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주전투진지 포기
코레히도르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바탄에 설치한 극동미육군전진사령부를 통하여 전투 경과를 매일 보고받고 있었다. 전진사령부로부터의 보고가 점점 비관적으로 바뀌자 1942년 1월 22일에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바탄반도로 파견되었다. 리메이 부근에 있던 제2필리핀군단사령부에서 파커 장군과 회담하고 이어서 제1필리핀군단사령부를 찾아 웨인라이트 장군과 회담한 서덜랜드는 주전투진지를 포기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맥아더는 서덜랜드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주전투진지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판단은 적절한 것이었다. 제51사단의 패주로 인하여 제2필리핀군단 방어선의 서쪽 절반이 무너졌고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반격은 실패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 사이에는 커다란 돌출부가 생겼는데 안에서는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제2필리핀군단을 포위할 위험이 있었다. 제1필리핀군단의 보급로인 서부도로에는 일본군이 봉쇄점을 설치하여 전선으로의 보급품 수송이 막힌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주전투진지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했으며 수만명이 철수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늦어도 22일 저녁에는 철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철수는 23일 밤부터 시작하여 26일 아침에 마지막 부대가 필러-바각도로를 따라 설정한 후방전투진지(Rear Battle Position)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후방전투진지.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5.html P.246)
제2필리핀군단에서 가장 먼저 철수한 부대는 중포와 지원부대로서 23일 밤에 성공적으로 철수하여 25일 아침에 후방전투진지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24일 오전 10시부터 야포와 항공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총공격을 실시했으나 제2필리핀군단은 저녁까지 전선을 사수한 후 저녁 7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필리핀사단장(US) 맥슨 로우 준장이 지휘하는 후위부대가 서쪽의 구이톨에서 동쪽의 발랑가에 이르는 방어선을 편성하여 후퇴를 엄호했다. 후위부대는 서쪽으로부터 제51사단의 잔존병, 제33보병연대(PA), 제31보병연대(PA)의 1개 대대, 제57보병연대(PS)의 1개 대대, 그리고 제31보병연대(US)의 1개 대대였다. 후위부대는 전차단장 위버 장군이 지휘하는 전차 및 75mm 자주포의 지원을 받았다.
24일 밤의 철수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루종일 일본군의 맹공에 시달린 병사들은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한꺼번에 진지에서 뛰쳐나와 무질서하게 동부도로와 후방도로(Back Road)를 따라 남쪽으로 도망쳤다. (후방도로는 공병대가 바탄반도 내륙에 동부도로와 나란히 남북으로 건설한 도로로 차량통행이 가능했다.) 차량도 길을 메운 보병과 뒤섞여 동부도로와 후방도로를 걷는 속도로 남하할 수 밖에 없었다. 보병이 도로를 비워두고 양옆으로 걸어서 철수하면 차량이 왕복하면서 훨씬 빨리 효율적으로 철수할 수 있으련만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헌병도 없었고 지휘관들도 자신의 부대를 통제할 수 없었다. 병력이 뒤섞여 부대구분이 무의미했다. 만일 24일 밤에 일본군이 도로교차점을 포격했다면 무시무시한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라 중장은 미-필리핀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휘하 부대를 우추격대(보병제9연대), 중추격대(보병제141연대), 좌추격대(보병제142연대)로 개편하여 추격을 실시했다. 주력인 중추격대가 24일 오후 7시 30분에 미-필리핀군이 철수한 진지를 돌파하면서 일본군의 추격이 본격화되는 듯했으나 곧 로우 준장의 후위부대에 막혀 자정까지 진격을 저지당했다.
주력이 철수하는 동안 추격하려는 일본군을 막던 로우 준장의 후위부대도 자정을 넘어 25일 새벽이 되자 주력을 따라 철수하기 시작했다. 발랑가를 지키던 제31보병연대가 후위부대 중 마지막으로 25일 새벽 3시에 후방도로를 따라 철수했다. 전차들과 75mm 자주포가 남하하는 보병의 뒤를 지키면서 철수했다.
25일 날이 밝자 일본군의 항공기가 전력을 다하여 후퇴 중인 미-필리핀군을 공격했다. 일본기들은 도로를 메우며 철수하는 미-필리핀군을 발견하면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기총소사를 가했다. 대공무기가 없는 미-필리핀군은 일본기가 나타날 때마다 도로 양옆으로 달아났으며 일본기가 사라지면 희생당한 불운한 전우의 시체를 남겨둔 채 남쪽으로 걸어갔다.
26일 아침이 되자 미-필리핀군의 주력이 후방전투진지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26일 오전 9시 30분에 일본군 중추격대(보병제141연대)가 가장 뒷쪽에서 후퇴를 엄호하던 전차단을 따라잡았다. 그러자 전차단은 기습적으로 반격했다. 일본군이 접근하자 전차단장 위버 장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후방도로에 세웠다. 구동계가 망가져 기동이 불편하던 전차 2대가 가장 북쪽에 서고 도로를 따라서 전차가 일렬로 늘어섰으며 75mm 자주포들이 가장 남쪽에 배치되었다. 준비를 갖춘 전차단은 일본군 선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맹렬한 일제사격을 가했다. 기세등등하게 추격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화력을 뒤집어 쓴 일본군은 움찔하여 물러섰다. 그러자 위버 장군은 기동이 곤란한 전차 2대의 승무원을 빼낸 후 재빨리 철수했다. 일본정찰기가 철수하는 전차단을 발견하고 보고했으나 적을 얕보고 추격하다가 뜨거운 맛을 본 일본군은 위버 장군이 일부러 남겨둔 2대의 전차를 보고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중추격대를 지휘하던 보병제141연대장 이마이 대좌는 박격포와 야포의 화력지원이 가능해진 후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37mm 속사포가 도착하여 전차 2대에 여러 발을 명중시킨 이후에야 정찰대를 보냈다. 전차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살펴본 정찰대는 빈 전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마이 대좌가 속은 것을 알았을 때 전차단은 후방전투진지에 도착한 이후였다.
동쪽의 제2필리핀군단이 철수하는 동안 서부도로가 봉쇄되면서 4일 동안 보급을 받지 못한 서쪽의 제1필리핀군단도 철수하여 26일 아침까지 후방전투진지에 배치를 마쳤다.
이로써 일본군은 미-필리핀군의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했다.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1942년 1월 9일 현재 6,651명의 병력을 가지고 전투에 돌입한 제65여단은 1월 24일까지 전사 608명, 부상 863명, 합계 1,471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휘하의 3개 연대 소속이었다. 1월 9일 현재 각 1,919명으로 이루어진 3개 연대 중 서해안에 파견된 보병제122연대는 24일까지 전사 35명, 부상73명, 합계 108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제2필리핀군단을 상대한 2개 연대 중 보병제141연대는 전사 335명, 부상 364명으로 합계 699명의 사상자를, 제142연대는 전사 226명, 부상 387명, 합계 613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56명이 참가한 여단사령부에서는 전사 1명, 부상11명, 293명이 참가한 여단공병대에서 전사 5명, 부상9명, 142명이 참가한 여단통신대에서는 부상 7명, 303명이 참가한 야전병원에서는 전사 6명, 부상 12명의 피해를 입었다. 보병제9연대를 비롯한 배속부대는 전사 93명, 부상 288명, 합계 381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따라서 배속부대를 포함하면 제65여단의 사상자는 전사 701명, 부상 1,151명으로 합계 1,852명이다. 같은 기간 미-필리핀군의 사상자 숫자는 알 수 없다.
후방전투진지는 미-필리핀군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1월 23일에 마셜 장군에게 보낸 전문에서 후방전투진지가 최후의 방어선이며 이곳에서 전멸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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