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민다나오 함락(3) - 카가얀 지구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 델몬테 비행장, 그리고 샤프 장군의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부가 있는 중요한 카가얀 지구의 방어를 위하여 샤프 장군은 제102사단(PA)과 민다나오군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102사단은 제103보병연대와 제61 및 제81야포연대(보병으로 전환)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02사단장이자 지구사령관인 윌리엄 모스 대령은 주력을 타골론과 카가얀 사이의 마칼라자만 해안선에 투입했다. 타골론과 사어 하이웨이에 이르는 6.4km 길이의 우익은 존 우드브리지 중령의 제81야포연대가 맡았다. 우드브리지 중령에게는 제30폭격비행대대(US) 요원 65명이 증원되었다. 사어 하이웨이에서 커그만강 사이의 6.4km에 이르는 중앙은 하이럼 타킹턴 중령의 제61야포연대가 맡았고 커그만강에서 카가얀강에 이르는 좌익은 조셉 웹 소령의 제103보병연대가 담당했다.
(민다나오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3 P.509)
가와무라 지대는 제15구축대(오야시오, 구로시오)의 호위를 받으면서 1942년 5월 1일에 일로일로를 출항했다.
2일 오후에 미군정찰기가 가와무라 지대를 싣고 남하중인 일본선단을 발견했다. 병사들에게는 비상이 발령되었고 그날 밤에 선단이 마칼라자만에 진입하자 폭파계획이 실행되었다. 일본군은 오야시오, 구로시오의 화력지원 아래 3일 새벽 1시부터 방어선의 동쪽 끝인 타골론 부근에 상륙을 시작했다. 주력은 타골론에서 5km 정도 남쪽인 타골론강 하구에 상륙했고 일부는 타골론에 직접 상륙했다. 타골론을 지키던 필리핀군은 방어선 정면에 상륙을 감행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남쪽으로부터 일본군 주력이 달려오자 철수해야 했다. 일본군은 오전 중에 타골론과 사어 하이웨이 사이의 해안을 확보했다.
샤프 장군은 사어 하이웨이를 지키기 위하여 민다나오군에 남은 마지막 야포인 2.95인치 산포 3문을 보유한 폴 필립스 소령의 분견대와 제62 및 제93보병연대(PA)를 파견했다. 2.95인치 산포 분견대는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에 자리잡고는 포격으로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압력에 밀려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을 내어주고 640m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방어선을 폈다. 3일 오후가 되자 제93보병연대의 선두가 도착했으며 해가 질 때까지 연대 주력이 도착했다. 제61보병연대는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2개 보병연대는 2.95인치 산포 분견대의 화력 지원 아래 사어 하이웨이를 가로막는 강력한 방어선을 폈다.
해안의 상황은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안을 방어하던 제61및 제81야포연대와 제102보병연대는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제81야포연대는 철수 과정에서 80% 의 병력을 잃었으며 제102보병연대는 일본군의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탈출하다가 편제가 무너졌다. 3일 저녁이 되자 제103사단은 해안에서 10km 를 후퇴하여 사어 하이웨이를 따라 방어선을 폈다.
3일 저녁에 샤프 장군은 모스, 우드브리지, 그리고 웹과 회의를 한 후 방어에 유리한 망기마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사어 하이웨이는 탱쿨란에서 2개로 갈라져 북쪽 가지는 달리리그, 남쪽 가지는 푼티안을 거쳐 다시 합류하는데 달리리그와 푼티안의 전방에는 망기마 계곡과 망기마강이 있어 강력한 자연장애물이 되었다.
방어해야 할 지점이 둘이었으므로 샤프 장군은 휘하 병력을 나누어 달리리그 지구과 푼티안 지구를 설정했다. 제102사단장 모스 대령이 지휘하는 달리리그군은 제62보병연대, 제81야포연대, 2.95인치 산포 분견대, 그리고 제43보병연대(PS) 소속의 필리핀스카우트 중대 2개로 이루어졌다. 윌리엄 달튼 대령이 지휘하는 푼티안군은 제61야포연대와 제93보병연대로 이루어졌다. 해안에서의 철수 과정에서 편제가 무너진 제102보병연대의 잔존병은 몇 개의 소부대로 재편되어 망기마 계곡 방어에 투입되었다.
망기마선으로의 후퇴는 3일 밤11시에 시작되어 4일 아침에 끝났다. 망기마선으로 후퇴함으로써 샤프 장군은 델몬테 비행장을 포기했다.
달리리그 지구에서는 앨런 세이어 중령의 제62보병연대가 망기마 계곡에 배치되었고 2.95인치 산포 분견대가 화력지원을 맡았다. 제43보병연대(PS)의 C 및 E중대와 제81야포연대는 예비대로서 달리리그에 주둔했다. 제81야포연대의 병력은 일본군 상륙 당시 1,000명에 달했으나 이때쯤엔 2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남쪽 푼티안 지구에서도 병력들이 참호를 파고 방어준비를 마쳤다.
일본군은 5월 4일과 5일 이틀을 소비하여 공격준비를 한 후 6일 아침부터 진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선두는 6일 오전에 탱쿨란을 통과하여 북쪽 가지를 따라 진격하다가 달리리그 전방의 망기마 계곡에서 제61보병연대의 방어선을 만나 멈추었다. 남쪽으로 향한 일부 병력도 역시 푼티안 전방에서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만나 멈추었다.
가와무라 장군은 남쪽 가지의 푼티안은 소수 병력으로 견제만 하고 주력을 북쪽 가지에 투입하여 달리리그를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일본군은 서둘지 않고 먼저 포격으로 방어선을 약화시켰다. 일본군 포병대가 6일 저녁에 탱쿨란에 도착하여 포격준비를 마쳤으며 포격은 7일과 8일 이틀 동안 공습과 함께 지속되었다. 충분히 포격을 가했다고 생각한 가와무라 장군은 8일 저녁 7시부터 보병을 내보내어 방어선에 침투를 시도했다. 침투에 성공한 일본군이 뒤에서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밤새 크고 작은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연대 주력은 이틀간의 포격과 공습에 시달린 후에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일본군이 총공격을 가하자 더이상 견뎌내지 못했다. 9일 오전 11시 30분에 제62보병연대는 방어선을 떠나 달리리그를 거쳐 동쪽으로 도망쳤다. 달리리그를 지키던 필리핀스카우트 중대 2개는 앨런 펙 소령의 지휘 아래 제62보병연대가 빠져나갈 때까지 시가지를 지키다가 포위당하기 직전에 철수했다.
필리핀군이 도망치는 길은 탁 트인 도로였다. 일본군의 야포와 공습, 그리고 추격하는 일본군의 소화기 사격을 받아가며 도망치던 달리리그군은 와해되었다. 저녁이 되자 2.95인치 산포 분견대 150명을 제외한 모든 부대의 편제가 무너졌다. 이제 사어 하이웨이의 북쪽 가지는 일본군에게 개방되었다.
남쪽의 푼티안군은 여전히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으나 북쪽 가지를 통과한 일본군이 뒤쪽에서 공격하면 속절없이 포위되어 궤멸될 것이었다. 이제 망기마선을 지킬 희망은 사라졌으며 샤프 장군에게 남은 길은 항복 아니면 게릴라전 뿐이었다. 이로써 민다나오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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