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바탄의 보급상황
바탄의 보급상황은 처음부터 심각했으며 갈수록 악화되었다. 오렌지계획에 따르면 바탄에는 43,000명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보급품을 축적해야 했다. 맥아더 장군이 이 계획을 폐기하고 해안에서 적과 싸우기로 결정하면서 바탄에 쌓여있던 보급품은 전방보급소로 반출되었다. 1941년 12월 23일에 맥아더가 바탄철수를 결심했을 때 바탄에는 연어통조림 약 1,040톤, 과일통조림과 채소통조림 약 70톤, 양념을 포함한 기타 식량 약 3톤, 그리고 휘발유 약 150만리터 등이 있었다.
바탄에 보급품을 본격적으로 수송하는 일은 23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쯤엔 보급해야 할 인원이 크게 늘어 있었다. 오렌지 계획에서 상정한 43,000명 대신 미-필리핀군 80,000명과 피난민 26,000명이 바탄반도에 들어왔다. 이 많은 인원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보급품을 수송하는 일은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도 어려운 과업이었다. 하물며 전쟁이 나서 부대가 철수하는 와중에 1주일 만에 수송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코레히도르에는 10,000명이 6개월간 사용할 보급품을 축적해야 했는데 이미 7,000명분의 식량이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간단했다.
바탄반도는 상황이 달랐다. 마닐라에서 바탄에 이르는 유일한 육로는 철수하는 부대와 함께 사용해야 했으며 차량마저 모자라서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다. 철도가 있었으나 협궤라 적재량이 작았고 기관사를 포함한 승무원들이 대부분 달아나 무용지물이었다.
포트 맥킨리와 포트 스토첸버그를 비롯한 전방 보급소에서는 관리병이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많은 보급품들이 뒤에 남겨졌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 후퇴하는 부대가 버려진 보급소에 들어가 가져갈 수 있는 보급품은 최대한 챙기고 나머지는 파괴했다. 후퇴하는 부대는 기회가 닿는대로 식량을 최대한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탄반도에 도착한 사단들은 10일에서 25일치 식량을 가진 상태였다.
바탄으로 향하는 보급품 수송의 주요 루트는 마닐라항을 통한 해상수송이었다. 어차피 바탄에 수송된 보급품 대부분이 마닐라항 부두 근처의 창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육군수송지원단의 보급장교 프레드릭 워드 대령은 민간인 자원자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바지, 예인선, 보트를 사용하여 보급품을 마닐라항에서 만을 가로질러 50km 떨어진 바탄까지 수송했다. 이런 소형선박들은 적재량도 적고 속력도 느렸지만 바탄에 있는 원시적인 수준의 부두에서도 쉽게 하역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공습으로 해상수송을 방해했는데 가장 큰 손실은 화물선 시키앙이었다. 밀가루 2,500톤과 휘발유를 싣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도망쳐 나온 이 프랑스 화물선은 12월 14일에 마리벨스에 접안하여 싣고왔던 휘발유를 내려놓았으나 밀가루의 하역은 늦어졌다. 그러던 중 12월 24일에 일본기의 공습으로 2,500톤의 밀가루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화물선 시키앙. http://www.wrecksite.eu/img/wrecks/si_kiang_i.jpg)
마닐라항에서의 선적작업 또한 일본기의 공습으로 방해를 받았다. 특히 위기감을 느낀 하역노동자들이 도망쳐 버려 선적에 지장을 받았는데 소식을 듣고 약 200명의 미국인과 영국인 자원자들이 모여들어 선적을 도왔다. 31일 저녁에 후위대가 마닐라를 떠날때까지 마닐라항에서 선적된 보급품은 약 30,000톤이었다.
후위대가 떠날 때까지도 마닐라항 부근의 창고에는 많은 식량과 휘발유를 비롯한 보급품이 남아 있었다. 후위대는 이것들을 파괴하는 대신 창고를 개방하고 떠났다. 곧 마닐라 시민들이 몰려와서 남겨진 식량과 휘발유를 비롯한 보급품을 챙겨갔으나 상업지대의 개인창고에 들어있던 식량과 휘발유를 비롯한 일부 물품들은 일본군이 차지했다.
바탄으로 수송된 보급물자에는 우선순위가 부여되어 있었다. 탄약과 식량이 1순위였으며 의약품, 폭발물, 철조망, 그리고 휘발유가 2순위였으며 나머지는 3순위였다.
탄약수송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개전 당시 병사는 1단위(Unit)의 탄약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어진지에 1단위를 추가로 보유하고 있었다. (단위란 전투시 1일 탄약소모량의 기준을 정한 것으로 소총의 경우 100발이 1단위였다.) 이외에 포트 스토첸버그와 포트 맥킨리를 비롯한 전방보급소에 탄약이 반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보유량의 2/3인 15,000톤은 6트럭 분량의 전차예비부품과 함께 바탄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23일 이후 15,000톤이 추가로 수송되었다. 따라서 탄약과 전차예비부품은 충분했다.
식량문제는 심각했다. 필리핀자치령 법률에 따르면 쌀과 설탕은 주(State)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런 제한은 철폐되어야 했으나 행정처리가 늦어졌다. 따라서 카바나투안의 국영쌀창고에 들어있던 4,500톤의 쌀이 바탄으로 가는 대신 고스란히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공무원들은 심지어 일본군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쌀을 불태우려는 시도까지 저지했다.
1942년 1월 3일의 조사에서 식량상황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바탄반도 내의 식량은 10만명의 30일치 밖에 되지 않았다. 내용을 보면 고기 및 생선통조림 50일치, 분유 40일치, 밀가루 및 채소통조림 30일치, 필리핀인의 주식인 쌀 20일치 등이었으며 설탕, 소금, 후추, 조리용 지방, 시럽 등이 조금 있었다. 과일통조림, 커피, 감자, 양파, 시리얼 등은 형편없이 부족했고 신선한 고기와 과일은 거의 없었다.
1월 5일에 보급사령관 드레이크 장군으로부터 식량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바탄반도 및 코레히도르에 있는 모든 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식량배급을 정량의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령했다. 이럴 경우 하루 약 2,000칼로리가 되는데 이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성인 필요량의 절반 정도로서 더운 날씨에 험악한 지형에서 쉴새없이 이동하고 진지를 만드는 등 많게는 하루 20시간 가까이 격렬하게 활동하던 전투병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양이었다. 다행히 많은 장병들이 개인적으로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사비로 구입하거나 버려진 보급소에 들어갔을 때 슬쩍 챙기는 방식으로 식량을 확보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챙겨야 하니 많아봐야 1인당 통조림 2박스 정도가 한계였으나 식량 배급량이 줄어들자 이것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보급장교들은 식량확보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행히 쌀의 수확기였으므로 공병이 리마이 부근에 정미소를 지은 다음 논에서 쌀을 수확했다. 고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도살장을 만들어 물소나 기타 가축들을 보이는대로 끌고와 도살했다. 라마오에는 물고기 창고를 만들어 놓고 지역 어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부들은 일본기가 활동하지 않는 저녁에 출항하여 밤새 고기를 잡아 새벽에 라마오로 돌아왔다. 소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커다란 솥에 바닷물을 넣고 끓였다.
농성을 시작한지 몇 주가 지나자 식량부족이 일본군보다 더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 모든 부대에서 식량확보를 위하여 사냥꾼들을 바탄반도 내부의 정글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일본군과 대치 중인 전선은 조용한 반면 바탄반도 내에서는 하루종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운이 좋으면 정글로 숨어들어온 물소를 사냥할 수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냥감은 점점 줄어들어 나중에는 주로 원숭이가 사냥감이 되었다. 식량사정이 더 악화되자 뱀을 먹는 병사도 나타났으며 항복을 앞두고 식량부족이 극심해지자 많은 병사들이 각종 벌레를 포함하여 정글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동식물을 먹어보려고 시도했다. 식량부족은 바탄에서 농성 중이던 미-필리핀 연합군이 항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피복도 모자랐다. 1월 초에 보급부서는 10,000벌의 군복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80,000명의 병사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덥고 습한 날씨와 정글의 날카로운 풀과 나뭇가지는 군복을 쉽게 찢고 헤지게 만들었다. 군화는 50,000켤레가 있었으나 미군 기준으로 만들어진 군화는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리핀인의 발에는 너무 커서 무용지물이었다.
모기장, 우비, 담요 및 방서모의 부족도 심각했다. 적당한 보호장비만 있었어도 말라리아나 열사병 등 병사들의 건강을 해치는 질병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의무부대는 의약품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12월 23일에 리마이에 제1통합병원이 들어섰으며 12월 말에 캅카벤 부근에 두번째 통합병원이 들어섰다. 마닐라에는 충분히 많은 의약품이 있었고 수송부대에서도 의약품 수송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상당한 양의 의약품을 수송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주일 만에 10만명이 6개월 동안 사용할 막대한 양의 의약품을 모두 수송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2월 말부터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비롯한 의약품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료는 충분했다. 처음 2주 동안은 휘발유 소비를 통제하지 않았으므로 각 부대에서 마구잡이로 신청하여 부대 내에 쌓아두는 바람에 재고가 하루에 53,000리터씩 줄어들었다. 이후 상황을 파악한 수뇌부가 휘발유 청구 요건을 깐깐하게 챙기기 시작하자 하루 소비량은 11,000리터까지 줄어들었다.
차량 쟁탈전은 바탄에 들어와서 더 심해졌다. 각 부대는 자기들이 쓰기 위하여 차량을 마구잡이로 징발하고 주행 중인 차량을 강제로 세운 다음 탈취했다. 사태를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맥아더의 부참모장 셔먼 장군이 아무리 자제를 요청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셔먼 장군은 공동주차장을 만들고 포병이나 수송부대처럼 편제표에 차량이 편제된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가진 차량을 모두 공동주차장으로 보낸 다음 필요시 차량을 배정받아 사용하라고 명령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셔먼 장군은 헌병을 투입했다. 헌병은 주행 중인 차량을 무작위로 세우고는 검문했다. 운전병이 정당한 공무로 차량을 운행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헌병이 차를 압수하여 공동주차장으로 보냈다. 그러자 일선부대는 헌병의 눈을 피해서 차량을 운용하기 시작했고 도로에서 압수된 차량 숫자가 줄어들자 셔먼 장군은 헌병을 각 부대에 파견했다. 하지만 일선부대에서 차량을 얼마나 절묘하게 감추는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불시에 들이닥친 노련한 헌병들도 번번히 허탕을 쳤다. 결국 셔먼 장군은 편제표상 차량을 가진 부대를 제외하고는 휘발유 공급을 중단했다. 일선부대는 비축해 둔 휘발유로 버텼으나 결국 비축했던 휘발유마저 떨어지면서 차량이 쓸모가 없어지자 공동주차장으로 보냈다.
공병자재는 폭발물 350톤, 철조망 800톤, 모래주머니 200톤, 대량의 목재 및 건설자재 등을 포함하여 약 10,000톤이 수송되었다. 이러한 자재들은 대부분 전방의 보급소로부터 바탄 입구의 루바오를 거쳐 1월 6일까지 바탄반도 내의 2곳에 집적되었다.
바탄에 도착한 공병대가 처음으로 한 일은 미국에서 증원될 전투기가 사용할 활주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방어선의 요새화는 주로 보병과 포병이 맡았지만 공병도 이들을 도와서 진지를 개선하고 철조망을 쳤으며 지뢰를 깔았다. 공병은 또한 도로와 다리의 유지보수를 맡았으며 유사시 다리를 폭파할 임무를 맡았다. 바탄반도로 들어온 피난민 26,000명을 위한 숙소와 정미소를 짓고 제재소를 만들어 건물과 다리를 만들 때 사용할 목재를 생산하는 것도 이들의 일이었다.
공병대의 문제점은 기술자 부족으로 그들은 기술을 가진 민간인 자원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특히 유능한 공병장교가 부족했는데 공병장교 부족이 얼마나 심했던지 일시적으로 민간인이 공병대대를 지휘하는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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