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구원노력
진주만 기습은 유럽전쟁에 쏠려있던 미국인의 관심을 태평양 및 극동지역으로 끌어당겼다. 미국인 사이에 필리핀의 미군을 도와야한다는 공감대가 생겼고 맥아더 장군의 이름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개전과 동시에 태평양함대 주력이 치명타를 입자 전쟁부와 해군부는 필리핀 함락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필리핀에 대한 구원노력을 중단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미국민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전쟁부, 그리고 참모총장까지 모두 필리핀 국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를 느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순간 중순양함 펜사콜라와 초계함 나이애가라가 호위하는 수송선 7척(홀브룩, 리퍼블릭, 메그스, 블룸폰테인, 어드미럴할스테드, 파머, 쇼몽)이 남태평양의 피닉스 제도 부근을 항진하고 있었다. 펜사콜라 호송선단으로 불린 이 선단은 75mm 야포 20문을 보유한 포병여단, 제7중폭격비행전대의 지상요원, P-40 전투기 18대, A-24 경폭격기 52대, 50구경 철갑탄 및 예광탄 500,000발, 37mm 대공포탄 9,600발, 500파운드(227kg)폭탄 2,000발, 300파운드(136kg) 폭탄 3,000발, 그리고 약간의 차량과 장비를 싣고 있었다. 수송 중인 병력은 4,600명이었다. 진주만 기습 직후 호송선단은 일단 피지 제도의 수바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CA-24 펜사콜라.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USS_Pensacola_(CA-24)
펜사콜라 호송선단이 수바로 향하는 동안 선단의 최종 행선지를 두고 미군수뇌부는 갈팡질팡했다. 처음에 전쟁부와 해군부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하와이로 보내기로 합의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극동으로 보내길 원했다. 결국 펜사콜라 호송선단은 12월 12일에 호주의 브리즈번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22일에 도착했다.
맥아더 장군은 12월 13일에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에게 수상함을 파견하여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브리즈번에서 마닐라까지 호송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아시아함대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위하여 함정을 할애할 여력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브레러튼 소장의 건의에 따라 다음날인 14일에 다시 증원을 요청했다. 그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실린 P-40 전투기 18대와 A-24 경폭격기 52대에 추가하여 전투기 200대와 급강하폭격기 50대를 항공모함을 이용하여 필리핀에 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펜사콜라 호송선단에 실린 50구경 기관총탄을 마닐라로 수송하기 위하여 팬아메리칸사의 비행기를 호주와 마닐라 사이에 왕복시킬 것을 권고했다.
미국과 영국은 1941년 1월에서 3월에 걸친 회의를 통하여 독일우선 원칙에 입각한 레인보우 계획에 합의했다. 여기에 따르면 태평양 지역에서는 수세를 취하되 제한된 공세는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치명상을 입으면서 미해군은 레인보우 계획에 명시된 제한된 공세도 취할 수 없었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2월 8일에 열린 합동위원회에서 해군은 진주만 기습으로 인하여 중부태평양 공세를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틀 후인 12월 10일에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에게 마닐라에서 철수할 권한을 부여했다.
해군은 필리핀 구원에 소극적이었으며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필리핀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레이 반도를 지키는 것이었다. 스타크 제독이 생각한 방어선은 말레이반도 - 수마트라 - 자바 - 호주를 잇는 선이었다. 따라서 그는 펜사콜라 호송선단이 마닐라로 가는데 부정적이었으며 호송선단에 실린 비행기, 무기, 탄약 및 병력은 호주방어에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시아함대도 필리핀을 지키느라 희생하지 말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한 채 후퇴하여 호주방어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군과 달리 육군은 필리핀 구원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육군도 필리핀의 상황이 절망적이며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지킬 수 있는 지점에 집중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구원문제를 순전히 군사적인 면에서만 판단할 수는 없었다. 스팀슨 전쟁장관은 만약 미국이 필리핀을 외면한다면 말레이반도에서 싸우고 있는 영국군과 호주군, 곧 일본군과 싸워야 할 네덜란드군, 그리고 4년 이상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소련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참전과 동시에 동맹국에게 불신을 받는다면 연합군 내에서 미국의 위신과 발언권이 크게 떨어질 수 있었는데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스팀슨 전쟁장관과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필리핀 구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이유였으며 루스벨트 대통령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와 달리 필리핀 방어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일본군을 제압하지 못해도 일본군의 전선이 이미 지나치게 늘어져 있으니 미해군이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방어가 약해진 일본본토를 공습함으로써 필리핀의 일본군을 본토로 불러들이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미해군은 1942년 4월 18일에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도쿄를 공습했지만 필리핀과는 상관없는 작전이었다.
필리핀 방어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맥아더 장군은 펜사콜라 호송선단을 호위해달라는 자신의 요청을 하트 제독이 거부하자 분노하여 워싱턴에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를 읽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을 불러 따졌다.
대통령이 나서자 해군도 성의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송함 포크와 쿨리지가 호주를 향해 떠났으며 1월 중에 2척이 뒤따랐다. 이로써 호주에 230대의 전투기가 파견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해군장관의 압력을 받은 스타크 제독은 필리핀 방어를 위하여 육군에게 가급적 협조하라고 하트 제독에게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하트 제독은 가망없는 전선에서 최대한 많은 함정을 살려서 후퇴시킨다는 군사적 타당성과 희생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어에 협조하라는 상부의 압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전쟁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지원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느꼈다. 그가 보기로 필리핀은 이번 전쟁의 핵심이며 따라서 미국이 생산하는 모든 항공기를 포함한 미국의 자원을 대부분 필리핀에 투입해야 마땅했다. 필리핀의 중요성을 바라보는 맥아더 장군과 워싱턴의 시각에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었다.
절망적인 군사적 상황을 무릅쓰고 진행되었던 백악관과 전쟁부의 필리핀 구원노력은 처음부터 결실을 맺지 못할 운명이었다. 1941년 12월 24일에서 1942년 1월 14일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미국과 영국 사이의 아케이디아 회담에서 필리핀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영국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큰 피해를 입자 미국이 이전의 약속을 어기고 태평양에 집중할까봐 두려워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을 안심시켜야 했다. 회담결과 독일우선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이로써 미국의 기본전략을 바꾸어 필리핀을 살리려던 맥아더 장군의 노력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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