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민다나오 함락(2) - 라나오 지구


1942년 4월 29일 아침에 코타바토 북쪽의 파랑에 상륙한 가와구치 지대의 주력은 해안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파랑을 지키던 부대는 칼릭스토 드쿠 대령의 제1사단제2보병연대(PA)로서 총 병력은 880명이었으나 약 300명은 말라리아로 입원중이었다. 해안에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던 필리핀군은 일본군이 상륙하려 하자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일본군은 파랑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이곳을 지키던 필리핀군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코타바토에 상륙한 1개 대대와 연결했다. 드쿠 대령의 부대는 오전 11시까지 파랑을 지켰으나 이후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내륙으로 3km 들어가서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이로써 파랑이 개방되었으며 그날 오후에 일본군이 돌아와 파랑을 점령했다.


(민다나오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3 P.509)

 


파랑을 점령한 가와구치 지대의 다음 목표는 북쪽으로 35km 떨어진 말라방이었다. 말라방을 지키던 부대는 유진 미첼 대령의 제61보병연대(PA)였다. 유진 대령은 말라방 북쪽을 흐르는 마탈링강의 북안을 따라 방어선을 폈다. 2.95인치 산포 2문을 가진 제81포병연대(PA)가 화력지원을 맡았다. 


가와구치 장군은 병사의 피로를 덜기 위하여 도보로 행군하지 않고 파랑에서 수송선에 병사를 태워 북상한 후 30일 새벽 3시에 말라방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날이 밝자 마탈링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리핀군은 힘껏 싸웠으나 정오경에 일본군이 마탈링선의 좌익을 점령하여 돌출부를 만들었다. 유진 대령은 오후 2시에 좌익을 탈환하기 위하여 반격을 실시했으나 실패했고 일본군은 더 많은 병력을 돌출부에 투입했다.


이제 좌익 돌출부가 전투의 초점이 되었다. 좌익을 되찾지 못하면 마탈링선을 지킬 수 없었다. 유진 대령은 예비대는 물론 우익을 지키던 병력까지 모두 투입하여 좌익을 점거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하자 마탈링선을 포기해야 했다. 오후 8시에 필리핀군은 마탈링선을 떠나 1번도로를 따라 6km 떨어진 후방진지로 후퇴했다. 후퇴 과정에서 좌익을 맡았던 대대는 일본군에 막혀 1번도로로 나가지 못하고 작은 오솔길을 따라 후퇴함으로써 본대와 헤어졌다.


일본군은 5월 1일 아침 7시 30분에 새로운 방어선을 공격했다. 필리핀군은 다시 패하여 오전 10시 30분에 방어선을 버리고 8km 떨어진 새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철수 과정에서 1개 중대를 잃었으나 새로운 방어선에 도착하자 제84임시보병연대로부터 2개 중대가 증원되었으며 마탈링선에서 철수할 때 헤어졌던 대대의 생존자 120명도 도착하여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라나오지구사령관 가이 포트 준장은 유진 대령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선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1일 오후 1시에 방어선에 도달했다. 보병이 공격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군의 야포와 박격포가 공격준비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수시간 동안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후 해질녘에 총공격을 실시했다. 필리핀군은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오후 11시에 방어선이 점령되었을 때 제61보병연대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유진 대령은 90명의 부하를 데리고 1번도로를 따라 몇 km 철수한 후 도로봉쇄점을 설치하려 했다. 그러나 오전 2시 30분에 트럭을 탄 일본군이 들이닥쳐 참호를 파고 있던 필리핀군을 쫓아버리고 유진 대령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일본군은 라나오군의 2개 보병연대 중 하나인 제61보병연대를 와해시키고 연대장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제1대대장 야마다 소좌를 포함하여 약 30명이었다.


이제 라나오군에 남은 전력은 로버트 베시 중령의 제73보병연대(PA) 뿐이었다. 베시 중령은 휘하의 2개 대대와 남쪽으로부터 도망쳐 온 제61보병연대의 패잔병을 모아 라나오 호수 서쪽의 바콜로드에 방어선을 폈다. 나머지 1개 대대는 라나오지구의 북해안을 방어하고 있었다. 필리핀군은 라나오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얕은 강의 북안에 방어선을 폈으며 다리는 폭파했다. 연대의 유일한 야포인 2.95인치 산포 1문이 화력지원을 맡았다.


5월 2일 아침에 라나오 호수 남안의 거내시에 도착한 일본군은 휴식과 재정비를 마치고 3일 새벽에 경전차들을 앞세운 채 트럭을 타고 바콜로드를 향하여 출발했다. 3일 오전 8시에 전차는 폭파된 다리에 도달했다. 선두전차가 얕은 강물로 뛰어들자 2.95인치 산포가 포탄을 명중시켜 파괴했다. 그러자 나머지 전차는 감히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 기고만장하여 트럭을 타고 거침없이 진격하던 일본군 보병은 선두에 섰던 전차대가 갑자기 멈추자 필리핀군 방어선 바로 앞에서 황급히 트럭에서 내렸고 그 과정에서 필리핀군의 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야포가 도착하자 상황은 변했다. 야포가 필리핀군을 그 자리에 못박아두는 동안 일본정찰기가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유심히 살펴 방어선의 서쪽 끝을 확인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방어선의 서쪽으로 우회하여 제73보병연대를 포위하려고 했다. 결국 정오에 베시 중령은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다.


제73보병연대는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3일 밤에 라나오 호수 북쪽의 마라위에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일본군은 추격하지 않고 그날 마카잘라만에 상륙한 가와무라 지대와 연결하기 위하여 북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트럭에 올라탄 가와구치 지대는 민다나오 북해안의 일리간을 거쳐 6일에 카가얀에 도착함으로써 가와무라 지대와 연결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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