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민다나오와 비사야
개전 이래 4개월 동안 혼마 장군에게는 루손과 남부 필리핀을 동시에 공격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말에 민다나오의 다바오를 점령한 이래 남부 필리핀에 대한 작전은 항공기와 함정에 의한 정찰 정도로 제한했다. 하지만 1942년 3월 말이 되자 혼마 장군은 바탄 뿐 아니라 남부 필리핀까지 공격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루손군이 항복한 다음날인 4월 10일부터 남부 필리핀에 대해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민다나오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3 P.509)
필리핀제도 남쪽에 있는 민다나오의 면적은 97,530㎢ 로 루손에 이어 필리핀에서 두번째로 큰 섬이다. 서쪽으로는 잠보앙가 반도가 술루해를 향하여 뻗어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디우아타 산맥이 달리고 있다.
민다나오의 교통은 루손에 비해 크게 열악했다. 철도는 없었으며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2개뿐이었다. 하나는 1번 도로로서 민다나오 남동해안의 다바오에서 시작하여 디고스로 간 다음 민다나오 남쪽을 관통하여 서해안의 코타바토에 도달했다. 이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 다음 북해안을 따라 북서쪽 끝의 수리가오까지 이어져 있었다. 3번 도로는 1번 도로의 북쪽인 카가얀-타클로반과 남쪽의 카바칸을 잇는 길이 160km 짜리 도로로서 고등판무관의 이름을 따서 사이어 하이웨이라고 불렀다. 대체적으로 북쪽의 도로는 포장되어 전천후로 차량운행이 가능했으나 남쪽 도로는 비가 많이 오면 차량운행이 불가능했다.
민다나오의 또다른 중요한 교통수단은 작은 배로서 해안은 물론 항해가 가능한 아구산강과 민다나오강을 따라 내륙까지 운항했다. 아구산 강은 디우아타 산맥의 서쪽 기슭을 따라 달리다가 북해안에서 민다나오해로 흘러 들어간다. 민다나오 강은 남쪽에서 1번 도로의 남쪽을 달려 코타바토에서 모로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필리핀. 웨스턴 비사야라고 표시된 섬이 파나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dministrative_divisions_of_the_Philippines)
루손과 민다나오 사이를 비사야라고 부르며 중요한 섬은 세부, 파나이,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그리고 보홀이다. 섬들은 대부분 중앙의 산지와 해안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섬 중앙에 평야를 가진 파나이가 5개 섬 중 가장 평평한 편이고 세부가 가장 험하다. 도로망은 대부분 해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둘러싼 간선도로가 있고 거기서 지선이 나와 내륙의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형태였다. 도로는 일부 구간만 전천후로 사용이 가능했고 대부분 구간은 비가 많이 오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세부, 네그로스, 그리고 파나이에는 짧은 철도가 있었다. 작은 배들이 빈약한 도로와 철도의 수송력을 보충하는 동시에 비사야의 다른 섬과 루손 및 민다나오를 연결했다.
비사야와 민다나오의 방어를 맡은 것은 세부에 사령부를 둔 윌리엄 샤프 준장의 비사야-민다나오군으로 병력은 대부분 필리핀 육군이었다. 비사야-민다나오 지역에서 편성된 사단은 5개였으나 제61, 제81, 및 제101사단만 남고 제71 및 제91사단은 가장 나중에 편성된 제73및 제93보병연대를 남겨두고 루손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현지에서 편성한 다수의 임시부대와 경찰대 일부를 합친 병력을 개전 당시 샤프 장군이 이끌고 있었다.
비사야-민다나오군도 루손에서 싸우던 병사들과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훈련이 부족했으며 군복, 담요, 모기장을 비롯한 모든 장비가 모자랐다. 병사들은 엔필드 소총을 지급받았으나 많은 경우 사용법을 잘 몰랐으며 상태가 나쁜 총도 많았다. 30구경 및 50구경 기관총도 있었으나 역시 상태가 나쁜 경우가 많았으며 일부는 폐기해야 했다. 모든 무기의 예비부품이 모자라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많은 무기를 버려야 했다. 대전차포는 없었으며 수류탄, 방독면, 철모도 모자랐고 탄약도 많이 부족했다.
무기의 부족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야포였다. 개전 당시 샤프 장군에게는 야포가 1문도 없어서 사단포병대는 이름과 달리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2월 12일에 그는 2.95인치 야포 8문을 받았는데 그중 3문은 2주일 후의 다바오 함락 당시 잃었다. 샤프 장군은 나머지 5문으로 전역이 끝날 때까지 버텨야했다.
샤프 장군은 부족한 물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필리핀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들을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 신발, 내복, 수류탄 및 엔필드 소총의 추출기 등을 생산했으나 소총탄이나 야포의 부품은 생산이 불가능했다.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원래 임무는 남부 필리핀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전쟁이 나자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따라서 샤프 장군은 휘하 병력이 주둔한 섬마다 사령부를 만들고 일본군이 상륙하면 내륙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위하여 식량, 탄약, 연료 및 장비를 내륙으로 옮겼으며 이동이 불가능한 보급품이나 장비는 파괴했다.
1942년 1월 초에 샤프 장군은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세부를 떠나 민다나오로 이동하면서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주력을 델몬테 비행장이 있는 민다나오로 집결시켰다. 이제 비사야에서 병력이 주둔하는 섬은 세부, 파나이,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그리고 보홀의 6개로 줄어들었다.
개전 이래 샤프 장군의 담당 지역은 점차 줄어들었다. 2월 4일부터 극동미육군사령부는 호주에서 오는 보급품의 경유지인 파나이와 민도로를 샤프 장군에게서 떼내어 직접 관리했다. 맥아더는 탈출하기 1주일 전인 3월 초에 비사야 지역을 샤프 장군에게서 떼어내 6개 섬을 담당하는 5개 사령부로 이루어진 비사야군을 창설했다. 비사야군 사령관 브래포드 치노웨스 준장은 원래 파나이를 담당했으나 비사야군 창설과 함께 세부로 옮겼다. 치노웨스 장군은 이제 민다나오군 사령관이 된 샤프 장군과 동격으로 코레히도르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았다. 비사야군의 분리는 샤프 장군으로 하여금 비사야 방어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민다나오 방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으며 이는 맥아더가 민다나오를 향후 필리핀 탈환을 위한 기지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군은 처음에는 남부 필리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개전 당시 제14군은 마닐라 점령에 집중했으며 남부 필리핀에 대해서는 마닐라 점령 이후 적당한 시기에 점령한다는 간단한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42년 1월 말에 실시한 제14군의 바탄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대본영은 하루속히 남부 필리핀을 포함하여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라고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바탄을 공략할 병력과 별도로 남부 필리핀에 투입할 병력도 파견했다.
남부 필리핀 공략을 위하여 증원된 부대는 가와구치 지대와 가와무라 지대였다. 보병제35여단사령부와 보병제124연대로 이루어진 가와구치 지대는 보병제35여단장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의 지휘 아래 3월 23일에 보르네오를 떠나 4월 1일에 링가옌만에 도착했다.
보병제9여단사령부와 보병제41연대로 이루어진 가와무라 지대는 보병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의 지휘 아래 3월 27일에 싱가포르를 떠나 4월 5일에 링가옌만에 도착했다.
혼마 장군은 가와구치 지대, 가와무라 지대, 그리고 다바오에 주둔 중이던 미우라 지대를 동원하여 남부 필리핀을 공격했다.
'1941년 및 그 이전 > 필리핀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핀 함락(73)-민다나오 함락(2) (0) | 2018.06.10 |
---|---|
필리핀 함락(71)-비사야 함락 (0) | 2018.06.09 |
필리핀 함락(69)-공습 하의 생활 (0) | 2018.06.08 |
필리핀 함락(68)-코레히도르 공습 및 포격 (0) | 2018.06.08 |
필리핀 함락(67)-코레히도르 (0) | 2018.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