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공습 하의 생활
1941년 12월에서 42년 1월 초에 걸친 일본군의 공습 이후 코레히도르와 4개 요새섬의 병사들은 피해를 복구하고 방어를 강화했다. 말린타터널에서는 1921년 시작되었다가 워싱턴조약으로 중단되었던 확장공사를 마무리하여 해안방어사령부(Seaward Defense)로 사용했다. 3월 4일에는 바탄반도에서 코레히도르로 8인치 평사포 1문을 옮겼으나 운용 인원을 구하지 못하여 항복시까지 사용하지 못했다. 포트 휴이에서는 바다를 향해 있던 155mm 평사포 1문을 바탄 방향으로 옮겼다.
중요 설비는 보강했다. 공병은 말린타 터널의 서쪽 끝에 있던 커다란 우물 주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았다. 모리슨 언덕에 있던 휘발유 저장고와 탑사이드에 있던 항만방어부대의 전화교환소는 60cm 의 콘크리트로 둘러쌌다. 말린타 터널 입구와 바텀사이드의 항만 지역에는 철심이 들어간 콘크리트로 만든 정육면체 모양의 전차장애물을 설치하고 75mm 해안포대에는 지붕을 만들었다.
말린타 터널을 확장할 때는 일본군이 남쪽 카비테에서 포격을 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포격을 시작하자 해안방어사령부의 입구가 일본군이 쏘아대는 포탄의 탄도와 일치했으므로 공병이 입구 앞에 튼튼한 방호벽을 세웠다.
땅을 팔 도구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병사들이 어떻게든 도구를 입수하여 틈만 나면 참호를 팠다. 공병이 참호파는 방향이나 방법을 지도해 주었는데 공병이 이제 충분하다고 말해도 대부분은 계속 팠다. 개전 이래 코레히도르에서 병사들이 판 참호의 길이는 3km 가 넘었다.
1942년 1월 6일에 코레히도르의 식량 배급량은 바탄과 같이 정량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일과 및 땅파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대부분 식량을 찾으러 다녔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바지선이 코레히도르 부근에서 침몰하면 으례 병사들이 헤엄쳐 가서 먹을만한 것을 건져오곤 했다. 하루는 위스키를 가득 싣고 마닐라를 떠난 바지선이 코레히도르 해안 가까운 곳에 침몰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몰려들어 중유로 뒤덮인 바다로 뛰어들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헌병이 달려와 병사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제 막 해안으로 돌아온 불운한 병사에게서 위스키를 압수했으나 이미 많은 병사들이 건져낸 위스키를 들고 사라진 이후였다.
미군 수뇌부는 말린타 터널 내에 있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분지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맥아더와 참모들의 책상, 그리고 참모들이 자는 2층 침대가 있었다. 극동미육군 사령부의 건너편에는 항만방어사령부가 있었으며 필리핀자치령정부도 말린타 터널 안에 있었다.
(말린타 터널 안의 맥아더와 서덜랜드. 1942년 3월.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2 P.492)
야외에서 근무하는 인원에게 말린타 터널 안은 별세계였다. 터널 안에서는 필리핀과 미국의 관료, 각군의 모든 계급의 장교들, 빳빳하게 풀을 먹인 흰 제복을 입은 간호사, 종군기자, 인부, 수리 및 건설요원, 이발사, 환자, 그리고 공습을 피해 뛰어들어온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방향을 잃고 머뭇거리다 보면 매끈한 바닥에 대걸레질을 하던 청소부가 비키라고 요구했고 한쪽에서는 필리핀 소년이 구두를 닦고 있었다.
바탄반도의 병사들이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호화판으로 먹는다고 의심한 것처럼 코레히도르에서는 야외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자신들은 밖에서 고생하고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때 말린타 터널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과 경멸이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맥아더는 터널 안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더그아웃 더그' 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1942년 1월 초에 일본제14군은 제5비행집단을 뺏기면서 항공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1월 말에 실시한 오리온-바각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 실패하자 대대적인 증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항공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3월 16일에 말레이로부터 중폭격기 60대를 보유한 비행제60 및 제62전대가 클라크 비행장에 도착함으로써 제14군비행대의 항공기 숫자는 2배 가까이 늘었다. 당시 제14군비행대(제10독립비행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0독립비행대 본부
독립비행제76중대 : 97식 사령부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52중대 : 97식 군정찰기 9대
독립비행제74중대 : 98식 직접협동기 8대
비행제50전대제3중대 : 97식 전투기 10대
비행제16전대 : 97식 전투기 32대
비행제60전대 : 97식 중폭격기 35대
비행제62전대 : 97식 중폭격기 25대
합계 : 128대
해군에서도 1식 육상공격기 2개 비행전대, 제로전투기 1개 비행전대, 그리고 97식 함상공격기 1개 비행전대를 보내 주었다.
혼마 장군은 3월 24일부터 코레히도르에 대한 공습을 재개했다. 오전 9시 25분부터 비행제60전대의 97식 중폭격기 26대와 제62전대의 중폭격기 19대가 날아와 하루 종일 공습했다. 비행제60전대는 100kg짜리 폭탄 87발, 250kg 짜리 폭탄 36발, 500kg 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다. 비행제62전대는 100kg짜리 폭탄 88발, 250kg 짜리 폭탄 18발을 떨어뜨렸다. 해군도 전투기 3대와 1식 육상공격기 33대를 보내어 폭격했다. 밤에는 비행제60전대의 중폭격기가 3대씩 3번에 걸쳐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이날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은 71톤이다.
다음날인 25일에는 비행제60전대의 18대와 해군기 24대가 폭격했으며 밤에는 비행제62전대가 3대씩 3번에 걸쳐 야간폭격을 감행했다.
26일에는 코레히도르에 대한 주간폭격은 해군기만 실시했으며 야간에 비행제62전대가 3대씩 3번에 걸쳐 야간폭격을 감행했다.
27일에는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행제62전대가 중폭격기 35대를 내보내어 마리벨스와 코레히도르를 폭격했으며 야간에는 제60전대가 1개 중대를 내보내어 폭격했다.
28일에는 비행제60 및 제62전대에서 1개 비행중대씩 내보내어 코레히도르를 폭격했으며 야간에는 해군의 1식육상공격기 1개 중대가 폭격했다.
29일에는 비행제60전대는 폭격에서 빠지고 비행제62전대가 주간과 야간에 각각 1개 비행중대를 내보내어 코레히도르를 폭격했다.
30일에는 비행제62전대가 14대를 내보내어 코레히도르를 폭격했고 야간에는 2대씩 3번에 걸쳐 폭격을 감행했다.
31일에는 육군기의 주간폭격은 없었으며 야간에 제60전대가 2대씩 3번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4월 1일에도 육군기의 주간폭격은 없었으며 야간에 제60전대가 1대씩 3번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3월 24일부터 4월 1일까지 공습에 참가하는 육군기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으나 해군기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일본기의 공습으로 병사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24일 오전 9시부터 74시간 동안 60번의 공습경보가 울렸다. 일본기는 하루 종일 폭격을 가했으며 심지어 야간에도 소수가 날아와 폭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두번째 폭격 기간동안 27회에 걸쳐 야간폭격을 시도했다. 일본기들은 7,200m - 8,100m 높이로 다가와 소형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정확성이 떨어져서 피해는 미미했다.
공습경보는 보통 오전 9시가 좀 넘으면 울리기 시작했으며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제되었다.
1주일에 걸친 공습으로 바텀사이드의 극장, 우체국, 빵집이 부서졌고 해군통신감청소도 피해를 입었다. 맥아더로부터 물려받은 웨인라이트의 집도 파괴되었으며 탄약고 몇개가 폭탄을 맞아 탄약 일부와 TNT 상당량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폭격의 강도에 비해서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다. 12월의 폭격 이후 중요한 설비는 보호되었고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들어앉았다. 폭탄의 충격을 막는데 모래주머니의 효과가 좋다는 것이 알려지자 너도나도 모래주머니에 모래를 담아 주변에 쌓아두는 바람에 모래주머니가 품귀현상을 빚었다.
일본군도 대공포를 피하는 방법을 배웠다. 일본기들은 폭탄투하 고도를 6,600m 이상으로 높였다. 또한 소규모 편대로 나뉘어서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들었으며 폭탄을 투하한 순간 고도와 방향을 바꾸어 대공포의 조준을 방해했다. 이러한 일본기의 전술 변화로 인하여 대공포는 일본기가 폭탄투하점에 도달하기 전에 탄막을 펴는 것이 힘들어졌으며 명중율도 떨어졌다.
3인치 대공포의 가장 큰 문제는 9,000m 이상의 높이까지 쏘아올릴 수 있는 기계식 신관이 부족하여 1개 포대에서만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2월 3일에 잠수함이 기계식 신관을 가진 대공포탄 2,750발을 싣고 옴으로써 이제 2개 포대에서 9,000m 까지 사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지반 나머지 포대는 여전히 7,200m 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는 도화선식 신관을 사용해야 했다. 도화선식 신관의 또다른 문제는 30% 에 달하는 높은 불량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화선식 신관도 쓸모가 있었는데 일본기를 높은 고도로 몰아냄으로써 폭격의 정확성을 떨어뜨렸다.
미군은 대공화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엉뚱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기어리 포대장 벙커 대령은 12인치 박격포를 대공포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벙커 대령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제62해안대공포연대장 체이스 대령의 핀잔을 무릅쓰고 12인치 박격포의 304kg 짜리 고폭탄에 3인치 대공포의 도화선식 신관을 결합시켜 발사해 보았지만 폭발하지 않았다.
4월 1일을 마지막으로 코레히도르에 대한 제2차 폭격이 끝났다. 제14군비행대는 해체되고 새로이 제22비행단이 만들어져 제2차 바탄전투를 지원하는데 전념했다. 이제 코레히도르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탄반도의 미-필리핀군이 항복하고 나면 일본군의 모든 야포와 항공기는 코레히도르를 공격하러 돌아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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