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코레히도르
일본은 바탄반도를 점령해도 극동 제일의 양항인 마닐라항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닐라항을 사용하고 싶으면 코레히도르를 포함하여 마닐라만의 입구를 감제하는 해상요새 4개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코레히도르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1)
코레히도르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마닐라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였다. 미서전쟁 당시 코레히도르에는 중포 3문이, 그리고 코레히도르 남쪽에서 마닐라만 입구를 가로지르는 엘프레일섬과 카발로섬에는 해안포 12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획득한 미국은 1914년까지 코레히도르와 인근 섬들을 강력하게 요새화시켜 마닐라항은 극동의 지브롤터로 불렸다. 시대상을 반영하여 요새들은 바다로부터의 공격을 저지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함도 물리칠 수 있었다.
1922년에 워싱턴 해군조약에 의하여 코레히도르의 방어시설 건설이나 현대화는 금지되었다. 미국은 돌산인 말린타 언덕에 터널을 파고 창고를 건설했으나 1941년 말에 일본이 침공했을 때 코레히도르의 방어시설은 새로 만들어진 대공포 진지를 제외하고는 1914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포트 밀스가 자리한 코레히도르는 마닐라만 입구를 지키는 4개의 해상 요새 중 가장 컸으며 마닐라만 입구를 북쪽 수로와 남쪽 수로로 나누었다. 코레히도르의 길이는 약 6km, 가장 넓은 곳의 폭은 800m 정도인 올챙이 모양으로 머리는 서쪽이고 꼬리는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머리와 꼬리의 연결 지점은 폭이 약 550m 인 저지대로서 바텀사이드라고 불렀다. 바텀사이드에는 산호세 마을, 2개의 부두, 발전소, 작업장, 그리고 냉동창고를 포함한 창고들이 모여 있었다. 바텀사이드의 바로 동쪽에는 내부에 복잡한 터널망을 가진 말린타 언덕이 있었다. 말린타 언덕의 동쪽 꼬리부분에는 대공포 진지, 작은 활주로 그리고 해군의 통신감청소가 있었다.
(말린타 언덕. 북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이 서쪽이다. 중앙의 저지대는 바텀사이드.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3)
바텀사이드의 서쪽은 미들사이드라고 불리며 병원, 초급장교 및 부사관 숙소, 군대 매점, 어린이를 위한 2개의 학교가 있었다. 해발 150m 정도 되는 고지대는 탑사이드라고 불렀으며 사령부, 막사, 장교숙소, 그리고 연병장이 있었다. 올챙이 머리 부분의 지형은 좁은 해안을 벗어나면 바로 절벽이었으므로 방어에 유리했다. 절벽 사이에는 몇 개의 계곡이 있어 상륙한 적이 진격로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미군은 중요한 계곡 3개에 체니, 제임스 , 그리고 램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코레히도르에서 발전소는 대단히 중요했다. 식수는 21개의 깊은 우물에서 전기펌프로 퍼올렸다. 열대의 날씨에서 식품을 보관하려면 전기로 작동하는 냉동창고가 필수였으며 말린타 언덕의 거대한 터널망에는 전기로 작동하는 전등과 환풍기가 필요했다. 코레히도르에는 105km 에 달하는 도로와 오솔길이 있었지만 중장비는 대부분 22km 길이의 전기철도로 운반했다. 거대한 해안포들은 비상발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발전소에서 보내주는 전기에 의존했다. 따라서 미군은 발전소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말린타 터널.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5)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물은 말린타언덕에 있는 터널망이었다. 동서로 달리는 길이 430m 폭 9m 의 중앙터널에는 전기철도가 깔려 있었다. 중앙터널의 좌우로는 길이 120m 정도되는 분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25개 뻗어 있었다. 북쪽에는 12개의 분지를 가진 지하병원이 있어서 북쪽 출입구로 통했다. 남쪽에 있는 창고를 지나면 해군터널로 연결되었다. 터널의 벽면은 콘크리트로 강화했으며 천정은 아치로 마무리했다. 구석구석 전선을 깔아 전등을 설치했으며 환풍기가 신선한 공기를 공급했다. 포격이나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말린타 터널 안에는 필리핀주둔미군사령부, 항만방어사령부, 병원, 작업장, 그리고 창고가 들어 있었다.
코레히도르의 화력은 강력했다. 해안포 세력은 자체의 이름과 역사를 가진 23개의 포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경 3인치에서 12인치에 이르는 해안포는 총 56문으로 모두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물건이었다. 사정거리가 가장 긴 것은 스미스 포대와 헌 포대에 1문씩 배치된 12인치 평사포로 사정거리가 25,000m 였으며 사방으로 사격할 수 있었다. 스미스 및 헌 포대를 제외한 12인치 평사포 6문과 155mm 구형평사포 19문이 16,000m 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12인치 박격포와 3인치 해안포는 사정거리가 짧았다.
함정에 효과적인 철갑탄의 숫자는 충분했으나 지상군에 효과적인 고폭탄은 거의 없었으며 조명탄은 전무했다.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지뢰가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코레히도르의 무장.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4)
대공화기는 3인치 대공포 28문, 50구경 기관총 48정 그리고 60인치 스페리 탐조등 10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3인치 대공포 중 1개 포대 4문은 코레히도르에서 바로 보이는 바탄반도의 남쪽 끝에 있었다. 3인치 대공포의 사격고도는 최대 9,800m 였다. 대공포탄의 숫자는 해안포만큼은 아니지만 넉넉한 편이었다.
전쟁 전에 코레히도르의 주둔군은 사령부, 포병, 그리고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병력숫자는 4개의 요새섬을 합쳐 6,000명 미만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코레히도르의 병력은 크게 늘었다. 먼저 카비테항이 폐쇄되면서 해군병력이 상륙했다. 12월 25일에는 맥아더 사령부가 제809헌병중대, 보급중대 2개, 공병중대, 기타 지원부대와 함께 도착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올롱가포가 폐쇄되면서 1,0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진 제4해병연대가 옮겨왔다.
코레히도르를 제외하고 마닐라만을 지키던 해상요새 3개의 무장도 강력했다. 코레히도르 바로 남쪽에 있는 카발로에는 포트 휴이가 있었다. 카발로는 코레히도르 다음으로 컸으나 그래도 면적은 0.6㎢ 에 지나지 않았다. 서해안은 수면에서 바로 120m 높이로 절벽이 솟아올라 있었으나 동해안은 완만하여 상륙이 가능했다. 1942년 4월말 현재 포트 휴이의 병력은 약 800명으로 해병 93명과 해군 443명은 프랜시스 브리젯 중령의 지휘 아래 보병으로서 동해안을 방어했다. 나머지 병력은 포병이었다. 대공화력은 3인치 대공포 4문으로 코레히도르의 대공포와 통합 운용되었다. 해안포는 13문으로 14인치 평사포 2문, 12인치 박격포 4문, 6인치 평사포 2문, 155mm 구형평사포 3문, 3인치 해안포 2문이었다.
(포트휴이, 드럼, 프랭크의무장.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6)
포트휴이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포트드럼은 특이했다. 공병대가 엘프레일 섬을 해수면까지 깎아낸 다음 그 위에 길이 107m, 폭 44m 짜리 콘크리트 전함을 만들었다. 해수면에서 갑판까지의 높이는 12m 였으며 외벽의 두께는 최대 11m 에 달했다. 여기에 14인치 주포 4문과 6인치 부포 4문, 3인치 해안포 1문 그리고 3인치 대공포 2문을 설치했다. 병력은 200명 밖에 되지 않지만 포트드럼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엘프레일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7)
(포트드럼.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7)
가장 남쪽에 있는 카라바오는 카비테주에서 불과 460m 떨어져 있었는데 해안선은 동해안의 1곳을 빼고는 모두 해안에서 30m 이상 솟아오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군은 여기에 포트 프랭크를 설치하고 필리핀스카우트 400명을 배치했다. 무장은 14인치 평사포 2문, 12인치 박격포 8문, 155mm 구형평사포 4문, 75mm 해안포 3문, 3인치 대공포 4문, 탐조등 2개였다.
마닐라만의 4개 요새와 수빅만의 포트윈트를 합쳐 1941년 8월에 마닐라만 및 수빅만 항만방어부대가 창설되었다. 항만방어부대는 조지 무어 소장이 이끄는 필리핀해안포사령부의 예하 부대가 되었으며 무어 소장이 사령관을 겸직했다. 부대는 사령부, 해안포연대 3개, 해안대공포연대 1개, 그리고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약 5,7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1 및 제2해안대공포연대는 필리핀육군 소속으로 실제로는 필리핀스카우트해안포연대의 통제를 받았다.
주요 부대의 인원은 다음과 같다.
사령부 : 575명
제59해안포연대(US) : 1,383명
제60해안대공포연대(US) : 2,033명
제91해안포연대(PS) : 830명
제92해안포연대(PS) : 515명
제1해안포연대(PA) : 490명
제2해안포연대(PA) : 79명
지뢰매설부대 : 42명
항만방어부대는 4개의 주요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코레히도르의 해안선은 기어리 포대장 폴 벙커 대령이 방어했다. 벙커 대령은 휘하에 4개의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개 부대가 북쪽을, 2개 부대가 남쪽을 방어했다. 대공방어와 조기경보는 제60해안대공포연대장인 시어도어 체이스 대령이 맡았다. 코레히도르를 제외한 4개 요새의 지휘관은 자기 요새의 방어를 책임졌다. 해군사령관 케네스 호펠 대령은 서류상 웨인라이트의 직속 부하로 무어 소장과 동급이었으나 실제로는 무어 소장의 통제를 받았다.
마닐라만의 해상요새는 바다로부터 다가오는 적에 대해서는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마닐라만을 봉쇄하는 일본의 순양함이나 구축함은 해안포의 사정거리 내로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요새는 하늘과 육지로부터의 공격에는 취약했다. 일본군은 전역 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하여 코레히도르를 공습했고 1942년 4월 9일에는 바탄반도를 점령하면서 이제 야포로 코레히도르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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