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마우반 방어선(2) - 도로봉쇄점 전투


1942년 1월 18일 아침부터 기무라 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제1필리핀군단장 웨인라이트 장군은 적의 전력이 증강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초선의 병력을 주저항선으로 후퇴시켰다.


이후 며칠간 미-필리핀군은 서부도로를 따라 가해지는 일본군 우익대(보병제122연대)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주력했다. 그동안 좌익대를 이끌던 보병제20연대제3대대장 나카니시 히로시 중좌는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에서 헛점을 발견했다. 그는 제31포병연대의 방어선이 서쪽의 제1보병연대나 동쪽의 K 중대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사이로 몰래 침투했다.


19일에 마우반 방어선을 몰래 통과한 좌익대의 1개 중대가 20일 오전 10시에 제1사단(PA)의 후방인 서부도로 상의 167이정표(KP167) 지점에 도로봉쇄점을 설치했다. KP는 Kilometer Point 의 약어로 KP167은 마닐라에서 167km 떨어진 지점을 뜻한다. 서부도로는 제1사단의 중장비와 보급품이 수송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도로봉쇄점은 큰 위협이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19일 오전에 일본군이 제31포병연대를 우회하여 침투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제91사단의 1개 대대를 제1사단에 배속한 후 제1사단장 세군도 준장에게 일본군의 침투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세군도 준장은 실랑가난산 기슭의 오솔길 3곳에 1개 중대씩 파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소수 병력으로 오솔길을 막은 필리핀군을 견제하면서 정글 속으로 우회하여 계속 침투했다.

또다른 예비대인 제26기병연대와 제91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필러-바각도로를 차단하려는 난바중대를 쫓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우반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maps/USA-P-PI-12.gif P.278)


따라서 21일 정오경에 일본군의 도로봉쇄점을 발견했을 때 제1필리핀군단에서 당장 동원가능한 예비대는 제92보병연대의 1개 소대 밖에 없었다. 제92보병연대장 존 로드먼 대령은 소대장 비벌리 스카든 중위에게 도로봉쇄점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스카든 소대는 몇백미터 전진한 후 사격을 받아 진격이 좌절되었다. 다급해진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92보병연대 본부중대에서 20명을 차출하여 만든 임시 소대를 직접 지휘하여 남쪽으로부터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역시 진격을 저지당했다. 도로를 봉쇄한 일본군은 처음에 1개 중대 규모였으나 침투에 성공한 병력이 계속 합류하여 22일 아침이 되자 보병제20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 전체가 도로봉쇄점에 집결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필러-바각도로를 지키던 제91사단과 제26기병연대, 그리고 제194전차대대 C중대의 1개 소대를 제92보병연대장 로드먼 대령에게 배속시킨 후 도로봉쇄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드먼 대령은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군에게 대전차무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로드먼 대령은 22일 아침에  전차 1개 소대만 내보내어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밤새 대전차장애물을 만들고 대전차지뢰를 깔아둔 상태였다. 앞선 전차 2대가 대전차지뢰에 파괴되자 나머지 전차는 방향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자 로드먼 대령은 정원 미달인 제26기병연대의 1개 차량화대대와 제72보병연대제3대대를 투입했다. 필리핀군은 적의 방어선까지 도달했으나 몰아내는데는 실패했다.


다음날인 23일에 로드먼 대령은 가진 병력을 모두 투입하여 대규모 공격을  실시했으나 역시 적을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23일의 공격이 실패하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로드먼 대령에게 제2경찰연대제3대대를 추가로 배속했다. 로드먼 대령은 다음날 동서에서 협격하기로 하고 23일 저녁에 제3경찰대대를 서쪽으로 우회시켰다. 제3경찰대대는 일본군에게 들키지 않고 우회하여 일본군 서쪽의 172이정표 지점에 도달했다. 이제 동쪽에서 필리핀군이 공격할 때 서쪽에서 동시에 제3경찰대대가 공격하면 병력이 모자라는 일본군은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러나 제3경찰대대는 뚜렷한 이유없이 힘들여 도착한 172이정표 지역을 떠나 밤새 일본군 남쪽의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따라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 24일 아침, 제91보병연대제1대대와 제72보병연대제3대대가 동쪽에서 공격할 때 제2경찰연대제3대대는 서쪽이 아닌 남쪽에서 공격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반대 방향인 동쪽과 서쪽으로 병력 분산을 강요당하는 대신 인접한 동쪽과 남쪽에 병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였던 이날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결국 로드먼 대령은 도로봉쇄점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로드먼 대령이 패배한 이유로 병력부족을 들기는 어렵다. 24일까지 로드먼 대령이 지휘한 병력은 제91보병연대제1대대, 제72보병연대제3대대, 제26기병연대제2대대, 그리고 경찰연대의 2개 대대, 곡사포 1개 중대, 전차 1개 소대, 그리고 몇몇 파견대로서 보병만 5개 대대에 달했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이 부대들은 모두 정원 미달에 지치고 굶주렸으며 제26기병연대와 곡사포중대, 전차소대를 제외하고는 자동화기가 전무했다.


하지만 로드먼 대령이 상대한 일본군의 처지는 훨씬 열악했다. 보병제20연대제3대대(1개중대 감편)는 21일에 도로봉쇄점을 만든 이후 미-필리핀군 방어선 후방에 고립되었다. 본대로부터의 추가 보급은 없었으며 무장 또한 침투시 도보로 가져온 것 밖에 없었다. 이 상태에서 감편된 대대 규모의 일본군은 나흘동안 야포와 전차의 지원을 받는 미-필리핀군 5개 대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미육군의 공식전사는 이 전투의 결과는 방어자에게 유리한 지형, 훈련, 그리고 의지의 차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고 적었다. 역사학자 헤들리 윌모트는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이 미-필리핀군보다 얼마나 우월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았다.


도로봉쇄점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주저항선의 제1사단은 우익대(보병제122연대)의 공세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끊긴 상태로 4일이 지나 24일 저녁이 되자 탄약과 식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탄이 떨어져 야포의 화력지원이 불가능해지자 제1사단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제3보병연대장 베리 대령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제71야포연대장 할스테드 파울러 중령과 상의한 다음 웨인라이트 장군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제1사단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사실 그때 웨인라이트 장군은 이미 맥아더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통신불량으로 베리 대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서부도로가 막혔으므로 철수는 해안을 따라 나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야포를 비롯한 중장비는 모두 파괴해야만 했다. 제1사단은 25일 오전 10시 30분에 서해안에 위치한 대대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제3연대제1대대가 후위를 맡아 일본군의 추격을 막았다.

철수한 제1사단은 26일 아침부터 바각에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몰골이 비참했다. 처음에 도착한 1,000여명의 병사 중 1/4 가량이 속옷 차림에 소총도 없어서 민간인과 구별할 수 없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야포의 대량 상실이었다. 제1사단은 모든 야포 - 2.95인치 산포 15문, 75mm 곡사포 10문, 75mm 자주포 4문, 155mm 평사포 2문 - 를 자기 손으로 파괴해야 했다.

제1사단이 철수하면서 마우반선의 동쪽을 지키던 제31포병연대와 제1보병연대 K중대도 철수했다. 이로써 마우반 방어선이 무너졌으며 동쪽 아부케이선의 붕괴와 함께 미-필리핀군은 주전투진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제1필리핀군단은 26일 아침까지 마지막 방어선인 후방전투진지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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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마우반 방어선(1) - 모론 공방전


제1필리핀군단이 지키는 마우반선은 동쪽의 실랑가난산 기슭에서 마우반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 서해안의 마우반에 걸쳐 있었다. 방어선의 동쪽 끝인 실랑가난산 기슭은 제1보병연대(PA)의 K 중대가 담당했다. K 중대의 동쪽은 제31사단(PA)소속의 제31포병연대가 지켰는데 보병으로 전환된 상태였다. 서쪽은 제31사단(PA)의 제3보병연대가 지켰다. 제31사단장은 피델 세군도 준장이었다.


(마우반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maps/USA-P-PI-12.gif P.278)


주저항선 북쪽 1.3km 에는 바얀다티부터 방어선 중앙까지 제3보병연대 병사들이 배치된 전초선이 있었다. 바얀다티 북쪽 3km 에 있는 모론과 바얀다티-모론 사이의 모래사장은 제1보병연대 I중대와 제26기병연대 G중대가 지켰다. 제1필리핀군단의 예비대는 제71사단의 전투병력을 흡수한 제91사단(PA), 제26기병연대, 그리고 제1보병연대(PA, 파견대 감편)였다.


일본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동쪽의 제2필리핀군단에 주력했기 때문에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으로는 보병제122연대(2개 중대 감편), 야포병1개대대, 공병1개 소대, 그리고 통신1개분대로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허약한 우측지대를 보냈다. 보병제122연대장 와타나베 대좌가 지휘하는 우측지대는 디날루피한을 떠나 올롱가포를 점령한 다음 남하하여 모론과 바각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측지대는 1942년 1월 9일 오후 7시에 디날루피한을 떠나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서진하여 10일 오후 2시에 비어있던 올롱가포를 점령했다. 야포는 무너진 다리와 파괴된 도로를 수리할 때까지 디날루피한에 남았다.


이틀 후인 12일에 우측지대의 일부가 제14군의 명령에 따라 현지에서 징발한 보트를 타고 수빅만의 입구에 자리한 그란데섬을 점령했다. 그란데 섬의 포트 윈트를 지키던 나폴레옹 보드로 대령은 12월 24일에 철수명령을 받고 25일까지 155mm 평사포 4문과 함께 바탄반도로 철수했다. 이때 남아있던 무기와 보급품을 제대로 파괴하지 않아서 일본군은 몇문의 대구경 고정식 해안포와 자주포, 그리고 155mm 포탄 수천발을 노획했다. 마바탕-마우반 방어선을 설정한 시점에서 포트 윈트에 대한 지원이나 보급은 불가능했지만 그렇다고 일찍 포기한 것은 큰 실수였다. 수빅만을 감제하는 포트 윈트에 수비대가 있었다면 일본군은 나중에 중요한 보급기지가 되는 올롱가포항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서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은 측면으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렸을 것이다.


우측지대는 14일에 올롱가포를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주력은 도보로 이동하고 일부 병력은 보트에 타고 모론에 상륙하기로 했다. 보트에 탔던 병력은 지도를 잘못읽는 바람에 모론과 올롱가포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상륙했다.


모론 북쪽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웨인라이트 장군은 모론에 제1보병연대, 제1공병대대, 야포 2개대대를 파견했다. 일찌감치 모론에 파견되어 쉴새없이 정찰활동을 하면서 지친 제26기병연대 G중대는 같은 연대의 E-F복합중대로 교체했다. 이 병력들은 제1사단장 세군도 준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현장지휘관은 제1보병연대장 맥컬럼 소령이었다.


우측지대 주력은 모론 북쪽에서 합류한 후 남하했다. 일본군의 전진은 웨인라이트 장군의 예상보다 빨라서 우측지대의 선두는 미-필리핀군이 모론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모론 바로 북쪽에 있는 바탈란강을 건넜다. 미-필리핀군의 선두에 선 것은 에드윈 램지 중위가 지휘하는 제26기병연대 G중대의 1개 소대로서 그때까지 군마를 보유하고 있었다. 27명으로 이루어진 램지 소대는 이날 아침에 철수 명령을 받았으나 주변 지형을 잘 알던 램지 중위가 자진하여 선두를 맡은 것이었다. 모론에 진입한 램지 소대는 한발앞서 마을 중앙에 진출한 일본군 선두로부터 총격을 받았는데 램지 중위는 총격을 가하는 일본군 뒤에서 적의 주력이 바탈란강을 건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것을 알아차린 램지 중위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미군의 마지막 기병돌격이 실시되었다. 27명의 기병은 굉장한 기세로 마을 중앙으로 돌격하면서 근거리에서 권총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기습적인 돌격에 놀란 일본군은 많은 시체를 남긴 채 바탈란강을 다시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다. 램지 소대는 직후에 도착한 E-F복합중대와 함께 방어선을 펴고 적의 공격에 맞서 모론을 지켰다. 5시간 후에 제1보병연대가 도착하여 모론을 확보했다. 이날 전투에서 램지 소대와 E-F복합중대는 박격포탄에 부상을 입은 램지 중위 자신을 포함하여 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램지 중위는 이날의 활약으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은성훈장. https://en.wikipedia.org/wiki/Silver_Star)


우측지대는 17일 아침부터 모론에 공격을 가했다. 이날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제1보병연대장 맥컬럼 소령이 머리에 부상을 입어 제3보병연대장 키어리 베리 대령이 제1보병연대장을 겸직했다. 일본군은 17일 저녁에 마침내 모론을 점령했으며 제1보병연대는 남쪽으로 2.5km 정도 물러나 언덕에 방어선을 폈다. 이 시점에서 우측지대만으로 미-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강력한 증원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은 13일에 바탄 서해안을 공격하는 부대를 크게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증강된 일본군은 단지 바각까지 남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각에서 필라-바각도로를 따라 동진하여 제65여단과 싸우고 있는 제2필리핀군단을 뒤에서 공격할 것이었다.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은 13일 오후 9시에 제16사단보병단장인 기무라 나오키 소장을 지휘관으로 하고 다수의 연대포와 속사포를 장비한 보병2개 대대 기간의 부대를 만들어 속히 서측지구로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제16보병단사령부, 보병제20연대(1개 대대 감편), 보병제33연대의 연대포 절반과 속사포 전부로 이루어진 부대가 15일 아침에 마닐라를 떠나 그날 밤에 샌페르난도에 도착했다. 기무라 소장은 서해안에서 싸우던 우측지대의 지휘권도 장악했다. 15일 밤10시를 기하여 병력 약 5,000명으로 이루어진 기무라 지대가 편성되었다. 동시에 제65여단은 제1필리핀군단을 공격할 책임으로부터 벗어났다.


기무라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6보병단사령부

보병제20연대(제1대대 감편)

보병제122연대(제1대대감편)

보병제33연대연대포중대의 절반과 속사포중대

야포병제22연대제5중대

공병제16연대의 1개 중대

독립공병제21연대의 1개 소대

전신제2연대의  무선 1개 분대

독립무선제54소대의 절반

제65여단통신대의 무선 1개 분대

독립자동차 1개 소대

독립치중병제51중대

제16사단위생대의 1/6

제16사단제1야전병원의 절반


기무라 지대의 주력은 16일 저녁에 올롱가포에 도착했으며 17일 아침부터 남하를 시작하여 18일 오전 10시에는 모론에 도착했다. 기무라 소장은 휘하 부대를 3개로 나눴다. 서해안을 담당한 우익대(보병제122연대)는 서부도로를 따라 공격했다. 좌익대(보병제20연대제3대대)는 모론을 동쪽으로 우회하여 모론 남쪽의 능선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동쪽을 담당한 좌측대(보병제20연대제3대대난바중대)는 실랑가난산의 기슭을 따라 제1필리핀군단의 동쪽으로 우회하여 필라-바각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병제20연대제2대대는 예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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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아부케이 방어선(3) - 반격실패


1942년 1월 16일 저녁에 아부케이선의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제51보병연대의 패주로 인하여 제51사단이 맡고 있던 아부케이선의 서쪽 전체가 무너졌다. 제51사단의 방어선을 복구하지 못하면 아부케이선을 포기해야 했다. 파커 장군은 필리핀사단의 제31보병연대(US)와 제45보병연대(PS)를 동원하여 제51사단의 방어선을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공격예정시간인 17일 아침까지 제31보병연대는 출발선인 아부케이하시엔다 동쪽에 도착했으나 길을 잃어 헤매던 제45보병연대는 아직 남쪽으로 4,6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따라서 파커 장군의 반격은 제31보병연대 단독으로 실시하게 되어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부케이 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7)


1월17일 오전 8시 15분에 제31보병연대는 아부케이하시엔다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12번오솔길(Trail 12)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좌익은 제1대대, 우익은 제2대대였으며 제3대대는 예비대였다. 좌익의 제1대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북상하여 저녁까지 발란타이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우익의 제2대대는 370m 정도 전진했을 때 강력한 적의 방어선에 부딪혔다. 거듭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제2대대는 진격이 정체되었다. 이로써 계속 북상 중인 제1대대와 간격이 벌어지자 예비대인 제3대대에서 K 중대가 파견되어 간격을 메웠다.


17일 저녁에 필리핀사단장 로우 준장은 부하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다음날인 18일 공격에는 토마스 도일 대령의 제45보병연대와 찰스 스틸 대령의 제31보병연대를 모두 투입하기로 결정되었다. 제31보병연대가 서쪽을 맡고 제45보병연대가 주공을 맡아 서쪽의 제31보병연대와 동쪽의 제43보병연대 사이로 공격을 가할 계획이었다. 제41사단을 실제로 지휘하던 맬컴 포이티어 대령이 제41사단의 포병단을 동원하여 화력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18일 아침이 되었을 때 제31보병연대의 서쪽을 맡고 있던 제1대대가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졌다. 따라서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의 좌익에 투입되었고 제45보병연대의 공격은 2개 대대로 실시했다.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제1대대를 위협하던 일본군을 밀어내고 제1대대의 서쪽에서 발란타이강에 도달하여 13km 길이의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로써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에 배속되면서 제31보병연대의 서쪽, 즉 아부케이선의 최서단에 자리잡았다.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서쪽은 단지 정글일 뿐이었다.


2개 대대만으로 공격한 제45보병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전진했으나 예정보다 공격을 늦게 시작한 까닭으로 18일 저녁까지 발란타이 강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쪽의 제31보병연대제2대대 또한 아직 일본군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발란타이강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18일 저녁이 되었을 때 일본군은 아직 아부케이하시엔다 북쪽에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18일 저녁이 되었을 때 제2필리핀군단의 상황은 엄중했다. 이마이 대좌의 보병제141연대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주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제45보병연대의 정찰병은 아보아보강 계곡을 따라 남하 중이던 대규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이들은 보병제9연대로서 부정확한 지도 때문에 길을 잃고 정글 속을 헤매는 중이었으나 어쨌든 아부케이선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온 지점에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제2필리핀군단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19일 정오에 제31보병연대는 돌출부의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이 전투에 전차투입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차단장 위버 준장은 그날 제2필리핀군단으로부터 전차 지원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동쪽의 제41보병연대의 2개 대대는 북쪽으로 진격을 재개하여 이른 오후에 발란타이강에 도달했다. 서쪽에서는 제31보병연대에 배속된 제45보병연대제3대대가 일본군으로부터 하루종일 총격을 받았다.


19일 저녁이 되었을 때 필리핀사단의 반격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부케이선 서단의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일본군으로부터 치열한 기관총 사격을 받고 있었다.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아부케이선 남쪽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파커 장군의우유부단이었다. 그는 나라 중장이 동부도로를 포기하고 아부케이선의 서쪽에 주력을 투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동부도로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서둘러 아부케이선의 서쪽을 집중적으로 보강한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20일과 21일 이틀 동안 미-필리핀군은 아부케이하시엔다 북쪽의 돌출부를 제거하려고 여러번 공격했으나 축차투입을 되풀이하면서 번번이 실패했다. 미-필리핀군이 돌출부 제거에 신경을 쓰는 동안 나라 중장은 주력을 아부케이선의 서쪽 정면에 집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집결을 마친 일본군은 22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제31보병연대의 방어선은 좌익에 제45보병연대제3대대, 중앙에 제31보병연대제1대대, 우익에 제31보병연대제3대대가 있었다. 제3대대의 동쪽에는 일본군이 형성한 돌출부가 있었으며 제31보병연대제3대대의 남동쪽에는 제31보병연대제2대대가 돌출부의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22일 오전 10시에 일본군 일부가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서쪽에서 몰래 발란타이강을 건너 밀림 속에 숨었다가 공격 시작과 동시에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서쪽 측면을 공격했다. 정오가 되자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은 주로 중앙을 담당한 제31보병연대제1대대 정면에 집중되었다. 엄청난 포격과 공습에 이어 일본군이 일제히 발란타이강을 건너 방어선을 공격하자 제31보병대대제1대대는 버티지 못하고 밀려났다. 정면과 왼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던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제1대대의 후퇴로 오른쪽 어깨까지 열려버리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제1대대 동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제31보병연대제3대대도 오른쪽의 돌출부와 정면의 일본군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판에 제1대대의 철수로 왼쪽 어깨마저 열려버리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22일 저녁까지 제31보병연대는 아부케이하시엔다의 동쪽과 남쪽에 걸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다. 아부케이하시엔다의 동쪽 900m 지점에 제31보병연대제2대대가 있었고 그 남동쪽에 제3대대, 그리고 이어서 제1대대가 방어선을 폈다.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약 90m 후방에서 예비대로 대기했다. 그리하여 반격을 시작한지 5일만에 제31보병연대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반격은 실패했다.


반격에 참가했던 병사의 상태는 열악했다. 식량이 모자라 사탕수수를 씹으면서 허기를 달래야 했고 낮에는 일본기의 공습에 시달리고 밤에는 일본군의 침투에 대비하느라 잠이 부족하여 틈만 나면 졸았다.

일본군의 야포가 남하하면서 일본군은 화력지원을 제대로 받은 반면 미-필리핀군 야포의 화력지원은 제약을 받았다. 미-필리핀군 야포가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면 연기를 보고 일본기가 달려들었다. 정글 덕분에 직접 피해를 입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때마다 포격을 중단하고 이동해야 했다. 일본군 보병이 박격포와 다수의 척탄통으로부터 충실한 화력지원을 받은 반면 미-필리핀군이 보유한 3인치 박격포의 포탄은 불발율이 매우 높았다.


후방에서는 일본보병제9연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보병제9연대는 17일에 아보아보강 계곡에 들어선 이후 계속 남하했다. 일본군이 구이톨에 접근하자 미-필리핀군은 반격을 시도했다. 19일 아침에 제21보병연대의 정찰대가 보병제9연대의 선두와 만나 가벼운 총격전 끝에 도망쳤다. 일본군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제21사단과 제31사단이 파견되었다. 제21사단은 적을 보자마자 도망쳤으나 제31사단은 용감하게 싸워 일본군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흥분한 병사들이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서로에게 사격을 가했다. 제31사단장 블루멜 대령이 달려가 서로 총질하고 있던 부하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미-필리핀군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보병제9연대는 21일 아침에 구이톨 부근에 나타나 구이톨 오솔길에 자리잡은 언덕을 점령했다. 큰 피해를 입고 재편성 중이던 제51사단이 남북에서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했다. 보병제9연대가 구이톨과 그 부근을 감제할 수 있는 언덕을 장악하자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제2필리핀군단 전체가 포위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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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아부케이 방어선(2) - 위기일발


1942년 1월 12일 하루동안 일본군 제65여단은 서쪽으로 주공을 옮기면서도 아부케이선에 대한 압박을 유지했다. 일본군은 제57보병연대 전방에서 칼라귀먼강 남안에 다시 발판을 마련했고 중앙에서는 제41사단의 전초선을 남쪽으로 밀어붙였다. 서쪽에서는 일본군이 제51보병연대의 방어선에 구멍을 내었다. 즉시 예비대가 투입되어 일본군의 추가 진출을 막고 방어선 일부를 탈환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동해안을 지키던 제57보병연대는 여전히 아카기대대(보병제141연대제2대대)로부터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아카기대대는 12일 밤에 제57연대와 서쪽의 제41연대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서 돌출부를 형성했다.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반격을 위하여 예비대인 제21보병연대로부터 제2 및 제3대대를 제57보병연대에 배속했다. 제57보병연대장 클라크 대령은 13일 오전 6시에 제21연대제2대대를 동원하여 아카기 대대의 돌출부를 공격했다. 공격해보니 돌출부가 예상보다 넓어서 제2대대는 오른쪽의 제57연대와 연결되기 전에 왼쪽의 제41연대와 연결이 끊어져 버렸다. 클라크 대령은 제2대대의 좌익에 제3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제3대대는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포격을 얻어맞고 그자리에 못박혔다. 그러자 클라크 대령은 제21연대 대신 예비대로 돌렸던 제57보병연대제2대대를 투입하여 13일 저녁에 겨우 돌출부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날 제43보병연대의 후방을 통과하던 제23보병연대는 일본군의 포격을 뒤집어쓰고 60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바탄반도의  중앙을 남하하던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험한 지형 때문에 13일에도 미-필리핀군의 주방어선에 도달하지 못했다.


14일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15일이 되자 제57보병연대 전면의 위협은 사라졌다. 제57보병연대장 아놀드 풍크 대령(13일 정오에 클라크 대령으로부터 연대장직을 이어받음)은 제21보병연대를 제2필리핀군단에 돌려주었다.


15일 오후 4시에 일본군 보병제141연대의 일부 병력이 발란타이강을 건너 남안에 도달하여 제41사단과 제51사단 사이의 작은 언덕을 장악했다. 제41사단과 제51사단에서는 병력을 보내어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했다.

제51사단은 위기에 빠졌다. 일본군의 주공이 제51사단 전면에 집중되고 있는데 사단장 존스 장군에게는 철수 과정에서 약화된 부대 밖에 없었다. 그는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에게 증원병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사실 일본군이 아부케이선의 서쪽 부분에 전력을 집중할 가능성은 맥아더 장군도 고려하고 있었다. 10일에 맥아더가 시찰을 다녀간 이후 11일에는 극동미육군사령부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이, 12일에는 부참모장 셔먼 장군이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을 찾아와 아부케이선의 서쪽 부분을 강화하라고 요구했다. 파커 장군은 증원을 요청했고 맥아더가 받아들였다. 15일 밤에 극동미육군사령부로부터 필리핀사단(US, 제57보병연대 감편), 그리고 웨인라이트의 제1필리핀군단으로부터 제31사단(PA)이 제2필리핀군단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부케이 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7)


예비대를 확보하자 파커 장군은 동부도로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제21보병연대제3대대를 제51사단에 배속하면서 반격을 명했다. 그런데 혼란통에 반격 명령만 전달되고 제3대대가 제51사단에 배속된다는 내용은 누락되었다.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반격할 전력이 안 된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명령에 따라 반격을 준비했다. 좌익의 제53연대가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우익의 제51연대가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할 것이었다.


16일 새벽에 시작된 반격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제51보병연대는 발란타이강을 건너 일본보병제141연대를 공격했는데 기습효과에 힘입어 일본군 전선을 무너뜨렸다. 일본군 전선에는 위험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팽창했다. 그러나 제51연대의 초반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사단장 존스 장군의 평가대로 제51사단은 공세를 취할 전력이 부족했다. 일본군은 초반 기습의 충격에서 깨어나 16일 정오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보병제141연대는 제51연대의 동쪽 측면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남쪽으로도 파고 들었다. 제51연대의 북서쪽에 있던 보병제9연대는 돌출부의 북쪽과 서쪽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남쪽으로 파고들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제51연대는 세방면에서 공격을 받는 동시에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닫자 제51연대의 사기가 무너졌고 이는 전선 붕괴로 이어졌다. 필리핀 병사들은 아침에 출발했던 진지를 지나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이로써 방어선 중앙에 구멍이 뚫렸다.


보병제141연대장 이마이 대좌는 적의 방어선이 뚫린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오전에 강력한 공격을 받아 전선이 붕괴되었던 충격이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방어선 너머에 얼마나 많은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적을 쫓아 방어선 너머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이번엔 자신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전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는 방어선을 돌파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제51연대의 동쪽을 지키던 제43보병연대를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한다는 보다 안전한 길을 택했다.


제51연대의 패주로 졸지에 왼쪽 어깨가 열려버린 제43보병연대는 기세가 오른 보병제141연대 주력의 공격을 받았다. 제43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유진 루이스 중령은 제41공병대대, 통신병, 보급병, 그리고 패잔병 등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총동원한 임시대대를 만들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보병제141연대의 주력이 제43보병연대를 공격하는 동안 일부 병력은 제43연대의 동쪽에 있던 제42보병연대를 공격하여 제43연대와의 연결을 끊으려했다. 실제로 일부 병력이 두 연대 사이에 진출했으나 제23연대에서 1개 대대가 달려와 침입자를 몰아내고 제43연대와의 연결을 유지했다.

제41사단의 우익을 맡은 제41보병연대는 일본군 보병제121연대 및 아카기대대(제141연대제2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41연대의 방어선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으나 제1필리핀군단으로부터 증원된 제31사단(PA) 소속의 제31보병연대제3대대가 달려와 가까스로 붕괴를 막았다. 


제51연대의 패주로 인하여 아부케이선의 서쪽 끝을 담당한 제53보병연대는 오른쪽 어깨가 열려버렸으나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았다. 일본군 보병제141연대는 동쪽의 제41연대를 공격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북쪽의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힘든 행군 끝에 제51보병연대와 격전을 치른 후 재편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53연대 후방에는 제51사단에 배속된 제21보병연대제3대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혼란한 하루가 끝날 때까지 제51사단에서는 제3대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결국 제3대대는 16일 하루동안 대기만 하다가 구이톨로 철수했다.


제53연대가 위험하다고 핀단한 제51사단사령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 과정은 엉망이었다. 길도 제대로 없는 정글을 통과하면서 부대가 흩어졌다. 대부분은 굶주리고 지친 모습으로 구이톨에 도착했으나 일부는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나뭇잎, 관목뿌리, 달팽이를 먹어가며 며칠간 걸은 끝에 서해안의 바각에 도착했다.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패잔병을 구이톨에서 재편성하여 방어선을 폈다.


1942년 1월 16일에 제2필리핀군단은 커다란 위기를 넘겼다. 제51연대가 패주했을 때 일본보병제141연대가 제51연대를 추격하여 그대로 방어선 안쪽으로 뛰어든 다음 뒤쪽에서 제41사단을 공격했다면 아부케이선이 붕괴했을 것이다. 다행히 보병제121연대는 제51연대를 추격하지 않고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제43연대를 공격했다.

또한 보병제9연대가 비어버린 제51사단 방어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살리안강을 따라 아부케이로 남동진했으면 제2필리핀군단의 우익이 포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지도에 이끌린 보병제9연대는 살리안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진격하는 대신 보다 남쪽의 아보아보강쪽으로 진출했다. 보병제9연대는 19일까지 정글에서 헤매었다.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필리핀사단장(US) 맥스 로우 준장에게 제51사단의 방어선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 로우 사단장은 휘하의 제31보병연대(US) - 제31보병연대(PA)와 혼동하지 말 것 - 와 제45보병연대(PS)에게 반격의 출발점인 아부케이 하시엔다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제45보병연대는 중간에 길을 잃어 반격이 개시되었을 때 출발선에서 4,600m 정도 남동쪽에 있었다.


1월 16일 저녁이 되었을 때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아부케이선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동부도로에 집중하려던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아부케이선의 서쪽 부분에 주공을 두어 제51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선두인 보병제9연대는 남쪽으로 깊숙이 진출한 상태였다. 실제로는 정글에서 길을 잃어 헤매고 있었으며 나라 중장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지만 어쨌든 존재 자체로 아부케이선의 미-필리핀군은 서쪽으로부터 위협을 느꼈다. 이제 제2필리핀군단이 아부케이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17일 아침에 실시할 제31보병연대(US)의 역습이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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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아부케이 방어선(1) - 동부도로 공세


제65여단은 1942년 1월 9일 오후 3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제2필리핀군단 지역을 강타한 포격에 이어 보병이 진격을 시작했다.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공격을 시작하면서 두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미-필리핀군 병력이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1-2만 정도에 불과하므로 저항이 약할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미군 방어선 위치를 실제보다 북쪽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첫번째 착각은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깨졌다. 전진하는 일본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톤단위의 포탄은 끝까지 싸우려는 미군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두번째 착각이 깨지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제14군의 의도에 따라 제65여단의 주공은 동쪽이었다. 제65여단의 4개 연대 중 3개가 동쪽인 제2필리핀군단 정면에 투입되었다.

여단의 좌익(동쪽)을 맡은 것은 보병제141연대장 이마이 다케오 대좌가 이끄는 좌익대였다. 좌익대는 보병제141연대, 독립속사포제3중대, 산포병제48연대제3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헤르모사에서 출발한 좌익대는 동부도로를 따라 칼라귀먼강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다.

소노다 대좌가 지휘하는 전차제7연대는 공병이 다리와 도로를 정비하면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좌익대의 추격에 협력할 예정이었다.

제2필리핀군단 방어선의 서쪽은 가미지마 대좌의 뒤를 이은 보병제9연대장 다케이치 스스무 대좌가 지휘하는 우익대가 공격할 것이었다. 우익대는 보병제9연대주력, 독립속사포제9중대, 산포병제48연대제2대대로 이루어졌다. 우익대는 알붐을 점령한 다음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좌익대와 합류함으로써 방어선의 적을 포위섬멸할 것이었다.

예비대인 보병제142연대는 좌익대를 뒤따르면서 발랑가 서쪽방면으로 남하할 것이었다.

제2필리핀군단을 공격하는 제65여단 주력은 제14군포병대의 화력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야전중포병제1연대장 이리 대좌가 지휘하는 포병대는 야전중포병제1 및 제8연대와 독립중포병제9대대로 이루어졌다. 포병대는 처음에 헤르모사 북쪽에서 화력지원 및 대포병사격을 담당하다가 전선이 남하하면 오라니까지 전진할 계획이었다.


제1필리핀군단이 방어하는 서쪽을 공격할 부대는 보병제122연대장 와타나베 류노스케 대좌가 지휘하는 우측지대였다. 보병제122연대(2개중대감편)과 야포병2개중대를 기간으로 한 우측지대는 올롱가포, 모론을 거쳐 바각까지 남하할 계획이었다. 나라 중장은 우측지대가 저항을 거의 만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아부케이 선이라고 불리는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마닐라만에 면한 마바탕에서 나티브산의 북동쪽 사면에 걸쳐 있었다.


(아부케이 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7)


동부도로를 포함하는 동쪽은 잘 훈련된 제57보병연대(PS)가 지키고 있었다. 중앙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병력이 충분한 제43사단이 맡아 발란타이강을 따라 방어선을 표고 있었다. 서쪽은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앨버트 존스 준장의 제51사단이 맡아 발란타이강의 북안을 따라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칼라귀먼강의 지류인 발란타이강은 얕아서 쉽게 건널 수 있었으나 게곡이 깊어 방어에 유리했다. 제51사단의 방어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약해져서 나티브산의 사면에 걸쳐진 방어선 서쪽 끝은 단지 개인호 몇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9일 오후 3시에 포격에 이어 진격을 시작한 제65여단 병사들은 서로 다른 수준의 저항을 받았다. 동쪽에서 공격한 좌익대는 미군의 엄청난 포격을 받았다. 반면 서쪽을 공격한 우익대는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하지만 좌익대도 본격적인 방어선을 만나지 않아서 진격 자체는 순조로웠다. 9일 저녁까지 좌익대가 만난 적은 헤르모사 남쪽에서 만난 제57보병연대의 정찰대 뿐이었다. 미군 정찰대는 가벼운 교전 끝에 철수했다. 9일 저녁에 이마이 대좌와 다케이치 대좌의 보고를 받은 나라 중장은 미-필리핀군이 전의를 잃고 퇴각중이라고 생각했다. 


1월 10일에 맥아더 대장이 바탄반도를 방문했다. 맥아더는 10일 새벽에 참모장 리처드 서덜랜드 소장과 함께 어뢰정을 타고 코레히도르를 떠나 해협을 건너 마리벨레스에 상륙했다. 동부도로를 타고 북상한 맥아더는 제2필리핀군단사령부에 들러 파커군단장을 비롯한 제2군단의 장교들과 회의한 후 전선을 시찰했다. 이어서 필러-바각도로를 따라 제1필리핀군단사령부에 들른 맥아더는 웨인라이트 군단장과 회의를 가진 후 코레히도르로 돌아갔다. 이것이 맥아더의 유일한 바탄방문이었다.


(전선 시찰 중인 맥아더 장군. 옆의 인물은 제51사단장 앨버트 존스 준장이다. 1942년 1월 10일.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8)


맥아더가 바탄을 방문중일 때 혼마 장군은 비행기로 항복권유문을 떨어뜨렸다. 제1필리핀군단은 한층 강력한 포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중에 혼마 장군은 필리핀군 상대로 전단을 뿌렸는데 내용은 맥아더가 필리핀인을 목숨을 담보로 항복권유를 무시하고 항전을 고집하고 있으니 그를 위하여 개죽음하지 말고 일본군에게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마이 대좌는 동부도로를 쉴새없이 때리는 미군의 포탄을 피하기 위하여 동부도로에는 아카기 대위가 지휘하는 제2대대(2개 중대 감편)만 남기고 주력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제41사단 방어선을 공격하기로 했다.


동부도로를 담당한 아카기대대는 10일 오후에 사멀 남쪽에서 제57보병연대의 전초선을 공격했다. 전초선을 지키던 필리핀 스카우트들은 짧은 총격전 후에 철수했다. 아카기대대는 더 이상의 보병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야포의 방해 때문에 저녁까지 사멀에서 남쪽으로 1,600m 떨어진 칼라귀먼강에 도달하는데 그쳤다. 보병제141연대의 주력은 야포의 방해는 덜 받았으나 지형이 험하여 10일 저녁까지 칼라귀먼강에 만들어진 제41사단의 전초선에 도달하는데 그쳤다.


조지 클라크 대령이 지휘하는 제57보병연대(PS)는 우익에 제1대대, 좌익에 제3대대를 배치하고 제2대대를 예비로 보유했다. 아카기대대는 11일 저녁에 칼라귀먼강을 건너 오후 10시에는 제3대대의 방어선에서 불과 140m 떨어진 사탕수수밭에 도달했다. 미군은 적이 사탕수수밭을 튀어나와 방어선에 다다르기 전에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사탕수수를 제거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실수였다. 일본군은 오후 11시에 무시무시한 함성과 함께 빗발치는 탄환을 뚫고 I 중대의 방어선으로 돌격했다. 선두의 일본군은 철조망을 만나자 서슴없이 몸을 던졌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동료의 등을 밟고 그대로 돌격했다. 예상 외로 빠른 돌격속도에 압도된  I중대는 중대장이 중상을 입고 부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밀려났다. 이로써 인접한 K중대의 측면이 열려버리자 제3대대장은 즉시 예비대인 L중대를 투입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했고 연대예비대인 제2대대에서 추가로 1개 중대가 달려온 다음에야 겨우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12일 새벽이 되자 필리핀 스카우트들은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I중대 진지를 탈환했다. 전투현장에 남은 일본군 시체는 200구에 달했다.


일본군 일부는 소규모 부대나 개인적으로 제57보병연대제3대대 주둔지에 침투했다. 제57연대는 1개 소대를 투입하여 12일 하루동안 소탕전을 벌였다. 소대장 알렉산더 니닝거 소위는 부하들을 소규모의 저격팀으로 만들어 수색하면서 일본군을 소탕했다. 소대는 니닝거 소위를 포함하여 약간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훨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12일 저녁까지 침투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니닝거 소위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서쪽으로 이동중이던 좌익대의 주력은 10일 밤에 별다른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아부케이 방아선의 서쪽을 담당한 우익대는 험한 지형과 부정확한 지도 때문에 정글 속에서 헤매었다. 11일 아침이 되었을 때 선두인 제2대대는 겨우 제51사단방어선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오라니강에 도달했다.


11일 오후가 되자 나라 중장은 공격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나티브산의 관측소에서 보내는 정보에 따라 동부도로를 때리는 미군의 화력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일본군 포병이 대포병전에 실시하려 했으나 정글에 가려 미군야포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나라 중장은 아부케이 방어선 서쪽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보병제141연대 주력은 더욱 서쪽으로 진격시키고 해안과 제141연대 사이에 예비대인 보병제142연대를 투입했다. 이로서 예비대인 제142연대는 좌익대가 되었고, 좌익대였던 제141연대는 우익대가 되었다.  제2필리핀군단의 서쪽 끝인 나티브산 능선을 담당한 보병제9연대의 2개 대대는 이제 우회대가 되었다. 우회대는 계속 남하하여 적의 방어선을  서쪽으로부터 포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보병제9연대의 1개 대대는 여단예비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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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일본군의 상황 및 계획


미-필리핀군이 바탄반도에서 방어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일본제14군은 약화되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필리핀 점령은 개전 이후 50일 내에 마쳐야 하며 이후에 제14군의 중핵인 제48사단과 제5비행집단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차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잔당 소탕 및 경비는 제16사단과 제65여단이 담당할 것이었다. 제65여단은 개전 45일째인 1월 22일에 필리핀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2월 29일에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과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타케 중장은 제16군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을 예정보다 1달 가까이 빨리 실시하자고 대본영에 건의하여 1월 1일에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1월 2일에 남방군은 제14군에게 주력인 제48사단과 제5비행집단을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방군 총사령부는 강력한 차출의지를 보여주면서 명령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하여 남방군 총참모부장 아오키 시게마사 중장을 파견했다. 아오키 중장은 1월 5일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나라 아키라 중장이 지휘하는 제65여단은 12월 30일 오전8시에 구축함 2척과 수뢰정 4척의 호위 아래 14척의 수송선을 타고 대만의 가오슝을 떠나 1월 1일 오후 2시에 링가옌만에 상륙했다. 이는 예정보다 3주일이나 빠른 것이었으나 제48사단의 차출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상륙한 제65여단의 1개 대대는 비행집단장 지휘 아래 들어가 비행장 방어임무를 맡았고 보병5개대대와 야포2개중대로 이루어진 주력은 도보로 남하하여 6일 오후에는 포락 남쪽에 도달했다.


제65여단은 원래 경비목적으로 창설되었으며 여단장 나라 중장의 의견에 따르면 전투에 부적합했다. 약 6,500명의 병력을 가진 제65여단은 3개 연대(제122, 제141 및 제142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연대는 2개 보병대대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보병대대는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중대 1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차량은 거의 없었으며 여단 전체에 야포라고는 2개 중대가 모두였다. 지원병력으로는 야전병원 1개, 공병부대 1개, 그리고 통신소대 1개를 가지고 있었다. 제65여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2선급 징집병이었으며 훈련도 부실하여 부대훈련을 중대급까지만 실시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적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루손에 있는 미-필리핀군의 병력이 미군 35,000명에 필리핀군 5,000 - 10,000명으로 총 40,000 - 45,000 명 정도이며 그중 바탄반도에는 25,000명 정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전차는 40대 정도로 예상했으며 약간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에서 농성중이던 미-필리핀군의 실제 병력은 약 80,000명에 달했다.

또한 일본군은 1월 6일에 헤르모사에서 노획한 미군 서류를 통해 미-필리핀군이 식량 부족으로 전날인 5일부터 정량의 절반만을 보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히 떨어진 적군을 공격하기만 하면 줄줄이 항복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혼마 중장이 바탄반도 공략을 쉽게 생각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바탄반도 공략이 본질적으로 적의 방어선을 공격하는 전투가 아니라 도망치는 적을 뒤쫓는 추격전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미-필리핀군은 급조한 방어선에서 잠시 저항하다가 후퇴할 것이며 바탄반도 남쪽 끝의 마리벨스 부근에서야 방어선을 펴고 본격적인 저항을 시도하다가 결국 코레히도르 섬으로 철수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혼마 중장은 약체인 제65여단에게 바탄반도 공략을 맡겼다. 작전은 단순하고 야심찼다. 제65여단은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할 것이었다. 주공인 동쪽에서는 동부도로를 따라 아부케이를 거쳐 발랑가까지 남하하고 조공인 서쪽에서는 서부도로를 따라 모른을 거쳐 바각까지 남하하여 다수의 적을 포위격멸할 것이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역시 주공을 동쪽에 , 조공을 서쪽에 두어 남쪽 끝인 마리벨스까지 남하한 다음 주공과 조공이 합류하여 적의 마지막 저항을 일소한다는 것이었다. 마리벨스 도달은 1월 20일로 예상했다.


물론 제65여단만으로는 이러한 공격이 불가능하므로 다양한 지원이 주어졌다. 제16사단은 보병제9연대, 야포병 1개대대(75mm 야포), 공병연대, 그리고 의무대를 지원했다. 제48사단은 야포병2개대대(75mm 야포)를 지원했다. 전차제7연대도 공격에 참가했으며 제14군은 150mm 유탄포를 가진 야전중포병제1연대 및 독립중포병제9대대 그리고 105mm 유탄포로 무장한 야전중포병제8연대를 지원했다.


항공지원은 제5비행집단의 일부 세력을 떼내어 1월 8일에 편성한 제14군비행대가 담당했다. 제10독립비행대장 호시 코마타로 대좌가 지휘하는 제14군비행대는 제10독립비행대(제52 및 제74중대 기간, 정찰), 독립비행제76중대(정찰), 비행제50전대의 1개 중대(전투), 비행제16전대(경폭 2개 중대)로 이루어져 전투기 11대, 경폭격기 36대, 정찰기 22대를 보유하고 정찰, 탄착관측, 그리고 지상지원을 담당했다. 여러 비행장에 흩어져 있던 제14군비행대의 항공기들은 1월 10일까지 클라크 비행장에 집결했으며 13일부터 주로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진지, 바탄 활주로, 그리고 마리벨스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16사단은 제65여단의 바탄 공세와 호응하여 마닐라만 남쪽에 있는 터네이트와 더 남쪽에 위치한 나숙부를 점령하여 바탄반도의 미군과 남쪽의 연결을 끊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1월 8일 현재 바탄반도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5.html P.246)


혼마 중장은 1월 4일 정오에 제65여단에게 남하하여 제48사단을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카하시 지대와 독립중포병제9대대는 제65여단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제65여단은 1월 8일 오후 6시까지 디날루피한과 헤르모사 사이에 전개를 마치고 다음날 오후로 예정된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제48사단은 제65여단에게 바탄 전선을 물려주고 마닐라 시내로 철수하여 미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설비를 사용하여 차량을 수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등 차기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제48사단은 1월 14일을 기하여 제14군의 지휘를 벗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책임진 제16군 지휘 아래로 들어갔다. 제48사단은 25일 오전에 혼마 장군의 열병을 받고 오후에 마닐라 시내를 행진했다. 이후 마닐라를 떠난 제48사단은 2월 8일에 링가옌만에서 수송선을 타고 루손을 떠났다. 필리핀 전투에서 제48사단의 전사 및 실종자는 358명이었다.

제5비행집단은 제14군비행대를 제외하고 대만으로 돌아가 정비를 받았다. 이후 제5비행집단의 주력은 태국 방면으로 배치되었으며 일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지원했다.


사실 제14군 내에는 바탄반도 공격에 대한 신중론이 있었다.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은 바탄반도의 지형이 험하므로 공격하기 어렵고 설사 바탄반도를 점령하더라도 코레히도르를 비롯한 마닐라만의 요새들을 공격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마닐라만 요새까지 점령하지 못하면 어차피 마닐라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바탄반도 공격준비는 오랜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며 제14군의 주력인 제48사단이 빠져나간 상황에서는 공격을 미루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탄반도는 봉쇄만 해두고 먼저 마닐라를 비롯한 후방을 안정시키고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후방을 정리한 다음 굶주림 때문에 약해진 바탄반도의 적을 공격하면 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아니면 봉쇄만 하고 있어도 어차피 바탄반도의 적은 식량이 모자라서 6개월이면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제1과고급참모인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는 반론을 폈다. 나카야마 대좌는 적이 바탄반도에서 농성하고 있는 이상 후방안정은 불가능하며 비록 어렵고 손실이 많이 나더라도 바탄반도의 적을 하루빨리 소탕하는 것만이 군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적이 식량배급량을 줄였다고 하여 적이 최대한 절약해도 6개월 버틸 식량만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방작전 전체의 시간표를 고려할 때 바탄반도를 6개월씩 봉쇄한다는 방침을 상부에서 받아들일 리 없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마에다 참모장의 의견이 옳았으나 당시의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린 혼마 장군은 나카야마 대좌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편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침공을 앞당기자는 남방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대본영 육군부는 바탄반도에서 미-필리핀군이 농성하는 상황에서 남방군 총사령부가 제48사단을 너무 빨리 제14군에게서 빼내려 하자 불안감을 느꼈다. 다나카 신이치 제1부장은 작전과 회의에서 남방군의 조치가 적당한지 의문이라며 제48사단을 당분간 제14군 휘하에 두어 바탄반도 공략을 마치게 한 후 다른 방면으로 전용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육군부의 불안은 필리핀에서 돌아온 남방군 총참모부장 아오키 중장이 제48사단 없이도 바탄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낙관적인 보고를 하면서 사라졌다. 스기야마 참모총장은 1월 10일에 열린 대본영 연락회의에 참석하여 제14군이 수주일 내로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에서 저항하고 있는 미-필리핀군을 완전히 격멸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인식 하에서 대본영 육군부는 1월 14일을 기하여 제48사단을 제14군에서 빼내어 제16군 휘하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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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바탄의 보급상황


바탄의 보급상황은 처음부터 심각했으며 갈수록 악화되었다. 오렌지계획에 따르면 바탄에는 43,000명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보급품을 축적해야 했다. 맥아더 장군이 이 계획을 폐기하고 해안에서 적과 싸우기로 결정하면서 바탄에 쌓여있던 보급품은 전방보급소로 반출되었다. 1941년 12월 23일에 맥아더가 바탄철수를 결심했을 때 바탄에는 연어통조림 약 1,040톤, 과일통조림과 채소통조림 약 70톤, 양념을 포함한 기타 식량 약 3톤, 그리고 휘발유 약 150만리터 등이 있었다.


바탄에 보급품을 본격적으로 수송하는 일은 23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쯤엔 보급해야 할 인원이 크게 늘어 있었다. 오렌지 계획에서 상정한 43,000명 대신 미-필리핀군 80,000명과 피난민 26,000명이 바탄반도에 들어왔다. 이 많은 인원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보급품을 수송하는 일은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도 어려운 과업이었다. 하물며 전쟁이 나서 부대가 철수하는 와중에 1주일 만에 수송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코레히도르에는 10,000명이 6개월간 사용할 보급품을 축적해야 했는데 이미 7,000명분의 식량이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간단했다.


바탄반도는 상황이 달랐다. 마닐라에서 바탄에 이르는 유일한 육로는 철수하는 부대와 함께 사용해야 했으며 차량마저 모자라서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다. 철도가 있었으나 협궤라 적재량이 작았고 기관사를 포함한 승무원들이 대부분 달아나 무용지물이었다.


포트 맥킨리와 포트 스토첸버그를 비롯한 전방 보급소에서는 관리병이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많은 보급품들이 뒤에 남겨졌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 후퇴하는 부대가 버려진 보급소에 들어가 가져갈 수 있는 보급품은 최대한 챙기고 나머지는 파괴했다. 후퇴하는 부대는 기회가 닿는대로 식량을 최대한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탄반도에 도착한 사단들은 10일에서 25일치 식량을 가진 상태였다.


바탄으로 향하는 보급품 수송의 주요 루트는 마닐라항을 통한 해상수송이었다. 어차피 바탄에 수송된 보급품 대부분이 마닐라항 부두 근처의 창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육군수송지원단의 보급장교 프레드릭 워드 대령은 민간인 자원자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바지, 예인선, 보트를 사용하여 보급품을 마닐라항에서 만을 가로질러 50km 떨어진 바탄까지 수송했다. 이런 소형선박들은 적재량도 적고 속력도 느렸지만 바탄에 있는 원시적인 수준의 부두에서도 쉽게 하역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공습으로 해상수송을 방해했는데 가장 큰 손실은 화물선 시키앙이었다. 밀가루 2,500톤과 휘발유를 싣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도망쳐 나온 이 프랑스 화물선은 12월 14일에 마리벨스에 접안하여 싣고왔던 휘발유를 내려놓았으나 밀가루의 하역은 늦어졌다. 그러던 중 12월 24일에 일본기의 공습으로 2,500톤의 밀가루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화물선 시키앙. http://www.wrecksite.eu/img/wrecks/si_kiang_i.jpg)


마닐라항에서의 선적작업 또한 일본기의 공습으로 방해를 받았다. 특히 위기감을 느낀 하역노동자들이 도망쳐 버려 선적에 지장을 받았는데 소식을 듣고 약 200명의 미국인과 영국인 자원자들이 모여들어 선적을 도왔다. 31일 저녁에 후위대가 마닐라를 떠날때까지 마닐라항에서 선적된 보급품은 약 30,000톤이었다.


후위대가 떠날 때까지도 마닐라항 부근의 창고에는 많은 식량과 휘발유를 비롯한 보급품이 남아 있었다. 후위대는 이것들을 파괴하는 대신 창고를 개방하고 떠났다. 곧 마닐라 시민들이 몰려와서 남겨진 식량과 휘발유를 비롯한 보급품을 챙겨갔으나 상업지대의 개인창고에 들어있던 식량과 휘발유를 비롯한 일부 물품들은 일본군이 차지했다.


바탄으로 수송된 보급물자에는 우선순위가 부여되어 있었다. 탄약과 식량이 1순위였으며 의약품, 폭발물, 철조망, 그리고 휘발유가 2순위였으며 나머지는 3순위였다.


탄약수송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개전 당시 병사는 1단위(Unit)의 탄약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어진지에 1단위를 추가로 보유하고 있었다. (단위란 전투시 1일 탄약소모량의 기준을 정한 것으로 소총의 경우 100발이 1단위였다.) 이외에 포트 스토첸버그와 포트 맥킨리를 비롯한 전방보급소에 탄약이 반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보유량의 2/3인 15,000톤은 6트럭 분량의 전차예비부품과 함께 바탄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23일 이후 15,000톤이 추가로 수송되었다. 따라서 탄약과 전차예비부품은 충분했다. 


식량문제는 심각했다. 필리핀자치령 법률에 따르면 쌀과 설탕은 주(State)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런 제한은 철폐되어야 했으나 행정처리가 늦어졌다. 따라서 카바나투안의 국영쌀창고에 들어있던 4,500톤의 쌀이 바탄으로 가는 대신 고스란히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공무원들은 심지어 일본군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쌀을 불태우려는 시도까지 저지했다.


1942년 1월 3일의 조사에서 식량상황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바탄반도 내의 식량은 10만명의 30일치 밖에 되지 않았다. 내용을 보면 고기 및 생선통조림 50일치, 분유 40일치, 밀가루 및 채소통조림 30일치, 필리핀인의 주식인 쌀 20일치 등이었으며 설탕, 소금, 후추, 조리용 지방, 시럽 등이 조금 있었다. 과일통조림, 커피, 감자, 양파, 시리얼 등은 형편없이 부족했고 신선한 고기와 과일은 거의 없었다.


1월 5일에 보급사령관 드레이크 장군으로부터 식량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바탄반도 및 코레히도르에 있는 모든 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식량배급을 정량의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령했다. 이럴 경우 하루 약 2,000칼로리가 되는데 이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성인 필요량의 절반 정도로서 더운 날씨에 험악한 지형에서 쉴새없이 이동하고 진지를 만드는 등 많게는 하루 20시간 가까이 격렬하게 활동하던 전투병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양이었다. 다행히 많은 장병들이 개인적으로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사비로 구입하거나 버려진 보급소에 들어갔을 때 슬쩍 챙기는 방식으로 식량을 확보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챙겨야 하니 많아봐야 1인당 통조림 2박스 정도가 한계였으나 식량 배급량이 줄어들자 이것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보급장교들은 식량확보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행히 쌀의 수확기였으므로 공병이 리마이 부근에 정미소를 지은 다음 논에서 쌀을 수확했다. 고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도살장을 만들어 물소나 기타 가축들을 보이는대로 끌고와 도살했다. 라마오에는 물고기 창고를 만들어 놓고 지역 어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부들은 일본기가 활동하지 않는 저녁에 출항하여 밤새 고기를 잡아 새벽에 라마오로 돌아왔다. 소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커다란 솥에 바닷물을 넣고 끓였다.


농성을 시작한지 몇 주가 지나자 식량부족이 일본군보다 더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 모든 부대에서 식량확보를 위하여 사냥꾼들을 바탄반도 내부의 정글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일본군과 대치 중인 전선은 조용한 반면 바탄반도 내에서는 하루종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운이 좋으면 정글로 숨어들어온 물소를 사냥할 수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냥감은 점점 줄어들어 나중에는 주로 원숭이가 사냥감이 되었다. 식량사정이 더 악화되자 뱀을 먹는 병사도 나타났으며 항복을 앞두고 식량부족이 극심해지자 많은 병사들이 각종 벌레를 포함하여 정글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동식물을 먹어보려고 시도했다. 식량부족은 바탄에서 농성 중이던 미-필리핀 연합군이 항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피복도 모자랐다. 1월 초에 보급부서는 10,000벌의 군복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80,000명의 병사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덥고 습한 날씨와 정글의 날카로운 풀과 나뭇가지는 군복을 쉽게 찢고 헤지게 만들었다. 군화는 50,000켤레가 있었으나 미군 기준으로 만들어진 군화는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리핀인의 발에는 너무 커서 무용지물이었다.

모기장, 우비, 담요 및 방서모의 부족도 심각했다. 적당한 보호장비만 있었어도 말라리아나 열사병 등 병사들의 건강을 해치는 질병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의무부대는 의약품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12월 23일에 리마이에 제1통합병원이 들어섰으며 12월 말에 캅카벤 부근에 두번째 통합병원이 들어섰다. 마닐라에는 충분히 많은 의약품이 있었고 수송부대에서도 의약품 수송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상당한 양의 의약품을 수송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주일 만에 10만명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막대한 양의 의약품을 모두 수송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2월 말부터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비롯한 의약품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료는 충분했다. 처음 2주 동안은 휘발유 소비를 통제하지 않았으므로 각 부대에서 마구잡이로 신청하여 부대 내에 쌓아두는 바람에 재고가 하루에 53,000리터씩 줄어들었다. 이후 상황을 파악한 수뇌부가 휘발유 청구 요건을 깐깐하게 챙기기 시작하자 하루 소비량은 11,000리터까지 줄어들었다.


차량 쟁탈전은 바탄에 들어와서 더 심해졌다. 각 부대는 자기들이 쓰기 위하여 차량을 마구잡이로 징발하고 주행 중인 차량을 강제로 세운 다음 탈취했다. 사태를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맥아더의 부참모장 셔먼 장군이 아무리 자제를 요청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셔먼 장군은 공동주차장을 만들고 포병이나 수송부대처럼 편제표에 차량이 편제된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가진 차량을 모두 공동주차장으로 보낸 다음 필요시 차량을 배정받아 사용하라고 명령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셔먼 장군은 헌병을 투입했다. 헌병은 주행 중인 차량을 무작위로 세우고는 검문했다. 운전병이 정당한 공무로 차량을 운행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헌병이 차를 압수하여 공동주차장으로 보냈다. 그러자 일선부대는 헌병의 눈을 피해서 차량을 운용하기 시작했고 도로에서 압수된 차량 숫자가 줄어들자 셔먼 장군은 헌병을 각 부대에 파견했다. 하지만 일선부대에서 차량을 얼마나 절묘하게 감추는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불시에 들이닥친 노련한 헌병들도 번번히 허탕을 쳤다. 결국 셔먼 장군은 편제표상 차량을 가진 부대를 제외하고는 휘발유 공급을 중단했다. 일선부대는 비축해 둔 휘발유로 버텼으나 결국 비축했던 휘발유마저 떨어지면서 차량이 쓸모가 없어지자 공동주차장으로 보냈다.


공병자재는 폭발물 350톤, 철조망 800톤, 모래주머니 200톤, 대량의 목재 및 건설자재 등을 포함하여 약 10,000톤이 수송되었다. 이러한 자재들은 대부분 전방의 보급소로부터 바탄 입구의 루바오를 거쳐 1월 6일까지 바탄반도 내의 2곳에 집적되었다.


바탄에 도착한 공병대가 처음으로 한 일은 미국에서 증원될 전투기가 사용할 활주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방어선의 요새화는 주로 보병과 포병이 맡았지만 공병도 이들을 도와서 진지를 개선하고 철조망을 쳤으며 지뢰를 깔았다. 공병은 또한 도로와 다리의 유지보수를 맡았으며 유사시 다리를 폭파할 임무를 맡았다. 바탄반도로 들어온 피난민 26,000명을 위한 숙소와 정미소를 짓고 제재소를 만들어 건물과 다리를 만들 때 사용할 목재를 생산하는 것도 이들의 일이었다.


공병대의 문제점은 기술자 부족으로 그들은 기술을 가진 민간인 자원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특히 유능한 공병장교가 부족했는데 공병장교 부족이 얼마나 심했던지 일시적으로 민간인이 공병대대를 지휘하는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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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탄방어태세


잠발레스산맥의 남단에 위치한 바탄반도는 마닐라만과 수빅만 사이에 엄지손가락처럼 삐져나와 있다. 바탄반도와 남쪽 카비테주 해안과의 거리는 약 19km 이며 그 사이에는 코레히도르를 비롯한 몇개의 섬이 마닐라만 입구를 지키고 있다.


(1942년 1월 8일 현재 바탄반도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5.html P.246)


길이 40km, 기저부의 폭이 32km 인 바탄반도는 방어에 적합했다. 지표면은 정글로 뒤덮인 산악지대였으며 중심의 산지로부터 깊은 계곡이 해안으로 뻗어 있었다. 북쪽에는 해발 1,253m의 나티브산이 있었고, 남쪽에는 해발 1,388m로 바탄 최고봉인 마리벨스산이 있었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는 해안을 따라 달리는 110번도로와 동서로 관통하는 필러-바각도로 뿐이었다. 110번 도로 중 라약에서 시작하여 바탄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마리벨스에 이르는 구간은 동부도로라고 부르는데 자갈로 포장되어 전천후로 차량이 다닐 수 있었다. 110번 도로 중 마리벨스에서 서해안을 따라 모론까지 북상하는 구간은 서부도로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구간이 비포장이라 비가 많이 내리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나티브-마리벨스 능선의 가장 낮은 구간을 넘어 동해안의 필러와 서해안의 바각을 잇는 필러-바각도로는 바탄반도에서 유일하게 동서로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였으나 역시 비포장이라 비가 많이 내리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바탄반도는 정글로 뒤덮여 있어서 항공정찰로 지상군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공습을 가하기 어려워 제공권을 빼앗긴 미군에게 유리했다.


바탄방어전은 공식적으로 1942년 1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웨인라이트 장군은 바탄반도의 서쪽 절반을 담당한 제1필리핀군단장으로 임명되었고 파커 장군은 동쪽 절반을 담당한 제2필리핀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제1및 제2필리핀군단의 경계선은 나티브산과 마리벨스산을 잇는 능선이었다. 마리벨스산 남쪽은 지원사령부지역(Service Command Area)으로 획정되어 필리핀군관구 부사령관인 앨런 맥브라이드 준장이 지휘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과 지원사령부는 모두 코레히도르에 위치한 맥아더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1월 5일에 맥아더 장군은 지원사령부지역 내에 극동미육군사령부 참모들로 이루어진 바탄전진사령부를 설치했다. 자신의 부참모장인 리처드 마셜 준장이 이끄는 전진사령부를 통하여 맥아더는 바탄에서의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의 제1필리핀군단은 3개 필리핀군사단(제1, 제31 및 제91사단), 제71사단(PA)의 전투병력, 제26기병연대(PS), 포병 및 기타 부대를 합쳐 약 22,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커 장군의 제2필리핀군단은 4개 필리핀군사단(제11, 제21, 제41 및 제51사단), 필리핀사단에서 파견된 제57보병연대(PS), 포병 및 기타부대를 합쳐 약 25,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 예비대는 필리핀사단(제57보병연대 감편), 전차단, 그리고 75mm 자주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맥브라이드 준장이 지휘하는 지원사령부지역에는 제2경찰사단, 제71사단(PA)사령부를 포함한 잔여 병력, 육군항공대 병력으로 이루어진 임시보병부대, 해병대, 그리고 해군수병으로 이루어진 임시보병대대가 있었다.


바탄방어선은 북쪽의 주전투진지(Main Battle Position)와 남쪽의 후방전투진지(Rear Battle Position)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전투진지는 동해안의 마바탕에서 중앙의 나티브산을 거쳐 서해안의 마우반을 잇는 약 32km 길이의 방어선이었다. 방어선 전면에는 전초선이 있었고 방어선 자체는 수km 의 종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상륙을 막기 위하여 방어선 후방의 해안도 방어했다.

흔히 마바탕-마우반선, 또는 아부케이-마우반선이라고 불리던 주전투진지는 연속된 방어선은 아니었다. 산타로사산(889m), 나티브산(1,287m), 그리고 실랑가난산(893m)으로 이루어져 통과가 거의 불가능한 24km X 24km 의 산괴가 방어선 중간에 박혀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을 끊어놓고 있었다. 


주전투진지에서 남쪽으로 13km 정도 떨어진 후방전투진지는 필러-바각도로에 평행하게 동해안의 오리온과 서해안의 바각을 연결하는 방어선으로 극동미육군사령부 예비대가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1월 7일에는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웨인라이트 장군의 제1필리핀군단이 맡은 서쪽구역은 지형이 험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으며 수풀이 밀생하여 걸어다니려면 정글도(bolo)가 필요할 정도였다. 교통도 불편했다. 마리벨스에서 서해안을 따라 바각에 이르는 서부도로는 포장이 되지 않아 비가 많이 내리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바각에서 모론까지는 자갈로 포장하여 전천후 차량통행이 가능했으나 모론에서 길이 끊어지므로 이후로는 정글 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 수 밖에 없었다. 모론 북쪽으로 가려면 건기에도 지도, 나침반, 그리고 정글도가 필수였다.


(정글도. https://en.wikipedia.org/wiki/Bolo_knife)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해안의 마우반에서 내륙의 실랑가난산 기슭까지 이어져 있었다. 서쪽은 제1사단(PA)의 제3보병연대가 맡았고 중앙은 보병으로 전환한 제31사단(PA)의 제31포병연대가 담당했다. 동쪽의 실랑가난산 기슭을 담당한 것은 제1보병연대의 K중대였다. 제3보병연대는 방어선 앞쪽에 이중철조망을 쳤지만 방어선의 나머지 부분은 험난한 지형에만 의지했다.


제1필리핀군단은 일본군이 마우반 북쪽의 해안을 통하여 병력증원 및 보급을 행하지 못하도록 모론에 제1보병연대의 I중대와 제26기병연대의 G중대를 파견하여 마우반과 모론 사이의 해안선을 감시했다. 또한 방어선 후방에 일본군이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3보병연대의 예비대로 지정된 제1보병연대 제2대대가 마우반 남쪽해안을 방어했다.


제1필리핀군단의 포병세력은 제71야포연대(제1대대 감편), 제91야포연대의 2개 포대, 제23야포연대의 1개 포대, 75mm 자주포 1개 포대, 그리고 155mm 평사포 2문으로 이루어져 제71야포연대장 할스테드 파울러 중령의 지휘를 받았다. 총 33문의 야포 중 155mm 평사포 2문을 제외한 31문이 75mm 곡사포 또는 구형의 2.95인치 산포였다. 

75mm 곡사포는 방어선 바로 뒤에서 북동쪽에서 뻗어있는 마우반 능선에 배치했다. 75mm 자주포는 능선 남쪽 약 270m 지점에 배치했으며 사정거리가 짧은 2.95인치 산포는 능선 북쪽에 배치했다. 155mm 평사포 2문은 남쪽에 있는 마우반곶의 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선과 해안선을 동시에 감제했다. 울창한 정글 덕분에 야포진지는 공중정찰이나 공습으로부터 안전했다. 


해안방어는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의 제31사단(PA)이 맡았다. 제31사단은 제1보병연대제2대대의 방어선 남쪽으로부터 세이사인곶 사이의 16km 구간에 제45보병연대(PS)의 1개 대대를, 그 남쪽에 제31보병연대(PA)의 1개 대대를 배치했다. 제31사단의 해안방어선은 세이사인곶에 배치된 제92해안포연대(PS) 소속 155mm 평사포 2문의 지원을 받았다. 제92해안포연대의 다른 포들은 바각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1필리핀군단의 예비대는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셀렉의 제71사단과 스티븐스의 제91사단, 그리고 제26기병연대(PS)였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71사단의 전투병력을 제91사단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1월 6일 이후로 제71사단에는 지원사령부지역에 있던 사단사령부와 소수의 지원병력만 남게되어 제71사단은 편제표에만 존재할 뿐 유명무실해졌다.

제26기병연대도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상실한 말의 보충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제26기병연대는 말이 없는 병사들로 차량화보병중대와 정찰장갑차 및 브렌캐리어로 이루어진 기계화부대를 만들었다.


파커 장군의 제2필리핀군단은 마닐라만의 마바탕으로부터 나티브산까지 약 14km 를 방어했다.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서쪽과 달리 주로 평탄한 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해안을 따라 달리는 서부도로는 동부도로와 달리 포장된 전천후 도로였으며 이 도로를 따라 마바탕, 아부케이, 발랑가, 필러, 오리온, 리메이, 라마오, 캅카벤 등의 마을이 늘어서 있었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지형이 험해졌다.


동부도로를 포함하는 제2필리핀군단의 우익은 주전투진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며 일본군의 주공이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따라서 파커 장군은 이곳에 생생하고 잘 훈련된 제57보병연대(PS)를 배치했다. 제57보병연대는 마바탕 서쪽 약 1,800m 까지 방어했으며 추가로 발랑가까지의 서해안도 지켰다.

제57보병연대의 서쪽 약 5,900m 구간은 빈센트 림 준장의 제41사단(PA)이 지켰다. 제41사단은 바탄에 가장 먼저 들어와서 손실이 없었다. 림 준장은 3개 연대를 모두 발란타이강을 따라 만들어진 방어선에 투입했다. 

제41사단의 서쪽 약 4,600m 는 존스 장군의 제51사단(PA)이 담당했다. 제53보병연대가 발란타이강을 따라 만들어진 방어선을 지켰으며 제52보병연대가 예비대가 되었다. 제51보병연대는 1월 11일에야 사단으로 돌아왔다.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제1필리핀군단보다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가장 지형이 험한 제51사단 구역에도 이중철조망이 만들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부족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몇 개 되지 않는 곡괭이, 삽, 도끼에다가 대검, 심지어 식판과 숟가락까지 사용하여 개인호, 참호, 사격호를 파고 공들여 위장했으며 사계청소를 하고 통신망도 꼼꼼하게 깔았다.


제2필리핀군단의 장거리화력지원은 구형 155mm 평사포 12문을 보유한 제86야포연대(PS)와 구형 155mm 평사포 12문과 155mm곡사포 2문을 보유한 제301야포연대(PA)가 담당했다. 이들은 아부케이 서쪽에 자리잡고 주전투진지와 동부도로를 감제했다.

제57보병연대는 제24야포연대제1대대와 75mm 곡사포 8문을 보유한 제88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제41사단은 사단포병에 더하여 아부케이 남서쪽에 주둔한 제24야포연대제2대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51사단의 사단포병이 보유한 야포는 75mm 곡사포 8문이 모두였으므로 제41사단으로부터 2.95인치 산포를 지원받았다.


발랑가 남쪽의 해안선은 1월 11일부터 제11사단(PA)이 지켰다. 제11사단은 자체의 포병연대에 더하여 제21포병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21사단은 군단예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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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마닐라 함락


맥아더 장군은 1941년 12월 26일에 마닐라를 비무장 도시(open city)로 선언했다. 신문은 이 사실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마닐라 방송국도 하루종일 방송했다. 시청 앞에는 '비무장 도시' 라는 현수막이 걸렸으며 그날 저녁부터 등화관제가 해제되어 도시는 불을 밝혔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도시를 탈출했다. 마닐라를 빠져나가는 도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피난민들로 미어 터졌으며 어쩌다 마닐라를 떠나는 기차에는 사람들이 객차 위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마닐라의 상업지구는 텅 비었으며 듀이 대로에도 자동차가 거의 사라졌다. 


(비무장 도시 현수막. 일본측이 찍은 사진이다.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4.html P.233)


일본군은 마닐라가 비무장 도시를 선언한 이후에도 폭격을 가했다. 27일에 일본기가 니콜스 비행장과 마닐라 항을 폭격했으며 다음날에도 마닐라 항에 떠있던 선박을 폭격하는 과정에서 부두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전후 혼마 장군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비무장 도시로 선언한 마닐라에 대한 폭격을 전쟁범죄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대해 혼마 장군측은 당시 마닐라에는 무장병력이 남아서 조직적으로 일본군에 대한 적대행위(장비와 보급품의 반출 및 파괴활동)를 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마닐라를 국제법상 비무장 도시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마셜 장군이 지휘하는 후위대가 남겨진 장비와 보급품에 대한 반출 및 파괴활동을 마치고 마닐라를 빠져나간 것은 12월 31일 저녁이었다.


마셜 장군의 후위대는 파괴활동을 꼼꼼하게 수행했다. 1942년 1월 1일 아침이 밝았을 때 도시의 남동쪽에서는 포트 맥킨리의 연료가 불타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니콜스 비행장이 불타고 있었으며 마닐라 만을 건너 남쪽에서는 카비테 항이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후위대가 판다칸의 연료 탱크를 폭파하자 불타는 기름이 주변의 창고와 건물을 집어삼키고 파시그강으로 흘러들어 강둑을 따라 또다른 화재를 일으켰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불길을 피해 달아났다. 마닐라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껴졌다.


후위대와 함께 경찰마저 철수하자 마닐라의 치안은 엉망이 되었다. 1월 1일 아침이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부두 지역에 몰려들었다. 후위대가 보급품 창고의 문을 열어놓고 철수한 것이었다. 남아있는 민간인을 위하여 후위대는 소각해야 할 보급품 중에서 쉽게 가져갈 수 있는 물품은 소각하는 대신 창고를 개방했다. 실제로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후위대가 개방한 창고에 있던 보급품은 사람들이 전부 가져가버려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문제는 후위대의 배려가 치안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1일 저녁이 되어 후위대가 개방한 창고가 비면서 가져갈 물품이 사라지자 흥분한 사람들은 떼지어 상업지대를 돌아다니면서 개인 소유의 창고나 상점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이를 제지할 경찰이 없었으므로 혼란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요사태는 2일 오후에 일본군이 진입할 때까지 이어졌다.


1월 1일 아침이 되었을 때 츠치바시 유이치 중장의 제48사단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12월 29일에 내린 명령에서 혼마 장군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더이상 마닐라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1일 저녁에는 모리오카 장군의 제16사단이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하여 역시 기존 명령에 따라 멈추었다.


츠치바시 중장은 1일 오전 10시 40분에 제14군 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마닐라에서 대화재가 발생했으므로 빨리 병력을 투입하여 피해를 막아야 한다면서 진입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제14군사령부가 비날로난에서 카바나투안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이 전문은 오후 5시 10분에야 혼마 장군에게 전달되었으며 군사령부가 카바나투안에 도착한 7시부터 참모회의가 시작되었다. 제14군사령부는 오후 8시에 마닐라 진입을 허가하기로 결정했으나 야간에 남북에서 동시에 일본군이 진입할 경우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2일 날이 밝은 다음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닐라 진입에 따른 여러 사항을 현지부대와 조정하기 위하여 위하여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중장이 제48사단에 파견되었다. 제48사단과 제16사단의 경계선은 마닐라 가운데를 흐르는 파시그강이었다.


1941년 1월 2일 오후 5시 45분에 제48사단보병단장 아베 고이치 소장이 이끄는 3개 대대(대만보병제1연대의 1개대대, 보병제47연대의 2개대대)가 마닐라 북쪽에 진입했고 동시에 남쪽으로부터는 수색제16연대와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가 진입했다. 일본군은 즉시 마닐라의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도시의 치안을 회복했다. 2일 아침에 석방된 약 3,500명의 마닐라 거주 일본인들이 안내와 통역을 맡았다.


주요 교차로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일본군과 통역이 검문했다. 필리핀인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집안에 머무르라는 경고를 받았고 3,000명에 달하는 미국인과 영국인은 산토토마스 대학에 억류되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일본군 장교는 주로 호텔이나 관공서를 숙소로 사용했고 병사들은 주로 학교를 막사로 사용했다. 시청에 있던 필리핀자치령 재무부의 금고는 밀봉되었고 은행은 문을 닫았다. 신문사는 잠시 문을 닫았다가 일본군의 감독 아래 활동을 재개했다.

필리핀자치령 공무원들은 대부분 억류되었다. 재판은 당분간 중단되었으며 수도와 전기같은 기반시설은 일본인의 통제를 받았다. 군표의 사용을 포함하여 경제활동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담은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일본군 부상자와 환자는 차이니즈 종합병원과 필리핀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혼마 장군은 마닐라를 점령함으로써 대본영이 부여한 임무를 달성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맥아더의 미-필리핀군은 건재했으며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을 소탕하지 않는 한 극동 제일의 양항 중 하나인 마닐라항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닐라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은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마닐라만의 몇몇 섬을 제외하고 루손 전역을 가벼운 피해만 입은 상태로 석권했다.

남쪽 민다나오에서는 일본군이 중요한 항구인 다바오에 강력한 교두보를 만들었다. 민다나오를 지키던 윌리엄 샤프 준장의 부대는 건재했으며 이제 필리핀에서 유일하게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델몬테비행장을 지키고 있었다.

루손과 민다나오 사이의 비사야에는 아직 일본군이 상륙하지 않았다. 파나이, 세부, 보홀, 레이테와 몇몇 섬에는 소규모의 미-필리핀군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다른 곳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제23군은 크리스마스에 홍콩을 점령했다. 개전 첫날 말레이에 상륙한 야마시타 장군의 제25군은 영국군을 격파하면서 싱가포르를 향하여 남하 중이었다. 일본군은 술루제도와 보르네오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남해지대는 괌을 점령하고 라바울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른 부대는 셀레베스-암본 지역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버마의 주요 비행장들이 12월 25일에 공습을 받았으며 제15군은 버마침공을 위하여 태국에 집결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남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의 모든 전력을 동남아시아에 집중시켜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해군의 호위 하에 민다나오에 1개 사단을 상륙시키고 델몬테 비행장을 중심으로 대량의 항공기를 집결시켜 바탄반도까지 보급로를 열고 루손에 상륙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주장은 워싱턴에서 공감을 얻었으며 영국도 독일우선원칙에 어긋나더라도 동남아시아에 탄약과 보급품을 보내는 것을 양해했다.


문제는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 미국이 할 수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필리핀을 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는데 진주만 기습으로 전함을 모두 잃은 태평양함대는 동남아시아로 가는 선단에 강력한 호위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전쟁계획국은 1942년 1월 첫째주 동안 필리핀 구원 가능성을 검토했다.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필리핀 수비대를 구하려면 지상군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1,500대의 항공기가 필요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투입할 수 있는 항공기의 2배였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런 다수의 항공기를 운용하려면 호주는 물론 진격로를 따라 수많은 비행장을 만들어야 했고 이들과 미국 서해안을 잇는 보급로를 지키려면 막대한 해군전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하여 연합군은 이미 동남아시아에 있는 해군전력에 더하여 전함 9척, 항공모함 7척, 구축함 50척, 잠수함 60척을 대서양과 지중해로부터 빼내어 추가로 투입해야 했다. 이럴 경우 유럽과 중동으로 가는 선단의 호송이 불가능해지고 서반구(Western Hemisphere)의 방어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었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2월 말에 이미 내부적으로 필리핀 상실을 기정사실화한 해군과 달리 여전히 필리핀 구원을 주장하던 스팀슨 전쟁장관과 마셜 육군참모총장도 전쟁계획국의 보고를 받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전쟁계획국의 계산은 필리핀 구원의 희망을 끝장내었다.


결국 미국과 영국참모본부는 말레이반도-수마트라-자바-호주로 이어지는 말레이방벽(Malay Barrier)에서 일본을 막는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럴 경우 미국은 가장 중요한 호주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군은 1942년 1월 초에 ABDA 사령부를 창설하고 영국의 웨이벌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사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형식상 맥아더 장군도 웨이벌 장군의 지휘 아래 들어갔으나 ABDA 사령부가 필리핀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맥아더 장군은 ABDA 사령부와 상관없이 종전대로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제 바탄반도로 들어온 미-필리핀군 앞에는 기나긴 굶주림과 전투, 그리고 포로수용소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몰랐으며 대부분 구원군이 달려오는 중이라고 믿었다. 오직 맥아더 장군과 직속 참모들만이 절망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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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바탄철수 완료


과구아-포락방어선에서 후퇴한 미-필리핀군은 1942년 1월 5일에 바탄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구메인강 남안을 따라 방어선을 폈다. 방어선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좌익은 제21사단, 우익은 제11사단이었는데 강을 건넌 양 사단의 부대가 서로를 향하여 이동하여 접촉함으로써 연속적인 방어선을 편성하려는 열의가 없었다. 병사들은 모순되는 명령에 시달렸다. 전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가 잠시 후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기 일쑤였으며 동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과 서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오기도 했다.


제21사단장 카핀핀 장군은 동쪽의 제11사단이 철수했다는 엉터리 정보를 듣고 정오에 제21사단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사단이 이동을 시작했을 때 상황을 알게된 웨인라이트 장군이 개입하여 철수를 중단시키고 그날밤까지 방어선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5일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방어선을 편성했으나 실태는 한심했다. 어떤 구간에는 광활한 정면에 병사 몇명만이 띄엄띄엄 배치된 반면 어떤 구간에는 협소한 정면에 대병력이 밀집해 있었으며 소속이 다른 병력들이 뒤섞여 대부분 구간에서 지휘관이 누구인지 불명확했다. 제21야포연대장 리처드 말로니 대령은 휘하 부대를 찾아다니다가 야포를 트럭에 매단 채 보병 및 전차와 뒤섞여 주둔하고 있던 부하들을 찾아내고 기겁했다. 이때 일본군이 공격했다면 제11사단과 제21사단은 붕괴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일본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제21사단 정면의 다카하시지대는 5일 저녁까지 피오 이남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다. 제11사단 정면의 다나카부대는 5일 새벽에 제11사단의 후위대를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다나카부대를 대신한 이마이부대는 5일 오후에야 전선에 도착했으므로 공격할 시간이 없었다.


5일 밤이 되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11사단과 제21사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양 사단은 라약 남쪽에서 쿨로강을 건너 철수할 것이었다. 제11사단이 먼저 철수했다. 7번도로를 따라 남하한 제11사단이 라약을 통과한 후 쿨로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자 오후 8시 30분부터 제21사단이 쿨로강을 건넜다. 미-필리핀군이 철수하는 동안 라약은 끔찍한 교통정체를 겪었다. 행군하는 병사, 트럭, 버스, 야포, 전차, 말, 그리고 참모나 지휘관 차량이 마구 뒤섞여 라약 시가지를 통과했다. 제21야포연대를 끝으로 제21사단이 모두 쿨로강을 건너자 제21사단의 후위를 맡았던 제26기병연대가 강을 건넜고 이어서 전차들이 마지막으로 6일 새벽 2시에 쿨로강을 건넜다. 그 직후 창코 대위가 지휘하는 제91공병대대가 다리를 폭파했다.


(라약교차로 방어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3.html#13-1 P.217)


쿨로강 남쪽에는 마지막 지연방어선인 라약방어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라약 남쪽에서 헤르모사까지 동서로 달리는 110번도로를 따라 설정된 라약방어선은 제71사단장(PA) 셀렉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제71(PA) 및 제72보병연대(PA), 제31보병연대(US), 그리고 제26기병연대(PS)로 이루어진 라약방어선이 완성되자 셀렉 장군은 6일 오전 6시를 기하여 웨인라이트 장군의 지휘에서 벗어나 바탄방어군사령관 파커 장군의 지휘 아래로 들어갔다.


방어선에 투입된 병력은 제71 및 제72보병연대(합계 약 2,500명), 제26기병연대(657명), 그리고 필리핀 유일의 미군연대인 제31보병연대(약 2,100명)이었다. 포병은 75mm 곡사포 2개 포대와 구형 75mm 곡사포 4문을 가진 제71야포연대, 75mm 곡사포 10문을 가진 제23야포연대제1대대(PS), 그리고 75mm 곡사포 2개 포대를 가진 제88야포연대제1대대(PS)였다. 이외에 전차단과 자주포 2개 대대도 화력지원에 가세했다.


방어선의 우익은 제71보병연대였으며 이어서 제72보병연대가 자리했다. 제72보병연대의 서쪽 약 2,700m에 걸친 구간은 제31보병연대의 제1 및 제2대대가 맡았다. 방어선의 좌익은 6일 새벽에 쿨로강을 거쳐 후퇴한 제26기병연대였다. 제31보병연대제3대대는 예비대로 900m 후방에 주둔했다. 제26기병연대는 제88야포연대제1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제31보병연대는 제23야포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제71 및 제72보병연대는 각각 제71야포연대의 1개 포대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다. 헤르모사의 남서쪽에는 전차단과 자주포가 대기했다.


파커 장군은 라약방어선이 튼튼하다고 생각했으나 현장지휘관 셀렉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셀렉 장군은 좌익의 제26기병연대를 제외한 부대들은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정면을 맡고 있다고 생각했다.


6일 오전 10시에 미군정찰대가 남하 중인 이마이부대를 발견했다. 대만보병제1연대, 전차제7연대의 1개중대, 75mm 산포를 장비한 산포병제48연대,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야포병제1연대로 이루어진 이마이부대가 접근하자 오전 10시 30분부터 미군 야포가 불을 뿜었다. 포격을 받은 이마이부대는 라약 북쪽 4,000m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잠시 후 일본군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양군 포병간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포격전의 승부는 곧 결정났다. 일본군 포병은 관측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사정거리가 긴 150mm 유탄포를 가지고 있어서 관측이 제한되고 사정거리가 짧은 75mm 곡사포 밖에 갖추지 못한 미군 포병을 간단히 압도했다. 일본군의 150mm 유탄포가 관측기의 도움을 받아 미군이 보유한 75mm 곡사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격을 가하자 미군야포는 진지를 벗어나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고도 600m 이하로 날아다니는 일본군 관측기는 도망치는 미군야포의 위치를 계속 알려주었고 결국 정오까지 제23야포연대제1대대의 75mm 곡사포 10문 중 1문만이 살아남았다. 150mm 유탄포가 미군야포를 몰아내는 동안 일본군의 75mm 산포는 제31 및 제71보병연대를 집중적으로 때렸다.


방어선을 충분히 약화시켰다고 생각한 이마이 대좌는 오후 2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쿨로강의 다리가 끊어졌으므로 전차는 공격에 참가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서 오후 3시에 텅 빈 디날루피한을 점령했다.


쿨로강을 건넌 일본군은 오후 4시에 제31보병연대의 우익인 B중대 정면에 강력한 일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이미 큰 피해를 입은 B중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700m 정도 밀려났다. 이로써 B중대 서쪽에 있던 제31보병연대C중대와 동쪽에 있던 제72보병연대A중대 사이 공간이 열려버렸다. 제31보병연대제1대대가 구멍을 막는데 실패하자 제31보병연대장 찰스 스틸 대령은 셀렉 장군에게 예비대인 제31보병연대제3대대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여 승인을 받았다. 제31보병연대제3대대장 재스퍼 브래디 중령은 I 및 L중대에게 B중대가 지키던 방어선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 I 중대는 전진하다가 일본군의 포격을 집중적으로 얻어맞고 쫓겨났다. 그러나 도널드 톰슨 소령이 지휘하는 L중대는 신속하게 전진하여 역습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을 기습하여 몰아내고 B 중대의 방어선을 되찾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켰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본군은 얇게 늘어진 방어선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셀렉 장군에게는 이제 예비대도 없었고 포병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제72보병연대의 전선을 뚫어버리면 라약방어선에 배치된 모든 병력의 퇴로가 끊길 것이었다. 결국 6일 밤10시에 파커 장군이 철수명령을 내렸다.


방어선 우익의 제71사단은 큰 어려움없이 철수했다. 그러나 방어선 중앙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는 추격하던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7일 새벽 2시 30분에 일본군이 헤르모사에 도달하여 제31보병연대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으나 연대의 측면을 지키던 E중대가 악착같이 저항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하여 E 중대를 거의 전멸시키면서 새벽 5시에 겨우 헤르모사를 점령했으나 이미 제31보병연대 주력은 남쪽으로 빠져나간 이후였다. E중대의 생존자들은 며칠 후에야 미군 전선에 도착했다.


방어선의 좌익을 지키던 제26기병연대는 무전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27일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철수사실을 알았다. 이미 일본군이 헤르모사 남쪽까지 진출한 상황이라 도로를 따라 철수하기는 불가능했다. 기병대는 할 수 없이 길도 없는 정글을 헤치면서 산을 넘어 미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라약방어선에서 미일 양국의 전차는 활약하지 않았다. 쿨로강의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일본전차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헤르모사 남쪽에서 예비대로 대기하던 미군전차는 전투명령을 받지 못했다. 셀렉 장군은 라약방어선의 지형이 전차를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전차단은 6일 밤 9시에 보병보다 먼저 바탄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바탄으로의 철수가 끝났다. 2주에 걸친 철수기간 동안 미-필리핀군의 주요 부대가 전멸하는 일은 없었고 카바나투안을 제외하면 모든 방어선에서 철수에 필요한 시간 동안 적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훈련과 장비가 열악한 필리핀군을 이끌고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기동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맥아더, 웨인라이트, 존스를 비롯한 미군 지휘관들의 야전지휘능력이 뛰어났다는 증거이다. 


미-필리핀군은 철수기간 동안 상당한 병력을 잃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의 북부루손군은 28,000명에서 1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라진 12,000명 중 대부분은 탈영하여 집으로 돌아가버린 필리핀 병사이며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나 포로는 소수이다. 존스 장군의 남부루손군은 상황이 좋아서 처음의 15,000명 중에서 14,000명이 바탄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전사 627명, 부상 1,282명, 실종 7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외에 2,700명이 질병에 걸려 전선을 떠났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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