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아부케이 방어선(2) - 위기일발


1942년 1월 12일 하루동안 일본군 제65여단은 서쪽으로 주공을 옮기면서도 아부케이선에 대한 압박을 유지했다. 일본군은 제57보병연대 전방에서 칼라귀먼강 남안에 다시 발판을 마련했고 중앙에서는 제41사단의 전초선을 남쪽으로 밀어붙였다. 서쪽에서는 일본군이 제51보병연대의 방어선에 구멍을 내었다. 즉시 예비대가 투입되어 일본군의 추가 진출을 막고 방어선 일부를 탈환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동해안을 지키던 제57보병연대는 여전히 아카기대대(보병제141연대제2대대)로부터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아카기대대는 12일 밤에 제57연대와 서쪽의 제41연대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서 돌출부를 형성했다.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반격을 위하여 예비대인 제21보병연대로부터 제2 및 제3대대를 제57보병연대에 배속했다. 제57보병연대장 클라크 대령은 13일 오전 6시에 제21연대제2대대를 동원하여 아카기 대대의 돌출부를 공격했다. 공격해보니 돌출부가 예상보다 넓어서 제2대대는 오른쪽의 제57연대와 연결되기 전에 왼쪽의 제41연대와 연결이 끊어져 버렸다. 클라크 대령은 제2대대의 좌익에 제3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제3대대는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포격을 얻어맞고 그자리에 못박혔다. 그러자 클라크 대령은 제21연대 대신 예비대로 돌렸던 제57보병연대제2대대를 투입하여 13일 저녁에 겨우 돌출부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날 제43보병연대의 후방을 통과하던 제23보병연대는 일본군의 포격을 뒤집어쓰고 60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바탄반도의  중앙을 남하하던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험한 지형 때문에 13일에도 미-필리핀군의 주방어선에 도달하지 못했다.


14일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15일이 되자 제57보병연대 전면의 위협은 사라졌다. 제57보병연대장 아놀드 풍크 대령(13일 정오에 클라크 대령으로부터 연대장직을 이어받음)은 제21보병연대를 제2필리핀군단에 돌려주었다.


15일 오후 4시에 일본군 보병제141연대의 일부 병력이 발란타이강을 건너 남안에 도달하여 제41사단과 제51사단 사이의 작은 언덕을 장악했다. 제41사단과 제51사단에서는 병력을 보내어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했다.

제51사단은 위기에 빠졌다. 일본군의 주공이 제51사단 전면에 집중되고 있는데 사단장 존스 장군에게는 철수 과정에서 약화된 부대 밖에 없었다. 그는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에게 증원병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사실 일본군이 아부케이선의 서쪽 부분에 전력을 집중할 가능성은 맥아더 장군도 고려하고 있었다. 10일에 맥아더가 시찰을 다녀간 이후 11일에는 극동미육군사령부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이, 12일에는 부참모장 셔먼 장군이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을 찾아와 아부케이선의 서쪽 부분을 강화하라고 요구했다. 파커 장군은 증원을 요청했고 맥아더가 받아들였다. 15일 밤에 극동미육군사령부로부터 필리핀사단(US, 제57보병연대 감편), 그리고 웨인라이트의 제1필리핀군단으로부터 제31사단(PA)이 제2필리핀군단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부케이 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7)


예비대를 확보하자 파커 장군은 동부도로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제21보병연대제3대대를 제51사단에 배속하면서 반격을 명했다. 그런데 혼란통에 반격 명령만 전달되고 제3대대가 제51사단에 배속된다는 내용은 누락되었다.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반격할 전력이 안 된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명령에 따라 반격을 준비했다. 좌익의 제53연대가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우익의 제51연대가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할 것이었다.


16일 새벽에 시작된 반격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제51보병연대는 발란타이강을 건너 일본보병제141연대를 공격했는데 기습효과에 힘입어 일본군 전선을 무너뜨렸다. 일본군 전선에는 위험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팽창했다. 그러나 제51연대의 초반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사단장 존스 장군의 평가대로 제51사단은 공세를 취할 전력이 부족했다. 일본군은 초반 기습의 충격에서 깨어나 16일 정오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보병제141연대는 제51연대의 동쪽 측면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남쪽으로도 파고 들었다. 제51연대의 북서쪽에 있던 보병제9연대는 돌출부의 북쪽과 서쪽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남쪽으로 파고들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제51연대는 세방면에서 공격을 받는 동시에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닫자 제51연대의 사기가 무너졌고 이는 전선 붕괴로 이어졌다. 필리핀 병사들은 아침에 출발했던 진지를 지나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이로써 방어선 중앙에 구멍이 뚫렸다.


보병제141연대장 이마이 대좌는 적의 방어선이 뚫린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오전에 강력한 공격을 받아 전선이 붕괴되었던 충격이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방어선 너머에 얼마나 많은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적을 쫓아 방어선 너머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이번엔 자신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전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는 방어선을 돌파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제51연대의 동쪽을 지키던 제43보병연대를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한다는 보다 안전한 길을 택했다.


제51연대의 패주로 졸지에 왼쪽 어깨가 열려버린 제43보병연대는 기세가 오른 보병제141연대 주력의 공격을 받았다. 제43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유진 루이스 중령은 제41공병대대, 통신병, 보급병, 그리고 패잔병 등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총동원한 임시대대를 만들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보병제141연대의 주력이 제43보병연대를 공격하는 동안 일부 병력은 제43연대의 동쪽에 있던 제42보병연대를 공격하여 제43연대와의 연결을 끊으려했다. 실제로 일부 병력이 두 연대 사이에 진출했으나 제23연대에서 1개 대대가 달려와 침입자를 몰아내고 제43연대와의 연결을 유지했다.

제41사단의 우익을 맡은 제41보병연대는 일본군 보병제121연대 및 아카기대대(제141연대제2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41연대의 방어선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으나 제1필리핀군단으로부터 증원된 제31사단(PA) 소속의 제31보병연대제3대대가 달려와 가까스로 붕괴를 막았다. 


제51연대의 패주로 인하여 아부케이선의 서쪽 끝을 담당한 제53보병연대는 오른쪽 어깨가 열려버렸으나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았다. 일본군 보병제141연대는 동쪽의 제41연대를 공격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북쪽의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힘든 행군 끝에 제51보병연대와 격전을 치른 후 재편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53연대 후방에는 제51사단에 배속된 제21보병연대제3대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혼란한 하루가 끝날 때까지 제51사단에서는 제3대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결국 제3대대는 16일 하루동안 대기만 하다가 구이톨로 철수했다.


제53연대가 위험하다고 핀단한 제51사단사령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 과정은 엉망이었다. 길도 제대로 없는 정글을 통과하면서 부대가 흩어졌다. 대부분은 굶주리고 지친 모습으로 구이톨에 도착했으나 일부는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나뭇잎, 관목뿌리, 달팽이를 먹어가며 며칠간 걸은 끝에 서해안의 바각에 도착했다.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패잔병을 구이톨에서 재편성하여 방어선을 폈다.


1942년 1월 16일에 제2필리핀군단은 커다란 위기를 넘겼다. 제51연대가 패주했을 때 일본보병제141연대가 제51연대를 추격하여 그대로 방어선 안쪽으로 뛰어든 다음 뒤쪽에서 제41사단을 공격했다면 아부케이선이 붕괴했을 것이다. 다행히 보병제121연대는 제51연대를 추격하지 않고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제43연대를 공격했다.

또한 보병제9연대가 비어버린 제51사단 방어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살리안강을 따라 아부케이로 남동진했으면 제2필리핀군단의 우익이 포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지도에 이끌린 보병제9연대는 살리안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진격하는 대신 보다 남쪽의 아보아보강쪽으로 진출했다. 보병제9연대는 19일까지 정글에서 헤매었다.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필리핀사단장(US) 맥스 로우 준장에게 제51사단의 방어선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 로우 사단장은 휘하의 제31보병연대(US) - 제31보병연대(PA)와 혼동하지 말 것 - 와 제45보병연대(PS)에게 반격의 출발점인 아부케이 하시엔다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제45보병연대는 중간에 길을 잃어 반격이 개시되었을 때 출발선에서 4,600m 정도 남동쪽에 있었다.


1월 16일 저녁이 되었을 때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아부케이선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동부도로에 집중하려던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아부케이선의 서쪽 부분에 주공을 두어 제51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선두인 보병제9연대는 남쪽으로 깊숙이 진출한 상태였다. 실제로는 정글에서 길을 잃어 헤매고 있었으며 나라 중장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지만 어쨌든 존재 자체로 아부케이선의 미-필리핀군은 서쪽으로부터 위협을 느꼈다. 이제 제2필리핀군단이 아부케이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17일 아침에 실시할 제31보병연대(US)의 역습이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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