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해군과 육군항공대의 철수


진주만 기습의 결과 중부태평양항로가 막혔으므로 필리핀으로 향하는 선단은 일단 호주를 거쳐야만 했다. 전쟁 이전에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호주의 기지는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펜사콜라 호송선단이 일단 호주에 가기로 결정되면서 남서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전쟁노력은 이제 미본토와 호주 사이의 보급선을 확보하고 호주의 기지를 개발하며 호주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항로를 확립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포트 샘 휴스턴에 주둔 중이던 제3군 참모장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준장은 12월 12일에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다. 이틀 후 아이젠하워가 총장실에 들어서자 마셜은 아시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젠하워는 이 질문이 자신의 앞날을 결정할 중요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요청했다.


총장실에서 나와 생각을 정리한 아이젠하워는 몇 시간 후 다시 마셜을 찾았다. 그는 필리핀 수비대가 오래 버틸 가능성이 사실상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구원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을 무찌르려면 아시아인의 신뢰와 호의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필리핀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앞으로 미국을 믿어도 될 것인지 판단할 것이었다. 따라서 필리핀을 잃을 때 잃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을 경우 변명이 가능하지만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포기했을 경우에는 변명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필리핀을 돕기 위해서는 호주를 강력한 군사기지로 개발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이젠하워의 견해는 이미 대통령과 스팀슨 전쟁장관의 동의를 얻은 마셜 자신의 견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이젠하워는 시험을 통과했다. 이후 그는 마셜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승승장구하여 불과 3년 만에 자신의 후원자와 동시에 원수 계급장을 달게 된다.


(아이젠하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wight_D._Eisenhower)


사실 마셜 장군은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필리핀 구원 계획을 입안할 적임자로 아이젠하워를 점찍고 있었다. 그는 필리핀에서 3년간 맥아더 장군의 참모로 일했기 때문에 극동 정세에 정통했고 맥아더 장군의 계획과 요구사항도 알고 있었으며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신뢰도 얻고 있었다. 

마셜 장군은 아이젠하워를 전쟁계획국(War Plans Division)내의 태평양과(Pacific Section) 과장으로 임명했다가 나중에 전쟁계획국장으로 승진시켰다. 아이젠하워는 전쟁계획국에서 근무하면서 필리핀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아이젠하워는 12월 17일에 호주에서 활동하게 될 미군사령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호주주둔 미육군(U.S. Army Forces in Australia)으로 이름붙여진 이 부대의  사령관으로 충칭에서 열린 연합군 회의에 참석 중이던 조지 브렛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브렛 소장이 호주에 부임할 때까지 필리핀에서 추격사령부를 지휘하던 헨리 클라겟 준장이 호주로 급파되어 임시로 지휘를 맡았다. 브렛 소장의 참모장으로는 맥아더 사령부의 군수참모였던  스티븐 체임벌린 대령이 임명되었다.  


호주주둔 미육군은 필리핀을 구원하기 위한 부대였으며 브렛 소장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실제로 마셜 장군은 클라겟 준장에게 브리즈번에 도착한 펜사콜라 호송선단의 비행기와 무기, 탄약 그리고 병력이 하루빨리 필리핀에 도착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시아함대사령관 하트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제독의 명령에 따라 호주해군위원회에 브리즈번에서 필리핀으로 향하는 길목인 토레스 해협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각별히 신경써 달라고 요청했다. 


호주주둔 미육군 사령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실려온 비행기, 증원군, 그리고 보급품은 필리핀에 도착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양륙되었을 때 시동모터, 사격조준기, 방루연료탱크같은 필수적인 부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야포여단과 해군보급품은 수송선 중 가장 빠른 홀브룩과 블룸폰테인에 실려 12월 28일에 브리즈번을 출항했으나 이미 일본군이 보르네오에 진출하여 항로를 막아버린 상태였다. 12월 31일에 호주에 도착한 브렛 장군은 임무를 중단시켰다. 수송선에 실려있던 포병 주력은 다윈에, 일부는 자바섬의 수라바야에 상륙했다.


맥아더 장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2월 14일에 항공모함을 이용하여 호주를 거치지 않고 비행기를 바로 필리핀에 증원해 달라고 요청했고 일본군 주력이 링가옌 만에 상륙한 22일에는 해군이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호주와 필리핀을 잇는 항로를 보호해 달라고 요구했다.

반응은 냉담했다. 스타크 제독은 현재와 같은 전략적 상황에서 항공모함을 수송임무에 쓴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못을 박았다.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에게 비행기의 증원은 호주를 출발하여 토레스 해협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통과하는 수송함으로만 가능하다고 통보할 수 밖에 없었다.


해군은 필리핀에 추가로 전력을 투입하기는 커녕 발을 빼고 있었다. 아시아함대사령관 하트 제독은 록웰 제독에게 필리핀 주둔 해군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고  26일 새벽 2시에 잠수함 샤크를 타고 마닐라를 떠났다. 다음날에는 남아있던 구축함 2척도 남쪽으로 떠났다.

잠수함들은 크리스마스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잠수함이 12월 31일에 마닐라 만을 떠남으로써 필리핀 근해에서의 작전을 종결했다. 미해군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아시아함대의 잠수함부대는 12월 8일부터 25일에 걸친 8번의 일본군 상륙에 대해 단 1번도 상륙을 지연시키거나 심각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B-17 과 마찬가지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기록이었다.

잠수함마저 떠나자 이제 필리핀에 남은 함정은 포정 3척, 소해정 3척, 어뢰정 6척, 그리고 예인선과 잡용정 몇 척이 전부였다. 록웰 제독은 지휘권을 넘겨받으면서 마닐라의 중유와 휘발유를 불태우고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코레히도르와 바탄 남단의 마리벨레스로 옮긴 후 카비테 기지와 생글리 곶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최후의 순간에는 해군병력들도 지상전에 투입될 것이었다. 하트 제독은 떠나면서 맥아더 장군에게 필요하면 해병대는 물론 해군병력 모두를 동원할 권한을 넘겨주었다.


B-17이 호주로 철수하고 남아있던 전투기들도 유명무실해지면서 극동항공대사령관 브레러튼 장군도 할일이 없어졌다. 맥아더 장군은 12월 24일에 브레러튼 장군을 불러 호주로 가라고 말했다. 브레러튼 장군이 남겠다고 하자 맥아더 장군은 호주로 가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호주에 가서 필리핀 수비대의 생명선인 호주와 필리핀 사이의 항로를 확보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했다. 브레러튼 장군은 명령에 따라 24일 오후 4시에 포트 맥킨리에 있던 자신의 사령부를 폐쇄하고 참모들과 함께 카탈리나 비행정을 타고 마닐라를 떠났다.


브레러튼 장군이 떠나면서 남아있던 소수의 전투기는 추격사령부 참모장이었던 해럴드 조지 대령이 지휘했다. 마지막 임무를 위하여 바탄에 전투기 비행장이 만들어졌다. 제19폭격비행전대의 지상요원 650명은 12월 말까지 호주로 떠났으나 제24 및 제27비행전대의 지상요원들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들은 바탄에 남아 일부는 항공기 운용 및 정비에 투입되었으며 대부분은 보병이 되었다.


12월 24일이 되자 미군이 필리핀에 대한 증원에 실패했음이 명백해졌다. 필리핀에 전투기를 증원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설사 전투기가 도착한다고 해도 바탄을 제외하고는 작전할 기지가 없었다.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전투기 증원이 불가능해졌음을 솔직하게 통보했다. 펜사콜라 호송선단은 호주에 도착했으나 필리핀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단 1대의 비행기, 단 1발의 총탄, 단 1명의 증원군도 받지 못했다.


일본군은 1941년 12월 8일에서 25일에 이르는 3주일 동안 필리핀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1번의 주요 상륙작전과 7번의 보조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시켰다. 루손 섬에는 대군이 상륙하여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마닐라로 쇄도했으며 남쪽에 상륙한 일본군은 호주와 필리핀 사이의 보급선을 끊었다. 일본군은 또한 필리핀 상공의 제공권과 근해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아시아함대와 극동항공대를 마닐라에서 2,400km 떨어진 호주로 쫓아내었다.

이제 맥아더 장군은 고립된 섬에서 제공권을 장악당한 채 훈련이 부실하고 장비가 빈약한 필리핀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야만 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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