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공격준비사격

1942년 5월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야포와 항공기는 공격준비사격 단계로 옮겨갔으며 제4사단은 상륙정에 승선할 준비를 시작했다.

5월 1일의 포격 및 공습은 여태까지 최대 규모였던 4월 29일의 규모를 넘어섰다.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된 포격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는데 포격은 상륙 예정 지점인 코레히도르의 꼬리 부분과 제임스 협곡에 집중되었다.
일본기들도 오후 3시 15분부터 5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23회, 비행제60전대는 45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와 포트 드럼에 50kg 짜리 폭탄 36발, 100kg 짜리 폭탄 180발, 250kg 짜리 폭탄 60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떨어뜨렸다.

제14군이 공식적으로 공격준비사격의 시작으로 인정한 2일의 포격은 전날보다 더 심했다. 야포들은 오전 7시 30분에 일본기의 공습과 함께 포격을 시작하여 오후 7시 30분까지 지속했다. 도중에 3번에 걸쳐 2시간 30분의 휴식을 가졌는데 그 동안 군정찰기 5대가 코레히도르 상공을 정찰하여 표적의 파괴상황을 확인했다. 이날 24cm 유탄포는 5시간 동안 포격에 참가하여 3,600발을 발사했는데 이건 5초에 1발 꼴이었다.  일본기는 13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20회, 비행제60전대는 35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와 카발로섬에 100kg 짜리 폭탄 159발, 250kg 짜리 폭탄 45발, 500kg 짜리 폭탄 12발을 떨어뜨렸다.

(코레히도르 상공의 일본폭격기.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0.html#30-3 P.548)

이날 12인치 박격포 8문을 보유한 기어리 포대의 탄약고에 일본군의 24cm 포탄이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와 명중했다. 코레히도르 전체가 흔들리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10톤짜리 포신이 성냥개비처럼 하늘을 날았다. 포신 하나는 140m 를 날아가 골프장에 떨어졌으며 무게가 6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는 1km 를 날아가 지름이 1.2m 가 넘는 나무를 싹뚝 자르면서 떨어졌다. 27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낳은 이 폭발로 12인치 박격포 8문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기어리 포대는 폐허가 되었다.

2일 저녁이 되었을 때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방어시설은 큰 피해를 입었고 꼬리 부분에는 여러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때마침 불어온 서풍을 타고 화재가 크게 번지는 바람에 코레히도르의 가용 인원을 모두 투입한 후에야 겨우 불길을 잡았다.

일요일인 5월 3일에도 일본군은 하루종일 포격을 지속했으며 일본기들도 5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16회, 비행제60전대는 44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에 100kg 짜리 폭탄 150발, 250kg 짜리 폭탄 57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떨어뜨렸다.

그날 저녁 남중국해를 초계하던 잠수함 스피어피시가 마지막으로 코레히도르에 도착하여 어뢰와 함께 25명의 인원을 싣고 떠났다. 이때 떠난 인원은 작전참모 콘스턴트 어윈 대령, 재정감 로열 젱크스 대령, 감찰감 밀튼 힐 대령을 포함하여 육군장교 6명, 해군장교 6명, 그리고 간호사 13명이었다. 어윈 대령은 당시까지 생존한 모든 육군, 해군, 그리고 해병대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젱크스 대령은 회계 장부를 들고 있었다. 스피어피쉬는 이외에도 코레히도르에서 보내는 마지막 우편물과 함께 대량의 극동미육군사령부 및 필리핀미군사령부의 기록과 명령문을 싣고 호주로 탈출했다.

5월 4일의 포격은 또다시 이전의 기록을 갱신했다. 이날 하루동안 일본군 야포는 16,000발을 발사하여 코레히도르에서는 하루종일 포탄으로 기관총 사격을 받는 느낌이었다. 포격은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제임스 협곡과 꼬리 부분의 노스포인트와 카발리포인트 사이에 집중되었다.
일본기들도 6차례에 걸쳐 폭격을 가했다. 비행제16전대는 25회, 비행제60전대는 36회 출격하여 코레히도르에 50kg 짜리 폭탄 74발, 100kg 짜리 폭탄 95발, 250kg 짜리 폭탄 48발, 500kg 짜리 폭탄 11발을 떨어뜨렸다.

이날 탑사이드의 경계병이 북상하는 일본군주정 15척을 발견했다. 상륙부대의 승선을 위하여 바탄반도 동해안에 주정이 집결하고 있었다. 상륙이 임박했다.

상륙에 대항하는 코레히도르의 방어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4월 9일 이래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6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살아남은 병사의 체력은 크게 떨어져 있었다. 막강하던 해안포 세력도 많이 위축되었다. 5월 3일 저녁 현재 가용한 해안포는 12인치 해안포 4문, 12인치 박격포 1문, 155mm 평사포 16문, 3인치 해안포 7문이었는데 155mm 평사포 16문 중 9문, 3인치 해안포 7문 중 4문만이 바탄 방향으로 포격할 수 있었다. 정상 작동하는 대공포는 1개 포대 뿐이었고 기관총도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탐조등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해안방어시설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쯤에는 코레히도르의 반격능력도 거의 소진되어 4일 하루 동안 155mm 평사포 3문만이 간간이 반격을 가했을 뿐이었다. 코레히도르 남쪽의 포트 드럼과 프랭크의 14인치 해안포도 반격을 가했다. 포트 프랭크는 간헐적으로 사격할 수 밖에 없었고 포트 드럼은 꾸준히 사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공격준비사격의 마지막날인 5일에 일본군 야포는 얼마 남지 않은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방어시설을 파괴하는데 주력했다.
일본기도 아침부터 공격에 가세했다. 비행제16전대는 25회, 비행제60전대는 45회 출격하여 제4사단의 상륙예정지를 중심으로 100kg 짜리 폭탄 195발, 250kg 짜리 폭탄 56발, 500kg 짜리 폭탄 15발을 떨어뜨렸다.

코레히도르의 북해안은 폐허가 되었다. 해안선을 지키던 야포는 철수하거나 파괴되었고 탐조등은 파괴되거나 켜지지 않았다. 지뢰는 폭발했고 철조망은 끊어졌으며 기관총좌가 있던 자리는 커다란 탄공이 되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전화선이 모두 절단되었다. 한 포대에서 대대본부까지 전화선을 복구했지만 3분 만에 다시 끊겼다. 무전기는 거의 없었으므로 이제 지휘관들은 포탄이 작렬하는 지표면을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다니는 전령을 통해서만 상황보고를  받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오후가 되자 자욱한 연기와 먼지 때문에 탑사이드에서 꼬리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저녁이 되자 코레히도르의 북해안을 지키는 방어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날은 보름달이었으므로 상륙에 적당했다.

오후 9시에 코레히도르 동쪽 끝에 있던 청음반이 접근하는 상륙주정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이 소식은 H 스테이션을 거쳐 말린타 터널로 전달되었고 무어 소장은 경계령을 내렸다. 1시간 후에는 남하하는 일본군 주정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무어 소장은 오후 10시 30분을 기하여 적의 임박한 상륙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정이 되기 직전에 일본군의 포격이 잠시 멈추더니 꼬리 쪽에서 요란한 소화기 사격소리가 터졌다. 잠시 후 전령이 달려와 코레히도르 북해안의 노스포인트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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