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발리에그 역습


1941년 12월 30일이 되자 루손에 있는 미군 및 필리핀군은 대부분 마닐라 북쪽에 있었다. 북부루손군은 밤반과 아라얏을 잇는 D-5선을 지키고 있었다. 길이가 24km 정도인 D-5선의 좌익은 잠발레스산맥이었고 우익은 해발 1,026m 인 아라얏산이었다. 아라얏 동쪽은 통과가 힘든 칸다바늪지였다. D-5 선은 탈락에서 이어지는 3번도로를 차단했다. 일본군 주력은 D-5 선 대신 마닐라를 목표로 동쪽의 5번도로를 따라 남하중이었다. 만일 일본군이 플라리델을 거쳐 칼룸핏의 다리를 점령하면 남부루손군의 퇴로를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맥아더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바탄도로.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2.html P.204)


맥아더는 칼룸핏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팜팡가강 동쪽에서 동원가능한 모든 전력을 투입했다. 남부루손군 소속의 제51보병연대(제1대대 감편)와 밥콕 중령이 지휘하는 임시자주포대대의 자주포들이 플라리델을 지켰다. 제194전차대대(C중대 감편)는 칼룸핏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팜팡가강 동쪽 연안에 있는 아팔릿에서 대기했다. 필요하면 제194전차대대는 칼룸핏 동쪽으로 진출하여 전투에 참가할 것이었다.


플라리델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앙갓강 유역의 발리에그는 제71사단(제71 및 제72보병연대, 제71야포연대)와 제192전차대대 C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31일 새벽에 카바나투안에서 철수한 제91사단이 발리에그에 도착하여 마을 남쪽에서 예비대로 대비했다.

31일 오전 10시에 맥아더의 참모장인 서덜랜드 장군이 남부루손군 사령관 존스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팜팡가강 동쪽의 모든 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했다. 따라서 발리에그를 지키던 병력들도 북부루손군 사령관인 웨인라이트 장군의 지휘를 벗어나 존스 장군 지휘 아래 들어왔다. 존스 장군은 1월 1일 오전 6시까지 제1경찰여단을 마지막으로 모든 부대를 팜팡가강 서쪽으로 이동시킨 다음 칼룸핏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발리에그를 공격한 일본군은 전차제7연대장 소노다 신스케 대좌가 지휘하는 전차단이었다. 30일 저녁에 카바나투안을 출발한 전차단은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하여 31일 새벽에 발리에그 외곽에 도달했다. 일본공병대가 전차의 엄호 하에 마을 북쪽을 흐르는 앙갓강에 걸린 파괴된 다리를 수리하려고 하자 제71야포연대와 제192전차대대 C중대의 1개 소대가 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포기하고 동쪽으로 가서 정오에 앙갓강 상류에서 강을 건넜다. 이때 발리에그 남쪽에 주둔중이던 제91사단이 미리 받았던 명령에 따라 남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오후 1시 30분에 일본전차가 마을 동쪽으로 접근하자 제71사단의 2개 보병연대가 황급히 버스를 타고 철수했으며 전차도 뒤를 따랐다.  난리통에 제71야포연대는 철수하지 못했다.


존스 장군이 플라리델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를 방문한 웨인라이트 장군과 철수계획을 논의하는 동안 남부루손군 참모가 들어와 제91사단에 이어 제71사단도 후퇴중이라고 알렸다. 존스 장군은 즉시 제71사단 병력들을 붙잡으라고 명령했으나 제71사단을 태운 버스는 헌병이 제지하기 전에 플라리델을 빠져나가 버렸다. 다행히 전차들은 플라리델에서 멈추었다.


공격을 받으면 경험이 부족한 제51보병연대만으로 플라리델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존스 장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하여 선제기습을 가하기로 했다. 제192전차대대 C중대의 2개 소대(전차 10대)가 밥콕 중령이 지휘하는 75mm 자주포 6문의 화력지원 아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발리에그로 북상했다. 일본군은 발리에그의 동쪽 지역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발리에그의 남서쪽으로부터 접근하던 미군은 제71야포연대를 만났다. 그리하여 미군전차들은 자주포에다가 추가로 제71야포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후 5시에 윌리엄 젠트리 중위가 지휘하는 제192전차대대 C중대의 전차 10대가 75mm 자주포 6문 및 제71야포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전차가 좁은 도로를 일직선으로 달리면서 일본군이 들어있던 도로 양편의 오두막에 기관총탄을 퍼붓자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일본전차가 반격을 시작하여 어스름하게 지는 해를 배경으로 좁은 도로를 오르내리면서 양군 전차 사이에 짧고 격렬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이때쯤엔 피아가 섞여 미군의 화력지원이 불가능했으나 기습을 당해 얼이 빠진 일본군 보병 또한 미군전차에 소총사격이나 가할 뿐 일본전차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른 병과의 개입없이 정면대결할 경우 일본전차는 미군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군전차는 1대의 손실도 입지 않고 일본전차 8대를 격파했다.

해가 지자 자주포와 제71야포연대의 화력 지원 아래 미군전차들이 발리에그를 빠져나갔고 포병들은 오후 10시에 철수했다. 전차들은 1월 1일 오전 2시 30분까지 칼룸핏 다리를 건너 철수했다.


발리에그의 일본군을 기습하여 시간을 번 존스 장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1월 1일 오전 3시까지 제1경찰여단이 칼룸핏 다리를 건넜고 마지막으로 제51보병연대가 새벽 4시에 플라리델을 떠났다.


한편 발리에그에서 크게 한방 먹은 일본군은 바로 남하하지 못하고 정찰대를 먼저 내보냈다. 정찰대가 플라리델 북쪽 외곽에 도착하자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버스소리가 들렸다. 정찰대는 바로 시내로 뛰어들었으나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추격할 수 없었다.


(칼룸핏 다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2.html#12-1 P.209)


제51보병연대의 마지막 대열이 칼룸핏 다리를 통과한 것은 1월 1일 오전 5시였다. 북부루손군 사령관 웨인라이트 장군은 남부루손군 사령관 존스 장군, 제91사단장 스티븐스 장군, 그리고 임시전차단장 웨버 장군에게 휘하부대가 모두 팜팡가강을 건넜냐고 문의했다. 3명의 장군으로부터 그렇다는 확인을 받은 웨인라이트 장군은 북부루손군 공병대장 해리 스케리 대령에게 칼룸핏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직 팜팡가강 동쪽에는 나시스코 마자노 중령(PS)이 지휘하는 공병 1개 소대가 남아 있었다. 스케리 대령은 다리 폭파를 미루고 마자노 중령을 계속 호출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고 접근하는 일본군의 소총소리가 가까이 들려오자 스케리 대령은 할 수 없이 폭파명령을 내렸다. 1942년 1월 1일 오전 6시 15분에 칼룸핏 다리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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