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바탄방어태세
잠발레스산맥의 남단에 위치한 바탄반도는 마닐라만과 수빅만 사이에 엄지손가락처럼 삐져나와 있다. 바탄반도와 남쪽 카비테주 해안과의 거리는 약 19km 이며 그 사이에는 코레히도르를 비롯한 몇개의 섬이 마닐라만 입구를 지키고 있다.
(1942년 1월 8일 현재 바탄반도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5.html P.246)
길이 40km, 기저부의 폭이 32km 인 바탄반도는 방어에 적합했다. 지표면은 정글로 뒤덮인 산악지대였으며 중심의 산지로부터 깊은 계곡이 해안으로 뻗어 있었다. 북쪽에는 해발 1,253m의 나티브산이 있었고, 남쪽에는 해발 1,388m로 바탄 최고봉인 마리벨스산이 있었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는 해안을 따라 달리는 110번도로와 동서로 관통하는 필러-바각도로 뿐이었다. 110번 도로 중 라약에서 시작하여 바탄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마리벨스에 이르는 구간은 동부도로라고 부르는데 자갈로 포장되어 전천후로 차량이 다닐 수 있었다. 110번 도로 중 마리벨스에서 서해안을 따라 모론까지 북상하는 구간은 서부도로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구간이 비포장이라 비가 많이 내리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나티브-마리벨스 능선의 가장 낮은 구간을 넘어 동해안의 필러와 서해안의 바각을 잇는 필러-바각도로는 바탄반도에서 유일하게 동서로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였으나 역시 비포장이라 비가 많이 내리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바탄반도는 정글로 뒤덮여 있어서 항공정찰로 지상군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공습을 가하기 어려워 제공권을 빼앗긴 미군에게 유리했다.
바탄방어전은 공식적으로 1942년 1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웨인라이트 장군은 바탄반도의 서쪽 절반을 담당한 제1필리핀군단장으로 임명되었고 파커 장군은 동쪽 절반을 담당한 제2필리핀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제1및 제2필리핀군단의 경계선은 나티브산과 마리벨스산을 잇는 능선이었다. 마리벨스산 남쪽은 지원사령부지역(Service Command Area)으로 획정되어 필리핀군관구 부사령관인 앨런 맥브라이드 준장이 지휘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과 지원사령부는 모두 코레히도르에 위치한 맥아더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1월 5일에 맥아더 장군은 지원사령부지역 내에 극동미육군사령부 참모들로 이루어진 바탄전진사령부를 설치했다. 자신의 부참모장인 리처드 마셜 준장이 이끄는 전진사령부를 통하여 맥아더는 바탄에서의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의 제1필리핀군단은 3개 필리핀군사단(제1, 제31 및 제91사단), 제71사단(PA)의 전투병력, 제26기병연대(PS), 포병 및 기타 부대를 합쳐 약 22,5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커 장군의 제2필리핀군단은 4개 필리핀군사단(제11, 제21, 제41 및 제51사단), 필리핀사단에서 파견된 제57보병연대(PS), 포병 및 기타부대를 합쳐 약 25,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 예비대는 필리핀사단(제57보병연대 감편), 전차단, 그리고 75mm 자주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맥브라이드 준장이 지휘하는 지원사령부지역에는 제2경찰사단, 제71사단(PA)사령부를 포함한 잔여 병력, 육군항공대 병력으로 이루어진 임시보병부대, 해병대, 그리고 해군수병으로 이루어진 임시보병대대가 있었다.
바탄방어선은 북쪽의 주전투진지(Main Battle Position)와 남쪽의 후방전투진지(Rear Battle Position)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전투진지는 동해안의 마바탕에서 중앙의 나티브산을 거쳐 서해안의 마우반을 잇는 약 32km 길이의 방어선이었다. 방어선 전면에는 전초선이 있었고 방어선 자체는 수km 의 종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상륙을 막기 위하여 방어선 후방의 해안도 방어했다.
흔히 마바탕-마우반선, 또는 아부케이-마우반선이라고 불리던 주전투진지는 연속된 방어선은 아니었다. 산타로사산(889m), 나티브산(1,287m), 그리고 실랑가난산(893m)으로 이루어져 통과가 거의 불가능한 24km X 24km 의 산괴가 방어선 중간에 박혀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을 끊어놓고 있었다.
주전투진지에서 남쪽으로 13km 정도 떨어진 후방전투진지는 필러-바각도로에 평행하게 동해안의 오리온과 서해안의 바각을 연결하는 방어선으로 극동미육군사령부 예비대가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1월 7일에는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웨인라이트 장군의 제1필리핀군단이 맡은 서쪽구역은 지형이 험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으며 수풀이 밀생하여 걸어다니려면 정글도(bolo)가 필요할 정도였다. 교통도 불편했다. 마리벨스에서 서해안을 따라 바각에 이르는 서부도로는 포장이 되지 않아 비가 많이 내리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바각에서 모론까지는 자갈로 포장하여 전천후 차량통행이 가능했으나 모론에서 길이 끊어지므로 이후로는 정글 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 수 밖에 없었다. 모론 북쪽으로 가려면 건기에도 지도, 나침반, 그리고 정글도가 필수였다.
(정글도. https://en.wikipedia.org/wiki/Bolo_knife)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해안의 마우반에서 내륙의 실랑가난산 기슭까지 이어져 있었다. 서쪽은 제1사단(PA)의 제3보병연대가 맡았고 중앙은 보병으로 전환한 제31사단(PA)의 제31포병연대가 담당했다. 동쪽의 실랑가난산 기슭을 담당한 것은 제1보병연대의 K중대였다. 제3보병연대는 방어선 앞쪽에 이중철조망을 쳤지만 방어선의 나머지 부분은 험난한 지형에만 의지했다.
제1필리핀군단은 일본군이 마우반 북쪽의 해안을 통하여 병력증원 및 보급을 행하지 못하도록 모론에 제1보병연대의 I중대와 제26기병연대의 G중대를 파견하여 마우반과 모론 사이의 해안선을 감시했다. 또한 방어선 후방에 일본군이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3보병연대의 예비대로 지정된 제1보병연대 제2대대가 마우반 남쪽해안을 방어했다.
제1필리핀군단의 포병세력은 제71야포연대(제1대대 감편), 제91야포연대의 2개 포대, 제23야포연대의 1개 포대, 75mm 자주포 1개 포대, 그리고 155mm 평사포 2문으로 이루어져 제71야포연대장 할스테드 파울러 중령의 지휘를 받았다. 총 33문의 야포 중 155mm 평사포 2문을 제외한 31문이 75mm 곡사포 또는 구형의 2.95인치 산포였다.
75mm 곡사포는 방어선 바로 뒤에서 북동쪽에서 뻗어있는 마우반 능선에 배치했다. 75mm 자주포는 능선 남쪽 약 270m 지점에 배치했으며 사정거리가 짧은 2.95인치 산포는 능선 북쪽에 배치했다. 155mm 평사포 2문은 남쪽에 있는 마우반곶의 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선과 해안선을 동시에 감제했다. 울창한 정글 덕분에 야포진지는 공중정찰이나 공습으로부터 안전했다.
해안방어는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의 제31사단(PA)이 맡았다. 제31사단은 제1보병연대제2대대의 방어선 남쪽으로부터 세이사인곶 사이의 16km 구간에 제45보병연대(PS)의 1개 대대를, 그 남쪽에 제31보병연대(PA)의 1개 대대를 배치했다. 제31사단의 해안방어선은 세이사인곶에 배치된 제92해안포연대(PS) 소속 155mm 평사포 2문의 지원을 받았다. 제92해안포연대의 다른 포들은 바각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1필리핀군단의 예비대는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셀렉의 제71사단과 스티븐스의 제91사단, 그리고 제26기병연대(PS)였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71사단의 전투병력을 제91사단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1월 6일 이후로 제71사단에는 지원사령부지역에 있던 사단사령부와 소수의 지원병력만 남게되어 제71사단은 편제표에만 존재할 뿐 유명무실해졌다.
제26기병연대도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상실한 말의 보충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제26기병연대는 말이 없는 병사들로 차량화보병중대와 정찰장갑차 및 브렌캐리어로 이루어진 기계화부대를 만들었다.
파커 장군의 제2필리핀군단은 마닐라만의 마바탕으로부터 나티브산까지 약 14km 를 방어했다.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서쪽과 달리 주로 평탄한 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해안을 따라 달리는 서부도로는 동부도로와 달리 포장된 전천후 도로였으며 이 도로를 따라 마바탕, 아부케이, 발랑가, 필러, 오리온, 리메이, 라마오, 캅카벤 등의 마을이 늘어서 있었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지형이 험해졌다.
동부도로를 포함하는 제2필리핀군단의 우익은 주전투진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며 일본군의 주공이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따라서 파커 장군은 이곳에 생생하고 잘 훈련된 제57보병연대(PS)를 배치했다. 제57보병연대는 마바탕 서쪽 약 1,800m 까지 방어했으며 추가로 발랑가까지의 서해안도 지켰다.
제57보병연대의 서쪽 약 5,900m 구간은 빈센트 림 준장의 제41사단(PA)이 지켰다. 제41사단은 바탄에 가장 먼저 들어와서 손실이 없었다. 림 준장은 3개 연대를 모두 발란타이강을 따라 만들어진 방어선에 투입했다.
제41사단의 서쪽 약 4,600m 는 존스 장군의 제51사단(PA)이 담당했다. 제53보병연대가 발란타이강을 따라 만들어진 방어선을 지켰으며 제52보병연대가 예비대가 되었다. 제51보병연대는 1월 11일에야 사단으로 돌아왔다.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제1필리핀군단보다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가장 지형이 험한 제51사단 구역에도 이중철조망이 만들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부족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몇 개 되지 않는 곡괭이, 삽, 도끼에다가 대검, 심지어 식판과 숟가락까지 사용하여 개인호, 참호, 사격호를 파고 공들여 위장했으며 사계청소를 하고 통신망도 꼼꼼하게 깔았다.
제2필리핀군단의 장거리화력지원은 구형 155mm 평사포 12문을 보유한 제86야포연대(PS)와 구형 155mm 평사포 12문과 155mm곡사포 2문을 보유한 제301야포연대(PA)가 담당했다. 이들은 아부케이 서쪽에 자리잡고 주전투진지와 동부도로를 감제했다.
제57보병연대는 제24야포연대제1대대와 75mm 곡사포 8문을 보유한 제88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제41사단은 사단포병에 더하여 아부케이 남서쪽에 주둔한 제24야포연대제2대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51사단의 사단포병이 보유한 야포는 75mm 곡사포 8문이 모두였으므로 제41사단으로부터 2.95인치 산포를 지원받았다.
발랑가 남쪽의 해안선은 1월 11일부터 제11사단(PA)이 지켰다. 제11사단은 자체의 포병연대에 더하여 제21포병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21사단은 군단예비대였다.
'1941년 및 그 이전 > 필리핀 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핀 함락(35)-일본군의 상황 및 계획 (0) | 2018.05.12 |
---|---|
필리핀 함락(34)-바탄의 보급상황 (0) | 2018.05.12 |
필리핀 함락(32)-마닐라 함락 (0) | 2018.05.11 |
필리핀 함락(31)-바탄철수 완료 (0) | 2018.05.10 |
필리핀 함락(30)-과구아-포락방어선 (0) | 2018.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