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남부 필리핀 항복

남부 필리핀을 담당한 비사야-민다나오군의 항복을 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것이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지휘관 중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회복이 불가능할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따라서 항복할 생각도 없었다.

일본군은 남부 필리핀에서 3개의 섬(세부, 파나이, 민다나오)에 상륙했을 뿐이었다. 세부와 파나이의 현지 지휘관은 일본군에게 패했지만 주력을 보존하여 안전한 산악지대로 철수했고 언제까지라도 게릴라전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세부와 파나이에 상륙했던 병력을 포함하여 남부 필리핀에 파견된 일본군은 민다나오에 집결하여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관 샤프 장군의 부대를 격파했지만 주력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샤프 장군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아직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이미 지역 지휘관들은 샤프 장군의 명령에 따라 게릴라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샤프 장군은 1942년 5월 6일 오전에 2개의 명령을 받았다. 하나는 웨인라이트 장군으로부터 온 것으로 비사야-민다나오군을 필리핀주둔미군사령부의 지휘에서 빼내어 맥아더의 직접 지휘 아래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맥아더로부터 온 것인데 웨인라이트의 항복이 임박한 것은 알았으나 그가 샤프 장군에게 보낸 명령은 모르는 상태에서 작성한 것으로 내용은 동일했다. 즉 앞으로는 웨인라이트의 명령을 받지말고 맥아더 자신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비사야-민다나오군은 맥아더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7일 밤늦게 웨인라이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비사야-민다나오군의 지휘권을 다시 행사하면서 항복하라고 명령하자 샤프 장군은 맥아더 사령부에 문의했다. 호주로부터 날아온 회신은 명확했다. 웨인라이트의 명령은 근거가 없으며 샤프 장군은 맥아더의 명령을 따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회신에서 맥아더는 샤프에게 휘하 부대를 잘게 나누어 게릴라전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코레히도르 수비대를 처형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일본군이 그런 위협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다. 전후에 벌어진 혼마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퓨 중령과 드레이크 장군은 처형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웨인라이트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이 없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이미 항복한 병사들을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처형 위협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물론 혼마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웨인라이트의 공포가 단순히 개인의 과잉반응이었다고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많은 장교들도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코레히도르에 억류된 장교들 사이에는 일본군이 지정한 날짜까지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하루에 10명씩 항복할 때까지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일본군이 그런 계획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없고 그 소문을 일본군이 퍼뜨렸다는 증거도 없지만 적어도 당시 처형에 대한 공포를 웨인라이트만이 가지고 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5월 8일이 되자 샤프 장군은 고민에 빠졌다. 공식적으로는 웨인라이트의 방송을 무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그랬을 경우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운명에 관해 웨인라이트와 같은 처형의 공포를 느꼈다. 결국 그는 웨인라이트가 파견한 트레이윅 대령을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트레이윅을 기다리는 동안 샤프는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휘하의 섬사령관들에게 자신의 지휘를 벗어나 게릴라전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샤프 장군은 10일 오후에 사어 하이웨이 상의 말라이발라이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에서 트레이윅 대령과 하바 중좌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트레이윅은 샤프에게 웨인라이트의 명령문을 전달하면서 만일 항복을 거부한다면 코레히도르 수비대 11,000명은 처형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샤프는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샤프 장군은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웨인라이트와 같은 처지에 빠졌다. 그는 이미 포기한 지휘권을  다시 확립하고 휘하 지휘관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해야 했다. 샤프는 트레이윅과의 회견을 마친 직후 휘하 사령관에게 무전을 보내어 이틀 전의 지휘권 포기 명령을 철폐하고 휘하 지휘관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이미 암호기를 파괴했기 때문에 이 명령은 평문으로 발신했다. 샤프는 오후 7시 15분에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어 대단히 심각한 이유 때문에 항복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다음날인 11일에는 섬지휘관에게 보내는 샤프의 명령문을 가진 전령이 출발했다.
웨인라이트는 5월 11일에 돌아온 트레이윅으로부터 샤프가 항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처형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샤프의 부하들은 널리 흩어져 있었으며 결정적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 필리핀 사람인 그들은 일본군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다.  만일 위험하고 고된 게릴라전을 펼 생각이 없을 경우 대부분 현지에서 징집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므로 구태여 항복하여 일본군의 자비를 구하면서 자유를 박탈당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에게 샤프의 항복명령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민다나오의 지휘관들은 대체로 항복명령을 따랐으나 필리핀인 장교와 병사들은 대부분 항복보다는 탈영을 택하여 집으로 돌아가거나 게릴라전을 펼쳤다.

세부에 주둔하던 치노웨스 장군의 항복은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치노웨스는 5월 7일 밤에 웨인라이트의 항복방송을 들었고 8일에는 샤프 장군으로부터 그의 지휘를 벗어나 게릴라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더니 10일 오후에 샤프로부터 이틀 전의 명령을 철회하고 항복하라는 무전이 들어왔다. 그 직후  세부의 일본군 지휘관이 목숨이 아까우면 항복하라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내왔다.

일련의 사태를 돌아본 치노웨스는 10일 들어온 샤프의 무전이 일본군의 조작이거나 아니면 샤프가 협박당하여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1일과 12일에 민다나오와 조심스럽게 무전을 주고받은 결과 상대가 샤프 장군이 아니거나 만일 맞다면 일본군의 총검 앞에서 떨면서 통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3일에 네그로스군 사령관인 힐스먼 대령이 보내온 무전이 그의 판단을 뒤집었다. 힐스먼은 샤프 장군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면서 곧 세부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이 가짜로 무전을 치거나 샤프 장군을 협박하여 무전을 보내도록 강요할 순 있어도 속임수로 전령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치노웨스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켰다. 샤프가 맥아더와 통신한다는 걸 알고 있던 그는 항복명령이 맥아더의 뜻이라고 착각했다. 치노웨스는 15일에 세부에 도착한 전령을 만나 샤프가 보낸 사람이 맞다는 걸 확인하자 다음날인 16일에 항복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던 시절은 물론 종전 이후인 1949년 2월까지도 자신이 맥아더의 뜻에 따라 항복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크리스티 대령이 지휘하는 파나이군은 게릴라전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었다. 병력은 잘 조직되었고 훈련 상태도 양호했으며 식량은 풍족했고 근거지는 안전했다. 파나이군은 이미 몇번의 치고 빠지는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일본군의 반격 시도를 맞받아쳐 큰 피해를 입히면서 좌절시켰다. 일본군은 해안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륙으로는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크리스티 대령은 언제까지라도 게릴라전을 지속할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5월 10일에 샤프 장군으로부터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크리스티 대령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샤프에게 답신을 보내어 자신에 대한 샤프의 지휘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크리스티는 오직 맥아더의 명령에 의해서만 항복할 것이며 그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내리는 항복명령은 모두 반역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문장으로 통신을 끝냈다.

샤프 장군은 11일에 다시 통신을 보내어 자신의 항복결정을 맥아더도 알고 있다면서 사이어 대령이 자신의 편지를 들고 파나이로 갈테니까 그를 만나라고 말했다. 크리스티 대령은 12일에 다시 강경한 답신을 보냈다. 그는 샤프가 자신에게 항복명령을 내리는 것은 반역행위라고 재차 주장하면서 과연 항복명령을 내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맥아더나 전쟁부에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 대령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말로 통신문을 끝맺었다. 그뒤로도 둘은 매일같이 무전기로 날선 공방을 벌였다.

무전기를 통해 샤프와 크리스티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5월 12일에 민다나오를 떠난 사이어 대령이 18일에 파나이에 도착했다. 그는 크리스티 대령을 만나 샤프 장군의 편지와 웨인라이트가 샤프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건넸다. 샤프 장군은 편지에 통신과는 전혀 딴판인 정중하고 간곡한 어조로 섬사령관들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웨인라이트는 물론 샤프 자신의 항복도 받아들여진 상태가 아니라고 적었다. 사이어 대령은 만일 섬사령관들이 항복을 거부하면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처형될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는 샤프와 같은 고민에 빠졌다. 항복을 거부하고 파나이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코레히도르 수비대 11,000명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있는 일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크리스티는 19일 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많았던 그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21일에 항복하겠다고 말한 다음 만 하루 이상을 아무런 명령없이 내버려 두었다. 부하들은 그의 뜻을 알아챘다.  21일 아침에 크리스티 대령이 항복했을 때 부하들의 90% 가 게릴라전을 펴거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탈영한 상태였다.

레이테와 사마르를 관장하던 코넬 대령도 5월 10일자 항복명령을 거부했다. 그가 책임진 섬에는 일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따라서 패배한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20일에 샤프 장군의 전령이 도착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코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또한 항복하기 전에 부하들에게 탈영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5월 26일에 코넬 대령이 항복했을 때 2,500명에 달하던 그의 병력 중에서 항복한 인원은 그를 포함한 미국인 장교 11명, 필리핀인 장교 40명, 그리고 필리핀인 부사관 및 병 20명 뿐이었다.

네그로스를 책임진 힐스먼 대령은 섬을 5개 지구로 나눈 후 각 지구마다 1개 대대를 배치했다. 대대마다 식량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이 균등하게 배분되었으며 대대장들은 게릴라전 수행을 위하여 연대 지휘로부터 벗어났다.
힐스먼 대령은 5월 10일의 항복명령을 거부했고 13일에 전령을 만난 이후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샤프 장군은 찰스 험버 중령에게 편지를 들려 다시 네그로스에 보냈다. 18일에 험버 중령이 네그로스에 도착하여 샤프의 편지를 건네주면서 간곡히 요청하자 힐스먼은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샤프의 명령에 따르면 힐스먼은 5월 20일에 인접한 파나이의 일로일로에 가서 항복해야 했으나 불가능했다. 이미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던 대대장들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힐스먼은 네그로스에 남아서 대대장들을 설득하기로 하고 부사령관인 카터 매클레넌 대령이 험버 중령과 함께 일로일로에 가서 일본군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매클레넌 대령이 20일 밤에 일로일로에 도착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일본군 지휘관 오타 구마타로 대좌가 자신이 직접 항복을 받겠다면서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네그로스 서해안에 상륙했다.  맥클레넌 대령과 동행한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나 오타 대좌는 기선을 제압한답시고 상륙하면서 사방에 총질을 했다.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일본군의 오만방자한 행동은 네그로스 주민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항복을 강요당해 기분이 나빴던 네그로스 주민들은 일본군이 상륙하면서 함부로 총질을 해대자 격분하여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지금까지 용인해오던 일본인의 상점을 때려부수고 200명에 달하는 네그로스의 일본민간인을 몽땅 구금했다. 필리핀군은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일부는 가세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오타 대좌도 당황했지만 더 놀란 것은 미군이었다. 일본군의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필리핀인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일본민간인이 살해당한다면 일본군이 어떤 보복을 가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다급해진 힐스먼 대령과 대대장들의 노력으로 구금된 일본민간인이 해를 입는 일은 막았지만 소요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필리핀에서 케손 대통령을 대리하던 마누엘 로하스 준장이 직접 네그로스에 가서 간곡히 호소하고 샤프 장군이 일본군의 동의를 얻어 이번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어떠한 처벌도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이후에야 소요사태는 진정되었으며 구금되었던 일본민간인들도 석방되어 일본군에 인계되었다.

소요사태는 가라앉았지만 힐스먼 대령은 여전히 휘하 대대장들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번이나 연장된 항복시한의 마지막날인 6월 3일에 힐스먼 대령이 이끌어 낸 결과는 1개 대대의 병력 95%, 그리고 다른 2개 대대의 병력 30%가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2개 대대는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따지고 보면 전체 병력의 30% 남짓만이 항복하는 셈이었으나 소요사태로 혼쭐이 난 오타 대좌는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후 1주일에 걸쳐 남아있던 수비대가 차례로 항복하면서 6월 9일이 되자 고립된 소규모 병력을 제외한 필리핀의 모든 병력이 항복했다. 일본군이 이날 필리핀을 점령했다고 선포하면서 필리핀주둔미군사령부는 소멸했으며 웨인라이트 장군도 이날을 기하여 공식적으로 전쟁포로의 신분이 되었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 장군들. 1942년 7월에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무어 장군, 킹 장군, 웨인라이트 장군, 일본장교 2명, 파커 장군, 존스 장군. 뒷줄 왼쪽부터 일본군 전령, 로우 장군, 풍크 장군, 위버 장군, 브라우어 장군, 비브 장군, 블루멜 장군, 드레이크 장군, 맥브라이드 장군, 피어스 장군, 호프먼 대령(통역), 일본군 2명.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2.html#32-3 P.583

 

이로써 필리핀을 둘러싼 6개월 간의 전투가 끝났다. 원래 1942년 2월 중순까지 끝마치기로 되어 있었지만 4달을 더 끌었으며 그 결과 일본군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손실을 입었다. 실망한 대본영은 혼마 장군을 제14군사령관에서 해임하여 도쿄로 소환했다. 이후 혼마는 한직으로 밀려났으며 1943년 8월에 예편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극동 제일의 양항인 마닐라항을 얻었다. 또한 필리핀은 그 자체로 남방자원지대와 일본본토 사이의 항로를 보호하는 강력한 기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140,000명에 달하는 미-필리핀군을 격파했고 미극동항공대와 아시아함대를 말레이 방벽에서 쫓아내었다.

필리핀 전역에서 제14군이 획득한 포로는 83,631명이며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 12대, 전차 및 장갑차 77대, 평사포 314문, 곡사포 63문, 야포 및 산포  152문, 대공포 83문, 대전차포 23문, 기타 경포 116문,  중기관총 443정, 경기관총 871정,  소총 58,500정.

물론 여기에는 댓가가 따랐다. 제14군은 필리핀 전역에서 전사 및 행방불명 2,772명, 부상 5,3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환자도 18,000명에 달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패배했지만 6개월에 걸친 저항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싸우면서 중요한 전쟁 초반기에 다른 곳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일본군 전력을 붙잡아 두고 소진시켰다. 실제로 필리핀은 남방작전에서 부차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필리핀 점령을 위하여 다른 어떤 전역보다도 많은 전력을 투입해야 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6개월 동안 일본이 마닐라항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이는 원래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으며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들이 패배한 것은 6개월 내로 그들을 구해야 할 태평양함대가 전쟁 첫날에 진주만에서 대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수비대의 분투가 1942년의 전략 상황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1942년 6월 초까지 일본군은 필리핀을 봉쇄한 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버마를 장악하고 비스마르크 제도를 넘어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까지 도달했으며 동쪽으로는 길버트 제도까지 진출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포트모르즈비와 미드웨이에서 막혔는데 일본군을 저지한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의 의미가 필리핀 전투보다 크다.

그러나 필리핀 전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전투였다. 전쟁 초기의 6개월 동안 연합군은 질풍같은 일본군의 진격 앞에 낙엽처럼 스러졌지만 필리핀 수비대만은 꿋꿋이 버텨내었다. 필리핀 수비대는 일본이 맹위를 떨치던 그 엄혹한 시기에 일본군은 결코 무적이 아니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뛰어난 지휘를 받는 군대는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일본군과 싸워야 할 태평양 지역의 미군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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