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D-4선 붕괴


원래 D-4 선은 일본군에게 공격 준비를 위하여 하루 정도 지체하도록 강요할 목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수비군은 이후 D-5 선으로 옮겨가게 되어 있었으나 12월 27일 저녁에 북부루손군 사령관 웨인라이트 장군은 D-4 선에서 최대한 오래 적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웨인라이트 장군이 마음을 바꾼 이유는 뚜렷하지 않으며 맥아더 사령부의 의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D-4 선의 우익을 맡은 것은 제91사단으로 동쪽 산지부터 카바나투안을 거쳐 카르멘(아그노강 남안의 카르멘과 다른 도시임)까지 담당했다. 요충지는 5번 도로가 지나가는 교차로인 카바나투안이었다. D-4 선의 중앙을 맡은 것은 제11사단으로 카르멘에서 3번 도로 사이를 담당했고 D-4 선의 좌익을 맡은 것은 제21사단으로 3번 도로와 잠발레스산맥 사이를 방어했다.

제192전차대대 A중대(제194전차대대의 1개 소대 증편)가 중앙의 제11사단을 지원했고 제192전차대대 주력은 우익을 맡은 제91사단을 지원했다. 경전차 20대로 전력이 줄어든 제194전차대대는 맥아더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남부루손군의 퇴각로를 지키기 위하여 29일에 D-4 선을 떠나 칼럼핏 다리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아팔릿으로 이동했다.


(북부루손군의 철수상황도.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0.html#10-2 P.167)


부대들이 D-4 선에 자리를 잡은 28일에 맥아더 장군은 전쟁부에 전문을 보내어 북부루손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만들었다고 보고했다. 전문에서 맥아더 장군은 북부루손군이 상대하는 일본군이 3개 사단이라고 과대평가하면서 현재는 일본군이 재편성 중이라 잠잠하지만 곧 대규모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27일이 되자 일본군은 맥아더가 사령부를 코레히도르로 옮겼으며 최소한 1개 사단(제31사단)이 바탄반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틀 후인 29일에 제48사단과 제5비행집단은 강력한 부대를 투입하여 바탄반도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함으로써 미-필리핀군의 철수를 막아야 한다고 한다고 주장했으나 제14군사령부는 거부했다. 제14군사령부는 미-필리핀군 일부가 바탄반도에서 농성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부루손군의 전부와 북부루손군의 대부분을 포함한 미-필리핀군 주력은 여전히 마닐라 부근에서 결전을 벌일 생각이라고 믿었으므로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병력분산을 반대했다. 다만 제5비행집단은 29일 이후로 바탄반도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는데 주력을 투입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D-4 선을 향한 일본군의 주공은 동쪽 카바나투안을 목표로 한 츠치바시 중장의 보병제48사단으로 전차제4 및 제7연대, 제14군포병대, 그리고 제5비행집단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서쪽에서는 보병제9연대를 기간으로 한 가미지마 지대가 3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탈락을 점령함으로써 제48사단의 우측면을 보호할 것이었다.


D-4 선 우익의 요충지는 팜팡가강변에 자리잡은 5번 도로의 중요한 교차점인 카바나투안이었다. 팜팡가강은 도시의 북쪽 2,7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꺾은 다음 다시 남쪽으로 꺽어 도시의 서쪽을 지나 마닐라 만으로 들어갔다. 카바나투안 부근에서의 강폭은 90m 정도로 차량은 건널 수 없었으나 보병이 건너는 것은 가능했다. 도시의 북쪽과 서쪽에는 다리가 있었다.


28일 아침에 혼마 장군이 비날로난으로 사령부를 옮기는 것과 동시에 제14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전차단으로 전차제4 및 제7연대, 대만보병제2연대제1대대, 산포병제48연대제1대대가 주축이었다. 전차단은 샌퀸틴,  새너제이를 거쳐 남하하여 리살에서 팜팡가강을 건넜고 29일에 봉가본에 도착하여 D-4 선의 우익을 위협했다.


보병제48사단의 주력은 2개의 부대로 나뉘어 진격했다. 대만보병제1연대와 산포병제48연대제3대대, 그리고 공병제48연대의 1개 중대로 이루어진 우종대(右縱隊)는 29일 새벽에 로살레스를 출발하여 김바, 발록을 거쳐 탈라베라에서 카르멘으로 빠졌다가 서쪽으로부터 카바나투안으로 향했다. 대만보병제2연대, 보병제47연대, 수색제48연대, 그리고 포병과 공병으로 이루어진 좌종대(左縱隊)는 제48보병단장 아베 고이치 소장의 지휘 아래 전차단을 따라 남하하다가 새너제이에서 서쪽으로 꺾어 발록까지 간 다음 탈라베라를 거쳐 바로 남하하여 북쪽으로부터 카바나투안으로 접근했다.


카바나투안을 지키던 것은 제91사단의 주력인 제92전투단이었다. 제1대대가 도시 서쪽과 팜팡가강 사이를 지켰고, 제2대대가 시가지를, 제3대대가 시가지 북쪽과 팜팡가강 사이를 지켰다. 제192전차대대가 도시의 북동쪽에 배치되었으나 자세한 위치나 일본군 공격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도시 북쪽과 서쪽의 다리는 파괴했다.


가장 먼저 카바나투안에 도착한 일본군은 봉가본에서 남하한 전차대였다. 전차대는 30일 새벽에 도시의 북동쪽으로부터 접근하여 필리핀군 제3대대를 간단히 밀어내고 도시 북쪽의 도하점을 차지했다. 잠시 후 좌종대가 팜팡가강에 도착했다. 보병제47연대가 일본전차의 엄호 아래 강을 건너 공격하자 방어선이 무너졌고 오전7시까지 카바나투안은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제48보병단장 아베 고이치 소장은 보병제47연대에게 추격명령을 내렸다. 산포병제48연대의 2개 대대와 150mm 곡사포를 장비한 중포병제1연대의 1개 대대가 뒤따랐다.

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던 제91사단은 카바나투안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가판 북쪽에서 페나란다강을 건넌 뒤 다리를 폭파했다. 그날 아침 마닐라에서 도착한 학생군사교육단 300명을 증원받은 제91사단은 가판 북쪽부터 서쪽 팜팡가강까지 페나란다강의 남안을 따라 1.6km 길이의 방어선을 편성했다. 

30일 오후에 페나란다강에 도착한 보병제47연대가 공격을 가하자 단번에 방어선이 무너졌고 가판은 그날 밤 안으로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제91사단은 다시 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40km 떨어진 발리에그로 철수했다.

추격하는 일본군이 5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D-5 선의 우익은 형성하기도 전에 무너져 버렸다. 이제 D-5 선의 오른쪽 끝은 시불스프링스가 아닌 아라얏산이 되었다. 5번 도로가 뚫리면서 일본군이 칼룸핏을 직접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막지 못하면 남부루손군의 퇴로가 막힐 것이었다.


카르멘에서 3번 도로에 이르는 D-4 선의 중앙을 담당한 것은 제11사단이었다. 제11사단의 구역에서 요충지는 제11연대가 지키던 라파스와 사라고사였다. 제2대대가 라파스를, 제3대대가 사라고사를 방어했고 제1대대는 예비대로서 사라고사 남쪽 4,700m 지점에 주둔했다. 제192전차대대 A중대는 사라고사 부근에 주둔했다.


사라고사와 라파스 모두 탈락-카바나투안 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었는데 제11연대가 처음 배치될 때는 사라고사 동쪽 도로는 제92전투단이 지킨다는 이유로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11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러셀 볼크만 소령은 동쪽에 위협을 느끼고 사라고사 동쪽을 흐르는 달라곳강 너머로 1개 보병중대와 1개 전차소대를 파견하여 도로봉쇄점을 설치했다. 다리는 폭파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보병은 다리없이도 쉽게 강을 건너올 수 있었다. 볼크만 소령의 예상은 적중했다. 제91사단의 후퇴로 사라고사 동쪽 도로는 적에게 개방된 상태였다.


사라고사를 공격한 것은 가노지대(대만보병제2연대제3대대, 산포병제48연대의 1개 대대)였다. 가노지대는 탈락-카바나투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탈락을 동쪽으로부터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30일 새벽 1시에 탈라베라를 출발했다. 탈락을 동쪽에서 공격함으로써 북쪽에서 탈락을 공격하는 가미지마지대를 도울 수 있었고 만일 가노지대가 충분히 빨리 기동한다면 북부루손군의 병력이 철수하기 전에 퇴로를 끊을 수도 있었다.


잇따른 승리에 기고만장해진 가노지대는 제대로 정찰하지도 않은 채 자전거를 타고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도로를 의기양양하게 전진했다. 일본군이 접근하자 도로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미군전차들이 사격을 가했고 혼비백산한 일본군은 82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물러섰다. 그러나 그 직후 일본군이 포위할까봐 두려워진 전차소대장은 전차들을 다리 너머 사라고사로 후퇴시켰다. 전차가 다리를 건너 후퇴하자 겁에 질린 공병이 다리를 폭파해 버렸다. 이로써 사라고사 동쪽의 봉쇄점을 지키던 보병중대는 전차의 지원도 없이 강 너머에 남겨졌다. 날이 밝자 정신을 차린 일본군이 박격포와 75mm 산포의 지원을 받으면서 도로봉쇄점을 공격했다. 중대장은 도로봉쇄점을 포기하고 강을 건너 사라고사 방면으로 후퇴했다. 정오까지 제11연대제3대대는 강 서안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했다.


가노지대는 75mm 산포로 20분 동안 포격을 가한 후 강을 건너 공격해 왔다. 일본군의 기세에 밀린 제3대대는 460m 정도 서쪽으로 후퇴하여 전차와 함께 방어선을 편성했다.


오후 2시 15분에 일본군 대전차포 1문이 전선에 도착하여 포격을 가했다. 전차들이 반격을 가하여 파괴했으나 그 과정에서 선두전차가 파괴되었다. 그러자 전차들은 전의를 잃고 후퇴했다. 전차는 제11연대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므로 볼크만 소령은 전차의 후퇴를 막을 수 없었다.


전차가 후퇴하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이 공격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그러자 볼크만 소령은 모든 예비대를 한꺼번에 투입하여 맞받아쳤다. 뜻밖의 저항에 놀란 일본군이 진격을 멈춘 사이 제3대대는 방어선을 떠나 오후 4시에 서쪽으로 1,300m 떨어진 지점에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이때 웨인라이트 장군으로부터  D-5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동쪽의 카바나투안이 함락됨으로써 D-4 선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제11연대는 라파스 동쪽을 흐르는 탈라베라강 다리 입구에 방어선을 폈고 그 후방에서 제11사단이 라파스를 거쳐 콘셉시온으로 빠져나갔다. 이윽고 제11연대도 차례로 다리를 건너 철수했으며 오후 5시 30분에 마지막으로 제3대대가 다리를 건너 철수한 후 공병대가 다리를 폭파했다. 제3대대가 철수할 때쯤 동쪽에서 가노지대가 접근했으나 제3대대가 기관총 세례를 퍼붓자 전진을 멈추었다.


30일 아침에 550명이었던 제11연대제3대대의 병력은 D-5 선에 도착했을 때는 156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살아남은 병사 중 많은 숫자가 크고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제3대대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 가노지대의 서진을 저지함으로써 탈락이 북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공격받아 제21사단의 퇴로가 끊기는 사태를 막았다.


D-4 선의 좌익인 탈락을 지키던 것은 카핀핀 장군의 제21사단이었다. 사단의 좌익을 맡은 제21연대는 13번도로가 탈락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켰다. 우익을 맡은 제22연대는 3번도로를 지켰다. 예비대인 제23연대는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산타로사에 주둔했다. 제21연대가 주둔한 지형은 완만한 구릉이었고 제22연대가 지키던 지형은 대부분 논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였다.


탈락을 공격한 가미지마지대는 조심스럽게 남하했다. 상륙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보병제9연대장 가미지마 요시오 대좌는 빠른 진격을 위하여 부하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기 싫어했다. 가미지마지대는 29일 오후에 탈락 북쪽에 도착했으며 일본군의 도착을 알아차린 제21사단은 전투에 대비했다. 예비대로서 산타로사에 주둔하던 제23연대는 샌미구엘까지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가미지마 대좌는 2개 중대를 이끌고 탈락 시내로 강행정찰을 나섰다. 일본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탈락 시내는 비어 있었다. 오후 3시에 야포병제22연대의 2개 대대를 포함한 지대 주력이 도착하자 가미지마 대좌는 3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필리핀군 제22연대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제22연대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대부분 논이라서 엄폐물이 없고 탁 트인 전장은 방어군에 유리했다. 게다가 제22연대의 방어선에는 동쪽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와서 제22연대장에게 붙잡힌 전차 5대와 자주포 2문이 가세하여 화력이 증강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가미지마 대좌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으면서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다. 제22연대는 전차 1대를 상실했으나 다른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다.

제22연대의 방어선을 뚫는데 실패한 일본군은 이번에는 서쪽의 제21연대 방어선을 공격했다. 제21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방어선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저녁이 되자 제21사단에게 D-5 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칼 사보이 중위가 지휘하는 제21야포연대제3대대가 후퇴를 엄호했다. 제3대대가 철수허가시간을 3시간 이상 넘겨가면서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일본군은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보이 중위는 아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철수명령을 내렸다. 야포를 고스란히 끌고 트럭으로 철수한 제21야포연대제3대대가 사단에 도착했을 때 제21사단사령부는 제3대대가 전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제21사단은 31일 아침에 D-5 선에 도착하여 밤반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폈다.


탈락을 점령한 일본군 보병제9연대는 증원을 받았다. 30일 저녁에 보병제9연대제3대대가 친정인 보병제9연대로 돌아왔고 31일에는 가노지대와 야전중포병제8연대(다카하시 가츠미 중좌)가 합류했다. 크게 증강된 일본군은 3번 도로를 따라 남하할 준비를 갖추면서 31일 하루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31일까지 일주일동안 북부루손군은 밤반과 아라얏을 잇는 D-5 선까지 약 80km 를 후퇴했다. 좌익과 중앙은 대체로 계획에 따라 후퇴했으나 우익은 위험한 상태였다. 이곳에는 일본제48사단의 주력이 전차연대 2개와 증강된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D-5 선보다 훨씬 남쪽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이들을 막지 못하면 남부루손군의 퇴로가 끊길 것이었다.


이로써 철수의 제1단계는 끝났다. 철수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통신이 두절되기도 하고 보급은 어려웠으며 몇몇 다리는 너무 일찍 파괴되었고 어떤 부대는 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에 철수했다. 그러나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가 열악한 필리핀군을 이끌고 실시한 작전이란 걸 감안하면 철수작전의 제1단계는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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