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웨인라이트의 항복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항복해야 했던 킹 소장과는 달리 웨인라이트 중장은 항복을 결심할 당시 상부로부터 항복할 권한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루손군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웨인라이트에게도 킹과 마찬가지로 항복할 권한이 없었다. 항복을 막는 명령은 맥아더 장군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도 내려와 있었다. 루스벨트는 1942년 2월 9일에 당시 극동미육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저항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맥아더의 권한과 책임을 이어받은 웨인라이트도 이 명령의 구속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바탄반도의 병력이 항복하자 루스벨트는 전쟁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4월 10일에 웨인라이트에게 전문을 보내어 기존의 항복금지명령을 철회하고 항복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서 맥아더가 14일에 루스벨트의 명령에 의거하여 자신의 항복금지명령을 철회함으로써 웨인라이트는 항복할 권한을 완전히 인정받았다.

1942년 5월 6일 오전 10시 30분에 웨인라이트의 참모장 비브 장군은 자유의 소리 채널을 통하여 항복하겠다고 방송했다.
비브 장군이 항복방송을 하는 동안 코레히도르의 무선통신사들은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관 샤프 장군에게 보내는 웨인라이트의 마지막 명령을 암호로 송신하고 있었다. 웨인라이트는 명령문에서 샤프 장군을 항만방어부대를 제외한 필리핀의 모든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에 임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휘에서 빼내어 맥아더 직속으로 옮겼다. 이로써 웨인라이트는 자신의 항복을 코레히도르와 마닐라만 해상요새로 한정지으려 했다.
항복방송은 10시 30분, 11시 그리고 11시 45분에 영어와 일본어로 반복하여 송출되었으나 일본군은 듣지 못했다.

그동안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파괴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소총을 제외한 모든 화기를 파괴했고 암호를 비롯한 기밀서류와 지도는 불태웠으며 통신기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부쉈다. 재무장교 존 반스 대령은 부하들과 함께 몇 시간에 걸쳐 이백만 페소가 넘는 지폐를 모두 잘랐다. 파괴작업이 끝난 정오가 되자 말린타 터널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말린타 터널 안의 사람들은 한계에 달했다. 더럽고 굶주리고 피곤에 찌든 사람들은 항복소식을 듣고서도 멍한 표정을 지을 뿐 분노나 슬픔을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보급장교는 식량창고를 활짝 열었고 사람들이 몰려가 식량을 가져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가 터지도록 먹은 다음 그 자리에서 곯아 떨어졌다.

정오가 되자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백기가 걸렸고 해상요새들은 포격을 멈추었으며 병사들도 사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일본군도 사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오후 12시 30분에 다시 한번 항복방송을 송출했음에도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의도를 알아들었다는 어떠한 반응도 없자 웨인라이트는 당황했다. 만일 전투가 다시 시작되면 이미 무장해제한 자신의 부하들은 속절없이 학살당할 것이었다. 이제 방법은 항복사절이 일본군을 만나 직접 항복의사를 전하는 것 뿐이었다. 골랜드 클라크 해병대위가 이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통역을 포함하여 4명으로 이루어진 클라크 대위 일행은 침대보를 막대에 묶은 백기를 든 채 지프를 타고 오후 1시에 말린타 터널을 나섰다. 일본군은 클라크 일행이 전선을 통과할 수 있게 허용했다.  잠시 후 클라크 대위는 제14군의 제1과 고급참모 나카야마 대좌와 통역을 만났다. 나카야마는 항복을 하고 싶다면 웨인라이트 장군이 직접 와야한다고 말했다.

클라크 대위가 말린타 터널로 돌아와 나카야마 대좌의 말을 전하자 오후 1시 30분에 웨인라이트가 세단을 타고 터널을 나가 나카야마를 만났다. 웨인라이트가 자신의 항복은 코레히도르와 해상요새에 한정된 것이라고 말하자 나카야마는 화를 벌컥 내면서 필리핀에 있는 모든 병사의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웨인라이트는 그런 문제는 혼마 중장과 직접 담판할 것이며 그 아래 계급과는 논의하지 않겠다고 받아쳤다. 나카야마의 보고를 받은 혼마는 바탄 반도로 데려오라고 말했다.

웨인라이트는 항만방어사령관 무어 소장을 자신의 대리로 지명하여 코레히도르에 남겨두고 참모장 비브 준장, 선임보좌관 존 퓨 중령, 사무보좌관 윌리엄 로렌스 소령, 보좌관 토머스 둘리 소령, 당번병 허버트 캐럴 병장과 함께 보트를 타고 코레히도르를 떠나 오후 4시에 바탄반도 동해안의 캅카벤에 도착했다.

웨인라이트 일행은 오후 4시 30분에 회담장으로 지정된 집에 도착했는데 혼마 중장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현관문 앞에 서서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일본병사 1명이 다가와 물 한잔씩을 건네 주었고 잠시 후 일본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댔다.
혼마 중장은 5시 정각에 도착했다. 번쩍거리는 캐딜락을 타고 나타난 혼마 중장은 부하들의 경례에 절도있게 답례한 후 현관에 놓아둔 기다란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혼마의 막료들이 좌우에 앉았고 웨인라이트 일행은 건너편에 앉았다.

혼마는 최대한 신경써서 잘 차려입고 나왔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새하얀 와이셔츠 위에 깨끗하게 세탁한 짙은 녹색의 정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훈장을 주렁주렁달고 군도를 찼다. 키가 180cm 에 가까워서 당시 일본인 중에서 키가 큰 편인 혼마는 가슴둘레도 컸으며 몸무게도 90kg 에 달해 당당한 풍채를 하고 있었다.

반면 웨인라이트는 키가 180cm 를 넘었으나 원래부터 별명이 '깡마른'(skinny)일 정도로 마른 체형으로 몸무게는 70kg  남짓했다. 그는 자신의 옷 중 상태가 가장 좋은 카키색 군복을 입고 나왔으며 가슴에는 아무 장식도 달지 않았다.

혼마의 오른쪽에는 제14군참모장 와치 장군이 앉았고 왼쪽에는 통역과 나카야마 대좌가 앉았다. 웨인라이트는 혼마의 맞은편에 앉았고 왼쪽에는 비브 장군과 둘리 소령이, 오른쪽에는 퓨 중령과 로렌스 소령이 앉았다. 일본인 뒤에는 종군기자, 사진사, 그리고 뉴스영화 촬영기사들이 있었다.

(웨인라이트-혼마 회담.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2.html#32-2 P.568)

 

회담은 의례적인 덕담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웨인라이트가 미리 작성한 항복문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혼마에게 내밀었으나 혼마는 가만히 있었고 참모장 와치 장군이 대신 받아 건네주었다. 혼마는 영어를 읽고 말할 줄 알았으나 문서에는 눈길도 안주고 바로 통역에게 넘기면서 방안의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본어로 번역하여 크게 읽으라고 말했다. 그는 회담 내내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통역이 읽기를 마치자 혼마는 전 필리핀의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는 남부 필리핀의 병사들은 비사야-민다나오군 사령관인 샤프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샤프 장군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는다고 대답했다. 혼마는 이 설명을 받아들지 않고 미국 라디오가 웨인라이트를 필리핀의 모든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웨인라이트의 지휘권을 보장한 공개 명령문을 신문에서 보았다고 반박했다.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은 며칠 전에 자신의 지휘로부터 벗어났으며 지금은 연락도 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혼마는 비행기를 하나 내줄테니 장교를 파견하여 명령을 전하면 된다고 응수했다.

이후 몇분동안 말씨름이 이어졌으나 웨인라이트는 자신이 비사야-민다나오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혼마는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킹 장군이 항복할 때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소. 당신이 일개 부대의 지휘관에 불과하다면 당신 또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소. 나는 같은 급인 총사령관과 협상하길 원하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회담장을 떠날듯한 시늉을 했다. 웨인라이트는 당황했다. 만일 혼마가 항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무장해제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기다리는 건 대량학살 뿐이었다. 웨인라이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혼마가 못 이긴 척 다시 자리에 앉자 웨인라이트는 비브 참모장 및 퓨 중령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필리핀의 병력 전체가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혼마는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지휘권이 없다고 말했소. 코레히도르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래도 항복하고 싶다면 상륙한 부대의 지휘관에게 항복하시오."

그러고는 회담장을 떠나 버렸다. 웨인라이트는 남아있던 나카야마에게 비행기를 하나 내주면 장교를 파견하여 비사야-민다나오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말했지만 나카야마는 그런 이야기는 코레히도르에 돌아가서 그곳의 현지 지휘관에게 항복할 때 하라고 말했다.  코레히도르로 돌아오는 보트 안에서 웨인라이트는 비사야-민다나오군이 항복을 거부할 경우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만일 맥아더의 구상대로 동격인 4개의 사령부가 미-필리핀군을 분할 지휘하는 체제를 갖추었다면 웨인라이트가 직면한 문제는 피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웨인라이트, 마셜, 그리고 루스벨트까지 반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맥아더의 구상은 비현실적이었다. 만일 맥아더의 구상대로 했다면 지휘체계의 모순 때문에 5월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웨인라이트가 코레히도르를 떠나 있는 동안 일본군이 말린타 터널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우선 말린타 언덕을 포위한 다음 통행을 금지했다. 웨인라이트를 배웅하고 돌아온 무어 소장마저 말린타 터널로 들어갈 수 없었다.
웨인라이트와 무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널을 지휘하던 보급사령관 찰스 드레이크 준장은 자신의 보좌관으로서 러시아계인 시어도어 칼라쿠카 중령을 터널 밖으로 내보내어 일본군을 만나보게 했다. 칼라쿠카는 일본군 지휘관을 만났으나 그는 일본어를 몰랐고 일본군 중에서는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다. 하지만 다행히 일본군 중에 러시아어를 아는 중위가 있었다.  칼라쿠카는 일본군 소좌 및 러시아어를 아는 중위와 함께 말린타 터널로 돌아왔고 이어서 미군과 일본군이 러시아어로 협상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일본군 소좌는 말린타 터널을 10분 내로 비우라고 요구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결국 입원환자, 의료진, 각 사령부의 참모, 그리고 터널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오후 4시까지 터널의 중앙통로에 모이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오후 4시가 되자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들어와 중앙통로에 모인 사람들을 터널 밖으로 쫓아내었다. 밤에 웨인라이트가 터널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터널을 차지하고 있었다.
6일 자정에는 예정대로 제4사단의 우익대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머리 부분에 상륙했다.

웨인라이트는 말린타 터널에 도착하자마자 코레히도르 현지 지휘관에게 항복하기 위하여 나카야마를 따라 길을 나섰다. 나카야마는 웨인라이트 일행을 코레히도르의 현지 지휘관인 보병제61연대장 사토 대좌가 본부를 차린 산호세 마을로 데려갔다.

협상은 없었다. 사토는 제14군사령부로부터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웨인라이트를 보자마자 미리 만들어 두었던 문서를 내밀었다. 혼마가 불러주는대로 작성한 그 문서에는 미-필리핀군 전체가 항복해야 하며 모든 장비와 무기의 파괴를 금한다고 적혀 있었다. 미-필리핀군의 현지 부대는 4일 내로 일본군이 지정한 곳에 집결하여 부근의 일본군 사령관에게 항복해야 했다. 마지막 부분에는 일본군은 필리핀의 미-필리핀군이 모두 항복한 이후에야 전투를 중지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웨인라이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6일 자정에 그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밀란타 터널에 돌아와 일본군이 보초를 서는 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웨인라이트는 7일 아침부터 항복조건을 이행하기 위하여 제14군의 정보참모 하바 히카루 중좌와 협의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사야-민다나오군에 대한 지휘권을 다시 확립하고 샤프 장군을 항복시키는 일이었다. 웨인라이트는 샤프 장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문을 작성했다. 작전참모인 제시 트레이윅 대령이 하바 중좌와 함께 이 명령문을 가지고 민다나오로 가서 샤프 장군을 만나 항복하라고 설득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웨인라이트에게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부하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할 것을 요구했다. 웨인라이트는 7일 오후 5시에 마닐라로 가서 오후 11시 50분에 KZRH 라디오 채널을 통하여 샤프 장군, 존 호란 대령 그리고 길레르모 나카 중령에게 항복하라고 방송했다. (호란 대령과 나카 중령은 북부 루손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펴고 있었다.) 이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의 민간방송국이 청취하여 전쟁부에 전달했다.


 (KZRH 채널을 통하여 항복명령을 내리고 있는 웨인라이트 장군.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2.html#32-2 P.573)

 

다음날인 8일 아침에 트레이윅 대령은 하바 중좌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민다나오로 떠났다. 웨인라이트의 보급장교인 니콜 갤브레이스 대령은 호란을, 그리고 칼라쿠카는 나카를 찾아 나섰다.

갤브레이스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호란 대령은 웨인라이트의 방송을 들었고 갤브레이스를 만난 후 14일에 항복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을 거부하고 도망쳐서 북부 루손에서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칼라쿠카도 마찬가지였다. 나카 중령의 부대를 찾아낸 칼라쿠카는 실제 지휘관은 에버렛 워너 중령이고 나카 중령은 부지휘관임을 알았다. 워너 중령은 항복하기로 했으나 나카 중령은 거부했다. 결국 나카 중령은 제14보병연대(PA) 중심의 부하를 이끌고 도망쳐서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팔라완과 남부 루손에서도 소규모 병력들이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은 5월 12일에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이들을 항복시키라고 요구하면서 필리핀의 모든 병력이 항복하기 전까지는 이미 항복한 병사들을 전쟁포로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퓨 중령을 레가스피로 파견하여 남부 루손에서 게릴라전을 펴고 있던 병력들을 항복시켰다. 팔라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필리핀경찰대 병력도 웨인라이트가 파견한 필리핀인 경찰대 간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항복했다.

이로써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해상요새와 루손의 항복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남부 필리핀을 지키던 비사야-민다나오군의 항복은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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