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코레히도르의 방어태세


1941년 12월 말까지 코레히도르의 지상방어병력은 포병에서 차출한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포병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적이 상륙하면 보병으로서 싸우게 되어 있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적의 상륙에 대비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맥아더 장군은 12월 29일에 제4해병연대가 코레히도르에 상륙하자 연대장 새뮤얼 하워드 대령을 해안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대로 된 해안방어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4해병연대는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 크게 증강되었다. 1941년 11월에 상하이를 탈출할 당시 연대는 766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는 2개 대대로, 대대는 소총중대 2개와 기관총중대 1개로, 소총중대는 2개 소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연대는 올롱가포 해군기지의 해병분견대를 흡수하여 소총중대의 3번째 소대를 만들었고 이후 필리핀 내의 해병분견대를 흡수하여 2개의 소총중대를 창설했다. 코레히도르에 도착한 이후 연대는 카비테에서 철수한 해병을 모아 제3대대를 창설했다. 이로써 연대의 병력은 장교 66명, 부사관 및 사병 1,365명으로 늘어났으며 항복때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제4해병연대는 코레히도르에 도착했을 때 2,000명의 6개월치 식량, 10단위 이상의 탄약, 2년치 피복, 그리고 100병상짜리 병원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충분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갖추고 있었다.


해안방어사령관이 된 하워드 대령은 코레히도르를  3개의 방어지구로 나누었다. 꼬리 끝에서 말린타 터널을 포함하는 지역은 동부지구로서 제1대대를 배치했다. 부두, 미들사이드와 탑사이드의 막사와 건물 대부분을 포함하는 중부지구에는 제3대대를 배치하고 서쪽의 서부지구에는 제2대대를 배치했다.


제4해병연대는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자마자 기존 방어시설을 개선하고 새로운 방어시설을 만들었다. 그들은 동부지구에서만 34km 가 넘는 철조망을 새로 쳤으며 지뢰를 묻고 대전차호와 참호를 파고 사계청소를 실시하고 포좌를 만들고 최종 방어선을 설정했다.


4월 9일에 바탄반도가 함락되면서 일부 병력이 코레히도르로 탈출하여 항반방어부대의 병력이 늘어났다. 1942년 4월 15일 현재 항만방어부대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1942년 4월 15일 현재 항만방어부대의 병력현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9.html#29-2 P.529)


이중에서 해안방어사령부의 병력은 약 4,000명이며 그중 해병대원은 1.352명이었다. 829명은 해군으로부터 왔고 929명은 필리핀 육군으로부터 왔으며 나머지 약 800명은 육군과 필리핀 스카우트로부터 왔다. 이러한 잡다한 병력을 통솔하는 일은 어려운 임무였다. 이들중에는 필리핀인 식당급사, 필리핀육군항공대의 지상병력, 잠수모함 카노푸스의 생존자, 스카우트 포병이 섞여 있었다. 대부분 보병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바탄에서 온 병력은 체력이 떨어져 전투에 부적합했다.


방어의 핵심은 해병대원이었다. 동부지구에는 제1대대 약 400명을 중심으로 1,115명을 배치했다. 중부지구에는 제3대대 약 500명을 중심으로 동부지구와 비슷한 병력을 배치했다. 서부지구는 제3대대 약 600명을 중심으로 915명을 배치했다. 각 지구에 배치된 병력은 이웃 지구에 적이 상륙하더라도 이동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적이 상륙한 지구에 대한 증원은 예비대의 몫이었다.


예비대는 약 800명으로 사령부 및 근무중대 약 300명과 임시제4해병대대 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월 10일에 창설된 임시제4해병대대는 해병대 소령이 대대장을 맡았지만 장교는 해군과 해병대가 반반이었으며 부사관 및 사병은 대부분 해군이었다. 해군수병은 자기 분야의 베테랑이었으나 보병전투에 대해서는 기본도 몰랐다. 하지만 애당초 오래 복무한 군인들이고 또한 열심히 배웠으므로 훈련 시간이 짧고 여건이 나빴다는 점을 감안하면 급히 실시한 보병훈련의 효과는 좋은 편이었다.


해안방어에 배정된 4,000명 이외에도 하워드 대령은 필요하면 거의 모든 병력을 해안방어에 동원할 수 있었다. 유사시 보급병, 공병, 헌병으로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병력을 해안방어에 동원할 계획이 세워져 있었으며 심지어 민간인에게도 방어구역이 할당되어 있었다.


해안방어에 대한 화력지원은 155mm 평사포 1문, 75mm 야포 23문, 그리고 3인치 해군포 2문이 맡았으며 야간상륙에 대비한 탐조등은 11개였다. 동부지구에는 75mm 야포 10문과 탐조등 6개가 배치되었다. 중부지구에는 155mm 평사포 1문, 75mm 야포 7문, 3인치 해군포 1문, 탐조등 3개가 배치되었다. 서부지구에는 75mm 야포 6문, 3인치 해군포 1문, 그리고 탐조등 2개가 배치되었다.


비록 개전 이래 3개월에 걸친 공습으로 코레히도르의 목조 건물은 거의 불타고 섬 전체에 폭탄 구덩이가 생겼지만 해안포와 대공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m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탄약고는 폭탄의 직격에도 버텨내었고 포대를 둘러싼 콘크리트는 대부분의 폭격으로부터 해안포와 대공포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카비테의 일본군 야포로부터 포격을 받은 포트 드럼과 프랭크의 경험은 공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곧 코레히도르도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야포사격이 단 하루만에 3달 동안의 공습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사기는 높은 편이었다.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믿는 병사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일본군이 코레히도르를 점령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건강상태도 4월 초까지는 양호했다. 공습에 의한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으며 배식량 감소로 인한 영향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습하고 먼지가 많은 터널에서 생활함으로서 생기는 가벼운 호흡기 질환이 입원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설사와 배탈 또한 흔했으나 바탄에서 골칫거리였던 이질이나 말라리아는 드물었다. 터널 안의 병원은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바탄의 병원보다는 훨씬 시설이 좋았으며 환자 수에 비하여 충분한 의약품을 보유했다.


(말린타 터널 속의 병원 모습.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9.html#29-2 P.533)


말린타 터널은 여전히 코레히도르의 핵심이었으며 바탄 점령 이후 수용인원이 늘어났다. 따라서 2층 침대와 3층 침대가 많아졌고 공기는 더 나빠졌으며 이와 벼룩도 더 기승을 부렸다.


코레히도르의 발전소는 핵심 시설로서 냉동창고와 양수기 가동에 필수적이었다. 말린타 터널에도 전기가 꼭 필요했으나 그곳에는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디젤발전기가 있었고 연료도 6월말까지 사용할 양이 있었다.


전기에 의존하는 코레히도로의 급수체계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다. 폭격으로 급수관이 부서지면 해당 구역의  병사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취수원으로 가서 물을 받아와야 했다. 물은 주로 직경 60cm, 길이 170cm 에 달하는 12인치 포탄의 장약통에 받았다. 장약통은 대량의 물을 저장하기 좋았으나 크고 무거워서 다루기 어려웠다. 병사들에게 물을 받아오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코레히도르에서 물이 충분했던 적은 없었으며 사람이 늘어나면서 급수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4월 3일에 바탄반도 함락에 대비하여 물을 최대한 비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때 확인된 섬의 최대 저수용량은 1100만 리터였는데 이 정도로는 발전소가 작동을 멈추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코레히도르에서는 하루 두끼를 먹었다. 아침은 해뜨기 전에 먹었으며 저녁은 해가 진 후 8시 전후로 먹었다. 아침 메뉴는 커피가 떨어지기 전에는 주로 토스트와 커피였으며 가끔씩 베이컨이나 소시지가 나왔다. 저녁은 주로 연어, 통조림 야채, 쌀푸딩이 나왔으며 가끔씩 신선한 소고기나 스튜가 나왔다. 많은 병사들이 아침으로 나온 토스트를 절반만 먹고 나머지를 아껴 두었다가 낮에 먹음으로써 저녁까지의 긴 시간을 견뎠다.


바탄에서와 마찬가지로 코레히도르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쌀이 식사에서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미군 병사들은 대체로 쌀을 싫어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일본군의 공습은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축내었다. 3월 28일에 냉동창고가 폭탄에 맞자 병사들은 그날과 다음날 대량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나 대신 이후 며칠간 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4월 3일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모든 식량을 말린타 터널 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옮길 수 없는 분량은 휘하 부대에 배분했다. 따라서 많은 부대가 여분의 식량을 받아 저장해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추가로 보급했다. 이후로 공습에 의한 식량손실은 사라졌다.


바탄반도의 병사들이 코레히도르에서는 호화판으로 먹는다고 의심했듯이 코레히도르에서는 해군이 잘 먹는다는 불만이 있었는데 이는 근거가 있었다. 해군 또한 식량배급을 절반으로 삭감당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자체적인 식량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해군 식탁에는 커피, 설탕, 잼, 통조림 과일 등이 더 자주 올라왔다. 이런 불평등은 웨인라이트 장군이 육군의 불만을 받아들여 3월 21일에 해군이 관리하던 식량을 전체 식량풀에 통합함으로써 사라졌다.


코레히도르에서는 바탄같은 기아 현상은 없었다. 바탄반도가 함락되었을 때 코레히도르에는 정량의 절반으로 10주 동안 먹을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4월 초까지는 2배 가까이 더 많은 식량이 있었는데 이는 맥아더가 코레히도르를 떠나면서 항만방어사령관 무어 소장에게 20,000명이 정량의 절반으로 6월 30일까지 먹을 식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엄명한데 따른 것이었다. 4월 초에 바탄에서 일본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웨인라이트는 맥아더에게 20,000명이 아니라 현재 코레히도르에 있는 인원이 6월 30일까지 먹을 식량을 비축할 수 있도록 조건을 완화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에 따라 바탄반도의 병사들은 마지막 1주일 동안 코레히도르에서 보내온 식량으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었으나 대신 코레히도르의 식량 비축량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웨인라이트의 계산에 의하면 바탄이 함락되었을 당시 코레히도르에는 11,000명이 정량의 절반으로 먹을 경우 1942년 6월 20일까지 버틸 식량이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