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지원사령부지역(Service Command Area)


맥아더 장군이 주전투진지의 포기를 결정한 1942년 1월 22일에 서해안의 일본군은 바탄반도의 남쪽에 대담한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일본군은 2개 대대를 동원하여 3번에 걸쳐 3곳에 상륙했는데 일본군의 상륙지역은 지원사령부가 방어하고 있었다.


미-필리핀군이 바탄반도로 들어온 1942년 1월 7일에 설정된 지원사령부지역은 필리핀군관구 부사령관인 앨런 맥브라이드 준장이 지휘했다. 지원사령부 담당 구역의 북쪽 경계는 마말라강-마리벨스산-페이사완강을 잇는 선이었다. 지원사령부 지역은 패니귀안강을 경계로 동부지구와 서부지구로 나뉘었다. (패니귀안강은 마리벨스산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마리벨스 시가지 동쪽에서 마리벨스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쪽 끝에 있는 마리벨스 시가지는 해군 담당으로 맥브라이드 준장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지원사령부가 담당한 면적은 260㎢가 넘었으며 동해안의 마말라강 하구로부터 서해안의 페이사완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선의 길이는 60km 가 넘었다. 내륙은 기복이 심하고 험준했으며 많은 강이 깊은 계곡을 따라 빠른 속력으로 흘렀다. 마닐라만에 면한 동해안은 단조로운 편이었으나 일본군이 상륙한 서해안은 수많은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들쭉날쭉했다. 서부지구는 대부분 정글로 덮여 있었고 해안에서 조금 들어오면 포장되지 않은 단선도로인 서부도로가 마리벨스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동부지구 사령관은 제2사단장(PA) 길레르모 프란치스코 소장이었다. 그가 보유한 병력은 제2 및 제4경찰연대와 그외 잡다한 부대였으며 75mm 자주포 1개 포대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이 상륙한 서부지구 사령관은 제71사단장(PA) 클라이드 셀렉 준장으로 서해안의 카이보보곶에서 마리벨스까지 16km 길이의 해안선을 맡았다. 그가 보유한 병력은 제71사단 잔존병(사단사령부, 지원부대, 2.95인치 산포 1개 대대와 75mm 야포 2문), 제1경찰연대, 그리고 5개 추격비행대대의 지상요원이었다. 그리고 임시로 프랜시스 브리젯 해군중령이 지휘하는 대대 규모의 마리벨스 수비대를 배속받았다.


셀렉 준장이 지휘하는 병력은 소속이 제각각이었고 제복도 달랐다. 많은 병력이 보병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일부 병력은 한번도 소총을 쏘아보지 못했다. 이런 잡동사니 병력을 지휘하는 일은 평시에도 어려웠다.


비행기를 잃은 육군항공대 병사들은 바탄반도에 들어와서 2주간 보병 훈련을 받았으나 시간이 모자랐다. 무장이 통일되지 않아 화기숙달훈련에 어려움을 더했다. 30구경 기관총이 제1차 세계대전형 멀린 기관총, 루이스 기관총, 그리고 브라우닝 자동소총의 3가지였으며 추가로 50구경 기관총의 사용법도 익혀야 했다. 220명으로 이루어진 중대에 총검이 3자루 밖에 없었으나 중대장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중대에서 총검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3명 밖에 없었다.

필리핀 경찰대는 주로 치안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보병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다.

마리벨스를 지키던 해군대대는 남쪽으로 철수한 제10초계비행대대의 잔여인원, 폭격을 받아 손상을 입은 채 마리벨스에 정박 중이던 잠수모함 카노푸스의 승조원, 그리고 포병 출신의 해병 4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 중 해병만이 보병훈련을 받았다.


(잠수모함 AS-9 카노푸스. https://en.wikipedia.org/wiki/USS_Canopus_(AS-9)


셀렉 준장은 상륙한 일본군이 내륙으로 진출하는 오솔길을 차단하는 형태로 진지를 만들었다. 진지 전방에는 전초를 세웠으며 진지에는 철조망을 두르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통신망을 연결했다. 해군 소속의 6인치 포 4문이 있었으나 담당 구역의 북쪽 끝과 남쪽에 1문씩 2문만 배치할 수 있었다. 퀴나완곶에 설치하려던 3번째 포는 포좌의 시멘트가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본군이 상륙했으며 4번째 포는 포좌의 위치조차 정하지 못했다. 셀렉 준장은 야간상륙을 막기 위하여 탐조등을 요청했으나 지급받지 못했다.


1942년 1월 22일이 되자 불완전하나마 셀렉 준장이 담당한 바탄반도 서해안 16km의 방어태세가 갖추어졌다. 가장 북쪽은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제17추격비행대대가 맡았다. 그 아래에서 아냐산강까지는 제1경찰연대대제1대대가 맡았다. 퀴나완곶을 포함한 아냐산강 이남은 236명의 병력을 가진 제34추격비행대대가 맡았다. 그 남쪽으로는 제1경찰연대의 제2대대, 제3추격비행대대, 그리고 해군대대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예비대는 제1경찰연대제3대대, 제20 및 제21추격비행대대였다. 경험부족에다가 무장이 빈약한 병력들이기는 했으나 셀렉 준장은 이들을 믿고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는 수 밖에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