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부케이 방어선(3) - 반격실패
1942년 1월 16일 저녁에 아부케이선의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제51보병연대의 패주로 인하여 제51사단이 맡고 있던 아부케이선의 서쪽 전체가 무너졌다. 제51사단의 방어선을 복구하지 못하면 아부케이선을 포기해야 했다. 파커 장군은 필리핀사단의 제31보병연대(US)와 제45보병연대(PS)를 동원하여 제51사단의 방어선을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공격예정시간인 17일 아침까지 제31보병연대는 출발선인 아부케이하시엔다 동쪽에 도착했으나 길을 잃어 헤매던 제45보병연대는 아직 남쪽으로 4,6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따라서 파커 장군의 반격은 제31보병연대 단독으로 실시하게 되어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부케이 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6.html#16-1 P.267)
1월17일 오전 8시 15분에 제31보병연대는 아부케이하시엔다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12번오솔길(Trail 12)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좌익은 제1대대, 우익은 제2대대였으며 제3대대는 예비대였다. 좌익의 제1대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북상하여 저녁까지 발란타이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우익의 제2대대는 370m 정도 전진했을 때 강력한 적의 방어선에 부딪혔다. 거듭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제2대대는 진격이 정체되었다. 이로써 계속 북상 중인 제1대대와 간격이 벌어지자 예비대인 제3대대에서 K 중대가 파견되어 간격을 메웠다.
17일 저녁에 필리핀사단장 로우 준장은 부하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다음날인 18일 공격에는 토마스 도일 대령의 제45보병연대와 찰스 스틸 대령의 제31보병연대를 모두 투입하기로 결정되었다. 제31보병연대가 서쪽을 맡고 제45보병연대가 주공을 맡아 서쪽의 제31보병연대와 동쪽의 제43보병연대 사이로 공격을 가할 계획이었다. 제41사단을 실제로 지휘하던 맬컴 포이티어 대령이 제41사단의 포병단을 동원하여 화력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18일 아침이 되었을 때 제31보병연대의 서쪽을 맡고 있던 제1대대가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졌다. 따라서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의 좌익에 투입되었고 제45보병연대의 공격은 2개 대대로 실시했다.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제1대대를 위협하던 일본군을 밀어내고 제1대대의 서쪽에서 발란타이강에 도달하여 13km 길이의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로써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에 배속되면서 제31보병연대의 서쪽, 즉 아부케이선의 최서단에 자리잡았다.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서쪽은 단지 정글일 뿐이었다.
2개 대대만으로 공격한 제45보병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전진했으나 예정보다 공격을 늦게 시작한 까닭으로 18일 저녁까지 발란타이 강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쪽의 제31보병연대제2대대 또한 아직 일본군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발란타이강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18일 저녁이 되었을 때 일본군은 아직 아부케이하시엔다 북쪽에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18일 저녁이 되었을 때 제2필리핀군단의 상황은 엄중했다. 이마이 대좌의 보병제141연대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주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제45보병연대의 정찰병은 아보아보강 계곡을 따라 남하 중이던 대규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이들은 보병제9연대로서 부정확한 지도 때문에 길을 잃고 정글 속을 헤매는 중이었으나 어쨌든 아부케이선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온 지점에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제2필리핀군단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19일 정오에 제31보병연대는 돌출부의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이 전투에 전차투입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차단장 위버 준장은 그날 제2필리핀군단으로부터 전차 지원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동쪽의 제41보병연대의 2개 대대는 북쪽으로 진격을 재개하여 이른 오후에 발란타이강에 도달했다. 서쪽에서는 제31보병연대에 배속된 제45보병연대제3대대가 일본군으로부터 하루종일 총격을 받았다.
19일 저녁이 되었을 때 필리핀사단의 반격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부케이선 서단의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일본군으로부터 치열한 기관총 사격을 받고 있었다.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아부케이선 남쪽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파커 장군의우유부단이었다. 그는 나라 중장이 동부도로를 포기하고 아부케이선의 서쪽에 주력을 투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동부도로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서둘러 아부케이선의 서쪽을 집중적으로 보강한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20일과 21일 이틀 동안 미-필리핀군은 아부케이하시엔다 북쪽의 돌출부를 제거하려고 여러번 공격했으나 축차투입을 되풀이하면서 번번이 실패했다. 미-필리핀군이 돌출부 제거에 신경을 쓰는 동안 나라 중장은 주력을 아부케이선의 서쪽 정면에 집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집결을 마친 일본군은 22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제31보병연대의 방어선은 좌익에 제45보병연대제3대대, 중앙에 제31보병연대제1대대, 우익에 제31보병연대제3대대가 있었다. 제3대대의 동쪽에는 일본군이 형성한 돌출부가 있었으며 제31보병연대제3대대의 남동쪽에는 제31보병연대제2대대가 돌출부의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22일 오전 10시에 일본군 일부가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서쪽에서 몰래 발란타이강을 건너 밀림 속에 숨었다가 공격 시작과 동시에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서쪽 측면을 공격했다. 정오가 되자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은 주로 중앙을 담당한 제31보병연대제1대대 정면에 집중되었다. 엄청난 포격과 공습에 이어 일본군이 일제히 발란타이강을 건너 방어선을 공격하자 제31보병대대제1대대는 버티지 못하고 밀려났다. 정면과 왼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던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제31보병연대제1대대의 후퇴로 오른쪽 어깨까지 열려버리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제1대대 동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제31보병연대제3대대도 오른쪽의 돌출부와 정면의 일본군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판에 제1대대의 철수로 왼쪽 어깨마저 열려버리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22일 저녁까지 제31보병연대는 아부케이하시엔다의 동쪽과 남쪽에 걸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다. 아부케이하시엔다의 동쪽 900m 지점에 제31보병연대제2대대가 있었고 그 남동쪽에 제3대대, 그리고 이어서 제1대대가 방어선을 폈다.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약 90m 후방에서 예비대로 대기했다. 그리하여 반격을 시작한지 5일만에 제31보병연대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반격은 실패했다.
반격에 참가했던 병사의 상태는 열악했다. 식량이 모자라 사탕수수를 씹으면서 허기를 달래야 했고 낮에는 일본기의 공습에 시달리고 밤에는 일본군의 침투에 대비하느라 잠이 부족하여 틈만 나면 졸았다.
일본군의 야포가 남하하면서 일본군은 화력지원을 제대로 받은 반면 미-필리핀군 야포의 화력지원은 제약을 받았다. 미-필리핀군 야포가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면 연기를 보고 일본기가 달려들었다. 정글 덕분에 직접 피해를 입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때마다 포격을 중단하고 이동해야 했다. 일본군 보병이 박격포와 다수의 척탄통으로부터 충실한 화력지원을 받은 반면 미-필리핀군이 보유한 3인치 박격포의 포탄은 불발율이 매우 높았다.
후방에서는 일본보병제9연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보병제9연대는 17일에 아보아보강 계곡에 들어선 이후 계속 남하했다. 일본군이 구이톨에 접근하자 미-필리핀군은 반격을 시도했다. 19일 아침에 제21보병연대의 정찰대가 보병제9연대의 선두와 만나 가벼운 총격전 끝에 도망쳤다. 일본군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제21사단과 제31사단이 파견되었다. 제21사단은 적을 보자마자 도망쳤으나 제31사단은 용감하게 싸워 일본군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흥분한 병사들이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서로에게 사격을 가했다. 제31사단장 블루멜 대령이 달려가 서로 총질하고 있던 부하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미-필리핀군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보병제9연대는 21일 아침에 구이톨 부근에 나타나 구이톨 오솔길에 자리잡은 언덕을 점령했다. 큰 피해를 입고 재편성 중이던 제51사단이 남북에서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했다. 보병제9연대가 구이톨과 그 부근을 감제할 수 있는 언덕을 장악하자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은 제2필리핀군단 전체가 포위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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