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코레히도르 공격계획


1942년 4월 9일에 루손군이 항복하자 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즉시 코레히도르 공격을 준비했다. 혼마 중장은 루손군이 항복한 당일인 9일 정오에 제4사단장 기타노 겐조 중장에게 코레히도르 상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레히도르 상륙은 5월 이전에는 실시할 수 없었다. 상륙주정을 모아야했고 무기와 장비는 재정비해야 했다. 바탄전투로 지친 병력은 휴식을 취하고 재편성한 다음 상륙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야포와 비행기는 코레히도르의 방어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상륙의 주력을 맡은 제4사단은 캅카벤 부근에 집결하여 상륙훈련에 몰두했다. 제4사단은 보병 9개 대대, 야포병 3개 대대, 산포병 및 구포 각 1개 대대, 박격 1개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기에 제16사단으로부터 전차제7연대, 산포병제51연대제3대대, 나가노지대로부터 독립구포제2대대, 그리고 제14군으로부터 독립구포제14대대, 박격1개 중대를 배속받았다.

제16사단은 남쪽 카비테로 가서 엘프레일섬과 카라바오섬에 위장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쪽으로 떠나기 전에 제16사단은 제4사단에게 전차제7연대, 산포병제51연대제3대대를 넘겼고 군포병대에 15cm 유탄포 1개 대대와 제22야포연대를 넘겼다. 또한 바탄반도의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보병단장이 지휘하는 보병제20연대를 제14군에 넘겼다. 대신 수색제16연대가 복귀했으며 10cm 캐넌포를 장비한 야전중포병제8연대의 1개 중대도 복귀하여 카비테  부근의 터네이트에 방열했다.

제65여단은 북부 루손 및 중부 루손 동부지역에 대한 치안확보 임무를 맡았으며 제21보병단(나가노지대)은 중부 루손 서부지역에 대한 치안확보임무를 맡았다.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항공기와 야포가 코레히도르의 방어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제22비행단은 재정비를 위하여 코레히도르에 대한 정찰을 제외하고 2주간 활동을 중지했다. 다만 해군은 이 기간에도 육상공격기를 내보내어 꾸준하게 폭격했다.

기타지마 중장의 제14군 포병대도 코레히도르를 포격했다. 기타지마 중장은 야포들을 캅카벤 주변과 마리벨스 북쪽의 고지대에 전개했다. 대포병사격을 피하기 위하여 야포는 분산배치했으며 주의깊게 위장했다.


제14군포병대는 24cm 유탄포 5개 중대, 15cm 캐넌포 3개 중대, 15cm 유탄포 5개 중대, 10cm 캐넌포  3개 중대, 10cm 유탄포 5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여기에 제16사단으로부터 15cm 유탄포 1개 중대와 야포병제22연대(제1대대의 1개 중대 감편)가 배속되었다. 군포병대에는 이외에도 기구중대, 포병정보연대, 그리고 견인중대가 있었다. 기구중대는 병력 150명, 차량 25대, 그리고 관측용 기구 1개로 이루어졌다. 중좌가 지휘하는 포병정보연대는 본부, 음향 및 섬광분석반, 측량반, 9개팀으로 이루어진 제도반, 그리고 6개 청음초를 가진 청음반으로 이루어져 675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14군포병대의 야포 수는 116문으로 상세는 다음과 같다.


24cm 유탄포 10문

15cm 캐넌포 10문

15cm 유탄포 36문

10cm 캐넌포 16문

10cm 유탄포 12문

7.5cm 야포 32문


공격준비 기간중 혼마 장군을 괴롭힌 2가지의 문제는 상륙주정 확보와 말라리아였다.


제14군의 상륙주정은 주로 링가옌만과 올롱가포에 있었는데 소형주정만 육지로 수송이 가능했고 대형 주정은 코레히도로와 마리벨스 사이의 북쪽 수로를 통해 마닐라만으로 들여와야 했다. 낮에는 코레히도르의 해안포가 주정의 통과를 막을 것이었다. 밤에는 사정이 나았으나 소음은 숨길 수 없었다.

제14군이 고민하고 있던 4월 11일에 해군이 대낮에 발동정을 북쪽 수로를 통해 마닐라만에 진입시키려고 시도했다. 오후 6시에 코레히도르의 해안포가 불을 뿜자 주정은 대파되어 철수했다. 이로써 대낮에 북쪽 수로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혼마 장군은 해군의 경거망동 때문에 적이 주정 통과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크게 화를 냈다.


제14군은 야간에 야포사격과 공습으로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주의를 분산시키면서 소수의 주정을 북쪽수로를 통하여 마닐라만으로 진입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다. 4월 13일에 독립공병연대가 북쪽 수로의 양안에 대해 지형과 해면상황을 면밀히 관찰한 후 14일 밤에 첫 시도가 있었다. 제14군포병대, 제4사단포병대, 그리고 제22비행단의 비행기들이 코레히도르를 공격하여 주의를 분산시키는 사이 공병제22연대 소속의 대발 5척이 북쪽 수로를 통하여 무사히 마닐라만에 진입했다. 이후 같은 방식으로 다수의 주정이 같은 방식으로 마닐라만에 진입했다.

북쪽 수로를 통하여 마닐라만에 진입한 주정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4월 14일 대발 5척

16일 대발 10척

17일 대발 5척, 특대발 5척, 장갑정 3척

27일 대발 5척,

5월 3일 대발 10척


올롱가포에 있던 소발 22척은  4월 12일에서 21일에 걸쳐 제14군포병대의 견인차량을 이용하여 바탄반도 동해안의 오라니로 수송되었다. 


혼마 장군 입장에서는 말라리아도 골칫거리였다. 일본군의 입원환자는 4월 3일 현재 15,500 명이었다. 그런데 의약품과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루손군의 항복으로 일본군이 말라리아가 득실대는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입원환자가 30,600명으로 급증했는데 28,000명이 말라리아 환자였다. 특히 코레히도르 상륙을 담당한 제4사단이 가장 큰 피해를 입어 4월 중순이 되자 전투 가능한 병력이 사단의 1/3로 줄어들었으며 1개 연대가 상륙훈련을 하는데 250명만이 참가한 적도 있었다. 혼마 장군이 거듭 요청한 끝에 4월 말에 퀴닌 300,000정이 비행기에 실려 필리핀에 도착했다. 이로써 5월 초로 예정된 공격에 맞추어 말라리아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제14군은 4월 28일에 코레히도르 상륙을 위한 야전명령을 하달했으나 날짜는 확정하지 않았다. 날짜를 정하지 않은 이유는 보안문제도 있었지만 상륙주정의 확보가 느려지고 말라리아가 창궐하면서 4월 28일의 시점에서는 언제 공격이 가능할지 혼마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5월 초가 되어 상륙주정이 확보되고 일본에서 보내준 퀴닌으로 말라리아도 잦아들자 혼마 장군은 5월 2일에 명령을 내려 공격일을 5월 5일로 확정했다.


일본군은 포로를 심문하여 코레히도르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 그들은 중요한 해안포대의 위치를 2개 빼고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근접전용 포대의 위치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중요 시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섬의 급수시설, 통신시설, 도로망과 철도망, 발전소, 저장소, 막사의 위치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사용한 지도는 정확도와 자세함에서 미군의 지도와 거의 비슷했다.


일본군은 보병의 방어태세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며 말린타 터널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말린타 터널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여 코레히도르와 바탄반도를 잇는 해저터널이 있다고 믿었다. 심문관은 바탄반도에서 잡은 포로에게 해저터널 입구의 위치를 대라고 윽박질렀으나 포로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해저터널의 입구가 어딘지 알려줄 수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일본군은 바탄반도 쪽의 입구 찾기를 포기했지만 코레히도르를 점령한 후 다시 한번 해저터널의 입구를 찾아 코레히도르를 샅샅이 수색했다.


코레히도르 상륙 계획의 골자는 야포와 비행기의 지원 아래 전차와 보병으로 이루어진 상륙부대가 기습적으로 야간 상륙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상륙지점은 2곳으로 첫날에는 코레히도르의 꼬리 부분에 선발대가 상륙하고 다음날 밤에 주력이 머리 부분에 상륙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두 부대는 서로를 향하여 전진하여 목 부근에서 합류함으로써 코레히도르 점령을 완수할 것이었다. 이후 필요하다면 제4사단이 카발로를 점령하고 카비테에서 대기 중인 제16사단이 엘프레일 및 카라바오섬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바탄반도에서 바라본 코레히도르의 모습. 화살표는 일본군의 상륙예정지점이다.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9.html#29-1  P.520)


상륙을 위하여 혼마 장군은 제4사단에게 2개의 해상작업대를 배속시켰다. 독립공병제23연대로 이루어진 제1해상작업대는 상륙주정으로 병력을 수송하여 상륙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독립공병제21연대로 이루어진 제2해상작업대는 코레히도르 부근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제1해상작업대를 보호하고 상륙시 화력지원을 맡았다. 제2해상작업대는 포정 또는 무장한 어선 2-4척으로 이루어진 11개 편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의 무장을 위하여 제65여단에서 독립속사포 중대 1개, 독립산포병제3연대의 1개 대대, 제16사단에서 독립속사포 1개 중대 그리고 마닐라 방위대에서 야포병제22연대의 2개 중대, 야전고사포제47대대의 고사포 1개 소대가 차출되었다.


제4사단이 상륙준비를 하는 동안 포병대는 4월 10일부터 코레히도르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포병대는 제4사단이 상륙하기 전에 코레히도르의 해안포, 대공포, 탐조등, 근접전용 야포, 방어시설과 해안의 장애물을 파괴할 것이었다.

공습도 실시했으나 해군의 육상공격기가 주로 담당하고 제22비행단에서는 폭격기 1개 중대만 참가했다. 제22비행단의 주력은 4월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참가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상륙 직후에 코레히도르가 항복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혼마 장군은 만일 백기를 가진 사절이 도착할 경우 즉시 자신에게 알려야하며 군사령부로부터 전투중지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했다.


제14군은 공격의도를 숨기기 위하여 노력했다. 공격부대가 주둔하는 곳의 민간인은 모두 내쫓았고 코레히도르에 뿌리는 전단에는 공격하겠다는 위협은 피하고 봉쇄로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의도를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는 필리핀의 전투가 이미 끝났으며 앞으로 일본군은 군정 실시와 잔당 소탕에 주력하겠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혼마 장군은 4월 29일에 열리는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떠들썩하게 마닐라에 입성했으며 행사장에서는 시종 느긋하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행사가 끝나자 그는 마닐라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소탕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민다나오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혼마 장군과 참모들은 즉시 바탄반도로 돌아와 코레히도르 공격을 위한 막바지 준비에 매달렸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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