루어진 2개 중폭격전대가 말레이를 떠나 3월 16일에 클라크비행장에 도착했다. 제14군의 항공세력은 미카미 기조 소장이 지휘하는 제22비행단으로 재편되었다. 제22비행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제22비행단사령부(사령관 미카미 소장)
제10독립비행대
제10독립비행대본부
독립비행제76중대(97식사령부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52중대(97식군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74중대(98식직접협동정찰기 8대)
비행제16전대(97식경폭격기 32대)
제11항공지구사령부
제48비행장대대
제18비행장대대
제13비행장대대
제32비행장대대
제8비행장대대
배속부대
비행제60전대(97식중폭격기 35대)
비행제62전대(97식중폭격기 25대)
비행제50전대제3중대(97식전투기 10대)
제96비행장대대
야전기상제2대대본부
기상제3중대
야전고사포제40대대의 1개 중대
독립자동차제297중대
육상근무제111중대
건축근무제56중대
휴식과 재편성을 마친 제14군의 기존 병사들과 새로 도착한 병사들이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혼마 장군은 공격계획을 짰다. 바탄반도 내의 미-필리핀군을 여전히 40,000명으로 과소평가한 가운데 작성된 계획은 미-필리핀군이 3중 방어선을 펼 것이라는 가정 아래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사맛산을 점령하고 이어서 리마이 방어선을 뚫은 다음 최종적으로 마리벨스산 방어선을 뚫고 바탄반도 남단에 도달할 것이었다. 이어서 코레히도르 상륙을 준비한다는 계획이었다.
1월말 공세에서 미-필리핀군을 얕보고 공격을 서둘렀다가 낭패를 보았던 혼마 장군은 이번에는 여유있게 시간계획을 잡았다. 그는 사맛산을 점령하는데 1주일, 리마이 방어선을 뚫는데 2주일, 그리고 마리벨스산 방어선을 뚫고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데 1주일, 합계 1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3월 23일에 산페르난도에서 열린 회의에서 공격계획이 확정되었다. 공세의 주력은 기타노 중장의 제4사단과 나라 중장의 제65여단이었다. 우익을 맡은 제65여단이 사맛산 서쪽을 공격하고 제4사단은 중앙과 좌익을 맡아 사맛산을 점령할 것이었다. 서해안의 제1필리핀군단 정면에서는 모리오카 중장의 제16사단이 위장공격을 실시하고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리마이 북쪽 해안에 상륙위협을 가하여 주공을 지원할 것이었다. 24일부터 미카미 장군의 제22비행단이 해군기와 함께 미-필리핀군 전선을 공습하고 보병의 공격개시 직전에 기타지마 장군의 포병이 미-필리핀군 방어선에 포격을 가하여 약화시킬 것이었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3.html#23-2 P.415)
3월 23일의 회의에서 공격일을 4월 3일로 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공격시간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제4사단장 기타노 중장은 정오에 공격하길 원했다. 보병을 전선에 전개시킨 상태로 시간을 끌어봐야 적에게 시간여유만 준다는 것이었다. 반면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해질녘에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낮에 공격했다가는 보병이 적의 방어선에 도달하기도 전에 적의 야포에게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여 공격시간은 오후 3시로 정했다.
주공은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익(서쪽)은 제65여단으로 제2필리핀군단의 서쪽 끝을 공격하여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 판틴간강 계곡과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여 사맛산의 서쪽지역을 장악할 것이었다.
중앙과 좌익(동쪽)은 제4사단이 맡았다. 중앙은 제4보병단장 다니구치 구레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4사단 우익대였다. 제4사단우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4보병단사령부
보병제8연대의 1개 대대
보병제61연대
전차제7연대(2개 중대 감편)
독립산포병제3연대제2대대(1개중대감편)
독립구포제2대대(1개중대감편)
독립구포제15대대
박격제3대대(1개중대 감편)
공병제4연대(1개중대 및 2개소대 감편)
우익대는 티아위르강을 건넌 다음 캣몬강을 따라 D구역의 한가운데를 남하하여 사맛산으로 향할 것이었다.
주공의 좌익(동쪽을 맡은 것은 )제4사단의 좌익대였다. 보병제8연대장 모리타 하루지 대좌가 지휘하는 좌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8연대(1개대대 감편)
독립산포병제3연대제2대대의 1개 중대
독립구포제2대대의 1개 중대
공병제4연대의 1개 중대(2개소대 감편)
좌익대는 4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여 제21사단(PA)이 지키는 D 구역의 동쪽을 통과하여 사맛산으로 향할 것이었다.
제4사단의 포병대는 야포병제4연대, 공병대는 독립공병제23연대(2개중대 감편), 예비대는 보병제37연대(1개대대 감편), 치중대는 치중병제4연대였으며 기타 사단직할부대들이 있었다.
서해안에서는 제16사단이 공격 3일 전인 3월 31일부터 제1필리핀군단 정면에 위장공격을 시작하여 4월 첫주 내내 제1필리핀군단을 그 자리에 붙잡아 둔 다음 4월 8일부터 제4사단의 뒤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제4사단의 동쪽 측면을 지키다가 나중에 오리온-리마이 사이 해안에 상륙하려는 듯이 위장함으로써 이 방면의 미-필리핀군을 고착견제할 것이었다.
혼마 장군의 예상으로는 1주일이 지나면 제4사단은 마말라강에, 제65여단은 마리벨스산 기슭에 도달할 것이었다. 혼마는 이곳에 미군이 강력한 리마이 방어선을 형성할 것으로 보았다. 조공을 맡았던 제16사단과 나가노지대까지 모두 동원하여 공격하더라도 리마이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2주가 걸릴 것으로 보았다. 이후 마리벨스산 부근의 최종방어선을 뚫은 후 소탕하는데 1주일이 걸릴 것이었다.
제4사단장 기타노 중장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일단 사맛산을 점령하면 그 이후로는 도망치는 미-필리핀군을 일방적으로 추격하는 소탕전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옳았다.
3월 둘째주부터 일선의 미-필리핀군은 일본군이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걸 느꼈다. 일본군은 수색차장을 실시해 미-필리핀군 정찰대의 접근을 막았으며 정찰대를 자주 내보내어 무인지대에서 정찰대끼리 교전이 잦아졌다. 3월 마지막 주가 되자 일본군의 수색차장은 미-필리핀군 전선 900m 앞까지 접근했다.
3월 중순부터 미-필리핀군 병사들은 일본군 전선 후방에서 병력이 남하하고 도로공사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활동이 뜸하던 일본기들도 3월 하순부터 떼지어 날아다니면서 방어선, 포대, 그리고 후방의 보급소를 공격했다.
팜팡가강 하구에서는 다수의 주정이 목격되었다. 일본군은 대형 주정에 75mm 산포를 싣고 남하하여 동해안에 포격을 가했다. 투사량이 적고 명중율도 떨어져 피해는 가벼웠으나 이런 행동은 일본군이 동해안에 상륙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높였다.
일본군 포병의 움직임도 심상찮았다. 3월 말에 아부케이 서쪽에서 일본군의 관측용 기구가 떠오르자 미-필리핀군 병사들은 일본군에게 새로운 포병부대가 도착했음을 알았다.
공격을 준비하는 도중 혼마 장군은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항복권고문을 떨어뜨렸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3월 24일에 미-필리핀군이 사맛산에 침투한 일본군 정찰대와 교전하여 장교 1명을 사살했는데 이 장교에게서 사맛산 부근의 전차기동로, 적절한 도하점, 그리고 미군포대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내용의 명령문이 나왔다. 공격이 임박했다는 조짐이었다.
3월 말이 되자 일본기들이 미-필리핀군의 행동을 크게 제약했다. 일본기들은 교대로 날아와 하루종일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공습으로 인한 피해는 가벼웠지만 하루종일 머리 위에 떠있는 일본기때문에 미-필리핀군은 낮에는 참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일본기의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참호에 숨어있는 미-필리핀군의 모습.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3.html#23-3 P.419)
3월 28일이 되자 일본군이 공격시작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65여단은 판틴간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제21 및 제41사단(PA)의 전초선을 밀어내고 공격에 유리한 지형을 차지했다. 제65여단의 동쪽에서는 제4사단이 4월 2일까지 티아위르-탈리사이강 북안에 전개를 마쳤다.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전개했으며 서해안에서는 제16사단이 3월 31일부터 위장공격을 시작했다.
4월 2일이 되자 25km에 걸친 전선을 따라 배치된 나가노지대, 제4사단, 제65여단, 제16사단이 공격준비를 마쳤다. 혼마 중장은 이번에는 승리하리라고 확신했다.
'1941년 및 그 이전 > 필리핀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핀 함락(62)-D구역 붕괴 (0) | 2018.06.03 |
---|---|
필리핀 함락(61)-공격 개시 (0) | 2018.06.02 |
필리핀 함락(59)-전투준비(1) (0) | 2018.06.01 |
필리핀 함락(58)-보급노력 (0) | 2018.06.01 |
필리핀 함락(57)-싸우는 사생아들(3) (0) | 2018.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