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전투준비(2) - 일본군


미-필리핀군과 마찬가지로 일본군도 휴지기를 이용하여 전투준비를 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은 지친 병사들을 휴식시킨 후 새로 도착한 증원군과 함께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1942년 2월말 현재 제14군의 상황은 심각하여 전투에 적합한 병력이 3,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보급상황도 풍족하지는 않았다. 일본군의 배식 정량은 하루에 1.8kg정도였으나 본토로부터의 보급량이 부족하여 1월부터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14군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현지주민에게서 쌀을 사들였고 거부할 경우 훔치거나 약탈했으나 그래도 부족하여 2월 중순이 되자 하루 배식량이 쌀 790g에 약간의 야채, 고기, 생선에 불과할 정도로 떨어졌다.


의약품도 부족했다. 퀴닌이 모자라서 1월부터 후방 병력에 대한 예방적 투여는 중단되었고 3월 10일 이후로는 일선병력에 대한 예방적 투여마저 중단되고 오직 발병하여 입원한 환자에게만 투여되었다. 디프테리아, 파상풍, 괴저, 이질약도 부족했다.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13,000명의 일본군이 질병으로 입원했다.


설상가상으로 문책성 인사이동까지 있었다. 대본영은 제14군의 성과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필리핀에 병력과 보급품을 보내주는 대신 제14군의 참모장, 작전참모 및 보급참모를 경질했다. 경질된 마에다 장군을 이어 제14군 참모장이 된 와치 다카지 소장이 3월 1일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문책과는 별도로 제14군의 전력은 강화되었다. 2월 말부터 일본군 증원병력이 필리핀에 쇄도했다.

2월 26일에 제21사단의 보병단장 나가노 가메이치로 소장이 이끄는 나가노지대가 필리핀에 도착했다. 나가노지대는 제21보병단사령부, 보병제62연대, 산포1개 대대, 공병1개 중대로 이루어져 약 4,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제14군에 증원된 가장 큰 단일부대는 기타노 겐조 중장의 제4사단이었다. 사단 및 보병단사령부, 보병1개연대, 그리고 포병 및 지원부대로 이루어진 제4사단의 선두가 2월 27일에 링가옌만에 상륙했으며 이후 추가 상륙이 이어져 3월 15일까지 대부분 상륙을 마쳤고 마지막 병력은 4월 3일에 도착했다. 

제4사단은 강력한 사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장비는 열악했으며 병력은 11,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연대는 3개 대대와 보병포중대로 이루어졌다. 대대의 경우 소총중대 수는 4개가 아닌 3개였으며 기관총중대와 대대포소대가 있었다. 대전차포가 모자랐으며 야전병원도 4개가 아닌 2개였다. 혼마 중장은 제4사단이 일본군 사단 중에서 가장 장비가 열악하다고 평가했다.


제14군의 기존부대들은 병력을 받아 소모된 병력을 보충했다. 제65여단은 3월 1일에서 4일에 걸쳐 약 60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약 3,500명의 병력을 보충받았다. 제16사단도 3월 8일과 9일에 제65여단과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받았다.


4월 2일에는 경비부대인 제10독립수비대(이쿠타 도라오 대좌)가 도착했다.


이외에도 말레이와 보르네오에 전개했던 제5 및 제18사단의 일부가 4월 초에 링가옌만에 상륙했다. 제14군은 이 부대들을 2개 지대로 편성하여 비사야 및 민다나오 점령에 투입했다.


포병도 증강되었다. 지휘체계도 개편되어 제4사단, 제16사단, 제65여단, 그리고 나가노지대에 소속된 포병을 제외한 포병세력은 제14군포병대가 되어 홍콩에서 건너온 기타지마 기시오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3월 29일 현재 현재 제14군의 포병세력은 다음과 같다.(야포 = 7.5cm 야포, 산포 = 7.5cm 산포)


제4사단(야포 24문, 10cm 유탄포 12문)

제16사단(야포 24문, 10cm 유탄포 12문)

제65여단(야포 12문)

나가노지대(산포9문)


제14군포병대(사령관 기타지마 중장)

독립산포병제3연대(산포 24문)

야전중포병제1연대(15cm 유탄포 24문)

야전중포병제8연대(10cm 유탄포 16문)

독립구포제2대대(15cm 구포 12문)

독립구포제14대대(98식 구포 8문)

독립구포제15대대(98식 구포 8문)

중포병제1연대(24cm 유탄포 8문)

독립중포병제2중대(24cm 유탄포 2문)

독립중포병제9대대(15cm 캐넌포 10문)

박격제3대대(경박격포 36문)

포병정보제5연대

제3트랙터대

기구제1중대


야포 60문, 산포 33문, 10cm 유탄포 24문, 15cm 유탄포 24문, 10cm 캐넌포 16문, 15cm 구포 12문, 98식 구포 16문, 24cm 유탄포 10문, 15cm 캐넌포 10문, 경박격포 36문으로 합계 241문이었다. 1문당 준비한 포탄은 3월 29일 현재 41식산포 620발, 94식산포 1,300발, 개조38식야포 1,900발, 91식 10cm 유탄포 3,060발, 96식 15cm 유탄포 588발, 92식 10cm 캐넌포 1,044발, 98식 구포 8발, 45식 24cm 유탄포 640발, 96식 24cm 유탄포 200발, 89식 15cm 캐넌포 891발, 96식 15cm 캐넌포 375발, 94식 경박격포 780발이었다. 일본군은 공격 시작 후 2주 내에 사용할 1문당 포탄량을 10cm 캐넌포 720발, 15cm 캐넌포 540발, 10cm 유탄포 900발, 45식 24cm 유탄포 200발, 96식 24cm 유탄포 60발로 정했다.


항공세력도 증강되었다. 합계 중폭격기 60대로 이루어진 2개 중폭격전대가 말레이를 떠나 3월 16일에 클라크비행장에 도착했다. 제14군의 항공세력은 미카미 기조 소장이 지휘하는 제22비행단으로 재편되었다. 제22비행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제22비행단사령부(사령관 미카미 소장)


제10독립비행대

제10독립비행대본부

독립비행제76중대(97식사령부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52중대(97식군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74중대(98식직접협동정찰기 8대)

비행제16전대(97식경폭격기 32대)


제11항공지구사령부

제48비행장대대

제18비행장대대

제13비행장대대

제32비행장대대

제8비행장대대


배속부대


비행제60전대(97식중폭격기 35대)

비행제62전대(97식중폭격기 25대)

비행제50전대제3중대(97식전투기 10대)


제96비행장대대

야전기상제2대대본부

기상제3중대

야전고사포제40대대의 1개 중대

독립자동차제297중대

육상근무제111중대

건축근무제56중대


휴식과 재편성을 마친 제14군의 기존 병사들과 새로 도착한 병사들이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혼마 장군은 공격계획을 짰다. 바탄반도 내의 미-필리핀군을 여전히 40,000명으로 과소평가한 가운데 작성된 계획은 미-필리핀군이 3중 방어선을 펼 것이라는 가정 아래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사맛산을 점령하고 이어서 리마이 방어선을 뚫은 다음 최종적으로 마리벨스산 방어선을 뚫고 바탄반도 남단에 도달할 것이었다. 이어서 코레히도르 상륙을 준비한다는 계획이었다.


1월말 공세에서 미-필리핀군을 얕보고 공격을 서둘렀다가 낭패를 보았던 혼마 장군은 이번에는 여유있게 시간계획을 잡았다. 그는 사맛산을 점령하는데 1주일, 리마이 방어선을 뚫는데 2주일, 그리고 마리벨스산 방어선을 뚫고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데 1주일, 합계 1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3월 23일에 산페르난도에서 열린 회의에서 공격계획이 확정되었다. 공세의 주력은 기타노 중장의 제4사단과 나라 중장의 제65여단이었다. 우익을 맡은 제65여단이 사맛산 서쪽을 공격하고 제4사단은 중앙과 좌익을 맡아 사맛산을 점령할 것이었다. 서해안의 제1필리핀군단 정면에서는 모리오카 중장의 제16사단이 위장공격을 실시하고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리마이 북쪽 해안에 상륙위협을 가하여 주공을 지원할 것이었다. 24일부터 미카미 장군의 제22비행단이 해군기와 함께 미-필리핀군 전선을 공습하고 보병의 공격개시 직전에 기타지마 장군의 포병이 미-필리핀군 방어선에 포격을 가하여 약화시킬 것이었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3.html#23-2 P.415)


3월 23일의 회의에서 공격일을 4월 3일로 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공격시간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제4사단장 기타노 중장은 정오에 공격하길 원했다. 보병을 전선에 전개시킨 상태로 시간을 끌어봐야 적에게 시간여유만 준다는 것이었다. 반면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해질녘에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낮에 공격했다가는 보병이 적의 방어선에 도달하기도 전에 적의 야포에게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여 공격시간은 오후 3시로 정했다.


주공은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익(서쪽)은 제65여단으로 제2필리핀군단의 서쪽 끝을 공격하여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 판틴간강 계곡과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여 사맛산의 서쪽지역을 장악할 것이었다.

중앙과 좌익(동쪽)은 제4사단이 맡았다. 중앙은 제4보병단장 다니구치 구레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4사단 우익대였다. 제4사단우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4보병단사령부

보병제8연대의 1개 대대

보병제61연대

전차제7연대(2개 중대 감편)

독립산포병제3연대제2대대(1개중대감편)

독립구포제2대대(1개중대감편)

독립구포제15대대

박격제3대대(1개중대 감편)

공병제4연대(1개중대 및 2개소대 감편)


우익대는 티아위르강을 건넌 다음 캣몬강을 따라 D구역의 한가운데를 남하하여 사맛산으로 향할 것이었다.


주공의 좌익(동쪽을 맡은 것은 )제4사단의 좌익대였다. 보병제8연대장 모리타 하루지 대좌가 지휘하는 좌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8연대(1개대대 감편)

독립산포병제3연대제2대대의 1개 중대

독립구포제2대대의 1개 중대

공병제4연대의 1개 중대(2개소대 감편)


좌익대는 4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여 제21사단(PA)이 지키는 D 구역의 동쪽을 통과하여 사맛산으로 향할 것이었다.


제4사단의 포병대는 야포병제4연대, 공병대는 독립공병제23연대(2개중대 감편), 예비대는 보병제37연대(1개대대 감편), 치중대는 치중병제4연대였으며 기타 사단직할부대들이 있었다.


서해안에서는 제16사단이 공격 3일 전인 3월 31일부터 제1필리핀군단 정면에 위장공격을 시작하여 4월 첫주 내내 제1필리핀군단을 그 자리에 붙잡아 둔 다음 4월 8일부터 제4사단의 뒤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제4사단의 동쪽 측면을 지키다가 나중에 오리온-리마이 사이 해안에 상륙하려는 듯이 위장함으로써 이 방면의 미-필리핀군을 고착견제할 것이었다.


혼마 장군의 예상으로는 1주일이 지나면 제4사단은 마말라강에, 제65여단은 마리벨스산 기슭에 도달할 것이었다. 혼마는 이곳에 미군이 강력한 리마이 방어선을 형성할 것으로 보았다. 조공을 맡았던 제16사단과 나가노지대까지 모두 동원하여 공격하더라도 리마이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2주가 걸릴 것으로 보았다. 이후 마리벨스산 부근의 최종방어선을 뚫은 후 소탕하는데 1주일이 걸릴 것이었다.


제4사단장 기타노 중장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일단 사맛산을 점령하면 그 이후로는 도망치는 미-필리핀군을 일방적으로 추격하는 소탕전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옳았다.


3월 둘째주부터 일선의 미-필리핀군은 일본군이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걸 느꼈다. 일본군은 수색차장을 실시해 미-필리핀군 정찰대의 접근을 막았으며 정찰대를 자주 내보내어 무인지대에서 정찰대끼리 교전이 잦아졌다. 3월 마지막 주가 되자 일본군의 수색차장은 미-필리핀군 전선 900m 앞까지 접근했다.


3월 중순부터  미-필리핀군 병사들은 일본군 전선 후방에서 병력이 남하하고 도로공사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활동이 뜸하던 일본기들도 3월 하순부터 떼지어 날아다니면서 방어선, 포대, 그리고 후방의 보급소를 공격했다.


팜팡가강 하구에서는 다수의 주정이 목격되었다. 일본군은 대형 주정에 75mm 산포를 싣고 남하하여 동해안에 포격을 가했다. 투사량이 적고 명중율도 떨어져 피해는 가벼웠으나 이런 행동은 일본군이 동해안에 상륙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높였다.


일본군 포병의 움직임도 심상찮았다. 3월 말에 아부케이 서쪽에서 일본군의 관측용 기구가 떠오르자 미-필리핀군 병사들은 일본군에게 새로운 포병부대가 도착했음을 알았다.


공격을 준비하는 도중 혼마 장군은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항복권고문을 떨어뜨렸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3월 24일에 미-필리핀군이 사맛산에 침투한 일본군 정찰대와 교전하여 장교 1명을 사살했는데 이 장교에게서 사맛산 부근의 전차기동로, 적절한 도하점, 그리고 미군포대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내용의 명령문이 나왔다. 공격이 임박했다는 조짐이었다.


3월 말이 되자 일본기들이 미-필리핀군의 행동을 크게 제약했다. 일본기들은 교대로 날아와 하루종일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공습으로 인한 피해는 가벼웠지만 하루종일 머리 위에 떠있는 일본기때문에 미-필리핀군은 낮에는 참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일본기의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참호에 숨어있는 미-필리핀군의 모습.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3.html#23-3 P.419)


3월 28일이 되자 일본군이 공격시작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65여단은 판틴간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제21 및 제41사단(PA)의 전초선을 밀어내고 공격에 유리한 지형을 차지했다. 제65여단의 동쪽에서는 제4사단이 4월 2일까지 티아위르-탈리사이강 북안에 전개를 마쳤다.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전개했으며 서해안에서는 제16사단이 3월 31일부터 위장공격을 시작했다.


4월 2일이 되자 25km에 걸친 전선을 따라 배치된 나가노지대, 제4사단, 제65여단, 제16사단이 공격준비를 마쳤다. 혼마 중장은 이번에는 승리하리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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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전투준비(1) - 미-필리핀군

1942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된 휴지기 동안 바탄반도의 일본군과 미-필리핀군은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일본제14군 사령관 혼마 장군은 3월동안 새로 도착한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동시에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하여 꼼꼼하게 공격계획을 세웠다.
방어측인 미-필리핀군은 휴지기를 이용하여 필리핀육군을 훈련시키고 방어선을 정비했다.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과 의약품이었지만 입수가 불가능했다. 결국 3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전투준비를 마쳤으나 병사들의 체력 약화 때문에 방어력은 오히려 약해졌다.

킹 소장이 지휘하는 루손군의 병력은 바탄반도의 남단에 몰려 있었다. 520㎢ 가 채 안되는 좁은 지역에 제1 및 제2필리핀군단, 루손군예비대, 지원사령부, 해안대공포연대 2개, 75mm 자주포대대 2개, 임시전차단, 공병 및 통신부대가 몰려 있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좁은 지역에 몰려 있어 일본기가 실수로 폭탄을 떨어뜨려도 군사적으로 가치있는 표적에 맞을 정도였다.

루손군의 병력은 79,500명으로 3/4이 필리핀육군이었고 필리핀스카우트가 8,000명, 미군이 12,500명이었다. 이외에 6,000명의 현지주민과 20,000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필리핀육군사단은 9개였는데 인가 병력인 7,500명을 채운 것은 제71사단의 전투병력을 흡수한 스티븐스 장군의 제91사단 뿐이었다. 블루멜 장군의 제31사단이 6,400명으로 2번째로 많았으며 나머지 7개사단(제1, 제2, 제11, 제21, 제41, 제51 및 제71사단)은 모두 6,000명 이하였다. 특히 전투부대를 제91사단에 넘겨준 제71사단의 병력은 2,500명에 불과했다.

1942년 3월말 현재 루손군의 배치는 1월 말의 배치와 거의 비슷했다.

(1942년 1월 27일 현재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오리온-바각 방어선의 길이는 약 26km 였으며 동쪽 절반은 파커 장군이 지휘하는 제2필리핀군단이, 서쪽 절반은 웨인라이트의 뒤를 이은 존스 장군이 지휘하는 제1필리핀군단이 방어했다. 군단경계선은 북쪽의 판틴간강에서 마리벨스산 동쪽 기슭을 거쳐 남쪽의 파니키안강을 잇는 선이었다.

3월 중순이 되었을 때 동쪽을 지키던 파커 장군의 제2필리핀군단은 약 28,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배치상황은1월말과 비슷하게 동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4,000m 에 이르는 방어선을 동쪽으로부터 A, B, C, D 4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A 구역은 리마이 북쪽 해안으로부터 오리온 남서쪽까지 2,3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1보병연대(PA)가 담당했다. 사령관은 제31보병연대장(PA) 존 어윈 대령이었다.
B구역은 약 1,800m 에 걸쳐 있었는데 육군항공대 요원 1,400명으로 이루어진 임시항공연대가 담당했으며 사령관은 제31보병연대(US)에서 파견된 노련한 보병 지휘관인 어빈 도안 대령이었다.
C 구역은 4,1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2보병연대(PA)와 제51전투단(PA, 제51사단의 잔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제31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이었다.
D구역은 사맛산에서 판틴간강에 이르는 5,500m 구간으로 제21 및 제41사단(PA)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필리핀 사단장인 맥슨 로우 준장이었다.
E 구역은 해안방어를 담당했으며 제2사단(제1및 제2필리핀경찰연대 감편), 전차 1개 중대, 자주포 1개 포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사령관은 프란치스코 장군이었다.
군단예비대는 제33보병연대(제1대대 감편), 그리고 2개의 필리핀육군 전투공병대대였다.

서쪽을 지키던 존스 장군의 제1필리핀군단은 약 32,6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배치상황은1월말과 비슷하게 서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2,000m 에 이르는 방어선을 7번 오솔길을 기준으로 좌측 및 우측 구역으로 나누었다.

우측 구역은 7번 오솔길을 포함한 동쪽 5,000m 를 담당했으며 제11사단(PA)과 제2필리핀경찰연대(1개 대대 감편)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제11사단장 윌리엄 브라우어 준장이었다. 제2필리핀경찰연대가 가장 오른쪽에 배치되어 제1필리핀군단과의 연결을 담당했다.
좌측 구역은 서해안부터 7번 오솔길까지 7,000m 를 담당했으며 제91사단(PA)과 제1사단(PA)의 잔존병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제91사단장 루터 스티븐스 준장이었다. 제91사단이 가장 서쪽에 배치되어 비누안간강 이북의 서해안까지 함께 방어했다.
남측 구역은 비누안간강 이남의 해안방어를 담당했다. 배치 병력은 제1경찰연대, 제88야포연대(PS)의 1개 포대 그리고 잡다한 항공부대병력이었다. 사령관은 피어스 장군이었다.
군단예비대는 제45보병연대(PS)와 말을 잃어버린 제26기병연대(PS)였다.

루손군의 예비대는 감편된 필리핀 사단으로 제31보병연대(US), 제57보병연대(PS) 그리고 임시전차단으로 이루어져 5,000명이 약간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야포는 약 150문으로 제1군단에 약 50문, 제2군단에 약 100문이 배치되었다. 제1군단의 야포는 2문의 155mm 곡사포와 14문의 155mm 평사포를 제외하면 모두 75mm 야포였다. 제2군단은 75mm 곡사포 72문, 2.95인치 산포 12문을 보유했고 나머지는 모두 구형 155mm 평사포였다.
이외에 75mm 자주포 27문이 있었으며 대공포연대 2개가 비행장과 후방 시설을 공습으로부터 지켰는데 이중 3인치 대공포 1개 포대와 37mm 대공포 2개 포대는 전방에 배치되었다.
해군은 37mm 에서 76.2mm 에 이르는 야포 31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해안방어에 투입되었다. 바탄반도의 해안포는 1문이었다.
루손군의 포병세력은 서류상으로는 강했으나 실제로는 지형, 공중정찰의 부재, 사격통제장비 및 통신장비의 부족, 수송기관의 부족 등으로 전력 발휘에 지장을 받았다. 바탄반도에서 효과적이었을 105mm 야포가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고립지대 전투가 끝나고 소강상태가 찾아온 1942년 2월 중순부터 극동미육군사령부는 필리핀육군에 대한 훈련을 실시했다. 전쟁 전의 훈련과정에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법 이외에는 기초적인 전투기술도 배우지 못한 병사들이 많아서 처음부터 훈련해야 했으나 그만큼 효과도 좋았다. 적의 포격이 시작되면 공포에 질려 나무 밑에 모이는 대신 그 자리에  꼼짝말고 엎드려 있도록 훈련시킨 것만으로도 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훈련 과정에는 실전에서 배운 전훈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일본군이 귀중품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곤 했으므로 정글에서 귀중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일본군이 방어선의 빈틈을 찾아 침투하는데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병사들에게 방어선을 점령하면 인접부대와 확실하게 연결하고 열심히 주변을 정찰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적이 후방에 침투했을 경우에는 전선의 병력은 방어선을 그대로 지키면서 지원사격만 하고 후방에 침투한 일본군은 예비대가 처리하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다.

정글 속에서 적의 개인호나 기관총좌를 만나면 소수의 병력이 신중하게 접근하여 처리하되 이 공격조는 분대나 소대로부터 지속적인 화력 지원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정글 전투에서는 전진 속도에 연연하지 말라는 원칙이 세워졌다. 정글에서 행군할 때에는 최소한 일몰 1시간 전에 진군을 멈추고 야영준비를 함으로써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했다. 하루에 1번먹는 식사는 가급적 일몰 전에 먹는 것으로 정했다.

전투에서는 야포지원을 기대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야포는 사전에 정해진 계획에 따라 보병의 공격 이전에 실시하는 공격준비사격에 주력했다. 보병의  요청에 따라 지원사격을 하기에는 통신장비가 모자랐다. 대신 박격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부실한 야포 지원의 빈자리를 메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경전차의 운용방식도 확립했다. 초기에 전차는 보병에 앞서 진격해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보병지휘관들은 전차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한 반면 전차들은 시야가 나쁜 정글에서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쉽게 파괴되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보병이 전차 바로 뒤에 붙어서 같이 다니라고 명령했다. 보병의 직접 지원을 받은 전차는 일본군의 기관총좌를 파괴하는데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었다.

상륙에 대한 방어책도 마련했다. 최고의 무기는 기관총이었으며 상륙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중요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병사들에게 해안에 배치된 기관총이 상륙 직전이거나 상륙 도중인 적에게 10분간 가하는 사격은 상륙한 적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3일에 맞먹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지시켰다.

훈련과 더불어 방어선의 강화도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소화기의 사정거리까지 사계청소를 실시하고 개인호에 위장을 실시하고 철조망을 설치했다. 코레히도르에서는 지속적으로 장교를 파견하여 방어선의 상태를 점검한 후 지휘관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제14공병대대(PS)의 전문가들이 제1군단 전방에서 3군데의 지뢰밭을 선정하고 1,400개의 급조 지뢰와 폭뢰를 개조한 대형지뢰 35개를 묻었다. 지뢰밭의 전방에는 돌격하는 일본군이 지뢰밭으로 뛰어들도록 철조망을 설치했다. 제11사단(PA)은 3월 말까지 대나무를 잘라 사단의 담당구역 전체에 3.6m 높이로 벽을 쌓았다. 이 벽은 방탄 기능이 없었으나 적어도 적이 사단의 방어선을 관측하지 못하게 만들고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사기를 높였다.

신속한 전개를 위한 준비도 갖추었다. 킹 소장은 휘하 지휘관에게 야간에도 부하들이 관할 지역 어디라도 헤메지 않고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정글 속의 소로까지 철저히 파악한 다음 부하에게 주지시키라고 명령했다.

루손군의 예비대도 전개 준비를 갖추었다. 바탄반도의 버스와 트럭은 대부분 예비대 주둔구역에 주차해 있다가 여차하면 제31보병연대(US)와 제57보병연대(PS)를 싣고 전선으로 달려갈 것이었다. 빈약한 해안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하여 75mm자주포 1개 포대와 전차 1개 중대로 이루어진 기동예비대가 대기중이었다. 기동예비대의 병사들은 한밤중에 어느 해안으로든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3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굶주리고 장비부족에 허덕이면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일본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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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보급 노력


맥아더 장군은 미-필리핀군이 바탄에 들어간 1942년 1월 초부터 줄기차게 일본의 봉쇄망을 뚫고 보급해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탈출한 이후에는 웨인라이트 장군이 같은 요청을 반복했다. 워싱턴에서는 보급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독일우선이라는 연합군 전략이 무색하게 1942년 전반기에 미군 병력과 보급품의 대부분은 태평양에 투입되었다. 미국은 선박, 잠수함, 항공기를 이용하여 바탄에 보급품을 전달하려 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군은 남서태평양의 제해권을 확고하게 쥐고 있었고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무런 준비가 없던 연합군이 바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조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1942년 1월 4일에 맥아더 장군은 마셜 참모총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바탄에 잠수함을 사용하여 보급품을 빨리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수송작전에 잠수함을 투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하트 제독은 그런 임무에 사용할 잠수함이 없다면서 거부했다.


1월 17일에 맥아더는 다시 마셜에게 전문을 보내어 식량을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병사들이 정량의 절반만을 먹은지 벌써 열흘을 넘겼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필리핀군의 충성심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맥아더는 일본의 봉쇄망이란 선전일 뿐이며 실제로는 쉽게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셜 장군은 이미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필리핀에 식량을 가장 빨리 보내는 방법은 호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식량을 사서 현지에서 임대한 상선에 실어 필리핀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마셜은 이 임무를 위하여 스티븐 체임벌린 대령과 레스터 휘트록 중령을 호주로 파견하면서 1000만 달러를 사전승인없이 집행할 권한을 주었다. 당시는 미국의 1인당 GDP 가 1,000달러가 채 안되던 시절로 1000만 달러면 미국형 보병사단 1개를 만들거나 P-40 전투기를 200대 이상 사거나 리버티선 5척을 건조할 수 있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여기서 마셜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셜은 부하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절박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호주의 미군사령부는 필리핀 보급을 위한 조직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의 전문을 받은 마셜은 호주의 브렛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체임벌린 대령이 1000만 달러를 집행할 권한을 가지고 호주로 가고 있으니 현지의 달러와 호주파운드화를 긁어모아 그가 원하는 즉시 원하는 액수만큼 용도를 묻지말고 현찰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체임벌린 대령과 별도로 호주의 미군사령부도 최대한 빨리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부터 필리핀에 식량을 실은 수송선을 파견하라고 명령하면서 거기에 드는 비용은 얼마든지 지출해도 좋으며 예산이 더 필요하면 요청하라고 말했다. 마셜은 시간이 관건이라며 단호하고 신속한 행동을 요구했다. 이 명령에 따라 브렛 장군은 300만명분의 식량(5만명의 60일치)을 필리핀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존 로벤슨 대령이 식량을 사고 수송선을 임대할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6명의 부하와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되었다.


마셜은 또한 전직 전쟁부 장관이자 맥아더의 오랜 친구인 패트릭 헐리 장군에게 필리핀 보급 노력을 압박하라는 임무를 주어 호주로 파견했다. 맥아더에게는 전문을 보내어 필리핀 내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100만 달러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한을 주었는데 이것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의 의뢰를 받은 현지 중개인은 비밀리에 남부 루손에서 쌀을 사들인 다음 야간에 마닐라만 남안에서 400톤짜리 수송선 2척에 실어 코레히도르로 보냈다. 이 유능한 중개인은 눈치를 챈 일본군이 마닐라만 남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할 때까지 2번에 걸쳐 1,600톤의 쌀을 수송했다.


호주에서는 체임벌린 대령이 임무 수행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사실상 무제한의 자금을, 그것도 현금으로 바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호주에는 이런 임무에 적당한 크고 빠른 배가 거의 없었으므로 엄청난 현금을 손에 들고서도 상선을 임대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체임벌린 대령은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과 중국 선적의 상선 10척을 임대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상황은 더 어려웠는데 곧 일본에게 점령당해 배를 타고 탈출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네덜란드 당국은 필리핀으로 가는 위험한 항로에 배를 투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금지조치는 얼마 후 풀렸으나 당시 필리핀으로 간다는 건 사실상 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임대 비용이 구매 비용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원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사지나 마찬가지인 필리핀에 갈 선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대부분 세부나 민다나오까지 갈 선원만 구할 수 있었으며 코레히도르까지 직접 가기로 계약한 상선은 돈이시드로와 플로렌스디뿐이었다. 나머지 상선은 일단 세부나 민다나오까지만 보급품을 운반할 것이었다. 거기서 코레히도르까지는 다시 작은 배로 실어날라야 했다.


가장 먼저 출항한 돈이시드로는 700톤의 식량을 싣고 1월 27일에 브리즈번을 출항하여 프리맨틀을 거쳐 2월 9일에 자바의 바타비아로 가서 추가로 탄약을 실었다. 여기서 돈이시드로는 필리핀 화물선 플로렌스디와 합류했다. 로벤슨 대령은 네덜란드 당국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필리핀으로 가기로 약속한 플로렌스디의 승조원에게 어마어마한 액수를 지급했는데 선장의 경우 기존의 급료에 더해 코레히도르까지 한번 왕복하는데 10,000달러가 넘는 돈을 보너스로 지급했다. 별도로 생명보험도 들어 주었는데 선장은 5,000달러짜리였으며 가장 하급선원도 500달러짜리 보험에 들어주었다. 2척의 수송선이 바타비아에서 보급품을 싣는 동안 일본군이 남하하면서 코레히도르로 가는 직항로가 막혔다. 2월 14일에 바타비아를 떠난 2척의 수송선은 토레스 해협을 통과하는 우회로를 따라 코레히도르로 가려고 했으나 토레스 해협으로 가는 도중 다윈 북쪽 해상에서 2월 18일과 19일에 걸쳐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다. 폭탄에 맞아 선체에 구멍이 뚫린 돈이시드로는 멜빌섬 인근에 좌초되었으며 플로렌스디는 침몰했다. 


(멜빌섬 인근에 좌초된 돈이시드로. https://en.wikipedia.org/wiki/Don_Isidro_(1939)#Context_in_attempts_to_relieve_the_Philippines)


민다나오와 세부를 향한 3척의 상선은 수송에 성공했다. 2월 10일에 브리즈번을 떠난 코스트파머는 2월 17일에 무사히 민다나오의 아나칸에 도착하여 식량 2,500톤과 보급품을 하역했다. 이어서 도나나티가 3월 10일에 세부에 도착하여 5,000톤의 식량과 보급품을 하역했으며 20일에는 안후이가 도착하여 2,500톤의 식량을 포함한 보급품을 하역했다. 이 3척이 운반한 보급품은 식량 10,000톤, 소화기 탄약 4,000,000발, 81mm 박격포탄 8,000발, 그리고 약간의 의약품, 통신 및 공병장비등이었다.


나머지 상선은 실패했다. 필리핀으로 향하던 중국 선적의 상선 2척은 위험해역에 들어서자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윈으로 돌아왔다. 2월 18일에 네덜란드 당국은 로벤슨 대령에게 상선을 필리핀 항로에 투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로벤슨 대령은 상선 4척을 골라 중국인 선원들에게 거액을 주고 각각 72만명분의 식량을 실어 2월 26일에 필리핀으로 파견했으나 이후 모두 소식이 끊겼다.


코스트파머, 도나나티, 그리고 안후이가 민다나오와 세부에 실어온 보급품은 작고 빠른 수송선으로 코레히도르까지 운반해야 했다. 미군은 필리핀의 섬 사이를 운행하던 300톤에서 1,000톤 사이의 소형수송선 25척을 임대했다. 이런 수송선은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밤에만 운행했으며 배마다 장교가 타서 봉쇄망을 뚫을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 결정하고 만일 나포될 위험에 처하면 배를 자침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세부는 이제 코레히도르로 갈 보급품이 집결하는 장소가 되었다. 호주로부터 온 보급품 이외에도 세부의 장교들은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돌아다니며 방대한 양의 식량을 사 모았다. 4월 10일에 일본군이 세부시를 점령했을 때 창고에는 세부와 파나이 수비대의 12개월치 식량, 그밖의 섬에 있는 수비대가 먹을 6개월치의 식량이 들어 있었으며 교외의 창고에는 별도로 12,000톤에 달하는 식량, 의약품, 휘발유 및 기타 보급품이 쌓여 있었다.


세부에 쌓인 보급품 중 일부만이 바탄에 전달되었다. 소형수송선 레가스피는 1월과 2월에 한번씩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여 식량을 하역했다. 그러나 세번째 항해에 나선 레가스피는 3월 1일에 민도로 섬 북쪽에서 일본군 포함에 걸려 침몰하고 선원들은 포로가 되었다. 2월 말에 소형수송선 프린세사가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여 식량을 하역했다.


코스트파머가 민다나오에 싣고 온 식량과 81mm 박격포탄은 소형수송선 엘카노와 레푸스가 운반했다. 2척의 수송선은 첫번째 항해를 무사히 마쳤으나 두번째 항해에 나선 레푸스는 팔라완 근해에서 나포되었다.


3월이 되자 일본군의 봉쇄가 강해져 도나나티와 안후이가 세부에 싣고 온 보급품은 코레히도르에 전달되지 못했다. 세부와 민다나오에서 코레히도르로 보급품을 수송하던 소형수송선 25척 중에서 10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어 7,000톤에 달하는 식량, 연료 그리고 기타 보급품이 상실되었다.


결과적으로 민다나오와 세부에 도착한 10,000톤의 식량 중 1,000톤 가량만이 코레히도르에 전달되었다. 하역된 식량의 상태도 나빴다. 여러번 옮겨 실은 통조림은 도중에 종이로 된 표지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따기 전에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밀가루와 설탕을 넣은 포대는 터져서 삽으로 선창 바닥에 깔린 밀가루와 설탕을 퍼내야 했다. 소형수송선에는 냉장고가 없었으므로 양파와 감자는 열대의 기후에 상하여 기아에 내몰린 병사들의 눈앞에서 버릴 수 밖에 없었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자바 근해에서 벌어진 일련의 해전에서 연합군이 참패하고 3월 2일에 바타비아가 점령되자 자바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로써 호주가 일본군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면서 더이상 필리핀에 수송선을 보내기가 어려워졌다. 호주에 남은 선박은 이제 호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필요했다. 헐리 장군과 브렛 장군은 3월 4일에 공동 명의로 마셜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제 호주에서 필리핀으로 수송선을 보내기는 불가능하니 향후로는 하와이에서 직접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호주에서 필리핀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막아버리면서 이제 호주에서 우회하여 필리핀에 도달하는 항로의 길이는 하와이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거리와 비슷해졌다.


전쟁부에서도 하와이에서 직접 수송선을 보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코스트파머가 무사히 민다나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2월 22일에 마셜에게 전문을 보내어 코스트파머의 도착으로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의 봉쇄망이란 별 것 아니라며 호주에만 맡기지 말고 하와이에서도 직접 필리핀에 수송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합동참모본부의 군수부장인 브레헌 서머빌 소장은 하와이에서 필리핀으로 직접 수송선을 보내는 것은 가능하며 제1차세계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하여 1,500톤의 적재량을 가진 고속수송함 6척을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고속수송함들은 카리브해에 있었는데 모자라는 승조원을 채워넣고 식량을 사서 싣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최초의 고속수송함이 뉴올리언스를 떠난 것은 3월 2일이었다. 이 수송함은 파나마 운하를 건너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를 떠난 수송함이 하와이 근해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 바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후속하던 5척의 고속수송함들도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바탄의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써 하와이에서 필리핀에 직접 보급한다는 계획은 실패했다.


맥아더는 바탄반도에 들어간 직후부터 잠수함으로 보급해달라고 요청했으나 ABDA 사령부의 해군사령관이 된 하트 제독이 강력하게 거부했고 ABDA 사령관 웨이벌 장군도 하트 제독을 지지했다. 그러자 마셜이 1월 17일에 웨이벌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잠수함을 필리핀 보급에 투입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마셜은 킹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협조를 요청했다. 이 전문에서 마셜은 필리핀 수비대가 많은 일본군 병력, 비행기, 그리고 함정을 붙잡아 두어 ABDA 지역 방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육군은 필리핀에 보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이때 해군도 나서서 열흘이나 2주마다 보급품을 실은 잠수함 1척씩만 코레히도르로 보내주면 싣고간 보급품의 양에 상관없이 보급품을 실은 잠수함이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기앙양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마셜의 의견에 동의한 킹 제독은 하트 제독에게 잠수함을 사용하여 필리핀에 보급하도록 권고했다.


하트 제독에게 있어서 미해군 서열상 직속상관인 킹 제독의 권고는 곧 명령이었다. 또한 서류상 하트 제독의 직속상관이라지만 방금 만들어져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임시사령부에 지나지 않는 ABDA 사령관인 영국육군 웨이벌 장군에게도 미해군이 자신들의 잠수함을 사용하여 필리핀에 있는 미군에게 보급하겠다는데 막을 권한이 없었다. 최종적으로 호주에서 10척, 하와이에서 2척의 잠수함이 필리핀 보급에 투입되었다.


1월에는 3척이 투입되었다.시울프는 50구경 탄약 675박스와 3인치 대공포탄 72발을 싣고 1월 16일에 다윈을 출항하여 27일 새벽에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시울프는 탄약을 하역한 후 그곳에 있던 잠수함예비부품, 어뢰 16발, 그리고 25명(육군조종사 12명, 해군조종사 11명, 영국군정보장교, 해군서기)을 태우고 돌아왔다. 

링가옌만을 초계중이던 시드래건은 명령을 받고 코레히도르로 가서 잠수함예비부품 2톤, 어뢰 23발, 그리고 루돌프 바비안 국장을 포함한 필리핀의 암호해독기관인 캐스트국의 인원 23명을 태우고 나왔다. 레드 및 퍼플 암호해독기, 통신기, 암호책을 포함한 1.5톤의 물품도 함께 반출했다.

트라우트는 3인치 대공포탄 3,517발을 싣고 하와이를 출항하여 2월 3일 밤에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트라우트는 대공포탄을 하역한 다음 어뢰와 함께 마닐라 은행에서 코레히도르로 옮겨 두었던 금괴 2톤과 은화 18톤을 싣고 나왔다. 진주만에 도착했을 때 14,500달러에 달하는 금괴 하나가 없어져서 비상이 걸렸다. 헌병이 배안을 샅샅이 수색한 결과 주방에서 금괴가 나왔는데 취사병이 종이를 누르는 문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진. https://www.youtube.com/watch?v=2k1_Gr9c91M)


2월에도 3척이 투입되었다. 소드피쉬는 19일에 도착하여 케손 대통령을 태우고 나왔다. 사르고는 30구경 탄약 1,000,000발을 민다나오에 수송했다. 퍼밋은 맥아더를 태우려고 코레히도르에 갔다가 대신 어뢰와 해군 인력을 싣고 나왔다.


3월에는 2척이 필리핀으로 향했다. 스내퍼는 코레히도르로 가서 식량 46톤과 3인치 대공포탄 185발, 그리고 경유 110,000리터를 하역했다.시드래건은 인도차이나 해안을 초계하던 중 보급명령을 받고 세부로 가서 45kg 짜리 포대에 담긴 쌀과 밀가루 34톤과 경유 45,000리터를 싣고 마리벨스로 향했다. 시드래건은 무사히 도착하여 하역을 시작했으나 식량 7톤을 하역했을 때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마리벨스가 당장이라도 함락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자 하역을 중단하고 23명의 인원을 태운 후 떠났다. 이때 태운 인원은 육군대령 1명, 카노푸스의 어뢰담당관인 샌디 맥그리거를 포함한 해군장교 3명, 그리고 암호해독가 존 리트와일러와 언어학자 루돌프 테일러를 포함한 캐스트국의 잔여인원 17명, 그리고 해군부사관 1명과 수병 1명이었는데 수병은 몰래 탔다.


4월 1일에는 소드피시가 2월에 이어 식량 40톤을 싣고 호주의 프래맨틀을 떠났고 다음날 시레이븐이 3인치 대공포탄 1,500발을 싣고 같은 항구를 떠났으나 가는 도중에 바탄이 함락되자 2척 다 초계임무로 바뀌었다.


5월 초에는 스피어피시가 코레히도르로 가서 간호사 12명을 포함한 25명을 태우고 함락 직전에 빠져나왔다. 하와이에서도 1척의 잠수함이 100톤의 식량을 싣고 코레히도르로 가는 도중 항복소식을 들었다.


결국 잠수함이 맥아더에게 보내준 식량은 53톤으로 바탄의 병력 2/3가 한끼 먹을 분량에 불과했다. 추가로 3인치 대공포탄 약 4,000발, 50구경 탄약 37톤, 30구경 탄약 1,000,000발, 그리고 약 114,000리터의 경유를 보급했다. 한마디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비행기도 필리핀 보급에 투입되었다. 1월 26일에 B-24 폭격기 2대가 모르핀 10,000정을 포함한 의약품과 탄약을 싣고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했다.

2월에는 퀴닌 50,000정을 포함하여 1번만 보급이 있었다. 일본군의 다윈 공습으로 필리핀으로 보낼 물품을 저장하고 있던 격납고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보급은 다윈 인근의 바첼로 비행장에 보급품을 다시 모은 3월에 재개되었다.

3월에는 3번의 보급이 있었다. 11일에는 4대의 B-17 폭격기가 호주에서 이륙했으나 1대는 추락하고 2대는 비행장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1대만이 의약품 730kg과 통신장비 및 대공포부품을 싣고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했다. 16일에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한 B-17폭격기 2대는 맥아더 일행을 태우고 호주로 돌아왔다. 26일에는 퀴닌 1,000,000정을 포함한 의약폼 530kg 과 통신장비 2,300kg을 실은 폭격기가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폭격기는 돌아오는 길에 케손 대통령을 태우고 왔다.

4월에는 폭격기들이 의약품과 통신장비를 포함한 많은 보급품을 델몬테 비행장에 실어날랐다.

마지막으로 5월 3일에 델몬테 비행장에 접근하던 B-17 폭격기는 비행장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것을 발견하고 기수를 돌렸다.


이로써 델몬테 비행장에는 많은 보급품이 모였으나 이것을 코레히도르로 전달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결국 실제로 코레히도르에 전달된 물품은 야간에 코레히도르섬 꼬리 부근의 해군비행장에 착륙한 소형비행기가 싣고 간 퀴닌 768,000정을 포함하여 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3월 중순이 되자 필리핀에 대한 보급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여 호주에서 필리핀으로 향하는 항로를 막았다. 곧이어 민다나오와 세부에서 코레히도르로 가는 항로도 막히면서 그곳에 쌓인 막대한 보급품이 전달되지 못했다.


마셜은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다급해진 마셜은 중국으로부터 보급품을 보내려고 시도했다. 3월 30일에 마셜의 요청을 받은 스틸웰이 식량과 비행기를 수배하는 동안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했다.


4월 초에는 전투식량 1,000,000명분, 쌀 200톤, 고기 340톤, 연유 158톤, 담배 20톤 그리고 탄약 548톤을 실은 마지막 선단이 호놀룰루를 떠났다. 코레히도르까지의 항해시간은 22일이었는데 출항 후 8일이 되었을 때 바탄반도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3월 말에 웨인라이트와 맥아더는 민다나오와 세부에 쌓여있는 보급품을 코레히도르로 옮길 수 있도록 일본의 봉쇄망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공습을 계획했다.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을 출격한 B-17 폭격기 10대가 비사야와 수빅만에 있는 일본함정을 폭격하여 일본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500톤급 소형수송선이 코레히도르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식량을 가득 실은 소형수송선 1척이 세부에, 휘발유를 가득실은 소형수송선 1척이 일로일로에 대기 중이었다. 2척의 수송선은 P-40 전투기 3대의 호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다른 수송선들도 세부와 민다나오에 도착하여 B-17 폭격기의 공격으로 봉쇄가 느슨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보급품을 선적했다. 수송선과 전투기는 준비가 되었지만 폭격기의 집결이 늦어지면서 공습은 실행되지 못했다. 4월 10일에 세부가 함락되었을 때 소형수송선들은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B-17 폭격기들이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세부 함락 다음날인 4월 11일이었다.


이로써 필리핀에 대한 보급은 실패했다. 3월 말이 되자 육체적 쇠약에 더하여 구원의 좌절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바탄반도에 있던 미-필리핀군의 전투력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다. 4월 1일에 루손군의 군의관은 미-필리핀군의 전투력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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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싸우는 사생아들(3) - 사기


병사들의 전투력은 물리적인 조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궁핍한 처지에 몰려 있더라도 사기가 높은 부대는 무서운 상대이며 이런 적에게 섣불리 싸움을 걸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군은 미-필리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선전전단은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하여 널리 사용되던 방법이며 일본군 역시 바탄에서 사용했다. 일본기들이 바탄반도를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인종차별, 질투, 증오, 탐욕 등에 호소하는 전단을 뿌렸다.  어떤 전단은 인종문제를 부각하면서 필리핀군의 탈영을 부추겼다. 전단은 필리핀 병사들이 급료로 받는 화폐는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필리핀 병사는 미국에게 속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를 받는 댓가로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 굶주림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적었다. 반면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필리핀의 상황은 미화했다. 어떤 전단은 일본 치하의 새 필리핀(New Philippines)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전직 필리핀군의 편지를 실었다. 어떤 전단에는 병사의 아내가 병역기피자의 품에 안겨 있는 그림을 넣었다. 기아에 초점을 맞춘 전단도 있었다. 어떤 전단은 코레히도르가 칠면조, 고기, 과일, 케이크, 위스키, 와인에 완전히 둘러싸인 모습을 그려놓고 병사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냐는 문구를 적었다. 


(일본군의 선전전단.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1.html#21-3 P.386)


필리핀미군사령부의 평가에 따르면 선전전단의 효과는 미미했다. 병사들은 취미로 전단을 모았으며 자신에게 없는 전단을 서로 교환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부하들로부터 테두리에 예쁘게 리본을 두른 전단을 선물로 받았는데 내용은 일본군이 자신을 거명하며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선전방송은 보다 효과적이었다. 일본은 마닐라 방송국을 사용하여 매일 오후 9시 45분에 필리핀의 미군을 겨냥한 선전방송을 했는데 도쿄로즈가 진행하는 라디오 도쿄의 방식을 차용한 이 방송은 병사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인기있는 노래들을 틀었다. 미군 장교들은 쾌활하게 웃고 떠들던 병사들이 방송을 들으면서 침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고 선전방송의 위력을 느꼈다.


미군도 코레히도르에 자체 방송국을 가지고 '자유의 소리(The Voice of Freedom)' 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3번 방송을 했다. 주로 노래를 틀면서 그 사이에 미본토와 국제 뉴스 및 필리핀 현지 소식을 알려주는 형식이었는데 평가는 나쁜 편이었다. 특히 현지 소식이 병사들이 겪고 있는 실상과 다른 경우가 많아 일부 장교는 자유의 소리 방송이 오히려 수뇌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고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매일밤 '자유필리핀방송' (Freedom for the Philippines) 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했는데 병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전역의 초기에는 식량과 장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가 높았으며 2월 초의 승리 이후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증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넘쳐났다. 증원군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은 1월 15일에 맥아더가 한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날 맥아더는 필리핀 전체의 미-필리핀군에 행한 방송에서 수천명의 군인과 수백대의 비행기를 포함한 증원군이 미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증원군의 도착 시점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늦어도 우기가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도착하리라고 믿었다.


2월이 되자 일선 지휘관들은 약해지는 부하의 체력과 늘어나는 환자, 줄어드는 배식량을 보면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대령급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장병들은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마지막 순간에 강력한 군대가 도착하여 자신들을 구원하리라고 믿었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암담한 운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자는 극소수였다.


워싱턴 탄신일인 2월 22일에 방송된 루스벨트의 노변담화는 구원에 대한 병사들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날 루스벨트는 청취자들에게 세계지도를 펴라고 요청한 다음 지도를 짚어가면서 전 지구에 걸친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크며 미국의 전선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그리고 미국이 앞으로 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바탄의 병사들은 방송이 끝나자 자신들이 전 지구에 걸친 대전쟁이라는 거대한 게임에서 버려도 되는 하찮은 말로 취급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병사들은 1943년, 44년, 45년에 얼마나 많은 비행기가 생산될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패배하기 전에 증원군이 도착할 것인가가 궁금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필리핀 구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3월 12일에 일어난 맥아더의 탈출은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필리핀 병사들 사이에서 맥아더의 위상은 절대적이었으며 대부분의 미군 장교에게도 맥아더는 전설이었다. 심지어 대령들도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맥아더가 결국은 마술사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나 호주로 가 버렸다.


맥아더를 향한 믿음을 놓지 않은 장병들은 자유의소리 방송이 내린 해석에 따라 그가 호주로 간 것 자체가 증원군 도착이 임박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호주에 도착해서 행한 맥아더의 첫 연설을 증거로 들었다. 맥아더는 연설에서 자신의 최우선 목표가 필리핀 구원이라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곳에 왔으며 나는 돌아갈 것이다."(I came through and I shall return.)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노병을 포함하여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외부에서 도착하는 증원군을 지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코레히도르였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났다는 것은 증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3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대부분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증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남은 것은 피할 수 없는 패배 뿐이었다. 그나마 필리핀군은 전투가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으나 미군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죽음 아니면 포로수용소 뿐이었다.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깨달음은 미-필리핀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으나 미군 중 일부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선택도 단순해졌다. 이제 그들은 번민을 그만두고 일본군에게 승리의 댓가를 최대한 비싸게 받아내는 방법을 찾는데 집중했다.


필리핀 사단의 헨리 리 중위는 자신의 시 'Fighting On' 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매혹적인 승리의 빛을 볼 수 없네

풍족한 전리품과 이득을 얻을 기회는 사라졌네

만일 내가 참고 견딘다면 - 나는 계속 참고 견뎌야만 하리

만일 내가 고통을 참는다면 - 그 보상은 고통이리

하지만, 비록 설렘과 열정과 희망은 사라졌지만

내안의 무언가가 나를 계속 싸우게 하네.


I see no gleam of victory alluring

No chance of splendid booty or of gain

If I endure - I must go on enduring

And my reward for bearing pain - is pain

Yet, though the thrill, the zest, the hope are gone

Something within me keeps me fight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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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싸우는 사생아들(2) - 의료


기아는 필연적으로 질병을 불러온다. 기아로 인한 질병의 징후는 1942년 1월 중순부터 다양한 개인 기록에 등장하며 공식적인 증거는 의무부대가 지휘관에게 제출한 2월 2일의 보고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보고서에 따르면 열량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병사들의 체중이 7kg 이상 줄었다. 또한 지방 및 비타민 A, B, C의 부족으로 인한 증상이 나타났으며 무기력증, 공격성 결여, 우울, 짜증 등의 증상을 보였다.


2월 말이 되자 바탄에 파견된 극동미육군전진사령부의 의무장교인 제임스 길레스피 중령은 코레히도르에 있는 그의 상관 윕 쿠퍼 대령에게 바탄반도의 병사들은 부족한 식사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되고 전투효율이 저하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단백질, 지방, 미네랄, 그리고 몇몇 비타민의 부족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대책은 쇠고기, 야채, 과일의 보급을 늘리고 1인당 하루에 110g 의 연유를 공급하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길레스피 중령은 최소한 비타민 정제만이라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맥아더는 이미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필리핀을 도와야한다고 워싱턴과 호주를 온통 들쑤시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봉쇄를 뚫고 바탄에 보급품을 보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바탄의 식사량은 계속 줄었다. 일선 병사들은 최소한 하루에 3,500칼로리의 열량이 필요했으나 1월에는 2,000칼로리, 2월에는 1,500칼로리로 떨어지더니 3월에는 급기야  1,000칼로리까지 떨어졌다. 기초 체력이 떨어지면서 가벼운 질병에도 쓰러지는 병사가 늘어났다. 루손군사령부의 군의관 해럴드 글래틀리 중령은 이런 상황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전염병이라도 순식간에 유행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3월 말이 되자 몸에서 지방이 빠져나가 수척해지는 것을 넘어 근육약화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이 급증했다. 4월 2일이 되자 마지막 비타민 정제가 떨어졌다.


영양결핍과 비타민부족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말라리아였다. 바탄반도에서는 전쟁 후반기와 같은 강력한 말라리아 대책이 불가능했다. 미-필리핀군의 최종방어선은 북쪽의 나티브산과  남쪽의 마리벨스산 사이의 습하고 모기가 많은 계곡을 따라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곳은 원래부터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리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필리핀 병사들은 모기장도 지급받지 못했다. 말라리아에 효과적인 아타브린의 재고량은 적어서 금방 소진되었고 전통적인 치료제인 퀴닌마저 부족했다.


미-필리핀군은 바탄반도로 들어오자마자 말라리아에 감염되기 시작했으나 2월 말까지는 환자가 적었는데 군의관들이 예방적으로 퀴닌을 투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퀴닌의 재고량이 줄어들면서 2월 말이 되자 예방적 투여는 불가능해지고 발병한 환자에게만 투여해야 했다. (발병한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률이 10% 에 달한다.) 그러자 말라리아 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3월 초가 되자 일선 병사의 35%에서 말라리아가 발병했으며 이중 500명이 입원했다. 3월 20일이 되자 확인된 환자만 3,000명이 넘었다. 3월 말이 되자 일선 병력의 75% 이상이 말라리아에 걸렸으며 입원환자는 1,000명을 넘어섰다.


미군사령부는 퀴닌 확보를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웨인라이트는 호주의 맥아더에게 퀴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며 군의관들은 바탄반도에서 찾아낸 퀴나나무의 껍질에서 퀴닌을 추출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 입원환자가 750명을 헤아리던 3월 23일에 군의관들이 보유한 퀴닌은 10,000명을 치료할 수 있는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3월 말에 민다나오에서 날아온 소형 항공기가 758,000정의 퀴닌을 가져다 주었으나 부족했다. 이것과 남아있던 600,000정을 합해도 말라리아 유행을 막기 위한 최소량인 3,000,000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바탄의 위생상태는 좋지 않았는데 특히 제대로 위생교육을 받지 못한 필리핀 육군이 심했다. 필리핀 병사들은 강물을 끓이거나 정수하지 않고 그대로 마셨으며 식기도 소독하지 않았다. 변소를 파지 않고 아무데나 대변을 보는 경우가 많았으며 변소를 취사장 바로 옆에 파는 경우도 많았다. 쓰레기는 아무곳에나 대충 묻어서 어디나 파리들이 떼지어 날아다녔다. 그러니 설사와 이질이 만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양결핍과 말라리아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설사와 이질로 상당히 고통받았으며 약이 부족하여 치료에도 차질을 빚었다. 맨발로 다녀야만 했던 많은 필리핀 병사들이 십이지장충에 감염되었으나 구충제가 모자라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병원의 위생상태도 나빴다. 소독약이 모자라 제대로 살균하기 힘들었으며 의료폐기물은 변소에 그냥 버렸다. 결국 간호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내감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3월 말이 되자 퀴닌, 설사약, 구충제, 소독약 이외에도 대부분의 약품이 바닥을 드러냈다. 항생제와 항독소가 부족하여 가스괴저가 발생하는 바람에 약만 있었어도 절단하지 않고 충분히 치료가능한 상처로 인하여 팔다리를 절단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전투신경증은 뚜렷하지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른 어떤 질병 못지않게 전투효율을 크게 떨어뜨렸다. 병사들은 12월 8일 개전 이래 쉴새없이 전투를 치렀으며 심지어 예비대로 대기하면서도 폭격에 시달렸다. 여기에 바탄반도에 들어온 후 필요량에 못 미치는 적은 양의 식사를 오랫동안 강요당하자 심리적으로 무너졌다. 전역 초기에 낙오된 병사들은 스스로 소속 부대를 찾아와 복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일단 낙오되면 총과 장비들을 버렸으며 강요하지 않으면 복귀하려 하지 않았다. 전투신경증은 널리 퍼져 있었으나 입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차피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사들이 입원을 꺼렸으며 지휘관도 적극적으로 전투신경증 환자를 찾아내어 후송하려 하지 않았다.


바탄에는 2개의 통합병원이 있었다. 제1통합병원은 리마이 부근에 들어섰는데 4.3m x 12m 크기의 수술실 8개를 갖추었다. 군의관들은 여기서 1,200건 이상의 수술을 집도했는데 절정이던 1월 16일에는 하루만에 182건을 집도했다. 8개의 수술대에서 하루종일 수술이 진행되었으며 수술실 바로 밖에는 들것에 누워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방어선의 남하와 함께 제1통합병원은 마리벨스 산기슭으로 옮겼다. 적십자 표시를 하고 있었음에도 제1통합병원은 전역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으로부터 3번이나 폭격을 받았다.


제2통합병원은 캅카벤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리얼강가의 대나무숲에 들어섰다. 대나무가 일본군의 공중정찰로부터 병원의 위치를 숨겨주었고 리얼강의 물을 정수한 후 11,000리터짜리 물탱크에 저장하여 사용했다.


(통합병원의 내부 모습.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1.html#21-2 P.382)


구호소나 치료후송소에 있던 환자나 부상자는 구급차나 셔틀버스로 후송되었는데 구급차는 숫자가 적어서 특수한 경우에만 운행했으므로 주로 셔틀버스로 후송되었다. 셔틀버스에는 좌석 대신 들것이 15개 실려 있었으며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밤에만 운행했다. 구호소나 치료후송소에 도착한 환자나 부상자가 셔틀버스를 타고 통합병원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시간 정도였으나 상황이 열악하여 36시간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


부상자는 대부분 포탄이나 소화기에 당했으며 항공폭탄에 다친 경우는 적었다. 일본군 소총에 맞은 부상자들을 치료한 군의관들은 미군의 30구경 총탄에 맞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위치에 맞고도 살아남아 후송된 병사를 여럿 치료하면서 구경이 작은 일본군 소총의 위력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같은 부위에 맞아도 일본군 소총은 미군 소총보다 훨씬 작은 상처만을 남겼다. 상처 부위는 복부가 가장 많았다. 환자의 영양상태가 나빠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렸으므로 입원기간이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2월 15일이 되자 전투에 의한 부상자는 줄어들었으나 질병 환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병원은 팽창을 거듭했다. 원래 1,000병상으로 계획했던 통합병원은 3,000병상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고도 부족하자 의무대대의 치료후송소가 병원급으로 확대되어 자체적으로 300병상 이상을 갖추었고 부상자에 대한 간단한 응급처치만 하게 되어 있는 수집중대조차 100 내지 150병상을 갖추고 병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3월 말이 되자 2개의 통합병원에 7,000명, 제1필리핀군단의 치료후송소에 4,000명이 입원해 있었다. 치료중대 및 수집중대에 입원한 환자의 총수는 확인할 수 없는데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를 보면 제91치료중대에는 900명, 제11치료중대에는 600명이 입원해 있었다.


악화된 건강상태는 미-필리핀군의 전투력을 깎아먹었다. 3월 14일에 바탄반도의 군의관들은 루손군사령부 소속 병력의 전투 효율이 45% 미만이라고 평가했다. 지휘관들의 평가는 더 비관적이었다. 3월 12일에 제1필리핀군단장이었던 웨인라이트 장군은 후임자인 존스 장군에게 군단의 전투효율이 25% 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같은 시기 제2필리핀군단장 조지 파커 장군은 부하들의 전투효율이 20% 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전투효율 감소는 필리핀 육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필리핀스카우트 연대인 제45보병연대에 대한 검진에서 50% 이상의 병사가 비타민 부족에 따른 증상을 호소했으며 진찰 결과 명확하게 증상이 드러나는 경우도 20%에 달했다. 기아에 따른 부종과 비타민 부족에 따른 야맹증이 만연했다. 연대군의관은 짧은 행군에서 여러 명이 낙오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평소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원 미군으로 이루어진 제31보병연대도 마찬가지로 검진 결과 50%가 넘는 병사가 이질과 말라리아로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일본군이 공격해 옴에 따라 루손군의 예비대였던 제31보병연대가 4월 4일에 출동명령을 받았을 때 병력의 1/3이 입원 중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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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싸우는 사생아들(1) - 음식과 피복


We're the battling bastards of Bataan,

No mama, no papa, no Uncle Sam,

No aunts, no uncles, no cousins, no nieces,

No pills, no planes, no artillery pieces,

And nobody gives a damn.


- "The Battling Bastards of Bataan"  By Frank Hewlett


우리는 바탄의 싸우는 사생아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엉클샘도 없고,

이모도 없고, 삼촌도 없고, 사촌도 없고, 조카도 없고,

약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대포도 없고,

그리고 관심가져주는 이도 없네.


- 프랭크 휼렛의 시 "바탄의 싸우는 사생아들"


필리핀의 지휘권 변동은 바탄반도의 병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식량부족을 넘어 기아에 직면한 그들에게 식량확보를 제외한 모든 일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1942년 1월 6일에 미-필리핀군의 식량배급량은 정량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나 실제로는 그마저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의 정량은 2kg, 필리핀군의 정량은 1.8kg였으니 절반이라면 매일 최소한 900g 은 먹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850g 을 넘기지 못했다.

식단도 영양의 균형을 고려하기보다는 양을 맞추는데 주력할 수 밖에 없었다. 식사량의 대부분은 쌀이 차지했으며 나머지 식재료는 가지고 있는 한도 내에서 조금씩 추가되었다.


식량이 줄어들면서 식사량도 줄어들었다. 1942년 1월 5일의 식량목록에는 밀가루 30일치, 주로 통조림 형태인 고기 및 생선 50일치, 채소통조림 30일치, 연유 20일치, 그리고 약간의 설탕, 라드, 커피, 그리고 과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목록은 1월 말이 되면 밀가루 6일치, 고기 및 생선 11일치, 채소 4일치, 과일 5일치로 줄어든다. 2월 23일에 필리핀군관구의 보급장교인 프랭크 브레지나 대령은 밀가루 4.5일치, 고기 및 생선 2.5일치, 토마토통조림 228통, 과일통조림 48통, 건포도 500kg, 연유 27,736통, 커피 14kg 그리고 설탕 9,800kg 이 남았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극동미육군의 보급참모인 찰스 드레이크 준장은 바탄반도에서는 고기통조림이 사라졌으며 동물성 단백질은 코레히도르에서 보내주는 약간의 연어통조림과 병사들이 스스로 도살하는 가축에서 섭취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것으로는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보고했다. 필리핀 전역 초기 1인당 하루 170g 이었던 고기배급량은 전역 말기가 되면 하루 34g 으로 줄어든다. 1월 말이 되자 바탄반도에서 버터, 커피, 차는 사실상 사라졌으며 설탕과 연유는 귀해져서 소량만이 지급되었다.


필리핀군과 미군 사이의 차별은 없었다. 필리핀군은 밀가루를 받지 않는 대신 쌀을 좀 더 많이 지급받는 등의 차이점은 있었으나 총량은 미군과 동일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2월 중순까지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에게 정량의 절반이나마 배급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 17일 바탄반도의 1인당 식량배급상황을 보면 총량 785g 으로 쌀 255g, 고기 115g, 빵 145g, 그리고 토마토 및 채소통조림, 베이컨, 설탕, 커피, 쥬스 등이 270g 이다. 이후 식량배급상황은 지속적으로 나빠져 3월 말이 되면 정량의 1/4 이하로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준까지 떨어진다. 아래는 1942년 3월 25일의 식량배급상황이다.


(1942년 3월 25일 현재 바탄반도의 식량배급상황. 단위는 온스. 1온스는 약 28g.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1.html#table8 P.368)


입원한 환자에게는 의학적 판단에 따라 필요량만큼의 식사가 제공되었으나 환자의 상태에 맞게 음식을 조리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수술을 하거나 장에 문제가 있어 죽을 먹어야 할 환자가 쌀밥을 힘겹게 먹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미-필리핀군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보급장교가 병사들을 이끌고  마닐라만에 면한 지역의 논을 돌아다니면서 전쟁통에 주인이 떠나버린 논의 벼를 남김없이 베어다가 공병대가 만든 방앗간에서 도정했다. 이렇게 확보한 쌀이 250톤이었다.

쌀은 밀을 밀어내고 미군의 주식이 되었다. 빵과 감자에 익숙한 미군 병사들은 쌀밥이나 죽에서 벽지에 바르는 풀같은 맛이 난다면서 싫어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고기는 사흘에 한번 맛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물소를 도살한 것이었다. 공병대가 라마오에 만든 도살장에서 600마리의 물소를 잡아 냉장창고가 있는 코레히도르로 보냈다가 필요하면 요청하여 다시 바탄반도로 가져와 먹었다. 하지만 일선 부대에서는 냇가에 임시로 만든 도살장에서 물소를 잡았는데 냉장창고가 없었으므로 살아있는 물소를 울타리에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꺼내어 도살했다. 2월 초에 맥아더 사령부는 병사들이 병든 물소를 잡아먹고 탈이 날까봐 수의사가 물소의 상태를 검사하는 라마오의 도살장 이외의 장소에서는 도살을 금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제로 병사들은 사설 도살장에서 라마오의 도살장보다 더 많은 1,000마리의 물소를 잡았다.

물소를 모두 잡아먹고 나자 다음은 제26기병연대의 말 250필과 보급품 운반용 노새 48마리의 차례였다. 3월 15일에 제26기병연대의 마지막 말이 도살되었다. 바탄에서 도살되어 소비된 육류의 양은 약 1,300톤이다.


미-필리핀군은 또한 지역 어부에게 요청하여 물고기를 잡아들였다. 어부들은 저녁에 출항하여 밤새 고기를 잡아 아침에 돌아왔는데 많을 때는 하루 5톤이 넘는 어획고를 올렸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일본군이 밤에 조업하는 어선을 공격하면서 물고기의 공급은 끊겼다.


병사들은 개인적으로 식량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정글을 뒤져 야생닭과 멧돼지를 사냥하고 고구마, 죽순, 망고, 바나나를 찾아 먹었다.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개, 원숭이. 이구아나, 심지어 비단뱀까지 잡아먹었다.

병사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개인호 주변에 떨어진 벼의 낟알을 주워다가 손으로 비벼 껍질을 벗긴 다음 생쌀을 씹어 먹었다. 정찰나간 병사들은 주변의 마을에 들러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한 쌀을 가지고 돌아오고는 했다.

정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먹을 것을 찾다가 독성이 강한 야생당근이나 산딸기를 먹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으나 굶주림에 내몰린 병사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먹을 것을 찾았다. 4월이 되자 바탄반도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은 거의 사라졌다.


단위부대나 병사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식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철수 도중 버려진 보급창에서 발견한 식량을 보고하지 않고 숨긴 경우였다. 바탄 도착 직후 실시한 조사에서 어떤 부대는 보고하지 않은 C-레이션만 8,500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식량을 모아둔 곳에 철조망까지 쳐놓고 24시간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식량트럭을 몰던 어느 운전병은 토마토 통조림 520통, 토마토 소스 297통, 토마토 쥬스 114통, 연유 111통, 인조마가린 6통, 쌀 12자루, 밀가루 3/4포대를 가지고 있다가 적발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보고되지 않은 식량은 모두 압수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식량을 숨겨둔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불가능했다. 적발된 식량을 모두 압수하려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실제로 제21야포연대장 리처드 멀로니 대령을 위시하여 장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개인적으로 식량을 챙겨두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지휘관들은 식량을 많이 지급받기 위하여 급양인원을 부풀려 보고했다. 1월 17일에 바탄반도에서 보고한 급양인원은 122,000명에 달했으며 이는 추정 실제 인원의 거의 2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강력하게 경고하자 인원은 하루만에 96,000명으로 줄었으나 여전히 너무 많았다. 바탄반도에 들어온 이래 병력수가 한번도 6,500명을 넘긴 적이 없는 어느 사단은 2월 6일에 급양인원이 11,000명이라고 보고했다.  수뇌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급양인원을 부풀려서 보고하는 경향은 근절되지 않았다.


부족한 공급에 더하여 분배도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힘들게 근무하는 병사들이 가장 적은 식량을 받았으며 후방일수록, 그리고 식량보급에 직접 관여하는 병력일수록 잘 먹었다. 부대가 이동할 때에는 운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병력은 주로 밤에 이동했는데 상황에 따라 어떤 부대는 하루에 2번 식량보급을 받고 어떤 부대는 하루종일 굶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엉뚱한 부대에 도착한 트럭이 다시 원래 부대를 찾아가면 되지만 당시 바탄반도에서는 식량을 실은 트럭이 어떤 부대에 일단 도착했다가 식량을 실은 채로 다시 그 부대를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일본군도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보급에 악영향을 끼쳤다. 어느날 아침에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이 코레히도르의 냉장창고에 명중하여 물소 48마리분의 고기가 더위에 노출되었다. 코레히도르에서는 바탄반도의 하루 소비량인 11톤에 달하는 이 고기를 즉시 바지선에 실어 바탄반도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하루종일 5회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해가 질 때까지 바지선은 고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결국 더운 날씨에 하루종일 바지선에 실려 있었던 고기는 상하여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기아에 내몰린 병사들은 보급트럭을 습격하기도 했다. 필리핀군 헌병이 보급로를 지키면서 약탈은 줄어들었으나 대신 보급트럭들은 헌병에게 통행료 명목으로 식량을 건네야만 했다. 


일부 병사들은 식량창고에 몰래 들어가 식량을 훔치려 했다. 심지어 장교까지 식량을 훔치다가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식량창고를 지키던 초병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식량창고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식량만큼이나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담배였다. 또한 담배만큼 중간에서 많이 빼돌리는 물품도 없었다. 실제로 일선 병사들 사이에서는 50개비가 든 담배 1갑에 10페소(5달러)라는 말도 안되는 고가로 거래되었으나 후방에서는 평시와 비슷한 10센타보스(5센트)에 거래되었다.


물론 사태의 중심에는 담배공급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1942년 1월 6일부터 4월 2일까지 코레히도르에서 바탄반도에 공급한 담배는 50개비짜리 담배갑 200개가 들어있는 담배통 400개로 1인당 하루 1개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었다.


피복류의 부족도 병사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특히 필리핀 육군이 심했는데 이들 징집병들은 대부분 비옷, 담요, 그리고 2인용 천막을 지급받지 못했다. 이들에게 지급된 신발은 천으로 만들고 고무로 밑창을 댄 운동화로 철수 과정에서 대부분 헤졌다. 바탄반도의 병력 중 약 1/4은 신발이 없었으며 나머지도 대부분 평시같으면 벌써 버렸을 낡은 신발을 어쩔 수 없이 끌고 다니고 있었다. 3월 말이 되자 많은 병사들이 속옷도 없이 데님 군복 1벌로 지냈는데 군복의 90% 가 낡아서 넝마나 마찬가지였다. 병원이 어려움을 겪은 일 중 하나가 환자에게 지급할 옷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참상을 보다 못한 필리핀미군사령부 참모장 비브 준장은 보급품의 보관을 책임지고 있던 항만방어부대사령관 무어 소장에게 바탄반도로 보낼 군복, 담요 및 군화의 재고를 조사하여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4일 후 무어 소장이 보내온 답변서에는 군복과 담요의 재고는 없고 군화는 10,000켤레가 있다고 했는데 이 군화는 미국인 발에 맞추어 만들어져 발이 작은 필리핀군은 신을 수가 없어서 바탄반도로부터 코레히도르로 반납된 물품이었다. 4월 4일에 비브 장군은 킹 소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커다란 군화 10,000켤레라도 받겠냐고 물었다. 킹 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탄반도에서는 코레히도르의 병사들이 호화판으로 먹는다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잘못된 생각으로 코레히도르에서도 호화판으로 먹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탄반도보다 사정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코레히도르에 상륙했던 웨인라이트 장군도 느꼈던 바였다. 코레히도르에서는 하루 2번 식사를 했으며 정확하게 정량의 절반을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식단도 나름대로 영양의 균형을 맞추었으며 베이컨, 햄, 싱싱한 야채 그리고 가끔씩 커피, 우유, 잼같이 바탄반도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진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급식에 있어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3월 말에 바탄헌병대가 보급트럭 1대를 세우고 화물운송장을 확인하면서 고조되었다. 이 트럭은 바탄에 배치된 3개의 대공포대에 식량을 전달하러 가던 길이었는데 항만방어부대 소속인 이 대공포대들은 바탄이 아닌 코레히도르 기준으로 보급을 받고 있었다. 헌병이 확인한 물품은 바탄의 병사들로서는 눈이 휘둥그래질 수준이었다. 햄과 베이컨 각 1통씩, 비엔나소세지 24통, 밀가루 1포대,  건포도 11kg, 라드 15kg, 완두콩, 옥수수, 토마토, 복숭아 각 24통씩, 감자 6통, 케첩 24병, 담배 50갑에 얼음 270kg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바탄과는 비교도 안되게 호화로운 코레히도르의 식사에 대한 소문은 바탄반도 전체에 퍼졌으며 병사들이 품고있던 의혹과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불만이 커지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항만방어부대의 식사도 바탄과 같은 수준으로 낮출 수 밖에 없었다.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코레히도르의 식사를 바탄과 같은 수준으로 낮출 이유는 없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바탄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했으며 그럴 경우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코레히도르는 바탄반도 상실 이후에도 계속 일본군에 저항하며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필리핀 수비대의 임무가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최대한 오래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웨인라이트로서는 코레히도르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바탄과는 달리 최소한의 체력과 사기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타당한 결정이었다. 또한 이미 정량의 절반만을 먹고 있던 코레히도르의 10,000명 병사에게 주어지는 식사를 바탄반도 수준으로 낮춘다고 해서 민간인을 포함하여 거의 100,000명이 득실거리던 바탄반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결국 그러한 조치는 바탄반도의 운명을 바꾸지도 못하면서 코레히도르 수비대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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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미군사령부 개편


맥아더는 코레히도르를 탈출하기 전에 필리핀 주둔 미군의 지휘체계를 개편했다.

윌리엄 샤프 준장이 지휘하던 비사야-민다나오군은 비사야군과 민다나오군으로 분리하여 민다나오군 사령관으로 샤프 준장을 유임시키고 비사야군 사령관으로 제61사단장(PA) 브래드퍼드 치노웨스 준장을 임명했다. 이로써 샤프 준장은 비사야 방면에는 신경쓸 필요없이 민다나오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을 지휘하는 루손군을 창설하여 제1필리핀군단장이었던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을 사령관으로 삼고 공석이 된 제1필리핀군단장 자리에는 남부루손군을 이끌었던 앨버트 존스 장군을 임명했다.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마닐라만의 섬들을 방어하는 조지 무어 소장의 항만방어부대는 존속시켰다. 무어 소장은 코레히도르에 20,000명이 6월 30일까지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해야 하며 다른 사령관이 요청해도 절대로 내주면 안된다는 엄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필리핀에는 4개의 사령부가 생겼는데 이들은 모두 동격으로 호주의 맥아더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군수참모였던 루이스 비브 대령을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극동미육군사령부 부참모장의 직함을 주어 코레히도르에 상주시키면서 자신의 대리로 삼을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이러한 내용을 전쟁부에 알리지 않았다. 필리핀의 지휘구조 개편을 온전히 자신의 권한으로 생각한 맥아더는 일단은 눈앞에 닥친 탈출에 집중하고 지휘구조 개편에 대한 내용은 호주에 도착한 후에 전쟁부에 통보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맥아더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3월 12일 저녁에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나자 지휘구조 개편 사실을 모르는 전쟁부는 필리핀에 남은 선임장교인 웨인라이트 장군을 맥아더의 후임자로 간주했다. 워싱턴에서 코레히도르로 들어오는 모든 전문은 한결같이 웨인라이트를 사령관으로 지칭했으며 그가 맥아더의 지휘권을 온전하게 물려받았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3월 17일자로 준장으로 승진한 극동미육군사령부 부참모장 비브 장군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맥아더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르면 그는 맥아더의 대리로서 전쟁부 또는 맥아더로부터 명령을 받아 웨인라이트를 지휘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부는 그를 무시하고 웨인라이트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코레히도르에 들어온 전문을 바탄반도에 있는 웨인라이트에게 그대로 전달해야 할지 맥아더 또는 대리인인 자신의 명의로 전달해야 할지 헷갈렸다. 비브는 호주에 막 도착한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어 전쟁부에 지휘구조 개편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19일이 되자  비브의 시련은 더 커졌다. 이날 마셜 참모총장은 웨인라이트에게 보낸 전문에서 그를 극동미육군사령관(CG USAFFE)으로 부르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남서태평양지역군(SWPA)의 담당 영역에 필리핀이 포함되어 있지만 맥아더는 어디까지나 감독을 할 뿐이며 웨인라이트는 전쟁부의 직접 지휘를 받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매일 전쟁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웨인라이트가 극동미육군사령관이라면 극동미육군 부참모장인 비브 자신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직속상관이 되는 셈이었다.


20일이 되자 결정적 사태가 벌어졌다. 먼저 오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보내는 전문이 코레히도르로 들어왔다. 대통령은 웨인라이트를 중장으로 승진시켰다면서 그를 필리핀의 모든 미군 및 필리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불렀다. 오후가 되자 마셜 참모총장으로부터 웨인라이트를 지칭하는 "극동미육군 사령관" 앞으로 보내는 2통의 전문이 도착했다. 1통은 웨인라이트의 중장 승진을 상원이 승인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전문에서 마셜은 웨인라이트가 필리핀의 미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라고 확인하면서 앞으로 전쟁부에 제출하는 일일보고서를 웨인라이트 자신의 명의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비브는 20일 밤에 바탄의 루손군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웨인라이트가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필리핀 주둔 미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반응은 기록에 없지만 그가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실제로 코레히도르와 호주 사이에 오간 전문을 보면 비브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날인 21일 아침에 웨인라이트는 중장 계급장을 달고 코레히도르에 상륙하여 비브가 공손하게 건네는 대통령과 참모총장 명의의 전문을 받았다.


웨인라이트는 극동미육군사령부를 필리핀미군사령부(U.S. Forces in the Philippines = USFIP)로 개편하고 비브 준장을 참모장으로 삼았다. 해군사령관으로는 케네스 호펠 대령을 임명했다. 원래 미육군과 해군은 같은 지역에서 작전하더라도 별도의 사령부를 유지했으며 합동작전은 사령부 간의 협조를 통하여 실시했다. 그건 필리핀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맥아더가 1942년 1월 말에 전투지역이 좁고 육군과 해군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해병대를 포함한 해군을 자신의 지휘 아래 넣어달라고 마셜 참모총장에게 요청했다. 워싱턴의 육군 및 해군 수뇌부가 협의를 거쳐 맥아더의 요청을 승인함으로써 1월 30일부터 필리핀의 해군은 맥아더의 지휘를 받게 되었는데 웨인라이트는 이 권한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육군과 해군이 지휘권을 단일화한 최초의 사례로써 이후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지역군과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은 이 선례를 따라 통합사령부 방식을 취하게 된다.


웨인라이트가 자신의 사령부를 꾸리자 맥아더가 전문을 보내어 무슨 근거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물었다. 웨인라이트는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마셜 참모총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신은 필리핀에 동격인 4개의 사령부를 두고 코레히도르에 파견한 부참모장을 통하여 통제할 생각이라면서 이는 필리핀의 특성상 꼭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다음날인 22일에 마셜 장군은 대통령에게 맥아더의 계획에 대해 보고하면서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계획에 따르면 마닐라만에 2개의 사령부가 있게 되는데 사령관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6,400km 떨어진 멜버른에 앉아있는 맥아더가 중재해야 했다. 마셜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사태는 이미 일어났었다. 3월 15일에 바탄반도에 식량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러 코레히도르에 왔던 웨인라이트는 다른 사령관이 요청하더라도 절대로 식량을 내주면 안 된다는 맥아더의 엄명을 받은 무어 소장에게 빈손으로 쫓겨났다. 이때 웨인라이트는 무어 소장으로부터 20,000명이 6월 30일까지 먹을 식량을 코레히도르에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분노에 휩싸였다. 웨인라이트가 맥아더의 탈출 이후 자신을 맥아더와 동격의 사령관으로 대하던 전쟁부에 제동을 걸고 맥아더의 계획을 알리는 대신 전쟁부의 생각대로 필리핀 전체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마셜에 따르면 맥아더의 계획은 1927년에 미육군과 해군이 합의한 연합사령부 구성원칙에도 어긋났다. 맥아더가 호주의 연합군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 된 이상 그가 필리핀의 미군을 직접 지휘하는 것은 부적합했다. 맥아더는 단일사령부를 통하여 필리핀의 미군을 지휘해야만 했다.


대통령은  마셜의 생각에 동의하고 당일인 3월 22일 오후에 멜버른으로 전문을 보냈다. 여기서 대통령은 맥아더의 계획에 대한 비판은 자제했지만 웨인라이트가 필리핀 전체의 지휘권을 갖는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확실하게 전달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표현 속에 담긴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알아차린 맥아더는 물러섰다. 그는 답신에서 참모총장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며 자신도 중장으로 승진한 웨인라이트가 필리핀 전체의 사령관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로써 지휘권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혼란은 사라졌다. 웨인라이트는 이제 필리핀 전체의 사령관으로서 맥아더가 가졌던 커다란 권한과 무거운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onathan_M._Wainwright_(general)


1942년 4월 18일에 남서태평양지역사령부가 정식으로 인가되었을 때 필리핀 제도는 호주, 뉴기니, 솔로몬 제도,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함께 맥아더의 책임 지역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사령관과는 달리 웨인라이트는 맥아더를 거치지 않고 전쟁부와 직접 통신을 주고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웨인라이트가 필리핀 전체의 사령관이 되면서 며칠 전에 만들어진 루손군사령관이 공석이 되었다. 웨인라이트는 루손군사령부를 폐지하는 대신 맥아더의 포병장교였던 에드워드 킹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대해 맥아더의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은 훗날 루손군 사령부는 코레히도르의 사령부가 없어지는 대신 만들었던 것이라면서 코레히도르에 필리핀미군사령부를 만든 시점에서 루손군사령부는 없애고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을 직접 지휘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서덜랜드의 비판과는 별도로 웨인라이트에게는 루손군사령부가 필요했다. 일본군이 조만간 다시 공격해 올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으며 그때는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항복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을 모두 지휘하는 단일 사령관이 없다면 항복절차가 지연되면서 의미없는 희생이 늘어날 것이었다. 그렇다고 웨인라이트 본인이 바탄반도로 건너가 항복한다면 일본군은 코레히도르를 비롯한 필리핀 전체의 항복을 요구하면서 바탄반도만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루손군사령관이 필요했다. 루손군사령관은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니 항복절차가 쓸데없이 지연되어 의미없는 희생이 발생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코레히도르나 비사야, 민다나오에 대한 지휘권은 없으니 일본군이 그에게 필리핀 전체의 항복을 강요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지아 법대 출신의 유능한 포병장교인 킹 소장은 미군사령부에 의한 항복으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복을 실행해야 할 비운의 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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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맥아더 탈출


1942년 1월 말이 되자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앞으로 몇달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 명확해지면서 워싱턴에서는 맥아더 대장의 거취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맥아더 장군을 일본군에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구해내어 일본에 맞설 연합군의 지휘를 맡길 것인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MacArthur#Field_Marshal_of_the_Philippine_Army)

 


워싱턴에서는 후자를 선택했으나 그를 탈출시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곤경에 빠진 부하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허둥지둥 달아나는 추태를 보이느니 차라리 마지막까지 코레히도르에서 버티다가 부하들과 함께 죽거나 포로가 되는 길을 택할 것이었다. 


맥아더의 오랜 친구였던 패트릭 헐리 준장은 마셜 육군참모총장에게 맥아더를 탈출시키려면 대통령이 직접 필리핀에서의 임무를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임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며 탈출 과정은 맥아더가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주의하면서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셜은 맥아더의 탈출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 조언을 충실하게 지켰다.


맥아더를 탈출시키려는 의도는 1942년 2월 2일에 마셜이 보낸 전문에서 은근한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마셜은 이 전문에서 맥아더와 함께 코레히도르에 머무르던 그의 부인과 아들에 대한 대피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맥아더는 퉁명한 어조로 가족의 거취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이틀 후인 2월 4일에 마셜은 좀 더 직설적인 전문을 보냈다. 여기서 그는 코레히도르에 있는 주요 인물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짜고 있다면서 맥아더에게 코레히도르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셜은 두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민다나오로 가서 그곳에 주둔 중이던 윌리엄 샤프 준장의 비사야-민다나오군 병력을 기반으로 한 게릴라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호주로 가서 극동에 전개한 연합군을 지휘하는 것으로 마셜은 호주를 강력한 기지로 개발하고 있으며 대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셜은 맥아더에게 민다나오로 가서 게릴라 작전을 지휘하든지 아니면 호주로 가서 연합군을 지휘하든지 아무튼 코레히도르 방어보다는 더 크고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답하지 않았다.


나흘 후인 2월 8일에 마누엘 케손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이 국무부에 깜짝놀랄만한 전문을 보내왔다. 2부로 된 전문의 제1부는 케손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제2부는 맥아더가 마셜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제1부에서 케손은 미정부에게 당장 필리핀의 독립을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자신은 필리핀을 중립국으로 선포할 것이며 미군과 일본군은 상호 협정에 따라 필리핀에서 철수하고 필리핀 국군은 해체한다는 것이었다. 제2부에서 맥아더는 케손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군사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맥아더에 따르면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 사상자는 절반이 넘으며 사단은 연대 규모로, 연대는 대대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전쟁부는 미-필리핀군의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나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바탄반도의 군사적 상황과는 별개로 필리핀을 즉각 독립시키라는 것은 이미 전쟁에 뛰어든 미국으로서는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워싱턴의 대응은 빠르고 단호했다. 다음날인 2월 9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케손에게 개인적 답신을 보내어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필리핀을 독립시키라는 요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이어서 필리핀 사람들에게 닥친 불행에 대하여 공감을 표하면서 필리핀에 주둔 중인 미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미국은 필리핀을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루스벨트는 케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필리핀 제도 밖에 있는 군대가 필리핀에 돌아가 침략자들을 완전히 쫓아낼 때까지 우리는 노력을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맥아더에게도 답신을 보냈다. 그는 맥아더에게 필리핀 국군을 항복시킬 권한을 부여했으나 미군은 저항이 완전히 불가능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이어서 추축진영에 대한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필리핀 수비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대해 강조했다.


케손과 맥아더는 루스벨트의 결정에 승복했다. 케손은 답신에서 미국정부의 결단이 나온 배경을 십분 이해하며 이에 완전히 승복한다고 말했다. 맥아더도 2월 11일에 보낸 답신에서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 국군을 따로 항복시키지 않을 것이며 미-필리핀군은 한덩어리가 되어 바탄반도에서 싸우고 이어서 코레히도르에서 전멸할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맥아더는 1주일 전에 받았던 마셜의 질문에 대답했다. 맥아더와 그의 가족은 미-필리핀군이 코레히도르에서 최후를 맞을 때 그들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었다.


코레히도르 수비대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맥아더의 답변을 받은 마셜은 당황했다. 그는 2월 14일에 전문을 보내어 만일 맥아더의 가족이 코레히도르에 남아 있다가는 비참하게 죽든지 아니면 잔인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엄청난 고초를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셜은 맥아더가 지난번처럼 자신의 전문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코레히도르의 대공포탄 비축상황을 묻는 합동참모본부 명의의 질문을 넣어 두었다. 다음날 보내온 답신에서 맥아더는 코레히도르의 대공포탄 상황을 설명했으나 자신의 가족에 대한 마셜의 우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튿날인 2월 16일에 맥아더가 마셜에게 따로 전문을 보내왔다. 사실 맥아더가 전문을 쓰고 있는 동안 극동에 있는 영국의 핵심 거점으로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던 싱가포르가 항복했다. 일본군은 말레이, 보르네오, 셀레베스를 이미 석권했고 수마트라와 자바의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이 와중에도 맥아더는 여전히 일본군 보급로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며 특유의 낙관적 시각으로 아직 모든 것을 단번에 뒤집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맥아더의 희망은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일본군에 대한 측면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ABDA사령부가 망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며 미국과 영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싱가포르 함락 이후 2주 동안 차기 전략방향을 놓고 회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ABDA지역을 동서로 분리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호주를 포함하는 동쪽은 미국이, 서쪽은 영국이 담당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담당 영역 내의 모든 연합군 군대를 지휘할 남서태평양지역사령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사령관은 물론 맥아더가 될 것이었다.

이제 ABDA사령부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2월 27일에 연합참모본부는 웨이벌 장군에게 ABDA사령부를 해체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맥아더는 네덜란드 정부의 통제 아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모든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서류상의 말놀음일 뿐이었다. 맥아더는 여전히 코레히도르에 틀어박힌 채 전쟁부와 합동참모본부의 통제 아래 필리핀의 미군과 필리핀 국군에 대한 지휘권만 행사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거취와는 상관없이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인 마누엘 케손의 탈출은 찬성했다. 미국잠수함 소드피시가 2월 20일에 마리벨스에 도착하여 케손과 자치령 정부의 각료들을 싣고 떠났다. 소드피시는 파나이섬에 케손 일행을 내려주고 마리벨스로 돌아와 필리핀고등판무관 프랜시스 사이어를 태우고 호주로 향했다.


태평양 전략을 둘러싼 영국과의 협의가 가닥이 잡히고 필리핀 자치령 정부가 코레히도르를 떠나자 맥아더의 탈출을 더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2월 23일에 전문을 보냈다. 극동미육군사령관은 즉시 코레히도르에 있는 포트 밀스를 떠나 민다나오를 경유하여 호주로 가서 새로 만들어지는 남서태평양지역군사령관에 취임하라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형태의 명령이었다.

동시에 합동참모본부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또다른 잠수함 1척을 코레히도르로, 그리고 폭격기를 민다나오로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레히도르에서 민다나오까지는 잠수함으로 이동하고 민다나오에서 호주까지는 폭격기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명령이 코레히도르에 도착한 시간은 2월 23일 정오였다. 맥아더의 전기작가인 프레이저 헌트에 따르면 맥아더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으로 답신을 준비했다가 자신의 참모들을 불러 대통령의 전문과 자신의 답신을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참모들은 한목소리로 대통령의 명령을 따라야 하며 저런 명백한 명령을 거부하는 짓은 군사재판감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필리핀군의 유일한 희망은 외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는 것이며 맥아더는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그 지원군을 지휘할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미-필리핀군이 남아있는 식량과 탄약으로 6월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참모들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바꾼 맥아더는 루스벨트에게 명령을 따르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는 하지만 자신의 탈출로 인한 미-필리핀군의 사기 저하와 지휘권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탈출 날짜로 3월 15일을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탈출 날짜를 맥아더의 재량에 맡기는 동시에 그에게 탈출을 위하여 호주의 폭격기와 잠수함을 징발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2월 28일에 호주의 육군과 육군항공대를 지휘하던 조지 브렛 중장은 B-17폭격기 3대를 민다나오에 보낼 준비를 하고 해군을 지휘하던 윌리엄 글래스포드 소장은 잠수함 1척을 3월 15일까지 코레히도르에 보내라는 극비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남서태평양지역군을 창설하여 불안에 떨고 있던 호주정부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미국정부는 3월 15일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마셜 참모총장은 3월 6일에 전문을 보내어 최대한 빨리 탈출하라고 명령했으나 맥아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맥아더가 명령에 따라 빨리 탈출하고자 해도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잠수함은 정밀하게 조율된 일정에 따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으며 3월 15일 이전에는 코레히도르에 도착할 수 없었다. 미군잠수함이 코레히도르 부근에 출현하면 일본군의 대잠경계태세가 강화될 것이었다. 따라서 잠수함이 예정보다 일찍 코레히도르 부근에 도착하여 얼쩡거리는 것은 위험했다.


헌트에 따르면 맥아더는 3월 10일에 다시 한번 마셜로부터 탈출을 재촉하는 전문을 받고 결정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제1필리핀군단장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과 항만방어부대장 조지 무어 소장은 맥아더가 곧 떠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필리핀에 잔존한 해군을 지휘하던 프랜시스 록웰 소장은 최대한 빨리 코레히도르를 탈출할 방법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잠수함은 없었으므로 어뢰정을 사용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6척의 어뢰정 중 상태가 의심스러운 2척을 제외하고 4척을 준비했다. 이 소규모 어뢰정 편대의 편대장은 벌클리 대위였으나 어차피 록웰 소장이 어뢰정에 탑승하여 민다나오까지의 항해를 직접 지휘했다.


이때 코레히도르를 탈출한 사람은 21명으로 맥아더 자신을 포함한 가족 4명, 육군 13명, 육군항공대 1명, 해군 2명, 필리핀육군 1명이었다. 어뢰정별 탑승자는 다음과 같다.


PT41정(벌클리 대위) : 맥아더 장군의 가족(본인, 부인, 아들, 중국인 보모), 서덜랜드 장군(참모장), 해럴드 레이 대령(해군), 시드니 허프 중령(보좌관), 모어하우스 소령(군의관)

PT34정(켈리 대위) : 록웰 소장(해군), 마셜 장군(부참모장), 찰스 스티버스 대령(인사참모), 조셉 맥미킹 대위(작전장교, 필리핀육군)

PT35정(에이커스 소위) : 찰스 윌러비 대령(작전참모), 레그란 딜러 중령(공보장교), 프랜시스 윌슨 중령(서덜랜드의 보좌관), 폴 로저스 상사(서기)

PT32정(슈마커 중위) : 스펜서 에이킨 준장(통신감), 휴이 케이시 준장(공병감), 윌리엄 마쾃 준장(대공포장교), 해럴드 조지 준장(항공장교), 조 세르 중령(통신장교)


3월 12일 저녁에 해가 떨어지자 어뢰정이 코레히도르에 접안했고 곧 사람들이 탑승했다. 어뢰정은 오후 9시 15분에 코레히도르를 떠나 남쪽으로 내달려 13일 새벽에 필리핀 중부에 있는 구요 제도의 무인도에 정박했다. 도중에 어뢰정들이 헤어졌는데 그중 1척이 흩어진 어뢰정을 찾아 헤매던 벌클리 대위의 어뢰정을 적으로 착각하여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싣고 있던 예비 휘발유를 바다에 버렸다. 따라서 이 어뢰정에 탔던 인원들을 나머지 3척의 어뢰정에 옮겼다. 3척의 어뢰정은 날이 어두워지자 구요 제도를 출발하여 밤새 달린 끝에 14일 해뜰녘에 민다나오 북해안에 도달했다.


거기서 맥아더 일행은 샤프 장군을 만나 델몬테 비행장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브렛 장군이 보낸 B-17 폭격기 1대 밖에 없었다. 브렛 장군은 4대를 보냈으나 2대는 비행장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고 1대는 추락했다. 천신만고 끝에 민다나오에 도착한 맥아더는 자신을 기다리던 폭격기가 달랑 1대뿐인데다 기체 상태마저 엉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폭발했다. 그는 브렛 장군에게 분노에 찬 전문을 보내어 당장 다른 비행기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분노가 풀리지 않은 맥아더는 다시 마셜 참모총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브렛 장군이 중요한 인물들을 태우고 민다나오에서 호주까지 위험한 바다 위로 장거리 비행을 해야하는 중차대한 임무에 상태가 엉망인 폭격기 1대만 달랑 보냈다면서 만일 브렛 장군에게 적당한 폭격기가 그렇게도 없다면 미본토와 하와이에서 가장 상태가 좋고 유능한 승무원이 모는 폭격기를 3대만 찾아서 브렛 장군에게 보내주라고 요청했다.


격노한 맥아더의 전문에 이어 마셜로부터 질책하는 전문을 받은 브렛 장군은 호주를 샅샅이 뒤져서 상태가 좋은 B-17 폭격기 3대를 골라 다시 델몬테 비행장에 보냈고 이들 중 2대가 16일 밤에 도착했다. 맥아더 일행은 곧 폭격기에 올라 다음날인 17일 오전 9시에 다윈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3월 21일에 마셜에게 보낸 전문에서 자신의 탈출을 도와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코레히도르에서 민다나오까지 맥아더 일행을 실어준 어뢰정 4척의 승조원 전원은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은성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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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일본군의 후퇴


대본영 계획에 따르면 루손 점령은 1942년 1월 말까지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러나 1월 26일부터 실시한 바탄공세가 실패하면서 2월 초에 일본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직면한 현실은 암담했다. 제65혼성여단과 보병제9연대가 동쪽에서 실시한 공세는 값비싼 희생만 치르고 막혔다.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는 엉뚱한 곳에 상륙하여 전멸했고 다른 대대는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전멸 위기에 빠져 있었으며 연대의 나머지 병력은 적 방어선 후방에 고립되어 있었다. 고립된 병력을 구하려는 보병제9, 보병제33, 보병제122연대의 공격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파국이 찾아올 것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사실 대본영은 2월 8일까지 제4사단과 제21사단 일부를 제14군에 증원하기로 내정한 상태였다. 일의 발단은 1월 22일에 천황이 참모총장에게 바탄반도의 전황을 묻자 참모총장이 제14군을 증원할 필요성이 있다고 답변한 것이었다. 이후 대본영은  바탄반도 공략이 늦어질 경우 미국이 선전에 활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바상륙에 투입될 예정이던 제21사단의 일부와 중국에 주둔 중이던 대본영 직속 예비대인 제4사단을 필리핀에 증원하여 바탄반도를 소탕하기로 결정했다. 제4사단의 필리핀 도착이 완료되는 시점은 1942년 3월 말로 정했다.


남방군은 필리핀 증원에 반대했다. 그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남방작전의 최종 목표인 자바였는데 남방군은 자바상륙을 준비하면서 수송선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 바탄반도야 어차피 남방작전이 성공하면 드넓은 일본 영역 한가운데에 고립된 지점이 될 것이니 언제든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남방군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자바상륙을 눈앞에 둔 이 중차대한 시기에 급할것 하나없는 바탄반도 공략을 위하여 자바전투에 투입될 제21사단의 일부를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가뜩이나 부족한 수송선을 동원하여 제4사단을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옮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에 사용할 수송선이 있다면 자바상륙에 한척이라도 더 배정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42년 2월 8일에 비록 제16군 소속이었지만 필리핀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의지할 수 있었던 강력한 예비대였던 제48사단이 링가옌만을 떠났다.

이날 제14군은 바탄반도를 공략할 것이냐 봉쇄할 것이냐를 두고 산페르난도에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제14군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과 제1과 고급참모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는 한달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격돌했다. 나카야마 참모는 공격을 속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공격실패는 병단장들에게 과도한 권한을 준 것이 실패의 원인이므로 차후 공세는 군이 직접 지도해야 하며 서쪽보다는 동쪽 사맛산 지역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에다 참모장은 현재 제14군의 전력으로는 공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우니 바탄공략을 중단하고 일단 봉쇄한 다음 증원군이 도착하면 전력을 재건한 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14군의 전력이 공격을 지속하기 힘들만큼 약화되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뚜렷했으므로 참모들은 대부분 마에다 참모장의 의견에 동조했다.


8일 오후 6시에 혼마 중장이 마에다 참모장의 안을 채택했으며 회의는 비사야, 민다나오 공략 등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 후 끝났다. 이제 제14군이 할 일은 병사들을 쉬게하면서 군을 재편하는 동시에 봉쇄망을 단단히 조이면서 증원군인 제4사단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3월 말에 제4사단이 도착하면 다시 공격을 가할 것이었다. 8일 저녁에 혼마 중장은 일선의 일본군에게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65여단장 나라 아키라 중장은 티아위르강과 탈리사이강 북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은 바각 및 고고강 북쪽의 고지대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라 중장은 철수하는데 문제가 없었으나 모리오카 중장은 그렇지 않았다. 모리오카 중장은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가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싸우고 있고 연대의 나머지 병력이 고립지대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철수할 수는 없다면서 며칠 간의 유예를 요청했다. 혼마 중장은 모리오카 중장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나라 중장에게 제2군단 정면에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흉내를 냄으로써 제16사단에 가해지는 압력을 덜어주라고 명령했다.


2월 13일에 제65여단은 제2군단 정면에서 마치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듯이 요란을 떨었다. 준비포격과 항공대의 공습에 이어 대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군세를 크게 보이기 위하여 제14군이 보유한 모든 트럭을 끌고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 미-필리핀군의 야포 사정거리 내로 들어온 것은 1개 대대에 미달하는 병력이었으며 과감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멀찍이서 총격을 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혼마 장군은 이런 견제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으나 미-필리핀군은 위력정찰로 생각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월 22일에 제16사단의 철수가 마무리되자 제65여단도 철수명령을 받았다. 제65여단은 이전보다 더 북쪽인 발랑가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1달에 걸친 바탄공략전은 실패로 끝나고 제14군은 증원을 기다리면서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이제 혼마 장군은 봉쇄망을 조이는데 신경을 썼다. 마닐라 이남의 루손을 책임지고 있던 보병제33연대장 스즈키 타츠노스케 대좌는 제3대대와 수색제16연대(1개 중대 감편)을 이끌고 마닐라 만의 남안으로 가서 필리핀 사람들이 바탄이나 코레히도르에 식량을 보내주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105mm 캐넌포 4문과 155mm 캐넌포 2문을 동원하여 매일 코레히도르를 비롯하여 마닐라만 입구의 요새화된 섬들을 포격했다.


혼마 장군은 남쪽으로부터 소수의 선박이 기습적으로 바탄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루손섬 바탕가스주 바로 남쪽에 있는 민도로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2월 26일에 보병제33연대제3대대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포대로 이루어진 스즈키지대가 해군함정의 호위를 받으면서 올롱가포를 떠났다. 스즈키지대는 27일 아침에 민도로섬의 북동쪽에 상륙하여 주변의 마을과 비행장을 점령했다. 민도로섬 남쪽에는 약 50명이 지키는 비행장이 있었는데 그곳은 공격하지 않았다. 이 남쪽 비행장은 3월 15일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점령했다.


개전 이래 1942년 2월 말까지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이룬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아래는 제14군이 2월 20일까지 노획한 전리품으로 이것만 보아도 제14군이 미-필리핀군을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14군의 전리품.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9.html)


그러나 댓가 또한 컸다. 제14군은 1942년 1월 6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약 2,700명의 전사 및 실종자와 4,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기록했다. 더하여 10,000 - 12,000명이 말라리아, 이질, 각기병, 그리고 열대성 풍토병에 걸렸다. 예하 부대인 제16사단과 제65여단을 살펴보면 당시 제14군의 비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제16사단이 가진 3개의 보병연대 중 보병제20연대는 사실상 사라졌다. 보병제9연대는 바탄반도의 동서방면에서 모두 싸우면서 약 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가장 피해가 적은 보병제33연대도 윗쪽 고립지대 전투에서 12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942년 2월 24일 현재 바탄반도에 있는 제16사단의 병력 중 전투가능한 보병의 숫자는 712명에 지나지 않았다.


제65혼성여단도 마찬가지였다. 2개 대대로 이루어진 보병연대 3개를 가진 제65여단의 병력은 1월 9일 현재 6,651명에 달했지만 연속적인 전투를 치르면서 소모되었다. 1942년 1월 9일부터 24일 사이에 제65여단은 1,471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월 25일부터 2월 15일 사이에도 손실은 계속되어 이 기간동안 제16사단에 배속된 제122연대는 약 3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보병제141연대는 80명의 전사자와 25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보병제142연대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상륙 이래 2월 15일까지 제65여단 및 배속부대가 입은 피해는 전사 1,142명, 부상 3,110명에 달한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대부분 지친데다가 질병을 앓고 있어서 전투력이 떨어졌다.


제14군의 정보주임이었던 나카지마 요시오 중좌는 1942년 3월 1일 현재 제14군에서 전투가능한 병력이 약 3,000명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제14군은 군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전력이 떨어져 있었다. 훗날 전범재판에서 혼마 중장은 만일 그때 맥아더 장군이 대규모 역습을 감행했다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마닐라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과는 대조적으로 오리온-바각방어선에서 승리한 미-필리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낙관주의가 판을 쳤다. 혼마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맥아더가 머물던 마닐라 호텔의 객실에서 자결했으며 싱가포르 공략을 지휘했던 야마시타 장군이 후임으로 부임했다는 헛소문을 맥아더 사령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장병이 믿을 정도였다.


승리의 2월에 병사들의 사기는 개전 이래 가장 높았으며 일선 장교는 그 효과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찰에 나선 병사들은 이전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행동했으며 주전투진지였던 아부케이선까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부하들의 높은 사기에 고양된 일선 장교 사이에서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하자는 주장이 크게 일어났다. 많은 일선장교들이 이 기회에 반격을 가하여 최소한 주전투진지였던 아부케이선까지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일부는 바탄반도의 입구에 해당하는 라약선까지 밀어붙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선장교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이러한 총반격에 대한 열의는 계급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고위사령부로 올라갈수록 약해졌으며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총반격이 불가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본군이 필리핀 근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움켜쥐고 있는 한 맥아더의 군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총반격이 성공하여 아부케이를 넘어 라약, 심지어 마닐라까지 진격한다고 해도 일본이 본격적으로 추가 병력을 투입하면 외부로부터의 보급이나 증원을 기대할 수 없는 미-필리핀군은 다시 바탄반도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었다.


총반격은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최대한 오래 거부한다는 필리핀수비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었다. 미-필리핀군이 바탄반도의 고정된 방어선을 지키는 한 식량, 휘발유, 탄약을 비롯한 모든 보급품을 적게 소비하면서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거부한다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반면 총반격은 실패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다고 해도 수많은 문제점을 낳을 것이었다. 지켜야 할 보급선은 길게 늘어지고 병사가 떠나버린 해안은 적의 상륙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안그래도 쪼들리는 보급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총반격은 당시 미-필리핀군의 높은 사기와 일본제14군의 약화된 전력을 감안할 때 전술적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전략적 견지에서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총반격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해야할 일은 자신이 눌러앉은 방어선을 강화해서 반드시 오고야 말 일본군의 다음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1942년 2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과 일본군은 모두 자신의 방어선에 눌러 앉았다. 양측 방어선 사이의 공간은 정찰대만이 오가는 무인지대로 남았다. 일본군이 공격을 재개할 때까지 바탄반도의 전투는 휴지기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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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고립지대 전투(2) - 고립지대 소탕


모리오카 중장이 고립지대를 구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하는 동안 제1필리핀군단은 고립지대 소탕에 죽을 쑤고 있었다. 제1사단장 세군도 장군은 휘하의 예비병력을 총동원했지만 작은 고립지대(Little Pocket )를 정리하는데 실패했다. 우측구역 사령관 브라우어 장군은 큰 고립지대(Big Pocket)를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1일 저녁 현재 큰 고립지대의 북쪽과 북동쪽에는 제11보병연대의 G 및 C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고립지대 남쪽에는 제45보병연대제1대대가 있었고 제51사단의 임시대대가 고립지대 남쪽과 서쪽의 5번오솔길을 지키고 있었다. 


(고립지대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3 P.336)


2월 2일에 실시한 큰 고립지대에 대한 공격에는 전차가 투입되었다. 제192전차대대A중대 소속의 전차 4대로 이루어진 전차소대가 제45보병연대제1대대의 1개 소대와 함께 7번오솔길을 따라 북상했다. 이들이 고립지대 속으로 들어가자 말벌집을 건드려 놓은 듯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으나 전차소대는 스카우트 소대의 근접호위를 받으면서 착실하게 전진하여 저녁에 고립지대를 뚫고 북쪽으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전차 1대가 파괴되었다. 전차와 스카우트소대는 이로써 7번오솔길을 개통시켰으나 그날 밤에 일본군이 이들이 지나온 7번오솔길을 다시 점령했다. 


2월 3일 공격에서도 전차 1대가 파괴되었으나 전과는 미미했다. 이날 윌리볼드 비안치 중위는 용감한 행위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비안치 중위는 다른 소대가 적의 기관총좌 2개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자원하여 선두에서 공격에 참가했다. 그는 2발의 총알을 왼팔에 맞았으나 후송을 거부한 채 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쏘아대며 적 기관총좌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기관총좌 하나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가슴 근육에 총알 2발을 더 맞았다. 이후 전차가 다른 기관총좌를 발견했으나 주포의 사각이 나오지 않아 공격을 못하자 전차에 뛰어올라 대공기관총을 잡고 적의 기관총좌에 쏘아대다가 다시 1발의 총알을 맞고 전차에서 떨어졌다. 그는 즉시 후송되었으며 1달 후 완전히 회복하여 복귀했다.


(윌리볼드 비안치 중위. https://en.wikipedia.org/wiki/Willibald_C._Bianchi)


2월 4일 공격에서는 제192전차대대B중대로부터 전차소대 1개가 추가되었다. 이날 추가로 전차 1대를 잃었으나 여전히 전과는 미미했다.


2월 5일 오전 10시에 제1필리핀군단장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1사단사령부에서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존스 장군, 브라우어 장군, 세군도 장군, 웨인라이트의 참모장인 윌리엄 매이허 대령, 그리고 존스의 참모장인 스튜어트 맥도널드 대령이었다. 여기서 웨인라이트 장군은 고립지대 전투의 지휘권을 브라우어 장군에게서 거두어 존스 장군에게 넘겼다. 존스 장군은 고립지대를 완전히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을 가함으로써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이 부족한 병력을 이리저리 돌려서 공격을 막지 못하도록 만든 다음 단일축선을 따라 집중공격을 가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7일까지 공세를 시작한다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2월 6일 하루동안 존스 장군은 공세를 준비했다. 작은 고립지대 소탕전은 제1보병연대장 베리 대령이 지휘했다. 그에게는 일선에 배치한 병력을 제외한 제1사단의 모든 예비병력이 주어졌다.

큰 고립지대 소탕전은 제45연대제1대대장인 레슬리 라스롭 중령이 지휘했다. 그의 휘하에 주어진 병력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고립지대 서쪽에 제92보병연대제1대대와 전차소대가 배치되었으며 이 부대가 주공이 되어 동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고립지대의 남쪽에는 제51사단의 임시대대, 동쪽에는 제45보병연대제1대대, 북동쪽에는 제11보병연대C중대 그리고 북쪽에는 제11보병연대G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공격예정시간은 2월 7일 오전9시였다. 하지만 동원된 병력 규모로 알 수 있듯이 큰 고립지대 소탕에 심혈을 기울이던 존스 장군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잘한 사항까지 챙겼기 때문에 라스롭 중령은 말만 현장지휘관일 뿐 실제 역할은 존스 장군의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날밤에 모리오카 중장이 큰 고립지대를 구하기 위하여 북쪽으로부터 공세를 가했다. 보고를 받은 브라우어 장군은 존스 장군이 다음날 공세에 사용하려고 모아둔 병력 중에서 제92보병연대A중대와 전차소대를 빼내어 북쪽으로 급파했다. 명백한 월권행위였으나 정확한 판단이었다. 제11보병연대제2대대장 헬머트 뒤스터호프 중령이  공격을 받아 지리멸렬한 자신의 부하들을 추스려 기세등등하게 밀고 내려오던 일본군의 진격을 잠깐 지연시킨 사이 A중대와 전차가 현장에 도착함으로써 북쪽에서 밀고 내려온 일본군이 큰 고립지대와 연결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


2월 7일 오전 7시 30분에 존스 장군은 자신이 모아둔 병력 중 일부가 밤새 일본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전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쪽으로 가버린 병력을 대신할 저드슨 크로우 소령의 제92보병연대제2대대는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제2대대의 도착 직후에 시작된 공세는 실패했다. 그러자 존스 장군은 큰 고립지대는 일단 포위만 해놓고 작은 고립지대 소탕이 끝나면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소탕하기로 했다.


2월 7일 오전 9시에 베리 대령은 예정대로 작은 고립지대를 공격했으나 전과는 미미했다. 저녁이 되자 베리 대령은 포위망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2월 8일 공세는 포위망을 완벽하게 짜고 실시되었다. 이 공세로 작은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나 섬멸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전투의 혼란 속에 8일 저녁이 되자 포위망이 다시 흐트러지면서 동쪽이 휑하니 비어 버렸는데 베리 대령은 모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동쪽이 비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어둠을 틈타 도망쳤다. 이로써 베리 대령은 작은 고립지대를 없앴으나 대신 작은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을 제1필리핀군단 후방에 풀어놓은 결과가 되었다.


2월 9일 아침이 되자 작은 고립지대를 탈출한 일본군이 윗쪽 고립지대의 서쪽을 지키던 필리핀군 후방에 나타났으나 다행히 혼란은 없었다. 원래 감편된 중대 수준인데다가 열흘 동안 적진 후방에 고립되어 있다가 전날 실시한 베리 대령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작은 고립지대의 일본군은 필리핀군 방어선을 배후에서 위협할 전력이 되지 못했으며 그럴 의지도 없었다. 이들은 북쪽의 일본군 전선으로 도망치다가 필리핀군 방어선에 가로막힌 것 뿐이었다. 잠시 후 베리 대령의 추격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개인호 하나도 파지 못한 상태로  다시 포위되었다. 필리핀군이 항복을 권유하자 일본군은 소총사격으로 화답했고 이어진 짧고 격렬한 교전 끝에 전멸했다.


일본제14군은 2월 8일에 바탄공략을 포기하고 봉쇄로 전환했다. 이 결정에 따라 모리오카 중장은 9일 아침에 휘하 병력을 바각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보병제20연대의 병력이 아냐산-길라임 지역과 고립지대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대로 철수할 수는 없었다. 모리오카 중장은 제14군에 며칠간의 말미를 요청하여 승인을 받은 후 큰 고립지대 내의 요시오카 대좌에게 북쪽으로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위쪽 고립지대 내의 보병제33연대제2대대에게는 남쪽으로 공세를 가하여 큰 고립지대에 갇힌 일본군의 탈출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위쪽 고립지대로부터의 공격은 실패했다. 존스 장군은 작은 고립지대 전투에서 풀려난 베리 대령의 부대를 모두 윗쪽 고립지대의 남쪽에 몰아 넣었으며 따라서 충분한 병력을 보유한 베리 대령은 윗쪽 고립지대의  일본군이 실시한 공세를 간단히 막아내었다.


2월 9일 하루동안 큰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은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필리핀군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북쪽으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쪽으로부터는 제92보병연대의 2개 대대가 밀고 들어왔다. 남쪽으로부터는 제51사단의 임시대대가 7번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전진했다. 제11보병연대G중대는 7번오솔길의 북쪽으로부터 남으로 밀고 들어왔다. 제11보병연대C중대와 제45보병연대제1대대는 7번 오솔길 동쪽에서 7번오솔길 상의 일본군을 고착견제하고 남북에서 서로를 향해 전진하는 양 부대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량사정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방어선을 뚫고 침투할 때 보급품 운반을 위하여 필리핀 상륙 이후 입수한 말과 노새를 대량으로 끌고 들어왔는데 포위된 상황에서 말과 노새를 도축하여 먹었으며 투올강 덕분에 식수 걱정도 없었다.


2월 10일이 되자 제92보병연대가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을 투올강으로부터 밀어내었다. 이제 일본군은 마실 물이 없어서 나무의 수액을 마셔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2월 11일이 되자 고립지대에 대한 공격이 동쪽, 서쪽, 그리고 남쪽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스카우트대대는 동쪽에서 공세를 가하여 7번오솔길을 완전히 장악했다. 서쪽에서 공격한 제92보병연대와 남쪽에서 공격한 제51사단 임시대대도 약진하여 이제 총을 잘못 쏘면 건너편의 아군이 맞을 지경이 되었다. 다만 살아남은 일본군이 북쪽으로 몰리면서 북쪽에서 공격하던 제11보병연대의 C중대와 G중대는 강한 저항을 받아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요시오카 대좌는 더 이상 꾸물거리다가는 전멸할 것임을 깨닫고 북쪽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북쪽의 C중대와 G중대 사이에는 도저히 통과가 불가능해 보이는 울창한 정글이 있었는데 요시오카 대좌는 이 정글을 통하여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이날 미-필리핀군의 지휘관이 바뀌었다. 전투를 지휘하던 존스 장군이 급성 이질로 후송되자 참모장 맥도널드 대령이 임시로 지휘를 맡았으며 웨인라이트 장군은 다음날인 12일에 브라우어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2월 12일이 되자 큰 고립지대 전투가 사실상 끝났다. 일본군이 차지했던 지역에 들어간 필리핀군은 살아있는 말과 노새 몇 마리를 발견했으나 포로는 없었다. 필리핀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약 300구였고 추가로 일본군이 매장된 무덤 약 150기도 확인했다. 또한 대량의 장비, 무기 및 탄약을 노획했다. 필리핀군은 큰 고립지대 안의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믿었으나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11일 밤에 도저히 통과가 불가능해 보이는 울창한 정글을 통하여 큰 고립지대를 탈출했다. 이후 일본군은 깊은 정글만을 골라 힘겹게 북상한 끝에 4일 만인 15일 정오에 보병제9연대의 방어선에 도달함으로써 사지를 벗어났다.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을 때 1,000명에 달했던 병력은 요시오카 대좌를 포함하여 378명으로 줄어들었으며 대부분 환자나 부상자였다. 생존자 중 100명 정도가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중상자였다고 한다.


이로써 요시오카 대좌의 보병제20연대는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연대가 남부루손에 상륙했을 때는 2,881명이었으며 바탄전투에 투입되었을 때는 2,690명이었다. 마우반선에서의 피해는 가벼웠다. 하지만 1월 23일부터 시작된 상륙작전은 치명적이었다. 첫번째로 상륙한 제2대대는 롱고스카와얀곶과 퀴나완곶에서 전멸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투입된 제1대대는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사실상 전멸했다. 마지막으로 제3대대를 포함한 나머지 병력들은 고립지대 전투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1942년 2월 15일 현재 보병제20연대의 병력은 파견나간 인원을 포함하여 약 65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절반 이상이 환자나 부상자였다.


큰 고립지대가 정리되자 브라우어 장군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돌출부인 윗쪽 고립지대로 관심을 돌렸다. 12일 현재 윗쪽 고립지대의 서쪽은 제3보병연대의 3개 중대, 제1보병연대의 1개 중대, 그리고 처음 공격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11보병연대F중대의 잔존병이 지키고 있었다. 동쪽은 26일 저녁에 브라우어 장군이 존스 장군에게서 빼내온 제92보병연대A중대와 지리멸렬한 제12보병연대의 잔존병인 5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남쪽은 제2경찰연대제2대대가 지켰다.


2월 13일부터 브라우어 장군은 큰 고립지대 전투에서 풀려난 부대를 투입하여 윗쪽 고립지대를 공격했다. 제45보병연대제1대대는 남쪽에서, 제51사단 임시대대와 제92보병연대는 서쪽에서, 그리고 제11보병연대와 경찰대대는 동쪽에서 공격했다.

2월 14일 저녁이 되자 윗쪽 고립지대의 크기는 320m x 180m로 줄어들었다.


윗쪽 고립지대 전투에도 제192전차대대의 전차들이 참가했다. 관목이나 덩굴이 시야를 가리는 정글에서 제11보병연대제2대대 소속의 이고로트족 병사들이 전차병에게 도움을 주었다. 바탄반도의 원주민인 이들 병사들은 전차 위에 올라타고 정글도를 휘둘러 무성한 가지를 쳐냄으로써 전차병의 시야를 틔워 주었다. 전차 위에 올라타서 저격에 노출된 그들은 자신을 노리는 일본군을 발견하면 권총을 쥔 오른손으로 사격을 가하면서 왼손에 든 지팡이로 전차병에게 일본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2월 15일 오후가 되자 저항이 약해졌다. 윗쪽 고립지대의 일본군은 큰 고립지대에 갇힌 요시오카연대의 탈출을 돕기 위하여 버티고 있었는데 15일 오후에 요시오카연대가 보병제9연대의 방어선에 도달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나자 힘껏 싸울 이유가 없어졌으며 안전하게 철수할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15일 저녁이 되자 윗쪽 고립지대의 크기는 160m x 90m 로 줄어들었다.


2월 16일이 되자 윗쪽 고립지대는 90m x 70m로 줄어들었으며 17일이 되자 드디어 필리핀군은 1월 26일의 방어선을 복구했다. 이로써 고립지대 전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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