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보급 노력


맥아더 장군은 미-필리핀군이 바탄에 들어간 1942년 1월 초부터 줄기차게 일본의 봉쇄망을 뚫고 보급해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탈출한 이후에는 웨인라이트 장군이 같은 요청을 반복했다. 워싱턴에서는 보급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독일우선이라는 연합군 전략이 무색하게 1942년 전반기에 미군 병력과 보급품의 대부분은 태평양에 투입되었다. 미국은 선박, 잠수함, 항공기를 이용하여 바탄에 보급품을 전달하려 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군은 남서태평양의 제해권을 확고하게 쥐고 있었고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무런 준비가 없던 연합군이 바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조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1942년 1월 4일에 맥아더 장군은 마셜 참모총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바탄에 잠수함을 사용하여 보급품을 빨리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수송작전에 잠수함을 투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하트 제독은 그런 임무에 사용할 잠수함이 없다면서 거부했다.


1월 17일에 맥아더는 다시 마셜에게 전문을 보내어 식량을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병사들이 정량의 절반만을 먹은지 벌써 열흘을 넘겼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필리핀군의 충성심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맥아더는 일본의 봉쇄망이란 선전일 뿐이며 실제로는 쉽게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셜 장군은 이미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필리핀에 식량을 가장 빨리 보내는 방법은 호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식량을 사서 현지에서 임대한 상선에 실어 필리핀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마셜은 이 임무를 위하여 스티븐 체임벌린 대령과 레스터 휘트록 중령을 호주로 파견하면서 1000만 달러를 사전승인없이 집행할 권한을 주었다. 당시는 미국의 1인당 GDP 가 1,000달러가 채 안되던 시절로 1000만 달러면 미국형 보병사단 1개를 만들거나 P-40 전투기를 200대 이상 사거나 리버티선 5척을 건조할 수 있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여기서 마셜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셜은 부하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절박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호주의 미군사령부는 필리핀 보급을 위한 조직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의 전문을 받은 마셜은 호주의 브렛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체임벌린 대령이 1000만 달러를 집행할 권한을 가지고 호주로 가고 있으니 현지의 달러와 호주파운드화를 긁어모아 그가 원하는 즉시 원하는 액수만큼 용도를 묻지말고 현찰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체임벌린 대령과 별도로 호주의 미군사령부도 최대한 빨리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부터 필리핀에 식량을 실은 수송선을 파견하라고 명령하면서 거기에 드는 비용은 얼마든지 지출해도 좋으며 예산이 더 필요하면 요청하라고 말했다. 마셜은 시간이 관건이라며 단호하고 신속한 행동을 요구했다. 이 명령에 따라 브렛 장군은 300만명분의 식량(5만명의 60일치)을 필리핀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존 로벤슨 대령이 식량을 사고 수송선을 임대할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6명의 부하와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되었다.


마셜은 또한 전직 전쟁부 장관이자 맥아더의 오랜 친구인 패트릭 헐리 장군에게 필리핀 보급 노력을 압박하라는 임무를 주어 호주로 파견했다. 맥아더에게는 전문을 보내어 필리핀 내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100만 달러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한을 주었는데 이것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의 의뢰를 받은 현지 중개인은 비밀리에 남부 루손에서 쌀을 사들인 다음 야간에 마닐라만 남안에서 400톤짜리 수송선 2척에 실어 코레히도르로 보냈다. 이 유능한 중개인은 눈치를 챈 일본군이 마닐라만 남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할 때까지 2번에 걸쳐 1,600톤의 쌀을 수송했다.


호주에서는 체임벌린 대령이 임무 수행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사실상 무제한의 자금을, 그것도 현금으로 바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호주에는 이런 임무에 적당한 크고 빠른 배가 거의 없었으므로 엄청난 현금을 손에 들고서도 상선을 임대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체임벌린 대령은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과 중국 선적의 상선 10척을 임대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상황은 더 어려웠는데 곧 일본에게 점령당해 배를 타고 탈출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네덜란드 당국은 필리핀으로 가는 위험한 항로에 배를 투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금지조치는 얼마 후 풀렸으나 당시 필리핀으로 간다는 건 사실상 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임대 비용이 구매 비용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원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사지나 마찬가지인 필리핀에 갈 선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대부분 세부나 민다나오까지 갈 선원만 구할 수 있었으며 코레히도르까지 직접 가기로 계약한 상선은 돈이시드로와 플로렌스디뿐이었다. 나머지 상선은 일단 세부나 민다나오까지만 보급품을 운반할 것이었다. 거기서 코레히도르까지는 다시 작은 배로 실어날라야 했다.


가장 먼저 출항한 돈이시드로는 700톤의 식량을 싣고 1월 27일에 브리즈번을 출항하여 프리맨틀을 거쳐 2월 9일에 자바의 바타비아로 가서 추가로 탄약을 실었다. 여기서 돈이시드로는 필리핀 화물선 플로렌스디와 합류했다. 로벤슨 대령은 네덜란드 당국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필리핀으로 가기로 약속한 플로렌스디의 승조원에게 어마어마한 액수를 지급했는데 선장의 경우 기존의 급료에 더해 코레히도르까지 한번 왕복하는데 10,000달러가 넘는 돈을 보너스로 지급했다. 별도로 생명보험도 들어 주었는데 선장은 5,000달러짜리였으며 가장 하급선원도 500달러짜리 보험에 들어주었다. 2척의 수송선이 바타비아에서 보급품을 싣는 동안 일본군이 남하하면서 코레히도르로 가는 직항로가 막혔다. 2월 14일에 바타비아를 떠난 2척의 수송선은 토레스 해협을 통과하는 우회로를 따라 코레히도르로 가려고 했으나 토레스 해협으로 가는 도중 다윈 북쪽 해상에서 2월 18일과 19일에 걸쳐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다. 폭탄에 맞아 선체에 구멍이 뚫린 돈이시드로는 멜빌섬 인근에 좌초되었으며 플로렌스디는 침몰했다. 


(멜빌섬 인근에 좌초된 돈이시드로. https://en.wikipedia.org/wiki/Don_Isidro_(1939)#Context_in_attempts_to_relieve_the_Philippines)


민다나오와 세부를 향한 3척의 상선은 수송에 성공했다. 2월 10일에 브리즈번을 떠난 코스트파머는 2월 17일에 무사히 민다나오의 아나칸에 도착하여 식량 2,500톤과 보급품을 하역했다. 이어서 도나나티가 3월 10일에 세부에 도착하여 5,000톤의 식량과 보급품을 하역했으며 20일에는 안후이가 도착하여 2,500톤의 식량을 포함한 보급품을 하역했다. 이 3척이 운반한 보급품은 식량 10,000톤, 소화기 탄약 4,000,000발, 81mm 박격포탄 8,000발, 그리고 약간의 의약품, 통신 및 공병장비등이었다.


나머지 상선은 실패했다. 필리핀으로 향하던 중국 선적의 상선 2척은 위험해역에 들어서자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윈으로 돌아왔다. 2월 18일에 네덜란드 당국은 로벤슨 대령에게 상선을 필리핀 항로에 투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로벤슨 대령은 상선 4척을 골라 중국인 선원들에게 거액을 주고 각각 72만명분의 식량을 실어 2월 26일에 필리핀으로 파견했으나 이후 모두 소식이 끊겼다.


코스트파머, 도나나티, 그리고 안후이가 민다나오와 세부에 실어온 보급품은 작고 빠른 수송선으로 코레히도르까지 운반해야 했다. 미군은 필리핀의 섬 사이를 운행하던 300톤에서 1,000톤 사이의 소형수송선 25척을 임대했다. 이런 수송선은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밤에만 운행했으며 배마다 장교가 타서 봉쇄망을 뚫을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 결정하고 만일 나포될 위험에 처하면 배를 자침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세부는 이제 코레히도르로 갈 보급품이 집결하는 장소가 되었다. 호주로부터 온 보급품 이외에도 세부의 장교들은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돌아다니며 방대한 양의 식량을 사 모았다. 4월 10일에 일본군이 세부시를 점령했을 때 창고에는 세부와 파나이 수비대의 12개월치 식량, 그밖의 섬에 있는 수비대가 먹을 6개월치의 식량이 들어 있었으며 교외의 창고에는 별도로 12,000톤에 달하는 식량, 의약품, 휘발유 및 기타 보급품이 쌓여 있었다.


세부에 쌓인 보급품 중 일부만이 바탄에 전달되었다. 소형수송선 레가스피는 1월과 2월에 한번씩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여 식량을 하역했다. 그러나 세번째 항해에 나선 레가스피는 3월 1일에 민도로 섬 북쪽에서 일본군 포함에 걸려 침몰하고 선원들은 포로가 되었다. 2월 말에 소형수송선 프린세사가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여 식량을 하역했다.


코스트파머가 민다나오에 싣고 온 식량과 81mm 박격포탄은 소형수송선 엘카노와 레푸스가 운반했다. 2척의 수송선은 첫번째 항해를 무사히 마쳤으나 두번째 항해에 나선 레푸스는 팔라완 근해에서 나포되었다.


3월이 되자 일본군의 봉쇄가 강해져 도나나티와 안후이가 세부에 싣고 온 보급품은 코레히도르에 전달되지 못했다. 세부와 민다나오에서 코레히도르로 보급품을 수송하던 소형수송선 25척 중에서 10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어 7,000톤에 달하는 식량, 연료 그리고 기타 보급품이 상실되었다.


결과적으로 민다나오와 세부에 도착한 10,000톤의 식량 중 1,000톤 가량만이 코레히도르에 전달되었다. 하역된 식량의 상태도 나빴다. 여러번 옮겨 실은 통조림은 도중에 종이로 된 표지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따기 전에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밀가루와 설탕을 넣은 포대는 터져서 삽으로 선창 바닥에 깔린 밀가루와 설탕을 퍼내야 했다. 소형수송선에는 냉장고가 없었으므로 양파와 감자는 열대의 기후에 상하여 기아에 내몰린 병사들의 눈앞에서 버릴 수 밖에 없었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자바 근해에서 벌어진 일련의 해전에서 연합군이 참패하고 3월 2일에 바타비아가 점령되자 자바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로써 호주가 일본군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면서 더이상 필리핀에 수송선을 보내기가 어려워졌다. 호주에 남은 선박은 이제 호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필요했다. 헐리 장군과 브렛 장군은 3월 4일에 공동 명의로 마셜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제 호주에서 필리핀으로 수송선을 보내기는 불가능하니 향후로는 하와이에서 직접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호주에서 필리핀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막아버리면서 이제 호주에서 우회하여 필리핀에 도달하는 항로의 길이는 하와이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거리와 비슷해졌다.


전쟁부에서도 하와이에서 직접 수송선을 보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코스트파머가 무사히 민다나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2월 22일에 마셜에게 전문을 보내어 코스트파머의 도착으로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의 봉쇄망이란 별 것 아니라며 호주에만 맡기지 말고 하와이에서도 직접 필리핀에 수송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합동참모본부의 군수부장인 브레헌 서머빌 소장은 하와이에서 필리핀으로 직접 수송선을 보내는 것은 가능하며 제1차세계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하여 1,500톤의 적재량을 가진 고속수송함 6척을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고속수송함들은 카리브해에 있었는데 모자라는 승조원을 채워넣고 식량을 사서 싣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최초의 고속수송함이 뉴올리언스를 떠난 것은 3월 2일이었다. 이 수송함은 파나마 운하를 건너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를 떠난 수송함이 하와이 근해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 바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후속하던 5척의 고속수송함들도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바탄의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써 하와이에서 필리핀에 직접 보급한다는 계획은 실패했다.


맥아더는 바탄반도에 들어간 직후부터 잠수함으로 보급해달라고 요청했으나 ABDA 사령부의 해군사령관이 된 하트 제독이 강력하게 거부했고 ABDA 사령관 웨이벌 장군도 하트 제독을 지지했다. 그러자 마셜이 1월 17일에 웨이벌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잠수함을 필리핀 보급에 투입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마셜은 킹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협조를 요청했다. 이 전문에서 마셜은 필리핀 수비대가 많은 일본군 병력, 비행기, 그리고 함정을 붙잡아 두어 ABDA 지역 방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육군은 필리핀에 보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이때 해군도 나서서 열흘이나 2주마다 보급품을 실은 잠수함 1척씩만 코레히도르로 보내주면 싣고간 보급품의 양에 상관없이 보급품을 실은 잠수함이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기앙양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마셜의 의견에 동의한 킹 제독은 하트 제독에게 잠수함을 사용하여 필리핀에 보급하도록 권고했다.


하트 제독에게 있어서 미해군 서열상 직속상관인 킹 제독의 권고는 곧 명령이었다. 또한 서류상 하트 제독의 직속상관이라지만 방금 만들어져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임시사령부에 지나지 않는 ABDA 사령관인 영국육군 웨이벌 장군에게도 미해군이 자신들의 잠수함을 사용하여 필리핀에 있는 미군에게 보급하겠다는데 막을 권한이 없었다. 최종적으로 호주에서 10척, 하와이에서 2척의 잠수함이 필리핀 보급에 투입되었다.


1월에는 3척이 투입되었다.시울프는 50구경 탄약 675박스와 3인치 대공포탄 72발을 싣고 1월 16일에 다윈을 출항하여 27일 새벽에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시울프는 탄약을 하역한 후 그곳에 있던 잠수함예비부품, 어뢰 16발, 그리고 25명(육군조종사 12명, 해군조종사 11명, 영국군정보장교, 해군서기)을 태우고 돌아왔다. 

링가옌만을 초계중이던 시드래건은 명령을 받고 코레히도르로 가서 잠수함예비부품 2톤, 어뢰 23발, 그리고 루돌프 바비안 국장을 포함한 필리핀의 암호해독기관인 캐스트국의 인원 23명을 태우고 나왔다. 레드 및 퍼플 암호해독기, 통신기, 암호책을 포함한 1.5톤의 물품도 함께 반출했다.

트라우트는 3인치 대공포탄 3,517발을 싣고 하와이를 출항하여 2월 3일 밤에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트라우트는 대공포탄을 하역한 다음 어뢰와 함께 마닐라 은행에서 코레히도르로 옮겨 두었던 금괴 2톤과 은화 18톤을 싣고 나왔다. 진주만에 도착했을 때 14,500달러에 달하는 금괴 하나가 없어져서 비상이 걸렸다. 헌병이 배안을 샅샅이 수색한 결과 주방에서 금괴가 나왔는데 취사병이 종이를 누르는 문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진. https://www.youtube.com/watch?v=2k1_Gr9c91M)


2월에도 3척이 투입되었다. 소드피쉬는 19일에 도착하여 케손 대통령을 태우고 나왔다. 사르고는 30구경 탄약 1,000,000발을 민다나오에 수송했다. 퍼밋은 맥아더를 태우려고 코레히도르에 갔다가 대신 어뢰와 해군 인력을 싣고 나왔다.


3월에는 2척이 필리핀으로 향했다. 스내퍼는 코레히도르로 가서 식량 46톤과 3인치 대공포탄 185발, 그리고 경유 110,000리터를 하역했다.시드래건은 인도차이나 해안을 초계하던 중 보급명령을 받고 세부로 가서 45kg 짜리 포대에 담긴 쌀과 밀가루 34톤과 경유 45,000리터를 싣고 마리벨스로 향했다. 시드래건은 무사히 도착하여 하역을 시작했으나 식량 7톤을 하역했을 때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마리벨스가 당장이라도 함락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자 하역을 중단하고 23명의 인원을 태운 후 떠났다. 이때 태운 인원은 육군대령 1명, 카노푸스의 어뢰담당관인 샌디 맥그리거를 포함한 해군장교 3명, 그리고 암호해독가 존 리트와일러와 언어학자 루돌프 테일러를 포함한 캐스트국의 잔여인원 17명, 그리고 해군부사관 1명과 수병 1명이었는데 수병은 몰래 탔다.


4월 1일에는 소드피시가 2월에 이어 식량 40톤을 싣고 호주의 프래맨틀을 떠났고 다음날 시레이븐이 3인치 대공포탄 1,500발을 싣고 같은 항구를 떠났으나 가는 도중에 바탄이 함락되자 2척 다 초계임무로 바뀌었다.


5월 초에는 스피어피시가 코레히도르로 가서 간호사 12명을 포함한 25명을 태우고 함락 직전에 빠져나왔다. 하와이에서도 1척의 잠수함이 100톤의 식량을 싣고 코레히도르로 가는 도중 항복소식을 들었다.


결국 잠수함이 맥아더에게 보내준 식량은 53톤으로 바탄의 병력 2/3가 한끼 먹을 분량에 불과했다. 추가로 3인치 대공포탄 약 4,000발, 50구경 탄약 37톤, 30구경 탄약 1,000,000발, 그리고 약 114,000리터의 경유를 보급했다. 한마디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비행기도 필리핀 보급에 투입되었다. 1월 26일에 B-24 폭격기 2대가 모르핀 10,000정을 포함한 의약품과 탄약을 싣고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했다.

2월에는 퀴닌 50,000정을 포함하여 1번만 보급이 있었다. 일본군의 다윈 공습으로 필리핀으로 보낼 물품을 저장하고 있던 격납고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보급은 다윈 인근의 바첼로 비행장에 보급품을 다시 모은 3월에 재개되었다.

3월에는 3번의 보급이 있었다. 11일에는 4대의 B-17 폭격기가 호주에서 이륙했으나 1대는 추락하고 2대는 비행장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1대만이 의약품 730kg과 통신장비 및 대공포부품을 싣고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했다. 16일에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한 B-17폭격기 2대는 맥아더 일행을 태우고 호주로 돌아왔다. 26일에는 퀴닌 1,000,000정을 포함한 의약폼 530kg 과 통신장비 2,300kg을 실은 폭격기가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폭격기는 돌아오는 길에 케손 대통령을 태우고 왔다.

4월에는 폭격기들이 의약품과 통신장비를 포함한 많은 보급품을 델몬테 비행장에 실어날랐다.

마지막으로 5월 3일에 델몬테 비행장에 접근하던 B-17 폭격기는 비행장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것을 발견하고 기수를 돌렸다.


이로써 델몬테 비행장에는 많은 보급품이 모였으나 이것을 코레히도르로 전달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결국 실제로 코레히도르에 전달된 물품은 야간에 코레히도르섬 꼬리 부근의 해군비행장에 착륙한 소형비행기가 싣고 간 퀴닌 768,000정을 포함하여 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3월 중순이 되자 필리핀에 대한 보급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하여 호주에서 필리핀으로 향하는 항로를 막았다. 곧이어 민다나오와 세부에서 코레히도르로 가는 항로도 막히면서 그곳에 쌓인 막대한 보급품이 전달되지 못했다.


마셜은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다급해진 마셜은 중국으로부터 보급품을 보내려고 시도했다. 3월 30일에 마셜의 요청을 받은 스틸웰이 식량과 비행기를 수배하는 동안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했다.


4월 초에는 전투식량 1,000,000명분, 쌀 200톤, 고기 340톤, 연유 158톤, 담배 20톤 그리고 탄약 548톤을 실은 마지막 선단이 호놀룰루를 떠났다. 코레히도르까지의 항해시간은 22일이었는데 출항 후 8일이 되었을 때 바탄반도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3월 말에 웨인라이트와 맥아더는 민다나오와 세부에 쌓여있는 보급품을 코레히도르로 옮길 수 있도록 일본의 봉쇄망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공습을 계획했다.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을 출격한 B-17 폭격기 10대가 비사야와 수빅만에 있는 일본함정을 폭격하여 일본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500톤급 소형수송선이 코레히도르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식량을 가득 실은 소형수송선 1척이 세부에, 휘발유를 가득실은 소형수송선 1척이 일로일로에 대기 중이었다. 2척의 수송선은 P-40 전투기 3대의 호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다른 수송선들도 세부와 민다나오에 도착하여 B-17 폭격기의 공격으로 봉쇄가 느슨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보급품을 선적했다. 수송선과 전투기는 준비가 되었지만 폭격기의 집결이 늦어지면서 공습은 실행되지 못했다. 4월 10일에 세부가 함락되었을 때 소형수송선들은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B-17 폭격기들이 델몬테 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세부 함락 다음날인 4월 11일이었다.


이로써 필리핀에 대한 보급은 실패했다. 3월 말이 되자 육체적 쇠약에 더하여 구원의 좌절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바탄반도에 있던 미-필리핀군의 전투력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다. 4월 1일에 루손군의 군의관은 미-필리핀군의 전투력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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