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코레히도르 상륙

코레히도르 상륙을 책임진 제4사단장 기타노 겐조 중장은 상륙병력을 좌익대와 우익대로 구성했다.
보병제61연대장 사토 겐파치 대좌가 지휘하는 좌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61연대
전차제7연대 일부
산포병제51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
독립구포제2대대의 1개 중대(2문)
독립구포제15대대
박격제3대대의 1개 중대
공병제4연대(2개 소대 감편)
사단무선 1개 분대
위생대의 절반
제1야전병원의 절반
방역급수부의 1/4 

좌익대는 5일 밤에 코레히도르 꼬리 부분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며 미군이 항복할 경우에 대비하여 킹 소장의 항복을 받았던 제14군의 제1과고급참모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가 동행했다.

제4보병단장 다니구치 구레오 소장이 지휘하는 우익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4보병단사령부
보병제8연대의 1개 대대
보병제37연대
전차제7연대의 일부
독립산포병제3연대(제1대대의 제3소대 감편)
독립구포제2대대의 1개 중대(2문)
독립구포제14대대
박격제3대대(1개 중대 감편)
공병제16연대(1개 중대 감편)
사단무선 1개 분대
위생대의 절반
제1야전병원의 절반
방역급수부의 1/4


우익대는 6일 밤에 탑사이드의 제임스 협곡 부근에 상륙할 것이었다.

 

(코레히도르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27.html#27-1 P471)

4월 27일에 제14군 사령부에서 제4사단, 제22비행단, 제14군포병대 그리고 해군이 참가하는 회의가 열려 협조 방안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에 따라 제22비행단의 정찰기와 폭격기들은 공중에서 관찰한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상황을 제4사단에 전해 주었다.
제14군포병대는 원활한 화력지원을 위하여 60명으로 이루어진 관측대를 좌익대에 동승시켰다. 일본군이 말린타 언덕을 점령하는 즉시 이들이 포병관측소를 설치할 것이었다.

좌익대를 지휘하는 보병제61연대장 사토 대좌의 상륙 계획은 단순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5일 밤11시에 코레히도르 꼬리 부분의 북해안에 있는 인펀트리 포인트와 카발리 포인트 사이에 나란히 상륙할 것이었다. 서쪽에 상륙한 제1대대는 상륙 직후 서쪽으로 선회하여  말린타 언덕을 향하여 진격하고 동쪽에 상륙한 제2대대는 남하하여 킨들리 비행장을 점령할 것이었다.

 

(일본군의 코레히도르 상륙상황.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1.html P.554)

6일 밤에는 다니구치 소장이 이끄는 우익대가 머리 부분에 있는 제임스 협곡 부근에 상륙하여 꼬리 쪽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꼬리에 상륙한 좌익대와 머리에 상륙한 우익대가 중간에서 만난 이후 잔당 소탕에 들어갈 것이었다. 좌익대 상륙 이틀 후인 5월 7일까지 코레히도르 전투를 끝낸다는 것이 일본군의 계획이었다.

좌익대는 4일에 캅카벤 부근의 라마오강 계곡에 집결한 후 5일 아침에 라마오로 행군하여 해가 지자 상륙주정에 올랐다. 혼마 장군이 승선장에 나왔다. 그는 좌익대 지휘관 사토 대좌를 격려하고 승선하는 병사들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상륙주정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좌익대를 실은 100 척 이상의 상륙주정이 코레히도르에 접근하자 제14군 포병대는 10시 45분부터 11시까지 상륙예정지인 카발리 포인트와 인펀트리 포인트 사이를 집중격으로 포격했다.

좌익대의 상륙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륙주정이 라마오를 떠날 당시 조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코레히도르 부근의 조류도 서쪽으로 흐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코레히도르에 접근하자 조류가 동쪽으로 바뀌어 상륙주정들을 동쪽으로 밀어붙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예정된 상륙해안보다 1km 정도 동쪽으로 떨어진 카발리 포인트와 노스 포인트 사이에 상륙했다.

여기에 더하여 항행 도중 대대의 위치가 바뀌는 바람에 2개 대대가 동시에 상륙하려던 계획도 어긋났다.  제1대대와 함께 행동하던 사토 대좌는 자신의 동쪽에 있어야 할 제2대대가 반대로 서쪽에서 항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상륙하면 제1대대는 남하하는 제2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상륙 직후의 야간 전투 현장에서 이러한 기동은 극심한 혼란과 아군 사이의 오인 사격을 불러올 위험이 컸다. 따라서 사토 대좌는 제1대대를 앞서 나가게 했다. 그리하여 제1대대가 먼저 상륙하고 제2대대를 실은 주정들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 원래 계획대로 제1대대의 동쪽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대의 상대적인 위치는 복구되었지만 대신 병력이 분산되어 상륙했다. 그결과 먼저 상륙한 제1대대는 피해없이 기습적으로 상륙했으나 나중에 상륙한 제2대대는 방어태세를 갖춘 미군에 의하여 상륙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제4사단참모장 요시다 모토히코 대좌는 3가지로 정리했다. 

1. 조류 관계
2. 주정부대의 미숙
3. 상륙지점의 서쪽에 떨어지고 있는 저지사격 때문에 서쪽은 위험하다는 심리상태

상륙해안에 대기 중이던 미군 수비대는 하루종일 이어진 포격으로 얼이 빠졌다가 일본군의 상륙을 앞두고 포격이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따라서 제1대대의 상륙은 얼떨결에 허용했지만 제2대대를 태운 주정이 접근하자 반격을 가했다. 노스 포인트 바로 동쪽에는 75mm 야포 2문을 가진 포대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모르는 포대였다. 상륙주정이 접근하자 75mm 야포가 포격을 시작했고 제2대대의 선두 주정이 해안에서 270m 까지 접근하자 37mm 포 1문이 불을 뿜었다. 탐조등 1개도 잠시 켜졌으나 곧 일본군 포탄이 쏟아지자 황급히 껐다. 하지만 탐조등 없이도 해안에 접근한 일본군 주정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히 밝았기 때문에 수비대는 몇 척의 주정을 격침하고 거기에 탔던 일본군을 수장시켰다.

이때 보름달이 뜨면서 해안을 향하는 일본주정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자 웨이 포대에 남은 마지막 12인치 박격포를 포함하여 사격 가능한 모든 3인치 해안포 및 75mm 야포가 제2대대를 싣고 해안으로 향하는 주정에게 포격을 가했다. 주정에 타고 있던 일본종군기자 우노 가즈마로는 수백문의 포가 시뻘건 강철의 비를 쏟아부었다고 적었다.

2,000명으로 이루어진 좌익대가 상륙 과정에서 입은 피해는 극심했다. 5월 5일에서 7일까지 일본군이 입은 인명피해는 전사 및 행방불명 435명, 부상 및 환자가 428명으로 합계 863명인데 대부분 상륙과정에서 발생했으며 특히 동쪽에 상륙한 제2대대에서 심했다. 상륙주정도 절반 이상이 부서졌다. 보고를 받은 혼마 중장은 제1차 바탄공격 때처럼 실패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상륙 후 일본군의 상황은 혼마 중장의 상상보다는 좋았다. 코레히도르의 동부 지구를 맡은 제4해병연대제1대대가 지켜야 할 해안선은 9km 가 넘었기 때문에 북해안은 A중대만이 지키고 있었으며 상륙해안에 배치된 병력은 1개 소대에 불과했다. 따라서 오후 11시 10분에 피해없이 기습적으로 상륙한 보병제61연대제1대대는 해안에서의 짧고 격렬한 전투 끝에 해병대를 제압하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1개 중대는 남하하여 6일 새벽 1시에 남해안의 몽키 포인트에 도달했으며 대대 주력은 서쪽으로 꺾어 말린타 언덕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1대대의 주력은 1시 30분까지 덴버 포대를 점령하고 바로 동쪽에 남북해안을 잇는 연속된 방어선을 형성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덴버포대선이라고 불렀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과 말린타 터널 사이에는 2개 소대 밖에 없었으므로 무어 소장은 제59해안포연대의 병력들을 포대에서 빼내어 하워드 대령 휘하에 넣어주었다. 하워드 대령은 이 병력들을 반격에 투입했는데 말린타 터널에서 덴버포대선까지 가는 통로에 일본군이 포격을 집중시키고 있어 병력 투입이 어려웠다. 따라서 병력 집결이 늦어지자 미군은 충분한 병력이 모이기 전에 반격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덴버포대선의 일본군은 2시부터 4시까지 3번에 걸쳐 실시한 미군의 반격을 막아내었다. 오전 4시에 제2대대가 덴버포대선에 도착함으로써 덴버포대선은 크게 강화되었다.

하워드 대령은 오전 4시 30분에 예비대를 모두 덴버포대선 공략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정예병력인 제4해병연대의 제2 및 제3대대는 일본군의 추가 상륙에 대비하여 방어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반격의 주력은 프랜시스 윌리엄스 해병소령이 지휘하는 제4임시대대가 되어야만 했다. 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4임시대대는 비록 대대장과 장교의 절반은 해병대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해군이었으므로 보병으로서는 약체였다. 한 해병대 장교는 제4임시대대가 소총을 든 500명의 수병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덴버포대선을 공격할 미군의 북쪽과 중앙은 제4임시대대가 맡았으며 남쪽은 제4해병연대의 본부 및 근무중대 병력 300명이 맡았다. 예비대는 허만 하우크 대위가 이끄는 제59해안포연대의 60명이었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하여 병력 투입이 늦어져 윌리엄스 소령의 반격은 오전 6시 15분에야 실시되었다.

반격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800명을 동원하여 일시에 일본군을 때리자 강한 일격을 얻어맞은 덴버포대선의 남쪽과 북쪽은 무너졌고 중앙에서만 덴버포대의 기관총좌에 거치한 중기관총 1정에 힘입어 이쪽 방면을 맡은 T 중대의 진격을 막았다. T  중대장 베델 오터 해군대위는 5명의 자원자와 함께 기관총좌 제거에 나섰다. 이들은 30m 전방까지 포복으로 접근한 다음 동시에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정확하게 목표에 떨어져 기관총좌의 일본군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보병전투 훈련이 부족한 수병들이 기관총이 침묵하는 순간 즉시 돌격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일본군이 돌아와 기관총을 다시 거치하고 기관총좌를 제거한 6명 중 오터 대위를 비롯한 5명을 사살했다.  

북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Q중대는 병력을 실은 채 암초에 걸린 일본군의 상륙주정 2척을 발견했다. 중대는 상륙주정 2척을 격침하고 타고있던 일본군을 몰살시켰으나 미숙한 수병들은 이 간단한 임무에 매달려 수천발의 총탄을 소모하고 귀중한 시간을 30분이나 허비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의 처지는 절망적으로 보였다. 일본군은 말린타 언덕을 점령하기는 커녕 반격을 받아 밀려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탄약이 부족했다. 원래 제4사단은 좌익대를 실은 주정군에 24시간 동안 전투하기에 충분한 양의 탄약을 함께 실어 보냈다. 그러나 탄약을 실은 주정의 승조원들이 미군의 포화에 겁을 먹고 탄약을 주변의 바다에 대충 던져버린 후 돌아가 버렸다. 게다가 상륙 과정에서 주정을 많이 잃어서 추가 보급에 투입할 주정이 모자랐다. 혼마 장군은 추가 보급에 사용할 수 있는 주정이 21척 밖에 남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상륙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륙은 실패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반격의 충격에서 깨어나 방어선을 재편했으며 산포가 상륙하여 진격하는 미군의 머리 위에 포탄을 쏟아 부어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하워드 대령이 마지막 예비대인 제59해안포연대 60명을 투입했음에도 오전 8시가 되자 미군의 진격은 멈추었으며 여기에 일본군 전차 3대가 결정타를 먹였다. 일본군 전차가 실제로 가한 손해는 대단치 않았으나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그 자리에 못박힌 상태에서 적의 전차가 출현하자 대전차 무기가 없는 미군은 크게 놀랐으며 특히 훈련이 부족한 수병들의 동요가 심했다. 장교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우르르 도망치는 사태만은 막았으나 만일 적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면 그대로 와해될 가능성이 컸다.

이제 미군의 처지는 절망적이었다. 덴버포대선을 공격하던 부대는 일본군의 전차와 방어선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 채 일본군의 산포로부터 지속적으로 포격을 받고 있었다. 이 부대와 말린타 터널  사이는 제14군 포병대가 포격을 가하고 있어서 부상자도 후송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미군 전사자는 이미 800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가장 큰 문제는 6일 밤에 일본군의 추가 상륙이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제임스 협곡 부분에 집중 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일본군이 추가로 상륙할 것이 확실했는데 이제 웨인라이트에게는 예비대가 없었고 해안포도 거의 파괴되었다. 억지로 버티자면 하루는 버틸 수 있겠지만 일단 일본군이 추가로 상륙하고 나면 채 몇 시간을 버티기 어려웠다. 만일 끝까지 버티다가 일본군이 전투 끝에 말린타 터널에 도달한다면 그 결과는 대규모 학살이었다. 터널 안에는 1,000명이 넘는 환자도 있었다.

1942년 5월 6일 오전 10시, 웨인라이트는 상황을 평가한 후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브 참모장은 자유의 소리 채널을 통하여 항복하겠다는 방송을 내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어 장군은 정오까지 45구경 권총보다 구경이 큰 모든 화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동안 웨인라이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항복사실을 알렸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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