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남부루손군의 철수(2) - 주력 탈출


일본제16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은 사단사령부, 사단통신대, 보병제20연대(제2대대 및 제1대대의 주력 감편), 수색제16연대, 야포병제22연대(제2대대의 2개 중대 감편), 공병제16연대주력, 야전고사포제47대대(1개 중대 감편), 독립야전고사포제31중대, 사단치중, 병참부대 및 선박관련부대로 이루어진 사단주력을 이끌고 12월 24일 새벽에 아티모난에 상륙했으며 24일 저녁에 필리핀군 2개 대대를 쫓아내고 비나한을 점령했다.


(라몬만 상륙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3 P.140)


존스 장군은 비나한 서쪽의 파그빌라오에 방어선을 폈다. 방어병력은 1개 연대 수준이었다.  제52보병연대장 버질 코르데로 대령이 비나한에서 쫓겨온 제52보병연대 제2 및 제3대대(1개중대감편)을 지휘했고, 제53보병연대장 존 보트라이트 대령이 제53보병연대제1대대를 지휘했다.


아티모난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파그빌라오는 남부루손의 중요한 도로교차점이었다. 1번 도로가 아티모난을 거쳐 파그빌라오를 지나 루세나와 사리아야로 이어졌다. 한편 파그빌라오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타야바스가 나왔는데 여기에서는 남북으로 연결된 23번도로를 만날 수 있었다. 파그빌라오의 동쪽 2,700m 지점에서는 팔사방곤강이 1번 도로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12월 25일 아침이 되었을 때 제52보병연대는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팔사방곤강을 건너고 있었고 제53보병연대제1대대는 팔사방곤강의 서안에 전개하여 제52보병연대의 후퇴를 엄호하고 있었다. 제52보병연대의 마지막 부대가 추격하는 일본군의 사격을 받으면서 팔사방곤강을 건넌 직후 공병이 일본군 눈앞에서 다리를 폭파했다. 제52보병연대는 제53보병연대의 방어선을 통과한 후 파그빌라오-타야바스 도로에 방어선을 폈고 제53보병연대는 일본군의 도하에 대비하여 팔사방곤강을 지켰다.


일본군은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25일 오후4시에 수색제16연대를 선두로 일본군이 팔사방곤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일단 팔사방곤강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제53보병연대제1대대는 파그빌라오를 거쳐 루세나로 후퇴했다. 일몰 이후 파그빌라오에 진입한 수색제16연대는 제53보병연대를 추격하지 않고 북서쪽 타야바스로 방향을 바꾸어 제52보병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제53보병연대를 추격한 것은 수색제16연대를 뒤따르던 보병제20연대제3대대였다. 따라서 25일 밤이 되자 일본군은 파그빌라오를 점령하고 2개로 나뉘어 타야바스와 루세나로 후퇴 중인 필리핀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존스 장군은 타야바스만을 지키던 해밀턴 시라이트 대령의 제53보병연대제3대대를 불러들여 루세나를 통과하는 1번 도로와 타야바스에서 오는 도로가 만나는 사리아야 동쪽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시라이트 대령은 제51야포연대 병력으로 구성된 임시보병대대를 증원받았으며 제194전차대대 C중대의 전차들도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보병제20연대제3대대에 쫓기던 보트라이트 대대는 26일 아침에 루세나를 통과하여 오후 3시 30분에 사리아야에 도착했다. 추격하던 일본군은 오후 9시에 루세나에 도착했다.

북서쪽에서는 코르데로 연대가 26일 아침에 타야바스에 도착했으며 방향을 남서쪽으로 꺾어 보트라이트 대대보다 몇시간 늦게 사리아야에 도착했다. 추격하던 수색제16연대는 후퇴하는 필리핀군이 폭파한 다리 때문에 지체되어 26일 오후 4시에 타야바스에 도착했다. 수색제16연대는 코르데로 연대를 바로 추격하지 않고 타야바스에 머무르면서 일부 병력을 루반으로 북상시켜 츠네이로 부대를 증원했다. 26일 저녁까지 모리오카 중장은 사리아야 동쪽의 주요 도로망을 장악했다.


이때쯤 남부루손군의 상태는 절망적이지는 않더라도 위태로웠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편제가 점차 무너져 병력을 단대호로 표시하기가 어려워졌으므로 일본군처럼 휘하 부대에 지휘관 이름을 붙여야 했다. 존스 장군은 병력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시에 복수의 방어선을 설정했다. 전방 방어선이 무너지면 병력들은 후방 방어선을 통과하여 후퇴한 다음 후방 방어선이 적을 막는 동안 재편성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보급품 수송은 북부루손군과 마찬가지 이유로 어려웠다. 보급소 관리병력이 도망치면서 로스바노스에 있던 보급품들이 방치되었는데 다행히 사단의 보급부대가 비어있는 보급소에 들어가 대부분의 보급품을 챙기고 나머지를 파괴했다.


존스 장군은 155mm 평사포 6문을 바탄으로 후퇴시키는 어려운 과업도 단행했다. 극동미육군 사령부는 바탄반도로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평사포 견인에 필요한 10톤 트랙터를 내놓으라고 명령했으나 존스 장군은 거부하고 트랙터를 사용하여 평사포들을 바탄까지 견인하기로 결정했다. 평사포들은 26일 저녁에 바탄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위장한 상태로 10톤 트랙터에 이끌려 이동 중인 155mm 평사포 M1917.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1.html#11-2 P.198)


12월 26일 오후 7시에 존스 장군은 사리아야에서 서쪽으로 11km 떨어진 칸델라리아에 전방사령부를 설치하고 방어선을 폈다. 존스 장군은 도시를 동서로 감싸고 흐르는 강을 따라  제53보병연대(제3대대감편)를 배치했다. 서쪽의 방어선이 주방어선이었으며 동쪽의 방어선은 전초선이었다. 존스 장군은 동시에 칸델라리아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루사칸에 코르데로 대령의 제52연대를 배치했다. 두 방어선을 편성한 후 존스 장군은 사라이야에 있던 시라이트 부대를 루사칸에서 서쪽으로 2,700m 떨어진 티아옹으로 보냈다. 시라이트 부대는 27일 새벽 1시에 버스에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착실히 추격해왔다. 27일 오후에 수색제16연대를 선두로 한 일본군이 칸델라리아 동쪽의 전초선을 공격하여 간단하게 무너뜨렸다. 후퇴하는 필리핀군을 쫓아 칸델라리아 시내를 통과한 일본군은 강을 건너 주방어선을 들이쳤다. 27일 오후 8시 30분에 주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제53보병연대(제3대대 감편)는 티아옹을 향하여 달아났다.

일본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28일 아침에 칸델라리아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루사칸을 지키던 제52보병연대를 공격했다. 오전 9시 15분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제52보병연대도 티아옹으로 달아났다.


티아옹은 접근로 양옆이 고지대였으므로 방어에 유리했다. 존스 장군은 티아옹에 보병4개 대대를 투입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방어선은 전차로 보강되었으며 자주포가 지원했다. 제51야포연대의 야포 8문은 방어선 좌익의 고지대에 배치하여 1번 도로를 따라 접근하는 일본군에 포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었다. 북쪽 측면의 방어를 위하여 존스 장군은 제1보병연대장 맥키 소령이 이끌던 필리핀스카우트 예비역 300명을 티아옹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배치했다. 제51보병연대(제1대대감편)는 티아옹에서 남서쪽으로 18km 떨어진 리파에 주둔하면어 이쪽을 통한 일본군의 접근에 대비했다. 로스바노스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산티아고에는 제1필리핀경찰연대가 예비대로 대기했다.


만일 모리오카 중장이 티아옹 방어선을 공격했다면 참패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남부루손군은 티아옹을 떠나야 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이 이끄는 북부루손군이 D-4 선까지 내려오자 맥아더 장군은 28일 저녁에 존스 장군에게 빨리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남부루손군은 1942년 1월 1일 오전 6시까지 전원이 칼룸핏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29일 새벽 2시에 코르데로 대령의 제52보병연대가 제51야포연대의 1개 포대와 함께 티아옹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29일 저녁까지 제51사단의 주력이 티아옹을 떠나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리파를 지키던 제51보병연대는 베이호 서안을 따라 알라방까지 북상하여 기동예비대가 되었다. 시미언 지저스 준장이 지휘하는 제1경찰여단(제2연대 감편)은 마닐라로 통하는 17번 및 25번 도로를 지키던 제42보병연대와 교대했다. 제42보병연대는 버스를 타고 바탄으로 철수했다. 그날 밤에 남부루손군사령부는 마닐라 남서쪽에 있는 포트맥킨리로 옮겼다.

남쪽에서는 수색제16연대를 선두로 한 일본군이 티아옹을 점령했다.


남부루손군이 철수하기 위해서는 팜팡가강에 걸린 칼룸핏 다리를 통과해야 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 참모장 마셜 장군은 30일 저녁에 남부루손군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D-5 선의 우익이 뚫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셜 장군은 따라서 칼룸핏의 서쪽은 북부루손군이 지키겠지만 동쪽인 플라리델은 남부루손군이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남부루손군의 후위는 지저스 준장의 제2경찰여단이 맡았다. 제2경찰연대를 돌려받은 지저스 장군은 우익의 제1경찰연대로 17번 및 25번 도로를, 좌익의 제2경찰연대로 1번 및 21번 도로를 방어했다.

제1보병연대는 마닐라를 통하여 바탄으로 철수했다. 산티아고에 집결해 있던 병력은 경찰여단 방어선을 통과하여 칼룸핏으로 향했다. 이후에 제2경찰여단은 마닐라 남동쪽의 포트맥킨리로 후퇴했다.


남부루손군 사령부는 31일 새벽 4시에 플라리델로 이동했으며 제51사단 주력은 31일 저녁이 되기 전에 칼룸핏 다리를 건넜다. 제51보병연대의 2개 대대가 31일 오후에 플라리델 북서쪽의 5번 도로에 방어선을 폈다. 밥콕 중령의 자주포가 방어선에 배치되어 일본전차의 출현에 대비했다. 제194전차대대 C중대는 플라리델 남쪽 19km 지점에 자리잡고 남쪽으로부터 추격해오는 일본군에 대비했다. 마닐라 남동쪽의 포트맥킨리에는 지저스 장군의 제1경찰여단이 들어와 있었다. 제1경찰여단은 31일 저녁에 포트맥킨리를 떠나 1일 오전 6시에 칼룸핏 다리를 통과할 것이었다.


남부루손군의 철수는 성공적이었다. 미군과 필리핀군은 가벼운 피해만 입은 상태로 험한 지형을 뚫고 라몬만에서 플라리델에 이르는 230km 거리를 철수했다. 실제로 1월 1일이 되었을 때 모리오카 중장의 부대는 산티아고까지 진출하는데 그쳐 루손전투의 향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남부루손군의 파괴활동은 효과적이었다. 일본공병이 등골빠지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오카 중장은 남부루손군이 파괴한 도로와 다리 때문에 장갑차, 야포, 그리고 보급품 운반에 어려움을 겪었다. 12월 24일부터 1월1일 사이에 모리오카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128명, 부상 260명이었다.


12월 31일 저녁이 되자 루손의 대부분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으나 맥아더의 부대는 건재했다. 맥아더 장군은 1월 1일에 전쟁부에 보낸 전문에서 남부루손군 주력이 산페르난도에서 북부루손군과 연결되었다고 보고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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