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마우반 방어선(2) - 도로봉쇄점 전투
1942년 1월 18일 아침부터 기무라 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제1필리핀군단장 웨인라이트 장군은 적의 전력이 증강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초선의 병력을 주저항선으로 후퇴시켰다.
이후 며칠간 미-필리핀군은 서부도로를 따라 가해지는 일본군 우익대(보병제122연대)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주력했다. 그동안 좌익대를 이끌던 보병제20연대제3대대장 나카니시 히로시 중좌는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에서 헛점을 발견했다. 그는 제31포병연대의 방어선이 서쪽의 제1보병연대나 동쪽의 K 중대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사이로 몰래 침투했다.
19일에 마우반 방어선을 몰래 통과한 좌익대의 1개 중대가 20일 오전 10시에 제1사단(PA)의 후방인 서부도로 상의 167이정표(KP167) 지점에 도로봉쇄점을 설치했다. KP는 Kilometer Point 의 약어로 KP167은 마닐라에서 167km 떨어진 지점을 뜻한다. 서부도로는 제1사단의 중장비와 보급품이 수송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도로봉쇄점은 큰 위협이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19일 오전에 일본군이 제31포병연대를 우회하여 침투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제91사단의 1개 대대를 제1사단에 배속한 후 제1사단장 세군도 준장에게 일본군의 침투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세군도 준장은 실랑가난산 기슭의 오솔길 3곳에 1개 중대씩 파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소수 병력으로 오솔길을 막은 필리핀군을 견제하면서 정글 속으로 우회하여 계속 침투했다.
또다른 예비대인 제26기병연대와 제91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필러-바각도로를 차단하려는 난바중대를 쫓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우반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maps/USA-P-PI-12.gif P.278)
따라서 21일 정오경에 일본군의 도로봉쇄점을 발견했을 때 제1필리핀군단에서 당장 동원가능한 예비대는 제92보병연대의 1개 소대 밖에 없었다. 제92보병연대장 존 로드먼 대령은 소대장 비벌리 스카든 중위에게 도로봉쇄점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스카든 소대는 몇백미터 전진한 후 사격을 받아 진격이 좌절되었다. 다급해진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92보병연대 본부중대에서 20명을 차출하여 만든 임시 소대를 직접 지휘하여 남쪽으로부터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역시 진격을 저지당했다. 도로를 봉쇄한 일본군은 처음에 1개 중대 규모였으나 침투에 성공한 병력이 계속 합류하여 22일 아침이 되자 보병제20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 전체가 도로봉쇄점에 집결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필러-바각도로를 지키던 제91사단과 제26기병연대, 그리고 제194전차대대 C중대의 1개 소대를 제92보병연대장 로드먼 대령에게 배속시킨 후 도로봉쇄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드먼 대령은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군에게 대전차무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로드먼 대령은 22일 아침에 전차 1개 소대만 내보내어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밤새 대전차장애물을 만들고 대전차지뢰를 깔아둔 상태였다. 앞선 전차 2대가 대전차지뢰에 파괴되자 나머지 전차는 방향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자 로드먼 대령은 정원 미달인 제26기병연대의 1개 차량화대대와 제72보병연대제3대대를 투입했다. 필리핀군은 적의 방어선까지 도달했으나 몰아내는데는 실패했다.
다음날인 23일에 로드먼 대령은 가진 병력을 모두 투입하여 대규모 공격을 실시했으나 역시 적을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23일의 공격이 실패하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로드먼 대령에게 제2경찰연대제3대대를 추가로 배속했다. 로드먼 대령은 다음날 동서에서 협격하기로 하고 23일 저녁에 제3경찰대대를 서쪽으로 우회시켰다. 제3경찰대대는 일본군에게 들키지 않고 우회하여 일본군 서쪽의 172이정표 지점에 도달했다. 이제 동쪽에서 필리핀군이 공격할 때 서쪽에서 동시에 제3경찰대대가 공격하면 병력이 모자라는 일본군은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러나 제3경찰대대는 뚜렷한 이유없이 힘들여 도착한 172이정표 지역을 떠나 밤새 일본군 남쪽의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따라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 24일 아침, 제91보병연대제1대대와 제72보병연대제3대대가 동쪽에서 공격할 때 제2경찰연대제3대대는 서쪽이 아닌 남쪽에서 공격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반대 방향인 동쪽과 서쪽으로 병력 분산을 강요당하는 대신 인접한 동쪽과 남쪽에 병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였던 이날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결국 로드먼 대령은 도로봉쇄점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로드먼 대령이 패배한 이유로 병력부족을 들기는 어렵다. 24일까지 로드먼 대령이 지휘한 병력은 제91보병연대제1대대, 제72보병연대제3대대, 제26기병연대제2대대, 그리고 경찰연대의 2개 대대, 곡사포 1개 중대, 전차 1개 소대, 그리고 몇몇 파견대로서 보병만 5개 대대에 달했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이 부대들은 모두 정원 미달에 지치고 굶주렸으며 제26기병연대와 곡사포중대, 전차소대를 제외하고는 자동화기가 전무했다.
하지만 로드먼 대령이 상대한 일본군의 처지는 훨씬 열악했다. 보병제20연대제3대대(1개중대 감편)는 21일에 도로봉쇄점을 만든 이후 미-필리핀군 방어선 후방에 고립되었다. 본대로부터의 추가 보급은 없었으며 무장 또한 침투시 도보로 가져온 것 밖에 없었다. 이 상태에서 감편된 대대 규모의 일본군은 나흘동안 야포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미-필리핀군 5개 대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미육군의 공식전사는 이 전투의 결과는 방어자에게 유리한 지형, 훈련, 그리고 의지의 차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고 적었다. 역사학자 헤들리 윌모트는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이 미-필리핀군보다 얼마나 우월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았다.
도로봉쇄점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주저항선의 제1사단은 우익대(보병제122연대)의 공세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끊긴 상태로 4일이 지나 24일 저녁이 되자 탄약과 식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탄이 떨어져 야포의 화력지원이 불가능해지자 제1사단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제3보병연대장 베리 대령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제71야포연대장 할스테드 파울러 중령과 상의한 다음 웨인라이트 장군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제1사단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사실 그때 웨인라이트 장군은 이미 맥아더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통신불량으로 베리 대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서부도로가 막혔으므로 철수는 해안을 따라 나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야포를 비롯한 중장비는 모두 파괴해야만 했다. 제1사단은 25일 오전 10시 30분에 서해안에 위치한 대대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제3연대제1대대가 후위를 맡아 일본군의 추격을 막았다.
철수한 제1사단은 26일 아침부터 바각에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몰골이 비참했다. 처음에 도착한 1,000여명의 병사 중 1/4 가량이 속옷 차림에 소총도 없어서 민간인과 구별할 수 없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야포의 대량 상실이었다. 제1사단은 모든 야포 - 2.95인치 산포 15문, 75mm 곡사포 10문, 75mm 자주포 4문, 155mm 평사포 2문 - 를 자기 손으로 파괴해야 했다.
제1사단이 철수하면서 마우반선의 동쪽을 지키던 제31포병연대와 제1보병연대 K중대도 철수했다. 이로써 마우반 방어선이 무너졌으며 동쪽 아부케이선의 붕괴와 함께 미-필리핀군은 주전투진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제1필리핀군단은 26일 아침까지 마지막 방어선인 후방전투진지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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