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싸우는 사생아들(3) - 사기


병사들의 전투력은 물리적인 조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궁핍한 처지에 몰려 있더라도 사기가 높은 부대는 무서운 상대이며 이런 적에게 섣불리 싸움을 걸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군은 미-필리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선전전단은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하여 널리 사용되던 방법이며 일본군 역시 바탄에서 사용했다. 일본기들이 바탄반도를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인종차별, 질투, 증오, 탐욕 등에 호소하는 전단을 뿌렸다.  어떤 전단은 인종문제를 부각하면서 필리핀군의 탈영을 부추겼다. 전단은 필리핀 병사들이 급료로 받는 화폐는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필리핀 병사는 미국에게 속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를 받는 댓가로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 굶주림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적었다. 반면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필리핀의 상황은 미화했다. 어떤 전단은 일본 치하의 새 필리핀(New Philippines)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전직 필리핀군의 편지를 실었다. 어떤 전단에는 병사의 아내가 병역기피자의 품에 안겨 있는 그림을 넣었다. 기아에 초점을 맞춘 전단도 있었다. 어떤 전단은 코레히도르가 칠면조, 고기, 과일, 케이크, 위스키, 와인에 완전히 둘러싸인 모습을 그려놓고 병사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냐는 문구를 적었다. 


(일본군의 선전전단.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1.html#21-3 P.386)


필리핀미군사령부의 평가에 따르면 선전전단의 효과는 미미했다. 병사들은 취미로 전단을 모았으며 자신에게 없는 전단을 서로 교환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부하들로부터 테두리에 예쁘게 리본을 두른 전단을 선물로 받았는데 내용은 일본군이 자신을 거명하며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선전방송은 보다 효과적이었다. 일본은 마닐라 방송국을 사용하여 매일 오후 9시 45분에 필리핀의 미군을 겨냥한 선전방송을 했는데 도쿄로즈가 진행하는 라디오 도쿄의 방식을 차용한 이 방송은 병사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인기있는 노래들을 틀었다. 미군 장교들은 쾌활하게 웃고 떠들던 병사들이 방송을 들으면서 침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고 선전방송의 위력을 느꼈다.


미군도 코레히도르에 자체 방송국을 가지고 '자유의 소리(The Voice of Freedom)' 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3번 방송을 했다. 주로 노래를 틀면서 그 사이에 미본토와 국제 뉴스 및 필리핀 현지 소식을 알려주는 형식이었는데 평가는 나쁜 편이었다. 특히 현지 소식이 병사들이 겪고 있는 실상과 다른 경우가 많아 일부 장교는 자유의 소리 방송이 오히려 수뇌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고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매일밤 '자유필리핀방송' (Freedom for the Philippines) 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했는데 병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전역의 초기에는 식량과 장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가 높았으며 2월 초의 승리 이후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증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넘쳐났다. 증원군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은 1월 15일에 맥아더가 한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날 맥아더는 필리핀 전체의 미-필리핀군에 행한 방송에서 수천명의 군인과 수백대의 비행기를 포함한 증원군이 미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증원군의 도착 시점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늦어도 우기가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도착하리라고 믿었다.


2월이 되자 일선 지휘관들은 약해지는 부하의 체력과 늘어나는 환자, 줄어드는 배식량을 보면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대령급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장병들은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마지막 순간에 강력한 군대가 도착하여 자신들을 구원하리라고 믿었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암담한 운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자는 극소수였다.


워싱턴 탄신일인 2월 22일에 방송된 루스벨트의 노변담화는 구원에 대한 병사들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날 루스벨트는 청취자들에게 세계지도를 펴라고 요청한 다음 지도를 짚어가면서 전 지구에 걸친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크며 미국의 전선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그리고 미국이 앞으로 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바탄의 병사들은 방송이 끝나자 자신들이 전 지구에 걸친 대전쟁이라는 거대한 게임에서 버려도 되는 하찮은 말로 취급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병사들은 1943년, 44년, 45년에 얼마나 많은 비행기가 생산될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패배하기 전에 증원군이 도착할 것인가가 궁금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필리핀 구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3월 12일에 일어난 맥아더의 탈출은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필리핀 병사들 사이에서 맥아더의 위상은 절대적이었으며 대부분의 미군 장교에게도 맥아더는 전설이었다. 심지어 대령들도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맥아더가 결국은 마술사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나 호주로 가 버렸다.


맥아더를 향한 믿음을 놓지 않은 장병들은 자유의소리 방송이 내린 해석에 따라 그가 호주로 간 것 자체가 증원군 도착이 임박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호주에 도착해서 행한 맥아더의 첫 연설을 증거로 들었다. 맥아더는 연설에서 자신의 최우선 목표가 필리핀 구원이라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곳에 왔으며 나는 돌아갈 것이다."(I came through and I shall return.)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노병을 포함하여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외부에서 도착하는 증원군을 지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코레히도르였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났다는 것은 증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3월 말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대부분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증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남은 것은 피할 수 없는 패배 뿐이었다. 그나마 필리핀군은 전투가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으나 미군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죽음 아니면 포로수용소 뿐이었다.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깨달음은 미-필리핀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으나 미군 중 일부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선택도 단순해졌다. 이제 그들은 번민을 그만두고 일본군에게 승리의 댓가를 최대한 비싸게 받아내는 방법을 찾는데 집중했다.


필리핀 사단의 헨리 리 중위는 자신의 시 'Fighting On' 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매혹적인 승리의 빛을 볼 수 없네

풍족한 전리품과 이득을 얻을 기회는 사라졌네

만일 내가 참고 견딘다면 - 나는 계속 참고 견뎌야만 하리

만일 내가 고통을 참는다면 - 그 보상은 고통이리

하지만, 비록 설렘과 열정과 희망은 사라졌지만

내안의 무언가가 나를 계속 싸우게 하네.


I see no gleam of victory alluring

No chance of splendid booty or of gain

If I endure - I must go on enduring

And my reward for bearing pain - is pain

Yet, though the thrill, the zest, the hope are gone

Something within me keeps me fighting on.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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