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구원노력


진주만 기습은 유럽전쟁에 쏠려있던 미국인의 관심을 태평양 및 극동지역으로 끌어당겼다. 미국인 사이에 필리핀의 미군을 도와야한다는 공감대가 생겼고 맥아더 장군의 이름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개전과 동시에 태평양함대 주력이 치명타를 입자 전쟁부와 해군부는 필리핀 함락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필리핀에 대한 구원노력을 중단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미국민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전쟁부, 그리고 참모총장까지 모두 필리핀 국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를 느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순간 중순양함 펜사콜라와 초계함 나이애가라가 호위하는 수송선 7척(홀브룩, 리퍼블릭, 메그스, 블룸폰테인, 어드미럴할스테드, 파머, 쇼몽)이 남태평양의 피닉스 제도 부근을 항진하고 있었다. 펜사콜라 호송선단으로 불린 이 선단은 75mm 야포 20문을 보유한 포병여단, 제7중폭격비행전대의 지상요원, P-40 전투기 18대, A-24 경폭격기 52대, 50구경 철갑탄 및 예광탄 500,000발, 37mm 대공포탄 9,600발, 500파운드(227kg)폭탄 2,000발, 300파운드(136kg) 폭탄 3,000발, 그리고 약간의 차량과 장비를 싣고 있었다. 수송 중인 병력은 4,600명이었다. 진주만 기습 직후 호송선단은 일단 피지 제도의 수바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CA-24 펜사콜라.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USS_Pensacola_(CA-24)


펜사콜라 호송선단이 수바로 향하는 동안 선단의 최종 행선지를 두고 미군수뇌부는 갈팡질팡했다. 처음에 전쟁부와 해군부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하와이로 보내기로 합의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극동으로 보내길 원했다. 결국 펜사콜라 호송선단은 12월 12일에 호주의 브리즈번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22일에 도착했다.


맥아더 장군은 12월 13일에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에게 수상함을 파견하여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브리즈번에서 마닐라까지 호송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아시아함대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위하여 함정을 할애할 여력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브레러튼 소장의 건의에 따라 다음날인 14일에 다시 증원을 요청했다. 그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실린 P-40 전투기 18대와 A-24 경폭격기 52대에 추가하여 전투기 200대와 급강하폭격기 50대를 항공모함을 이용하여 필리핀에 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실린 50구경 기관총탄을 마닐라로 수송하기 위하여 팬아메리칸사의 비행기를 호주와 마닐라 사이에 왕복시킬 것을 권고했다.


미국과 영국은 1941년 1월에서 3월에 걸친 회의를 통하여 독일우선 원칙에 입각한 레인보우 계획에 합의했다. 여기에 따르면 태평양 지역에서는 수세를 취하되 제한된 공세는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치명상을 입으면서 미해군은 레인보우 계획에 명시된 제한된 공세도 취할 수 없었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2월 8일에 열린 합동위원회에서 해군은 진주만 기습으로 인하여 중부태평양 공세를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틀 후인 12월 10일에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에게 마닐라에서 철수할 권한을 부여했다.


해군은 필리핀 구원에 소극적이었으며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필리핀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레이 반도를 지키는 것이었다. 스타크 제독이 생각한 방어선은 말레이반도 - 수마트라 - 자바 - 호주를 잇는 선이었다. 따라서 그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이 마닐라로 가는데 부정적이었으며 호송선단에 실린 비행기, 무기, 탄약 및 병력은 호주방어에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시아함대도 필리핀을 지키느라 희생하지 말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한 채 후퇴하여 호주방어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군과 달리 육군은 필리핀 구원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육군도 필리핀의 상황이 절망적이며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지킬 수 있는 지점에 집중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구원문제를 순전히 군사적인 면에서만 판단할 수는 없었다. 스팀슨 전쟁장관은 만약 미국이 필리핀을 외면한다면 말레이반도에서 싸우고 있는 영국군과 호주군, 곧 일본군과 싸워야 할 네덜란드군, 그리고 4년 이상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소련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참전과 동시에 동맹국에게 불신을 받는다면 연합군 내에서 미국의 위신과 발언권이 크게 떨어질 수 있었는데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스팀슨 전쟁장관과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필리핀 구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이유였으며 루스벨트 대통령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와 달리 필리핀 방어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일본군을 제압하지 못해도 일본군의 전선이 이미 지나치게 늘어져 있으니 미해군이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방어가 약해진 일본본토를 공습함으로써 필리핀의 일본군을 본토로 불러들이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미해군은 1942년 4월 18일에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도쿄를 공습했지만 필리핀과는 상관없는 작전이었다.

필리핀 방어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맥아더 장군은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호위해달라는 자신의 요청을 하트 제독이 거부하자 분노하여 워싱턴에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를 읽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을 불러 따졌다. 

대통령이 나서자 해군도 성의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송함 포크와 쿨리지가 호주를 향해 떠났으며 1월 중에 2척이 뒤따랐다. 이로써 호주에 230대의 전투기가 파견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해군장관의 압력을 받은 스타크 제독은 필리핀 방어를 위하여 육군에게 가급적 협조하라고 하트 제독에게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하트 제독은 가망없는 전선에서 최대한 많은 함정을 살려서 후퇴시킨다는 군사적 타당성과 희생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어에 협조하라는 상부의 압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전쟁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지원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느꼈다. 그가 보기로 필리핀은 이번 전쟁의 핵심이며 따라서 미국이 생산하는 모든 항공기를 포함한 미국의 자원을 대부분 필리핀에 투입해야 마땅했다. 필리핀의 중요성을 바라보는 맥아더 장군과 워싱턴의 시각에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었다.


절망적인 군사적 상황을 무릅쓰고 진행되었던 백악관과 전쟁부의 필리핀 구원노력은 처음부터 결실을 맺지 못할 운명이었다. 1941년 12월 24일에서 1942년 1월 14일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미국과 영국 사이의 아케이디아 회담에서 필리핀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영국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큰 피해를 입자 미국이 이전의 약속을 어기고 태평양에 집중할까봐 두려워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을 안심시켜야 했다. 회담결과 독일우선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이로써 미국의 기본전략을 바꾸어 필리핀을 살리려던 맥아더 장군의 노력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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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라몬만 상륙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동시에 마닐라를 공격하겠다는 일본제14군의 계획에 따라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이 지휘하는 제16사단은 1941년 12월 17일에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를 떠나 링가옌 만에서 남동쪽으로 360km 떨어진 라몬만을 향해 6일 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라몬만 부대는 링가옌 부대에 비하여 약했다. 전투부대는 제16사단(보병제9 및 제33연대 감편)의 보병3개 대대, 야포병 2개 대대를 중심으로 약 7,00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약간의 지원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라몬만 상륙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3 P.140)


제16사단은 동시에 3곳(마우반, 아티모난, 시아인)에 상륙할 것이었다. 일단 상륙한 부대는 후속하는 지원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내륙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제16사단의 주력은 1번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카비테를 점령하고 이어서 남쪽으로부터 마닐라로 쇄도할 것이었다.


마우반에는 츠네이로 나리요시 중좌가 지휘하는 보병제20연대제2대대와 야포병제22연대의 1개 중대가 상륙할 것이었다. 츠네이로 부대는 상륙 직후 내륙으로 진격하여 루반을 점령한 다음 남하하여 아티모난 부대를 지원할 것이었다. 만일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 츠네이로 부대는 북상하여 베이 호의 남안을 따라 마닐라로 진격할 것이었다.


아티모난에는 모리오카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16사단 주력이 상륙할 것이었다. 사단사령부, 사단통신대, 보병제20연대(제2대대 및 제1대대의 주력 감편), 수색제16연대, 야포병제22연대(제2대대의 2개 중대 감편), 공병제16연대주력, 야전고사포제47대대(1개 중대 감편), 독립야전고사포제31중대, 사단치중, 병참부대 및 선박관련부대로 이루어진 사단주력은 1번 도로를 따라 서진한 다음 베이 호의 가장자리를 따라 북상하여 마닐라를 남쪽으로부터 공격할 것이었다. 도중에 만나는 미군의 저항거점은 가급적 우회할 계획이었다.


시아인에는 기무라 미츠오 소좌가 지휘하는 보병제20연대제1대대(제3중대 및 기관총 1개 소대 감편)가 상륙하여 주력의 좌익을 보호할 것이었다. 이후 시아인 부대는 사단예비대가 될 것이었다.


라몬만 부대를 실은 24척의 수송선은 링가옌 부대의 첫번째 선단이 대만 북부의 지룽을 떠난지 6시간 후인 12월 17일 오후 3시에 제4호위대의 엄호를 받으며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를 출항했다. 제4호위대는 제1근거지대 사령관 쿠보 규지 소장이 지휘하는 경순양함 나가라, 제24구축대(우미카제, 야마카제, 카와카제, 스즈카제), 제16구축대 제1소대(유키카제, 도키즈카제), 부설함 아오타카, 소해정 4척, 초계정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몬만 부대를 태운 호송선단은 23일에 미국잠수함 스컬핀에게 발견되었으나 적절한 회피로 공격을 피했다. 선단은 24일 새벽 1시 30분에 라몬만에 닻을 내렸으며 1시간 후에 병력들이 해안으로 출발했다.


마닐라 남쪽을 지키던 파커 소장의 남부루손군은 원래 제41사단(PA)와 제51시단(PA)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전 이후에 새로 편성된 제1정규사단(PA)이 배속되었으나 라몬만 상륙 당시 제1보병연대만이 전선에 도착한 상태였다. 제41사단이 마닐라 남쪽을 지켰으며 라몬 만을 포함한 마닐라 남서쪽은 제51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제51사단은 라몬만 상륙 당시 먼저 레가스피에 상륙하여 북상 중이던 기무라 지대를 상대하느라고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제1정규사단의 제1연대는 라몬만 상륙 당시 마우반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라몬만을 지키던 필리핀군의 문제는 야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남부루손군은 155mm 평사포 6문을 보유한 제86야포연대의 2개 포대와 75mm 자주포 16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들을 모두 서해안의 바탕가스, 발라얀 및 나숙부만에 배치했다. 제51사단장 앨버트 존스 준장은  라몬만에 최소한 155mm 평사포 2문이 필요하다고 보고했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파견을 거부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군이 마닐라 남쪽의 서해안에 상륙할까봐 두려워했다. 실제로 마닐라 남쪽의 서해안에 상륙하면 평탄한 지형에 깔린 좋은 도로를 따라 북상하여 금방 마닐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군도 처음에는 서해안의 바탕가스 만에 상륙하려고 계획했다가 나중에 라몬만으로 바꾸었다.


결국 라몬만 상륙이 시작되었을 때 필리핀군은 화력이 부족했으며 많은 부대가 이리저리 이동중이었다. 23일 밤부터 제51사단장 존스 준장에게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23일 오후 10시에 아티모난 앞바다에서 적의 선단이 발견되었다는 보고에 이어 24일 오전 2시에는 적이 아티모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어서 오전 4시에 마우반에 적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선두로 적의 상륙소식이 잇따라 들어왔다. 보고들은 일본군 병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아티모난에 상륙한 부대는 증강된 사단 규모, 마우반에 상륙한 부대는 증강된 여단 규모라고 평가했다.


가장 북쪽의 마우반에 상륙한 츠네히로 중좌의 보병제20연대제2대대는 해안에서 필리핀군 제1연대제2대대의 십자화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에 P-40 전투기 12대와 P-36 전투기 6대도 도착하여 일본군 병력과 수송선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과감히 돌진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오전 8시 30분에 마우반 시가지를 장악했다. 제1연대제2대대는 마우반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삼팔록으로 물러나 다시 방어선을 폈다. 오후 2시 30분에 츠네이로 부대가 약 300명의 필리핀군이 지키는 삼팔록을 공격했으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시아인에 상륙한 보병제20연대제1대대는 상륙과정에서 저항을 받지 않았다. 상륙 직후 1개 중대는 마닐라 철도를 따라 타야바스 만으로 남하하고 대대 주력은 레가스피에서 북상 중인 기무라 지대와 만나기 위하여 1번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전진했다. 타야바스 만으로 향한 중대는 저녁까지 파드르부르고스에서 8km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다. 제1대대 주력은 24일 오후 4시에 시아니 동쪽 24km 지점에서 코르데로 대령의 제52연대로부터 반격을 받았다. 3일 간의 전투를 치른 후에야 보병제20연대제1대대는 레가스피에서 북상한 기무라 지대와 만날 수 있었다.


모리오카 중장이 지휘하는 제16사단 주력은 아티모난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다. 선두는 해안에서 필리핀군 제52연대 제1대대 A중대의 총격을 받아 그 자리에 못박혔다. 이어서 상륙한 수색제16연대는 적의 거점을 우회하여 최대한 빨리 진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해안의 필리핀군 방어선과 아티모난 시가지를 우회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 후속한 일본군이 오전 9시에 아티모난 시가지로 진입하여약 500명의 필리핀군이 벌인 집요한 저항을 제압하고 오전 11시에 시가지를 장악했다. 


1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던 수색제16연대는 말릭버이에 접근했다. 말릭버이를 지키던 제52연대제2대대는 급히 방어준비를 서둘렀는데 비행제8전대의 경폭격기들이 날아와 차량 몇 대를 불태우고 방어선 구축을 방해했다. 공습을 받아 사기가 떨어진 필리핀군은 수색제16연대가 강력한 일격을 가하자 단번에 무너져 달아났다. 이로써 말릭버이는 간단하게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존스 준장은 제52연대제2 및 제3대대(1개 중대 감편)를 투입하여 비나한에 급히 방어선을 폈다. 그동안 아티모난 소탕을 마친 일본군 주력이 말릭버이에 도착했다. 24일 오후에 말릭버이를  출발한 일본군이 비나한에 강력한 일격을 가하자 방어선이 다시 무너졌다. 필리핀군은 1번 도로를 따라 파그빌라오로 달아났다. 


제16사단은 24일 저녁까지 목표 지점을 모두 점령함으로써 상륙 초기의 가장 어렵고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이날 제16사단의 피해는 7,000명의 상륙병력 중 전사 84명, 부상 184명에 불과했다. 양륙상황은 만족스러웠고 대부분의 지원부대가 그날 저녁까지 상륙했다. 제14군 사령부는 제16사단의 상륙이 기대 이상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링가옌만에 상륙하는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1941년 12월 24일.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3 P.143)


마닐라 북쪽에서는 링가옌 부대가 아그노 강으로 진출할 준비를 마쳤다. 일본군은 북쪽과 동쪽 측면의 안전을 확보했다. 25일 오전 11시에는 가미지마 지대(보병제9연대의 2개 대대, 야포병제22연대의 2개 중대 기간)가 링가옌 만의 남쪽 해안에 있는 산 페이비언을 점령하여 수송선을 위협하던 미군 야포를 쫓아내었다. 24일 아침에 혼마 장군은 참모들과 함께 바우앙에 상륙하여 제14군 사령부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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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그노강 진출


일본군이 상륙하자 극동미육군사령부는 75mm 자주포 12문을 웨인라이트 소장의 북부루손군에 배속시켰다. 제192전차대대는 북부루손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북부루손군에 배속되지는 않았다.


웨인라이트 소장은 포조루비오에 있던 제26기병연대(PS)를 로사리오로 파견했다. 기병대는 22일 새벽 5시에 출발했다.

제26기병연대의 정찰장갑차소대는 본대보다 앞서 다모티스를 거쳐 북쪽으로 진출했다가 일본수색제48연대 및 전차제4연대에게 쫓겨 다모티스로 돌아왔다. 그러자 기병대 주력도 로사리오를 거쳐 다모티스로 와서 방어선을 폈다. 오후1시에 제5비행집단의 공중지원을 받는 일본군이 북쪽으로부터 다모티스를 공격했다.

당시 제26기병연대장 피어스 대령은 기병대 이외에 제12 및 제71연대의 보병중대 2개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피어스 대령은 웨인라이트 소장에게 증원을 요청했고 웨인라이트 소장은 임시전차단장인 제임스 위버 준장에게 전차 1개 중대를 파견해달라고 부탁했다.

위버 준장은 휘발유 부족을 이유로 제192전차대대 C중대의 1개 소대 5대의 전차만 파견했다. 북상하던 5대의 전차는 아구 남쪽에서 일본군 경전차와 맞닥뜨렸다. 선두에 섰던 소대장 전차는 직격탄을 얻어맞고 불탔으며 나머지 4대의 전차는 로사리오로 물러났다. 오후 4시가 되자 아린게이에 상륙했던 대만보병제1연대와 산포병제48연대가 다모티스 전투에 가세했다. 제26기병연대는 중과부적으로 다모티스를 내주고 동쪽으로 물러섰다. 오후 7시까지 일본군이 다모티스를 완전히 점령했다.


다모티스 상실이 불가피해지자 웨인라이트 소장은 22일 오후에 어다네타에 주둔 중이던 제71사단(제71연대 감편)에게 북쪽으로 40km  떨어진 다모티스 남쪽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제26기병연대는 제71사단에 배속되었다. 제71사단장 클라이드 셀렉 준장은 사단의 우익을 맡은 제26기병연대에게 로사리오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바기오에 있던 보넷 중령의 제71연대(제1대대 감편)가 남하하여 북부루손군 주력과 합류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것이었다. 


(링가옌 만 상륙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1 .P.124)


셀렉 준장은 22일 오후 4시 30분에 직접 로사리오에 와서 철수하는 제26기병연대의 주력을 로사리오 서쪽에, F 기병중대를 로사리오 북쪽에 배치했다. 잠시 후 다모티스로부터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일본군의 선두는 전차제4연대와 수색제48연대였으며 주력인 이마이 대좌의 대만보병제1연대가 뒤따랐다. 일본군은 산포병제48연대(제1 및 제2대대 감편)의 화력지원을 받고 있었다.

제192전차대대 C 중대의 경전차 4대가 최전선에서 방어선을 지켰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일본전차가 방어선에 돌입하면서 제26기병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일본전차가 후퇴하는 기병대를 따라잡아 큰 피해를 입혔다. 토머스 트랍넬 소령이 후퇴하는 병사들을 모아 로사리오 서쪽의 작은 강에 걸린 다리에서 마지막 전차를 중심으로 필사적인 방어선을 폈다. 전차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길에 휩싸였지만 트랍넬 소령이 급조한 방어선에서 가까스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데 성공함으로써 제26기병연대는 붕괴를 면할 수 있었다.


패배한 제26기병연대의 주력이 로사리오로 철수했을 때 로사리오 북쪽을 지키던 F 기병중대는 야나기 대좌가 이끄는 보병제47연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로 인하여 F 중대는 단번에 로사리오 시내까지 밀려났다. 미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이때 보병제47연대는 샌 페이비언 공략을 위하여 일부 병력을 아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야나기 대좌는 공격을 중지하고 다모티스로부터 진격 중인 대만보병제1연대와 전차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제26기병연대의 주력은 로사리오를 빠져나갔고 F 중대도 뒤따랐다.


웨인라이트 소장은 후퇴하던 제26기병연대에게 로사리오-바기오 도로의 교차점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바기오에 있던 제71연대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바기오를 지키던 제71연대는 제26기병연대가 교차로를 방어중이라는 소식은 듣지 못하고 대신 일본군이 로사리오를 점령했다고 보고하는 무전을 엿들었다. 제71연대장 보넷 중령은 남쪽으로 통하는 도로가 이미 막혔다고 착각하여 바기오에 머물렀다. 결국 다음날 새벽에 제26기병연대는 교차점에서 밀려나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제 고립된 바기오에 남은 제71연대는 일본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접근하자 동쪽으로 빠져나가 길도 없는 산맥을 넘어 카가얀 하곡으로 도망쳤다. 필리핀의 여름수도인 바기오는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일본군은 작전 당일의 목표를 모두 점령했다. 일본군에게 의미있는 저항을 보여주어 계획을 방해한 것은 제26기병연대가 유일했다.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가 열악한 필리핀군은 일본군을 보자마자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링가옌 만 남쪽에 주둔 중이던 제21야포연대장 리처드 말로니 대령은 연대본부 앞의 해안도로를 따라 도망치는 필리핀군 병사들을 잡아서 정렬시킨 다음 사단사령부로 돌려 보냈지만 도중에 모두 사라졌다.


12월 23일 아침이 되었을 때 제71사단(제71연대 감편)은 시손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72연대와 제71공병연대가 방어선을 펴고 후방에서 파울러 중령의 제71야포연대가 화력지원을 맡았다. 큰 피해를 입은 제26기병연대는 남쪽 포조루비오에서 재편성 중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극동미육군사령부 예비로 카바나투안에 주둔 중이던 제91사단을 북부루손군에 배속시켜 주었다. 웨인라이트 소장은 제91전투단에게 23일 정오까지 포조루비오 북쪽에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23일 오후 12시 50분에 보병제47연대의 2개 대대가 남하하여 제71사단을 공격했다. 제71사단은 제71야포연대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때 일본기가 보병제47연대를 오폭하여 약 7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잠시 후 수색제48연대와 전차제4연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제10독립비행대 및 비행제16전대의 지원아래 공격을 재개했다. 


일본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필리핀군은 금방 무너졌다. 제71사단이 포병대를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고 달아나면서 오후 6시 30분에 시손이 떨어졌다. 북상 중이던 제91전투단은 일본기가 아그노 강의 다리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멀리 돌아야 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패주하는 제71사단에게 포조루비오 북쪽에 방어선을 펴라고 명령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포조루비오에서 재편성중이던 제26기병연대는 비날로난으로 남하하여 재편성을 마치라는 명령을 받고 오후 7시에 포조루비오를 떠났다. 같은 시각 제91전투단이 포조루비오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폈다. 그러나 시손을 점령한 일본군이 남하하여 23일 밤에 포조루비오를 강타하자 제91전투단의 방어선은 단번에 무너졌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23일 오후에 북부 루손을 지키기 어렵다고 보고 맥아더 장군에게 아그노 강으로 후퇴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는 아그노 강에서 일본군의 예봉을 꺾은 다음 반격할 요량으로 극동미육군사령부 예비인 필리핀 사단(US)을 북부루손군에 배속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맥아더 장군은 아그노 강으로의 후퇴는 허용했으나 필리핀 사단의 배속은 거부했다. 따라서 웨인라이트 소장은 필리핀 사단없이 반격계획을 짜야만 했다.


일본군은 24일 새벽부터 아그노 강 북쪽에 남은 마지막 미군 거점인 비날로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전차제4연대가 오전 5시에 비날로난 북쪽과 서쪽을 방어하고 있던 제26기병연대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가까스로 재편성을 마친 제26기병연대는 대전차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일본전차대는 기병대를 뒤따르던 대만보병제2연대에게 맡기고 방어선을 우회하여 비날로난 시내로 들어가 재편성 중이던 필리핀군을 남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동안 제26기병연대는 대만보병제2연대 선두의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반격을 가하여 위험에 빠뜨렸으므로 일본전차가 급히 돌아와야 했다.  잠시 후 대만보병제2연대 주력이 전장에 도착하면서 제26기병연대는 곤경에 빠졌으나 끝까지 방어선을 지켰다.


이때 웨인라이트 장군이 전황을 파악하러 비날로난에 도착했다. 그는 제71사단과 제91전투단의 모습은 간데없고 제26기병연대만이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악착같이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한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26기병연대장 피어스 대령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개전 당시 842명에서 이제 450명으로 줄어든 제26기병연대는 부상병과 함께 오후 3시 30분에 비날로난을 떠나 아그노 강 남쪽의 타유그로 철수했다. 이로써 북부 루손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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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링가옌 상륙(2) - 상륙


링가옌 부대의 항해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선단은 인도차이나로 가는 것처럼 속이기 위하여 처음에는 남서쪽으로 항진하다가 침로를 바꾸어 평균 8노트의 느린 속력으로 링가옌 만으로 향했다. 도중에 태풍을 만나 고생했으나 연합군의 항공기나 함정은 만나지 않았다.


원래 선단에는 항공엄호가 없었으나 21일부터 라오아그에 진출한 비행제24및 제50전대의 전투기 20대가 엄호를 시작했다. 동시에 6대의 경폭격기들이 포트 윈트가 있는 수빅만 입구의 그란데섬을 폭격하여 이곳이 상륙장소인 양 호도하려고 했다. 1941년 12월 22일 새벽 1시 40분에 선단은 정박지에 진입했다. 날씨는 으슬으슬하고 하늘은 어두웠으며 간간이 비가 뿌렸다.


일본군은 상륙 과정에서 착오를 겪었다. 선두로 진입한 우익대(제1수송선대, 보병제47연대 기간)의 선도함이 어둠 속에서 아린게이 강 하구를 놓치는 바람에 우익대는 상륙지점인 아구를 지나쳐 6km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 산토토마스 앞바다에 정박했다. 그러자 뒤따르던 선단들도 줄줄이 남쪽으로 더 내려와 정박했다. 그리하여 상륙주정의 항해거리가 길어졌다.


일본순양함과 구축함이 해안을 포격하는 동안 병사들은 새벽 2시부터 상륙주정에 옮겨타기 시작했다. 오전 4시에 우익대인 보병제47연대(1개 대대 감편), 전차제4연대(1개 중대 감편), 수색제48연대, 산포병제48연대제2대대, 야전중포병제8연대제1대대(1개 중대 감편)를 실은 주정이 수송선을 떠났으며 오전 4시 47분에 최초의 주정이 아구 해안에 도달했다. 13분 후인 5시에 좌익대(제2수송선대, 대만보병제1연대 기간)의 주정이 처음으로 카바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아린게이 해안에 도착했으며 이어서 제48보병단사령부, 대만보병제1연대, 산포제48연대제1대대, 그리고 공병제48연대주력이 상륙했다. 오전 7시에는 우에지마 지대(보병제9연대제1대대)가 바우앙에 상륙했다. 좌측지대(보병제9연대제3대대)는 오전 8시에 바우앙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산티아고에 상륙했다. 군예비대(보병제9연대제2대대)는 오전 9시에 바우앙에 상륙했다.


병사들은 상륙과정에서 크게 고생했다. 바다가 거칠어서 수송선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타기가 어려웠다. 주정은 해안으로 향하면서 정신없이 흔들렸으며 들이치는 파도에 몸이 흠뻑 젖었다. 바닷물을 머금은 무전기는 먹통이 되어 상륙한 부대와 연락이 끊어졌으며 심지어 선박 사이의 통신도 시원찮았다. 높은 파도는 주정을 해안에 내동댕이쳤으며 일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끌어낼 수 있었다. 북쪽에 상륙한 보병제9연대는 가미지마 지대를 상륙시킨 후 바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서 군예비대를 상륙시켰다.

제14군의 보병과 산포, 일부 전차는 계획대로 당일 상륙했으나 중포, 자동차, 그리고 보급품은 양륙하지 못했다.


미국잠수함 S-38 이 잠입하여 22일 오전 7시에 수송선 하요마루를 격침했으나 일본선단이 얕은 해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잠수함의 전반적인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일본전투기가 항공엄호를 펴기 직전인 22일 아침에 호주에서 날아온 B-17 폭격기 4대가 선단 상공에 도달하여 폭탄을 떨어뜨리고 함정에게 기총소사를 가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링가옌 만에서 북서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서 연합군 함대의 출현에 대비하던 다카하시 제독의 함대도 카탈리나 정찰비행정과 미육군항공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가벼운 피해만 입은 채 스콜 속으로 달아났다. 


악천후를 피해 해안에 접근하던 우익대의 수송선들은 샌 페이비언과 다구판에 각각 2문씩 배치된 제86야포대대(PS)의 155mm 평사포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이 포격은 혼마 장군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다구판 인근에 배치된 미군의 155mm 평사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1)


미군은 링가옌 부대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 12월 18일에 극동미육군항공대의 정보참모는 약 80척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북쪽으로부터 접근 중이라고 보고했다. 20일 새벽 2시에는 제16해군관구가 링가옌 만 북쪽 60km 해상에서 커다란 호송선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20일 밤에는 극동미육군항공대가 100척에서 120척으로 이루어진 일본군 원정부대가 링가옌 만으로 접근 중이며 21일 밤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22일 새벽에는 링가옌 만을 초계 중이던 미국잠수함 스팅레이가 일본선단의 도착을 보고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적이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링가옌 만을 지키던 병력은 필리핀군 2개 사단이었는데 남쪽 연안을 지키던 제21사단(PA)에게만 사단포병이 있었고 일본군이 상륙한 동쪽 연안을 지키던 윌리엄 브라우어 준장의 제11사단(PA)에는 포병이 없었다.


(링가옌 만 상륙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1 .P.124)


가미지마 지대가 상륙한 바우앙-아길리안 지역을 지키던 것은 도널드 보넷 중령의 제71보병연대였다. 동원된 이후 13주의 훈련 밖에 받지 않은 제71보병연대는 원래 제71사단 소속이었으나 임시로 제11사단에 배속된 상태였다. 로사리오에 주둔하고 있던 북부루손군 예비대인 클린턴 피어스 대령의 제26기병연대(PS)는 남쪽으로 19km 떨어진 포조루비오로 이동한 상태였다. 


바우앙 시가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71보병연대장 보넷 중령은 21일에 북쪽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는 다나카 대좌의 대만보병제2연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넷 연대장은 1개 대대에 75mm 자주포대를 붙여 라 유니언 주의 산 페르난도로 급파하고 다른 대대를 동쪽으로 우회시켰다.  75mm 자주포를 가진 대대가 정면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막는 동안 우회한 대대가 동쪽으로부터 일본군의 옆구리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제71연대가 기동을 마치기 전에 일본군이 상륙했다.


가미지마 지대(보병제9연제1대대)가 상륙한 바우앙 해안은 1정의 50구경 기관총과 몇 정의 30구경 기관총으로 무장한 제12보병연대(PA)의 본부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30구경 기관총은 대부분 탄약불량 때문에 사격하지 못했으나 50구경 기관총은 해안에 접근하는 가미지마 지대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퍼부어 링가옌 상륙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이 피해를 무릅쓰고 상륙을 감행하자 필리핀군은 탄약을 모래에 파묻고 달아났다.


가미지마 지대의 정찰대는 상륙 즉시 북상하여 오전 10시 30분에 산 페르난도에서 대만보병제2연대의 정찰대와 만났으며 오후 1시 30분에는 대대 주력끼리 만났다. 군직할예비대(보병제9연대제2대대)는 바우앙을 공격하여 오후 4시 30분에 점령했으며 제3대대는 바우앙을 넘어 나길리안 비행장을 목표로 동진했다. 보넷 중령은 공격 명령을 취소하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제71보병연대의 1개 대대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철수했고 연대 주력은 그날 저녁까지 필리핀의 여름 수도인 바기오로 철수했다. 


일본군의 중앙인 아린게이에 상륙한 이마이 히푸미 대좌의 대만보병제1연대와 산포병제48연대(제1 및 제2대대 감편)는 오전 10시에 병력을 집결시켜 3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이마이 대좌는 오후 3시 30분에 다모티스 북쪽에서 정찰제48연대 및 전차제4연대를 만났다.


일본군 남쪽에 상륙한 야나기 이사무 대좌의 우익대는 오전 6시 50분까지 아구를 점령했다. 야나기 대좌는 자동차의 상륙을 기다리지 않고 아린게이 도로를 따라 로사리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정찰제48연대와 전차제4연대는 우익대 주력과 헤어져 3번 도로를 따라 다모티스로 남하했다.


필리핀군 제11사단장 브라우어 준장은 일본군 상륙보고를 듣자 1개 대대를 북쪽으로 급파했다. 북상하던 대대는 오전 10시 30분에 다모티스 북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아구에서 남하한 정찰제48연대 및 전차제4연대가 불운한 필리핀 대대를 두드려 패서 남쪽으로 쫓아버렸다.


제48사단장 츠치바시 중장은 오후 3시 55분에 아린게이 부근에 상륙하여 아구에 사령부를 차렸다. 22일 오후가 되자 제48사단의 보병과 산포병 대부분, 그리고 전차 절반이 상륙을 마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비록 중포, 자동차, 그리고 보급품은 양륙하지 못했지만 이제 일본군이 반격을 받아 바다로 밀려날 위험은 없었다.


상륙 당일인 22일에 혼마 장군은 링가옌 만에 떠있는 수송선에 머물렀다. 상륙한 부대가 사방으로 진격하고 있었으나 통신이 끊겨 상황을 알 수 없었고 명령을 내릴 방법도 없었다. 그는 엄습하는 불안과 싸우면서 만사가 잘 풀리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혼마 장군 입장에서는 불안해 할 이유가 충분했다. 상륙해안의 필리핀군이 제대로 싸운다면 상륙한 일본군 선두를 당분간 좁은 해안평야에 가두어 둘 수 있었다. 일본군이 상륙 해안 남쪽의 중부 루손 평야로 진출하면 좋은 도로를 타고 마닐라까지 바로 갈 수 있었지만 역으로 마닐라 부근의 미군 주력도 트럭을 타고 상륙해안으로 재빨리 달려올 수 있었다. 만일 일본군의 중포와 잔여 병력이 모두 상륙하여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상륙해안 부근의 필리핀군 4개 사단이 잘 훈련되고 제대로 장비를 갖춘 필리핀사단(US)을 앞세우고 단호하게 반격한다면 좁은 해안평야에 갇힌 일본군 선두를 분쇄할 수 있었다.

선단의 운명도 걱정거리였다. 링가옌 만의 선단이 일본군 주력임을 알아차린 미군이 가지고 있던 항공기, 함정 , 잠수함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공격을 막아내는데 실패한다면 선단은 치명상을 입고 미처 상륙하지 못한 병사들은 물고기밥이 될 것이었다. 또한 이미 상륙한 병력은 보급과 퇴로가 끊긴 상태에서 비참한 패배에 직면할 것이었다.

혼마 장군이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반격을 실시하기에는 필리핀군의 훈련상태와 장비가 불량했으며 22일 시점에서는 이미 극동미육군항공대와 아시아함대에게는 일본선단에 치명상을 입힐 능력이 없었다.


제14군의 계획은 상륙한 부대가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진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부 참모가 교두보를 강화한 다음 진격하자고 주장하여 계획대로  빠르게 진격하자는 참모와 논쟁을 벌였다. 혼마 장군은 빠르게 진격하자는 참모의 손을 들어주었다.


22일 저녁까지 바다가 잔잔해지지 않자 혼마 장군은 오후 5시 30분에 남쪽으로 내려가 다모티스 부근에 중포와 잔여 병력을 양륙하기로 결정했다. 남쪽으로부터 가해질 미군의 포격을 두려워 한 혼마 장군은 제48사단장 츠치바시 중장에게 미군의 155mm 평사포가 배치되어 있는 샌 페이비언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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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링가옌 상륙(1) - 계획


필리핀 공략을 위한 대본영 계획의 제1단계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미군의 항공력과 해군력은 사실상 소멸했다. 서로 멀리 떨어진 5곳에 대한 선발부대의 상륙은 모두 성공하여 필리핀 안에 강력한 발판을 마련했다. 제5비행집단은 루손의 비행장에 전개하여 항속거리가 짧은 육군전투기도 지상군 지원이 가능해졌고 해군은 카미귄 섬, 레가스피 및 다바오에 수상기 기지를 확보했다. 이 모든 일이 2주일 내에 일어났다.


일본제14군의 계획에 따르면 주공인 제48사단은 마닐라 북쪽의 링가옌 만에, 조공인 제16사단은 마닐라 남서쪽의 라몬 만에 상륙할 것이었다. 라몬 만에 상륙할 제16사단(보병제9 및 제33연대 제외)은 11월 25일에 오사카를 떠나 12월 3일에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에 도착했다. 링가옌 만에 상륙할 제48사단(다나카 및 가노 지대 제외)은 12월 6일까지 펑후 제도의 마공과 대만의 가오슝 및 지룽에 집결했으며 곧 수송선들이 도착하여 승선을 시작했다. 수송선이 모자라서 1평당 평균 7명이 배정되어 콩나물시루 같았다. 제48사단의 승선은 17일에 끝났다. 


병력의 집결과 승선은 극도의 보안 속에 실시되었으며 계획의 전모를 아는 장교는 한줌에 불과했다. 개전 이후 일본군은 대만의 항구에 집결한 수송선에 대한 미군의 공습을 두려워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2월 22일 새벽 1시 40분에 제48사단을 태운 수송선 76척과  해군수송선 9척이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6척, 그리고 다수의 수뢰정, 소해정 및 부설함, 초계정, 그리고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호위 함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링가옌 만에 들어와 닻을 내렸다.


1941년 12월 22일부터 28일 사이에 필리핀에 상륙한 병력은 제14군 34,856명, 선박부대 4,633명, 제5비행집단 3,621명, 합계 43,110명이었다. 링가옌 부대의 주력은 츠치바시 유우이치 중장의 제48사단이었다. 1940년 말에 대만에서 편성된 제48사단은 대만보병제1 및 제2연대, 보병제47연대, 산포병제48연대, 통신대, 공병대, 그리고 수송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륙 당시에는 이외에도 많은 부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나 대신 대만보병제2연대는 다나카 및 가노 지대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제48사단의 차량화 수준은 평균적인 미군 보병사단과 비슷하여 일본군에서 차량화가 가장 잘 이루어진 사단 중 하나였다. 3,400명으로 이루어진 산포병제48연대는 75mm 산포 36문을 보유했다.


링가옌 부대에는 제48사단 이외에도 제16사단보병제9연대와 말이 끄는 75mm 야포 8문을 보유한 야포제22연대의 일부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구경포를 가진 부대로는 150mm 평사포 8문을 가진 독립야포병제9대대, 150mm 곡사포 24문을 가진 야포병제1연대, 105mm 평사포 16문을 가진 야포병제8연대가 있었다.

기갑부대로는 전차제4 및 제7연대가 있었는데 경전차 및 중형전차 80대에서 100대 가량을 보유했다. 일본군 중형전차는 미군 기준으로는 경전차에 해당하며 대전차 능력은 오히려 스튜어트 경전차보다 떨어졌다. 이외에도 다수의 지원 및 특별부대가 있었다.


(M-3 스튜어트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3_Stuart)

 


랑가옌 부대를 실은 선단은 3개로 나뉘어 있었다. 전신제2연대장 야마다 신이치 대좌가 지휘하는 제3수송선대는 수송선 21척에 승선하여 하라 소장이 지휘하는 제3호위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12월 17일 오전 9시에 대만 북부의 지룽을 떠났다. 제3호위대의 구성은 바탄섬공격부대를 호위했던 제3급습대와 사실상 같았다. 제48사단장 츠치바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2수송선대는 수송선 28척에 승선하여 니시무라 소장이 지휘하는 제2호위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18일 정오에 펑후 제도의 마공을 떠났다. 제2호위대의 구성은 비간공격부대를 호위했던 제2급습대와 사실상 같았다. 보병제47연대장 야나기 이사무 대좌가 지휘하는 제1수송선대는 수송선 27척에 승선하여 히로세 소장이 지휘하는 제1호위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18일 오후 5시에 대만 남부의 가오슝을 출항했다. 제1호위대의 구성은 아파리공격부대를 호위했던 제1급습대와 사실상 같았다. 링가옌 상륙부대가 보유한 상륙주정은 병력수송용 소형목조선인 얀마 48척, 소발동정 63척, 대발동정 73척, 특대발동정 15척이었다.


(대발동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aihatsu-class_landing_craft)


링가옌 상륙부대를 직접 호위하는 함대와는 별도로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이끄는 함대가 19일에 마공을 출항하여 루손 서쪽 460km 지점으로 향했다. 말레이 상륙을 지원하고 달려온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타케 중장의 함대가 이곳에서 이보우 중장의 함대와 합류했다. 그리하여 전함 2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수상기모함 2척과 다수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함대가 루손 서쪽 해상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연합군 함대의 반격에 대비했다. 


제48사단장 츠치바시 중장은 12월 17일에 자신이 탑승한 긴요마루에서 관계자들과 회의를 가지고 상륙계획을 확정했다. 링가옌만 상륙은 수송선대별로 3곳에서 실시될 계획이었다. 제1수송선대에 실린 보병제47연대(1개 대대 감편), 정찰제48연대, 전차제4연대(1개 중대 감편), 그리고 지원부대는 링가옌만 서쪽 입구인 아구마을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상륙주정 63척에 실린 선두 병력은 오전 5시에 출발하여 5시 40분에 해안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주정들은 하루동안 1시간 간격으로 10번 왕복하면서 병력을 상륙시킬 것이었다.


(링가옌 만 상륙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1 .P.124)


제2수송선대에 실린 대만보병제1연대와 전차제7연대는 아구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진 카바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상륙예정시간은 아구보다 10분 늦은 오전 5시 50분이었으며 상륙주정 57척과 얀마 19척을 준비했다.

제3수송선대에 실린 보병제9연대는 카바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진 바우앙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상륙예정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으며 상륙주정 20척과 얀마 29척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제14군은 상륙일인 22일 오전 7시 30분까지 북쪽으로는 바우앙에서 남쪽으로는 아구까지 24km 에 걸쳐 링가옌 만과 코르디예라 산맥 사이의 좁은 해안평야에 교두보를 마련할 것이었다.


상륙위치 선정은 탁월했다. 산맥과 해안 사이로 지나가는 3번 도로는 훌륭한 2차선 포장도로였다. 바우앙에는 동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어 바기오를 거쳐 남쪽 로사리오에서 다시 3번 도로와 만났다. 아구와 카바 사이의 아린게이에는 작은 강이 코르디예라 산맥을 깎아 만든 계곡을 따라 부분적으로 포장된 도로가 로사리오까지 뻗어 있었다. 상륙해안 남쪽은 중부루손 평야였으며 3번 도로는 마닐라까지 바로 이어져 있었다.


일단 해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미군을 무찌르고 나면 주력인 제48사단은 바로 남하할 것이었다. 상륙해안을 방어하는 일은 보병제9연대의 몫이었다. 가미지마 지대(보병제9연대제1대대)는 상륙하자마자 북상하여 라 유니언 주의 산 페르난도에서 남하 중인 다나카 지대와 합류하여 상륙해안의 북쪽 측면을 보호할 것이었다. 그동안 군예비대(보병제9연대제2대대)는 바우앙을 점령하고 군직할좌측지대(보병제9연대제3대대)는 바우앙-바기오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나길리안 비행장과 바기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바기오를 점령하면 동쪽으로부터 가해질 미군의 반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카바에 상륙한 병력은 아린게이 강을 따라 나있는 부분적으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여 로사리오를 점령할 것이었다. 아구에 상륙한 병력은 3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다모티스를 점령할 것이었다. 이후 양 부대는 아그노 강으로 진출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아그노 강에서 미군의 강력한 첫번째 방어선을 만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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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쟁의 충격


필리핀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방공호는 만들어져 있지 않았으며 필리핀군은 동원 중이었다. 당황한 필리핀에는 온갖 헛소문이 퍼졌다.


일본폭격기의 일부에 백인 조종사가 타고 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퍼져서 맥아더가 전쟁부에 보낸 보고서에도 언급되었다. 제27폭격비행전대의 누군가는 방금 도착한 A-20 쌍발폭격기가 듀이 대로에 늘어서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A-24 경폭격기가 마닐라 항에 도착하여 하역을 기다린다는 전화를 받았다. 비행전대에서는 인부를 모아 부두로 파견했으나 헛물만 켰다. 제27폭격비행전대는 일본 스파이가 비행전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더글러스 A-20 하복 쌍발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A-20_Havoc)


극동미육군사령부에도 온갖 헛소문이 들어왔다. 하루는 미함대가 필리핀을 구하기 위하여 태평양을 항해중이라는 소문이 들어왔다. 다음날에는 누군가 마닐라의 식수에 독을 풀었으며 항구 지역에는 독가스가 퍼지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어왔고 어떤 날에는 일본군 1,000명이 마닐라 만으로 들어와 마닐라를 관통해 흐르는 파시그 강 하구에 상륙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마닐라에는 하루종일 잘못된 공습경보가 울렸다. 공습경보가 하도 자주 울리자 서덜랜드 장군은  경보를 울리기 전에 육군사령부의 허락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등화관제가 엄격하게 실시되면서 마닐라의 우범지대에는 범죄가 들끓었다. 경찰, 경비병, 그리고 무장한 공습감시원이 혼란을 부채질했다. 제5열이 혼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여 흥분한 그들은 아무데나 불쑥 나타나 검문을 했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바로 사살했다. 경찰, 경비병 및 공습감시원이 무분별한 불시검문 및 사살로 혼란을 부채질하자 극동미육군사령부가 무기를 회수했다.


마닐라는 공습에 직면한 현대 도시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상접 입구는 모래주머니로 보호되었고 상점과 빌딩에는 임시변통의 대피호가 만들어졌다. 집에 지하실이 있는 사람은 밤에 그곳에서 잤다. 교통수단은 육군에 징발되었고 휘발유는 배급제로 바뀌었다. 차량은 야간에 하늘에서 보이지 않도록 전조등에 뚜껑을 달아야 했다. 교통체계는 붕괴했으며 트럭, 구급차, 그리고 관용차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렸다.


마닐라는 혼란에 빠졌다. 도심 거주자는 안전을 위하여 교외로 탈출했고 교외 거주자는 같은 이유로 도심으로 들어왔다. 중심 도로는 양쪽으로 오가는 트럭, 승용차, 그리고 손수레로 들어찼다. 가재도구와 가축을 실은 차들이 빵빵거리고 닭과 돼지 울음소리까지 합쳐 하루종일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식량을 찾아 몰려다녔으며 무선 및 유선 통신소는 사용대기자로 미어터질 지경이어서 외부에 소식을 전하기가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하여 은행으로 몰리자 인출한도가 1주일에 200페소로 제한되었다. 필리핀인들은 은화를 선호했으나 인출은 지폐로만 가능했다. 모든 거래가 현금으로만 이루어져 경제가 위축되었다.


필리핀 자치령은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자치령 정부는 방공호 건설을 시작했고 의회는 임시 회의를 열어 케손 대통령에게 국방비 20,000,000페소를 집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미국 정부가 민간 부문에 사용하도록 같은 금액을 원조해 주었다. 자치령 정부는 원조받은 돈으로 공무원에게 3달치 월급을 미리 지급했다. 따라서 공무원은 이 돈으로 가족을 안전한 마닐라 외곽으로 옮겨놓고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마닐라 시는 계엄령 선포 없이도 개전 1주일이 지나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군대도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의 보급장교였던 프랭크 카펜터 소령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지역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의 병사가 미국 수송선단의 회항, 탄약 부족, 아파리 상륙 등 기밀을 알고 있었다. 사령부로 돌아온 카펜터 소령은 독일군이 미군 복장을 하고 병사들에게 부정적인 소식을 퍼뜨리고 있으며 일본군 1,500명이 적절한 때에 행동하기 위하여 민간인 복장을 하고 마닐라 시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정보참모에게 조사를 요청했다.


8일 오후의 클라크 비행장 피습에 관해서 믿기 힘든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제26기병연대의 필리핀인 장교 1명이 강력한 단파통신기를 가지고 클라크 비행장 바로 옆의 공터에서 일본군에게 B-17이 땅에 있는 시간을 알려주었으며 비행장 피습 직후 이 사실을 알아차린 제26기병연대의 부사관 1명이 톰슨 기관단총으로 이 장교를 사살했다는 것이다. 또한 클라크 비행장의 조종사 막사 밖에 있는 나무에 누군가 거울을 매달아 놓았는데 이 거울이 일본기가 날아온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9일 아침의 니콜스 비행장 피습에 대해서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날 아침에 어선 12척이 니콜스 비행장을 향하여 마닐라 만에 일직선으로 떠 있었으며  니콜스 비행장 부근에서는 공습 직전에 낡은 자동차가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닐라 만에 들어선 일본기가 일직선으로 늘어선 어선을 따라 날아와 불타는 자동차의  화염을 발견하면 그곳이 바로 니콜스 비행장이었다는 것이다.


카비테 항 폭격에서도 클라크 비행장처럼 단파 통신기를 사용한 스파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일본인 아내를 둔 미국인이었으며 폭격 직후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에는 스파이가 카비테 기지에서 근무하던 젊고 아름다운 일본계 여성이었다고 나온다. 이 스파이는 통신을 보내던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그녀를 사랑하던 해군장교가 몰래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장병들이 일본군의 공격을 앞두고 목표를 알려주기 위하여 불꽃놀이를 하거나 목표 방향으로 축제용 로켓을 쏘아올리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기록에 따르면 비밀 단파통신기, 일직선으로 늘어선 어선, 그리고 아리따운 스파이 이야기는 모두 근거가 없으며 전후에 일본측 기록을 들여다보고 일본군 장교를 심문한 결과 당시 필리핀에서 조직적인 제5열의 활동은 없었다.


공수부대에 대한 보고도 잇따랐다. 12월 10일에 클라크 기지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20,000명의 공수부대가 낙하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극동미육군사령부는 필리핀 사단(US)에게 진압명령을 내렸다. 사단은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필리핀 수비대와 자치령은 전쟁 이전부터 제5열의 활동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필리핀 군관구의 정보부서와 자치령의 정보기관은 요주의 인물의 목록을 만들어 감시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인 뿐만 아니라 일본과 관련되거나 일본에 우호적인 많은 미국인 사업가, 기술자, 그리고 농장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와이에서 파견된 일본계 FBI 요원들이 필리핀의 일본인 사회에 침투했으며 경찰대 또한 별도의 정보기관을 운용했다.


전쟁이 터지자 목록에 올라있던 인물은 즉시 체포되었다. 마닐라의 일본인 구역에는 헌병이 배치되었으며 일본인은 집안에 머무르라는 경고를 받았다. 경찰은 경고를 무시하고 마닐라 시내를 돌아다니는 일본인을 길거리, 식당, 사무실, 클럽 등 모든 곳에서 눈에 띄는 족족 잡아들였다. 전쟁 첫날 맥아더 장군은 마닐라의 일본인 중 40%, 그리고 필리핀 내 다른 지역의 일본인 중 10% 가 구금 상태라고 전쟁부에 보고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13일부터 독일인과 이탈리아인도 구금되었다. 연행된 사람은 마닐라의 빌리비드 교도소에서 심사를 받았으며 혐의를 벗은 사람은 즉시 석방되었다. 만족스럽게 해명하지 못한 사람은 마닐라 남쪽의 막사로 보내져 고등판무관 대리와 육군장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조사를 기다렸다.


개전 초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군의 동원은 진행되었다. 필리핀군 사단 대부분은 개전 당시 3번째 연대의 동원이 완료되지 않았으나 15일까지 완료했다.

훈련소 관리요원으로 이루어진 제1정규사단(PA)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받아 포병대없이 12월 19일에 편성되었다. 제1정규사단은 남부루손군에 소속되었으며 편성 즉시 제1보병연대(PA)를 라몬 만의 마우반 지역으로 파견했다. 1942년 1월에는 필리핀 경찰대로 이루어진 제2정규사단(PA)이 편성되었다.

비사야와 민다나오에서는 개전 당시 절반 정도 동원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제72 및 제92사단(PA)은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12월 9일에 루손으로 파견되었다.

많은 임시부대가 현지에서 편성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장군은 동원령이 떨어진 10개 사단 소속이 아닌 예비군도 가까운 부대에 입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많은 부대가 정원외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학생군사훈련단 및 자원자를 합쳐 임시부대를 만들었다.


필리핀 수비대는 화력을 보완하고자 창고를 뒤졌다. 700명으로 이루어진 제301야포연대(PA)가 새로 만들어져 창고에서 찾아낸 나무바퀴 달린 제1차 세계대전형 155mm 평사포 24문과 155mm 곡사포 2문으로 무장하고 민다나오에서 불려온 알렉산더 퀸타드 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제301야포연대(PA)는 코레히도르 밖에서 155mm 야포를 보유한 유일한 부대였다.

동시에 75mm 야포 4문으로 구성된 포대 4개를 가진 임시포병대대 3개도 만들었다. 75mm 야포는 10월에 도착한 것이었으며 병력은 필리핀 스카우트, 예비군, 그리고 제200대공해안포연대에서 차출했다. 2개 대대는 북부루손군에 1개 대대는 남부루손군에 배속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전쟁이 터지자 휘하 부대에게 시중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라고 명령했다. 병참장교는 눈에 띄는 모든 자동차와 트럭, 대량의 피복과 식량을 사들였으며 운수회사는 육군에 징발되었다. 통신대는 모든 사진기, 라디오, 그리고 전화기를 사들였다. 마닐라장거리전화회사의 회장 조셉 스티브놋은 육군중령 계급장을 달고 통신대의 지휘를 받았다. 의무대는 의약품, 붕대, 수술기구를 사들였다. 자이알라이 클럽은 병원이 되었고 리잘 체육관은 의약품 창고가 되었다.


마닐라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병참장교가 석유회사로부터 마닐라 인근에 저장 중인 대량의 석유를 사들였다. 맥아더 장군은 식량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상인들로부터 쌀을 담은 125파운드(57kg)짜리 가마니 수천개를 사들였고 병참장교는 마닐라 만에 떠있던 상선을 돌아다니며 선적하고 있던 식량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또한 통조림회사와 식품회사로부터도 통조림을 비롯한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브렌건캐리어.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al_Carrier)

 


일본이 홍콩을 공격하면서 홍콩에 전개한 캐나다 자동차대대에 보급할 물자와 장비를 싣고 있던 캐나다 수송선 돈 호세가 마닐라에서 발이 묶였다. 맥아더 장군은 돈 호세가 싣고 있던 물자와 장비를 필리핀에 양륙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전쟁부가 캐나다 정부에 현지판매를 요청했다. 돈 호세가 싣고 있던 장비 중에 브렌건캐리어 57대가 있었는데 맥아더 장군은 이중 40대를 제임스 위버 대령의 임시 전차단에 배정했다. 애석하게도 이 브렌건캐리어에는 기관총이 없었으므로 전투임무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브렌건캐리어는 전량 마닐라 병기창에서 사용했다.


일본군이 아파리, 비간 및 레가스피에 상륙하자 맥아더 사령부는 비행장을 얻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대령은 일본군 주력은 아직 상륙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루손의 제공권을 장악한 다음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날짜를 28일로 실제보다 늦게 추정했다.


아파리 및 비간 상륙으로 북부루손군은 작전을 바꾸었다. 원래 북부루손군은 북부루손 전역을 방어하게 되어 있었으나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임무였다. 12월 16일에 북부루손군 사령관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은 북부루손 전체를 지킨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방어 구역을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 이남으로 축소하여 일본군 주력의 상륙이 예상되는 링가옌 만 방어에 치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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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레가스피 및 다바오 상륙


파커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루손군 담당 구역은 마닐라 남동쪽의 루손 지역이었다. 마닐라에서 루손 남동쪽 끝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400km 였으며 베이 호와 타알 호라는 큰 호수 2개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5개의 만이 있었는데 모두 상륙작전에 적합하여 상륙가능한 해안선의 길이가 400km 에 달했다. 지역 내에는 도로가 발달했으며 마닐라에서 다라가에 이르는 철도가 있었다. 루손 섬의 남동쪽 끝에 가까운 부분, 철도 종점인 다라가에서 1.6km 떨어진 알베이 만의 레가스피가 일본군 상륙지점이었다.


남부 루손군에는 2개 필리핀군 사단이 있었으며 아티모난을 경계로 빈센트 림 준장의 제41사단(PA)은 서쪽을, 엘버트 존스 준장의 제51사단(PA) 은 레가스피를 포함한 동쪽을 담당했다.

제51사단(PA) 또한 다른 필리핀군 사단과 마찬가지로 장비가 열악하고 훈련이 부족했다. 모든 병사들이 5년 이내 어느 시점에선가 5.5개월의 훈련을 거쳤으나 사단장 존스 준장에 의하면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동원 이후의 훈련이 중요했는데 이때 언어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부사관과 병들은 바이콜 사투리를 쓰는데 비하여 장교는 타갈로그어를 썼다. 어쨌든 동원 이후 1개 연대는 13주, 1개 연대는 5주 동안 훈련을 받았으며 나머지 1개 연대는 전혀 훈련을 받지 못했다. 존스 사단장의 견해에 따르면 제한적으로나마 전투를 치를만한 부대는 13주 동안 훈련받은 제52연대뿐이었다.


레가스피 상륙을 위하여 혼마 중장은 제16사단 소속 2,500명의 병력을 준비했다. 제16보병단장 기무라 나오키 소장이 지휘하는 기무라 지대는 제16보병단사령부, 보병제33연대(제1대대 감편), 야포병제22연대제4중대, 공병제16연대의 1개 중대(1개 소대 감편), 독립공병제6연대의 1개 중대(2개 소대 감편) 그리고 구레제1해군특별육전대 575명 및 제1설영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무라 지대가 탄 수송선 7척은 제1근거지대사령관 쿠보 규지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4급습대의 호위를 받았다. 제4급습대는 경순양함 나가라, 제24구축대(우미카제, 야마카제, 카와카제, 스즈카제), 제16구축대 제1소대(유키카제, 도키즈카제), 부설함 아오타카, 소해정 2척, 초계정 2척, 기타 소함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지타 류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11항공전대(수상기모함 치토세, 미즈호)도 동행했다.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6일에 가쿠다 가쿠지 소장이 이끄는 제4항공전대가 팔라우를 떠났다. 8일 아침에 다바오 동쪽 200km 지점에 도착한 제4항공전대는 경항모 류조로부터 함재기를 내보내어 다바오 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의 수상기모함 프레스톤을 공격했다.

8일 오전 9시에는 기무라 지대를 실은 선단이 팔라우를 출항했다. 프레스톤을 공격한 제4항공전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9일 아침에 기무라 선단과 합류하여 레가스피로 향했다.


(일본항공모함 류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aircraft_carrier_Ry%C5%ABj%C5%8D)


선단이 샌 베르나디노 해협에서 220km 떨어진 지점을 통과할 때 부설함 아오타카가 구축함 2척의 호위 아래 샌 베르나디노 해협에 기뢰 300개를 설치했다. 샌 베르나디노 해협 부근의 소르소곤 만을 초계하던 잠수함 S-39 함이 아오타카를 공격하려다가 일본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받고 쫓겨났다.


해안에서 160km 떨어진 곳까지 다가서자 류조가 함재기를 내보내어 알베이 만 연안을 공격했다. 기무라 지대를 태운 선단은 제4항공전대와 헤어져 알베이 만으로 진입했고 11일 밤 11시에 레가스피 앞바다에 도착했다.


기무라 지대는 12월 12일 새벽 2시 15분부터 상륙을 시작했는데 저항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필리핀군 부대는 240km 떨어져 있었다. 일본군은 오전 8시 30분까지 레가스피 비행장과 다라가에 있던 마닐라 철도의 종착역을 확보했다.

일본군이 상륙하자 레가스피에서 1.6km 떨어진 다라가 역의 역장이 전화로 보고했다.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남하하여 기습을 가하려고 생각해 보았으나 일본군이 제공권을 가진 상황에서 기습은 불가능했다. 결국 화차를 회수하고 마닐라 철도와 마닐라로 이어지는 1번 도로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제51공병대대가 모든 교량에 폭파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파견되었다. 제52연대 제1대대의 B 및 C 중대가 기관총 1개 소대와 함께 엄호를 맡았다.


12일 저녁부터 일본해군비행장정비부대가 레가스피 비행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선단과 호위함대는 다음 상륙을 위하여 13일에 팔라우로 돌아갔다. 14일에 세토 마스즈 중위가 이끄는 제23항공전대의 제로기 1개 중대(9대)가 레가스피 비행장에 진출했다.


기무라 지대에 최초로 반격을 가한 것은 극동미육군항공대였다. 12일 오후3시에 미군전투기 2대가 일본군이 장악한 레가스피 비행장을 공격하여 3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4일에는 델몬테비행장에서 날아온 B-17 폭격기 3대가 레가스피 앞바다의 소해정과 수송선, 그리고 비행장을 폭격했다. 호위기도 없이 날아온 B-17은 막 도착한 제로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어 3대 중 1대만이 델몬테 비행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2대는 귀환 도중 불시착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레가스피를 장악한 기무라 지대는 13일 아침부터 1번 국도를 따라 서진했다. 12월 17일에 일본군 정찰대가 나가에서 북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라게이 부근의 다리에 도달했을 때 다리에 폭약을 설치하고 있던 필리핀군 제51공병연대와 처음으로 만났다. 공병대는 서둘러 다리를 폭파했다. 다음날 기무라 지대는 나가에 입성했고 이후 부서진 다리를 수리하면서 서진하여 21일에는 선두가 다깃에 도달했다. 필리핀군과 기무라 지대의 본격적인 교전은 12월 22일에 이루어졌다. 1번 도로 상의 팀부요에 방어선을 편 매트 도브리닉 중위의 B 중대가 일본군 1개 중대의 공격을 물리쳐 10km 밖으로 밀어내었다. B 중대도 병력의 15% 를 잃었다.


23일 밤에 라몬 만에 상륙하는 일본제16사단의 주력을 태운 선단이 아티모난에 접근하자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제51사단(PA)은 라몬 만에서 다나카 지대가 제16사단 주력을 맞이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임무를 완수한 셈이었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와 술루제도의 홀로 섬에 대한 상륙은 일본해군의 기지항공대를 위한 비행장을 확보하고 필리핀 수비대의 퇴각로를 차단하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공하기 위한 기지를 얻는데 목적이 있었다.

다바오 상륙부대는 처음에는 미우라 도시오 중좌가 지휘하는 제16사단 보병제33연대 제1대대, 공병제16연대의 1개 소대, 독립공병제6연대의 1개 소대로 편성되어 4척의 수송선에 승선했다. 여기에 제56사단의 보병단장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이 지휘하는 사카구치 지대가 가세했다. 사카구치 지대는 제56사단 보병제146연대를 중심으로 전차 1개 중대, 사단포병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수송선 8척에 승선했다. 다바오 상륙부대의 병력은 합계 5,000명 정도였다.


다바오 상륙부대의 출항 날짜는 필리핀을 담당한 제14군이 결정했지만 일단 출항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맡은 제16군의 지휘를 받았다. 다바오를 점령한 이후에 미우라 지대는 제14군 휘하로 돌아가고 사카구치 지대는 제16군의 지휘 아래 술루 제도의 홀로 섬을 거쳐 북보르네오의 타라칸으로 진출했다. 홀로 섬 상륙을 위하여 레가스피에 상륙했던 해군제2특별육전대와 해군비행장부대가 2척의 수송선에 타고 사카구치 지대에 합류했다.


다바오 상륙부대를 실은 14척의 수송선은 12월 16일 오후 4시부터 17일 오후 2시에 걸쳐 차례로 팔라우를 떠났다. 직접 호위를 맡은 것은 제2수뢰전대 사령관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5급습대로서 경순양함 진츠, 제15구축대(쿠로시오, 오야시오, 하야시오, 나츠시오), 제16구축대제2소대(하츠카제, 아마츠카제), 부설함 시라타카, 기타 소함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제5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직접지원부대가 있었는데 그 구성은 제5전대(중순양함 나치, 하구로, 묘코), 제4항공전대(항공모함 류조, 구축함 시오카제), 제11항공전대(수상기모함 치토세)와 초계정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2월 19일 오후에 다바오 동쪽 360km 해상에서 류조는 함상폭격기 6대를 내보내어 다바오 만의 동쪽 끝인 산 오스틴 곶의 통신소를 폭격했다. 동시에 수상기모함 치토세는 수상기를 내보내어 다바오 시가지를 정찰했다.


선단은 20일 새벽 4시 10분에 다바오에 도착하여 류조에서 발진한 함재기의 지원 아래 상륙을 시작했다. 다바오의 북동쪽 해안에는 미우라 지대, 사카구치 지대 사령부, 그리고 사카구치 지대의 1개 대대가 상륙했고 남서쪽 구역에는 사카구치 지대의 1개 대대가 상륙했다. 다바오를 지키던 필리핀군은 로저 힐스맨 중령의 제101보병연대(PA) 제2대대를 중심으로 한 2,000명 정도였다. 필리핀군의 기관총좌 하나가 상륙하는 미우라 지대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혔지만 곧 일본구축함의 함포사격을 얻어맞고 분쇄되었다. 그러자 필리핀군은 전의를 잃고 오전 10시 30분까지 도시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남부 루손군 직속의 75mm 야포 8문 중 3문을 방기했다.


다바오의 남서쪽 해안에 상륙한 사카구치 지대의 1개 대대는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미우라 지대와 연결했다. 오후 2시 30분까지 시가지와 비행장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으며 저녁에는 다바오 남쪽에 수상기 기지가 들어섰다. 다바오에 살던 일본인 23,000명은 일본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다바오와 주변 지역의 점령임무를 맡은 미우라 지대는 제16군 지휘에서 벗어나 제14군 휘하로 돌아갔다.

21일에 제11항공함대 동항해군항공대 소속 97식대정 12대가 팔라우를 떠나 다바오 만에 진출했고 23일 오후에는 제11항공함대의 전투기 12대와  육상정찰기 2대가 다바오 비행장에 진출하여 제4항공전대로부터 다바오방면 상공직위 임무를 이어받았다.


사카구치 장군은 홀로 섬 상륙을 위하여 마츠모토 지대를 편성했다. 보병제146연대제3대대장 마츠모토 오사무 소좌가 지휘하는 마츠모토지대는 제3대대주력, 구레제2특별해군육전대, 포병 1개 소대, 무선 1개 분대로 이루어져 22일 밤에 다바오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호주 다윈 부근의 바첼로 비행장을 이륙한 B-17 폭격기 9대가 22일 석양 무렵에 다바오에 정박 중이던 일본선단 상공에 500파운드(227kg) 폭탄 30발을 떨어뜨렸다. B-17은 기습을 달성했으나 일본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나빠서 피해는 크지 않았다. B-17은 델몬테 비행장에 내려 재급유를 받은 후 5대는 바로 호주로 돌아가고 4대는 23일 새벽에 다시 다바오의 일본선단을 공습했으나 이번에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24일까지 B-17 폭격기 9대는 모두 무사히 다윈으로 돌아갔다. 

24일에는 B-17폭격기 3대가 300파운드(136kg) 폭탄 7발씩을 싣고 다윈을 떠나 다바오로 날아가서 폭격을 가했다. 2대는 다바오 비행장을 폭격하고 1대는 일본선단을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전과는 크지 않았다. 3대는 모두 다윈으로 돌아왔으나 2대는 제로기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마츠모토 지대는 폭격으로 인하여 예정보다 몇시간 늦은 23일 아침에 수송선 3척에 타고 다바오를 출항했다. 제5급습대(경순 1척, 구축함 4척, 초계정 2척)가 직접 호위를 맡고 제4 및 제11항공전대가 항공엄호를 담당했다. 선단은 24일 한밤중에 홀로 앞바다에 도착했으며 상륙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실시되었다. 제4항공전대는 24일에 다바오로 돌아갔고 제11항공전대의 수상기모함 치토세가 상륙작전을 엄호했다. 일본군은 홀로 섬을 지키던 필리핀 경찰대 300명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25일 오전 중에 홀로 시가지와 비행장을 점령했다. 26일에 일본전투기가 홀로 섬에 진출하여 제11항공전대로부터 상공직위 임무를 이어받았다. 제5전대는 홀로 섬 남쪽 약 100km 까지 진출했다가 팔라우로 돌아갔다. 이제 일본군은 다바오와 홀로 섬을 기지로 하여 보르네오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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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비간 상륙


2,000명의 병력을 가진 다나카 지대가 아파리에 상륙하는 동안 역시 2,000명으로 이루어진 가노 지대는 해군제2급습대의 엄호 아래 비간에 상륙했다. 제2급습대는 12월 10일 오전 1시 15분에 비간 앞바다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으나 바다가 거칠어서 상륙은 오전 5시부터 시작되었다. 

비간 부근 해상을 정찰하던 P-40 조종사 그랜트 마호니 중위가 10일 오전 5시 13분에 제2급습대를 발견하고


"수송선 6척과 해군함정 11척이 비간 만에 있음"


이라는 보고를 보냈다. 


오전 6시에 100파운드(45kg)짜리 폭탄 20발을 실은 제93폭격비행대대의 B-17폭격기 5대가 대대장 세실 컴즈 소령 지휘 아래 클라크 비행장을 이륙하여 제17추격비행대대 소속 P-40 전투기 6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비간으로 날아갔다. 오전 7시 45분에 일본선단 상공에 도달한 폭격기들은 3,700m 높이로 선단 상공을 통과하면서 폭탄의 절반을 떨어뜨리고 다시 3,800m 높이로 돌아오면서 나머지를 떨어뜨렸다. P-40 전투기는 저공으로 내려가 적의 수송선 및 함정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잠시 후 제34추격비행대대의 P-35 전투기들도 날아와 공격에 가세했다.


산 마르셀리노 임시비행장에 있던 에밋 오도넬 소령의 제14폭격비행대대 소속 B-17 폭격기 5대는 클라크 비행장으로 옮겨 폭탄을 싣고 재급유를 받은 다음 3대는 비간으로, 2대는 아파리로 향했다. 오도넬 소령을 포함하여 비간으로 향한 폭격기 3대는 오전 10시에 선단 상공에 도달하여 폭격을 실시했다. 제로기 18대와 비행제24전대 소속의 97식 전투기들이 제2급습대의 상공을 지켰으나 미군의 폭격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폭격과 기총소사에 의하여 수송선 오이카와마루와 다카오마루, 그리고 제10호소해정이 침몰했다. 제10호소해정은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의하여 폭뢰가 유폭되면서 굉침했으며 사상자는 전사자 79명, 중상 3명에 달했다. 폭발에 휘말려 제34추격비행대대장 새뮤얼 마렛 중위의 P-35가 추락했다.  구축함 무라사메는 기총소사를 받아 전사 5명, 중상 8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반격을 가하여 P-35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 제4수뢰전대장 니시무라 쇼지 소장의 기함인 경순양함 나카도 6번의 기총소사를 받아 전사 2명, 중상 1명의 피해를 입었다. 격추된 미군기는 마렛 중위를 포함하여 P-35 전투기 3대였다.

비간 폭격은 극동미육군항공대가 마지막으로 실시한 합동공격작전이었다. 이날 일본기가 니콜스 및 니엘슨 비행장과 카비테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이후 미군 전투기들은 공중전을 피하고 정찰에 주력했다.


아파리와 마찬가지로 비간 앞바다도 거칠어서 병력만 비간에 상륙하고 보급품은 다음날인 11일 아침부터 남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판단에 양륙했다. 수송선들은 12일 오후 10시까지 양륙을 마치고 제2수뢰전대의 엄호 아래 마공으로 돌아갔다. 


비간 비행장을 장악한 가노 지대는 소수의 분견대를 북쪽으로 70km 떨어진 북일리코스 주의 주도 라오아그로 파견했다. 3번 도로를 따라 북상한 분견대는 12일 오전 7시 30분에 라오아그 비행장을 확보했다.

11일 아침에 비행제24전대의 전투기 18대가 비간 비행장에 착륙했으며 라오아그 비행장에도 일본기가 도착했다.


비간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링가옌 만에서는 10일 자정에 일본군이 보낸 정찰용 모터보트 1척이 해안으로 접근하다가 들켰다. 그러자 제21사단(PA)이 밤새 야포, 기관총 및 소총 사격을 가했다. 아침이 되자 해안에는 적이 상륙했다는 흔적이 없었지만 제21사단장 마테오 카핀핀 준장은 적의 대규모 상륙기도를 물리쳤다고 보고했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일본제14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원래 다나카 지대와 가노 지대에게 새로 확보한 비행장 방어를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반격이 없을 것으로 보이자 두 지대를 합쳐 제14군 주력의 링가옌 상륙을 북쪽으로부터 지원하도록 계획을 바꾸었다. 제14군 참모장 마에다 장군이 12월 14일에 아파리에 날아와 다나카 대좌에게 비간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다나카 지대는 투게가라오 비행장에 1개 중대, 아파리 양륙장과 비행장에 각 1개 소대를 남겨두고 비간으로 갔다. 12월 20일 오후 1시에 다나카 지대와 가노 지대는 비간에서 합쳐져 다시 대만보병제2연대가 되었다.

연대장 다나카 대좌는 비간 및 라오아그 지구에 3개 중대를 남겨두고 21일 오후 12시 30분에 비간을 떠나 3번 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후방에 남은 부대는 비행집단장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남하하던 다나카 연대는 21일 저녁에 산 페르난도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박노탄에서 제11사단(PA)의 방어선을 만났다. 다나카 연대가 동쪽으로 우회하여 배후를 차단할 것처럼 위협하자 4,000명에 달하는 필리핀군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제14군 주력의 링가옌 만 상륙을 몇 시간 앞둔 22일 아침 7시에 다나카 연대는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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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파리 상륙


다나카 지대를 실은 해군제1급습대는 1941년 12월 10일 오전 3시 30분에 아파리 앞바다에 도착하여 오전 5시 30분부터 상륙을 시작했다. 바탄 섬에서 날아온 97식 전투기들이 선단 상공을 지켰다. 아파리에서 미군의 저항은 없었으나 바다가 거칠어 상륙이 어려웠다. 결국 2개 중대를 상륙시킨 상태에서 선단은 남동쪽으로 35km 떨어진 곤자가로 이동하여 나머지 병력을 상륙시켰다. 곤자가는 엥가노 곶이 부분적으로 바람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바다가 덜 거칠었다.


미군은 상륙 목적이 비행장 확보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링가옌 만을 지키던 북부루손군의 제11(PA) 및 제12사단(PA)은 아파리 상륙을 무시했다. 단지 카가얀 하곡에 주둔 중인 부대와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26기병연대(PS)소속의 장갑차 몇 대를 파견했을 뿐이었다. 대신 카가얀 하곡의 다리를 폭파하고 벨레테 고개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아파리에는 필리핀군 제11사단 제12보병연대 제3대대의 1개 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중대장 앨빈 해들리 중위가 상륙하는 일본군을 보고 투게가라오의 대대본부에 보고했다. 대대장은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해들리 중대는 1발의 총탄도 쏘지 않고 3번 도로를 따라 후퇴했다. 해들리 중위는 그날 아침 아파리에 일본군 10,000명이 상륙했다고 주장했다.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아파리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비행기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월 5일에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으로 이동했던 B-17 폭격기들은 12월 9일 저녁까지 루손의 클라크 비행장과 산 마르셀리노 임시비행장에 돌아와 있었다. 10일 아침에 일본군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10대의 B-17 중 8대는 비간 상륙부대를 공격했고 제14폭격비행대대의 2대만이 아파리 상륙부대를 공격했다.


조지 섀첼 중위가 조종하는 B-17은 10일 오전 9시 30분에 클라크 비행장을 이륙하여 아파리로 날아갔다. 정오에 섀첼 중위는 곤자가 부근 해상에 늘어선 일본수송선 위를 통과하면서 7,600m 높이에서 600파운드(272kg)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B-17 은 선단 상공을 지키던 일본기의 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사상자없이 산 마르셀리노로 돌아왔다.


콜린 켈리 대위가 조종하는 B-17은 600파운드 폭탄 3발만을 실은 상태에서 클라크 비행장을 급히 이륙하여 루손 서해안을 따라 남하중이라고 잘못 알려진 적의 항공모함을 찾아 나섰다. 적 항모를 찾지 못한 채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던 켈리 대위는 오후 1시에 곤자가 부근 해상에서 적의 수상전투함을 발견했다.  켈리 대위는 6,700m 높이에서 3발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돌아섰다.

켈리 대위의 B-17 이 클라크 비행장 가까이 왔을 때 타이난 항공대 소속 제로기 5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승무원 1명이 전사하고 기체에 불이 붙었다. 켈리 대위는 나머지 승무원에게 탈출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조종석을 지켰다. 부조종사가 탈출한 직후 B-17은 폭발했으며 켈리 대위의 시체는 추락한 잔해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살아남은 B-17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하루나급 또는 야마시로급 전함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며 전함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해상에 멈추었다고 보고했다. 미육군항공대는 전쟁 기간 동안 켈리 대위가 전함 하루나를 격침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실 그때 하루나는 수백km 떨어진 남중국해 건너편에 있었다. 켈리 대위가 공격한 함정은 다나카 지대의 상륙을 엄호하던 경순양함 나토리였으며 그나마 지근탄을 기록했을 뿐 명중시키지 못했다. 


나토리는 좌현 부근 해상에 떨어진 지근탄으로 함체 손상과 함께 전사 7명, 중상 6명 , 경상 16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나토리에 승좌하여 상륙을 지휘하던 제5수뢰전대장 하라 겐자부로 소장은 사령기를 구축함 나가즈키로 옮겨 달았고 나토리는 응급수리를 위해 마공으로 돌아갔다.


대신 나토리 옆에 있던 제19호소해정이 후방 선체에 명중탄을 맞아 기뢰가 유폭되면서 대파되어 좌초했으며 결국 일본해군은 제19호를 포기했다. 제19호소해정의 인명피해는 승조원 120명 중 전사 및 행방불명 72명, 중상 10명에 달했다. 구축함 하루카제와 하타카제가 부상자를 싣고 마공으로 돌아갔다.


켈리 대위에게는 수훈십자장이 추서되었다. 하루나 격침은 오보였지만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불타는 폭격기에서 승무원이 모두 탈출할 때까지 조종석을 지킨 책임감과 희생정신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했다.


B-17 의 공격에 놀란 하라 소장은 곤자가에 병력 상륙이 끝나자 비행장 정비에 필요한 롤러를 비롯한 중장비 하역을 미루고 수송선에게 아파리 앞바다로 퇴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파리 앞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심하여 정상적인 하역이 불가능했으므로 수송선 승조원들은 휘발유가 들어있는 드럼통을 바다에 던졌다. 조류를 따라 해안으로 떠내려가면 해안에서 회수한다는 생각이었다.

수송선들은 13일 오후까지 하역을 마치고 오후 4시 30분에 구축함 후미즈키와 사츠키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오슝으로 돌아갔다.


B-17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곤자가에 무사히 상륙한 다나카 지대의 주력은 아파리로 이동하여 10일 오후 1시 40분에는 그날 아침에 상륙하여 아파리 활주로를 장악하고 있던 2개 중대와 합류했다. 오후 6시에는 다나카 지대의 선두가 아파리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카말라뉴간의 활주로를 점령했으며 곧 제1비행장정비부대가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비행제50전대 주력인 97식전투기 24대가 아파리 비행장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아파리와 카말라뉴간 활주로를 살펴본 비행장정비부대는 침공 전의 정보와는 달리 중폭격기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폭격기를 쓰려면 남쪽으로 80km 떨어진 투게가라오 비행장이 필요했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다나카 지대는 11일 새벽부터 5번 도로를 따라 투게가라오로 남하했다. 투게가라오를 지키던 필리핀군 제11사단 제12연대 제3대대는 개전 이래 계속 폭격을 얻어맞아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게다가 아파리에서 철수한 해들리 중위의 보고를 듣고 10,000 명의 일본군이 진격해 온다고 착각하여 겁에 질렸다. 결국 제3대대는 다나카 지대가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 투게가라오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따라서 다나카 지대는 80km 를 아무런 저항없이 남하하여 12일 오전 5시 30분에 투게가라오 비행장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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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탄 섬 상륙과 아파리 및 비간 상륙부대 발진


일본군은 필리핀의 미국 항공력과 해군력을 제거하기 전에 선견부대를 상륙시켰다. 도쿄시간 12월 7일 저녁에 북부 루손을 향하는 2개 부대가 펑후 제도를, 그리고 루손에서 북쪽으로 240km 떨어진 바탄 섬에 상륙할 부대가 대만 남단의 가오슝을 떠났다. 다음날에는 루손 남동쪽 레가스피에 상륙할 부대가 팔라우 제도를 떠났고 며칠 후에는 민다나오의 중심도시 다바오에 상륙할 부대가 팔라우를 떠났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선견부대의 상륙지역은 바탄 섬, 아파리, 비간, 레가스피, 다바오, 그리고 홀로제도였다. 앞의 4곳은 주력의 상륙을 앞두고 가까운 곳에 비행장을 확보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미국 항공력을 공격하고 상륙한 일본군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레가스피 상륙은 이외에도 루손과 사마르 사이의 샌 베르나디노 해협을 제압하여 미군이 남쪽으로부터 루손에 증원군을 투입하는 것을 막을 것이었다.


다바오와 홀로제도 상륙은 남쪽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얻는다는 목적이 컸다. 더하여 필리핀을 남쪽으로부터 고립시켜 필리핀 수비대의 보급을 끊고 탈출을 저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선견부대는 비교적 소규모로 가장 큰 부대가 연대 규모였으며 가장 작은 부대는 증강된 중대 규모였다.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선견부대의 상륙은 주력의 상륙 예정 지점에서 미군 주력을 끌어내려는 양동 작전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상륙 병력이 적고 호위 함대도 약했으며 상륙 지점 또한 비행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위치였다. 


필리핀에 가장 먼저 상륙한 부대는 루손 북쪽의 바탄 섬에 상륙한 해군육전대 490명과 제24비행장대대였다. 상륙부대는 수송선 2척(하요마루, 쿠마카와마루)에 분승하여 제2근거지대사령관 히로세 수에토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3급습대의 호위를 받았다. 제3급습대는 구축함 야마구모, 제21수뢰정대(치도리, 하츠카리, 마나즈루, 토모즈루), 소해정 2척, 초계정 2척, 특설구잠정 9척, 특설포함 3척으로 이루어져 12월 7일 오후 6시 30분에 가오슝을 출항했다.


해군육전대는 8일 아침 7시에 저항을 받지 않고 바탄 섬에 상륙하여 바스코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어서 제24비행장대대가 상륙하여 비행장을 정비했으며 다음날부터 비행제24 및 제50전대 소속 97식 전투기가 바스코 비행장을 기지로 작전을 시작했다. 바스코 비행장은 규모가 작아서 본격적으로 운용하려면 확장해야 했으나 8일 낮에 실시한 클라크 비행장 공습이 성공하자 확장을 포기했다. 이후 바스코 비행장은 주로 대만과 루손을 오가는 비행기의 중계 기지로 활용되었다.


10일 오전 8시 30분에 제3급습대의 일부가 아파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카미귄 섬을 점령하고 수상기 기지를 만들었다. 일본군의 바탄 섬 상륙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았다. 사실 미군은 바탄 섬 상륙을 몰랐다.


루손 북해안에 있는 아파리는 1941년 당시 인구 26,500명의 항구도시였다. 카가얀 강 하구에 자리잡은 아파리는 북쪽을 제외한 3면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마닐라로 가려면 5번 도로를 따라 벨레테 고개를 통하여 남쪽으로 440km 를 달리든지 좁은 해안평야에 만들어진 서해안 도로를 따라 600km 를 달려야 했다. 따라서 아파리에 상륙한 부대가 남하하여 마닐라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남일로코스 주의 주도인 비간은 바닐라에서 3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50km 떨어진 루손 서해안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코르디예라 산맥이 카가얀 하곡과 좁은 해안평야를 가르고 있었으며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는 루손의 5대강 중 하나인 아브라 강의 하구가 있었다. 비간의 외항인 판단은 아브라 강 하구의 북안에 있었으며 전천후 포장도로로 비간과 이어져 있었다.


(루손 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6-2 P.101)


아파리와 비간은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의 북부루손군 구역 내에 있었다. 필리핀군 사단 3개, 필리핀 스카우트 기병연대와 보병대대 1개, 야포 1개 포대, 그리고 지원부대로 이루어진 북부루손군은 1,000 x 200km 넓이의 지역을 지켜야 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링가옌 만 이북의 넓은 지역에 윌리엄 브루거 대령의 필리핀군 제11사단만 배치했다.


제11사단(PA)은 다른 필리핀군 사단과 마찬가지로 9월에 동원이 시작되었으나 전쟁이 터졌을 때 보병연대의 병력은 정원인 1,500명의 2/3에 불과했다. 포병대는 합류하지 않았으며 지원부대는 편성되었으나 훈련이 부족했다. 수송수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모든 장비가 부족했다. 보병의 개인 훈련은 부족했으며 부대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1개 연대만이 중대 이상 규모로 훈련해 본 경험이 있었다. 


제11사단(PA) 주력은 링가옌 만에서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에 걸쳐 있었다. 루손에는 산 페르난도라는 지명이 2개다.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는 링가옌 만 북쪽에 있고 팜팡가 주의 산 페르난도는 바탄반도 입구에 있다.


카가얀 하곡 전체를 지키는 것은 1개 대대(제11사단 제12보병연대 제3대대)뿐이었다. 대대본부는 투게가라오에 있었으며 아파리에 1개 중대가 있었고 비간에는 병력이 없었다.


북부 루손에 상륙할 일본군 부대는 제48사단의 대만보병제2연대 소속이었다. 아파리에 상륙할 부대는 약 2,000명으로 연대장 다나카 토루 대좌의 이름을 따서 다나카 지대라고 불렀다. 다나카 지대는 6척의 수송선에 분승하여 12월 7일 오후 4시에 해군제1급습대의 호위 아래 펑후 제도의 마궁을 출항했다. 다나카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만보병제2연대본부

대만보병제2연대 제2대대 및 제1대대(2개 중대 감편)

산포병제48연대제1대대(1개 중대 감편)

공병제48연대의 1개 중대(2개 소대 감편)

제1비행장정비부대

독립공병제10연대(1개 중대 감편)

독립공병제21연대의 1개 소대

제1선박포병연대 일부


제5수뢰전대사령관 하라 겐자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1급습대는 경순양함 나토리, 제22구축대(사츠키, 미나즈키, 후미즈키, 나가즈키), 제5구축대의 1개 소대(하루카제, 하타카제), 소해정 3척(15호, 16호, 19호), 구잠정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간에 상륙할 부대 또한 약 2,000명으로 대만보병제2연대제3대대장 가노 젠키치 소좌의 이름을 따서 가노 지대라고 불렀다. 가노 지대는 6척의 수송선에 분승하여 12월 7일 오후 5시 30분에 해군제2급습대의 호위아래 펑후 제도의 마궁을 출항했다. 가노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만보병제2연대 제3대대및 제1대대(2개 중대 감편)
산포병제48연대의 1개 중대
야전고사포제45대대의 1개 중대
공병제48연대의 2개 소대
제2비행장정비부대
독립공병제10연대의 1개 중대
제2선박포병연대 일부

제4수뢰전대사령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2급습대는 경순양함 나카, 제2구축대(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제9구축대( 아사쿠모, 나츠쿠모, 미네쿠모), 소해정 6척(7호, 8호, 9호, 10호, 17호, 18호), 구잠정 9척, 어선 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부 루손 상륙을 중시한 일본해군은 호위함정과는 별도로 제3함대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이끄는 중순양함 2척(아시가라, 마야), 경순양함 쿠마, 구축함 2척(아사카제, 마츠카제), 특설수상기모함 2척(산요마루, 사누키마루)을 내보내어 상륙을 지원했다.

아파리와 비간 상륙부대가 펑후 제도의 마궁을 출항하자 곧 비행제24 및 제50전대 소속의 97식 전투기가 날아와 선단 상공을 엄호했다. 9일과 10일에도 제5비행집단의 전투기가 선단 상공을 엄호했다. 10일 아침에 다나카 지대는 아파리에, 가노 지대는 비간에 상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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