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비사야 함락


1942년 3월 4일에 비사야군이 창설되었을 때 사령관 브래포드 치노웨스 준장이 보유한 병력은 약 20,000명으로 6개의 섬을 관장하는 5개의 사령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것은 앨버트 크리스티 대령의 파나이군으로 제61사단(PA)을 기간으로 했으나 제61 및 제62보병연대와 제61포병연대는 민다나오로 파견되었다. 크리스티 대령은 대신 제64 및 제65임시보병연대를 창설했다. 여기에 잡다한 경찰대 병력을 더한 파나이군의 총병력은 약 7,000명이었다. 

두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유한 것은 어빈 스쿠더 대령의 세부군이었다. 비사야군 사령부가 있는 세부를 담당한 세부군은 제82 및 제83보병연대(PA), 세부헌병연대, 필리핀육군항공대의 분견대, 기타 잡다한 부대를 합쳐 6,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번째는 네그로스군으로 3,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저 힐스맨 대령이 지휘했다.

네번째는 레이테-사마르군으로 2,5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어도어 코넬 대령이 지휘했다.

가장 적은 병력을 보유한 것은 보홀군으로 1,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서 그라임스 대령이 지휘했다. 치노웨스 장군은 세부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보홀군의 주력인 제83보병연대제3대대(PA)와 그라임스 대령을 세부로 불러들였다. 따라서 일본군이 세부에 상륙했을 때 그라임스 대령은 세부에 있었다.


(필리핀. 웨스턴 비사야라고 표시된 섬이 파나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dministrative_divisions_of_the_Philippines)


비사야군은 창설 이래 일본군이 바탄반도를 점령할 때까지 1달의 유예기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어준비를 했다. 섬사령부는 전차장애물, 참호, 사격호를 만들고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깔았다. 이런 작업은 주로 민간인이 해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방어준비의 핵심은 게릴라전을 위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험한 산속의 은밀한 장소에 비밀기지를 만들고 그곳에 보급품과 무기를 옮기는 것이었다.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비사야군의 계획은 현실적인 판단이었으나 비사야의 민간인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미국과 필리핀자치령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 민간인들은 필리핀군이 상륙해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해안에서 결전을 벌여 격멸해버리길 원했다.


일본군은 비사야에 대해 적정 수준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각 섬마다 정확한 방어병력의 숫자는 몰랐으나 섬들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비사야군의 전체 병력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혼마 장군은 가와구치 지대를 세부에, 가와무라 지대를 파나이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섬을 장악한 이후 양 지대는 동행한 경비부대에 점령지를 넘기고 민다나오로 가서 다바오에 있는 미우라 지대와 함께 민다나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일단 이렇게 하고 나면 필리핀의 나머지 수비대는 알아서 항복할 것이었으며 만일 항복하지 않아도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4,852명의 잘 훈련되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사로 이루어진 가와구치 지대는 필리핀에 도착한 지 4일만인 1942년 4월 5일에 링가옌만을 떠나 세부로 향했다.

당시 가와구치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35여단사령부

보병제124연대

수색제16연대의 1개 소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중대

야전중포병제21대대의 1개 중대

독립공병제23연대의 1개 소대

독립공병제26연대의 1개 중대(2개 소대 감편)

제44정박장사령부 주력

병참부대 일부


세부섬 공략에 동행한 해군병력은 경순양함 쿠마, 제2구축대(무라사메, 사미다레), 수뢰정 1척, 특설포함 1척, 특설수상기모함 1척, 제51구잠대(특설구잠정 2척) 그리고 제32특별근거지대육전대였다.


치노웨스 장군은 4월 9일 오후에 전투함정의 보호를 받는 일본군 선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일본군 선단은 밤새 2개로 갈라져 하나는 주도인 세부시가 있는 동해안으로 접근하고 나머지 하나는 서해안의 톨레도로 접근했다.

10일 해가 뜬 직후에 가와구치 지대의 주력이 세부시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탈리사이에 상륙하여 세부시로 북상했다. 비슷한 시각에 서해안의 톨레도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세부시를 방어하던 부대는 하워드 에드먼즈 중령이 지휘하던 세부헌병연대로 1,1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먼즈 중령의 임무는 폭파반이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세부시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무기, 훈련도, 실전경험에서 월등한데다가 숫자까지 많은 일본군은 세부헌병연대를 압도했다. 일본군은 정오가 되자 세부시의 중심가에 도달했고 저녁 5시까지 세부헌병연대를 도시 바깥으로 밀어내었다. 어둠이 내리자 에드먼즈 중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세부시에서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 미리 설정해 둔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세부헌병연대는 최소한의 피해로 일본군의 세부 점령을 한나절 동안 저지했으나 폭파반이 임무를 완수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결국 세부 시내의 보급품 중 절반만을 폭파시켰을 뿐 나머지 절반과 교외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보급품은 모두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세부.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2 P.504)


세부 서해안의 톨레도에서도 일본군은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톨레도를 지키던 제82연대대제3대대(PA)는 일본군 선단이 수평선에 나타나자 그대로 동쪽으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톨레도를 장악한 다음 추격을 시작했다.


톨레도에서 동쪽으로 뻗은 길은 세부섬의 중앙을 관통하여 동해안의 탈리사이에 도달한다. 이 길의 중앙에 칸타바코가 있었으며 칸타바코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비사야군사령부가 있는 캠프엑스에 도달한다. 만일 필리핀군이 칸타바코를 차지하고 있으면 동해안과 서해안의 연결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본군이 세부섬을 장악하려면 칸타바코를 점령해야 한다. 치노웨스 장군은 칸타바코 방어를 위하여 보홀에서 그라임스 대령과 제83연대제3대대(PA)를 불러들였으며 칸타바코와 캠프엑스 사이에는 또다른 예비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톨레도와 칸타바코 사이의 도로에는 공병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이 다가오면 다리를 폭파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4월 10일 아침에 제82보병연대제3대대가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다리를 건넌 직후 일본군 전차가 나타났다. 그러자 필리핀군 공병은 당황하여 다리를 폭파시키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10일 오후에 칸타바코에 도착한 그라임스 대령은 주변 지형을 익히기 위해 정찰을 나섰다. 그는 다리 폭파음이 들리지 않았으므로 아직 일본군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일본군 정찰대에게 붙잡혔다. 지휘관을 잃은 제83보병연대제3대대는 칸타바코 부근에 숨어서 눈앞을 통과하는 일본군을 보고만 있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제83보병연대제3대대의 존재조차 몰랐다. 칸타바코와 캠프액스 사이에 주둔하던 예비대대도 일본군이 접근하자 바로 도망쳤다.


그나마 저항을 한 것은 톨레도에서 도망쳐 온 제82보병연대제3대대였다. 이들이 11일 새벽 3시 30분에 캠프엑스 입구에서 추격하던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하면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치노웨스 장군은 참모들과 함께 북쪽으로 800m 정도 올라가 새로운 사령부를 차릴 시간여유를 얻었다. 일본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탈리사이에 도달했다.


일본군이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점령하면서 세부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치노웨스 장군은 12일 밤에 북쪽으로 떠나 산악지대인 키암에 사령부를 차렸다. 하지만 4월 15일부터 일본군이 키암에 대해 공세를 시작하자 치노웨스 장군은 비사야군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웨인라이트 장군은 4월 16일에 민다나오군사령관 샤프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비사야-민다나오군을 재건하여 비사야의 남은 병력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와구치 지대는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필리핀군이 숨어있는 세부 북쪽의 산악지대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다. 일본군은 17일에 치노웨스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키암을 점령하는 등 필리핀군에 타격을 입혔으나 섬멸하는데는 실패했으며 치노웨스 장군은 키암을 탈출하여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키암 점령 이후 세부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확고해졌다.

일본군은 4월 19일에 세부를 점령했다고 선언했으며 가와구치 지대는 독립보병제31대대(다나카 요시나리 중좌)에게 세부섬을 인계하고 민다나오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파나이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NAY.png)


4,160명으로 이루어진 가와무라 지대는 4월 12일에  링가옌만을 떠나 파나이로 향했다.

당시 가와무라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9여단사령부

보병제41연대

수색제16연대의 1개 소대

독립산포병제20대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중대

독립공병제23연대의 1개 중대(1개 소대 감편)

독립공병제26연대의 2개 소대

제44정박장사령부의 일부

병참부대의 일부


파나이 공략에 동행한 해군병력은 경순양함 쿠마, 제24구축대(우미카제, 가와카제, 야마카제), 수뢰정 1척, 특설수상기모함 1척이었다.


가와무라 지대의 주력은 4월 16일 아침에 파나이 남동쪽의 일로일로에 상륙했고 일부는 북쪽의 카피스에 상륙했다. 17일에는 남서쪽의 산호세에 일부 병력이 추가로 상륙했으며 18일에는 일로일로 건너편의 귀마라스 섬에 다시 일부가 상륙했다. 일본군의 상륙은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일로일로에 상륙한 가와무라 지대 주력은 곧 북쪽으로 진격하여 19일에 카피스에서 남하한 병력과 연결했으며 이후 23일까지 평원 지대를 석권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파나이 전투에서 일단 승리했으나 파나이군 사령관 크리스티 대령에게 전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크리스티 대령은 해안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제61사단(PA)을 중심으로 7,000명으로 이루어진 병력을 이끌고 내륙의 산지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보급품은 풍족한 편이었다. 파나이군은 물소 500마리, 쌀 15,000자루, 통조림 수백상자 그리고 충분한 식수와 연료를 가지고 있었다. 산속에 작업장이 들어서 있었고 섬의 각지에서 몰래 가져온 벼를 타작하기 위한 방앗간도 있었다.


파나이군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게릴라 활동에 화가 난 산호세의 일본군이 1개 중대를 파견하여 크리스티 대령의 사령부를 공격하려 했으나 정보를 입수한 필리핀 민병대가 산호세 외곽에서 출동하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민병대는 활, 창, 정글도 같은 원시적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형의 잇점을 살려 완벽한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고 나머지를 산호세로 쫓아버렸다. 이후 일본군은 이미 확보한 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게릴라 활동으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파나이의 중요한 도시와 도로를 장악하고 섬을 통제했다. 가와무라 지대는 독립보병제33대대(세노오 야스미 중좌)에게 점령지를 넘기고 민다나오로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군은 4월 20일까지 세부와 파나이를 장악함으로써 비사야를 사실상 점령했다.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보홀에 남아있는 수비대는 이미 격파한 수비대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으며 해안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일본군은 필요하다면 이들 섬을 간단히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가와구치 지대와 가와무라 지대는 동행한 독립보병제31및 제33대대에게 점령지를 넘겨주고 민다나오 공략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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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민다나오와 비사야


개전 이래 4개월 동안 혼마 장군에게는 루손과 남부 필리핀을 동시에 공격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말에 민다나오의 다바오를 점령한 이래 남부 필리핀에 대한 작전은 항공기와 함정에 의한 정찰 정도로 제한했다. 하지만 1942년 3월 말이 되자 혼마 장군은 바탄 뿐 아니라 남부 필리핀까지 공격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루손군이 항복한 다음날인 4월 10일부터 남부 필리핀에 대해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민다나오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3 P.509)


필리핀제도 남쪽에 있는 민다나오의 면적은 97,530㎢ 로 루손에 이어 필리핀에서 두번째로 큰 섬이다. 서쪽으로는 잠보앙가 반도가 술루해를 향하여 뻗어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디우아타 산맥이 달리고 있다.

민다나오의 교통은 루손에 비해 크게 열악했다. 철도는 없었으며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2개뿐이었다. 하나는 1번 도로로서 민다나오 남동해안의 다바오에서 시작하여 디고스로 간 다음 민다나오 남쪽을 관통하여 서해안의 코타바토에 도달했다. 이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 다음 북해안을 따라 북서쪽 끝의 수리가오까지 이어져 있었다. 3번 도로는 1번 도로의 북쪽인 카가얀-타클로반과 남쪽의 카바칸을 잇는 길이 160km 짜리 도로로서 고등판무관의 이름을 따서 사이어 하이웨이라고 불렀다. 대체적으로 북쪽의 도로는 포장되어 전천후로 차량운행이 가능했으나 남쪽 도로는 비가 많이 오면 차량운행이 불가능했다.

민다나오의 또다른 중요한 교통수단은 작은 배로서 해안은 물론 항해가 가능한 아구산강과 민다나오강을 따라 내륙까지 운항했다. 아구산 강은 디우아타 산맥의 서쪽 기슭을 따라 달리다가 북해안에서 민다나오해로 흘러 들어간다. 민다나오 강은 남쪽에서 1번 도로의 남쪽을 달려 코타바토에서 모로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필리핀. 웨스턴 비사야라고 표시된 섬이 파나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dministrative_divisions_of_the_Philippines)


루손과 민다나오 사이를 비사야라고 부르며 중요한 섬은 세부, 파나이,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그리고 보홀이다. 섬들은 대부분 중앙의 산지와 해안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섬 중앙에 평야를 가진 파나이가 5개 섬 중 가장 평평한 편이고 세부가 가장 험하다. 도로망은 대부분 해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둘러싼 간선도로가 있고 거기서 지선이 나와 내륙의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형태였다. 도로는 일부 구간만 전천후로 사용이 가능했고 대부분 구간은 비가 많이 오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세부, 네그로스, 그리고 파나이에는 짧은 철도가 있었다. 작은 배들이 빈약한 도로와 철도의 수송력을 보충하는 동시에 비사야의 다른 섬과 루손 및 민다나오를 연결했다.


비사야와 민다나오의 방어를 맡은 것은 세부에 사령부를 둔 윌리엄 샤프 준장의 비사야-민다나오군으로 병력은 대부분 필리핀 육군이었다. 비사야-민다나오 지역에서 편성된 사단은 5개였으나 제61, 제81, 및 제101사단만 남고 제71 및 제91사단은 가장 나중에 편성된 제73및 제93보병연대를 남겨두고 루손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현지에서 편성한 다수의 임시부대와 경찰대 일부를 합친 병력을 개전 당시 샤프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비사야-민다나오군도 루손에서 싸우던 병사들과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훈련이 부족했으며 군복, 담요, 모기장을 비롯한 모든 장비가 모자랐다. 병사들은 엔필드 소총을 지급받았으나 많은 경우 사용법을 잘 몰랐으며 상태가 나쁜 총도 많았다. 30구경 및 50구경 기관총도 있었으나 역시 상태가 나쁜 경우가 많았으며 일부는 폐기해야 했다. 모든 무기의 예비부품이 모자라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많은 무기를 버려야 했다. 대전차포는 없었으며 수류탄, 방독면, 철모도 모자랐고 탄약도 많이 부족했다.


무기의 부족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야포였다. 개전 당시 샤프 장군에게는 야포가 1문도 없어서 사단포병대는 이름과 달리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2월 12일에 그는 2.95인치 야포 8문을 받았는데 그중 3문은 2주일 후의 다바오 함락 당시 잃었다. 샤프 장군은 나머지 5문으로 전역이 끝날 때까지 버텨야했다.


샤프 장군은 부족한 물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필리핀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들을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 신발, 내복, 수류탄 및 엔필드 소총의 추출기 등을 생산했으나 소총탄이나 야포의 부품은 생산이 불가능했다.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원래 임무는 남부 필리핀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전쟁이 나자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따라서 샤프 장군은 휘하 병력이 주둔한 섬마다 사령부를 만들고 일본군이 상륙하면 내륙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위하여 식량, 탄약, 연료 및 장비를 내륙으로 옮겼으며 이동이 불가능한 보급품이나 장비는 파괴했다.


1942년 1월 초에 샤프 장군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세부를 떠나 민다나오로 이동하면서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주력을 델몬테 비행장이 있는 민다나오로 집결시켰다. 이제 비사야에서 병력이 주둔하는 섬은 세부, 파나이,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그리고 보홀의 6개로 줄어들었다.


개전 이래 샤프 장군의 담당 지역은 점차 줄어들었다. 2월 4일부터 극동미육군사령부는 호주에서 오는 보급품의 경유지인 파나이와 민도로를 샤프 장군에게서 떼내어 직접 관리했다. 맥아더는 탈출하기 1주일 전인 3월 초에 비사야 지역을 샤프 장군에게서 떼어내 6개 섬을 담당하는 5개 사령부로 이루어진 비사야군을 창설했다. 비사야군 사령관 브래포드 치노웨스 준장은 원래 파나이를 담당했으나 비사야군 창설과 함께 세부로 옮겼다. 치노웨스 장군은 이제 민다나오군 사령관이 된 샤프 장군과 동격으로 코레히도르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았다. 비사야군의 분리는 샤프 장군으로 하여금 비사야 방어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민다나오 방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으며 이는 맥아더가 민다나오를 향후 필리핀 탈환을 위한 기지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군은 처음에는 남부 필리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개전 당시 제14군은 마닐라 점령에 집중했으며 남부 필리핀에 대해서는 마닐라 점령 이후 적당한 시기에 점령한다는 간단한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42년 1월 말에 실시한 제14군의 바탄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대본영은 하루속히 남부 필리핀을 포함하여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라고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바탄을 공략할 병력과 별도로 남부 필리핀에 투입할 병력도 파견했다. 


남부 필리핀 공략을 위하여 증원된 부대는 가와구치 지대와 가와무라 지대였다. 보병제35여단사령부와 보병제124연대로 이루어진 가와구치 지대는 보병제35여단장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의 지휘 아래 3월 23일에 보르네오를 떠나 4월 1일에 링가옌만에 도착했다.

보병제9여단사령부와 보병제41연대로 이루어진 가와무라 지대는 보병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의 지휘 아래 3월 27일에 싱가포르를 떠나 4월 5일에 링가옌만에 도착했다.

혼마 장군은 가와구치 지대, 가와무라 지대, 그리고 다바오에 주둔 중이던 미우라 지대를 동원하여 남부 필리핀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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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공습 하의 생활


1941년 12월에서 42년 1월 초에 걸친 일본군의 공습 이후 코레히도르와 4개 요새섬의 병사들은 피해를 복구하고 방어를 강화했다. 말린타터널에서는 1921년 시작되었다가 워싱턴조약으로 중단되었던 확장공사를 마무리하여 해안방어사령부(Seaward Defense)로 사용했다. 3월 4일에는 바탄반도에서 코레히도르로 8인치 평사포 1문을 옮겼으나 운용 인원을 구하지 못하여 항복시까지 사용하지 못했다. 포트 휴이에서는 바다를 향해 있던 155mm 평사포 1문을 바탄 방향으로 옮겼다.


중요 설비는 보강했다. 공병은 말린타 터널의 서쪽 끝에 있던 커다란 우물 주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았다. 모리슨 언덕에 있던 휘발유 저장고와 탑사이드에 있던 항만방어부대의 전화교환소는 60cm 의 콘크리트로 둘러쌌다. 말린타 터널 입구와 바텀사이드의 항만 지역에는 철심이 들어간 콘크리트로 만든 정육면체 모양의 전차장애물을 설치하고 75mm 해안포대에는 지붕을 만들었다.

말린타 터널을 확장할 때는 일본군이 남쪽 카비테에서 포격을 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포격을 시작하자 해안방어사령부의 입구가 일본군이 쏘아대는 포탄의 탄도와 일치했으므로 공병이 입구 앞에 튼튼한 방호벽을 세웠다. 


땅을 팔 도구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병사들이 어떻게든 도구를 입수하여 틈만 나면 참호를 팠다. 공병이 참호파는 방향이나 방법을 지도해 주었는데 공병이 이제 충분하다고 말해도 대부분은 계속 팠다. 개전 이래 코레히도르에서 병사들이 판 참호의 길이는 3km 가 넘었다.


1942년 1월 6일에 코레히도르의 식량 배급량은 바탄과 같이 정량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일과 및 땅파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대부분 식량을 찾으러 다녔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바지선이 코레히도르 부근에서 침몰하면 으례 병사들이 헤엄쳐 가서 먹을만한 것을 건져오곤 했다. 하루는 위스키를 가득 싣고 마닐라를 떠난 바지선이 코레히도르 해안 가까운 곳에 침몰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몰려들어 중유로 뒤덮인 바다로 뛰어들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헌병이 달려와 병사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제 막 해안으로 돌아온 불운한 병사에게서 위스키를 압수했으나 이미 많은 병사들이 건져낸 위스키를 들고 사라진 이후였다.


미군 수뇌부는 말린타 터널 내에 있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분지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맥아더와 참모들의 책상, 그리고 참모들이 자는 2층 침대가 있었다. 극동미육군 사령부의 건너편에는 항만방어사령부가 있었으며 필리핀자치령정부도 말린타 터널 안에 있었다.


(말린타 터널 안의 맥아더와 서덜랜드. 1942년 3월.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2 P.492)


야외에서 근무하는 인원에게 말린타 터널 안은 별세계였다. 터널 안에서는 필리핀과 미국의 관료, 각군의 모든 계급의 장교들, 빳빳하게 풀을 먹인 흰 제복을 입은 간호사, 종군기자, 인부, 수리 및 건설요원, 이발사, 환자, 그리고 공습을 피해 뛰어들어온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방향을 잃고 머뭇거리다 보면 매끈한 바닥에 대걸레질을 하던 청소부가 비키라고 요구했고 한쪽에서는 필리핀 소년이 구두를 닦고 있었다.


바탄반도의 병사들이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호화판으로 먹는다고 의심한 것처럼 코레히도르에서는 야외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자신들은 밖에서 고생하고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때 말린타 터널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과 경멸이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맥아더는 터널 안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더그아웃 더그' 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1942년 1월 초에 일본제14군은 제5비행집단을 뺏기면서 항공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1월 말에 실시한 오리온-바각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 실패하자 대대적인 증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항공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3월 16일에 말레이로부터 중폭격기 60대를 보유한 비행제60 및 제62전대가 클라크 비행장에 도착함으로써 제14군비행대의 항공기 숫자는 2배 가까이 늘었다. 당시 제14군비행대(제10독립비행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0독립비행대 본부

독립비행제76중대 : 97식 사령부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52중대 : 97식 군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74중대 : 98식 직접협동기 8대

비행제50전대제3중대 : 97식 전투기 10대

비행제16전대 : 97식 전투기 32대

비행제60전대 : 97식 중폭격기 35대

비행제62전대 : 97식 중폭격기 25대

합계 : 128대


해군에서도 1식 육상공격기 2개 비행전대, 제로전투기 1개 비행전대, 그리고 97식 함상공격기 1개 비행전대를 보내 주었다.


혼마 장군은 3월 24일부터 코레히도르에 대한 공습을 재개했다. 오전 9시 25분부터 비행제60전대의 97식 중폭격기 26대와 제62전대의 중폭격기 19대가 날아와 하루 종일 공습했다. 비행제60전대는 100kg짜리 폭탄 87발, 250kg 짜리 폭탄 36발, 500kg 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다. 비행제62전대는 100kg짜리 폭탄 88발, 250kg 짜리 폭탄 18발을 떨어뜨렸다. 해군도 전투기 3대와 1식 육상공격기 33대를 보내어 폭격했다. 밤에는 비행제60전대의 중폭격기가 3대씩 3번에 걸쳐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이날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은 71톤이다.

다음날인 25일에는 비행제60전대의 18대와 해군기 24대가 폭격했으며 밤에는 비행제62전대가 3대씩 3번에 걸쳐 야간폭격을 감행했다.

26일에는 코레히도르에 대한 주간폭격은 해군기만 실시했으며 야간에 비행제62전대가 3대씩 3번에 걸쳐 야간폭격을 감행했다.

27일에는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행제62전대가 중폭격기 35대를 내보내어 마리벨스와 코레히도르를 폭격했으며 야간에는 제60전대가 1개 중대를 내보내어 폭격했다. 

28일에는 비행제60 및 제62전대에서 1개 비행중대씩 내보내어 코레히도르를 폭격했으며 야간에는 해군의 1식육상공격기 1개 중대가 폭격했다.

29일에는 비행제60전대는 폭격에서 빠지고 비행제62전대가 주간과 야간에 각각 1개 비행중대를 내보내어 코레히도르를 폭격했다. 

30일에는 비행제62전대가 14대를 내보내어 코레히도르를 폭격했고 야간에는 2대씩 3번에 걸쳐 폭격을 감행했다. 

31일에는 육군기의 주간폭격은 없었으며 야간에 제60전대가 2대씩 3번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4월 1일에도 육군기의 주간폭격은 없었으며 야간에 제60전대가 1대씩 3번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3월 24일부터 4월 1일까지 공습에 참가하는 육군기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으나 해군기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일본기의 공습으로 병사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24일 오전 9시부터 74시간 동안 60번의 공습경보가 울렸다. 일본기는 하루 종일 폭격을 가했으며 심지어 야간에도 소수가 날아와 폭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두번째 폭격 기간동안 27회에 걸쳐 야간폭격을 시도했다. 일본기들은  7,200m - 8,100m 높이로 다가와 소형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정확성이 떨어져서 피해는 미미했다.

공습경보는 보통 오전 9시가 좀 넘으면 울리기 시작했으며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제되었다.


1주일에 걸친 공습으로 바텀사이드의 극장, 우체국, 빵집이 부서졌고 해군통신감청소도 피해를 입었다. 맥아더로부터 물려받은 웨인라이트의 집도 파괴되었으며 탄약고 몇개가 폭탄을 맞아 탄약 일부와 TNT 상당량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폭격의 강도에 비해서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다. 12월의 폭격 이후 중요한 설비는 보호되었고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들어앉았다. 폭탄의 충격을 막는데 모래주머니의 효과가 좋다는 것이 알려지자 너도나도 모래주머니에 모래를 담아 주변에 쌓아두는 바람에 모래주머니가 품귀현상을 빚었다.


일본군도 대공포를 피하는 방법을 배웠다. 일본기들은 폭탄투하 고도를 6,600m 이상으로 높였다. 또한 소규모 편대로 나뉘어서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들었으며 폭탄을 투하한 순간 고도와 방향을 바꾸어 대공포의 조준을 방해했다. 이러한 일본기의 전술 변화로 인하여 대공포는 일본기가 폭탄투하점에 도달하기 전에 탄막을 펴는 것이 힘들어졌으며 명중율도 떨어졌다.


3인치 대공포의 가장 큰 문제는 9,000m 이상의 높이까지 쏘아올릴 수 있는 기계식 신관이 부족하여 1개 포대에서만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2월 3일에 잠수함이 기계식 신관을 가진 대공포탄 2,750발을 싣고 옴으로써 이제 2개 포대에서 9,000m 까지 사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지반 나머지 포대는 여전히 7,200m 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는 도화선식 신관을 사용해야 했다. 도화선식 신관의 또다른 문제는 30% 에 달하는 높은 불량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화선식 신관도 쓸모가 있었는데 일본기를 높은 고도로 몰아냄으로써 폭격의 정확성을 떨어뜨렸다.


미군은 대공화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엉뚱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기어리 포대장 벙커 대령은 12인치 박격포를 대공포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벙커 대령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제62해안대공포연대장 체이스 대령의 핀잔을 무릅쓰고 12인치 박격포의 304kg 짜리 고폭탄에 3인치 대공포의 도화선식 신관을 결합시켜 발사해 보았지만 폭발하지 않았다.


4월 1일을 마지막으로 코레히도르에 대한 제2차 폭격이 끝났다. 제14군비행대는 해체되고 새로이 제22비행단이 만들어져 제2차 바탄전투를 지원하는데 전념했다. 이제 코레히도르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하고 나면 일본군의 모든 야포와 항공기는 코레히도르를 공격하러 돌아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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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코레히도르 공습 및 포격


항만방어사령관 무어 장군이 코레히도르의 해군통신감청소로부터 진주만 기습 보고를 받은 것은 12월 8일 오전 3시 40분으로 맥아더가 서덜랜드로부터 전화를 받은 시간과 거의 동시였다. 4개 요새는 이미 8일전부터 전원 전투배치 상태였으므로 무어 소장은 요새지휘관에게 진주만 기습 사실을 통보하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오전 6시 20분이 되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황이 존재한다는 공식 통보가 도착했고 해군은 일시적으로 마닐라항을 봉쇄했다. 오전 10시에 처음으로 코레히도르에 공습경보가 울렸고 그날 3번을 더 울렸다. 이후로도 공습경보는 자주 울렸으나 공습은 없었다. 일본군은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로 옮겨갈 때까지 코레히도르를 공습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마닐라를 떠나 코레히도르로 옮겨가자 혼마 장군은 12월 29일부터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의 제5비행집단과 해군 제11항공함대를 동원하여 코레히도르를 공습했다.


12월 29일 오전 11시 54분에 비행제14전대의 97식중폭격기 18대가 비행제50전대의 97식전투기 1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코레히도르 상공에 나타났다. 폭격기는 3대씩 편대를 지어 차례로 5,000m 높이로 코레히도르를 통과하면서 94식100kg짜리 폭탄 35발과 및 92식 250kg 짜리 폭탄 12발을 사령부와 막사에 떨어뜨렸다.

오후 12시 30분에는 비행제8전대의 99식경폭격기 22대와 비행제16전대의 97식경폭격기 18대가 도착했다. 99식경폭격기들은 97식중폭격기와 같은 방식으로 탑사이드와 바텀사이드의 건물과 시설에 100kg 짜리 폭탄 66발을 떨어뜨렸다. 97식경폭격기는 급강하폭격으로 1,000m 높이까지 내려와 50kg 짜리 폭탄 108발을 투하했다.

오후 1시에는 해군기 60대가 몰려와 코레히도르와 주변의 함정을 폭격했다.


바탄의 활주로에 전개한 소수의 미군기는 감히 이륙하지 못했고 대공포만이 저항했다. 3인치 대공포는 1,200발을 발사하여 일본기 13대를 명중시켜 그중 3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50구경 기관총은 급강하폭격을 실시하는 일본기를 공격하여 4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병사들은 일본기가 어디를 폭격하러 가는지 살펴보려고 창가에 몰려들었다가 폭탄이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혼비백산하여 방공호로 내달렸다.

병원, 매점, 사령부, 막사, 장교클럽 등이 폭탄을 맞았으며 연병장에 떨어진 폭탄은 직경 6m 짜리 구덩이를 만들었다.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섬 전체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이날의 폭격과 뒤이은 화재로 코레히도르의 목조 건물 60% 가 소실되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서둘러 말린타 터널로 이동했다.

다행히 일본군의 주요 목표였던 군사시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포대 2개가 피해를 입었으나 24시간 내로 기능을 회복했다. 바텀사이드에 계류되어 있던 소형함정 몇 척이 폭탄을 맞았고 꼬리 부분에 있는 킨들리 비행장에 주기중이던 필리핀 육군기 2대가 파괴되었다. 전기, 통신, 급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영구적인 피해는 없었다.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20명, 부상자는 약 80명이었다.


공습은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행동을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모두 창가에 나와 일본기가 어디로 가는지 구경하곤 했으나 공습 이후에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방공호의 위치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으며 일부 병사들은 상공에 일본기가 없어도 방공호를 벗어날 때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날씨에 대한 선호도 변했다. 운치있는 달밤은 일본기가 야간공습을 가할 수 있으므로 싫어했다.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도 역시 일본기의 기습 가능성이 있어서 싫어했다. 정감있는 구름은 일본기가 숨을 수 있어서 싫어했다. 반면 공습을 어렵게 만드는 심한 폭풍우를 좋아했으며 어서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12월 29일의 첫 공습 이후 사흘간 잠잠하던 일본기는 마닐라가 함락된 1942년 1월 2일에 되돌아왔다. 이날은 흐렸는데 정오부터 일본기가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내려와 폭탄을 떨어뜨리고 다시 구름 위로 사라졌다. 이날 합계 54대의 일본기가 코레히도르와 포트 드럼을 폭격했다. 일본기는 이후 1월 6일까지 매일 나타났으며 5일에는 포트 프랭크도 폭격을 받았다.


일본기의 공습 패턴은 비슷했다. 오전에 사진정찰기가 나타나 코레히도르나 다른 요새를 맴돌다가 사라지면 오후 12시 30분쯤 V자 편대를 이룬 폭격기가 나타나 6,000m 고도에서 시속 260km 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폭격을 가했다. 일본기는 5일까지 똑같은 코스와 고도로 차례차례 진입했기 때문에 대공포가 조준하기 쉬웠다. 마지막날인 6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실수를 깨닫고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다른 고도로 접근하여 폭격했다.


공습의 피해는 컸다. 2일과 3일의 공습으로 탑사이드와 미들사이드의 건물들이 다시 피해를 입었고 귀중한 물탱크 2개가 부서졌다. 4일의 공습은 바텀사이드의 부두, 작업장 및 창고에 집중되었다. 5일에는 부두에 매어둔 바지선이 폭탄에 맞아 불이 붙은채 떠내려가다가 하필이면 발전소 부근의 경유집적소에 닿아 화재를 일으켰다. 6일에는 부실한 방공호가 비극을 불렀다. 34명이 숨어있던 방공호 부근에 큰 폭탄이 떨어졌는데 그 충격으로 방공호가 무너지면서 31명이 죽었다. 7일 아침이 되자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한 지상건물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지면에는 평균 20m 마다 폭탄구덩이가 생겼다.


가장 큰 손실은 화재로 인한 것이었다. 평화시에도 빈약한 포트 밀스의 화재 진압 능력은 폭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무기력했다. 목재, 기계장비, 침구, 의약품 등 목제창고에 보관 중이던 귀중한 보급품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반면 콘크리트 창고에 보관하던 보급품들의 피해는 가벼웠다.


전기철도는 운행을 멈추었으며 통신선은 공습때마다 끊어져 밤에 수리해 놓으면 다음날 공습에 다시 끊어졌다. 폭탄에 피해를 입지 않을만큼 통신선을 깊이 파묻을 시간은 없었다.


군사시설은 이번에도 피해를 면했다. 해안포대와 탄약고는 폭탄에 견딜 수 있게 튼튼하게 지어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노출된 대공포대는 피해를 입었으나 대부분 12시간 내로 회복가능한 가벼운 피해였다. 29일에서 1월 6일까지 폭격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으나 단편적인 정보를 종합하면 최소한 사망 약 60명, 부상 약 220명이었다.


공습은 바탄전투가 시작된 1월 6일에 끝났다. 제5비행집단은 태국으로 철수했으며 제14군에 남은 소수의 항공기는 바탄전투를 지원해야 했다. 그리하여 3-4대의 항공기가 기습적으로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본격적인 공습은 일단 끝났다.


바탄전투가 벌어지는 1달 동안 불안하게 지속되던 코레히도르와 해상요새의 평화는 2월 초에 깨졌다. 제14군은 1월 24일에 곤도 도시노리 소좌가 지휘하는 곤도 포병대를 창설하고 마닐라만의 남안인 카비테주의 터네이트에 방호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0cm 유탄포 4문과 15cm 캐넌포 2문으로 이루어진 곤도 포병대는 2월 초까지 포트 드럼에서 9km, 포트 프랭크에서 13km 떨어진 터네이트 부근의 방호진지에 전개를 마쳤다.


최초의 포격은 2월 5일에 있었다. 곤도 포병대는 오전 8시부터 3시간 동안 포트 드럼을 포격하여 약 100발을 맞추었다. 포트 드럼에서는 14인치포와 6인치포를 동원하여 반격했고 포트 프랭크에서도 12인치 박격포로 사격을 가했으나 일본야포의 위치를 몰라서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이후 2월 중순까지 곤도 포병대와 포트 드럼 및 포트 프랭크는 매일 포화를 주고 받았으나 서로 치명타를 가하지 못했다.


2월 15일에 일본군은 카비테주에서 포트 프랭크에 식수를 공급하는 수도관을 발견하고 망가뜨렸다. 포트 프랭크에는 담수화 설비가 있었으나 귀중한 연료를 소모해야 했으므로 사령관 보드로 대령은 수리를 위하여 15명을 파견했다. 이들이 수도관이 파괴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약 30명으로 이루어진 일본군 정찰대가 나타나서 공격을 가했다. 15명은 포트 프랭크에서 쏘아주는 75mm 해안포의 지원 아래 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을 뿐 사망자 없이 돌아왔으나 수도관 수리에는 실패했다. 3월 9일에 다시 병력을 파견하여 수도관을 수리할 때까지 포트 프랭크에서는 담수화 설비를 사용하여 식수를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2월 20일에 일본군은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15cm 유탄포 2문을 증원받은 곤도 포병대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늦게까지 1분 간격으로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으로 코레히도르의 발전소와 포트 휴이의 관측소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일본군의 포격 강도는 하루에 1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동안 일본군은 터네이트 남서쪽에 있는 피코데로로산에 새로운 포병진지를 만들고 중포병제1연대장 하야카와 마사요시 대좌가 지휘하는 하야카와 포병대를 배치했다. 하야카와 포병대는 중포병제1연대, 24cm 유탄포를 장비한 독립중포병제2대대, 그리고 제3트랙터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곤도 포병대도 해체되어 하야카와 포병대에 흡수되었다. 첫 공격은 3월 15일이었다.


3월 15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하야카와 포병대의 24cm 유탄포가 포격을 시작하여 하루 종일 지속했다. 주목표는 포트 프랭크와 포트 드럼이었다. 포트 프랭크는 약 500발의 명중탄을 맞아 155mm 해안포대 1개와 3인치 대공포대 1개가 파괴되었고 포대 2개가 피해를 입어 일시적으로 기능을 상실했다. 100발의 명중탄을 맞은 포트 드럼에서는 1발이 남쪽을 향한 6인치 포의 포곽을 뚫고 들어와 폭발하는 바람에 콘크리트 요새 내부가 연기로 가득찼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포트 프랭크와 포트 드럼도 반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하야카와 포병대는 21일까지 매일 포격을 가했다. 4개 요새가 모두 포격을 받았으나 주요 표적은 남쪽에 있는 포트 드럼과 포트 프랭크였다. 포트 드럼은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았으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포트 프랭크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16일에 24cm 철갑탄 1발이 12인치 박격포대를 둘러싼 46cm 두께의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가 포대 아래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포대가 함몰되면서 장약 60통이 쏟아졌으나 기적적으로 폭발하지 않았다. 21일에는 24cm 철갑탄이 46cm 두꼐의 콘크리트 지붕을 뚫고 들어와 황열병 예방접종을 기다리던 병사 가운데에서 폭발하여 28명이 죽고 46명이 다쳤다. 


곤도 포병대의 포격과 달리 3월 15일에서 21일에 걸친 하야카와 포병대의 포격은 요새의 방어시설에 피해를 입혔다. 포트 프랭크에서는 3인치 대공포 4문과 155mm 구형평사포 4문이 큰 피해를 입었다. 12인치 박격포는 함몰되었고 14인치 평사포 2문도 피해를 입었으나 빨리 고쳤다.

포트 드럼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6인치포의 포곽은 수많은 명중탄에 맞아 철판이 우그러지고 찢겼으나 고치지 못할만큼 크게 망가진 것은 대공포 2문 뿐이었다.


일본군은 포격에 이어 포트 프랭크와 포트 드럼에 대한 상륙을 준비했으나 혼마 장군이 바탄반도 전투에 집중하기 위하여 취소시켰다. 나중에 포트 프랭크에서 75mm 포로 포격을 가하여 일본군이 상륙을 위하여 모아두었던 카누 45척을 파괴했다.


일본군이 포격하는 동안 해상요새도 반격했으나 일본군 야포의 위치를 알기 어려웠다. 일본군은 정성들여 야포를 위장했으며 필요하면 위치를 바꾸었고 심지어는 포격과 동시에 다른 곳에서 가짜 연기를 피우기도 했다. 미군은 발사음을 듣거나 날아오는 포탄의 궤적을 보고 일본군 포대의 위치를 추정하여 반격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코레히도르 체니 포대의 12인치 해안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2  P.483)


하야카와 포병대가 전개한 피코델로로산의 야포진지는 후사면에 만들어서 구경장이 큰 해안요새의 평사포들은 대부분 포격이 불가능했다. 후사면에 숨어있는 일본군의 야포진지를 공격하는 데에는 고각사격이 가능한 12인치 박격포 22문이 효율적이었으나 적당한 탄약이 모자랐다. 미군이 보유한 12인치 박격포탄은 대부분 함정 공격용으로 지연신관을 장착한 458kg 짜리 철갑탄이었다. 지상표적에 효과적인 순발신관을 장착한 304kg 짜리 고폭탄은 1,000발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이 탄약은 일본군이 바탄반도를 장악한 이후 마리벨스산에서 쏘아댈 일본군 야포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껴야 했다.

코레히도르의 12인치 박격포대인 기어리 포대장 폴 벙커 대령은 철갑탄의 지연신관에서 0.05초 지연 조각 하나를 제거하여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철갑탄은 착탄과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그러나 철갑탄 자체의 작약량이 적어서 지상표적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하야카와 포병대의 포격은 3월 22일에 끝났다. 포병대는 이날 해체되었으며 야포들은 제2차 바탄전투를 지원하기 위하여 바탄반도로 이동했다. 이로써 일본군과 해상요새의 포격전은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할 때까지 소강상태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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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코레히도르


일본은 바탄반도를 점령해도 극동 제일의 양항인 마닐라항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닐라항을 사용하고 싶으면 코레히도르를 포함하여 마닐라만의 입구를 감제하는 해상요새 4개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코레히도르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1)


코레히도르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마닐라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였다. 미서전쟁 당시 코레히도르에는 중포 3문이, 그리고 코레히도르 남쪽에서 마닐라만 입구를 가로지르는 엘프레일섬과 카발로섬에는 해안포 12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획득한 미국은 1914년까지 코레히도르와 인근 섬들을 강력하게 요새화시켜 마닐라항은 극동의 지브롤터로 불렸다. 시대상을 반영하여 요새들은 바다로부터의 공격을 저지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함도 물리칠 수 있었다.


1922년에 워싱턴 해군조약에 의하여 코레히도르의 방어시설 건설이나 현대화는 금지되었다. 미국은 돌산인 말린타 언덕에 터널을 파고 창고를 건설했으나 1941년 말에 일본이 침공했을 때 코레히도르의 방어시설은 새로 만들어진 대공포 진지를 제외하고는 1914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포트 밀스가 자리한 코레히도르는 마닐라만 입구를 지키는 4개의 해상 요새 중 가장 컸으며 마닐라만 입구를 북쪽 수로와 남쪽 수로로 나누었다. 코레히도르의 길이는 약 6km, 가장 넓은 곳의 폭은 800m 정도인 올챙이 모양으로 머리는 서쪽이고 꼬리는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머리와 꼬리의 연결 지점은 폭이 약 550m 인 저지대로서 바텀사이드라고 불렀다. 바텀사이드에는 산호세 마을, 2개의 부두, 발전소, 작업장, 그리고 냉동창고를 포함한 창고들이 모여 있었다. 바텀사이드의 바로 동쪽에는 내부에 복잡한 터널망을 가진 말린타 언덕이 있었다. 말린타 언덕의 동쪽 꼬리부분에는 대공포 진지, 작은 활주로 그리고 해군의 통신감청소가 있었다.


(말린타 언덕. 북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이 서쪽이다. 중앙의 저지대는 바텀사이드.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3)


바텀사이드의 서쪽은 미들사이드라고 불리며 병원, 초급장교 및 부사관 숙소, 군대 매점, 어린이를 위한 2개의 학교가 있었다. 해발 150m 정도 되는 고지대는 탑사이드라고 불렀으며 사령부, 막사, 장교숙소, 그리고 연병장이 있었다. 올챙이 머리 부분의 지형은 좁은 해안을 벗어나면 바로 절벽이었으므로 방어에 유리했다. 절벽 사이에는 몇 개의 계곡이 있어 상륙한 적이 진격로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미군은 중요한 계곡 3개에 체니, 제임스 , 그리고 램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코레히도르에서 발전소는 대단히 중요했다. 식수는 21개의 깊은 우물에서 전기펌프로 퍼올렸다. 열대의 날씨에서 식품을 보관하려면 전기로 작동하는 냉동창고가 필수였으며 말린타 언덕의 거대한 터널망에는 전기로 작동하는 전등과 환풍기가 필요했다. 코레히도르에는 105km 에 달하는 도로와 오솔길이 있었지만 중장비는 대부분 22km 길이의 전기철도로 운반했다. 거대한 해안포들은 비상발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발전소에서 보내주는 전기에 의존했다. 따라서 미군은 발전소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말린타 터널.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5)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물은 말린타언덕에 있는 터널망이었다. 동서로 달리는 길이 430m 폭 9m 의 중앙터널에는 전기철도가 깔려 있었다. 중앙터널의 좌우로는 길이 120m 정도되는 분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25개 뻗어 있었다. 북쪽에는 12개의 분지를 가진 지하병원이 있어서 북쪽 출입구로 통했다. 남쪽에 있는 창고를 지나면 해군터널로 연결되었다. 터널의 벽면은 콘크리트로 강화했으며 천정은 아치로 마무리했다. 구석구석 전선을 깔아 전등을 설치했으며 환풍기가 신선한 공기를 공급했다. 포격이나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말린타 터널 안에는 필리핀주둔미군사령부, 항만방어사령부, 병원, 작업장, 그리고 창고가 들어 있었다.


코레히도르의 화력은 강력했다. 해안포 세력은 자체의 이름과 역사를 가진 23개의 포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경 3인치에서 12인치에 이르는 해안포는 총 56문으로 모두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물건이었다. 사정거리가 가장 긴 것은 스미스 포대와 헌 포대에 1문씩 배치된 12인치 평사포로 사정거리가 25,000m 였으며 사방으로 사격할 수 있었다. 스미스 및 헌 포대를 제외한 12인치 평사포 6문과 155mm 구형평사포 19문이 16,000m 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12인치 박격포와 3인치 해안포는 사정거리가 짧았다.

함정에 효과적인 철갑탄의 숫자는 충분했으나 지상군에 효과적인 고폭탄은 거의 없었으며 조명탄은 전무했다.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지뢰가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코레히도르의 무장.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4)


대공화기는 3인치 대공포 28문, 50구경 기관총 48정 그리고 60인치 스페리 탐조등 10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3인치 대공포 중 1개 포대 4문은 코레히도르에서 바로 보이는 바탄반도의 남쪽 끝에 있었다.  3인치 대공포의 사격고도는 최대 9,800m 였다. 대공포탄의 숫자는 해안포만큼은 아니지만 넉넉한 편이었다.


전쟁 전에 코레히도르의 주둔군은 사령부, 포병, 그리고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병력숫자는 4개의 요새섬을 합쳐 6,000명 미만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코레히도르의 병력은 크게 늘었다. 먼저 카비테항이 폐쇄되면서 해군병력이 상륙했다. 12월 25일에는 맥아더 사령부가 제809헌병중대, 보급중대 2개, 공병중대, 기타 지원부대와 함께 도착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올롱가포가 폐쇄되면서 1,0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진 제4해병연대가 옮겨왔다.


코레히도르를 제외하고 마닐라만을 지키던 해상요새 3개의 무장도 강력했다. 코레히도르 바로 남쪽에 있는 카발로에는 포트 휴이가 있었다. 카발로는 코레히도르 다음으로 컸으나 그래도 면적은 0.6㎢ 에 지나지 않았다. 서해안은 수면에서 바로 120m 높이로 절벽이 솟아올라 있었으나 동해안은 완만하여 상륙이 가능했다. 1942년 4월말 현재 포트 휴이의 병력은 약 800명으로 해병 93명과 해군 443명은 프랜시스 브리젯 중령의 지휘 아래 보병으로서 동해안을 방어했다. 나머지 병력은 포병이었다. 대공화력은 3인치 대공포 4문으로 코레히도르의 대공포와 통합 운용되었다.  해안포는 13문으로 14인치 평사포 2문, 12인치 박격포 4문, 6인치 평사포 2문, 155mm 구형평사포 3문, 3인치 해안포 2문이었다.


(포트휴이, 드럼, 프랭크의무장.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6)


포트휴이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포트드럼은 특이했다. 공병대가 엘프레일 섬을 해수면까지 깎아낸 다음 그 위에 길이 107m, 폭 44m 짜리 콘크리트 전함을 만들었다. 해수면에서 갑판까지의 높이는 12m 였으며 외벽의 두께는 최대 11m 에 달했다. 여기에 14인치 주포 4문과 6인치 부포 4문, 3인치 해안포 1문 그리고 3인치 대공포 2문을 설치했다. 병력은 200명 밖에 되지 않지만 포트드럼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엘프레일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7)


(포트드럼.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7)


가장 남쪽에 있는 카라바오는 카비테주에서 불과 460m 떨어져 있었는데 해안선은 동해안의 1곳을 빼고는 모두 해안에서 30m 이상 솟아오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군은 여기에 포트 프랭크를 설치하고 필리핀스카우트 400명을 배치했다. 무장은 14인치 평사포 2문, 12인치 박격포 8문, 155mm 구형평사포 4문, 75mm 해안포 3문, 3인치 대공포 4문, 탐조등 2개였다.


마닐라만의 4개 요새와 수빅만의 포트윈트를 합쳐 1941년 8월에 마닐라만 및 수빅만 항만방어부대가 창설되었다. 항만방어부대는 조지 무어 소장이 이끄는 필리핀해안포사령부의 예하 부대가 되었으며 무어 소장이 사령관을 겸직했다. 부대는 사령부, 해안포연대 3개, 해안대공포연대 1개, 그리고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약 5,7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1 및 제2해안대공포연대는 필리핀육군 소속으로 실제로는 필리핀스카우트해안포연대의 통제를 받았다.


주요 부대의 인원은 다음과 같다.


사령부 : 575명

제59해안포연대(US) : 1,383명

제60해안대공포연대(US) : 2,033명

제91해안포연대(PS) : 830명

제92해안포연대(PS) : 515명

제1해안포연대(PA) : 490명

제2해안포연대(PA) : 79명

지뢰매설부대 : 42명


항만방어부대는 4개의 주요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코레히도르의 해안선은 기어리 포대장 폴 벙커 대령이 방어했다. 벙커 대령은 휘하에 4개의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개 부대가 북쪽을, 2개 부대가 남쪽을 방어했다. 대공방어와 조기경보는 제60해안대공포연대장인 시어도어 체이스 대령이 맡았다. 코레히도르를 제외한 4개 요새의 지휘관은 자기 요새의 방어를 책임졌다. 해군사령관 케네스 호펠 대령은 서류상 웨인라이트의 직속 부하로 무어 소장과 동급이었으나 실제로는 무어 소장의 통제를 받았다.


마닐라만의 해상요새는 바다로부터 다가오는 적에 대해서는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마닐라만을 봉쇄하는 일본의 순양함이나 구축함은 해안포의 사정거리 내로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요새는 하늘과 육지로부터의 공격에는 취약했다. 일본군은 전역 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하여 코레히도르를 공습했고 1942년 4월 9일에는 바탄반도를 점령하면서 이제 야포로 코레히도르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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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4월 8일 : 혼란


4월 8일 아침이 되자 제2군단은 알랑간강 남안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했다. 지휘는 C구역 사령관인 제31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과 A 구역 사령관인 제31보병연대장 존 어윈 대령이 맡았다. 블루멜 장군은 제37보병연대(US), 제57보병연대(PS), 제26기병연대(PS), 제14공병대대(PS), 제803공병대대(US)를 이끌고 좌익 2,300m 를 맡았다. 어윈 대령은 제31보병연대(PA)와 경찰연대를 이끌고 우익을 담당했다. 포병 세력은 완편된 제21야포연대(PA), 피해를 입은 야포대대 3개를 모아 만든 임시야포여단, 알렉산더 퀸타드 대령의 제301야포연대(PA)에서 살아남은 155mm 평사포 3문, 그리고 고정식 해안포 몇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군의 진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5.html#25-1 P.442)


8일 아침이 되었을 때 알랑간선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제803공병대대는 밤새 제멋대로 후퇴해 버렸고 부대마다 점령해야 할 방어선의 길이가 정해지지 않아 중간에 빈 공간이 생겼다. 방어선의 좌익은 서쪽으로부터 제14공병대대, 제26기병연대, 제31보병연대, 제57보병연대의 순이었는데 제26기병연대와 제31보병연대 사이에는 약 900m 의 간격이 있었다. 제31보병연대와 제57보병연대 사이에도 간격이 있었으며 제57보병연대의 동쪽에서 우익과 연결해야 할 제803공병대대가 무단으로 후퇴해 버림으로써 우익과의 연결도 끊어졌다.

블루멜 장군이 지휘하는 3개 연대의 병력은 연대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였다. 제31보병연대(US) 160명, 제26기병연대 300명, 제57보병연대 500명이었으며 제14공병대대 400명을 합쳐 블루멜 장군의 병력은 1,360명이었다. 우익을 지휘하던 어윈 대령은 2개 연대 1,2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병사들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굶주린데다가 5일 동안 제대로 자거나 쉬지도 못한 채 일본군의 포격과 공습을 받아가며 전투와 이동을 거듭한 병사들은 너무나 지쳐서 앉기만 하면 곯아 떨어졌기 때문에 잠들지 않으려면 서있는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이날도 공격에 앞서 준비사격과 공습을 실시했다. 오전 11시부터 일본군의 전투기와 경폭격기들이 제31 및 제57보병연대의 방어선에 소이탄을 떨어뜨렸다. 키큰 풀과 대나무가 불타면서 병사들은 일본군과 싸우기 전에 화재와 싸워야 했다.


우익을 맡은 제31보병연대(PA)와 경찰연대는 공습에 무너졌다. 일본기가 접근하여 기총소사를 가할 때마다 개인호를 파던 병사들은 달아났다가 장교들에게 붙잡혀 다시 방어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일본기가 나타나면 또다시 도망쳤다. 공습이 반복될수록 돌아오는 병사들이 줄어들더니 오후 3시가 되자 일본군 보병이 나타나기도 전에 알랑간선의 우익은 텅 비어버렸다.


일본군은 오후 2시에 알랑간선의 좌익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중대 수준으로 줄어든 제31보병연대는 오후 5시가 되자 제4사단좌익대(보병제8연대)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쪽에 있던 제57보병연대도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후퇴했다.


일본군 전차제7연대는 오후 4시부터 알랑간선의 서단을 맡고 있던 제14공병대대를 공격했다. 일본전차는 기세좋게 돌진하다가 공병대대가 만든 대전차 장애물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다. 전차는 그 자리에서 기관총과 전차포로 공격했으나 시야가 제한되어 효과가 없었다. 전차병이 전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가는 바로 사살되었다. 그러나 스카우트 공병 또한 대전차무기가 없어서 장애물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일본전차를 파괴하지 못했으므로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공병의 동쪽에 있던 제26기병연대는 제31 및 제57보병연대를 쫓아버린 제4사단좌익대(보병제8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주력을 기병연대의 정면에 투입하여 고착시키면서 일부를 동쪽으로 우회시켜 기병연대를 포위하려 했다. 당시 블루멜 장군은 휘하 부대와 전령을 통하여 연락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제31 및 제57보병연대가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루멜 장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제26기병연대와 제14공병대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오후 6시 30분에 공병대대와 기병연대는 방어선을 떠나 철수했다. 그날 저녁에 일본제4사단 주력은 알랑간강을 건너 캅카벤으로 진격했다.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한 나가노지대는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오후 5시에 알랑간강을 건넜다. 일본군은 후퇴 중인 제31보병연대(PA)와 경찰연대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후위를 맡은 전차와 75mm 자주포가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보병이 몽땅 포로로 잡히는 사태를 막으면서 후퇴했다. 나가노지대는 밤 10시에 라마오 북방까지 진출했다.


제16사단은 발랑가를 떠나 리마이 방면으로 남하했다. 서해안에서 제16사단을 교체한 제10수비대는 바각까지 남하했다.

서쪽에서 공격한 제65여단은 8일 오후 2시에 리마이산 정상을 점령하고 저녁 7시까지 리마이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2km 를 진격했다.


군포병대의 주력은 사맛산 부근에 방열하여 제4사단과 제65여단의 공격을 지원했고 10cm 유탄포를 가진 일부 부대는 나가노지대를 지원했다.

제22비행단도 공습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73회 출격하여 주로 퇴각하는 미-필리핀군을 상대로 15kg 짜리 폭탄 10발, 50kg 짜리 폭탄 281발, 100kg 짜리 폭탄 38발을 투하하여 자동차 21대를 파괴했다. 비행제60전대는 5번에 걸쳐 42회 출격하여 캅카벤 부근에 250kg 짜리 폭탄 92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18회 출격하여 파니키안과 라마오에 100kg 짜리 폭탄 2발과 250kg 짜리 폭탄 75발, 500kg 짜리 폭탄 1발을 투하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도로에 대한 공습이었다. 일본기들이 초저공으로 내려와서 후방으로 도망치는 패잔병으로 가득찬 도로에 폭탄을 떨어뜨린 후 기총소사를 가하고 사라지면 도로 양옆으로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만드는 긴 줄이 생겼다.


미-필리핀군에게 일선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도로마다 패잔병이 가득차 있었다. 무선통신은 기갑부대만 가능했으므로 지휘관들은 전령에 의지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지휘관들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위치와 상황을 몰랐다.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알랑간방어선의 동쪽 측면이 무너진 사실을 알았다.


킹 소장은 캅카벤을 방어하기 위하여 마지막 예비대인 찰스 세이지 대령의 임시해안대공포여단을 투입했다. 제200 및 제515해안대공포연대로 이루어진 여단은 대공포를 파괴한 후 보병이 되어 캅카벤 북쪽의 고지대에 전개했다. 킹 소장은 또한 제1군단 소속이던 제1필리핀경찰연대를 제2군단으로 돌린 후 캅카벤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했다.


블루멜 장군이 지휘하던 병력은 8일 오후 9시 30분에 라마오에 도착했다. 제2군단장 파커 장군은 블루멜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라마오강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하라고 명령했지만 실행이 불가능했다. 장교들은 라마오강 남안의 지리를 몰랐으며 달도 없는 밤에 완전히 지치고 편제가 무너진 병사들을 새로운 방어선에 배치할 능력도 체력도 의지도 바닥난 상태였다. 블루멜 장군은 방어선 편성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려 했으나 파커 장군과 통신이 닿질 않았다.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제1경찰연대는 해가 뜰 때까지 캅카벤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었다. 대공포여단의 오른쪽에 전개하라고 명령한 제26기병연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실제로 제26기병연대는 이 명령을 받지도 못했다. 동부도로와 오솔길을 따라 후퇴중인 패잔병을 재편성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결국 8일 밤 11시 30분에 임시해안대공포여단만이 홀로 캅카벤 북쪽 고지대에 전개했다. 


8일 저녁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호주의 맥아더 장군에게 루손군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맥아더 장군은 제1군단을 총동원하여 올롱가포에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맥아더는 일본군이 공격한 다음날인 4월 4일에 웨인라이트에게 전문을 보내어 루손군의 붕괴가 임박하면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1군단은 올롱가포, 제2군단은 디날루피한에 대하여 총반격을 실시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만일 총반격이 성공하면 올롱가포와 디날루피한에 쌓인 일본군 보급품을 탈취하여 더 오래 저항할 수 있고 만일 실패하더라도 공격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병력들이 바탄을 탈출하여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웨인라이트는 8일 저녁에 맥아더로부터 총반격을 실행하라는 전문을 받자 현재 루손군 병사들은 너무 지쳐서 조금만 진격하면 쓰러질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맥아더로부터 재차 반격을 실행하라는 전문이 들어오자 웨인라이트는 실행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이상 항의하지 않고 오후 11시 30분에 루손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제1군단을 동원하여 올롱가포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이 웨인라이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바탄에서는 항복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바탄에는 이제 병사들에게 정량의 절반을 1회 공급할 식량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보급소장들은 오후 9시부터 장비와 보급품을 폭파하기 시작했다. 마리벨스에서도 해군이 오후 10시 30분부터 파괴작업을 시작하여 화염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웨인라이트와 통화를 마친 킹 소장은 제1군단장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올롱가포를 목표로 총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가능하냐고 물었다. 존스 장군은 모든 부대가 비누안간강으로 후퇴하는 중이며 병사의 체력이 바닥나서 총공격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킹 소장은 공격명령을 철회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 사실을 웨인라이트에게 알리지 않고 부하들과의 회의를 거쳐 항복을 결정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공격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없자 참모장 비브 장군에게 확인해 보라고 명령했다. 비브 장군이 직접 제1군단에 전화를 걸자 존스 장군은 공격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비브 장군은 곧 공격명령이 내려갈 테니까 준비하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존스 장군은 즉시 킹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킹 소장은 코레히도르에 전화를 걸어 제1군단이 자신의 지휘를 벗어났느냐고 물었다. 항복하기로 결정한 킹 소장으로서는 자신에게 제1군단의 항복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바탄의 모든 병력은 킹 소장의 지휘권 아래에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킹 소장과 통화를 마치고 이제나저제나 제1군단의 공격을 기다리던 웨인라이트 장군은 후속 보고가 없자 9일 새벽 3시에 다시 루손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이미 백기를 든 2명의 사절이 일본군 사령관을 찾아 전방으로 떠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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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4월 7일 : 제2군단 붕괴


1942년 4월 7일부터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방어선을 편성했다가 병력들이 다 배치되기도 전에 버려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통신이 끊어져 상급 사령부가 일선의 상황을 모르고 명령을 내렸다가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철회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패잔병이 도로를 메워 부대의 전진이 불가능해지고 부대가 말 그대로 정글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이틀에 걸쳐 루손군은 와해되었다.


(일본군의 진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5.html#25-1 P.442)


4월 7일 아침에 미-필리핀군의 최대 관심사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탈환하여 제2군단과 제1군단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공격은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가할 계획이었다. 동쪽에서는 릴리 대령의 제57보병연대가 공격하고 서쪽에서는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 부근에 주둔 중이던 도일 대령의 제45보병연대와 제194전차대대 C중대가 공격할 것이었다. 두 연대가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에서 만나면 샌빈센트강 방어선이 8번 오솔길을 따라 판틴간강까지 연장되어 제2군단이 제1군단과 연결될 것이었다.


공격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쪽에서 공격하는 제45보병연대는 2개 대대 중 제2대대와 C중대의 전차 중 1개 소대 2대만 공격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제3대대와 C중대의 나머지 전차들은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에 맞서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켜야 했다.


반면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키던 일본군은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45보병연대가 공격해야 할 서쪽을 맡은 일본군은 우회가 힘든 지형에서 적이 굽은 오솔길을 돌아나오면 집중사격을 퍼부을 수 있는 위치에 방어선을 폈다.


4월 7일 오전 1시에 제2대대는 전차 2대를 앞세우고 8번 오솔길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했다. 오전 2시 40분경에 선두 전차가 모퉁이를 돌자 일본군이 오솔길에 설치한 장애물이 보였다. 그 순간 일본군이 사격을 가하여 선두 전차를 파괴했다. 뒤따르던 전차는 전진을 멈추고 응사하기 시작했다. 곧 제2대대 주력이 도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2대대는 제45보병연대장 도일 대령의 지휘 아래 전력을 다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도일 대령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제45보병연대가 출발점인 8번-29번 오솔길에 도착해보니 제3대대와 C중대의 전차들은 북쪽으로부터 공격하는 일본제65여단의 주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은 오후가 되자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제45보병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다행히 전차들이 우회하려는 일본군을 발견하고 저지함으로써 연대 전체가 포위당하는 사태는 면했지만 더 이상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키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제45보병연대는 오후 6시에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일본군에게 내어주고 D구역 사령부와 함께 판틴간강을 건너 제1군단 지역으로 철수했다. 북쪽에 있던 제41보병연대도 판틴간강을 건너 서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쪽에 있던 제57보병연대는 공격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병력이 출발하기 전에 일본제4사단우익대가 샌빈센트강과 제57보병연대 사이의 공간을 공격했다. 제201 및 제202공병대대 병사들은 방어선에  도착한 순간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그대로 달아났다. 이로써 오른쪽 옆구리가 열려버린 제57보병연대는 공격은 커녕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철수해야만 했다. 7일 오후 5시가 되자 8번 오솔길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사맛산 서쪽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된 제33보병연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일본군은 오전 5시부터 1시간 동안 박격포로 포격을 가한 후 공격을 시작했다. 제33보병연대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오후가 되자 한계에 달했다. 대대장 홈스 소령은 부하에게 탈출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는 군의관과 함께 진지에 남아 항복하고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삼삼오오 정글 속으로 사라졌으나 탈출에 성공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많은 숫자가 정글 속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는 루손군의 항복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제33보병연대는 사라졌다.


제65여단과 제4사단우익대가 D구역을 소탕하는 동안 제4사단 주력과 나가노지대는 샌빈센트선을 공격했다. 샌빈센트선에 배치된 필리핀군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일본군이 공격을 가하기도 전에 많은 병사들이 후방으로 도망치다가 장교에 의하여 다시 끌려왔다.


7일 아침이 되자 일본군은 샌빈센트선에 야포의 준비사격을 실시하고 제22비행단은 폭격을 가했다. 제22비행단은 이날 하루동안 169회에 걸쳐 제2군단 지역에만 92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비행제16전대는 20번에 걸쳐 78회 출격하여 주로 미-필리핀군의 차량을 상대로 15kg 짜리 폭탄 28발, 50kg 짜리 폭탄 278발, 100kg 짜리 폭탄 138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6번에 걸쳐 47회 출격하여 리마이산 부근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42발과 250kg 짜리 폭탄 99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9번에 걸쳐 44회 출격하여 미-필리핀군 포병과 캅카벤 시가지에 100kg 짜리 폭탄 135발과 250kg 짜리 폭탄 27발, 500kg 짜리 폭탄 14발을 투하했다. 일본기들은 뉴바기오에 있던 미-필리핀군의 제2야전병원에도 10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89명의 사망자와 10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공습 과정에서 격추된 비행기는 없었으나 미-필리핀군의 대공포에 맞아 17대가 피해를 입었다.


준비사격이 끝나자 일본군의 보병과 전차가 진격을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나가노지대가 전차를 앞세우고 샌빈센트강을 건너 C구역을 지키던 제32보병연대를 공격했다. 제32보병연대가 무너지자 나가노지대는 B구역으로 몰려갔다. B구역을 지키던 임시항공연대는 대전차무기가 없었으므로 일본군전차를 보자마자 철수했다. 그러자 A구역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PA) - 샌빈센트선의 좌익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US)와 다름 - 도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2필리핀군단의 원래 방어선을 모두 무너뜨렸다.


나가노지대가 제32보병연대를 공격하자 직접 공격을 받지 않은 제51전투단과 제31사단의 잔존병들도 방어선을 떠나 도망쳤다. 샌빈센트선을 지휘하던 제31사단장 블루멜 장군이 직접 소총을 들고 패잔병들을 위협하여 방어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로서 샌빈센트선의 우익이 무너졌다.


샌빈센트선의 좌익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US) 및 제57보병연대(PS)도 오전 7시부터 준비사격과 폭격을 얻어맞았다. 병사들은 방어선을 지켰으나 샌빈센트선의 우익이 무너진데 이어 오전 10시 30분에 일본제4사단좌익대가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하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자 샌빈센트선은 증발했다. 블루멜 장군은 남쪽의 마말라강에 의지하여 새 방어선을 펴기로 했다.


제대로 훈련받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미-필리핀군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던 스카우트와 미군도 와해되기 시작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약해진데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된 이래 거의 잠도 못자고 이동과 전투를 반복한 병사들은 한계에 달했다.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낙오하면서 편제가 흐트러졌다. 마말라강에 도착했을 때 제31 및 제57보병연대의 병력은 합쳐서 1,000명이 되지 않았다.


7일 오후에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제1군단의 예비대인 제26기병연대(PS)를 제2군단에 배속시켰고 제2군단장 파커 장군은 말을 모두 잃은 기병연대를 일선의 유일한 장성인 블루멜 장군에게 배속했다. 블루멜 장군은 제26기병연대장 리 반스 대령에게 마말라강 북쪽에 전개하여 후퇴하는 제31 및 제57보병연대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제31 및 제57보병연대가 제26기병연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마말라강 남쪽으로 후퇴하자마자 기병연대도 뒤따라 마말라강 남쪽으로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26기병연대제1대대는 일본군의 포격과 제16전대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블루멜 장군은 병력들을 급히 마말라강 남안에 배치했다. 마말라강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들은 제26기병연대, 제31 및 제57보병연대, 그리고 군단예비대에서 배속된 제14(PS) 및 제803(US) 공병대대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블루멜 장군은 생각이 바뀌었다. 마말라강은 북쪽이 높아 적이 남쪽의 방어선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블루멜의 부하들은 너무 지쳐 있었으며 대부분 전날인 6일 아침에 식사를 하고는 36시간 동안 쫄쫄 굶은 상태였다. 블루멜 장군은 부하들에게 최소한 식사를 하고 잠깐이라도 쉴 시간을 주기 위하여 남쪽으로 3,700m 떨어진 알랑간강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펴기로 결정했다. 제2군단사령부는 불루멜의 계획을 승인하고 A 및 B구역의 병력에게도 알랑간강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제2군단 병력이 후퇴하는 동안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1군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7일 오후 4시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1군단장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제11사단을 동원하여 8번 오솔길을 따라 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샌빈센트선과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내려질 당시 이미 샌빈센트선은 무너진 상태였으나 웨인라이트는 모르고 있었다. 반격명령를 받은 존스 장군은 난색을 표했다. 존스는 제11사단 병사들의 체력이 너무 떨어져 공격 준비를 갖추는 데만도 최소한 18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웨인라이트는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에게 결정을 맡겼다. 킹 소장은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반격명령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제1군단에게 비누안간강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제1군단은 D구역의 붕괴로 인해 노출된 우측면의 위협을 없애고 방어해야 할 해안선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웨인라이트 장군은 워싱턴에 전문을 보내어 방어선이 비누안간강과 알랑간강까지 내려옴으로써 미-필리핀군의 영역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보고했다. 파국이 눈앞이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장군은 제2군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린 이날 전투로 승리를 확정지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4월 3일의 공격 이래 제4사단은 전사 150명, 부상 250명을 기록했고 제65여단은 전사 77명, 부상 152명을 기록했으며 나가노지대는 사상자가 없었다. 일본군이 잡은 포로는 약 1,100명으로 제4사단이 약 1,000명, 제65여단이 111명을 잡았다. 제4사단의 노획품은 소총 1,500정, 경기관총 60정, 중기관총 50정, 대전차포 5문, 박격포 11문, 야포 1문이었다. 제65여단이 노획한 물품은 소총 252정, 경기관총 27정, 중기관총 10정, 대전차포 5문, 박격포 11문, 야포 및 산포 14문, 155mm 평사포 1문, 자동차 44대였다. 나가노지대의 노획품은 소총 7정이었다.


미-필리핀군이 전면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혼마 장군은 마말라강에서 재편성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했다. 7일밤 11시에 하달된 명령에 따르면 8일의 목표는 캅카벤이었다. 서쪽의 제65여단은 남하하여 리마이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앙의 제4사단은 캅카벤 서쪽의 리얼강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가노지대는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캅카벤 시가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4군 사령부가 있던 발랑가 부근에 집결한 제16사단은 나가노지대를 뒤따라 남하하여 마리벨스를 향한 최종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일 공격도 물론 야포의 준비사격과 제22비행단의 공습에 이어 실시할 것이었다. 포병사령관은 처음으로 야포가 사정거리 내로 도달하면 코레히도르에 대한 포격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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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4월 6일 : 반격실패


4월 3일에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방어선을 돌파하자 루손군 사령부는 반격을 가하여 방어선을 회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공격을 당한 제2필리핀군단의 예비대는 첫날부터 방어에 투입되었고 나머지 병력들은 방어에도 힘이 부치는 실정이라 반격은 루손군의 예비대를 중심으로 실시해야 했다. 루손군 예비대는 필리핀사단 소속의 제31보병연대(US), 제57보병연대(PS), 임시전차단, 그리고 제14(US) 및 제803공병대대(PS)로 이루어져 있었다. 필리핀사단의 3번째 연대로서 제1필리핀군단의 예비대였던 제45보병연대(PS)도 반격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이 공격했을 때 제31보병연대는 제2군단의 후방인 라마오에, 제45보병연대는 제1군단의 후방인 7번-9번 오솔길 교차점에 있었고 제57보병연대는 어느 군단으로든 갈 수 있게 후방에서 대기 중이었다. 제31보병연대는 일본군이 공격하자 라마오를 떠나 2번-10번 오솔길 교차점으로 향했다.


4일이 되자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제31보병연대, 제45보병연대, 그리고 임시전차단을 제2군단에 배속했다. 제57보병연대는 북상하여 제31보병연대가 떠난 라마오의 야영장에 주둔했으며 제14 및 제803공병대대는 공병작업을 중단하고 전투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일 저녁에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소장은 D구역 사령관 로우 준장에게 제31보병연대, 제45보병연대(제1대대 감편), 그리고 제194전차대대 C중대를 배속했다.


제45보병연대는 4일 오후 4시에 제1군단 후방의 주둔지를 떠나 밤새 제2군단 지역으로 들어와서 5일 아침에 제2군단 내의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에 도착했다.


제스퍼 브래디 중령이 지휘하는 제31보병연대는 제194전차대대 C중대와 함께 4일 오후 8시에 주둔지를 떠났다. 그들이 샌빈센트강에 도달하자 전방에서 내려오는 패잔병 때문에 전진이 곤란했다. 결국 오후 11시에 제31보병연대는 샌빈센트강에서 야영하기로 결정했다. 제194전차대대 C 중대는 제31보병연대와 헤어져 제45보병연대를 찾아 서쪽으로 향했다.


로우 장군은 6일 아침 6시부터 D구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3개의 오솔길을 따라 반격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동쪽에서는 제31보병연대가 4번 오솔길을 따라 북상할 것이었다. 제21사단의 잔존병이 공격에 합세할 것이었고 C구역의 포병대가 30분간의 준비사격을 가하여 지원할 것이었다.

중앙에서는 제33보병연대가 6번 오솔길을 따라 북상할 것이었다. 제42 및 제43보병연대의 잔존병 400명이 제33보병연대를 뒤따르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예비대 역할을 할 것이었다.

서쪽에서는 제45보병연대가 전차 1개 중대와 함께 29번 오솔길을 따라 제41보병연대의 예비방어선까지 북상할 계획이었다. 판틴간강을 건너 제1필리핀군단 지역으로 밀려나있던 제41보병연대도 반격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1보병연대는  6일 새벽에 판틴간강을 건너 기존의 연대예비선까지 진출한 다음 남쪽에서 올라오는 제45보병연대와 합류할 것이었다.

예비대는 제57보병연대로서 6번-8번 오솔길 교차점 부근에 주둔했다.


일본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도 자신의 공격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서쪽의 제65여단은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할 것이었다. 중앙과 동쪽을 담당한 제4사단은 사맛산 남쪽으로 공세를 지속함과 동시에 동쪽의 C 구역에도 공세를 가하여 카폿 남쪽 고지대를 점령할 것이었다. 동해안에서는 나가노지대가 동부도로 부근의 미-필리핀군에 압력을 가하면서 일부 병력을 탈리사이강 남안으로 보내어 제4사단의 공세를 지원할 것이었다. 6일 공격도 물론 포병과 제22비행단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일본군의 돌파.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4.html#24-1 P.423)


동쪽에서 예정된 제31보병연대의  반격은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했다. 제31보병연대의 공격 시작점은 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이었으므로 6일 아침까지 그곳에 도착해야 했다. 따라서 5일 저녁에 제31보병연대는 2번 오솔길과 샌빈센트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던 야영장을 떠나 공격시작점으로 향했다. 제31보병연대는 공격시작점인 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에서 동쪽으로 1,200m 떨어진 4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나자마자 일본군과 충돌했다. 일본제4사단좌익대의 선두가 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이미 점령한 후 429번 오솔길을 따라 동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4사단좌익대의 선두가 제31보병연대와 교전하는 동안 좌익대의 주력은 4번 오솔길 상에 남아있던 제21사단의 잔존병을 공격했다. 남북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제21사단의 잔존병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나 일부가 정글을 뚫고 탈출하여 제31보병연대에 도착했다. 제21사단의 잔존병을 만나본 제31보병연대장 브래디 중령은 현재 교전 중인 일본군보다 훨씬 강력한 일본군이 남하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좌익대 주력이 도착하여 공격에 가세하자 제31보병연대는 반격은 커녕 현 위치를 사수하는 일도 버겁게 되었다. 브래디 중령의 보고를 받은 로우 장군은 반격 명령을 철회했다. 브래디 중령은 제1대대를 우익에, 제2대대를 좌익에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대로 삼아 방어선을 정비했다. 6일 아침이 밝았을 때 제31보병연대는 공격시작점에서 동쪽으로 1,200m 떨어진 4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키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중앙의 반격도 실패했다. 중앙에서는 제33보병연대가 제42 및 제43연대의 잔존병과 함께 6번 오솔길을 따라 북상할 계획이었다. 6일 아침에 제42 및 제43연대의 잔존병이 제33보병연대가 있는 지점으로 북상하다가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공격하러 남하하던 제65여단 병력과 맞닥뜨렸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필리핀군은 와해되었다. 장교들의 노력도 헛되이 병사들은 말 그대로 정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42 및 제43보병연대의 북상을 기다리던 제33보병연대도 오후가 되자 사방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일본군이 제33보병연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반격은 커녕 졸지에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버린 제33보병연대는 6일 저녁이 되자 사주경계를 펴고 야영준비에 들어갔다. 


서쪽에서 시작한 반격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제41보병연대는 6일 새벽 2시에 판틴간강을 건너 29번 오솔길로 접근했다. 필리핀군은 도중에 아무런 경계조치 없이 자고 있던 일본군 1개 소대를 총검으로 조용히 처치한 후 계속 동진하여 6일 아침에 29번 오솔길에 도달했다. 그제서야 제41보병연대의 접근을 알아차린 일본제65여단은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했다. 제41보병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판틴간강까지 밀려나서 방어선을 펴고 남쪽에서 올라올 제45보병연대를 기다렸다.


제45보병연대도 6일 새벽 2시에 29번 오솔길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제194전차대대 C중대의 경전차가 합류했다. 2,300m 정도 북상한 오후 3시부터 제45보병연대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있던 제65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양쪽이 나무로 막힌 오솔길에서 전차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일본군 방어선을 뚫는데 실패한 제45보병연대는 저녁이 되자 전진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제45보병연대에서 북쪽으로 몇 km 떨어진 지점에서는 제41보병연대가 방어선을 펴고 제45보병연대의  북상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두 연대는 서로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이로써 서쪽의 반격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두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6일 저녁이 되자 반격이 실패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동쪽에서는 제31보병연대가 공격시작점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공격을 지원하기로 한 제21사단은 5일 - 6일 밤 사이에 와해되었다. 중앙에서도 공격을 지원해야 할 제42 및 제43연대의 잔존병들이 패배하여 편제가 붕괴되었고 제33보병연대는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서쪽에서는 제41 및 제45보병연대가 어느 정도 전진했으나 의미가 없었다. 이들도 다른 부대와 분리되어 포위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6일에도 승리했는데 특히 보조 역할을 맡은 제65여단이 크게 활약했다. 제65여단은 휘하 부대를 우익대와 좌익대로 나누어서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했다. 제65여단의 선두는 반격을 위하여 북상 중이던 제 42 및 제43여단의 잔존병을 쉽게 격파한 후에 D구역 사령부가 있던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점령했다. D구역 사령관 로우 준장은 황급히 서쪽으로 달아나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에 사령부를 차렸다. 예비대로서 6번-8번 오솔길 교차점 부근에 주둔 중이던 제57보병연대(PS)가 반격을 가했으나 탈환에 실패했다. 이로써 로우 장군은 동쪽에 있던 D구역 병력과 연결이 끊어졌다. 또한 6일 반격에서 유일하게 어느 정도 진격했던 제45보병연대도 해가 떨어지자 포위를 피하고 제57보병연대와의 연결을 확보하기 위하여 힘들여 진격했던 29번 오솔길을 되짚어 철수해야만 했다.


중앙과 동쪽을 담당한 일본제4사단도 성공적으로 진격했다. 제4사단장 기타노 중장은 동쪽의 카폿 남쪽 고지대 공격에 코우라 지로 대좌의 보병제37연대(1개 대대 감편)를 투입했다. 기타노 중장은 1월 말의 실패를 교훈삼아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측후방에서 들이쳤다. 보병제37연대는 6일 오전 10시 30분에 사맛산 북사면을 출발하여 북동쪽으로 공격했다. 선두에 선 전차제7연대 소속의 전차 7대가 접근하자 제31보병연대(US) 대전차중대 소속의 37mm 대전차포 2문이 불을 뿜었다. 이로써 일본전차의 진격을 잠깐 막았으나 대전차포탄이 없어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일본군 보병이 들이닥치자 제51전투단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제51전투단이 후퇴하자 바로 동쪽에 있던 제31사단(PA)도 같이 샌빈센트강 동쪽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C구역도 일본군에게 넘어가면서 2번 오솔길이 개방되었다. 이날 제4사단의 공격을 지원하던 전차제7연대장 소노다 신스케 대좌가 미군의 포격에 맞아 전사했다.


중앙을 공격한 제4사단의 주력은 44번-429번 오솔길 교차로를 지키고 있던 제31보병연대(US)를 집중공격했다. 하늘에서는 일본기가 하루 종일 미군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오후 3시가 되자 일본군의 압력이 견디기 어려운 수준으로 높아졌다. 이때 북쪽에 있던 제51전투단이 후퇴하면서 연결이 끊기자 제31보병연대장 브래디 중령은 부하들에게 샌빈센트강 동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31보병연대의 철수는 쉽지 않았다. 병사들의 체력이 떨어져 무거운 기관총을 가져갈 수 없었으므로 절벽에 던졌다. 후위를 맡은 K중대와 L중대는 추격하는 일본군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마 남지 않은 81mm 박격포탄을 한꺼번에 다 쐈다. 기세등등하게 추격하다가 갑자기 박격포탄 세례를 뒤집어 쓴 일본군이 움찔하는 동안 K중대와 L중대는 재빨리 철수했다. 이로써 샌빈센트강 서쪽과 사맛산 사이는 일본군이 장악했다.


동해안을 담당한 나가노지대는 카폿 동쪽으로 진출하여 제4사단의 좌익대와 연결했으며 서해안의 제16사단은 축차적으로 동진했다. 군포병대 주력은 카폿 남쪽 고지대 전투를 지원했으며 일부는 오리온 부근에서 대포병전을 수행했다. 독립중포병제2중대를 포함한 일부 부대는 코레히도르 포격에 대비하여 훈련을 실시했다.

제22비행단도 전투에 참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17번에 걸쳐 61회 출격하여 주로 리마이 부근의 포병 진지에 15kg 짜리 폭탄 8발, 50kg 짜리 폭탄 186발, 그리고 100kg  짜리 폭탄 84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5번에 걸쳐 45회 출격하여 리마이 부근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170발, 250kg 짜리 폭탄 42발 그리고 500kg 짜리 폭탄 14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5번에 걸쳐 37회 출격하여 오리온산 부근의 포병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170발과 250kg 짜리 폭탄 41발을 투하했다. 제22비행단은 이날 하루 동안 143회 출격하여 폭탄을 80톤 가까이 투하했다.


6일 오후 4시까지 미-필리핀군은 샌빈센트강 동안을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했다. B구역의 방어선에 이어진 북쪽은 제32보병연대(PA)가 담당했다. 이후 남서쪽으로 내려가면서 제51전투단의 잔존병, 제31사단(PA)의  잔존병, 제31보병연대(US), 제31공병대대, 그리고 제57보병연대(PS)제3대대의 순서였다. 샌빈센트선의 남서쪽에는 제57보병연대의 제1 및 제2대대가 있었다. 파커 장군은 군단예비대였던 제210 및 제202공병대대(PA)를 제57보병연대에 배속시켰다. 제57보병연대장 에드먼드 릴리 중령은 공병대대를 샌빈센트선과 연대 주력 사이에 투입하여 연결을 유지했다.


6일 저녁이 되었을 때 미-필리핀군의 처지는 암담했다. 반격은 실패한 반면 일본군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점령함으로써 D구역 사령관 로우 장군과 제41 및 제45보병연대를 제2군단의 주력과 분리시켰다. D 구역의 중요한 오솔길 3개(4번, 6번, 29번) 뿐 아니라 44번 오솔길과 2번 오솔길의 일부가 일본군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제2군단 방어선의 서쪽 절반을 무너뜨려 제1군단과 분리하고 사맛산을 점령했다. 만일 일본군이 동진하여 마닐라만에 도달하면 제2군단의 나머지 병력도 모두 포위당할 수 있었다.

제2군단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하여 응급조치로 샌빈센트강의 동쪽 제방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으나 병력은 대부분 지치고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2개 사단과 1개 연대가 분쇄되었으며 D구역 사령부와 2개 연대는 제2군단 주력과 분리되었다. 예비대도 대부분 투입되어 추가로 필요한 병력은 제1군단에서 빼와야만 했다.


미-필리핀군에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식량배급량이 늘어난 것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C레이션 5,000상자를 포함하여 대량의 식량을 바탄으로 보냈다. 이에 따라 하루 1인당 밀가루 배급량은 41g 에서 82g 으로, 쌀 배급량은 240g 에서 480g 으로, 통조림 고기 배급량은 35g 에서 70g 으로 늘어나는 등 하루배급량이 3월 22일 이후 배급량의 2배인 770g 으로 늘었다.  그래봐야 정량보다 한참 모자랐지만 하루 두끼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워싱턴과 호주에 전문을 보내어 바탄반도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했다. 마셜과 맥아더가 우울한 마음으로 웨인라이트의 전문을 읽는 동안에도 바탄반도의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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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D구역 붕괴


일본군의 4월 4일 공격도 강력한 준비사격 및 공습과 함께 시작되었다. 제22비행단은 이날도 133회 출격하여 75톤의 폭탄을 제2필리핀군단 지역에 투하했다. 비행제16전대는 12번에 걸쳐 54회 출격하여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50kg 짜리 폭탄 281발, 100kg 짜리 폭탄 15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5번에 걸쳐 45회 출격하여 오리온산과 사맛산 부근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286발과 250kg 짜리 폭탄 18발, 500kg 짜리 폭탄 2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5번에 걸쳐 34회 출격하여 제4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198발과 250kg 짜리 폭탄 24발을 투하했다.


일본군의 일제사격은 대부분 제42 및 제43보병연대의 잔존병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병사들은 전날에 이어 일본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방어선을 떠나 6번 오솔길을 따라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이들을 지휘하던 포티어 대령은 저녁에 남쪽으로 1,900m 떨어진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후퇴를 중단시키고 재편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 보병이 진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판틴간강과 캣몬강 유역을 지키던 병력 중 1/3이 탈락했다.


D 구역의 서쪽에서 29번 오솔길을 지키던 제41보병연대는 일본제65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기의 기총소사에 이어 오전 9시 30분부터 일본군이 방어선의 정면과 우측에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제41보병연대는 저녁때까지 남서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판틴간강을 건너 후퇴함으로써 29번 오솔길을 제65여단에게 내주었다. 그나마 편제를 유지하면서 후퇴하여 판틴간강 유역에 방어선을 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제65여단의 동쪽에서 공격한 제4사단의 공격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4사단우익대를 지휘하던 다니구치 장군은 오전 8시 30분에 전차제7연대를 동쪽으로 파견했다. D구역의 방어선은 이 지점에서 필러-바각 도로 북쪽에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본군 전차가 티아위르강을 건너 도로를 타고 제21보병연대의 후방으로 진출했다. 전날 방어선을 뺏겼던 제21보병연대의 좌측대대 잔존병이 만든 허술한 방어선이 뚫리자 제21보병연대의 우측대대도 방어선을 버리고 인접한 제23보병연대 구역으로 달아났다.  


보병제8연대장 모리타 대좌가 지휘하는 제4사단 좌익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익대는 오전 9시에  티아위르-탈리사이강을 건너 제23 및 제22보병연대 정면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쪽에서 몰려온 일본전차의 위협에 시달리던 제23보병연대는 정면에 다시 일본군 보병이 나타나자 전의를 잃었다. 오전 10시에 제23보병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졌고 이어서 D구역의 가장 동쪽을 지키던 제22보병연대도 방어선을 버리고 연대 예비방어선으로 물러섰다. 이로써 제4사단은 공격시간인 정오가 되기도 전에 D 구역의 기존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제4사단 우익대를 지휘하던 다니구치 장군은 공격준비에 시간이 걸려 공격시간을 정오에서 오후 1시로 늦추고 승인을 받았다. 이 내용은 포병에게는 전달되었으나 미군의 포격으로 전화선이 끊어져 좌익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좌익대가 정오에 진격을 시작했을 때 포병대가 일본군이 진격 중인 지역에 포격을 가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으나 일본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인사격에 의한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좌익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저녁이 될 때까지 약 1.6km 를 전진했다. 


오후 1시가 되자 우익대도 진격을 시작했다. 우익대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하여 저녁에 사맛산 북쪽 능선에 도달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예정보다 빨리 사맛산 정상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사맛산 서쪽에서 6번 오솔길을 막고 있던 제33보병연대는 이날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군이 제33보병연대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자 제33보병연대의 남쪽인 제6-제429오솔길 교차점에 제41야포연대의 1개 대대가, 그리고 남서쪽인 사맛산 남사면에 2개 대대가 방열했다.


4월 3일과 4일의 공격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이자 혼마 중장은 조공인 제16사단과 나가노지대를 예정보다 일찍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4일 밤에 제16사단은 전선을 제10수비대에 넘겨주고 동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나가노지대는 공격을 위하여 오리온 부근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사단은 재편성에 들어갔다. 4일 밤에 다니구치 장군은 우익대에서 전차제7연대와 보병제61연대의 1개 대대를 떼내어 좌익대로 옮겼다. 다니구치 장군은 좌익대를 강화한 후 스스로 지휘권을 잡았고 약화된 우익대의 지휘권은 보병제61연대장 사토 겐파치 대좌에게 넘겼다. 제4사단포병대는 탈리사이강을 건너 남하했고 사단예비대인 보병제37연대는 좌익대 후방에 대기했다. 제4사단의 주력이 된 좌익대는 5일 날이 밝으면 4번도로를 따라 진격할 것이었다. 우익대는 사맛산 정상을 점령한 후 남사면을 따라 진격하여 탈라강에 도달할 것이었다.


(일본군의 돌파.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4.html#24-1 P.423)


1942년 4월 5일 일요일 아침이 되자 일본군은 다시 준비사격과 공습을 가했다. 이날은 부활절로 포격과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미-필리핀군 병사들이 정글 속에서 열린 예배에 참가하고 있었다.


일본군 포병은 여전히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전방의 미-필리핀군 진지를 포격하는데 주력했다. 제22비행단도 전날에 이어 출격했다. 비행제16전대는 3번에 걸쳐 56회 출격하여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와 포병에게 50kg 짜리 폭탄 331발과 100kg 짜리 폭탄 78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5번에 걸쳐 45회 출격하여 사맛산 부근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208발, 250kg 짜리 폭탄 30발 그리고 500kg 짜리 폭탄 14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5번에 걸쳐 36회 출격하여 오리온산 부근의 미-필리핀군 진지와 포병에게 100kg 짜리 폭탄 145발과 250kg 짜리 폭탄 44발을 투하했다.


제4사단의 5일 공격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강화된 좌익대는 4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여 제21사단의 우익을 공격했다. 여기서 일본군은 제2차바탄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필리핀군은 사맛산 남사면에 방열한 제41포병연대 소속 2개 대대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방어선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일본군을 몇시간 동안 그 자리에 못박아 두었다. 좌익대는 그 자리에 못박힌 채 필리핀군의 포격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좌익대의 위기를 타개한 것은 사토 대좌가 지휘하던 우익대였다. 우익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하여 제21보병연대의 1개 소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오후 12시 50분에 사맛산 정상을 점령했다. 그러자 사맛산 남사면에 방열하여 좌익대를 못박아 두고 있던 제41포병연대의 2개 대대는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야포를 끌고 철수하기에는 이미 늦었으므로 병사들은 장비를 파괴하고 야포는 절벽에서 밀어버리고 철수했다.


야포의 위협이 사라지자 좌익대는 오후 2시에 진격을 재개했다. 제21사단이 야포의 지원없이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후 3시 30분에 일본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방어선이 무너졌고 병사들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사맛산 정상을 점령한 우익대는 남사면을 따라 진격하여 오후 4시 30분에 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에 있던 제21사단사령부를 공격했다. 기습을 당한 사령부 요원들은 혼비백산하여 429번 오솔길을 따라 서쪽으로 달아났다. 제21사단의 참모들은 대부분 무사히 탈출했으나 사단장 카핀핀 장군은 정신없는 탈출과정에서 자신의 참모들과 헤어져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날 일본군이 잡은 포로는 약 700명이다.

우익대의 일부 병력은 오후 5시에 사맛산 남서쪽의 6번-429번 오솔길 교차점 부근에 나타나 방금 그곳으로 도망쳐 온 제21사단사령부를 다시 쫓아내었다. 부근에 방열하고 있던 제41포병연대의 3번째 대대도 야포를 버려둔 채 달아났다.

5일 밤에 제4사단의 우익대와 좌익대는 4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에서 만났다.


이로써 일본군은 3일 만에 바탄반도 점령의 1단계를 완수했다. 강력한 포병과 항공대의 지원을 받은 일본군 보병과 전차는 방어선을 돌파하여 2개 사단을 박살내면서 D 구역을 유린하고 사맛산을 점령했다. 이제 미-필리핀군이 패배를 피하거나 최소한 늦추려면 굶주리고 질병에 시달리는 병력을 이끌고 결정적인 반격을 실시하여 성공시키거나 아니면 일본군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방어를 실시하여 진격을 저지하는 길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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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공격 개시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한 1942년 4월 3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인 성금요일(Good Friday)이었다. 이날 아침 사맛산 정상에 있던 제41사단(PA)포병대의 관측장교 2명은  일본군 전선에서 후방으로 약 3km - 5km 사이에서 일본군 포대를 30개 가까이 확인했다. 9시가 되자 일본군 야포가 효력사준비사격을 시작했고 10시부터 효력사를 시작했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제1차 사격을 실시했으며 30분 휴식 후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제2차 사격을 실시했다. 필리핀 전역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포격이었다.


기타지마 제14군포병사령관은 15cm 유탄포 5개 중대, 10cm 캐넌포 3개 중대, 15cm 캐넌포 2개 중대, 24cm 유탄포 5개 중대 합계 46문과 제4사단포병 3개 대대 36문, 그리고 제65여단포병 2개 대대 24문까지 106문을 직접 통제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도 자체 계획에 따라 준비사격에 동참하여 제14군의 화포 거의 모두가 준비사격에 참가했다.


제1차 사격에서 화포 1문당 발사수는 야포와 산포는 300발, 10cm 유탄포는 180발, 15cm 유탄포는 80발, 45식 24cm 유탄포는 40발, 96식 24cm 유탄포는 20발이었다. 제2차 사격의 화포 1문당 발사수는 야포와 산포는 100발, 10cm 유탄포는 60발, 15cm 유탄포는 20발, 45식 24cm 유탄포는 20발, 10cm 캐넌포는 30발, 15cm 캐넌포는 15발이었다. 10cm 및 15cm 캐넌포는 제1차 사격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미-필리핀군의 야포가 대응사격을 가하면 대포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포병전에 할당된 포탄은 1문당 10cm 캐넌포는 120발, 15cm 캐넌포는 105발이었다. 15cm 유탄포도 대포병전에 투입되었으며 할당된 포탄은 1문당 20발이었다. 


미카미 장군의 제22비행단도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12번에 걸쳐 59회 출격하여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50kg 짜리 폭탄 346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6번에 걸쳐 54회 출격하여 제4사단 및 제65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와 포병에게 100kg 짜리 폭탄 53발, 250kg 짜리 폭탄 108발 그리고 500kg 짜리 폭탄 18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6번에 걸쳐 34회 출격하여 제4사단 정면의 미-필리핀군 진지와 포병에게 100kg 짜리 폭탄 200발과 250kg 짜리 폭탄 24발을 투하했다. 제22비행단은 이날 하루 동안 147회 출격하여 8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경폭격기들은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저공으로 날면서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병사들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폭격기들은 진지와 함께 야포를 노렸다. 정찰기가 야포의 발사화염을 발견하면 폭격기가 그곳을 폭격했다. 미-필리핀군의 대공포 사수들은 포탄을 쏘아올릴 수 있는 최고 높이보다 900m 정도 높은 곳에서 빙빙 돌면서 정찰기의 보고를 기다리는 일본폭격기들을 보면서 이만 갈았다.


포격과 공습의 효과는 파멸적이었다. 5시간 동안 지속된 엄청난 파괴와 소음은 미-필리핀군 병사의 얼을 빼놓았다. 그들이 정성들여 만든 방어선은 엉망이 되었다. 전화선은 끊어졌으며 사탕수수밭과 대나무숲이 맹렬하게 불타면서 나는 연기가 사맛산에 있는 관측반의 시야를 가렸다.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한 미-필리핀군의 야포는 곧 일본군 야포와 폭격기의 반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오후 3시가 되자 포격과 공습은 남쪽으로 옮겨가고 일본군 보병과 전차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주공은 제2필리핀군단의 좌익인 D 구역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포격과 공습 또한 이곳에 집중되었다. D구역은 사맛산에서 판틴간강에 이르는 5,500m 구간으로 제21 및 제41사단(PA)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필리핀 사단장인 맥슨 로우 준장이었다.


(일본군의 돌파.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4.html#24-1 P.423)


D 구역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캣몬강이 흘렀는데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남북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3개가 있었다. 캣몬강과 판틴간강 사이에는 29번 오솔길이 있어 북쪽의 오리온-바각 도로와 남쪽에서 동서로 달리는 8번 오솔길을 연결했다. 캣몬강 동쪽에는 6번 오솔길이 역시 오리온-바각 도로와 8번 오솔길을 연결했고 사맛산 동쪽에는 D 구역와 C구역의 경계를 따라 남하하는 4번 오솔길이 있었다. 사맛산의 북서쪽에서 29번과 6번 오솔길을 동서로 연결하는 오솔길이 있었고 사맛산 남쪽에서는 6번과 4번 오솔길을 역시 동서로 연결하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둘 다 429번 오솔길이라고 불렀다.


D 구역의 동쪽은 마테오 카핀핀 준장의 제21사단(PA), 서쪽은 빈센트 림 준장의 제41사단(PA)이 맡았다. 제21사단은 동쪽으로부터 제22, 제23, 제21보병연대의 순으로 배치했으며 제21보병연대의 방어구역 내에 캣몬강이 있었다. 제41사단은 동쪽으로부터 제43, 제42, 제41보병연대의 순으로 배치했다. 각 연대의 후방 1,400m 지점에는 예비방어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일선 방어선에 배치되어 두 사단 모두 예비대가 부족했다.


D 구역을 공격한 일본군은 제65여단과 제4사단 우익대였다. 나라 중장의 제65여단은 판틴간강 서쪽에 전개한 우측지대를 제외하고 전 병력이 29번 오솔길을 방어하던 제42보병연대를 공격했다. 다니구치 장군이 지휘하는 제4사단 우익대는 보병제61연대, 보병제8연대의 1개대대, 전차제7연대, 포병 및 공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43 및 제21보병연대를 공격했다. 보병제8연대 중심의 제4사단 좌익대는 제22및 제23보병연대의 전방에 전개하고 있었으나 3일 공격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보병제142연대의 1개 대대를 기간으로 한 제65여단의 우측지대는 구포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판틴간강 동쪽 강변을 따라 남하하여 제1필리핀군단의 동쪽 끝을 지키던 제2필리핀경찰연대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우측지대는 경찰연대의 방어선을 뚫는데는 실패했지만 제1군단에게 위협을 가함으로써 제2군단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제65여단의 주력은 제41사단의 중앙으로 쇄도했다.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이 제42보병연대의 방어선에 도달했을 때 방어선은 비어 있었다. 필리핀군이 미리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제65여단은 오후 7시까지 29번 오솔길을 따라 약 900m 를 진격했다.


티아위르강을 건너 제43 및 제21보병연대를 공격한 제4사단우익대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티아위르강의 도하점에는 미-필리핀군의 대전차포 2문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준비사격 때 파괴되었다. 강을 건넌 일본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방어선에 들이닥치자 필리핀군은 총 몇 발을 쏜 이후에 그대로 달아났다. 제4사단 우익대도 오후7시까지 6번 오솔길을 따라 900m 정도 전진했다. 공격 첫날에 제65여단과 제4사단우익대는 일본군이 가장 긍정적으로 예측한 것보다도 훨씬 멀리 진격했다.


첫날의 전투는 준비사격 단계에서 결판났다. 일본군의 주공인 D 구역 중앙에 위치하여 가장 심한 포격을 얻어맞은 제42 및 제43보병연대와 제21보병연대의 왼쪽 대대는 일본군이 방어선에 도달하기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5시간에 걸친 준비사격과 공습에 얼이 빠진 필리핀군은 일본군을 보자마자 방어선을 버리고 달아났다. 제41공병대대(PA)의 헨리 해리스 중위는 도망치는 부하들에게 방어선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부하들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면서 그대로 후방으로 달아났다.


제41사단에서는 가장 서쪽에 있어서 준비사격을 덜 얻어맞은 제41보병연대만이 질서있게 후퇴했다. 제41보병연대는 인접한 제42보병연대로부터 대량으로 넘어오는 낙오병을 받아들이면서 후퇴하여 연대의 예비방어선인 29번과 429번 오솔길이 만나는 곳에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연대는 해가 졌을 때 8번 오솔길까지 후퇴했는데 아마도 잡음이 심한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명령을 잘못 알아들은 듯하다.


제21사단에서는 가장 왼쪽에 자리잡은 제21보병연대의 왼쪽 대대만이 붕괴되었다. 제21보병연대의 2개 대대중 오른쪽 대대가 굳건하게 버텨준 덕분에 제21보병연대장 윌리엄 와펜스타인 중령은 도망쳐오는 왼쪽 대대의 잔존병들을 재편성하여 사단의 좌익에 방어선을 펼 수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 보고를 받은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군단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33보병연대(PA, 제1대대 감편)를 D 구역 사령관인 로우 장군 휘하로 돌렸다. 연대장 스탠리 홈스 소령은 4일 아침까지 사맛산 서쪽의 6번 도로에 방어선을 펴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우 장군은 완전히 붕괴된 제42보병연대는 포기하더라도 제43보병연대는 재건하여 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3일 저녁에 D구역의 고참 장교인 멜컴 포티어 대령이 제43보병연대를 찾아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북상했다. D 구역의 작전참모 로버트 호프먼 대령은 제41보병연대가 8번 오솔길까지 남하한 것을 알아내고 다시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로우 장군은 제41, 제43 및 제33보병연대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다.


혼마 중장은 전선에서 잇따라 들어오는 승전보를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다음날은 공격을 가하지 않고 부대를 추스린 다음 5일에 다시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성공에 고무된 혼마 장군은 3일 저녁에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제65여단과 제4사단에게 다음날도 공격을 속행하라고 명령했다. 4일 공격도 충분한 준비사격과 공습 이후에 실시할 것이었다.


제65여단과 제4사단은 기존의 공격계획을 앞당겼다. 제65여단은 판틴간강 계곡과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할 것이었다. 제4사단우익대는 2개로 나뉘어 주력은 정오부터 캣몬강 유역을 따라 남하하고 전차제7연대는 동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3일 공격에 참가하지 않은 모리타 대좌의 좌익대는 타이위르-탈리사이강을 오전 10시에 건넌 다음 정오에 제22및 제23보병연대(PA)의 방어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남하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하여 보병연대 3개로 방어선을 펴려는 로우 장군의 계획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제43보병연대를 재건한다는 포티어 대령의 임무는 쉽지 않았다. 그는 3일 밤에 사맛산 서쪽에서 제43보병연대 뿐 아니라 제42보병연대의 낙오병까지 1,000명 이상을 발견했으나 모두들 너무나 겁을 먹고 사기가 꺾여 있어 장교의 집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포티어 대령은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여 그걸 마시려고 몰려든 수백명을 설득하여 겨우 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제41보병연대의 경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호프먼 대령으로부터 다시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는 밤새 북상하여 4일 오전 9시 30분에 29번 오솔길과 판틴간강 사이의 예비방어선에 도착했다.

홈스 소령의 제33보병연대(PA)는 병력이 600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많은 숫자가 방금 퇴원한 상태였다. 제33보병연대는 6번-429번 오솔길 교차점에서 1.6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서 대전차장애물을 만들고 있던 제41공병대대의 1개 소대를 발견했다. 홈스 소령은 그곳에 방어선을 펴기로 하고 4일 아침이 될 때까지 6번 오솔길을 따라 종심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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