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4월 8일 : 혼란


4월 8일 아침이 되자 제2군단은 알랑간강 남안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했다. 지휘는 C구역 사령관인 제31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과 A 구역 사령관인 제31보병연대장 존 어윈 대령이 맡았다. 블루멜 장군은 제37보병연대(US), 제57보병연대(PS), 제26기병연대(PS), 제14공병대대(PS), 제803공병대대(US)를 이끌고 좌익 2,300m 를 맡았다. 어윈 대령은 제31보병연대(PA)와 경찰연대를 이끌고 우익을 담당했다. 포병 세력은 완편된 제21야포연대(PA), 피해를 입은 야포대대 3개를 모아 만든 임시야포여단, 알렉산더 퀸타드 대령의 제301야포연대(PA)에서 살아남은 155mm 평사포 3문, 그리고 고정식 해안포 몇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군의 진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5.html#25-1 P.442)


8일 아침이 되었을 때 알랑간선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제803공병대대는 밤새 제멋대로 후퇴해 버렸고 부대마다 점령해야 할 방어선의 길이가 정해지지 않아 중간에 빈 공간이 생겼다. 방어선의 좌익은 서쪽으로부터 제14공병대대, 제26기병연대, 제31보병연대, 제57보병연대의 순이었는데 제26기병연대와 제31보병연대 사이에는 약 900m 의 간격이 있었다. 제31보병연대와 제57보병연대 사이에도 간격이 있었으며 제57보병연대의 동쪽에서 우익과 연결해야 할 제803공병대대가 무단으로 후퇴해 버림으로써 우익과의 연결도 끊어졌다.

블루멜 장군이 지휘하는 3개 연대의 병력은 연대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였다. 제31보병연대(US) 160명, 제26기병연대 300명, 제57보병연대 500명이었으며 제14공병대대 400명을 합쳐 블루멜 장군의 병력은 1,360명이었다. 우익을 지휘하던 어윈 대령은 2개 연대 1,2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병사들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굶주린데다가 5일 동안 제대로 자거나 쉬지도 못한 채 일본군의 포격과 공습을 받아가며 전투와 이동을 거듭한 병사들은 너무나 지쳐서 앉기만 하면 곯아 떨어졌기 때문에 잠들지 않으려면 서있는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이날도 공격에 앞서 준비사격과 공습을 실시했다. 오전 11시부터 일본군의 전투기와 경폭격기들이 제31 및 제57보병연대의 방어선에 소이탄을 떨어뜨렸다. 키큰 풀과 대나무가 불타면서 병사들은 일본군과 싸우기 전에 화재와 싸워야 했다.


우익을 맡은 제31보병연대(PA)와 경찰연대는 공습에 무너졌다. 일본기가 접근하여 기총소사를 가할 때마다 개인호를 파던 병사들은 달아났다가 장교들에게 붙잡혀 다시 방어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일본기가 나타나면 또다시 도망쳤다. 공습이 반복될수록 돌아오는 병사들이 줄어들더니 오후 3시가 되자 일본군 보병이 나타나기도 전에 알랑간선의 우익은 텅 비어버렸다.


일본군은 오후 2시에 알랑간선의 좌익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중대 수준으로 줄어든 제31보병연대는 오후 5시가 되자 제4사단좌익대(보병제8연대)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쪽에 있던 제57보병연대도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후퇴했다.


일본군 전차제7연대는 오후 4시부터 알랑간선의 서단을 맡고 있던 제14공병대대를 공격했다. 일본전차는 기세좋게 돌진하다가 공병대대가 만든 대전차 장애물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다. 전차는 그 자리에서 기관총과 전차포로 공격했으나 시야가 제한되어 효과가 없었다. 전차병이 전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가는 바로 사살되었다. 그러나 스카우트 공병 또한 대전차무기가 없어서 장애물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일본전차를 파괴하지 못했으므로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공병의 동쪽에 있던 제26기병연대는 제31 및 제57보병연대를 쫓아버린 제4사단좌익대(보병제8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주력을 기병연대의 정면에 투입하여 고착시키면서 일부를 동쪽으로 우회시켜 기병연대를 포위하려 했다. 당시 블루멜 장군은 휘하 부대와 전령을 통하여 연락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제31 및 제57보병연대가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루멜 장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제26기병연대와 제14공병대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오후 6시 30분에 공병대대와 기병연대는 방어선을 떠나 철수했다. 그날 저녁에 일본제4사단 주력은 알랑간강을 건너 캅카벤으로 진격했다.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한 나가노지대는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오후 5시에 알랑간강을 건넜다. 일본군은 후퇴 중인 제31보병연대(PA)와 경찰연대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후위를 맡은 전차와 75mm 자주포가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보병이 몽땅 포로로 잡히는 사태를 막으면서 후퇴했다. 나가노지대는 밤 10시에 라마오 북방까지 진출했다.


제16사단은 발랑가를 떠나 리마이 방면으로 남하했다. 서해안에서 제16사단을 교체한 제10수비대는 바각까지 남하했다.

서쪽에서 공격한 제65여단은 8일 오후 2시에 리마이산 정상을 점령하고 저녁 7시까지 리마이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2km 를 진격했다.


군포병대의 주력은 사맛산 부근에 방열하여 제4사단과 제65여단의 공격을 지원했고 10cm 유탄포를 가진 일부 부대는 나가노지대를 지원했다.

제22비행단도 공습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73회 출격하여 주로 퇴각하는 미-필리핀군을 상대로 15kg 짜리 폭탄 10발, 50kg 짜리 폭탄 281발, 100kg 짜리 폭탄 38발을 투하하여 자동차 21대를 파괴했다. 비행제60전대는 5번에 걸쳐 42회 출격하여 캅카벤 부근에 250kg 짜리 폭탄 92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18회 출격하여 파니키안과 라마오에 100kg 짜리 폭탄 2발과 250kg 짜리 폭탄 75발, 500kg 짜리 폭탄 1발을 투하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도로에 대한 공습이었다. 일본기들이 초저공으로 내려와서 후방으로 도망치는 패잔병으로 가득찬 도로에 폭탄을 떨어뜨린 후 기총소사를 가하고 사라지면 도로 양옆으로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만드는 긴 줄이 생겼다.


미-필리핀군에게 일선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도로마다 패잔병이 가득차 있었다. 무선통신은 기갑부대만 가능했으므로 지휘관들은 전령에 의지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지휘관들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위치와 상황을 몰랐다.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알랑간방어선의 동쪽 측면이 무너진 사실을 알았다.


킹 소장은 캅카벤을 방어하기 위하여 마지막 예비대인 찰스 세이지 대령의 임시해안대공포여단을 투입했다. 제200 및 제515해안대공포연대로 이루어진 여단은 대공포를 파괴한 후 보병이 되어 캅카벤 북쪽의 고지대에 전개했다. 킹 소장은 또한 제1군단 소속이던 제1필리핀경찰연대를 제2군단으로 돌린 후 캅카벤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했다.


블루멜 장군이 지휘하던 병력은 8일 오후 9시 30분에 라마오에 도착했다. 제2군단장 파커 장군은 블루멜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라마오강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하라고 명령했지만 실행이 불가능했다. 장교들은 라마오강 남안의 지리를 몰랐으며 달도 없는 밤에 완전히 지치고 편제가 무너진 병사들을 새로운 방어선에 배치할 능력도 체력도 의지도 바닥난 상태였다. 블루멜 장군은 방어선 편성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려 했으나 파커 장군과 통신이 닿질 않았다.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제1경찰연대는 해가 뜰 때까지 캅카벤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었다. 대공포여단의 오른쪽에 전개하라고 명령한 제26기병연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실제로 제26기병연대는 이 명령을 받지도 못했다. 동부도로와 오솔길을 따라 후퇴중인 패잔병을 재편성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결국 8일 밤 11시 30분에 임시해안대공포여단만이 홀로 캅카벤 북쪽 고지대에 전개했다. 


8일 저녁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호주의 맥아더 장군에게 루손군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맥아더 장군은 제1군단을 총동원하여 올롱가포에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맥아더는 일본군이 공격한 다음날인 4월 4일에 웨인라이트에게 전문을 보내어 루손군의 붕괴가 임박하면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1군단은 올롱가포, 제2군단은 디날루피한에 대하여 총반격을 실시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만일 총반격이 성공하면 올롱가포와 디날루피한에 쌓인 일본군 보급품을 탈취하여 더 오래 저항할 수 있고 만일 실패하더라도 공격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병력들이 바탄을 탈출하여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웨인라이트는 8일 저녁에 맥아더로부터 총반격을 실행하라는 전문을 받자 현재 루손군 병사들은 너무 지쳐서 조금만 진격하면 쓰러질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맥아더로부터 재차 반격을 실행하라는 전문이 들어오자 웨인라이트는 실행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이상 항의하지 않고 오후 11시 30분에 루손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제1군단을 동원하여 올롱가포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이 웨인라이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바탄에서는 항복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바탄에는 이제 병사들에게 정량의 절반을 1회 공급할 식량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보급소장들은 오후 9시부터 장비와 보급품을 폭파하기 시작했다. 마리벨스에서도 해군이 오후 10시 30분부터 파괴작업을 시작하여 화염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웨인라이트와 통화를 마친 킹 소장은 제1군단장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올롱가포를 목표로 총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가능하냐고 물었다. 존스 장군은 모든 부대가 비누안간강으로 후퇴하는 중이며 병사의 체력이 바닥나서 총공격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킹 소장은 공격명령을 철회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 사실을 웨인라이트에게 알리지 않고 부하들과의 회의를 거쳐 항복을 결정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공격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없자 참모장 비브 장군에게 확인해 보라고 명령했다. 비브 장군이 직접 제1군단에 전화를 걸자 존스 장군은 공격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비브 장군은 곧 공격명령이 내려갈 테니까 준비하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존스 장군은 즉시 킹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킹 소장은 코레히도르에 전화를 걸어 제1군단이 자신의 지휘를 벗어났느냐고 물었다. 항복하기로 결정한 킹 소장으로서는 자신에게 제1군단의 항복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바탄의 모든 병력은 킹 소장의 지휘권 아래에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킹 소장과 통화를 마치고 이제나저제나 제1군단의 공격을 기다리던 웨인라이트 장군은 후속 보고가 없자 9일 새벽 3시에 다시 루손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이미 백기를 든 2명의 사절이 일본군 사령관을 찾아 전방으로 떠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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