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코레히도르의 마지막 한달

코레히도르에서는 야외에서 지내던 병사들이 안전한 말린타 터널 내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불평을 터뜨렸다. 그러나 1942년 4월이 되자 말린타 터널 안도 점차 지내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어디에나 먼지, 오물이 있었고 파리, 벼룩, 이가 득실거렸다. 씻지못한 사람에게서 나는 악취가 공기에 가득했으며 참기 힘들만큼 더웠다. 공습이나 포격이 잠깐 멈추면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를 쐬려고 출입구 근방에 몰렸다.

과밀, 부족한 식사, 그리고 계속되는 긴장에 시달린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화를 내었고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사람들 사이의 온갖 갈등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꼬박꼬박 지급되는 급료를 쓸 곳이 없었으므로 사방에서 주사위던지기, 브리지, 포커판이 벌어졌다. 자포자기한 간호사 중 일부는 우연히 눈이 맞은 남자와 하룻밤 사랑을 위하여 밤에 터널 밖으로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다. 말린타 터널 안의 장교식당에서 매일 아침 열리는 천주교 미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물론 터널 밖의 생활은 훨씬 불편하고 위험했다. 터널 밖에서는 과밀에 시달릴 필요없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포격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대피호로 달려가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행운을 빌면서 꼼짝없이 엎드려 있어야 했다. 적의 관측으로부터 도로를 감추어주던 나무가 사라지면서 도로 위를 다니는 일은 위험천만한 행동이 되었다. 낮에 차량이 도로에 나타나면 어김없이 일본군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배식을 위하여 모이는 일은 일본군의 포격을 부르는 자살행위였다. 따라서 병사들은 꼭꼭 숨어있는 취사병에게 한명씩 다가가 배식을 받은 다음 멀찍이 떨어진 은폐된 곳으로 가서 따로 먹었다. 어차피 식사래야 쌀죽에 빵 몇 조각 넣은 것이 전부였다. 여기에 힘들게 구한 잼을 가끔씩 섞어주는 정도가 취사병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본군의 포격이 심해진 4월 14일에 웨인라이트의 작전참모인 콘스턴트 어윈 대령이 병사들의 배식량을 정량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포격과 폭격의 강화로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늘었으므로 사기를 유지하고 일본군이 상륙할 때 제대로 싸우려면 정량 배식이 필요하다는 논지였다. 그럴 경우 코레히도르에는 1달간 버틸 식량만이 남아 있었으므로 웨인라이트 장군은 어윈의 주장을 물리쳤다. 결과적으로는 어윈이 옳았지만 웨인라이트로서는 한달 내로 일본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면 식량이 떨어져 5월 중순에 항복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코레히도르의 배식량은 계속 정량의 절반으로 유지되었다.

이때쯤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식량도 떨어졌다. 일부 병사는 마지막으로 가진 것을 털어서 술을 담갔다. 건포도와 자두를 으깨어 엿기름과 섞은 걸 양동이에 넣고 깨끗한 물을 부은 다음 열대의 날씨에 놓아두면 그럭저럭 마실만한 술이 만들어졌다.

4월 말이 되면서 코레히도르에도 영양실조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기병과 괴혈병이 발생했으며 비타민 A 부족에 따른 야맹증도 나타났다. 한 대공포대장은 군의관을 찾아가 부하들이 야맹증으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라면서 대구 간유를 얻어 부하들에게 먹였다.

일본군의 포격과 폭격이 강화되면서 부상자가 크게 늘었다. 말린타 터널 내의 병원에는 복도마다 부상자와 환자가 누워서 치료를 기다렸다. 부상자가 늘면서 말린타 터널 내의 병원은 4월 25일에 3개의 분지를 더 차지하면서 1,000병상을 확보했다. 공간이 모자라 환자들도 2층 침대나 심지어 3층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 환자들은 리넨천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세탁한 리넨천을 빨래줄에 널기 위해 터널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자살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제4해병연대를 비롯한 일부 부대는 자체 병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수술이 필요한 큰 부상이나 심각한 질병은 말린타 터널의 병원으로 이송해야만 했다.
환자의 후송도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코레히도르에서는 구급차가 2대 있었으나 한대는 전역 초기에 파괴되었고 한대만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급차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가야 했고 걸을 수 있는 환자나 부상자는 걸어야 했다. 열이 40도에 이르는 말라리아 환자도 걸어서 병원으로 가야 했다.

끊임없는 포격으로 인한 긴장과 수면부족, 식량 결핍은 병사들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4월 말이 되자 지휘관들은 부하들이 생기가 없고 만사를 귀찮아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정신적 문제로 인한 전력 약화는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였으나 치료받은 병사는 극소수였다. 이유는 바탄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적의 포격을 피할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병사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병원에 가길 싫어했으며 군의관과 지휘관들도 같은 이유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병사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치료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한 가장 실질적인 위협은 발전기의 피해였다. 발전기는 양수기와 탐조등, 해안포를 올리고 내리는 승강기, 말린타 타널의 환풍기와 전등에 공급할 전기를 생산했다. 4월 말이 되자 바텀사이드에 있는 주발전기는 피해가 누적되어 발전 용량의 일부 밖에 가동하지 못했다. 해안포대에는 자체 발전기가 있었으나 발전기를 돌릴 경유가 부족했다. 말린타 터널과 병원에도 자체 발전기가 있었으나 정전 사태는 가끔씩 일어나 손전등으로 수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 부족은 4월 말이 되자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때는 건기로서 몇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코레히도르의 저수지는 수위가 많이 내려간 상태였다. 여기에 일본군의 포격으로 양수기가 부서지고 수도관에 구멍이 나고 발전기가 피해를 입으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급기야 4월 말이 되자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이 수통 1개로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의 양은 낮에 38도까지 올라가는 기온에서 활동하는 병사에게는 너무 부족했다. 이제 물부족은 단지 불편한 정도를 넘어 건강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물부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장교들도 1컵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 그 물에 자신의 속옷과 양말까지 빨아야 했다. 한 장교는 빨래 순서를 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으며 깜빡하여 러닝 셔츠를 빨기 전에 더러운 양말을 먼저 빨기라도 하는 날에는 낭패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코레히도르에서 샤워를 한다는 것은 버섯을 듬뿍 곁들인 스테이크,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 아삭거리는 샐러드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갖추어진 만찬에 맞먹는 엄청난 사치였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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