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예비 포격

루손군 항복 이후 일본군은 코레히도르에 대하여 27일 간의 포격을 가했다. 포격의 위력은 가공할 수준으로 단 하루만에 지난 3달간의 공습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정도였다. 해를 가릴 정도로 울창했던 코레히도르의 나무는 그을린 그루터기만 남기고 모두 쓸려나갔다. 깊은 탄공, 포탄의 탄피, 그리고 구조물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이 코레히도르의 풍경이 되었다. 27일간의 포격으로 해안방어선은 파괴되었고 거대한 해안포는 침묵했으며 대공포 또한 사용불능이 되었다.

루손군이 항복한 4월 9일에 캅카벤 부근에 전개한 일본군의 7.5cm 야포가 코레히도르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예비포격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군이 포격을 시작하자 코레히도르 북쪽 해안에 있는 카이저 포대의 155mm 평사포가 대포병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바탄반도에 있는 병원, 민간인, 그리고 아군이 피해를 입을 것을 염려한 웨인라이트 장군은 12일까지 대포병사격을 금지했다.

일본기도 코레히도르 공격에 가세했다. 제22비행단은 9일 오후 4시 30분부터 8시 30분에 걸쳐 경폭격기 44대와 중폭격기 35대를 투입했고 해군도 육상공격기 20대를 보내어 폭격을 가했으나 피해는 가벼웠다.

제14군포병대장 기타지마 중장은 코레히도르를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눈 다음 세분하여 휘하의 18개 포대별로 할당했다. 아부케이에서는 관측기구가 떠올라 포격의 정확도와 표적의 파괴여부를 확인했으며 정보연대도 4월 13일부터 전개하여 코레히도르에서 반격을 가할 경우 섬광과 소음으로 포대의 위치를 파악했다.

4월 12일 오전 6시부터는 기존의 7.5cm 야포에 더하여 10cm 야포가 포격에 가세했다. 일본기들도 9번에 걸쳐 공습을 가했다. 이날 웨인라이트 장군이 대포병사격 금지명령을 철회하면서 미군 포대가 대포병사격을 가했으나 그때마다 일본군으로부터 더 많은 포격을 얻어맞았다.

일본군의 15cm 유탄포가 포격에 가세하면서 코레히도르는 실질적인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14일 저녁까지 155mm 평사포 2문을 보유한 포대 3개와 3인치 대공포 4문을 가진 대공포대 1개가 파괴되었다. 탑사이드에 있던 조준기와 고도탐지기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미군은 필사적으로 수리하여 최소한 하나는 작동 상태로 유지했다.

일본군은 탐조등 파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밤에 탐조등을 15초 이상 밝히면 당장 일본군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격이 강해지면서 인명피해도 늘었다. 15일에는 일본군의 포탄이 방공호에 명중하여 콘크리트로 된 지붕이 무너지면서 필리핀군 70명이 죽었다.

16일에 일본군의 포탄 파편이 탑사이드 연병장에 있는 국기게양대 부근에서 터지면서 파편이 국기를 매단 밧줄을 끊었다. 이 광경을 본 제60해안대공포연대 B 포대의 아서 허프 대위가 자원자 3명과 함께 달려가 성조기가 땅에 닿기 전에 손으로 받아내었고 사방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 밧줄을 교체하여 다시 게양한 다음 대피호로 정신없이 뛰었다.

18일부터 카비테에서 옮겨온 24cm 유탄포가 포격에 가세하면서 이제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튼튼한 포대도 위험해졌다.
24일에 24cm 유탄포의 포탄이 크로켓 포대에 명중했다. 크로켓 포대에는 승강기에 올려져 포격 시에만 나타났다가 포격을 마치면 지하로 숨을 수 있는 12인치 해안포 2문이 있었다. 일본군의 포탄은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와 승강기를 부수고 화재를 일으켰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장약에 인화하기 전에 겨우 불을 껐다. 그러나 크로켓 포대는 완전히 전투력을 잃었다.

일본군의 포탄에 맞은 크로켓 포대.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30.html#30-1 P. 539

 

다음날인 25일 저녁에는 24cm 포탄이 말린타 터널 출입구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일단의 사람 사이에 떨어졌다. 13명이 즉사하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는데 중상자 일부는 며칠 내로 죽었다.

일본군은 규칙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해뜨기 직전부터 시작된 포격은 정오가 되면 일단 멈추었다가 오후 3시부터 다시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코레히도르의 전화선은 오전 10시쯤 되면 끊어졌다. 밤새 통신병이 수리를 했지만 다음날 10시가 되면 다시 끊어졌다.

공습도 계속되었다. 4월 9일부터 30일까지 코레히도르에는 108회 공습경보가 울렸다. 일본기들은 처음에는 대공포 사정거리  바깥인 6,000m 이상의 고공에서 폭격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하여 조준기와 고도탐지기, 그리고 대공포가 피해를 입어 정확한 대공사격이 어렵게 되자 대담해져서 점점 더 낮은 고도로 날아와 정확하게 폭격했다. 어떤 날은 작동하는 고도탐지기가 하나밖에 없어서 전화로 대공포대에 적기의 고도를 불러줘야 했다.
4월 12 일에서 28일까지 제22비행단의 폭격 상황은 다음과 같다

비행제16전대 33회 출격  50 kg짜리 폭탄 125발 100kg 짜리 폭탄 36발
비행제60전대 68회, 비행제62전대 65회 합계 100kg 짜리 폭탄 390발, 250kg 짜리 폭탄 208발

포격과 공습은 천장절인 4월 29일에 절정에 달했다. 오전 7시 30분에 일본폭격기가 날아와 포트 휴이를 폭격했고 경폭격기 3대가 코레히도르의 남쪽 부두와 말린타 터널 입구를 폭격했다.  동시에 캅카벤에서는 관측기구가 떠오르고 주로 바텀사이드를 목표로 포격이 시작되었다.
오전 8시에 폭격기 6대가 더 날아와 말린타 언덕을 폭격했고 야포들은 목표를 말린타 터널의 입구와 북쪽 부두로 옮겼다.
8시 20분이 되자 정찰기가 코레히도르 상공을 맴도는 가운데 야포들은 탑사이드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일분군 야포는 미들사이드를 포격했다. 오전 10시에 포탄이 2개의 탄약고에 명중하여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날의 포격은 쉬는 시간 없이 지속되었다. 저녁이 되자 코레히도르는 검은 연기와 먼지에 휩싸였다. 숲이란 숲은 모두 불길에 휩싸였고 탄약고는 계속 폭발하고 있었다.  말린타 언덕 표면의 구조물은 일소되었다.
관측소는 파괴되었고 해안의 대형 탐조등에 전원을 공급하던 발전소는 불타버렸다. 해안방어용 75mm 야포 3문과 4연장 1.1인치 대공포 1문도 파괴되었다. 이날 제14군포병대는 약 5,000발을 사격했다.
이날 제22비행단의 폭격상황은 다음과 같다.

비행제16전대 : 6차에 걸쳐 33회 출격. 50kg 짜리 폭탄 198발 투하. 1대가 미군 대공포에 대파
비행제60전대 : 50회 출격. 100kg 짜리 폭탄 211발, 250kg 짜리 폭탄 30발, 500kg 짜리 폭탄 16발 투하.
 
그날 저녁에 호주로부터 카탈리나 비행정 2척이 약간의 의약품과 기계식 신관 740개를 싣고 코레히도르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물량과 대비되는 초라한 보급이었다.

코레히도르에서도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4월 18일에 155mm 평사포대들은 노출된 진지를 벗어나 견인차 1대와 평사포 1문이 짝을 이룬 체제로 변환했다. 평사포는 한곳에서 포탄을 몇발 날린 다음 반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20일에는 탐조등 2개에도 견인차를 붙여 이동식으로 바꾸었다.

포트 프랭크와 드럼도 반격에 가담했다. 포트 프랭크의 14인치 해안포는 승강기에 설치된 방식이었는데 몇발 발사하고는 반격을 피해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포탑에 들어있는 포트 드럼의 14인치 해안포는 그럴 필요없이 계속 발사했다. 포트 드럼에서는 항복하는 순간까지도 5분 간격으로 14인치 포탄을 계속 발사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격한 것은 12인치 박격포 8문을 보유한 기어리 포대와 3문을 보유한 웨이 포대였다. 문제는 일본군 야포를 공격하는데 효율적인 순발신관을 장착한 304kg 짜리 고폭탄이 400발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은 지연신관을 장착한 철갑탄이었는데 지연신관은 지상 목표물에는 효과가 없었다.  병기부에서 지연신관을 개조하여 착탄하는 순간 터지게 만들었으나 전 인원이 달려들어도 하루에 25개 밖에 개조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가장 위협적인 12인치 박격포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웨이 포대는 일본군의 집요한 대포병사격으로 24일에 12인치 박격포 1문을 잃었고 이후 1문을 더 잃어 일본군 상륙 당시 1문만이 살아남았다. 기어리 포대는 4월 말까지 용케 피해를 면했으나 5월 2일에 포격을 받아 파괴되고 만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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