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롱고스카와얀곶 소탕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해군대대장 브리젯 중령은 롱고스카와얀 및 라피아이곶에 상륙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해군대대 병력을 증파함과 동시에 코레히도르에 요청하여 제4해병연대의 81mm 박격포 2문과 기관총소대 1개를 빌려왔다. 25일 아침에 푸콧산의 북쪽 능선에 자리잡은 81mm 박격포가  라피아이곶을 포격하자 일본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롱고스카와얀곶으로 물러나 그곳의 동료와 합류했다.


박격포 및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롱고스카와얀곶의 일본군 방어선을 해군대대의 전력으로 뚫기는 무리였다. 해군대대장 브리젯 중령은 25일 오전 10시에 코레히도르의 기어리 포대에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기어리 포대는 12인치(305mm) 박격포 1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극동미육군포병사령관 에드워드 킹 소장이 요청을 받아들여 기어리 포대장 폴 벙커 대령에게 포격명령을 내렸다. 26일 0시를 기하여 코레히도르의 12인치 박격포 12문이 11,000m 떨어진 롱고스카와얀곶의 일본군 진지에 순발신관을 장착한 304kg 짜리 고폭탄을 사용하여 16회의 일제사격을 가했다.


(12인치 박격포. https://en.wikipedia.org/wiki/12-inch_coast_defense_mortar)


12인치 박격포의 위력은 굉장했다. 4번째 일제사격 후에 일본군 진지 부근에 큰 화재가 일어나 미군관측병이 표적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두운 밤에 어디서 떨어지는지도 모르는 거포의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크게 놀랐으며 일부는 공포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일본군은 공습인지 포격인지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받은 일본군은 포격이 끝나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따라서 26일 아침에 실시한 해군대대의 공격은 실패했다. 26일 저녁이 되자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88야포연대 소속의 75mm 야포 1개 포대를 보내주었다.


27일 오전 7시부터 가용한 모든 화력(제88야포연대의 75mm 야포 1개 포대, 제4해병연대의 81mm 박격포 2문, 제71야포연대의 2.95인치 산포 1문, 그리고 기어리 포대)이 롱고스카와얀곶의 일본군 진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1시간에 걸친 준비포격이 끝나고 해군대대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다시 일본군에게 막혔다. 오히려 오후가 되자 일본군 일부가 해군대대 전열의 빈틈을 통해 후방으로 진출하여 포위하려는 것을 81mm 박격포와 2.95인치 산포가 겨우 저지하기도 했다. 정예보병의 대규모 투입없이 일본군 소탕은 불가능했다.

 

(롱고스카와얀 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301)


27일 저녁에 할 그랜베리 중령이 지휘하는 제57보병연대제2대대(PS) 병력 500명이 롱고스카와얀 전선에 도착하여 브리젯 중령의 지휘 아래 들어왔다. 

28일 아침에 해군대대와 교대하여 공격을 실시한 스카우트 병사들은 일본군을 거세게 밀어붙이면서 저녁까지 롱고스카와얀곶의 끝에서 1/3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29일에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은 오전 7시부터 기어리 포대를 동원하여 30분간 준비포격을 실시했다. 해군에서는 소해함 퀘일을 파견했다. 퀘일은 공습의 위험을 무릅쓰고 롱고스카와얀곶에 접근하여 3인치 주포 2문으로 오전 8시 30분까지 화력지원을 해주었다.


(AM-15 퀘일. https://en.wikipedia.org/wiki/USS_Quail_(AM-15)


제57보병연대제2대대는 기어리 포대의 준비포격이 끝난 오전 7시 30분에 공격을 시작했다. 전방에서 E 및 G중대가 공격을 담당했고 F중대는 예비대였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세어 정오 경에 일시 공격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오후에 그랜베리 중령이 예비대인 F 중대를 투입하자 승부는 결정났다. 29일 저녁까지 스카우트 병사들은 롱고스카와얀곶의 끝에 도달했다. 잔적소탕은 해군대대의 몫이었다.


30일 아침에 스카우트 제2대대가 서부도로에 도착하여 본대인 제57보병연대에 복귀했을 때 해군대대장 브리젯 중령이 감사의 의미로 보낸 연어통조림과 쌀이 도착했다. 식량배급이 삭감된 상황에서 귀한 선물이었다.


롱고스카와얀곶에 상륙했던 일본군 300명은 기어리 포대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은 포로 1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미-필리핀군의 피해는 전사 22명, 부상 66명이었는데 전투의 주역인 제57보병연대제2대대(PS)가 11명의 전사자와 4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롱고스카와얀 전투는 제대로 훈련된 정예보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해군대대의 업적이라면 푸콧산 정상을 지켜낸 것이었다. 만일 주변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푸콧산 정상을 초기에 점령당했다면 소탕은 훨씬 어렵고 희생 또한 컸을 것이다.


사실 일본군은 롱고스카와얀곶 전투에 대해 몰랐다. 기무라 소장은 물론이고 퀴나완곶에 상륙한 츠네이로 중좌조차 자신의 부하 중 일부가 따로 롱고스카와얀곶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실제로 일본군에게 잡힌 포로가 롱고스카와얀곶 전투에 대해 진술하자 심문했던 일본장교는 믿지 않았다. 일본군은 바탄반도를 점령한 후 롱고스카와얀곶에 매장된 일본군 묘지를 보고나서야 롱고스카와얀곶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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