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비사야 함락


1942년 3월 4일에 비사야군이 창설되었을 때 사령관 브래포드 치노웨스 준장이 보유한 병력은 약 20,000명으로 6개의 섬을 관장하는 5개의 사령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것은 앨버트 크리스티 대령의 파나이군으로 제61사단(PA)을 기간으로 했으나 제61 및 제62보병연대와 제61포병연대는 민다나오로 파견되었다. 크리스티 대령은 대신 제64 및 제65임시보병연대를 창설했다. 여기에 잡다한 경찰대 병력을 더한 파나이군의 총병력은 약 7,000명이었다. 

두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유한 것은 어빈 스쿠더 대령의 세부군이었다. 비사야군 사령부가 있는 세부를 담당한 세부군은 제82 및 제83보병연대(PA), 세부헌병연대, 필리핀육군항공대의 분견대, 기타 잡다한 부대를 합쳐 6,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번째는 네그로스군으로 3,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저 힐스맨 대령이 지휘했다.

네번째는 레이테-사마르군으로 2,5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어도어 코넬 대령이 지휘했다.

가장 적은 병력을 보유한 것은 보홀군으로 1,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서 그라임스 대령이 지휘했다. 치노웨스 장군은 세부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보홀군의 주력인 제83보병연대제3대대(PA)와 그라임스 대령을 세부로 불러들였다. 따라서 일본군이 세부에 상륙했을 때 그라임스 대령은 세부에 있었다.


(필리핀. 웨스턴 비사야라고 표시된 섬이 파나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dministrative_divisions_of_the_Philippines)


비사야군은 창설 이래 일본군이 바탄반도를 점령할 때까지 1달의 유예기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어준비를 했다. 섬사령부는 전차장애물, 참호, 사격호를 만들고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깔았다. 이런 작업은 주로 민간인이 해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방어준비의 핵심은 게릴라전을 위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험한 산속의 은밀한 장소에 비밀기지를 만들고 그곳에 보급품과 무기를 옮기는 것이었다.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비사야군의 계획은 현실적인 판단이었으나 비사야의 민간인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미국과 필리핀자치령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 민간인들은 필리핀군이 상륙해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해안에서 결전을 벌여 격멸해버리길 원했다.


일본군은 비사야에 대해 적정 수준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각 섬마다 정확한 방어병력의 숫자는 몰랐으나 섬들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비사야군의 전체 병력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혼마 장군은 가와구치 지대를 세부에, 가와무라 지대를 파나이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섬을 장악한 이후 양 지대는 동행한 경비부대에 점령지를 넘기고 민다나오로 가서 다바오에 있는 미우라 지대와 함께 민다나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일단 이렇게 하고 나면 필리핀의 나머지 수비대는 알아서 항복할 것이었으며 만일 항복하지 않아도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4,852명의 잘 훈련되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사로 이루어진 가와구치 지대는 필리핀에 도착한 지 4일만인 1942년 4월 5일에 링가옌만을 떠나 세부로 향했다.

당시 가와구치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35여단사령부

보병제124연대

수색제16연대의 1개 소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중대

야전중포병제21대대의 1개 중대

독립공병제23연대의 1개 소대

독립공병제26연대의 1개 중대(2개 소대 감편)

제44정박장사령부 주력

병참부대 일부


세부섬 공략에 동행한 해군병력은 경순양함 쿠마, 제2구축대(무라사메, 사미다레), 수뢰정 1척, 특설포함 1척, 특설수상기모함 1척, 제51구잠대(특설구잠정 2척) 그리고 제32특별근거지대육전대였다.


치노웨스 장군은 4월 9일 오후에 전투함정의 보호를 받는 일본군 선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일본군 선단은 밤새 2개로 갈라져 하나는 주도인 세부시가 있는 동해안으로 접근하고 나머지 하나는 서해안의 톨레도로 접근했다.

10일 해가 뜬 직후에 가와구치 지대의 주력이 세부시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탈리사이에 상륙하여 세부시로 북상했다. 비슷한 시각에 서해안의 톨레도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세부시를 방어하던 부대는 하워드 에드먼즈 중령이 지휘하던 세부헌병연대로 1,1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먼즈 중령의 임무는 폭파반이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세부시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무기, 훈련도, 실전경험에서 월등한데다가 숫자까지 많은 일본군은 세부헌병연대를 압도했다. 일본군은 정오가 되자 세부시의 중심가에 도달했고 저녁 5시까지 세부헌병연대를 도시 바깥으로 밀어내었다. 어둠이 내리자 에드먼즈 중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세부시에서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 미리 설정해 둔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세부헌병연대는 최소한의 피해로 일본군의 세부 점령을 한나절 동안 저지했으나 폭파반이 임무를 완수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결국 세부 시내의 보급품 중 절반만을 폭파시켰을 뿐 나머지 절반과 교외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보급품은 모두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세부.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8.html#28-2 P.504)


세부 서해안의 톨레도에서도 일본군은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톨레도를 지키던 제82연대대제3대대(PA)는 일본군 선단이 수평선에 나타나자 그대로 동쪽으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톨레도를 장악한 다음 추격을 시작했다.


톨레도에서 동쪽으로 뻗은 길은 세부섬의 중앙을 관통하여 동해안의 탈리사이에 도달한다. 이 길의 중앙에 칸타바코가 있었으며 칸타바코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비사야군사령부가 있는 캠프엑스에 도달한다. 만일 필리핀군이 칸타바코를 차지하고 있으면 동해안과 서해안의 연결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본군이 세부섬을 장악하려면 칸타바코를 점령해야 한다. 치노웨스 장군은 칸타바코 방어를 위하여 보홀에서 그라임스 대령과 제83연대제3대대(PA)를 불러들였으며 칸타바코와 캠프엑스 사이에는 또다른 예비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톨레도와 칸타바코 사이의 도로에는 공병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이 다가오면 다리를 폭파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4월 10일 아침에 제82보병연대제3대대가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다리를 건넌 직후 일본군 전차가 나타났다. 그러자 필리핀군 공병은 당황하여 다리를 폭파시키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10일 오후에 칸타바코에 도착한 그라임스 대령은 주변 지형을 익히기 위해 정찰을 나섰다. 그는 다리 폭파음이 들리지 않았으므로 아직 일본군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일본군 정찰대에게 붙잡혔다. 지휘관을 잃은 제83보병연대제3대대는 칸타바코 부근에 숨어서 눈앞을 통과하는 일본군을 보고만 있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제83보병연대제3대대의 존재조차 몰랐다. 칸타바코와 캠프액스 사이에 주둔하던 예비대대도 일본군이 접근하자 바로 도망쳤다.


그나마 저항을 한 것은 톨레도에서 도망쳐 온 제82보병연대제3대대였다. 이들이 11일 새벽 3시 30분에 캠프엑스 입구에서 추격하던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하면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치노웨스 장군은 참모들과 함께 북쪽으로 800m 정도 올라가 새로운 사령부를 차릴 시간여유를 얻었다. 일본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탈리사이에 도달했다.


일본군이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점령하면서 세부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치노웨스 장군은 12일 밤에 북쪽으로 떠나 산악지대인 키암에 사령부를 차렸다. 하지만 4월 15일부터 일본군이 키암에 대해 공세를 시작하자 치노웨스 장군은 비사야군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웨인라이트 장군은 4월 16일에 민다나오군사령관 샤프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비사야-민다나오군을 재건하여 비사야의 남은 병력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와구치 지대는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필리핀군이 숨어있는 세부 북쪽의 산악지대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다. 일본군은 17일에 치노웨스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키암을 점령하는 등 필리핀군에 타격을 입혔으나 섬멸하는데는 실패했으며 치노웨스 장군은 키암을 탈출하여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키암 점령 이후 세부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확고해졌다.

일본군은 4월 19일에 세부를 점령했다고 선언했으며 가와구치 지대는 독립보병제31대대(다나카 요시나리 중좌)에게 세부섬을 인계하고 민다나오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파나이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NAY.png)


4,160명으로 이루어진 가와무라 지대는 4월 12일에  링가옌만을 떠나 파나이로 향했다.

당시 가와무라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9여단사령부

보병제41연대

수색제16연대의 1개 소대

독립산포병제20대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중대

독립공병제23연대의 1개 중대(1개 소대 감편)

독립공병제26연대의 2개 소대

제44정박장사령부의 일부

병참부대의 일부


파나이 공략에 동행한 해군병력은 경순양함 쿠마, 제24구축대(우미카제, 가와카제, 야마카제), 수뢰정 1척, 특설수상기모함 1척이었다.


가와무라 지대의 주력은 4월 16일 아침에 파나이 남동쪽의 일로일로에 상륙했고 일부는 북쪽의 카피스에 상륙했다. 17일에는 남서쪽의 산호세에 일부 병력이 추가로 상륙했으며 18일에는 일로일로 건너편의 귀마라스 섬에 다시 일부가 상륙했다. 일본군의 상륙은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일로일로에 상륙한 가와무라 지대 주력은 곧 북쪽으로 진격하여 19일에 카피스에서 남하한 병력과 연결했으며 이후 23일까지 평원 지대를 석권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파나이 전투에서 일단 승리했으나 파나이군 사령관 크리스티 대령에게 전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크리스티 대령은 해안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제61사단(PA)을 중심으로 7,000명으로 이루어진 병력을 이끌고 내륙의 산지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보급품은 풍족한 편이었다. 파나이군은 물소 500마리, 쌀 15,000자루, 통조림 수백상자 그리고 충분한 식수와 연료를 가지고 있었다. 산속에 작업장이 들어서 있었고 섬의 각지에서 몰래 가져온 벼를 타작하기 위한 방앗간도 있었다.


파나이군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게릴라 활동에 화가 난 산호세의 일본군이 1개 중대를 파견하여 크리스티 대령의 사령부를 공격하려 했으나 정보를 입수한 필리핀 민병대가 산호세 외곽에서 출동하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민병대는 활, 창, 정글도 같은 원시적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형의 잇점을 살려 완벽한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고 나머지를 산호세로 쫓아버렸다. 이후 일본군은 이미 확보한 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게릴라 활동으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파나이의 중요한 도시와 도로를 장악하고 섬을 통제했다. 가와무라 지대는 독립보병제33대대(세노오 야스미 중좌)에게 점령지를 넘기고 민다나오로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군은 4월 20일까지 세부와 파나이를 장악함으로써 비사야를 사실상 점령했다.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보홀에 남아있는 수비대는 이미 격파한 수비대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으며 해안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일본군은 필요하다면 이들 섬을 간단히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가와구치 지대와 가와무라 지대는 동행한 독립보병제31및 제33대대에게 점령지를 넘겨주고 민다나오 공략을 준비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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