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부케이 방어선(1) - 동부도로 공세
제65여단은 1942년 1월 9일 오후 3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제2필리핀군단 지역을 강타한 포격에 이어 보병이 진격을 시작했다.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공격을 시작하면서 두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미-필리핀군 병력이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1-2만 정도에 불과하므로 저항이 약할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미군 방어선 위치를 실제보다 북쪽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첫번째 착각은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깨졌다. 전진하는 일본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톤단위의 포탄은 끝까지 싸우려는 미군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두번째 착각이 깨지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제14군의 의도에 따라 제65여단의 주공은 동쪽이었다. 제65여단의 4개 연대 중 3개가 동쪽인 제2필리핀군단 정면에 투입되었다.
여단의 좌익(동쪽)을 맡은 것은 보병제141연대장 이마이 다케오 대좌가 이끄는 좌익대였다. 좌익대는 보병제141연대, 독립속사포제3중대, 산포병제48연대제3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헤르모사에서 출발한 좌익대는 동부도로를 따라 칼라귀먼강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다.
소노다 대좌가 지휘하는 전차제7연대는 공병이 다리와 도로를 정비하면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좌익대의 추격에 협력할 예정이었다.
제2필리핀군단 방어선의 서쪽은 가미지마 대좌의 뒤를 이은 보병제9연대장 다케이치 스스무 대좌가 지휘하는 우익대가 공격할 것이었다. 우익대는 보병제9연대주력, 독립속사포제9중대, 산포병제48연대제2대대로 이루어졌다. 우익대는 알붐을 점령한 다음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좌익대와 합류함으로써 방어선의 적을 포위섬멸할 것이었다.
예비대인 보병제142연대는 좌익대를 뒤따르면서 발랑가 서쪽방면으로 남하할 것이었다.
제2필리핀군단을 공격하는 제65여단 주력은 제14군포병대의 화력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야전중포병제1연대장 이리 대좌가 지휘하는 포병대는 야전중포병제1 및 제8연대와 독립중포병제9대대로 이루어졌다. 포병대는 처음에 헤르모사 북쪽에서 화력지원 및 대포병사격을 담당하다가 전선이 남하하면 오라니까지 전진할 계획이었다.
제1필리핀군단이 방어하는 서쪽을 공격할 부대는 보병제122연대장 와타나베 류노스케 대좌가 지휘하는 우측지대였다. 보병제122연대(2개중대감편)과 야포병2개중대를 기간으로 한 우측지대는 올롱가포, 모론을 거쳐 바각까지 남하할 계획이었다. 나라 중장은 우측지대가 저항을 거의 만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아부케이 선이라고 불리는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마닐라만에 면한 마바탕에서 나티브산의 북동쪽 사면에 걸쳐 있었다.
(아부케이 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7)
동부도로를 포함하는 동쪽은 잘 훈련된 제57보병연대(PS)가 지키고 있었다. 중앙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병력이 충분한 제43사단이 맡아 발란타이강을 따라 방어선을 표고 있었다. 서쪽은 철수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앨버트 존스 준장의 제51사단이 맡아 발란타이강의 북안을 따라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칼라귀먼강의 지류인 발란타이강은 얕아서 쉽게 건널 수 있었으나 게곡이 깊어 방어에 유리했다. 제51사단의 방어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약해져서 나티브산의 사면에 걸쳐진 방어선 서쪽 끝은 단지 개인호 몇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9일 오후 3시에 포격에 이어 진격을 시작한 제65여단 병사들은 서로 다른 수준의 저항을 받았다. 동쪽에서 공격한 좌익대는 미군의 엄청난 포격을 받았다. 반면 서쪽을 공격한 우익대는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하지만 좌익대도 본격적인 방어선을 만나지 않아서 진격 자체는 순조로웠다. 9일 저녁까지 좌익대가 만난 적은 헤르모사 남쪽에서 만난 제57보병연대의 정찰대 뿐이었다. 미군 정찰대는 가벼운 교전 끝에 철수했다. 9일 저녁에 이마이 대좌와 다케이치 대좌의 보고를 받은 나라 중장은 미-필리핀군이 전의를 잃고 퇴각중이라고 생각했다.
1월 10일에 맥아더 대장이 바탄반도를 방문했다. 맥아더는 10일 새벽에 참모장 리처드 서덜랜드 소장과 함께 어뢰정을 타고 코레히도르를 떠나 해협을 건너 마리벨레스에 상륙했다. 동부도로를 타고 북상한 맥아더는 제2필리핀군단사령부에 들러 파커군단장을 비롯한 제2군단의 장교들과 회의한 후 전선을 시찰했다. 이어서 필러-바각도로를 따라 제1필리핀군단사령부에 들른 맥아더는 웨인라이트 군단장과 회의를 가진 후 코레히도르로 돌아갔다. 이것이 맥아더의 유일한 바탄방문이었다.
(전선 시찰 중인 맥아더 장군. 옆의 인물은 제51사단장 앨버트 존스 준장이다. 1942년 1월 10일.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8)
맥아더가 바탄을 방문중일 때 혼마 장군은 비행기로 항복권유문을 떨어뜨렸다. 제1필리핀군단은 한층 강력한 포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중에 혼마 장군은 필리핀군 상대로 전단을 뿌렸는데 내용은 맥아더가 필리핀인을 목숨을 담보로 항복권유를 무시하고 항전을 고집하고 있으니 그를 위하여 개죽음하지 말고 일본군에게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마이 대좌는 동부도로를 쉴새없이 때리는 미군의 포탄을 피하기 위하여 동부도로에는 아카기 대위가 지휘하는 제2대대(2개 중대 감편)만 남기고 주력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제41사단 방어선을 공격하기로 했다.
동부도로를 담당한 아카기대대는 10일 오후에 사멀 남쪽에서 제57보병연대의 전초선을 공격했다. 전초선을 지키던 필리핀 스카우트들은 짧은 총격전 후에 철수했다. 아카기대대는 더 이상의 보병을 만나지는 않았으나 야포의 방해 때문에 저녁까지 사멀에서 남쪽으로 1,600m 떨어진 칼라귀먼강에 도달하는데 그쳤다. 보병제141연대의 주력은 야포의 방해는 덜 받았으나 지형이 험하여 10일 저녁까지 칼라귀먼강에 만들어진 제41사단의 전초선에 도달하는데 그쳤다.
조지 클라크 대령이 지휘하는 제57보병연대(PS)는 우익에 제1대대, 좌익에 제3대대를 배치하고 제2대대를 예비로 보유했다. 아카기대대는 11일 저녁에 칼라귀먼강을 건너 오후 10시에는 제3대대의 방어선에서 불과 140m 떨어진 사탕수수밭에 도달했다. 미군은 적이 사탕수수밭을 튀어나와 방어선에 다다르기 전에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사탕수수를 제거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실수였다. 일본군은 오후 11시에 무시무시한 함성과 함께 빗발치는 탄환을 뚫고 I 중대의 방어선으로 돌격했다. 선두의 일본군은 철조망을 만나자 서슴없이 몸을 던졌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동료의 등을 밟고 그대로 돌격했다. 예상 외로 빠른 돌격속도에 압도된 I중대는 중대장이 중상을 입고 부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밀려났다. 이로써 인접한 K중대의 측면이 열려버리자 제3대대장은 즉시 예비대인 L중대를 투입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했고 연대예비대인 제2대대에서 추가로 1개 중대가 달려온 다음에야 겨우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12일 새벽이 되자 필리핀 스카우트들은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I중대 진지를 탈환했다. 전투현장에 남은 일본군 시체는 200구에 달했다.
일본군 일부는 소규모 부대나 개인적으로 제57보병연대제3대대 주둔지에 침투했다. 제57연대는 1개 소대를 투입하여 12일 하루동안 소탕전을 벌였다. 소대장 알렉산더 니닝거 소위는 부하들을 소규모의 저격팀으로 만들어 수색하면서 일본군을 소탕했다. 소대는 니닝거 소위를 포함하여 약간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훨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12일 저녁까지 침투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니닝거 소위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서쪽으로 이동중이던 좌익대의 주력은 10일 밤에 별다른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아부케이 방아선의 서쪽을 담당한 우익대는 험한 지형과 부정확한 지도 때문에 정글 속에서 헤매었다. 11일 아침이 되었을 때 선두인 제2대대는 겨우 제51사단방어선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오라니강에 도달했다.
11일 오후가 되자 나라 중장은 공격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나티브산의 관측소에서 보내는 정보에 따라 동부도로를 때리는 미군의 화력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일본군 포병이 대포병전에 실시하려 했으나 정글에 가려 미군야포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나라 중장은 아부케이 방어선 서쪽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보병제141연대 주력은 더욱 서쪽으로 진격시키고 해안과 제141연대 사이에 예비대인 보병제142연대를 투입했다. 이로서 예비대인 제142연대는 좌익대가 되었고, 좌익대였던 제141연대는 우익대가 되었다. 제2필리핀군단의 서쪽 끝인 나티브산 능선을 담당한 보병제9연대의 2개 대대는 이제 우회대가 되었다. 우회대는 계속 남하하여 적의 방어선을 서쪽으로부터 포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보병제9연대의 1개 대대는 여단예비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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