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싸우는 사생아들(1) - 음식과 피복


We're the battling bastards of Bataan,

No mama, no papa, no Uncle Sam,

No aunts, no uncles, no cousins, no nieces,

No pills, no planes, no artillery pieces,

And nobody gives a damn.


- "The Battling Bastards of Bataan"  By Frank Hewlett


우리는 바탄의 싸우는 사생아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엉클샘도 없고,

이모도 없고, 삼촌도 없고, 사촌도 없고, 조카도 없고,

약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대포도 없고,

그리고 관심가져주는 이도 없네.


- 프랭크 휼렛의 시 "바탄의 싸우는 사생아들"


필리핀의 지휘권 변동은 바탄반도의 병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식량부족을 넘어 기아에 직면한 그들에게 식량확보를 제외한 모든 일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1942년 1월 6일에 미-필리핀군의 식량배급량은 정량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나 실제로는 그마저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의 정량은 2kg, 필리핀군의 정량은 1.8kg였으니 절반이라면 매일 최소한 900g 은 먹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850g 을 넘기지 못했다.

식단도 영양의 균형을 고려하기보다는 양을 맞추는데 주력할 수 밖에 없었다. 식사량의 대부분은 쌀이 차지했으며 나머지 식재료는 가지고 있는 한도 내에서 조금씩 추가되었다.


식량이 줄어들면서 식사량도 줄어들었다. 1942년 1월 5일의 식량목록에는 밀가루 30일치, 주로 통조림 형태인 고기 및 생선 50일치, 채소통조림 30일치, 연유 20일치, 그리고 약간의 설탕, 라드, 커피, 그리고 과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목록은 1월 말이 되면 밀가루 6일치, 고기 및 생선 11일치, 채소 4일치, 과일 5일치로 줄어든다. 2월 23일에 필리핀군관구의 보급장교인 프랭크 브레지나 대령은 밀가루 4.5일치, 고기 및 생선 2.5일치, 토마토통조림 228통, 과일통조림 48통, 건포도 500kg, 연유 27,736통, 커피 14kg 그리고 설탕 9,800kg 이 남았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극동미육군의 보급참모인 찰스 드레이크 준장은 바탄반도에서는 고기통조림이 사라졌으며 동물성 단백질은 코레히도르에서 보내주는 약간의 연어통조림과 병사들이 스스로 도살하는 가축에서 섭취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것으로는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보고했다. 필리핀 전역 초기 1인당 하루 170g 이었던 고기배급량은 전역 말기가 되면 하루 34g 으로 줄어든다. 1월 말이 되자 바탄반도에서 버터, 커피, 차는 사실상 사라졌으며 설탕과 연유는 귀해져서 소량만이 지급되었다.


필리핀군과 미군 사이의 차별은 없었다. 필리핀군은 밀가루를 받지 않는 대신 쌀을 좀 더 많이 지급받는 등의 차이점은 있었으나 총량은 미군과 동일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2월 중순까지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에게 정량의 절반이나마 배급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 17일 바탄반도의 1인당 식량배급상황을 보면 총량 785g 으로 쌀 255g, 고기 115g, 빵 145g, 그리고 토마토 및 채소통조림, 베이컨, 설탕, 커피, 쥬스 등이 270g 이다. 이후 식량배급상황은 지속적으로 나빠져 3월 말이 되면 정량의 1/4 이하로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준까지 떨어진다. 아래는 1942년 3월 25일의 식량배급상황이다.


(1942년 3월 25일 현재 바탄반도의 식량배급상황. 단위는 온스. 1온스는 약 28g.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1.html#table8 P.368)


입원한 환자에게는 의학적 판단에 따라 필요량만큼의 식사가 제공되었으나 환자의 상태에 맞게 음식을 조리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수술을 하거나 장에 문제가 있어 죽을 먹어야 할 환자가 쌀밥을 힘겹게 먹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미-필리핀군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보급장교가 병사들을 이끌고  마닐라만에 면한 지역의 논을 돌아다니면서 전쟁통에 주인이 떠나버린 논의 벼를 남김없이 베어다가 공병대가 만든 방앗간에서 도정했다. 이렇게 확보한 쌀이 250톤이었다.

쌀은 밀을 밀어내고 미군의 주식이 되었다. 빵과 감자에 익숙한 미군 병사들은 쌀밥이나 죽에서 벽지에 바르는 풀같은 맛이 난다면서 싫어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고기는 사흘에 한번 맛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물소를 도살한 것이었다. 공병대가 라마오에 만든 도살장에서 600마리의 물소를 잡아 냉장창고가 있는 코레히도르로 보냈다가 필요하면 요청하여 다시 바탄반도로 가져와 먹었다. 하지만 일선 부대에서는 냇가에 임시로 만든 도살장에서 물소를 잡았는데 냉장창고가 없었으므로 살아있는 물소를 울타리에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꺼내어 도살했다. 2월 초에 맥아더 사령부는 병사들이 병든 물소를 잡아먹고 탈이 날까봐 수의사가 물소의 상태를 검사하는 라마오의 도살장 이외의 장소에서는 도살을 금지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제로 병사들은 사설 도살장에서 라마오의 도살장보다 더 많은 1,000마리의 물소를 잡았다.

물소를 모두 잡아먹고 나자 다음은 제26기병연대의 말 250필과 보급품 운반용 노새 48마리의 차례였다. 3월 15일에 제26기병연대의 마지막 말이 도살되었다. 바탄에서 도살되어 소비된 육류의 양은 약 1,300톤이다.


미-필리핀군은 또한 지역 어부에게 요청하여 물고기를 잡아들였다. 어부들은 저녁에 출항하여 밤새 고기를 잡아 아침에 돌아왔는데 많을 때는 하루 5톤이 넘는 어획고를 올렸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일본군이 밤에 조업하는 어선을 공격하면서 물고기의 공급은 끊겼다.


병사들은 개인적으로 식량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정글을 뒤져 야생닭과 멧돼지를 사냥하고 고구마, 죽순, 망고, 바나나를 찾아 먹었다.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개, 원숭이. 이구아나, 심지어 비단뱀까지 잡아먹었다.

병사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개인호 주변에 떨어진 벼의 낟알을 주워다가 손으로 비벼 껍질을 벗긴 다음 생쌀을 씹어 먹었다. 정찰나간 병사들은 주변의 마을에 들러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한 쌀을 가지고 돌아오고는 했다.

정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먹을 것을 찾다가 독성이 강한 야생당근이나 산딸기를 먹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으나 굶주림에 내몰린 병사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먹을 것을 찾았다. 4월이 되자 바탄반도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은 거의 사라졌다.


단위부대나 병사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식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철수 도중 버려진 보급창에서 발견한 식량을 보고하지 않고 숨긴 경우였다. 바탄 도착 직후 실시한 조사에서 어떤 부대는 보고하지 않은 C-레이션만 8,500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식량을 모아둔 곳에 철조망까지 쳐놓고 24시간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식량트럭을 몰던 어느 운전병은 토마토 통조림 520통, 토마토 소스 297통, 토마토 쥬스 114통, 연유 111통, 인조마가린 6통, 쌀 12자루, 밀가루 3/4포대를 가지고 있다가 적발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보고되지 않은 식량은 모두 압수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식량을 숨겨둔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불가능했다. 적발된 식량을 모두 압수하려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실제로 제21야포연대장 리처드 멀로니 대령을 위시하여 장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개인적으로 식량을 챙겨두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지휘관들은 식량을 많이 지급받기 위하여 급양인원을 부풀려 보고했다. 1월 17일에 바탄반도에서 보고한 급양인원은 122,000명에 달했으며 이는 추정 실제 인원의 거의 2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강력하게 경고하자 인원은 하루만에 96,000명으로 줄었으나 여전히 너무 많았다. 바탄반도에 들어온 이래 병력수가 한번도 6,500명을 넘긴 적이 없는 어느 사단은 2월 6일에 급양인원이 11,000명이라고 보고했다.  수뇌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급양인원을 부풀려서 보고하는 경향은 근절되지 않았다.


부족한 공급에 더하여 분배도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힘들게 근무하는 병사들이 가장 적은 식량을 받았으며 후방일수록, 그리고 식량보급에 직접 관여하는 병력일수록 잘 먹었다. 부대가 이동할 때에는 운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병력은 주로 밤에 이동했는데 상황에 따라 어떤 부대는 하루에 2번 식량보급을 받고 어떤 부대는 하루종일 굶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엉뚱한 부대에 도착한 트럭이 다시 원래 부대를 찾아가면 되지만 당시 바탄반도에서는 식량을 실은 트럭이 어떤 부대에 일단 도착했다가 식량을 실은 채로 다시 그 부대를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일본군도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보급에 악영향을 끼쳤다. 어느날 아침에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이 코레히도르의 냉장창고에 명중하여 물소 48마리분의 고기가 더위에 노출되었다. 코레히도르에서는 바탄반도의 하루 소비량인 11톤에 달하는 이 고기를 즉시 바지선에 실어 바탄반도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하루종일 5회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해가 질 때까지 바지선은 고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결국 더운 날씨에 하루종일 바지선에 실려 있었던 고기는 상하여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기아에 내몰린 병사들은 보급트럭을 습격하기도 했다. 필리핀군 헌병이 보급로를 지키면서 약탈은 줄어들었으나 대신 보급트럭들은 헌병에게 통행료 명목으로 식량을 건네야만 했다. 


일부 병사들은 식량창고에 몰래 들어가 식량을 훔치려 했다. 심지어 장교까지 식량을 훔치다가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식량창고를 지키던 초병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식량창고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식량만큼이나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담배였다. 또한 담배만큼 중간에서 많이 빼돌리는 물품도 없었다. 실제로 일선 병사들 사이에서는 50개비가 든 담배 1갑에 10페소(5달러)라는 말도 안되는 고가로 거래되었으나 후방에서는 평시와 비슷한 10센타보스(5센트)에 거래되었다.


물론 사태의 중심에는 담배공급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1942년 1월 6일부터 4월 2일까지 코레히도르에서 바탄반도에 공급한 담배는 50개비짜리 담배갑 200개가 들어있는 담배통 400개로 1인당 하루 1개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었다.


피복류의 부족도 병사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특히 필리핀 육군이 심했는데 이들 징집병들은 대부분 비옷, 담요, 그리고 2인용 천막을 지급받지 못했다. 이들에게 지급된 신발은 천으로 만들고 고무로 밑창을 댄 운동화로 철수 과정에서 대부분 헤졌다. 바탄반도의 병력 중 약 1/4은 신발이 없었으며 나머지도 대부분 평시같으면 벌써 버렸을 낡은 신발을 어쩔 수 없이 끌고 다니고 있었다. 3월 말이 되자 많은 병사들이 속옷도 없이 데님 군복 1벌로 지냈는데 군복의 90% 가 낡아서 넝마나 마찬가지였다. 병원이 어려움을 겪은 일 중 하나가 환자에게 지급할 옷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참상을 보다 못한 필리핀미군사령부 참모장 비브 준장은 보급품의 보관을 책임지고 있던 항만방어부대사령관 무어 소장에게 바탄반도로 보낼 군복, 담요 및 군화의 재고를 조사하여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4일 후 무어 소장이 보내온 답변서에는 군복과 담요의 재고는 없고 군화는 10,000켤레가 있다고 했는데 이 군화는 미국인 발에 맞추어 만들어져 발이 작은 필리핀군은 신을 수가 없어서 바탄반도로부터 코레히도르로 반납된 물품이었다. 4월 4일에 비브 장군은 킹 소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커다란 군화 10,000켤레라도 받겠냐고 물었다. 킹 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탄반도에서는 코레히도르의 병사들이 호화판으로 먹는다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잘못된 생각으로 코레히도르에서도 호화판으로 먹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탄반도보다 사정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코레히도르에 상륙했던 웨인라이트 장군도 느꼈던 바였다. 코레히도르에서는 하루 2번 식사를 했으며 정확하게 정량의 절반을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식단도 나름대로 영양의 균형을 맞추었으며 베이컨, 햄, 싱싱한 야채 그리고 가끔씩 커피, 우유, 잼같이 바탄반도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진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급식에 있어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3월 말에 바탄헌병대가 보급트럭 1대를 세우고 화물운송장을 확인하면서 고조되었다. 이 트럭은 바탄에 배치된 3개의 대공포대에 식량을 전달하러 가던 길이었는데 항만방어부대 소속인 이 대공포대들은 바탄이 아닌 코레히도르 기준으로 보급을 받고 있었다. 헌병이 확인한 물품은 바탄의 병사들로서는 눈이 휘둥그래질 수준이었다. 햄과 베이컨 각 1통씩, 비엔나소세지 24통, 밀가루 1포대,  건포도 11kg, 라드 15kg, 완두콩, 옥수수, 토마토, 복숭아 각 24통씩, 감자 6통, 케첩 24병, 담배 50갑에 얼음 270kg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바탄과는 비교도 안되게 호화로운 코레히도르의 식사에 대한 소문은 바탄반도 전체에 퍼졌으며 병사들이 품고있던 의혹과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불만이 커지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항만방어부대의 식사도 바탄과 같은 수준으로 낮출 수 밖에 없었다.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코레히도르의 식사를 바탄과 같은 수준으로 낮출 이유는 없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바탄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했으며 그럴 경우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코레히도르는 바탄반도 상실 이후에도 계속 일본군에 저항하며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필리핀 수비대의 임무가 일본의 마닐라만 사용을 최대한 오래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웨인라이트로서는 코레히도르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바탄과는 달리 최소한의 체력과 사기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타당한 결정이었다. 또한 이미 정량의 절반만을 먹고 있던 코레히도르의 10,000명 병사에게 주어지는 식사를 바탄반도 수준으로 낮춘다고 해서 민간인을 포함하여 거의 100,000명이 득실거리던 바탄반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결국 그러한 조치는 바탄반도의 운명을 바꾸지도 못하면서 코레히도르 수비대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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