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코레히도르 공습 및 포격
항만방어사령관 무어 장군이 코레히도르의 해군통신감청소로부터 진주만 기습 보고를 받은 것은 12월 8일 오전 3시 40분으로 맥아더가 서덜랜드로부터 전화를 받은 시간과 거의 동시였다. 4개 요새는 이미 8일전부터 전원 전투배치 상태였으므로 무어 소장은 요새지휘관에게 진주만 기습 사실을 통보하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오전 6시 20분이 되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황이 존재한다는 공식 통보가 도착했고 해군은 일시적으로 마닐라항을 봉쇄했다. 오전 10시에 처음으로 코레히도르에 공습경보가 울렸고 그날 3번을 더 울렸다. 이후로도 공습경보는 자주 울렸으나 공습은 없었다. 일본군은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로 옮겨갈 때까지 코레히도르를 공습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마닐라를 떠나 코레히도르로 옮겨가자 혼마 장군은 12월 29일부터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의 제5비행집단과 해군 제11항공함대를 동원하여 코레히도르를 공습했다.
12월 29일 오전 11시 54분에 비행제14전대의 97식중폭격기 18대가 비행제50전대의 97식전투기 1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코레히도르 상공에 나타났다. 폭격기는 3대씩 편대를 지어 차례로 5,000m 높이로 코레히도르를 통과하면서 94식100kg짜리 폭탄 35발과 및 92식 250kg 짜리 폭탄 12발을 사령부와 막사에 떨어뜨렸다.
오후 12시 30분에는 비행제8전대의 99식경폭격기 22대와 비행제16전대의 97식경폭격기 18대가 도착했다. 99식경폭격기들은 97식중폭격기와 같은 방식으로 탑사이드와 바텀사이드의 건물과 시설에 100kg 짜리 폭탄 66발을 떨어뜨렸다. 97식경폭격기는 급강하폭격으로 1,000m 높이까지 내려와 50kg 짜리 폭탄 108발을 투하했다.
오후 1시에는 해군기 60대가 몰려와 코레히도르와 주변의 함정을 폭격했다.
바탄의 활주로에 전개한 소수의 미군기는 감히 이륙하지 못했고 대공포만이 저항했다. 3인치 대공포는 1,200발을 발사하여 일본기 13대를 명중시켜 그중 3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50구경 기관총은 급강하폭격을 실시하는 일본기를 공격하여 4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병사들은 일본기가 어디를 폭격하러 가는지 살펴보려고 창가에 몰려들었다가 폭탄이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혼비백산하여 방공호로 내달렸다.
병원, 매점, 사령부, 막사, 장교클럽 등이 폭탄을 맞았으며 연병장에 떨어진 폭탄은 직경 6m 짜리 구덩이를 만들었다.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섬 전체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이날의 폭격과 뒤이은 화재로 코레히도르의 목조 건물 60% 가 소실되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서둘러 말린타 터널로 이동했다.
다행히 일본군의 주요 목표였던 군사시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포대 2개가 피해를 입었으나 24시간 내로 기능을 회복했다. 바텀사이드에 계류되어 있던 소형함정 몇 척이 폭탄을 맞았고 꼬리 부분에 있는 킨들리 비행장에 주기중이던 필리핀 육군기 2대가 파괴되었다. 전기, 통신, 급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영구적인 피해는 없었다.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20명, 부상자는 약 80명이었다.
공습은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행동을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모두 창가에 나와 일본기가 어디로 가는지 구경하곤 했으나 공습 이후에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방공호의 위치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으며 일부 병사들은 상공에 일본기가 없어도 방공호를 벗어날 때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날씨에 대한 선호도 변했다. 운치있는 달밤은 일본기가 야간공습을 가할 수 있으므로 싫어했다.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도 역시 일본기의 기습 가능성이 있어서 싫어했다. 정감있는 구름은 일본기가 숨을 수 있어서 싫어했다. 반면 공습을 어렵게 만드는 심한 폭풍우를 좋아했으며 어서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12월 29일의 첫 공습 이후 사흘간 잠잠하던 일본기는 마닐라가 함락된 1942년 1월 2일에 되돌아왔다. 이날은 흐렸는데 정오부터 일본기가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내려와 폭탄을 떨어뜨리고 다시 구름 위로 사라졌다. 이날 합계 54대의 일본기가 코레히도르와 포트 드럼을 폭격했다. 일본기는 이후 1월 6일까지 매일 나타났으며 5일에는 포트 프랭크도 폭격을 받았다.
일본기의 공습 패턴은 비슷했다. 오전에 사진정찰기가 나타나 코레히도르나 다른 요새를 맴돌다가 사라지면 오후 12시 30분쯤 V자 편대를 이룬 폭격기가 나타나 6,000m 고도에서 시속 260km 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폭격을 가했다. 일본기는 5일까지 똑같은 코스와 고도로 차례차례 진입했기 때문에 대공포가 조준하기 쉬웠다. 마지막날인 6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실수를 깨닫고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다른 고도로 접근하여 폭격했다.
공습의 피해는 컸다. 2일과 3일의 공습으로 탑사이드와 미들사이드의 건물들이 다시 피해를 입었고 귀중한 물탱크 2개가 부서졌다. 4일의 공습은 바텀사이드의 부두, 작업장 및 창고에 집중되었다. 5일에는 부두에 매어둔 바지선이 폭탄에 맞아 불이 붙은채 떠내려가다가 하필이면 발전소 부근의 경유집적소에 닿아 화재를 일으켰다. 6일에는 부실한 방공호가 비극을 불렀다. 34명이 숨어있던 방공호 부근에 큰 폭탄이 떨어졌는데 그 충격으로 방공호가 무너지면서 31명이 죽었다. 7일 아침이 되자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한 지상건물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지면에는 평균 20m 마다 폭탄구덩이가 생겼다.
가장 큰 손실은 화재로 인한 것이었다. 평화시에도 빈약한 포트 밀스의 화재 진압 능력은 폭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무기력했다. 목재, 기계장비, 침구, 의약품 등 목제창고에 보관 중이던 귀중한 보급품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반면 콘크리트 창고에 보관하던 보급품들의 피해는 가벼웠다.
전기철도는 운행을 멈추었으며 통신선은 공습때마다 끊어져 밤에 수리해 놓으면 다음날 공습에 다시 끊어졌다. 폭탄에 피해를 입지 않을만큼 통신선을 깊이 파묻을 시간은 없었다.
군사시설은 이번에도 피해를 면했다. 해안포대와 탄약고는 폭탄에 견딜 수 있게 튼튼하게 지어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노출된 대공포대는 피해를 입었으나 대부분 12시간 내로 회복가능한 가벼운 피해였다. 29일에서 1월 6일까지 폭격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으나 단편적인 정보를 종합하면 최소한 사망 약 60명, 부상 약 220명이었다.
공습은 바탄전투가 시작된 1월 6일에 끝났다. 제5비행집단은 태국으로 철수했으며 제14군에 남은 소수의 항공기는 바탄전투를 지원해야 했다. 그리하여 3-4대의 항공기가 기습적으로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본격적인 공습은 일단 끝났다.
바탄전투가 벌어지는 1달 동안 불안하게 지속되던 코레히도르와 해상요새의 평화는 2월 초에 깨졌다. 제14군은 1월 24일에 곤도 도시노리 소좌가 지휘하는 곤도 포병대를 창설하고 마닐라만의 남안인 카비테주의 터네이트에 방호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0cm 유탄포 4문과 15cm 캐넌포 2문으로 이루어진 곤도 포병대는 2월 초까지 포트 드럼에서 9km, 포트 프랭크에서 13km 떨어진 터네이트 부근의 방호진지에 전개를 마쳤다.
최초의 포격은 2월 5일에 있었다. 곤도 포병대는 오전 8시부터 3시간 동안 포트 드럼을 포격하여 약 100발을 맞추었다. 포트 드럼에서는 14인치포와 6인치포를 동원하여 반격했고 포트 프랭크에서도 12인치 박격포로 사격을 가했으나 일본야포의 위치를 몰라서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이후 2월 중순까지 곤도 포병대와 포트 드럼 및 포트 프랭크는 매일 포화를 주고 받았으나 서로 치명타를 가하지 못했다.
2월 15일에 일본군은 카비테주에서 포트 프랭크에 식수를 공급하는 수도관을 발견하고 망가뜨렸다. 포트 프랭크에는 담수화 설비가 있었으나 귀중한 연료를 소모해야 했으므로 사령관 보드로 대령은 수리를 위하여 15명을 파견했다. 이들이 수도관이 파괴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약 30명으로 이루어진 일본군 정찰대가 나타나서 공격을 가했다. 15명은 포트 프랭크에서 쏘아주는 75mm 해안포의 지원 아래 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을 뿐 사망자 없이 돌아왔으나 수도관 수리에는 실패했다. 3월 9일에 다시 병력을 파견하여 수도관을 수리할 때까지 포트 프랭크에서는 담수화 설비를 사용하여 식수를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
2월 20일에 일본군은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15cm 유탄포 2문을 증원받은 곤도 포병대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늦게까지 1분 간격으로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으로 코레히도르의 발전소와 포트 휴이의 관측소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일본군의 포격 강도는 하루에 1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동안 일본군은 터네이트 남서쪽에 있는 피코데로로산에 새로운 포병진지를 만들고 중포병제1연대장 하야카와 마사요시 대좌가 지휘하는 하야카와 포병대를 배치했다. 하야카와 포병대는 중포병제1연대, 24cm 유탄포를 장비한 독립중포병제2대대, 그리고 제3트랙터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곤도 포병대도 해체되어 하야카와 포병대에 흡수되었다. 첫 공격은 3월 15일이었다.
3월 15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하야카와 포병대의 24cm 유탄포가 포격을 시작하여 하루 종일 지속했다. 주목표는 포트 프랭크와 포트 드럼이었다. 포트 프랭크는 약 500발의 명중탄을 맞아 155mm 해안포대 1개와 3인치 대공포대 1개가 파괴되었고 포대 2개가 피해를 입어 일시적으로 기능을 상실했다. 100발의 명중탄을 맞은 포트 드럼에서는 1발이 남쪽을 향한 6인치 포의 포곽을 뚫고 들어와 폭발하는 바람에 콘크리트 요새 내부가 연기로 가득찼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포트 프랭크와 포트 드럼도 반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하야카와 포병대는 21일까지 매일 포격을 가했다. 4개 요새가 모두 포격을 받았으나 주요 표적은 남쪽에 있는 포트 드럼과 포트 프랭크였다. 포트 드럼은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았으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포트 프랭크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16일에 24cm 철갑탄 1발이 12인치 박격포대를 둘러싼 46cm 두께의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가 포대 아래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포대가 함몰되면서 장약 60통이 쏟아졌으나 기적적으로 폭발하지 않았다. 21일에는 24cm 철갑탄이 46cm 두꼐의 콘크리트 지붕을 뚫고 들어와 황열병 예방접종을 기다리던 병사 가운데에서 폭발하여 28명이 죽고 46명이 다쳤다.
곤도 포병대의 포격과 달리 3월 15일에서 21일에 걸친 하야카와 포병대의 포격은 요새의 방어시설에 피해를 입혔다. 포트 프랭크에서는 3인치 대공포 4문과 155mm 구형평사포 4문이 큰 피해를 입었다. 12인치 박격포는 함몰되었고 14인치 평사포 2문도 피해를 입었으나 빨리 고쳤다.
포트 드럼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6인치포의 포곽은 수많은 명중탄에 맞아 철판이 우그러지고 찢겼으나 고치지 못할만큼 크게 망가진 것은 대공포 2문 뿐이었다.
일본군은 포격에 이어 포트 프랭크와 포트 드럼에 대한 상륙을 준비했으나 혼마 장군이 바탄반도 전투에 집중하기 위하여 취소시켰다. 나중에 포트 프랭크에서 75mm 포로 포격을 가하여 일본군이 상륙을 위하여 모아두었던 카누 45척을 파괴했다.
일본군이 포격하는 동안 해상요새도 반격했으나 일본군 야포의 위치를 알기 어려웠다. 일본군은 정성들여 야포를 위장했으며 필요하면 위치를 바꾸었고 심지어는 포격과 동시에 다른 곳에서 가짜 연기를 피우기도 했다. 미군은 발사음을 듣거나 날아오는 포탄의 궤적을 보고 일본군 포대의 위치를 추정하여 반격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코레히도르 체니 포대의 12인치 해안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2 P.483)
하야카와 포병대가 전개한 피코델로로산의 야포진지는 후사면에 만들어서 구경장이 큰 해안요새의 평사포들은 대부분 포격이 불가능했다. 후사면에 숨어있는 일본군의 야포진지를 공격하는 데에는 고각사격이 가능한 12인치 박격포 22문이 효율적이었으나 적당한 탄약이 모자랐다. 미군이 보유한 12인치 박격포탄은 대부분 함정 공격용으로 지연신관을 장착한 458kg 짜리 철갑탄이었다. 지상표적에 효과적인 순발신관을 장착한 304kg 짜리 고폭탄은 1,000발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이 탄약은 일본군이 바탄반도를 장악한 이후 마리벨스산에서 쏘아댈 일본군 야포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껴야 했다.
코레히도르의 12인치 박격포대인 기어리 포대장 폴 벙커 대령은 철갑탄의 지연신관에서 0.05초 지연 조각 하나를 제거하여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철갑탄은 착탄과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그러나 철갑탄 자체의 작약량이 적어서 지상표적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하야카와 포병대의 포격은 3월 22일에 끝났다. 포병대는 이날 해체되었으며 야포들은 제2차 바탄전투를 지원하기 위하여 바탄반도로 이동했다. 이로써 일본군과 해상요새의 포격전은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할 때까지 소강상태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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