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바탄철수 완료


과구아-포락방어선에서 후퇴한 미-필리핀군은 1942년 1월 5일에 바탄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구메인강 남안을 따라 방어선을 폈다. 방어선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좌익은 제21사단, 우익은 제11사단이었는데 강을 건넌 양 사단의 부대가 서로를 향하여 이동하여 접촉함으로써 연속적인 방어선을 편성하려는 열의가 없었다. 병사들은 모순되는 명령에 시달렸다. 전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가 잠시 후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기 일쑤였으며 동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과 서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오기도 했다.


제21사단장 카핀핀 장군은 동쪽의 제11사단이 철수했다는 엉터리 정보를 듣고 정오에 제21사단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사단이 이동을 시작했을 때 상황을 알게된 웨인라이트 장군이 개입하여 철수를 중단시키고 그날밤까지 방어선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5일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방어선을 편성했으나 실태는 한심했다. 어떤 구간에는 광활한 정면에 병사 몇명만이 띄엄띄엄 배치된 반면 어떤 구간에는 협소한 정면에 대병력이 밀집해 있었으며 소속이 다른 병력들이 뒤섞여 대부분 구간에서 지휘관이 누구인지 불명확했다. 제21야포연대장 리처드 말로니 대령은 휘하 부대를 찾아다니다가 야포를 트럭에 매단 채 보병 및 전차와 뒤섞여 주둔하고 있던 부하들을 찾아내고 기겁했다. 이때 일본군이 공격했다면 제11사단과 제21사단은 붕괴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일본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제21사단 정면의 다카하시지대는 5일 저녁까지 피오 이남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다. 제11사단 정면의 다나카부대는 5일 새벽에 제11사단의 후위대를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다나카부대를 대신한 이마이부대는 5일 오후에야 전선에 도착했으므로 공격할 시간이 없었다.


5일 밤이 되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11사단과 제21사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양 사단은 라약 남쪽에서 쿨로강을 건너 철수할 것이었다. 제11사단이 먼저 철수했다. 7번도로를 따라 남하한 제11사단이 라약을 통과한 후 쿨로강에 걸린 다리를 건너자 오후 8시 30분부터 제21사단이 쿨로강을 건넜다. 미-필리핀군이 철수하는 동안 라약은 끔찍한 교통정체를 겪었다. 행군하는 병사, 트럭, 버스, 야포, 전차, 말, 그리고 참모나 지휘관 차량이 마구 뒤섞여 라약 시가지를 통과했다. 제21야포연대를 끝으로 제21사단이 모두 쿨로강을 건너자 제21사단의 후위를 맡았던 제26기병연대가 강을 건넜고 이어서 전차들이 마지막으로 6일 새벽 2시에 쿨로강을 건넜다. 그 직후 창코 대위가 지휘하는 제91공병대대가 다리를 폭파했다.


(라약교차로 방어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3.html#13-1 P.217)


쿨로강 남쪽에는 마지막 지연방어선인 라약방어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라약 남쪽에서 헤르모사까지 동서로 달리는 110번도로를 따라 설정된 라약방어선은 제71사단장(PA) 셀렉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제71(PA) 및 제72보병연대(PA), 제31보병연대(US), 그리고 제26기병연대(PS)로 이루어진 라약방어선이 완성되자 셀렉 장군은 6일 오전 6시를 기하여 웨인라이트 장군의 지휘에서 벗어나 바탄방어군사령관 파커 장군의 지휘 아래로 들어갔다.


방어선에 투입된 병력은 제71 및 제72보병연대(합계 약 2,500명), 제26기병연대(657명), 그리고 필리핀 유일의 미군연대인 제31보병연대(약 2,100명)이었다. 포병은 75mm 곡사포 2개 포대와 구형 75mm 곡사포 4문을 가진 제71야포연대, 75mm 곡사포 10문을 가진 제23야포연대제1대대(PS), 그리고 75mm 곡사포 2개 포대를 가진 제88야포연대제1대대(PS)였다. 이외에 전차단과 자주포 2개 대대도 화력지원에 가세했다.


방어선의 우익은 제71보병연대였으며 이어서 제72보병연대가 자리했다. 제72보병연대의 서쪽 약 2,700m에 걸친 구간은 제31보병연대의 제1 및 제2대대가 맡았다. 방어선의 좌익은 6일 새벽에 쿨로강을 거쳐 후퇴한 제26기병연대였다. 제31보병연대제3대대는 예비대로 900m 후방에 주둔했다. 제26기병연대는 제88야포연대제1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제31보병연대는 제23야포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제71 및 제72보병연대는 각각 제71야포연대의 1개 포대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다. 헤르모사의 남서쪽에는 전차단과 자주포가 대기했다.


파커 장군은 라약방어선이 튼튼하다고 생각했으나 현장지휘관 셀렉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셀렉 장군은 좌익의 제26기병연대를 제외한 부대들은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정면을 맡고 있다고 생각했다.


6일 오전 10시에 미군정찰대가 남하 중인 이마이부대를 발견했다. 대만보병제1연대, 전차제7연대의 1개중대, 75mm 산포를 장비한 산포병제48연대,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야포병제1연대로 이루어진 이마이부대가 접근하자 오전 10시 30분부터 미군 야포가 불을 뿜었다. 포격을 받은 이마이부대는 라약 북쪽 4,000m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잠시 후 일본군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양군 포병간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포격전의 승부는 곧 결정났다. 일본군 포병은 관측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사정거리가 긴 150mm 유탄포를 가지고 있어서 관측이 제한되고 사정거리가 짧은 75mm 곡사포 밖에 갖추지 못한 미군 포병을 간단히 압도했다. 일본군의 150mm 유탄포가 관측기의 도움을 받아 미군이 보유한 75mm 곡사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격을 가하자 미군야포는 진지를 벗어나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고도 600m 이하로 날아다니는 일본군 관측기는 도망치는 미군야포의 위치를 계속 알려주었고 결국 정오까지 제23야포연대제1대대의 75mm 곡사포 10문 중 1문만이 살아남았다. 150mm 유탄포가 미군야포를 몰아내는 동안 일본군의 75mm 산포는 제31 및 제71보병연대를 집중적으로 때렸다.


방어선을 충분히 약화시켰다고 생각한 이마이 대좌는 오후 2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쿨로강의 다리가 끊어졌으므로 전차는 공격에 참가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서 오후 3시에 텅 빈 디날루피한을 점령했다.


쿨로강을 건넌 일본군은 오후 4시에 제31보병연대의 우익인 B중대 정면에 강력한 일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이미 큰 피해를 입은 B중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700m 정도 밀려났다. 이로써 B중대 서쪽에 있던 제31보병연대C중대와 동쪽에 있던 제72보병연대A중대 사이 공간이 열려버렸다. 제31보병연대제1대대가 구멍을 막는데 실패하자 제31보병연대장 찰스 스틸 대령은 셀렉 장군에게 예비대인 제31보병연대제3대대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여 승인을 받았다. 제31보병연대제3대대장 재스퍼 브래디 중령은 I 및 L중대에게 B중대가 지키던 방어선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 I 중대는 전진하다가 일본군의 포격을 집중적으로 얻어맞고 쫓겨났다. 그러나 도널드 톰슨 소령이 지휘하는 L중대는 신속하게 전진하여 역습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을 기습하여 몰아내고 B 중대의 방어선을 되찾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켰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본군은 얇게 늘어진 방어선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셀렉 장군에게는 이제 예비대도 없었고 포병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제72보병연대의 전선을 뚫어버리면 라약방어선에 배치된 모든 병력의 퇴로가 끊길 것이었다. 결국 6일 밤10시에 파커 장군이 철수명령을 내렸다.


방어선 우익의 제71사단은 큰 어려움없이 철수했다. 그러나 방어선 중앙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는 추격하던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7일 새벽 2시 30분에 일본군이 헤르모사에 도달하여 제31보병연대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으나 연대의 측면을 지키던 E중대가 악착같이 저항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하여 E 중대를 거의 전멸시키면서 새벽 5시에 겨우 헤르모사를 점령했으나 이미 제31보병연대 주력은 남쪽으로 빠져나간 이후였다. E중대의 생존자들은 며칠 후에야 미군 전선에 도착했다.


방어선의 좌익을 지키던 제26기병연대는 무전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27일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철수사실을 알았다. 이미 일본군이 헤르모사 남쪽까지 진출한 상황이라 도로를 따라 철수하기는 불가능했다. 기병대는 할 수 없이 길도 없는 정글을 헤치면서 산을 넘어 미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라약방어선에서 미일 양국의 전차는 활약하지 않았다. 쿨로강의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일본전차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헤르모사 남쪽에서 예비대로 대기하던 미군전차는 전투명령을 받지 못했다. 셀렉 장군은 라약방어선의 지형이 전차를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전차단은 6일 밤 9시에 보병보다 먼저 바탄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바탄으로의 철수가 끝났다. 2주에 걸친 철수기간 동안 미-필리핀군의 주요 부대가 전멸하는 일은 없었고 카바나투안을 제외하면 모든 방어선에서 철수에 필요한 시간 동안 적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훈련과 장비가 열악한 필리핀군을 이끌고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기동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맥아더, 웨인라이트, 존스를 비롯한 미군 지휘관들의 야전지휘능력이 뛰어났다는 증거이다. 


미-필리핀군은 철수기간 동안 상당한 병력을 잃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의 북부루손군은 28,000명에서 1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라진 12,000명 중 대부분은 탈영하여 집으로 돌아가버린 필리핀 병사이며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나 포로는 소수이다. 존스 장군의 남부루손군은 상황이 좋아서 처음의 15,000명 중에서 14,000명이 바탄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전사 627명, 부상 1,282명, 실종 7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외에 2,700명이 질병에 걸려 전선을 떠났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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