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공격 개시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한 1942년 4월 3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인 성금요일(Good Friday)이었다. 이날 아침 사맛산 정상에 있던 제41사단(PA)포병대의 관측장교 2명은 일본군 전선에서 후방으로 약 3km - 5km 사이에서 일본군 포대를 30개 가까이 확인했다. 9시가 되자 일본군 야포가 효력사준비사격을 시작했고 10시부터 효력사를 시작했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제1차 사격을 실시했으며 30분 휴식 후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제2차 사격을 실시했다. 필리핀 전역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포격이었다.
기타지마 제14군포병사령관은 15cm 유탄포 5개 중대, 10cm 캐넌포 3개 중대, 15cm 캐넌포 2개 중대, 24cm 유탄포 5개 중대 합계 46문과 제4사단포병 3개 대대 36문, 그리고 제65여단포병 2개 대대 24문까지 106문을 직접 통제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도 자체 계획에 따라 준비사격에 동참하여 제14군의 화포 거의 모두가 준비사격에 참가했다.
제1차 사격에서 화포 1문당 발사수는 야포와 산포는 300발, 10cm 유탄포는 180발, 15cm 유탄포는 80발, 45식 24cm 유탄포는 40발, 96식 24cm 유탄포는 20발이었다. 제2차 사격의 화포 1문당 발사수는 야포와 산포는 100발, 10cm 유탄포는 60발, 15cm 유탄포는 20발, 45식 24cm 유탄포는 20발, 10cm 캐넌포는 30발, 15cm 캐넌포는 15발이었다. 10cm 및 15cm 캐넌포는 제1차 사격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미-필리핀군의 야포가 대응사격을 가하면 대포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포병전에 할당된 포탄은 1문당 10cm 캐넌포는 120발, 15cm 캐넌포는 105발이었다. 15cm 유탄포도 대포병전에 투입되었으며 할당된 포탄은 1문당 20발이었다.
미카미 장군의 제22비행단도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12번에 걸쳐 59회 출격하여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50kg 짜리 폭탄 346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6번에 걸쳐 54회 출격하여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와 포병에게 100kg 짜리 폭탄 53발, 250kg 짜리 폭탄 108발 그리고 500kg 짜리 폭탄 18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6번에 걸쳐 34회 출격하여 제4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와 포병에게 100kg 짜리 폭탄 200발과 250kg 짜리 폭탄 24발을 투하했다. 제22비행단은 이날 하루 동안 147회 출격하여 8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경폭격기들은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저공으로 날면서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병사들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폭격기들은 진지와 함께 야포를 노렸다. 정찰기가 야포의 발사화염을 발견하면 폭격기가 그곳을 폭격했다. 미-필리핀군의 대공포 사수들은 포탄을 쏘아올릴 수 있는 최고 높이보다 900m 정도 높은 곳에서 빙빙 돌면서 정찰기의 보고를 기다리는 일본폭격기들을 보면서 이만 갈았다.
포격과 공습의 효과는 파멸적이었다. 5시간 동안 지속된 엄청난 파괴와 소음은 미-필리핀군 병사의 얼을 빼놓았다. 그들이 정성들여 만든 방어선은 엉망이 되었다. 전화선은 끊어졌으며 사탕수수밭과 대나무숲이 맹렬하게 불타면서 나는 연기가 사맛산에 있는 관측반의 시야를 가렸다.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한 미-필리핀군의 야포는 곧 일본군 야포와 폭격기의 반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오후 3시가 되자 포격과 공습은 남쪽으로 옮겨가고 일본군 보병과 전차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주공은 제2필리핀군단의 좌익인 D 구역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포격과 공습 또한 이곳에 집중되었다. D구역은 사맛산에서 판틴간강에 이르는 5,500m 구간으로 제21 및 제41사단(PA)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필리핀 사단장인 맥슨 로우 준장이었다.
(일본군의 돌파.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4.html#24-1 P.423)
D 구역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캣몬강이 흘렀는데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남북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3개가 있었다. 캣몬강과 판틴간강 사이에는 29번 오솔길이 있어 북쪽의 오리온-바각 도로와 남쪽에서 동서로 달리는 8번 오솔길을 연결했다. 캣몬강 동쪽에는 6번 오솔길이 역시 오리온-바각 도로와 8번 오솔길을 연결했고 사맛산 동쪽에는 D 구역와 C구역의 경계를 따라 남하하는 4번 오솔길이 있었다. 사맛산의 북서쪽에서 29번과 6번 오솔길을 동서로 연결하는 오솔길이 있었고 사맛산 남쪽에서는 6번과 4번 오솔길을 역시 동서로 연결하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둘 다 429번 오솔길이라고 불렀다.
D 구역의 동쪽은 마테오 카핀핀 준장의 제21사단(PA), 서쪽은 빈센트 림 준장의 제41사단(PA)이 맡았다. 제21사단은 동쪽으로부터 제22, 제23, 제21보병연대의 순으로 배치했으며 제21보병연대의 방어구역 내에 캣몬강이 있었다. 제41사단은 동쪽으로부터 제43, 제42, 제41보병연대의 순으로 배치했다. 각 연대의 후방 1,400m 지점에는 예비방어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일선 방어선에 배치되어 두 사단 모두 예비대가 부족했다.
D 구역을 공격한 일본군은 제65여단과 제4사단 우익대였다. 나라 중장의 제65여단은 판틴간강 서쪽에 전개한 우측지대를 제외하고 전 병력이 29번 오솔길을 방어하던 제42보병연대를 공격했다. 다니구치 장군이 지휘하는 제4사단 우익대는 보병제61연대, 보병제8연대의 1개대대, 전차제7연대, 포병 및 공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43 및 제21보병연대를 공격했다. 보병제8연대 중심의 제4사단 좌익대는 제22및 제23보병연대의 전방에 전개하고 있었으나 3일 공격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보병제142연대의 1개 대대를 기간으로 한 제65여단의 우측지대는 구포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판틴간강 동쪽 강변을 따라 남하하여 제1필리핀군단의 동쪽 끝을 지키던 제2필리핀경찰연대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우측지대는 경찰연대의 방어선을 뚫는데는 실패했지만 제1군단에게 위협을 가함으로써 제2군단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제65여단의 주력은 제41사단의 중앙으로 쇄도했다.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이 제42보병연대의 방어선에 도달했을 때 방어선은 비어 있었다. 필리핀군이 미리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제65여단은 오후 7시까지 29번 오솔길을 따라 약 900m 를 진격했다.
티아위르강을 건너 제43 및 제21보병연대를 공격한 제4사단우익대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티아위르강의 도하점에는 미-필리핀군의 대전차포 2문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준비사격 때 파괴되었다. 강을 건넌 일본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방어선에 들이닥치자 필리핀군은 총 몇 발을 쏜 이후에 그대로 달아났다. 제4사단 우익대도 오후7시까지 6번 오솔길을 따라 900m 정도 전진했다. 공격 첫날에 제65여단과 제4사단우익대는 일본군이 가장 긍정적으로 예측한 것보다도 훨씬 멀리 진격했다.
첫날의 전투는 준비사격 단계에서 결판났다. 일본군의 주공인 D 구역 중앙에 위치하여 가장 심한 포격을 얻어맞은 제42 및 제43보병연대와 제21보병연대의 왼쪽 대대는 일본군이 방어선에 도달하기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5시간에 걸친 준비사격과 공습에 얼이 빠진 필리핀군은 일본군을 보자마자 방어선을 버리고 달아났다. 제41공병대대(PA)의 헨리 해리스 중위는 도망치는 부하들에게 방어선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부하들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면서 그대로 후방으로 달아났다.
제41사단에서는 가장 서쪽에 있어서 준비사격을 덜 얻어맞은 제41보병연대만이 질서있게 후퇴했다. 제41보병연대는 인접한 제42보병연대로부터 대량으로 넘어오는 낙오병을 받아들이면서 후퇴하여 연대의 예비방어선인 29번과 429번 오솔길이 만나는 곳에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연대는 해가 졌을 때 8번 오솔길까지 후퇴했는데 아마도 잡음이 심한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명령을 잘못 알아들은 듯하다.
제21사단에서는 가장 왼쪽에 자리잡은 제21보병연대의 왼쪽 대대만이 붕괴되었다. 제21보병연대의 2개 대대중 오른쪽 대대가 굳건하게 버텨준 덕분에 제21보병연대장 윌리엄 와펜스타인 중령은 도망쳐오는 왼쪽 대대의 잔존병들을 재편성하여 사단의 좌익에 방어선을 펼 수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 보고를 받은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군단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33보병연대(PA, 제1대대 감편)를 D 구역 사령관인 로우 장군 휘하로 돌렸다. 연대장 스탠리 홈스 소령은 4일 아침까지 사맛산 서쪽의 6번 도로에 방어선을 펴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우 장군은 완전히 붕괴된 제42보병연대는 포기하더라도 제43보병연대는 재건하여 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3일 저녁에 D구역의 고참 장교인 멜컴 포티어 대령이 제43보병연대를 찾아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북상했다. D 구역의 작전참모 로버트 호프먼 대령은 제41보병연대가 8번 오솔길까지 남하한 것을 알아내고 다시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로우 장군은 제41, 제43 및 제33보병연대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다.
혼마 중장은 전선에서 잇따라 들어오는 승전보를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다음날은 공격을 가하지 않고 부대를 추스린 다음 5일에 다시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성공에 고무된 혼마 장군은 3일 저녁에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제65여단과 제4사단에게 다음날도 공격을 속행하라고 명령했다. 4일 공격도 충분한 준비사격과 공습 이후에 실시할 것이었다.
제65여단과 제4사단은 기존의 공격계획을 앞당겼다. 제65여단은 판틴간강 계곡과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할 것이었다. 제4사단우익대는 2개로 나뉘어 주력은 정오부터 캣몬강 유역을 따라 남하하고 전차제7연대는 동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3일 공격에 참가하지 않은 모리타 대좌의 좌익대는 타이위르-탈리사이강을 오전 10시에 건넌 다음 정오에 제22및 제23보병연대(PA)의 방어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남하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하여 보병연대 3개로 방어선을 펴려는 로우 장군의 계획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제43보병연대를 재건한다는 포티어 대령의 임무는 쉽지 않았다. 그는 3일 밤에 사맛산 서쪽에서 제43보병연대 뿐 아니라 제42보병연대의 낙오병까지 1,000명 이상을 발견했으나 모두들 너무나 겁을 먹고 사기가 꺾여 있어 장교의 집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포티어 대령은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여 그걸 마시려고 몰려든 수백명을 설득하여 겨우 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제41보병연대의 경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호프먼 대령으로부터 다시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는 밤새 북상하여 4일 오전 9시 30분에 29번 오솔길과 판틴간강 사이의 예비방어선에 도착했다.
홈스 소령의 제33보병연대(PA)는 병력이 600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많은 숫자가 방금 퇴원한 상태였다. 제33보병연대는 6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에서 1.6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서 대전차장애물을 만들고 있던 제41공병대대의 1개 소대를 발견했다. 홈스 소령은 그곳에 방어선을 펴기로 하고 4일 아침이 될 때까지 6번 오솔길을 따라 종심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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