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마닐라 함락
맥아더 장군은 1941년 12월 26일에 마닐라를 비무장 도시(open city)로 선언했다. 신문은 이 사실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마닐라 방송국도 하루종일 방송했다. 시청 앞에는 '비무장 도시' 라는 현수막이 걸렸으며 그날 저녁부터 등화관제가 해제되어 도시는 불을 밝혔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도시를 탈출했다. 마닐라를 빠져나가는 도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피난민들로 미어 터졌으며 어쩌다 마닐라를 떠나는 기차에는 사람들이 객차 위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마닐라의 상업지구는 텅 비었으며 듀이 대로에도 자동차가 거의 사라졌다.
(비무장 도시 현수막. 일본측이 찍은 사진이다.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4.html P.233)
일본군은 마닐라가 비무장 도시를 선언한 이후에도 폭격을 가했다. 27일에 일본기가 니콜스 비행장과 마닐라 항을 폭격했으며 다음날에도 마닐라 항에 떠있던 선박을 폭격하는 과정에서 부두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전후 혼마 장군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비무장 도시로 선언한 마닐라에 대한 폭격을 전쟁범죄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대해 혼마 장군측은 당시 마닐라에는 무장병력이 남아서 조직적으로 일본군에 대한 적대행위(장비와 보급품의 반출 및 파괴활동)를 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마닐라를 국제법상 비무장 도시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마셜 장군이 지휘하는 후위대가 남겨진 장비와 보급품에 대한 반출 및 파괴활동을 마치고 마닐라를 빠져나간 것은 12월 31일 저녁이었다.
마셜 장군의 후위대는 파괴활동을 꼼꼼하게 수행했다. 1942년 1월 1일 아침이 밝았을 때 도시의 남동쪽에서는 포트 맥킨리의 연료가 불타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니콜스 비행장이 불타고 있었으며 마닐라 만을 건너 남쪽에서는 카비테 항이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후위대가 판다칸의 연료 탱크를 폭파하자 불타는 기름이 주변의 창고와 건물을 집어삼키고 파시그강으로 흘러들어 강둑을 따라 또다른 화재를 일으켰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불길을 피해 달아났다. 마닐라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껴졌다.
후위대와 함께 경찰마저 철수하자 마닐라의 치안은 엉망이 되었다. 1월 1일 아침이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부두 지역에 몰려들었다. 후위대가 보급품 창고의 문을 열어놓고 철수한 것이었다. 남아있는 민간인을 위하여 후위대는 소각해야 할 보급품 중에서 쉽게 가져갈 수 있는 물품은 소각하는 대신 창고를 개방했다. 실제로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후위대가 개방한 창고에 있던 보급품은 사람들이 전부 가져가버려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문제는 후위대의 배려가 치안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1일 저녁이 되어 후위대가 개방한 창고가 비면서 가져갈 물품이 사라지자 흥분한 사람들은 떼지어 상업지대를 돌아다니면서 개인 소유의 창고나 상점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이를 제지할 경찰이 없었으므로 혼란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요사태는 2일 오후에 일본군이 진입할 때까지 이어졌다.
1월 1일 아침이 되었을 때 츠치바시 유이치 중장의 제48사단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12월 29일에 내린 명령에서 혼마 장군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더이상 마닐라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1일 저녁에는 모리오카 장군의 제16사단이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하여 역시 기존 명령에 따라 멈추었다.
츠치바시 중장은 1일 오전 10시 40분에 제14군 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마닐라에서 대화재가 발생했으므로 빨리 병력을 투입하여 피해를 막아야 한다면서 진입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제14군사령부가 비날로난에서 카바나투안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이 전문은 오후 5시 10분에야 혼마 장군에게 전달되었으며 군사령부가 카바나투안에 도착한 7시부터 참모회의가 시작되었다. 제14군사령부는 오후 8시에 마닐라 진입을 허가하기로 결정했으나 야간에 남북에서 동시에 일본군이 진입할 경우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2일 날이 밝은 다음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닐라 진입에 따른 여러 사항을 현지부대와 조정하기 위하여 위하여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중장이 제48사단에 파견되었다. 제48사단과 제16사단의 경계선은 마닐라 가운데를 흐르는 파시그강이었다.
1941년 1월 2일 오후 5시 45분에 제48사단보병단장 아베 고이치 소장이 이끄는 3개 대대(대만보병제1연대의 1개대대, 보병제47연대의 2개대대)가 마닐라 북쪽에 진입했고 동시에 남쪽으로부터는 수색제16연대와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가 진입했다. 일본군은 즉시 마닐라의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도시의 치안을 회복했다. 2일 아침에 석방된 약 3,500명의 마닐라 거주 일본인들이 안내와 통역을 맡았다.
주요 교차로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일본군과 통역이 검문했다. 필리핀인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집안에 머무르라는 경고를 받았고 3,000명에 달하는 미국인과 영국인은 산토토마스 대학에 억류되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일본군 장교는 주로 호텔이나 관공서를 숙소로 사용했고 병사들은 주로 학교를 막사로 사용했다. 시청에 있던 필리핀자치령 재무부의 금고는 밀봉되었고 은행은 문을 닫았다. 신문사는 잠시 문을 닫았다가 일본군의 감독 아래 활동을 재개했다.
필리핀자치령 공무원들은 대부분 억류되었다. 재판은 당분간 중단되었으며 수도와 전기같은 기반시설은 일본인의 통제를 받았다. 군표의 사용을 포함하여 경제활동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담은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일본군 부상자와 환자는 차이니즈 종합병원과 필리핀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혼마 장군은 마닐라를 점령함으로써 대본영이 부여한 임무를 달성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맥아더의 미-필리핀군은 건재했으며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을 소탕하지 않는 한 극동 제일의 양항 중 하나인 마닐라항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닐라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은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를 포함한 마닐라만의 몇몇 섬을 제외하고 루손 전역을 가벼운 피해만 입은 상태로 석권했다.
남쪽 민다나오에서는 일본군이 중요한 항구인 다바오에 강력한 교두보를 만들었다. 민다나오를 지키던 윌리엄 샤프 준장의 부대는 건재했으며 이제 필리핀에서 유일하게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델몬테비행장을 지키고 있었다.
루손과 민다나오 사이의 비사야에는 아직 일본군이 상륙하지 않았다. 파나이, 세부, 보홀, 레이테와 몇몇 섬에는 소규모의 미-필리핀군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다른 곳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제23군은 크리스마스에 홍콩을 점령했다. 개전 첫날 말레이에 상륙한 야마시타 장군의 제25군은 영국군을 격파하면서 싱가포르를 향하여 남하 중이었다. 일본군은 술루제도와 보르네오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남해지대는 괌을 점령하고 라바울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른 부대는 셀레베스-암본 지역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버마의 주요 비행장들이 12월 25일에 공습을 받았으며 제15군은 버마침공을 위하여 태국에 집결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남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의 모든 전력을 동남아시아에 집중시켜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해군의 호위 하에 민다나오에 1개 사단을 상륙시키고 델몬테 비행장을 중심으로 대량의 항공기를 집결시켜 바탄반도까지 보급로를 열고 루손에 상륙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주장은 워싱턴에서 공감을 얻었으며 영국도 독일우선원칙에 어긋나더라도 동남아시아에 탄약과 보급품을 보내는 것을 양해했다.
문제는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 미국이 할 수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필리핀을 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는데 진주만 기습으로 전함을 모두 잃은 태평양함대는 동남아시아로 가는 선단에 강력한 호위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전쟁계획국은 1942년 1월 첫째주 동안 필리핀 구원 가능성을 검토했다.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필리핀 수비대를 구하려면 지상군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1,500대의 항공기가 필요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투입할 수 있는 항공기의 2배였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런 다수의 항공기를 운용하려면 호주는 물론 진격로를 따라 수많은 비행장을 만들어야 했고 이들과 미국 서해안을 잇는 보급로를 지키려면 막대한 해군전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하여 연합군은 이미 동남아시아에 있는 해군전력에 더하여 전함 9척, 항공모함 7척, 구축함 50척, 잠수함 60척을 대서양과 지중해로부터 빼내어 추가로 투입해야 했다. 이럴 경우 유럽과 중동으로 가는 선단의 호송이 불가능해지고 서반구(Western Hemisphere)의 방어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었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2월 말에 이미 내부적으로 필리핀 상실을 기정사실화한 해군과 달리 여전히 필리핀 구원을 주장하던 스팀슨 전쟁장관과 마셜 육군참모총장도 전쟁계획국의 보고를 받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전쟁계획국의 계산은 필리핀 구원의 희망을 끝장내었다.
결국 미국과 영국참모본부는 말레이반도-수마트라-자바-호주로 이어지는 말레이방벽(Malay Barrier)에서 일본을 막는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럴 경우 미국은 가장 중요한 호주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군은 1942년 1월 초에 ABDA 사령부를 창설하고 영국의 웨이벌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사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형식상 맥아더 장군도 웨이벌 장군의 지휘 아래 들어갔으나 ABDA 사령부가 필리핀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맥아더 장군은 ABDA 사령부와 상관없이 종전대로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제 바탄반도로 들어온 미-필리핀군 앞에는 기나긴 굶주림과 전투, 그리고 포로수용소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몰랐으며 대부분 구원군이 달려오는 중이라고 믿었다. 오직 맥아더 장군과 직속 참모들만이 절망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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