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과구아-포락방어선
1942년 1월 2일이 되자 미-필리핀군은 바탄반도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과구아-포락선에 방어선을 폈다. 이곳에서 일본군을 오래 막을수록 바탄반도에서 방어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16km 길이의 방어선 좌익(서쪽)에는 제21사단(PA)을 배치하고 제26기병연대(PS)를 예비대로 두었으며, 우익(동쪽)에는 제11사단(PA)을 배치하고 위버 장군의 임시전차단을 예비대로 두었다. 당시 미군사령부는 루손섬의 일본군을 12만명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선에 배치된 병사들이 느끼던 중압감은 상당했다. 하지만 실제로 루손에 있던 일본군은 6만 정도였으며 그중에서 구아과-포락 방어선을 공격한 일본군은 전차와 야포의 지원을 받는 2개 연대 규모였다.
방어선의 좌익인 포락을 공격한 것은 야전중포병제8연대장 다카하시 가츠미 중좌가 지휘하는 다카하시지대로서 보병제9연대(2개 중대 감편), 야포병제22연대의 2개 포대, 야전중포병제8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나중에 독립야전중포병제9대대가 가세했다. 방어선의 우익인 과구아를 공격한 것은 다나카 대좌가 지휘하는 다나카지대로서 대만보병제2연대(1개대대감편), 보병제47연대의 1개 대대, 전차제7연대의 1개 중대, 산포병 2개대대, 야전중포병제1연대(1개대대감편)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5비행집단이 다카하시지대와 다나카부대에 대한 항공지원을 담당했다.
(라약교차로 방어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3.html#13-1 P.217)
포락 남쪽의 방어선 서쪽을 담당한 제21사단은 2개 연대를 방어선에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예비로 두었다. 74번도로 서쪽의 좌익은 제21보병연대가, 74번도로 동쪽의 우익은 제22보병연대가 담당했다. 제23보병연대는 예비대로 8km 남쪽에서 대기했다. 사단포병단의 제3대대는 좌익의 제21보병연대를, 제1대대는 우익의 제22보병연대를 지원했다. 제2대대는 일반지원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제3대대의 세력이 1개 포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3대대 바로 뒤에서 제21보병연대를 지원할 채비를 갖추었다.
포락에서 남쪽으로 11km 떨어진 새너제이에는 군예비대인 제26기병연대(PS)가 주둔했다. 연대장 피어스 대령은 G중대를 잠발레스산맥과 제21보병연대 사이에 배치하고 연대 주력은 새너제이에 배치했다. 제21사단사령부도 새너제이에 있었다.
2일 오후에 보병제9연대의 선발대가 74번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제21보병연대를 공격하여 남쪽으로 1,800m 떨어진 피오 부근까지 몰아내었다. 제21사단장 카핀핀 장군은 예비대인 제23보병연대의 제3대대를 투입하여 제21보병연대를 보강함으로써 더 이상의 후퇴를 막았다.
3일 아침에 제23보병연대제3대대는 일본군을 원래 방어선까지 밀어내라는 명령을 받고 북상했다. 그러나 밤새 다카하시지대의 주력이 피오까지 남하한 상태였다. 피오로 접근하는 제3대대의 머리 위로 야포병제8연대의 105mm 포탄이 쏟아지더니 이어서 일본군의 소화기 사격이 시작되었다. 제3대대는 피오 남쪽에서 진격이 멈추었다가 곧 남쪽으로 쫓겨났다.
다카하시 중좌는 반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후퇴하는 제23보병연대제3대대를 뒤따라 남하하여 제21보병연대의 방어선을 들이쳤다. 정오까지 제21보병연대의 좌익이 무너졌다. 그러자 피해를 입지 않은 제21보병연대의 우익도 철수해야 했으며 이 와중에 제21보병연대본부가 통째로 포로로 잡힐뻔 했다. 제21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제22보병연대의 좌익을 맡고 있던 제1대대의 왼쪽이 열려 버렸고 이곳으로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21사단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동쪽으로부터 전차 1개 중대를 파견했으나 전차들은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머뭇거리다가 힘없이 밀려났다. 이로써 제21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나마 제21사단이 붕괴를 면한 것은 포병 덕분이었다. 제21야포연대는 불과 500m 거리에서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여러번 포수가 육안으로 일본군을 확인하고 직접사격을 가했다. 포병의 지속적인 방해로 다카하시지대의 공격속도가 느려졌으며 결국 해가 떨어지자 다카하시 중좌는 추격을 포기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따라서 제21사단은 겨우 병력을 추스려서 새너제이에 방어선을 펼 수 있었다.
다음날인 4일은 일본군이 간간이 105mm 포로 포격을 가할 뿐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동쪽에서 제11사단이 후퇴했으므로 웨인라이트 장군은 4일 오후에 제21사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해가 떨어지자 제21사단은 새너제이를 떠나 포락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구메인강 남안에 방어선을 폈다. 제21사단사령부, 제23보병연대본부 및 제21야포연대본부는 디날루피한에 자리를 잡았다.
과구아-포락방어선의 우익은 제11사단(PA)이 담당했다. 사단의 좌익은 제11보병연대로서 과구아-포락도로를 따라 산타로사부터 과구아까지를 담당했다. 제11보병연대는 3개 대대를 모두 방어선에 배치했으며 좌익은 제2대대, 중앙은 제3대대, 그리고 우익은 제1대대였다. 우익을 담당한 제13보병연대는 과구아를 담당했다. 예비대인 제12보병연대는 과구아에서 남쪽으로 7번도로를 따라 새즈무안에 걸쳐 주둔했다. 제11야포연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고, 제194전차대대 일부와 제192전차대대 A중대가 군예비대 역할을 했다.
제11사단을 공격한 것은 전력이 증강된 다나카부대였다. 다나카부대는 3일 새벽4시에 산페르난도를 떠나 7번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과구아 북쪽 900m 지점에 매복중이던 제194전차대대 C중대의 1개 소대가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다. 정오가 되어 일본군 주력이 도착하자 전차소대는 후퇴했다.
남하하던 일본군은 제11연대의 방어선에 접근하자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주력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75mm 야포로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다. 제11야포연대도 역시 75mm 야포로 반격을 가했다.
4일 아침이 되자 일본군의 150mm 곡사포 1개 포대가 포격에 가세했다. 4일 오후가 되자 전차제7연대를 선두로 일본군이 과구아를 지키던 제13연대와 서쪽의 제11연대 방어선에 공격을 가했다. 제13연대는 굳건하게 버텼으나 바로 서쪽의 제11연대제3대대는 15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밀려났다.
제11사단이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웨인라이트 장군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관건이었다. 제11사단장 브라우어 장군은 4일 오후에 제192전차대대 A중대와 함께 새너제이로 가서 버스 여러대를 구하여 제11보병연대로 보냈다. 제11보병연대는 이 버스를 타고 5일 아침 6시까지 루바오와 산타크루즈 사이의 7번도로로 철수했다.
제11사단의 후위를 맡은 것은 밀러 중령의 제194전차대대로 고든 페커 대위가 지휘하는 하프트랙 자주포들의 지원을 받았다. 후위대는 새즈무안-루바오 도로에 봉쇄점을 설치했는데 4일 오후 4시에 기관총, 박격포, 그리고 야포를 동반한 일본군 800명이 백기를 든 필리핀군 포로 3명을 앞세우고 봉쇄점에 접근했다. 밀러 중령은 망설이지 않고 사격명령을 내렸다. 전차와 자주포가 불을 뿜자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섰다. 4일 저녁이 되자 후위대는 불타는 루비오를 지나 7번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5일 새벽 3시에 추격하던 일본군이 후위대를 따라잡아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야포의 지원을 받았으나 보병이었기 때문에 기동이 용이한 7번도로와 주변의 벌판에서 전차와 자주포로 이루어진 미군후위대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후위대는 유리한 지형에서 장갑과 기동성, 그리고 화력의 우위를 살려 일본군을 무자비하게 살륙했다.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격퇴당했으며 결국 새벽 5시가 되자 추격을 포기했다. 큰 피해를 입은 다나카부대는 이날 오후에 이마이 히푸미 대좌의 대만보병제1연대(1개대대감편)를 기간으로 하는 이마이부대로 교체되었다. 이마이부대는 다나카부대에 배속되었던 산포병과 전차부대를 물려받았다.
한편 제11사단방어선의 좌익에 배치되었던 제192전차대대 A중대와 제11보병연대의 일부 병력은 7번도로를 통하여 철수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할수 없이 과구아-포락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새너제이까지 간 다음 74번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제21사단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디날루피한, 라약을 거쳐 7번도로를 따라 북상하여 산타크루즈까지 50km 에 달하는 거리를 돌아와야 했다.
미-필리핀군은 이틀만에 과구아-포락방어선을 포기하고 구메인강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좌익을 담당한 제21사단은 약 13km 를 후퇴했으며 우익을 담당한 제11사단은 약 10km 를 후퇴했다. 과구아-포락방어선에서의 사투로 바탄반도의 미군은 방어선을 강화할 시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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