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츠네이로대대의 상륙


미-필리핀군 방어선 뒤의 바탄반도 서해안에 병력을 상륙시킨다는 발상은 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에게서 나왔다. 혼마 중장은 1942년 1월 14일에 기무라 소장을 불러 바탄반도의 전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혼마 장군은 기무라 소장에게 적의 방어선 뒤에 상륙하는 작전의 효용에 대해 강조하면서 그러한 상륙작전에 쓸 수 있도록 발동정을 링가옌만에서 올롱가포로 보내도록 조치했다고 말했다.


발동정이 올롱가포에 오려면 먼저 수빅만의 기뢰를 청소해야 했다. 일본군은 18일부터 20일까지 수빅만 소해작업을 실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뢰에 접촉하여 소해정 1척이 침몰하고 1척이 좌초했다. 20일 오후에 1주일치 연료를 보유한 제52정박장사령부 소속의 대발동정 5척과 소발동정 5척이 보급품을 실은 5천톤급 수송선 다미시마마루와 함께 올롱가포에 도착했다.


기무라 소장은 1개 대대를 모론에서 승선시켜 바각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카이보보곶에 상륙시키기로 했다. 상륙한 일본군은 바각으로 진격함으로써 남하하는 일본군 주력에 호응하여 바각 이북의 미-필리핀군을 포위격멸할 계획이었다.


상륙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낯선 지형에서 적당한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월 22일 밤에 모론에서 보병제20연대제2대대를 태운 바지선의 승조원들이 가진 지도라고는 1:200,000 지도가 유일했다.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토박이가 아니면 바탄반도 서해안처럼 수많은 만과 곶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해안에서 특정한 곶을 찾는다는 것은 낮에도 힘든 일이었으며 밤에는 불가능했다. 하물며 지도까지 부실하다면 말할  나위가 없었다.


호위도 문제였다. 애당초 기무라 소장은 실행일을 21일로 잡았으나 호위문제로 하루를 연기했다. 당시 올롱가포 부근에서 발동정을 호위할만한 함정은 포함 1척 뿐이었는데 이 포함은 양륙을 마친 다미시마마루를 호위하면서 링가옌만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마닐라의 해군사령부에서 22일에도 호위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들어오자 기무라 소장은 호위없이 22일 밤에 상륙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보병제20연대제2대대장 츠네이로 나리요시 중좌가 지휘하는 츠네이로대대는 22일 오후 4시에 모론 북서쪽 해안에서 발동정에 올랐다. 900명의 병력을 가진 츠네이로대대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보병제20연대제2대대(2개소대감편)

보병제33연대속사포중대

보병제20연대무선 1개 분대

공병제16연대제2중대의 1개 소대(2개 분대 감편) 

제16사단제1야전병원의 전투구호반 1개

육상근무제124중대 일부

독립공병제10연대의 1개 소대


호위없는 항해의 위험성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발동정이 바다에 나섰을 때 존 벌클리 중위가 지휘하는 미해군의 PT-34정이 나타나 낙오한 발동정 1척을 발견하고 격침했다. 일본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PT-34정은 주력의 항해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수색했다. 1시간 후 PT-34정은 다시 낙오한 1척의 발동정을 발견했다.  PT-34정이 사격을 가한 후 발동정이 가라앉기 전에 벌클리 중위가 승선하여 2명의 포로를 잡고 일본군의 서류가 들어있는 상자를 노획했다. 그리하여 미군은 일본군의 카이보보곶 상륙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츠네이로대대를 태운 선단은 항로를 잃은 것도 모자라 2개로 갈라졌다. 병력의 1/3가량이 탄 작은 선단은 목표인 카이보보곶에서 남동쪽으로 16km 떨어진 롱고스카와얀곶에 상륙했다. 주력이 탄 선단은 목표인 카이보보곶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퀴나완곶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상륙은 완전한 기습으로 미-필리핀군을 놀라게 만들었으나 엉뚱한 곳에 상륙한 일본군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롱고스카와얀곶은 바탄의 최대항구인 마리벨스에서 서쪽으로 1,8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쪽의 라피아이곶과 함께 작은 만을 이루고 있다. 끝의 폭은 약 400m, 기저부의 폭은 2배 정도이며, 길이는 600m 정도이다. 좁은 해안을 벗어나면 높이 약 30m 의 해안절벽이 있고 전반적인 지형은 수많은 계곡과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정글이라 가시거리는 수미터에 불과하며 통로라고는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전부이다.


(롱고스카와얀 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301)


롱고스카와얀곶의 북쪽인 라피아이곶 내륙에는 해발 188m 의 푸콧산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마리벨스를 포함하여 바탄반도의 남서해안을 감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리벨스를 지키던 해군대대장 브리젯 해군중령은 푸콧산 꼭대기에 24시간 내내 감시하는 초소를 만들어 두었다.


23일 오전 8시 40분에 해군초병이 남쪽으로부터 푸콧산에 접근하는 300여명의 적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해군대대의 총 병력은 600명 정도였으나 당장 가용한 예비대는 해병과 수병으로 편성된 1개 소대에 지나지 않았다. 브리젯 중령은 예비소대를 급파하고 서부지구 사령관 셀렉 준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셀렉 준장은 제301화학중대(US)와 2.95인치 산포 1문을 보내 주었다. 브리젯 중령은 이후 해군대대에서 지속적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약 200명을 투입했다.


해군소대가 푸콧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약간 먼저 도착한 일본군 선두가 참호를 파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해병대원이 미숙한 수병을 이끌면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정상에서 몰아내고 기관총을 설치했다. 23일 저녁이 되자 제301화학중대가 도착하여 북쪽의 제3추격대대와 연결을 확보했다. 2.95인치 산포는 푸콧산의 북쪽 능선에 방열했다.


24일 아침이 되자 미군은 일본군이 푸콧산 남쪽 사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밤새 해군대대로부터 병력이 증원되었으므로 해병과 수병은 다수의 정찰대를 구성하여 반복적인 교전으로 일본군을 밀어내었다. 당시 정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군이 미군수병의 정체에 대해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자신을 압박하는 미군이 두가지 부류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첫번째 부류는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병력이었는데 소수여서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을 당혹하게 만든 두번째 부류는 적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처음보는 노란색 군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병사들이었다. 당시 미군 수병들은 흰색 군복을 물들여 위장복을 만들려고 했는데 염료와 시간이 부족하여 마치 겨자소스처럼 옅고 어두운 노란색이 되었다. 


노란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공터에만 나오면 주저앉아 큰소리로 떠들면서 담배를 피워댔다. 일본군은 마치 사격을 유도하는 듯한 행동을 보고 노란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미군이 미끼로 투입한 자살분대라고 판단했다. 자살분대를 여러개 투입할 정도로 미군이 공을 들이는 것으로 보아 곧 대규모 소탕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24일 저녁에 푸콧산을 떠나 라피아이곶과 롱고스카와얀곶으로 물러났다.


츠네이로대대의 주력 600명이 상륙한 퀴나완곶은 마리벨스와 바각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롱고스카와얀곶과 마찬가지로 20m 가까운 나무와 덤불이 무성한 정글지대였으나 전자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가 1.6km 떨어진 서부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재빨리 기동하여 서부도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퀴나완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2 P. 303)


퀴나완곶은 제34추격비행대대가 담당했다. 해안을 굽어보는 곳에 몇정의 50구경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요원들은 일본군이 상륙할 때 졸고 있었다. 그들이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일본군 상당수가 기관총좌 후방까지 진출한 후였다. 이 상태에서 발사하여 위치를 노출했다가 사방에서 공격당할 것을 두려워한 기관총 요원들은 숨을 죽이고 일본군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만을 바랬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상륙 및 그 직후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한참 진출한 이후인 23일 오전 2시 30분에야 상륙보고가 서부지구 사령관 셀렉 준장에게 도달했다. 그는 최근에 제1경찰연대장으로 임명한 알렉산더 대령에게 제3경찰대대를 이끌고 퀴나완 곶으로 가서 일본군을 도로 바다에 밀어 넣으라고 명령했다. 보다 남쪽인 롱고스카와얀곶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은 6시간이 지난 오전 8시 30분에야 들어왔다.


제3경찰대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은 전체 길이가 900m 인 퀴나완곶의 끝에서 500m 정도 내려온 지점에 참호를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23일 오전 10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알렉산더 대령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우회하려 했으나 일본군은 곶 전체를 관통하는 두터운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23일 저녁이 되자 알렉산더 대령은 일본군이 약 7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차, 야포, 그리고 미군 또는 필리핀 스카우트로 이루어진 정예보병의 증원을 요청했다.


23일 아침에 서부지구사령부에는 일본군 상륙소식을 들은 지원사령관 맥브라이드 장군과 바탄에서 맥아더를 대리하는 전진사령관 마셜 장군이 찾아왔다. 맥브라이드 장군은 마셜 장군에게 전차 및 정예보병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주전투진지에서 후퇴가 예정되어 있어 당장은 차출할 수 없었다. 대신 알렉산더 대령에게는 브렌건캐리어 2대, 제21추격비행대대의 일부, 1개 경찰중대, 제71사단본부중대가 주어졌다.


알렉산더 대령은 새로 주어진 부대를 포함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24일 아침부터 공격을 실시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오후 4시에 알렉산더 대령이 팔에 부상을 입어 후송되자 전투를 참관하던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 대령이 얼떨결에 지휘를 맡아야 했다. 


그동안 서부지구사령관 셀렉 준장이 해임되었다. 퀴나완곶에 상륙한 일본군이 소수라고 믿고 있던 마셜 장군은 소탕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공격정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여 셀렉 장군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었다. 23일 밤에 마셜 장군은 맥아더의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에게 셀렉 장군의 교체를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맥아더는 24일 오후에 서부지구사령관 셀렉 준장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제26기병연대장(PS) 클린턴 피어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서부지구사령관의 교체는 전면적인 지휘구조 개편과 맞물려 있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이 지원사령부지역으로 남하하면서 1월 25일을 기하여 서부지구사령관은 제1필리핀군단장, 동부지구사령관은 제2필리핀군단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휘하 부대를 잃은 지원사령부는 유명무실해졌다.


25일에 퀴나완곶에는 제21추격비행대대의 병력 전부가 증원되었고 26일에는 제88야포연대(PS)제2대대의 1개 포대가 퀴나완곶에, 나머지 1개 포대가 롱고스카와얀곶에 배치되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예보병의 대규모 투입없이는 소탕이 불가능했다.


26일 밤에 일본군이 퀴나완곶의 일본군을 증원하기 위하여 추가로 선단을 파견하자 제1필리핀군단장 웨인라이트 장군은 정예보병 500명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스카우트 대대를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제57보병연대제2대대는 롱고스카와얀곶으로,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퀴나완곶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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