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4월 7일 : 제2군단 붕괴


1942년 4월 7일부터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방어선을 편성했다가 병력들이 다 배치되기도 전에 버려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통신이 끊어져 상급 사령부가 일선의 상황을 모르고 명령을 내렸다가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철회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패잔병이 도로를 메워 부대의 전진이 불가능해지고 부대가 말 그대로 정글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이틀에 걸쳐 루손군은 와해되었다.


(일본군의 진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5.html#25-1 P.442)


4월 7일 아침에 미-필리핀군의 최대 관심사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탈환하여 제2군단과 제1군단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공격은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가할 계획이었다. 동쪽에서는 릴리 대령의 제57보병연대가 공격하고 서쪽에서는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 부근에 주둔 중이던 도일 대령의 제45보병연대와 제194전차대대 C중대가 공격할 것이었다. 두 연대가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에서 만나면 샌빈센트강 방어선이 8번 오솔길을 따라 판틴간강까지 연장되어 제2군단이 제1군단과 연결될 것이었다.


공격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쪽에서 공격하는 제45보병연대는 2개 대대 중 제2대대와 C중대의 전차 중 1개 소대 2대만 공격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제3대대와 C중대의 나머지 전차들은 29번 오솔길을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에 맞서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켜야 했다.


반면 6번-8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키던 일본군은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45보병연대가 공격해야 할 서쪽을 맡은 일본군은 우회가 힘든 지형에서 적이 굽은 오솔길을 돌아나오면 집중사격을 퍼부을 수 있는 위치에 방어선을 폈다.


4월 7일 오전 1시에 제2대대는 전차 2대를 앞세우고 8번 오솔길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했다. 오전 2시 40분경에 선두 전차가 모퉁이를 돌자 일본군이 오솔길에 설치한 장애물이 보였다. 그 순간 일본군이 사격을 가하여 선두 전차를 파괴했다. 뒤따르던 전차는 전진을 멈추고 응사하기 시작했다. 곧 제2대대 주력이 도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2대대는 제45보병연대장 도일 대령의 지휘 아래 전력을 다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도일 대령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제45보병연대가 출발점인 8번-29번 오솔길에 도착해보니 제3대대와 C중대의 전차들은 북쪽으로부터 공격하는 일본제65여단의 주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은 오후가 되자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제45보병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다행히 전차들이 우회하려는 일본군을 발견하고 저지함으로써 연대 전체가 포위당하는 사태는 면했지만 더 이상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지키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제45보병연대는 오후 6시에 8번-29번 오솔길 교차점을 일본군에게 내어주고 D구역 사령부와 함께 판틴간강을 건너 제1군단 지역으로 철수했다. 북쪽에 있던 제41보병연대도 판틴간강을 건너 서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쪽에 있던 제57보병연대는 공격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병력이 출발하기 전에 일본제4사단우익대가 샌빈센트강과 제57보병연대 사이의 공간을 공격했다. 제201 및 제202공병대대 병사들은 방어선에  도착한 순간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그대로 달아났다. 이로써 오른쪽 옆구리가 열려버린 제57보병연대는 공격은 커녕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철수해야만 했다. 7일 오후 5시가 되자 8번 오솔길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사맛산 서쪽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된 제33보병연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일본군은 오전 5시부터 1시간 동안 박격포로 포격을 가한 후 공격을 시작했다. 제33보병연대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오후가 되자 한계에 달했다. 대대장 홈스 소령은 부하에게 탈출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는 군의관과 함께 진지에 남아 항복하고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삼삼오오 정글 속으로 사라졌으나 탈출에 성공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많은 숫자가 정글 속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는 루손군의 항복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제33보병연대는 사라졌다.


제65여단과 제4사단우익대가 D구역을 소탕하는 동안 제4사단 주력과 나가노지대는 샌빈센트선을 공격했다. 샌빈센트선에 배치된 필리핀군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일본군이 공격을 가하기도 전에 많은 병사들이 후방으로 도망치다가 장교에 의하여 다시 끌려왔다.


7일 아침이 되자 일본군은 샌빈센트선에 야포의 준비사격을 실시하고 제22비행단은 폭격을 가했다. 제22비행단은 이날 하루동안 169회에 걸쳐 제2군단 지역에만 92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비행제16전대는 20번에 걸쳐 78회 출격하여 주로 미-필리핀군의 차량을 상대로 15kg 짜리 폭탄 28발, 50kg 짜리 폭탄 278발, 100kg 짜리 폭탄 138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0전대는 6번에 걸쳐 47회 출격하여 리마이산 부근의 미-필리핀군 진지에 100kg 짜리 폭탄 42발과 250kg 짜리 폭탄 99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투하했다. 비행제62전대는 9번에 걸쳐 44회 출격하여 미-필리핀군 포병과 캅카벤 시가지에 100kg 짜리 폭탄 135발과 250kg 짜리 폭탄 27발, 500kg 짜리 폭탄 14발을 투하했다. 일본기들은 뉴바기오에 있던 미-필리핀군의 제2야전병원에도 10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89명의 사망자와 10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공습 과정에서 격추된 비행기는 없었으나 미-필리핀군의 대공포에 맞아 17대가 피해를 입었다.


준비사격이 끝나자 일본군의 보병과 전차가 진격을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나가노지대가 전차를 앞세우고 샌빈센트강을 건너 C구역을 지키던 제32보병연대를 공격했다. 제32보병연대가 무너지자 나가노지대는 B구역으로 몰려갔다. B구역을 지키던 임시항공연대는 대전차무기가 없었으므로 일본군전차를 보자마자 철수했다. 그러자 A구역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PA) - 샌빈센트선의 좌익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US)와 다름 - 도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2필리핀군단의 원래 방어선을 모두 무너뜨렸다.


나가노지대가 제32보병연대를 공격하자 직접 공격을 받지 않은 제51전투단과 제31사단의 잔존병들도 방어선을 떠나 도망쳤다. 샌빈센트선을 지휘하던 제31사단장 블루멜 장군이 직접 소총을 들고 패잔병들을 위협하여 방어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로서 샌빈센트선의 우익이 무너졌다.


샌빈센트선의 좌익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US) 및 제57보병연대(PS)도 오전 7시부터 준비사격과 폭격을 얻어맞았다. 병사들은 방어선을 지켰으나 샌빈센트선의 우익이 무너진데 이어 오전 10시 30분에 일본제4사단좌익대가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하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자 샌빈센트선은 증발했다. 블루멜 장군은 남쪽의 마말라강에 의지하여 새 방어선을 펴기로 했다.


제대로 훈련받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미-필리핀군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던 스카우트와 미군도 와해되기 시작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약해진데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된 이래 거의 잠도 못자고 이동과 전투를 반복한 병사들은 한계에 달했다.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낙오하면서 편제가 흐트러졌다. 마말라강에 도착했을 때 제31 및 제57보병연대의 병력은 합쳐서 1,000명이 되지 않았다.


7일 오후에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은 제1군단의 예비대인 제26기병연대(PS)를 제2군단에 배속시켰고 제2군단장 파커 장군은 말을 모두 잃은 기병연대를 일선의 유일한 장성인 블루멜 장군에게 배속했다. 블루멜 장군은 제26기병연대장 리 반스 대령에게 마말라강 북쪽에 전개하여 후퇴하는 제31 및 제57보병연대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제31 및 제57보병연대가 제26기병연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마말라강 남쪽으로 후퇴하자마자 기병연대도 뒤따라 마말라강 남쪽으로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26기병연대제1대대는 일본군의 포격과 제16전대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블루멜 장군은 병력들을 급히 마말라강 남안에 배치했다. 마말라강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들은 제26기병연대, 제31 및 제57보병연대, 그리고 군단예비대에서 배속된 제14(PS) 및 제803(US) 공병대대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블루멜 장군은 생각이 바뀌었다. 마말라강은 북쪽이 높아 적이 남쪽의 방어선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블루멜의 부하들은 너무 지쳐 있었으며 대부분 전날인 6일 아침에 식사를 하고는 36시간 동안 쫄쫄 굶은 상태였다. 블루멜 장군은 부하들에게 최소한 식사를 하고 잠깐이라도 쉴 시간을 주기 위하여 남쪽으로 3,700m 떨어진 알랑간강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펴기로 결정했다. 제2군단사령부는 불루멜의 계획을 승인하고 A 및 B구역의 병력에게도 알랑간강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제2군단 병력이 후퇴하는 동안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1군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7일 오후 4시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1군단장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제11사단을 동원하여 8번 오솔길을 따라 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샌빈센트선과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내려질 당시 이미 샌빈센트선은 무너진 상태였으나 웨인라이트는 모르고 있었다. 반격명령를 받은 존스 장군은 난색을 표했다. 존스는 제11사단 병사들의 체력이 너무 떨어져 공격 준비를 갖추는 데만도 최소한 18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웨인라이트는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에게 결정을 맡겼다. 킹 소장은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반격명령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제1군단에게 비누안간강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제1군단은 D구역의 붕괴로 인해 노출된 우측면의 위협을 없애고 방어해야 할 해안선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웨인라이트 장군은 워싱턴에 전문을 보내어 방어선이 비누안간강과 알랑간강까지 내려옴으로써 미-필리핀군의 영역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보고했다. 파국이 눈앞이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장군은 제2군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린 이날 전투로 승리를 확정지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4월 3일의 공격 이래 제4사단은 전사 150명, 부상 250명을 기록했고 제65여단은 전사 77명, 부상 152명을 기록했으며 나가노지대는 사상자가 없었다. 일본군이 잡은 포로는 약 1,100명으로 제4사단이 약 1,000명, 제65여단이 111명을 잡았다. 제4사단의 노획품은 소총 1,500정, 경기관총 60정, 중기관총 50정, 대전차포 5문, 박격포 11문, 야포 1문이었다. 제65여단이 노획한 물품은 소총 252정, 경기관총 27정, 중기관총 10정, 대전차포 5문, 박격포 11문, 야포 및 산포 14문, 155mm 평사포 1문, 자동차 44대였다. 나가노지대의 노획품은 소총 7정이었다.


미-필리핀군이 전면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혼마 장군은 마말라강에서 재편성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했다. 7일밤 11시에 하달된 명령에 따르면 8일의 목표는 캅카벤이었다. 서쪽의 제65여단은 남하하여 리마이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앙의 제4사단은 캅카벤 서쪽의 리얼강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가노지대는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캅카벤 시가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4군 사령부가 있던 발랑가 부근에 집결한 제16사단은 나가노지대를 뒤따라 남하하여 마리벨스를 향한 최종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일 공격도 물론 야포의 준비사격과 제22비행단의 공습에 이어 실시할 것이었다. 포병사령관은 처음으로 야포가 사정거리 내로 도달하면 코레히도르에 대한 포격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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