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일본군의 상황 및 계획
미-필리핀군이 바탄반도에서 방어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일본제14군은 약화되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필리핀 점령은 개전 이후 50일 내에 마쳐야 하며 이후에 제14군의 중핵인 제48사단과 제5비행집단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차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잔당 소탕 및 경비는 제16사단과 제65여단이 담당할 것이었다. 제65여단은 개전 45일째인 1월 22일에 필리핀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2월 29일에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과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타케 중장은 제16군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을 예정보다 1달 가까이 빨리 실시하자고 대본영에 건의하여 1월 1일에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1월 2일에 남방군은 제14군에게 주력인 제48사단과 제5비행집단을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방군 총사령부는 강력한 차출의지를 보여주면서 명령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하여 남방군 총참모부장 아오키 시게마사 중장을 파견했다. 아오키 중장은 1월 5일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나라 아키라 중장이 지휘하는 제65여단은 12월 30일 오전8시에 구축함 2척과 수뢰정 4척의 호위 아래 14척의 수송선을 타고 대만의 가오슝을 떠나 1월 1일 오후 2시에 링가옌만에 상륙했다. 이는 예정보다 3주일이나 빠른 것이었으나 제48사단의 차출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상륙한 제65여단의 1개 대대는 비행집단장 지휘 아래 들어가 비행장 방어임무를 맡았고 보병5개대대와 야포2개중대로 이루어진 주력은 도보로 남하하여 6일 오후에는 포락 남쪽에 도달했다.
제65여단은 원래 경비목적으로 창설되었으며 여단장 나라 중장의 의견에 따르면 전투에 부적합했다. 약 6,500명의 병력을 가진 제65여단은 3개 연대(제122, 제141 및 제142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연대는 2개 보병대대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보병대대는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중대 1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차량은 거의 없었으며 여단 전체에 야포라고는 2개 중대가 모두였다. 지원병력으로는 야전병원 1개, 공병부대 1개, 그리고 통신소대 1개를 가지고 있었다. 제65여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2선급 징집병이었으며 훈련도 부실하여 부대훈련을 중대급까지만 실시했다.
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적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루손에 있는 미-필리핀군의 병력이 미군 35,000명에 필리핀군 5,000 - 10,000명으로 총 40,000 - 45,000 명 정도이며 그중 바탄반도에는 25,000명 정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전차는 40대 정도로 예상했으며 약간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에서 농성중이던 미-필리핀군의 실제 병력은 약 80,000명에 달했다.
또한 일본군은 1월 6일에 헤르모사에서 노획한 미군 서류를 통해 미-필리핀군이 식량 부족으로 전날인 5일부터 정량의 절반만을 보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히 떨어진 적군을 공격하기만 하면 줄줄이 항복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혼마 중장이 바탄반도 공략을 쉽게 생각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바탄반도 공략이 본질적으로 적의 방어선을 공격하는 전투가 아니라 도망치는 적을 뒤쫓는 추격전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미-필리핀군은 급조한 방어선에서 잠시 저항하다가 후퇴할 것이며 바탄반도 남쪽 끝의 마리벨스 부근에서야 방어선을 펴고 본격적인 저항을 시도하다가 결국 코레히도르 섬으로 철수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혼마 중장은 약체인 제65여단에게 바탄반도 공략을 맡겼다. 작전은 단순하고 야심찼다. 제65여단은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할 것이었다. 주공인 동쪽에서는 동부도로를 따라 아부케이를 거쳐 발랑가까지 남하하고 조공인 서쪽에서는 서부도로를 따라 모른을 거쳐 바각까지 남하하여 다수의 적을 포위격멸할 것이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역시 주공을 동쪽에 , 조공을 서쪽에 두어 남쪽 끝인 마리벨스까지 남하한 다음 주공과 조공이 합류하여 적의 마지막 저항을 일소한다는 것이었다. 마리벨스 도달은 1월 20일로 예상했다.
물론 제65여단만으로는 이러한 공격이 불가능하므로 다양한 지원이 주어졌다. 제16사단은 보병제9연대, 야포병 1개대대(75mm 야포), 공병연대, 그리고 의무대를 지원했다. 제48사단은 야포병2개대대(75mm 야포)를 지원했다. 전차제7연대도 공격에 참가했으며 제14군은 150mm 유탄포를 가진 야전중포병제1연대 및 독립중포병제9대대 그리고 105mm 유탄포로 무장한 야전중포병제8연대를 지원했다.
항공지원은 제5비행집단의 일부 세력을 떼내어 1월 8일에 편성한 제14군비행대가 담당했다. 제10독립비행대장 호시 코마타로 대좌가 지휘하는 제14군비행대는 제10독립비행대(제52 및 제74중대 기간, 정찰), 독립비행제76중대(정찰), 비행제50전대의 1개 중대(전투), 비행제16전대(경폭 2개 중대)로 이루어져 전투기 11대, 경폭격기 36대, 정찰기 22대를 보유하고 정찰, 탄착관측, 그리고 지상지원을 담당했다. 여러 비행장에 흩어져 있던 제14군비행대의 항공기들은 1월 10일까지 클라크 비행장에 집결했으며 13일부터 주로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진지, 바탄 활주로, 그리고 마리벨스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16사단은 제65여단의 바탄 공세와 호응하여 마닐라만 남쪽에 있는 터네이트와 더 남쪽에 위치한 나숙부를 점령하여 바탄반도의 미군과 남쪽의 연결을 끊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1월 8일 현재 바탄반도 상황.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5.html P.246)
혼마 중장은 1월 4일 정오에 제65여단에게 남하하여 제48사단을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카하시 지대와 독립중포병제9대대는 제65여단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제65여단은 1월 8일 오후 6시까지 디날루피한과 헤르모사 사이에 전개를 마치고 다음날 오후로 예정된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제48사단은 제65여단에게 바탄 전선을 물려주고 마닐라 시내로 철수하여 미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설비를 사용하여 차량을 수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등 차기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제48사단은 1월 14일을 기하여 제14군의 지휘를 벗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책임진 제16군 지휘 아래로 들어갔다. 제48사단은 25일 오전에 혼마 장군의 열병을 받고 오후에 마닐라 시내를 행진했다. 이후 마닐라를 떠난 제48사단은 2월 8일에 링가옌만에서 수송선을 타고 루손을 떠났다. 필리핀 전투에서 제48사단의 전사 및 실종자는 358명이었다.
제5비행집단은 제14군비행대를 제외하고 대만으로 돌아가 정비를 받았다. 이후 제5비행집단의 주력은 태국 방면으로 배치되었으며 일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지원했다.
사실 제14군 내에는 바탄반도 공격에 대한 신중론이 있었다.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은 바탄반도의 지형이 험하므로 공격하기 어렵고 설사 바탄반도를 점령하더라도 코레히도르를 비롯한 마닐라만의 요새들을 공격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마닐라만 요새까지 점령하지 못하면 어차피 마닐라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바탄반도 공격준비는 오랜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며 제14군의 주력인 제48사단이 빠져나간 상황에서는 공격을 미루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탄반도는 봉쇄만 해두고 먼저 마닐라를 비롯한 후방을 안정시키고 비사야와 민다나오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후방을 정리한 다음 굶주림 때문에 약해진 바탄반도의 적을 공격하면 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아니면 봉쇄만 하고 있어도 어차피 바탄반도의 적은 식량이 모자라서 6개월이면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제1과고급참모인 나카야마 모토오 대좌는 반론을 폈다. 나카야마 대좌는 적이 바탄반도에서 농성하고 있는 이상 후방안정은 불가능하며 비록 어렵고 손실이 많이 나더라도 바탄반도의 적을 하루빨리 소탕하는 것만이 군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적이 식량배급량을 줄였다고 하여 적이 최대한 절약해도 6개월 버틸 식량만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방작전 전체의 시간표를 고려할 때 바탄반도를 6개월씩 봉쇄한다는 방침을 상부에서 받아들일 리 없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마에다 참모장의 의견이 옳았으나 당시의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린 혼마 장군은 나카야마 대좌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편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침공을 앞당기자는 남방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대본영 육군부는 바탄반도에서 미-필리핀군이 농성하는 상황에서 남방군 총사령부가 제48사단을 너무 빨리 제14군에게서 빼내려 하자 불안감을 느꼈다. 다나카 신이치 제1부장은 작전과 회의에서 남방군의 조치가 적당한지 의문이라며 제48사단을 당분간 제14군 휘하에 두어 바탄반도 공략을 마치게 한 후 다른 방면으로 전용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육군부의 불안은 필리핀에서 돌아온 남방군 총참모부장 아오키 중장이 제48사단 없이도 바탄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낙관적인 보고를 하면서 사라졌다. 스기야마 참모총장은 1월 10일에 열린 대본영 연락회의에 참석하여 제14군이 수주일 내로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에서 저항하고 있는 미-필리핀군을 완전히 격멸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인식 하에서 대본영 육군부는 1월 14일을 기하여 제48사단을 제14군에서 빼내어 제16군 휘하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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