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리핀


필리핀은 7,6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만 남쪽으로부터 보르네오 북쪽까지 약 2,400km 에 걸쳐 있다.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80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필리핀은 일본, 중국,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잇는 지점을 점유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과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연결하는 항로를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을 기지로 하는 장거리 폭격기는 일본 및 중국해안을 폭격할 수 있으며 해군함정 또한 금방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필리핀.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1/Philippine_Sea_location.jpg)


필리핀은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마닐라와 호놀룰루 사이의 거리는 약 8,500km 이며 샌프란시스코와의 거리는 11,000km 에 달한다. 반면에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이 점유하고 있던 대만 남부 가오슝까지의 거리는 900km 에 지나지 않으며 도쿄까지의 거리도 3,000km 남짓하다. 홍콩까지의 거리는 약 1,100km, 싱가포르까지의 거리는 약 2,400km이다. 1920년대 이후로 필리핀과 미본토 사이에는 일본의 위임통치령인 마리아나 제도, 마셜 제도 및 캐롤라인 제도가 가로막고 있어서 전쟁시에는 적도 이남을 통하여 항해해야 했다.


필리핀의 육지 면적은 약 300,000㎢ 이다. 7,600개가 넘는 섬들 중 면적이 1 제곱마일(약 2.59㎢) 이 넘는 섬은 약 460개 뿐이며 1,000 제곱마일을 넘는 섬은 11개뿐이다.이 11개 섬의 면적이 전체 면적의 94% 를 차지한다. 가장 크고 중요한 섬은 북쪽의 루손 섬으로 면적이 109,960 ㎢ 이며 수도인 마닐라가 있다. 두번째로 큰 섬은 남쪽의 민다나오로서 면적이 104,630㎢ 이다. 민다나오 북쪽을 비사야라고 부르는데 중요한 섬은 사마르, 네그로스, 파나이, 레이테, 세부 등이다.

기후는 열대해양성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27도 정도이다. 6월에서 9월까지는 남서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동해안에 상륙하기 쉽다. 반면 10월에서 4월까지는 북동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남중국해에 면한 서해안에 상륙하기 쉽다.


(필리핀의 섬들. https://en.wikipedia.org/wiki/Outline_of_the_Philippines)


필리핀인은 말레이계로 1941년 당시 17,000,000 명 정도였다.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중부 루손과 세부였으며 가장 큰 도시는 마닐라로서 인구는 약 684,000명이었다.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중국인으로 약 117,000명이었다. 일본인은 30,000명 정도였는데 20,000명 이상이 남쪽 민다나오의 중심지인 다바오에 모여 살았다. 미국 민간인은 약 9,000명으로 대부분 루손에 살았다.


필리핀에서 쓰이는 사투리의 숫자는 60개 이상에 달했다. 미국이 40년간 통치하면서 영어를 열심히 보급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현재 영어 사용 인구는 27%에 불과했으며 스페인어 사용인구는 3%였다. 1937년에 중부 루손에서 많이 쓰는 타갈로그어를 국어로 정했으나 실제로는 비사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2배 정도 많았다. 이들 사투리들은 비슷한 점이 많았으나 다른 섬의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사투리 문제는 전국적으로 징병을 실시할 때 문제가 되었다. 어떤 섬에서 징병된 병사가 장교가 말하는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알아듣지 못하거나 다른 섬에서 징병된 병사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요 생산물은 주식인 쌀을 비롯하여 코프라, 사탕수수, 삼, 담배, 옥수수 등이었다. 산지에서는 구리, 금, 은, 철, 크롬, 망간, 납 등이 산출되었으나 구리를 제외하면 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전 국토의 60% 정도가 숲으로 덮여 있었는데 대부분 견목이었다. 마닐라 만과 술루 제도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혔으며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는 수산업이 중요한 산업이었다. 미국의 오랜 통치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은 거의 없었으며 기껏해야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다.


섬 사이나 해안의 교통을 주로 선박이 담당했기 때문에 도로나 철도의 필요성이 적었다. 1940년 현재 도로 연장은 2,300km 정도였는데 절반 가까운 1,130km 가 루손에 몰려 있었다. 자동차 숫자는 50,000 대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필리핀인들은 주로 물소가 끄는 수레에 짐을 싣거나 타고 다녔다. 철도 회사는 2개로서 국영 마닐라 철도회사가 루손에 400km, 미국인이 소유한 필리핀 철도회사가 파나이와 세부에 950km 의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는 협궤였다.


주요 도시는 전화 및 전보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이 소유한 필리핀 장거리전화회사가 마닐라와 루손의 주요 도시 및 파나이, 네그로스, 세부, 민다나오를 연결했다. 40개에 달하는 지방 정부들 또한 자체의 전화망으로 지역 내의 소도시들을 연결했다. 마닐라는 괌, 상하이 및 홍콩과 해저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4개의 국제라디오방송국이 바깥 세상과 소통했다.


북부 루손에는 북해안부터 남쪽으로 190km 에 걸쳐 평균 폭이 60km 인 평야가 북해안을 향하여 흐르는 카가얀 강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좌우는 산지로 막혀 있다. 중부 루손에도 마닐라 만부터 링가옌 만까지 190km 에 걸쳐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며 대규모 기동전에 적합하다. 북부 및 중부 루손의 해안에는 좁은 해안평야가 있으며 제한적인 기동만이 가능하다. 남부 루손에는 평지와 산지가 섞여 있으며 평탄한 해안을 가진 수많은 만이 있어 상륙작전에 적합하다.


루손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는 마닐라로 통하는 1,3,5번 도로이다. 2차선으로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며 수많은 지선 도로를 통해 마닐라와 루손의 다른 지역을 연결한다. 지선 도로는 대부분 1차선이었다.


(마닐라 만. 지도 출처 :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WAR IN THE PACIFIC, The Fall of the Philippines 부속 지도)


마닐라 만은 극동 제일의 양항이었다. 20km 폭을 가진 만의 입구를 통과하면 너비는 50km 로 늘어난다. 입구를 마주보고 50km 떨어진 곳에 마닐라가 있다. 북쪽 입구에 있는 마리벨레스는 찾기 쉽고 좋은 정박지이며 마닐라 남쪽의 카비테 또한 훌륭한 정박지이다. 마닐라 만의 서쪽은 바탄 반도였는데 입구를 잠발레스 산맥이 막고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코레히도르 섬.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index.html P.471)


마닐라 만에는 몇개의 작은 섬이 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섬은 코레히도르로서 입구의 북쪽 끝에서 3.5km 떨어져 있으며 카발로 섬과 함께 마닐라 만의 입구를 북부와 남부 수로로 나눈다. 올챙이처럼 생긴 코레히도르 섬의 길이는 6.3k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2.3km 정도 된다. 코레히도르 섬의 꼬리에서 남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는 카발로 섬이 있는데 크기는 코레히도르 섬의 1/3 정도이다. 입구 남쪽에서 3.4km 떨어진 곳에는 높이 100 - 200m 의 바위섬인 엘 프라일이 있고 입구 남쪽 바로 바깥에는 카라바오 섬이 있다. 이 섬들은 필리핀 방어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리핀에는 67,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증거가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말레이 폴리네시아 어족이 와서 선주민인 네그리토인들을 산악지방으로 쫓아내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들어가기 전까지 통일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다. 서기 300년경부터 인도힌두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국과 자바의 마자파힛 왕국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중국 또한 주로 교역을 통하여 필리핀에 영향을 끼쳤으며 900년 경에는 중국과의 교역으로 부를 쌓은 톤도 왕국이 마닐라 부근에 출현했다. 14세기 후반부터는 이슬람교가 남부 지방에 영향을 끼쳤고 1450년 경에는 술루 제도에 이슬람교를 믿는 술루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도 루손 북해안의 아파리를 거점으로 필리핀과 교역했다.

유럽인으로 필리핀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1521년에 도착한 마젤란이었다. 그는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왕에게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했다. 마젤란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필리핀 남부를 공격하다가 반격을 받아 살해당하고 부하들은 필리핀을 떠났다.
1543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러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가 필리핀에 도착하여 사마르 섬과 레이테 섬에 필리페2세의 이름을 따서 '필리페의 섬'(Las Isla Filifinas)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필리핀의 어원이 되었다.
1565년에 스페인 사람인 미겔 로페스 드 레가스피가 5척의 배에 500명의 병력을 포함한 일단의 사람들을 데리고 세부 섬에 최초로 스페인 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은 1571년에 마닐라 왕국과 톤도 왕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도전을 물리치고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스페인도 필리핀 남부의 술루 왕국은 1898년에 미국에 필리핀을 잃을 때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필리핀에는 동양과 서양이 뒤섞인 독특한 관습과 제도가 자리잡았다. 이슬람 세력의 침투와 더불어 남쪽에는 이슬람적인 관습이 자리잡았다. 중국의 영향으로 교역과 상업이 자리잡았으며 중국인이 이 분야를 장악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지배를 거치면서 천주교, 유럽식 법체계, 그리고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말이 되자 스페인의 통치는 원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필리핀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미국이 미서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필리핀의 새 지배자가 되었다. 필리핀을 얻으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스페인에 대항하던 필리핀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제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과 맞섰다. 그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선출한 후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최대 12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01년에 아기날도를 체포하여 미국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선언을 이끌어 내면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다음해인 1902년에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완전히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3,500명과 20만명에 달하는 필리핀인이 희생되었다. 이제 미국은 1902년 7월에 통과된 필리핀 조직법에 따라 필리핀을 통치하는 한편 스페인이 제압하지 못한 술루 왕국을 공격하여 1915년에 멸망시킴으로서 필리핀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곧 필리핀을 식민지로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필리핀 조직법을 대신할 필리핀 자치법(존스법)이 1916년에 의회를 통과했다. 기존의 필리핀 조직법이 필리핀 의회의 하원만 선거로 선출하고 상원과 총독은 미국이 지명한데 비하여 존스법은 상원도 선거로 뽑음으로서 자치권을 늘리는 내용이었다. 또한 총독을 제외한 행정부 관료도 대부분 필리핀인을 뽑아 현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존스법에 따라 자치권이 늘어나면서 필리핀인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타이딩스-맥더피 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10년의 유예 기간을 거친 이후 필리핀을 완전히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35년 5월에 미국 헌법을 본딴 필리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9월에는 자유 선거를 치러 마누엘 케손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필리핀 자치령(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이 성립되었다. 필리핀 자치령과 미국이 해군기지 사용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인 결과 필리핀 독립은 2년 미루어져 1946년에 독립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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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후기


1942년 2월 15일 오후 6시 10분에 퍼시발 중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직후 일본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우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하여 일본군에게 2월 16일 날이 밝을 때까지 부대 이동을 금했다. 일본항공부대는 영국군의 해상탈출에 대비하여 해상을 감시했다.

천황은 다음날인 2월 16일에 시종무관을 보내어 야마시타 중장을 치하했다. 

16일 아침이 되자 일본제2야전헌병대가 싱가포르 시내에 들어가 치안확보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군 전투부대는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주둔한 자리에서 휴식, 재편성 및 정비를 실시했다. 그 동안 시내에서는 영국과 일본위원들이 합동으로 중요 지점을 접수하고 별다른 충돌이나 불상사없이 영국군의 무장해제를 완료했다.

정부대본영연락회의 결과에 따라 2월 17일에 싱가포르는 소남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2월 18일부터 23일에 걸쳐 중대 및 대대 규모의 일본군이 싱가포르 주변의 작은 섬들에 상륙하여 주둔군의 무장 해제를 실시했다.

야마시타 중장은 2월 21일에 휘하 부대의 점령 지역을 확정했다. 제5사단 보병제9여단장인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이 싱가포르 경비대장이 되어 싱가포르 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가와무라 소장은 제2야전헌병대를 주축으로 보병제11 및 제41연대의 일부 병력을 지휘했다.

근위사단은 싱가포르 시를 제외한 싱가포르 섬의 치안을 맡았다. 제18사단은 조호르로 이동하여 치안을 담당했고, 제5사단은 싱가포르와 조호르를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의 치안을 맡았다.

비전투원을 보호하겠다던 야마시타 중장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 점령 직후인 1942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에 걸쳐 헌병대 주도로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 전역에서 중경 정부에 호의적인 중국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싱가포르 초대 수상 이광요의 주장에 따르면 약 70,000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싱가포르 함락은 일대 재앙이었다.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복은 영연방과 연합진영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영연방 국민 사이에 싱가포르는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인도를 지키는 보루로서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났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상실로 영국해군은 태평양에서 밀려났다. 동양함대는 재건되었으나 1942년 4월에 일본해군이 인도양에 진출하자 다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밀려났다. 이로써 동부 인도양의 제해권이 일본에게 떨어졌으며 실론 섬과 인도 동해안이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말레이 점령으로 일본의 버마 침공이 쉬워졌다. 침공군의 남쪽 측면이 안전해졌으며 랑군을 통하여 해상보급이 가능해졌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싱가포르가 자국 안보의 주춧돌이라는 인식 하에 싱가포르의 건재를 바탕으로 방어 계획을 세웠던 두 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영국에 대한 신뢰를 잃은 두 나라는 이제 미국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급속도로 친미 경향을 띄게 된다.

중국 또한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중국 정부와 국민은 이제 강력한 서방연합군이 일본을 무찌를 것이고 따라서 1937년부터 4년 이상 이어지던 지리한 전쟁도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불과 3달 만에 말레이,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무너지고 이어서 버마까지 함락되면서 중국이 고립되어 버리자 중국인들의 환호는 환멸과 냉소로 바뀌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20개 사단이 넘는 일본육군의 주력을 상대로 4년 이상 항전하고 있는 자신들과 겨우 3개 사단을 상대하면서 불과 70일 만에 말레이를 상실한 영국의 무능함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경제적인 의미도 컸다. 일본은 말레이 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함으로써 주석, 고무, 석유 등 귀중한 전략물자를 획득하여 전쟁 지속 능력이 크게 늘어났다.


싱가포르 함락의 가장 큰 의미는 영국을 위시한 유럽제국의 위신이 실추된 것이다. 일본군이 불과 3개월만에 동남아시아를 휩쓰는 걸 지켜본 아시아인은 백인에게 품고있던 오랜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자각은 4년후 일본이 패배하여 물러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오랜 식민 지배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말레이 전역에서 연합군의 병력 손실은 영국군 38,496명, 호주군 18,490명, 인도군 67,340명 , 말레이 의용대 14,382 명 등 총 138,708명으로 영국공식전사는 이들 중 13만명 이상이 포로라고 기술했다. 포로 중 장성급 주요 지휘관은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 요새사령관 프랭크 시몬스 소장, 제18보병사단장 벡위스-스미스 소장, 제11인도보병사단장 베르톨트 키 준장, 제8호주사단장 세실 캘러헌 준장 등이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싱가포르 상륙 이전까지 말레이 반도 전투에서 일본군이 확인한 영국군 시체는 약 7,000구이다.

제25군 정보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의 진술에 따르면 포로는 약 11만명으로 영국공식전사의 기술과 2만명 정도 차이가 나는데 대부분은 탈영병으로 그냥 인파에 섞여 사라진 경우이다. 일부는 싱가포르 함락을 전후하여 바다로 탈출하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인데 정확한 숫자는 불명이다. 10만이 넘는 포로들 중 많은 수가 버마를 비롯한 각지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혹사당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영국군 공식전사에 따르면 싱가포르 상륙을 앞둔 1942년 2월 8일 현재 일본군의 전력은 전투병력 67,660명, 지원 병력 33,000명, 그리고 육군항공대 10,000 명으로 110,660명이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말레이 전역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전사 3,507명, 부상 6,150명으로 합계 9,657명이다.


노획품도 상당했다. 1942년 2월 말 현재 일본군의 노획품은 야포 약 300문, 대공포 약 100문, 요새포 54문, 대전차포 108문, 박격포 180문, 중기관총 2,500정 이상, 대전차총 63정, 기관단총 약 800정, 소총 약 60,000정, 소총탄 약 3361만발, 기관차 및 화차 약 1,000대, 자동차 약 10,000대, 전차 및 장갑차 200대, 군용전화기 600개, 비행기 10대, 기타 탄약, 연료, 피복, 양식 등 다수이다.


소남도로 이름이 바뀐 싱가포르는 1942년부터 종전까지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는 엄격한 지배를 받았다. 싱가포르는 점령 기간 동안 일본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동남아시아 지배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그 결과 1945년 들어서는 연합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일본이 항복한 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나 말레이 반도는 1957년에 말레이 연방으로 독립했다. 싱가포르는 영국령으로 남았다가 1963년에 말레이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독립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2년 후인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을 탈퇴함으로써 독립국가가 되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1942년 7월 17일에 만주국의 동부 지역을 책임진 제1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싱가포르를 떠났다. 1943년 2월에 대장으로 승진한 야마시타 장군은 1944년 9월 25일에 미군의 침공으로부터 필리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제14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창이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42년 8월에 창이 수용소를 떠나 대만을 거쳐 만주국 지안에서 웨인라이트 등 다른 연합군 고위 포로들과 함께 종전시까지 포로 생활을 했다. 종전 이후 석방된 그는 미주리 함상에서 거행된 항복조인식에 참석했다. 이후 필리핀 바기오로 건너가 자신을 패배시켰던 야마시타 장군의 항복조인식에 참석했고 이어서 싱가포르의 부킷티마에서 열린 싱가포르 주재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에도 참석했다. 1945년 9월 말에 영국으로 귀국한 퍼시발 장군은 1946년에 퇴역했으며 1966년 1월 31일에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45년 9월 2일에 미주리 함상에서 열린 항복조인식에서 맥아더 장군의 서명 순간을 지켜보는 퍼시발 중장. 퍼시발의 오른쪽은 필리핀에서 포로가 된 미육군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Percival)


- 참고 도서 및 웹사이트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Major-General Woodburn Hirby, Naval & Military Press, 1968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Lionel Wigmore, Canberra Australian War Memorial, 1957

<マレー進攻作戦 (戦史叢書)>防衛庁防衛研修所戦史室 , 朝雲新聞社, 1966

<The Rise And Fall Of The Japanese Imperial Naval Air Service> Peter J. Edwards, Pen & Sword Books, 2010

<The Organization and Order of Battle of Militaries in World War 2, Vol.4 - Japan> Charles D. Pettibone, Trafford Publishing, 2007

<Rising Sun, Falling Skies> Jeffrey Cox, Osprey, 2014

<The Imperial Japanese Navy(1941-1945)> Paul S. Dull, Naval Ianstitute Press, 1978


<타임라이프북스 - 회오리치는 일장기> 한국일보-타임라이프사, 1981년

<대동아전쟁비사-제2권 말레이, 버어마 편> 한국출판사, 1971년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마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실록대하소설 태평양전쟁 1 -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해전> 이호원 지음, 한림출판사, 1975년

<휴맨카인즈 승리와 패배 야마시타 병단> 베리 피트, 백조출판사, 1982년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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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총평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은 승전국이었으나 인명과 경제력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영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의 군사력을 묶어놓고 미국의 협조를 얻어 해군군축조약으로 일본의 해군력 확장을 저지하면서 군축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군수공장은 민수용 산업으로 전환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숙련공들이 공장을 떠났다.

영국군은 1932년의 상하이 사변과 뒤이은 히틀러의 등장을 계기로 재군비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영국 정부는 망설였다. 처칠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이 본격적으로 재군비를 시작한 것은 1938년이 되어서였다. 민수용 공장을 군수공장으로 되돌리는 것은 몇 년에 걸친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나마 힘들게 생산한 장비 대부분을 1940년 6월 초의 됭케르크 철수에서 대부분 상실했고 이후 영국본토는 독일의 침공 위협에 시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본토가 침공 위협에서 벗어나고 육군이 재건되었으나 이번에는 그리스에서 참패를 당한데 이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과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다. 따라서 영국에게는 1941년 12월 초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머나먼 말레이까지 충분한 장비와 잘 훈련된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고 방어준비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할 여력이 없었다.


말레이 현지에서는 육해공군 및 민간행정기구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아 그나마 주어지는 빈약한 자원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에는 말레이의 육해공군 모두와 민간행정기구까지 완전하게 장악하는 1명의 총사령관을 두어 방어준비를 총괄케 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군에 대한 근거없는 경시 풍조가 있었다. 주로 중국 측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보내온 이러한 잘못된 정보는 인종차별적인 기존 관념과 맞물려 사실인 양 여겨졌으며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보내온 사람들은 친일파 내지는 패배주의자로 몰려 그들의 정보는 무시당했다.

잘못된 정보에 홀린 영국은 일본이 허약한 군대를 가지고 말레이를 침공할 확률이 적다고 보았으며 설사 침공하더라도 막아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침공을 받을 당시 영국군은 스스로가 판단했던 적정 숫자의 1/3밖에 안되는 낡은 항공기와 훈련이 부족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운명은 이때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격군인 일본제25군의 상태는 양호했다. 일본군은 말레이에 심어둔 간첩을 통하여 영국군 수비대의 규모와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격군으로 중국에서 실전경험이 있는 부대를 골랐으며 정글전투를 비롯하여 말레이 전투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여 추가 훈련을 실시했다. 사기 또한 높았다. 총사령관으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무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일본군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제25군은 영국공군의 4배에 달하는 신형기와 유능한 조종사를 보유한 육군항공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해군항공대는 해상보급선을 위협하는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단번에 제거하는 실력을 과시했다. 결론적으로 말레이 전역의 일본군은 비록 숫적으로는 다소 열세였으나 실제 전력은 영국군보다 강했다.


1941년 4월에 말레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퍼시발 중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의 지원을 받아 훈련과 방어진지 건설에 노력했으나 전쟁이 터지기 전에 방어 준비를 마치기에는 인원, 자금, 권한 그리고 시간이 부족했다.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Percival)


말레이 전역은 시작부터 파멸적이었다. 공군은 개전과 동시에 제압되어 일본군이 24시간 내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육군의 경우 투우사 작전이 문제였다. 투우사 작전은 개전과 동시에 태국으로 진격하여 싱고라를 점령함으로써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작전이었다. 제대로 실행된다면 주요 보급항인 싱고라 사용을 거부하여 말레이 전역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작전은 애당초 성공하기 힘들었다. 성공의 관건은 일본군이 싱고라에 상륙하기 24시간 이전에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 태국 국경을 넘는 것이었는데 태국의 중립을 존중하면서 국경을 넘을 타이밍을 잡기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1941년 12월 6일에 일본선단을 발견했을 때가 투우사 작전을 발동할 마지막 기회였으나 국경을 침범하면 일본 측으로 참전하겠다는 태국의 기세에 눌려 영국은 투우사 작전을 발동하지 못했다. 결국 태국의 중립을 무시할 배짱이 없는 한 투우사 작전은 세우지 말았어야 할 계획이었다.

투우사 작전의 존재와 발동 실패는 초기 전투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북부 말레이에 전개한 부대는 방어보다 이동에 적합하게 편성되어 열차와 트럭에 탑승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가뜩이나 부족한 자금은 방어선을 강화하기보다 이동 수단과 연료 등의 보급품을 확보하는데 돌려졌다. 병사들은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방어보다는 이동과 공격 훈련을 받았다. 개전과 동시에 공격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병사들은 석연찮은 지연 후에 공격이 취소되고 폭우로 참호에 물이 들어찬 부실한 방어선에서 방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기가 꺾였다.


일본군이 싱고라에 상륙했다는 소식은 즉시 보고되어야 했으며 이에 따라 즉각 투우사 작전의 취소와 방어태세 전환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정보가 늦게 전달되고 수뇌부가 허둥대면서 8일 오후 1시 30분에야 투우사 작전의 취소와 함께 방어 명령이 떨어졌다. 따라서 일본군은 침공 초기에 천금같은 10시간을 얻었다. 이 지연이 결국 지트라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경우 상황은 단순하다. 영국은 다분히 정치적인 제스처로서 일본이 겁먹기를 바라고 신형전함을 포함한 2척의 주력함을 싱가포르로 파견했다. 포커 게임에서 허풍을 친 셈이었는데 영국의 예상과 달리 스스로가 쥔 패에 자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허풍을 그대로 받아버렸다. 결국 패를 열어야 할 상황이 되었고 결과는 일본해군항공대의 승리였다.

만일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머무를 수는 없었을 것이며 말레이 전투에 큰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2척의 주력함이 자바로 탈출하여 네덜란드 해군 및 미해군 아시아 함대와 합류하였다면 일본군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침공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1941년 12월 13일이 되자 벌써 말레이 전역은 패배의 기운이 높아졌다. 말레이 전투의 승패는 이제 싱가포르로 얼마나 많은 증원군이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에 달렸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증원군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북부 말레이에서 2달 이상 일본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제3군단은 이 임무를 위하여 제9사단을 동원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말레이 상공의 제공권과 주변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요충지 조호르를 포함한 말레이 동해안에 제2의 상륙을 감행할 수 있었으므로 제9사단을 뺄 수 없었다. 따라서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지연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 http://www.unithistories.com/officers/indianarmy_officers_h01.html)


이런 식의 지연 작전에는 미리 만들어진 방어선이 큰 역할을 한다. 만일 간선도로를 따라 요충지마다 대전차 장애물을 포함한 방어선이 미리 건설되어 있었다면 지친 여단이 도착하여 재편성하고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방어선에 의지하여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동안 버티다가 적이 시간을 들여 전력을 정비한 후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려 하면 다시 후퇴하여 다음 방어선에서 버티는 식으로 차츰 적의 힘을  빼면서 효과적으로 시간을 끌어 증원군이 도착하고 전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전쟁 전 몇 달간 공병대와 민간 기술자의 합작으로 간선도로를 따라 축차적인 철수에 필요한 방어선을 건설할 시간이 있었으나 아까운 시간을 활용하지 못했다. 미리 만들어진 후방 방어선이 없는 상황에서 히스 중장은 보충없이 소모되기만 하는 제11사단의 전멸을 막기 위하여 계속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사정없이 추격했다. 접전 지역에서 병력의 우위를 누리고 있던 일본군은 선발 부대가 지치면 뒤따르던 부대를 초월시켜 전진시키는 방법으로 싱싱한 병력을 계속 공세에 투입하여 주도권과 전진 속도를 유지했다. 보병의 체력 소모를 막고 진격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민간에서 대량의 자전거를 징발하여 보급했다.

제25군은 대규모 공병대를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공병대는 영국군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부서진 다리를 수리하여 빠른 진격을 뒷받침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전쟁 전에 입수한 정보를 통하여 다리의 특성과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간에 쫓긴 영국군이 다리만 파괴하고 수리용 자재를 파괴하지  않은 것도 큰 이유였다. 일본군은 전쟁 전의 정보 수집을 통하여 다리 부근에 보수용 목재를 쌓아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영국군과 달리 민간인 동원에 거리낌이 없던 일본군은 필요하면 주변 마을에서 민간인들을 끌고와서 다리 수리에 투입했다. 일본공병대는 싱고라 상륙에서 조호르바루 점령까지 55일 동안 약 250개의 다리를 수리했다.

일본군은 마지막으로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히면 주정을 타고 바다를 통하여 우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11사단은 가끔씩 전투를 치르면서 끝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휴식이나 보충 및 재편성의 기회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후퇴 속에서 병사들은 지쳤고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사기 저하가 슬림강 참패의 일부 원인이었다.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마친 군대라면 후퇴를 하는 도중이라도 어떤 시점에 큰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끝까지 싸울 기회를 주는 것이 끝없는 후퇴보다 사기 유지에는 오히려 낫다.


개전 이후 싱가포르 증원 계획은 제3군단이 최소한 2달 이상 북부 말레이에서 버텨준다는 가정 아래 세워졌다. 그러나 개전 5주일 만에 제3군단은 480km 를 후퇴하여 중부 말레이의 요충지 쿠알라룸푸르를 잃었다. 이제 조호르까지의 후퇴는 불가피했다. 결국 영국군은 충분한 숫자의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1월 중순에 조호르에서 결전을 치러야 했다.


개전과 동시에 인도 및 중동에 산재해 있던 병력이 싱가포르로 향하기 시작했고 무기고에 있던 장비들도 항해를 시작했으나 일본군의 진격이 너무 빨랐다. 결국 증원군은 전세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전장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많은 장비들은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을 때 아직도 인도양을 건너는 중이었다.


항공기의 증원도 난항을 겪었다. 일본군은 침공 초기에 버마 최남단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의 증원 경로를 막았다. 따라서 전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전투기는 항공모함에 싣고 말레이 반도 근처까지 가서 날리거나 수송선에 실려가야 했는데 항모는 다른 곳에서 바빴고 수송선은 너무 느렸다. ABDA 사령관 웨이벌 대장은 말레이 전투는 처음부터 시간과의 싸움이었다며 만일 1달만 더 버틸 수 있었다면 충분한 숫자의 항공기를 전개하여 말레이 상공의 제공권을 되찾고 일본군의 해상보급선을 자른 다음 반격을 가하여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2년 1월 16일에서 24일에 걸쳐 벌어진 조호르에서의 결전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영국군은 가뜩이나 부족한 전력을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결시키지 못한 채 무아르-용펭-바투파핫 삼각형 지역에서 각개격파당하면서 참패했다.


조호르 참패 이전인 1월 초부터 런던의 전쟁내각에서는 싱가포르에서 발을 빼고 제18사단과 기타 증원부대를 버마로 보내자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옳은 판단이었으나 당시에는 실행이 불가능했다. 싱가포르가 자국 안보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믿고 있던 호주와 뉴질랜드는 절대로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때 영국정부가 싱가포르를 포기하고 증원선단을 버마로 돌렸다면 이후 추축국에 대항하는 영연방의 공동 전선이 붕괴했을 가능성도 있다. 처칠로서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조호르에서의 참패로 해군기지의 사용은 불가능해졌다. 이제 남은 길은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하여 최대한 오래 버팀으로써 일본군의 해군기지 사용을 거부하고 말레이에 전개한 일본군을 최대한 오래 붙잡아 두어 다른 방면에 사용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이것 또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었으나 퍼시발 장군의 판단 착오로 일본군의 상륙을 허용했고 이어진 영국군 수뇌부의 잇단 실책으로 1주일 만에 항복했다.
(싱가포르 섬 전투에 대한 분석은 여기로)


웨이벌 대장은 항복 이틀 후에 싱가포르 섬에서 장기 항전을 하려면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어서 민간인을 주저없이 작업에 투입하면서 동시에 강철같은 의지와 신념을 가져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에게 섬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자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퍼시발 중장이 그런 인물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누구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면 장기 항전이 가능했을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해군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할 때부터 싱가포르가 함락될 때까지 20년 간의 비극적 이야기에서 일관된 점은 협조 부족이다.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 미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가 1930년대 후반에 협조를 잘 했다면 일본이 침공할 생각을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4개국의 이해관계는 늘 어긋났고 일본의 위협이 가시화된 후에도 행동이 통일되지 않았다. 시야를 말레이 내부로 좁혀봐도 마찬가지이다. 말레이 행정 당국과 군 당국, 그리고 군대 내에서도 육해공 삼군 사이, 또한 백인 지배층과 말레이 인, 그리고 말레이의 중국인 사이에는 해군기지 건설부터 싱가포르 함락에 이르는 전 기간에 걸쳐 항상 일본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자세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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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탈출


싱가포르 수비대의 모든 병사가 항복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병사가 1942년 2월 12일 이후에 작은 배를 타고 탈출을 감행했다. 그 시기에는 바다가 잔잔한 데다가 조류가 남서쪽으로 강하게 흘렀기 때문에 일본함정이나 비행기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전문적인 항해 지식이 없이 작은 배를 띄워도 조류를 타고 남부 수마트라의 동해안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양쯔강에서 운항하던 객선을 개조한 보조초계함 리워는 자바의 탄종프리옥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고 2월 13일 아침에 싱가포르를 출항했다. 탑승 인원은 84명이었는데 승조원 이외에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생존자 몇 명, 육군 5명, 공군 2명, 말레이인 10명, 중국인 6명을 포함한 숫자였다. 리워는 14일 아침에 방카 해협 북쪽에서 수마트라 침공부대를 싣고 가던 일본선단을 만났다. 함장 토머스 윌킨슨 대위는 적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리워는 전속력으로 선단으로 접근하여 1문 뿐인 4인치 주포로 수송선 1척에게 가지고 있던 포탄 13발을 모두 쏘았다. 기습을 받은 수송선은 불이 붙었으나 리워도 선단 호위 중이던 경순양함 유라, 구축함 후부키 및 아사기리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침몰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윌킨슨 대위는 배를 몰아 불타는 수송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버렸다. 리워는 결국 침몰했고 84명의 탑승자 중 윌킨슨 대위를 포함한 77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7명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 윌킨슨 대위는 사후 소령으로 특진되었으며 빅토리아 십자장이 추서되었다.


(리워의 모형. https://en.wikipedia.org/wiki/HMS_Li_Wo)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은 일본군의 포로가 될 생각이 없었다. 2월 15일 오전에 항복을 결정한 회의를  마치고 탕글린 막사에 있던 제8호주사단사령부로 돌아온 그는 참모들을 모아 탈출 방안을 논의했다. 처음에 그는 15,000명에 달하는 호주군 모두를 이끌고 탈출하려 했으나 참모들이 현실성이 없으며 일본군의 보복으로 대량 학살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단념했다. 그는 자신의 포병단장인 세실 캘러헌 준장에게 사단장직을 물려주고 16일 새벽 1시에 참모인 모지스 소령 및 워커 중위와 함께 싱가포르를 탈출했다.

베넷 일행은 말레이 의용대원 몇 명과 함께 현지인의 보트를 얻어타고 말라카 해협을 건너 수마트라 동해안에 도착했다. 여기서 싱가포르 항만국의 란치인 턴을 타고 바탕하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일행은 바탕하리 강의 상류인 잠비에서 자동차로 바꿔타고 수마트라 서해안의 파당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베넷 소장은 역시 싱가포르를 탈출한 제12인도여단장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과 제6/15인도여단장 존 코츠 대령을 만났다. 베넷 소장이 탈출한 것을 알게된 ABDA 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자바까지 올 수 있도록 비행기를 수배해 주었다. 자바에 도착한 베넷 일행은 콴타스 항공을 타고 호주로 귀국했다. 탈출한 지 2주일 만인 1942년 3월 2일에 베넷 소장은 멜버른에서 호주육군참모총장 스터디 대장에게 신고했다.


제12인도여단장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과 제6/15인도여단장 존 코츠 대령은 퍼시발 중장의 명령에 따라 항복 직전에 수마트라로 탈출했다. 파당에서 대기하던 파리스 준장과 코츠 대령은 함께 탈출한 영국병들과 함께 2척의 배에 타고 실론을 향했다. 코츠 대령과 220명의 영국병이 탄 배는 무사히 실론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리스 준장이 500명의 병사와 함께 탄 네덜란드 증기선 루즈붐은 3월 1일 오후 11시 55분에 수마트라 서해안에서 일본잠수함 I-59의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 파리스 준장은 유일하게 띄워진 구명정에 올라탔으나 28명 정원에 80명이 올라탄 구명정의 물과 식량은 금방 떨어졌다. 구명정은 그 상태로 28일간 무려 1,600km 이상 표류한 후에 파당에서 160km 떨어진 산호초에 도착했으며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4명이었다. 파리스 준장도 3월 3일에 환각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잃고 죽었다.


(네덜란드 증기선 루즈붐. http://www.kingshottgenealogy.co.uk/Pages/RobertWGKingshott.aspx)


싱가포르 영연방 판무관 비비안 보우덴은 2월 15일에 증기선 메리로즈를 타고 싱가포르를 탈출했다. 메리로즈는 17일에 방카 해협을 통과하다가 일본군 초계함에 나포되어 방카 섬으로 끌려갔다. 일본군이 탑승자들의 가방을 검색하다가 보우덴의 가방에서 중요한 서류 몇 개를 발견하고 압수했다. 보우덴은 압수 조치에 항의하다가 심하게 얻어맞고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병사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2월 12일 이후 싱가포르를 탈출한 삼판이나 정크선을 포함한 소형 선박이 수백척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격침되거나 나포되었지만 1,600명의 영국군을 포함하여 약 3,000명이 수마트라를 통하여 실론 또는 자바로 탈출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당국은 영국군과 협력하여 수마트라 동해안에 도착한 탈출자들이 서해안의 파당까지 갈 수 있는 3가지 통로를 확보했다.


제1통로는 바탕하리 강을 따라 잠비까지 올라온 다음 자동차로 파당까지 가는 남쪽 길로써 베넷 일행이 사용했던 길이었다. 이 길은 일본군에 의해 가장 먼저 폐쇄되었다.

제2통로는 벵칼리스 섬을 거쳐 파당으로 가는 북서쪽 길이었다.

제3통로이자 가장 중요한 통로는 동해안의 탐빌라한과 내륙의 렝앗을 통하는 길이었다. 렝앗에서 버스를 타고 사왈룬토까지 가면 파당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파당에 도착한 탈출자는 배를 타고 실론이나 자바로 갈 수 있었다. 영국군은 파당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탈출자를 처리하고 네덜란드 군의 수마트라 방어를 지원했다. 네덜란드 당국은 일본군의 수마트라 침공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렝앗과 사왈룬토 사이에 버스를 운행하는 등 탈출자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

 

(남부 수마트라.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84)


하지만 수마트라 동해안에 도착한 탈출자들은 먼저 렝앗까지 인드라기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일본인이 소유했던 90톤 짜리 어선을 타고 탈출한 레이놀즈가 여기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동해안에 탈출자가 표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선을 몰고가서 렝앗까지 실어 날랐다. 3월 15일에 렝앗이 점령될 때까지 그가 실어나른 탈출자가 약 2,000 명에 달한다. 렝앗이 점령 위기에 빠지자 레이놀즈는 수마트라 동해안을 따라 위험한 항해를 감행한 끝에 인도로 탈출했다.


호주군의관이었던 알버트 코츠 중령은 란치를 타고 수마트라 동해안의 탐빌라한에 도착한 후 탈출해 온 다른 군의관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진료소를 열었다. 이후 영국군과의 협력을 통하여 탐빌라한에서 파당까지 연결되는 탈출로의 주요 지점마다 진료소가 들어섰다. 이제 부상을 입은 탈출자들은 군의관이 제공하는 의료 지원을 받으면서 파당으로 갈 수 있었다.


일본군이 수마트라 동해안을 침공함에 따라 2월 28일에 파당으로 옮긴 코츠 중령은 3주 후 파당이 함락될 때 철수를 거부하고 킬고어 소령과 함께 파당에 남아 탈출하지 못한 부상병을 돌보다가 포로가 되었다. 싱가포르를 탈출한 후 수마트라가 함락될 때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인원은 약 8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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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항복


1942년 2월 15일 아침에 퍼시발 중장은 민방위 사령관 심슨 소장으로부터 싱가포르의 물 공급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일본군이 13일에 저수지를 점령했지만 우들라이의 펌프장을 아직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 공급이 유지되고 있었다. 문제는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부서지는 것이었다. 수도관의 파손으로 12일부터 우들라이 펌프장에서 공급한 양의 1/3 만이 전달되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1/6로 줄어들고 나머지는 모두 누수되면서 저지대에만 물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병대를 주축으로 한 수리반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인원이 부족한데다가 도로가 잔해로 막혀 수리용 파이프 운반이 차질을 빚으면서 수리하는 속도가 부서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퍼시발 중장은 15일 오전 9시 30분에 포트캐닝에서 회의를 열었다. 북부, 서부 및 남부지구사령관, 말레이사령부 참모들, 민방위 사령관, 경찰청장 및 해협식민지 총독이 참석했다. 지구 사령관이 담당 구역의 전술적 상황을 보고한 후 민방위 사령관이 물 공급 문제를 보고했다. 그는 물 공급이 24시간 내로 끊길 것이며 일단 끊기면 전투가 없더라도 복구하는데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언급했다.


수도관 복구에 관한 견해는 너무 낙관적인 것이었다. 싱가포르가 함락된 뒤 일본군은 영국군 공병대와 행정청 직원들로 상수도 수리반을 만들어 최대한 지원해주는 대신 최대한 빨리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압력을 받은 수리반은 11시간 만에 200개의 망가진 파이프를 수리했다. 일본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런 살인적인 속력으로 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대의 건물에 물이 공급된 것은 5일 후였으며 10일이 지나서야 고지대의 건물에 물 공급이 시작되었다. 수압이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한 것은 6주가 지나서였다.


이어서 퍼시발 중장이 보급 상황을 설명했다. 군량은 며칠 분량이 남아 있었으며 민간 식량도 마찬가지였다. 소화기 탄약은 그럭저럭 남아 있었으나 야포탄의 부족은 심각했고 보포스 대공포의 탄약은 거의 떨어졌다. 연료는 자동차나 전차에 이미 들어 있는 분량을 제외하면 거의 떨어졌다. 가장 큰 위협은 물론 눈 앞에 닥친 단수 상태였다.

퍼시발 중장은 현 상태에서 일본군이 포위만 하고 있어도 보급 부족으로 결국 패배하며 만일 일본군이 총공격을 가하면 100만에 달하는 민간인에게 괴멸적인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지는 2개 밖에 없었다. 당장 총반격을 실시하여 대량의 군량미가 있는 부킷티마 지역을 탈환함과 동시에 일본군 야포를 몰아내어 포격으로 수도관을 부수지 못하게 만들던지 아니면 항복하는 길이었다. 지구 사령관들은 반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우울한 15분 간의 침묵이 흐른 후 퍼시발 중장이 항복을 결정했다.


퍼시발 중장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웨이벌 대장으로부터 항복 승인을 받은 상태였다. 처칠 수상이 포기한 것이었다. 전날인 14일에 퍼시발 중장이 단수 때문에 2-3일 이상은 저항이 불가능하다며 재차 항복 권한을 요청했을 때 웨이벌 대장은 군대가 마실 물이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우라는 냉정한 답변을 보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최후가 가까웠음을 느낀 웨이벌 대장은 즉시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 수비대의 장기 저항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이 전문을 읽은 처칠 수상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싱가포르에는 8만의 수비대 이외에도 100만 가까운 민간인이 있었다. 이들 민간인은 잘 조직되어 수비대에 보충병과 보급 및 정보의 원천이 되어 전투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포에 질려 웅성거리는 군중으로 적과 전투 중인 수비대의 커다란 부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 몇 달 이상 대규모의 적을 묶어둘 장기 저항의 희망도 없는데 100만의 민간인을 껴안은 대도시를 시가전의 아비규환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처칠 수상은 참모총장 브룩 장군의 동의를 얻어 웨이벌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귀관은 싱가포르에서 이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할 순간을 판단하는 유일한 사람이며 그에 따라서 퍼시발에게 명령하라. 참모총장 동의"


여기에 따라 웨이벌 대장은 15일 아침에 퍼시발 중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에서 그는 우선 최후까지 저항할 필요성을 언급한 후 저항이 완전히 불가능해졌을 때 저항을 중지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럴 경우 무기, 장비 및  차량을 모두 파괴하고 만일 탈출하려는 병사가 있다면 무장한 상태로 탈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퍼시발 중장과 그 부하들에게 감사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퍼시발 중장이 회의를 마치고 항복 절차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일본군은 공격을 지속했다. 제53여단의 좌익은 일본제5사단의 공격을 받아 브라델 도로 너머로 쫓겨났다. 제1말레이여단은 제18사단의 공격을 받아 알렉산드라 지역에서 밀려났다. 싱가포르 최대의 탄약창을 비롯하여 보급품 창고가 밀집한 알렉산드라 지역을 잃으면서 남아있던 탄약과 보급품을 모두 상실했다. 이제 영국군에게 남은 탄약은 단위부대가 보유한 분량이 전부였다.


15일 오전 11시 30분에 말레이사령부의 군정참모 뉴빅긴 준장, 식민장관 대리 프레이저, 그리고 통역 와일드 소령으로 이루어진 민군합동사절단이 백기를 내건 자동차를 타고 부킷티마 도로를 달려 일본제5사단 보병제21여단 정면으로 나아갔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의 보고를 받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정보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를 파견했다. 뉴빅긴 준장이 스기타 중좌에게 퍼시발 중장의 편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15일 오후 4시를 기하여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싶으니 일본측 사절단을 싱가포르로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기타 중좌는 와일드 소령에게


"항복을 하겠다면 정전한다. 항복할 의사가 있는가?"


하고 물었고 와일드 소령은


"있다."


고 대답했다. 당시 일본군은 '항복' 이라는 용어를 '무조건 항복' 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자 스기타 중좌는 야마시타 중장의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전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사령관은 귀군의 항복을 받아들이며 귀군 최고지휘관이 아래의 조건을 논의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원과 함께 2월 15일 18시(일본시간,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4시 30분)까지 지정한 장소로 와서 일본군 사령관과 회담하기를 요청한다. 


아래


1.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항전 중지 및 무장 해제

2. 행정 및 경제기구는 현재의 활동을 지속하다가 요구에 따라 일본군에게 축차적으로 양도할 것

3. 함선, 항공기, 차량, 무기, 탄약, 양식, 연료, 자재 기타와 군용토지, 건물, 교통, 통신, 항만시설, 비행장 등과 지도, 서류 등을 손상, 파괴 또는 태우는 행위는 일본군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간주함

4. 일본군과의 충돌 회피에 만전을 기할 것이며 국지적 충돌 발생시 최고지휘관이 직접 중지 명령을 내릴 것

5. 미국인, 네덜란드인, 중경측 중국인을 즉시 감금하여 일본군에게 넘길 것

6. 감금 중인 일본인을 즉시 일본군에게 넘길 것

7. 아래에 요구하는 사항을 담당할 인원(주임외 약간의 보조인원)을 준비하여 일본 측이 제시하는 요구 사항에 즉시 응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아래


위원장, 육해군각위원, 항공, 경제, 행정, 위생, 노동, 연락위원>


야마시타 중장이 지목한 회담장소는 부킷티마 마을 북쪽에 있는 포드자동차공장이었다. 야포탄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국군이 시가전을 불사하면서 끝까지 저항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야마시타 중장은 약점을 드러낸 퍼시발 중장의 기를 꺾어 항복을 기정사실화하고자 강수를 두었다.


오후 1시에 돌아온 사절단은 퍼시발 중장이 직접 오라는 내용을 담은 일본군의 답서를 전달했다. 퍼시발 중장은 참모인 트란스 준장과 뉴빅긴 준장, 그리고 통역 와일드 소령과 함께 포드 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퍼시발 일행을 태운 차가 일본군이 제시한 시간보다 시간보다 30분 늦은 오후 5시에 포드 자동차 공장 입구에 도착하자 스기타 중좌가 맞이했다. 차에서 내린 퍼시발 일행은 커다란 백기와 유니언잭을 들고 회담장까지 걸어 가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받았다. 일본종군기자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백기를 들고 회담장으로 향하는 퍼시발 일행의 사진을 찍었다. 회담도 하기 전에 항복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백기를 들고 회담장으로 향하는 퍼시발 일행. 가장 왼쪽에 백기를 든 사람이 통역 와일드 소령, 유니언잭을 든 사람이 참모 트란스 준장, 이어서 스기타 중좌, 뉴빅긴 준장, 가장 오른쪽이 퍼시발 중장. 스기타 중좌를 뒤따르는 인물은 일본측 통역인 히시가리 기자.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


퍼시발 일행이 회담장으로 지정된 포드자동차공장 건물 1층의 회의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5분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거기서 오후 8시 30분을 기하여 전투를 중지한다는 내용의 항복문서(정식명칭은 영군에 대한 요구사항)를 받았다. 야마시타 중장은 일부러 10분간 퍼시발 일행을 기다리게 한 후 오후 5시 15분에 막료들과 함께 입장했다. 통역인 히시가리 기자가 야마시타 중장을 소개한 후 야마시타 중장이 퍼시발 중장의 건너편에 앉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항복 회담 전경. 가운데 앉은 사람이 야마시타 중장. 건너편에 앉아 손을 입에 대고 있는 사람이 퍼시발 중장.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야마시타 : 일본군 포로가 있습니까?

퍼시발 : 1명도 없습니다.

야마시타 : 억류된 일본인 민간인이 있습니까?

퍼시발 : 모두 인도로 이송했으며 그곳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처리했습니다.

야마시타 : 당면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항복문서)는 읽어 보셨습니까?

퍼시발 : 읽었습니다.

야마시타 : 거기 제시된 절차를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퍼시발 중장은 문서를 뒤적거리더니 치안 유지 병력 이야기를 꺼냈다.


퍼시발 : 싱가포르 시내는 혼란합니다. 비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1,000 명의 무장병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마시타 : 일본군이 진주하면 치안 유지를 위하여 각별히 마음을 쓰겠습니다.

퍼시발 :  영국군이 싱가포르 사정을 잘 아니 1,000 명의 무장병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마시타 : 일본군을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퍼시발 : 시내를 경비하고 비전투원을 보호해야 합니다.

야마시타 : 비전투원은 무사도 정신에 따라 보호할 것입니다. 대장부로서 말씀드립니다.

퍼시발 : 공백이 생기면 시내가 혼란해질 것입니다. 경비를 하면서 동시에 혼란에 대응하려면 영국군과 일본군이 협력해야 합니다. 이후에 1,000 명의 무장해제 여부를 결정합시다.


초조해진 야마시타는 고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야마시타 : 일본군은 공격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공격할 겁니다.

퍼시발 : 야간공격을 보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마시타 : 여기서 합의가 나오지 않는 한 공격을 실시할 것입니다.

퍼시발 :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야마시타가 씨근덕거리는 동안 퍼시발이 말을 이었다.


퍼시발 : 싱가포르 시내가 혼란하므로 1,000 명의 무장병이 필요합니다.


야마시타는 압박을 가하기 위하여 참모 이케야 대좌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마시타 : 야습 시간은 언제인가?

이케야 : 20시입니다.


통역 와일드 소령으로부터 대화 내용을 들은 퍼시발이 끼어들었다.


퍼시발 : 야습은 곤란합니다.

야마시타 : 영군은 항복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퍼시발 : 정전을 원합니다.


여기서 야마시타는 승부수를 던졌다.


야마시타 : 야습시각이 다가오는데 영군은 항복하지 않고 있다.


그러고는 통역을 기다리지도 않고 책상을 쾅 친 다음 몸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으로 퍼시발 중장을 가리키면서 거칠게 물었다.


야마시타 : 예스냐 노냐? 선택하라.


퍼시발 중장은 통역 와일드 소령을 흘낏 쳐다본 다음 대답했다.


퍼시발 : 예스. 1,000명의 무장병을 허용하는 조건입니다.

야마시타 : 알겠습니다.


이때 스기타 중좌가 재빨리 끼어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스기타 : 무장병 배치 문제는 당분간 우리 측이 요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문서에 서명하시지요.


서명을 하기 전에 퍼시발 중장은 야마시타 중장에게 민간인의 안전 보장과 우발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16일 날이 밝은 이후에 시내로 진입할 것을 요청했고 야마시타 중장은 받아 들였다. 이로써 55분에 걸친 회담이 끝났다.


오후 6시 10분에 서명된 항복문서(정식 명칭은 영군에 대한 요구사항)은 낮에 퍼시발 중장에게 전달했던 문서를 토대로 세부 사항을 꼼꼼하게 규정하여 3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일본군이 보도자료에 명시한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군은 2월 15일 오후 8시 30분(일본시간 오후 10시)까지 적대행위를 중단한다.

2. 영군은 2월 15일 오후 9시 30분(일본시간 오후 11시)까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

3. 제국육군은 싱가포르 치안 유지를 담당한 1,000명 이하의 인원에게 추후 통고가 있을 때까지 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4. 제국육군은 영군이 사소한 위반 행위라도 저지른다면 즉시 발포할 것이다.


야마시타 중장은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회담 당시 영국군이 시가전으로 끝까지 저항할까 봐 마음을 졸였으며 당시 야포탄이 부족하여 만일 영국군이 끝까지 저항했다면 일본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당시 영국군과 일본군의 보급 상황을 살펴보면 이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본군에게 야포탄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2월 15일 아침에 야포 1문당 200발 정도 남았다고 하는데 이는 2회 교전할 분량으로 장기전을 생각하면 턱없이 모자란 양은 맞다. 문제는 당시 영국군의 사정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군은 항복 당일인 15일에  싱가포르 최대 규모인 알렉산드라 탄약창을 상실하면서 남은 탄약을 모두 잃었다. 따라서 당시 영국군이 보유한 야포탄은 단위 부대가 보유한 것이 전부였다. 탄약창을 상실하기 전인 15일 오전 회의에서 퍼시발 중장이 야포탄이 매우 부족하다(very short)고 언급한 것을 돌아볼 때 항복 당시 영국군이 보유한 야포탄이 일본군보다 특별히 많을 리가 없다. 더하여 영국군의 식량은 2주일 치가 채 남지 않았으며 민간 식량은 1주일치 밖에 없었다. 항복 당일에는 물 공급마저 끊겼다.


반면 일본군의 보급 사정은 급속히 호전되고 있었다. 싱고라에서 싱가포르 섬에 이르는 제25군의 보급 체계에서 병목 구간은 조호르 해협이었다. 그런데 일본 공병대가 2월 15일에 둑길을 복구하는데 성공하여 15일 오후에는 트럭이 보급품을 싣고 싱가포르 섬으로 들어왔다. 싱고라에 이르는 철도는 3일 전인 12일에 이미 조호르바루역까지 연결된 상태였다. 따라서 만일 퍼시발 중장이 항복을 거부했다면 일본군은 싱고라에서 철도를 타고 조호르바루역까지 운반된 야포탄을 3,000대에 달하는 자동차에 실어 둑길을 건너 일선 부대에 전달함으로써 공세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포탄이 없어 일본군이 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사령부로 돌아온 퍼시발 중장이 싱가포르 수비대에 항복명령을 내리면서 1942년 2월 15일 오후 8시 30분을 기하여 총성이 멎었다. 이로써 말레이 전투는 일본군의 예상보다 30일이나 빠른 70일 만에 영국군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밤 퍼시발 중장은 ABDA 사령부에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물, 석유, 식량, 그리고 탄약이 사실상 고갈되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장병들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며 귀관의 도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우리는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적대 행위는 오후 8시 30분에 끝냈습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싱가포르로부터의 통신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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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마지막 나날


1942년 2월 13일이 되자 싱가포르 시내의 상황이 심각해졌다. 기존 인구에 약 50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해안을 중심으로 반경 5km 내에 100만명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방어선이 시내에 접근함에 따라 공습 또는 포격에서 군사 표적과 민간 표적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파열되어 물 공급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부킷티마의 식량창고를 잃으면서 이제 말레이 사령부가 보유한 식량은 약 1주일치로 줄어들었다. 각 부대가 보유한 식량이 약 1주일치였으므로 군대가 먹을 식량은 약 2주일치가 남은 셈이었다. 민간이 보유한 식량은 약 1주일치였다. 소화기용 탄약 보유 상황은 그나마 나았으나 야포탄은 많이 모자랐고 대공포탄과 연료는 거의 떨어졌다. 

말레이 해군사령관은 13일에 부쿰 섬에 있던 대규모 중유 저장고를 폭파했는데 완전 폭파에는 실패했다.


13일 오후 2시에 퍼시발 중장은 포트캔닝에 있던 말레이 사령부에서 3명의 지역사령관, 사단장들, 그리고 말레이 사령부의 고위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었다. 지휘관 모두가 병력이 지치고 예비대가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반격은 성공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병사가 일본군 상륙 이후 5일간 모두 합쳐 3-4시간 밖에 자지 못했으며 지난 48시간 동안은 전혀 눈을 붙이지 못했다. 히스 중장과 벤넷 소장이 처음으로 조건부 항복을 거론했으나 퍼시발 중장은 거부하고 방어 지속을 명했다.


이 회의에서는 부녀자, 여성 간호병, 일부 참모 및 기술자의 탈출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큰 선박은 이미 싱가포르를 떠났으므로 말레이 해군사령관 스푸너 해군소장은 남아있던 소형 선박 약 40척으로 13일 밤에 마지막 철수를 실시했다. 승조원을 제외하고 육군 1,800명(호주군 100명 포함), 그리고  말레이 사령부 회의에서 결정된 인원과 민간 행정요원 1,200명, 총 3,000명이 13일 밤에 자바를 향하여 싱가포르를 떠났다. 스푸너 소장은 말레이 공군사령관 펄포드 공군소장과 함께 해군 모터 란치인 ML310 함을 타고 선단을 이끌었다.


(페어마일 급 모터 란치. https://en.wikipedia.org/wiki/Fairmile_B_motor_launch)


선단의 운명은 비참했다. 싱가포르를 떠난 직후부터 공습에 시달리던 선단은 수마트라와 방카 섬 사이의 방카 해협을 통과한 직후 오자와 중장이 이끌던 제7전대를 만나 풍비박산이 났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친 몇몇 선박들도 2-3일 내로 공습을 받아 격침되면서 약 40척의 선박이 모두 격침되었다. ML310 함도 2월 15일에 공습을 받아 방카 섬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체비아라는 무인도에 좌초했다. 스푸너 소장과 펄포드 소장을 포함한 약 40명은 섬에 상륙했으나 체비아 섬에는 식수와 식량이 거의 없었으며 말라리아 모기가 득실거렸다. 결국 생존자들은 두달 후 현지인의 배를 타고 수마트라에 상륙하여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체비아 섬에서 버티는 동안 스푸너 소장과 펄포드 소장을 포함한 18명이 기아와 말라리아로 죽었다.


2월 13일에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제 저항은 하루이틀 밖에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한 다음 병사와 민간인의 무익한 희생을 막기 위한 보다 폭넓은 자유재량권(사실상 항복할 권한)을 요청했다. 아직 처칠 수상의 엄격한 명령에 묶여 있던 데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방어 준비를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던 웨이벌 대장은 다음과 같이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귀관은 필요하다면 시가전을 감행해서라도 적에게 최대한 오래, 최대한 많은 피해를 주어야 한다. 귀관이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면서 최대한 오래 묶어두는 것은 다른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귀관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반드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 


2월 13일 전투는 주로 방어선의 서쪽 끝에서만 이루어졌다. 전날 호주군과 교전했던 일본제18사단장 무다구치 렌야 중장은 호주군 방어선을 뚫기가 어렵다고 보았는데 정확한 판단이었다. 제8호주사단장 벤넷 소장은 5개의 소규모 분견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탕글린 막사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좁은 방어구역 내에 집결시켰다. 따라서 참호마다 병력이 꽉꽉 들어차 있었으며 측면이나 심지어 후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선에도 대량의 병력을 배치했다.

탕글린 막사에는 보급품이 가득했다. 식량이 넘쳐흘러 병사들이 맛없는 표준 전투식량을 거부하고 별미를 찾아먹을 정도였다. 수영장에는 식수를 가득 채워 적어도 며칠 간은 물 걱정이 없었으며 피복도 충분했다. 심지어 위스키와 술도 사방에 널려있어 헌병대는 눈에 띄는대로 술을 압수하고 병사들이 취하지 않도록 감시하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다만 탄약, 특히 야포탄이 부족했으나 단기간의 방어전을 치르는 데에는 충분했다.


따라서 제18사단은 호주군을 피해 남쪽의 제1말레이여단 방어선을 공격했다. 보병제56연대는 산포병제1대대 및 320mm 구포를 보유한 독립구포제14대대 1개 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파시르판장 능선의 요충지인 270고지를 공격했다. 270고지를 지키던 제1말레이대대는 고정식 대구경 해안포의 지원 아래 열심히 싸워 능선을 지켰다. 하지만 일본군은 하루 종일 끈질기게 공격을 계속했고 말레이 여단은 힘껏 싸웠으나 오후가 되면서 서서히 압도되기 시작했다. 오후 5시가 되자 북쪽 125고지를 지키던 제2로얄대대가 보병제114연대에게 거의 포위당했고, 남쪽의 제2베드포드셔앤드하트포드셔 대대도 중형전차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은 제56연대제1대대의 공격을 받아 고지에서 쫓겨났다. 결국 해가 진 후에 제1말레이여단은 파시르판장 능선을 내어주고 알렉산드라 막사까지 철수했다. 이곳은 핵심 보급창과 싱가포르 최대의 탄약창, 그리고 군병원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제44여단도 함께 후퇴하여 말레이여단과 제8호주사단 사이를 방어했다. 그날 제2고든대대는 제27호주여단 휘하에 들어갔다.


제5사단은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면서 전진하여 수원지의 남쪽을 점령하고 13일 밤에 제54여단 정면에 진출했다. 이날 제5사단에 배속된 야전중포대가 케펠 항의 영국군 고정식 해안포와 포격전을 벌여 침묵시키기도 했다.

근위사단 또한 13일 하루동안 가벼운 저항을 받으면서 전진하여 13일 저녁까지 수원지 동쪽으로부터 제53여단, 제11사단 및 제2말레이여단 정면에 진출했다. 이날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는 영국군 식량창고를 점령하여 많은 식량을 노획했다.


(1942년 2월 12일 - 15일에 걸친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415)


14일 아침에 퍼시발 중장은 민방위 사령관 심슨 준장으로부터 조만간 물 공급이 끊길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오전 10시에 시청에서 퍼시발  중장은 시장과 민방위 사령관이 참석한 회의를 열었다. 시의 수도 기술자는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터져 2/3가 누수되고 있으며 물 공급이 길어야 48시간, 아마도 24시간 내로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퍼시발 중장은 보병으로서 남서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공병 100여명을 불러들여 수도관 수리를 맡겼다.

이후 토머스 총독을 만난 퍼시발 중장은 조만간 물 공급이 끊길 것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총독은 런던의 식민성에 전문을 보내어 물 공급이 끊기면 전염병 발생으로 10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이에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퍼시발 중장도 웨이벌 대장에게 비슷한 내용의 전문을 보냈으나 군대가 마실 물이 남아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우라는 답변을 받았다.


보병제55 및 제114연대는 14일 아침 8시 30분부터 박격포 및 야포의 화력 지원 아래 제1말레이여단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몇 차례에 걸쳐 방어선을 돌파하자 영국군이 결사적인 총검돌격으로 몰아내었으며 그때마다 양쪽이 큰 피해를 입었다. 승부는 오후 4시에 일본전차가 투입되면서 결정났다. 전차의 지원을 받은 보병제114연대제2대대가 방어선의 좌익을 돌파하자 기진맥진한 제1말레이여단은 부킷처민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말레이여단이 물러나면서 제2/13호주통합병원이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수술 중이던 부상병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등 14일과 15일에 걸쳐 의료진과 부상병 약 150명을 학살했다. 이때 희생된 인물 가운데는 11일에 부상을 입고 입원 중이던 제22호주여단 부관 빌 소령도 있었다.

제1말레이여단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 상황은 북쪽에 있던 호주군 전선에서 잘 보였으며 호주군 야포에게 절호의 표적을 제공했다. 그러나 벤넷 소장은 포탄 부족을 이유로 호주군 전선에 대한 야포사격만 허용했다. 따라서 호주군 포병은 빤히 보이는 일본군에게 포탄 1발도 쏘아보지 못한 채 말레이 여단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호주군의 남쪽에 배치된 제2/4호주기관총대대 병사들은 남쪽에서 제1말레이여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종대를 몇 개나 발견했다. 기관총 1정만 있으면 몰살시킬 수 있었으나 이미 보병으로 개편된 그들도 뻔히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부킷티마 도로 북쪽에서는 일본제5사단이 14일 오전 내내 제54 및 제55여단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다. 오후가 되자 일본군 중형전차들이 제55여단의 방어선을 뚫고 사임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제55여단은 플레즌트 산의 주택지구에서 겨우 진격을 저지했다. 14일 밤이 되자 제55여단의 방어선은 맥리치 저수지의 부두에서 플레즌트 산 도로를 지나 부킷 브라운의 남쪽을 지나 아담 도로에서 제54여단과 연결했다.


저수지 동쪽에서는 근위보병제3연대제3대대가 톰슨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105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제53여단과 제55여단 사이에 틈이 생겼다. 제11사단에서 1개 대대가 파견되어 틈을 메꾸었다.


동쪽에서는 근위보병제4연대가 14일 오후에 파야레바 활주로를 향하여 공격을 실시했다. 제2말레이여단의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뚫렸으나 인접한 제11사단의 예비대가 달려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전선을 안정시켰다.


일본군은 14일에 호주군을 제외한 전 전선을 공격했다. 벤넷 소장은 약화된 주변 방어선에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은 채 완고하게 탕글린 막사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방어지역만 고수했다. 실제로 벤넷 소장은 이날 멜버른에 있는 호주육군본부에 보낸 전문에서 일본군이 호주군을 우회하여 싱가포르를 함락한다면 쓸데없는 희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제 벤넷 소장은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호주군의 희생을 줄이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1942년 2월 14일 아침 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74)


이날 일본해군 선발대가 해군기지에 도착하여 조사를 실시했으며 근위사단은 우들라이 펌프장에서 불과 몇 백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섬의 일본군도 조호르 해협을 건너는 보급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특히 탄약 부족이 심각하여 야포탄같은 경우 15일 아침이 되자 1문당 200발 정도 남았는데 이는 불과 2회의 교전을 치를만한 분량이었다. 


일본군의 포격과 공습으로 14일 저녁이 되자 싱가포르 시내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도로는 무너진 건물과 쓰러진 전신주, 망가진 자동차 등으로 막혔다. 민방위 조직은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민간인 노동자들이 사라져서 잔해를 치우기는 커녕 시체를 매장할 수도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이 붕괴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었다. 민간 병원은 부상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며 임시 구호소로 사용되던 대형 호텔과 빌딩의 로비도 부상자로 들어찼다.


퍼시발 중장은 14일 오후 5시에 시청에서 다시 물 공급 회의를 열었다. 시의 수도 기술자는 공병대의 노력으로 물 공급 사정이 약간 호전되었다고 말했다. 퍼시발 중장은 민방위 사령관 심슨 준장에게 다음날 아침 7시에 다시 물 공급 상황에 대해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회의를 마쳤다. 저수지는 일본군 손에 떨어졌지만 영국군이 아직 우들라이 펌프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 공급은 지속되고 있었다.


14일 밤은 조용한 편이었다. 일본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대부분 전선에서 영국군 바로 앞까지 접근했으나 제18사단이 약간의 침투를 시도한 것 이외에는 방어선에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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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최종 방어선으로의 철수


1942년 2월 12일 아침에 엠파이어스타와 다른 1척의 상선이 해군 및 공군의 지상요원과 기술자 등을 태우고 순양함 더반과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싱가포르를 떠났다. 이 선단은 일본군의 심한 공습을 받았으며 더반이 1발, 엠파이어스타는 3발의 명중탄을 맞았으나  놀라울만큼 적은 사상자만 기록한 채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퍼시발 중장은 12일 오전 중에 서부지구, 마시포스, 그리고 제3군단을 방문하여 잇달아 회의를 가졌다. 그는 부킷티마 도로를 거쳐 일본군이 바로 싱가포르를 점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부킷티마 도로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북동쪽 및 남동쪽 해안의 병력들을 철수시켜 방어에 투입했다. 따라서 강력한 방어 설비를 갖춘 창이 요새도 포기했다. 퍼시발 중장은 싱가포르 총독 토머스 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일본군의 도착이 멀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총독은 라디오 방송국을 폭파하고 재무국의 지폐를 태웠다.


퍼시발 중장은 기존 계획보다 축소된 새로운 최종 방어선을 설정했다. 동쪽으로부터 칼랑 비행장 - 파야레바 활주로 - 우들라이 교차로 - 톰슨 마을 - 아담 도로 - 파레 도로 - 탕글린 역 - 부오나 비스타 마을(해안)로 이어지는 방어선이었다. 모든 부대는 13일 아침까지 새로운 방어선에 도착해야 했다.


북부 지구에서는 일본근위사단이 12일 아침부터 니순을 지키던 제8여단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8여단은 제2/10발루치대대를 만다이 도로에 배치하고 우익에 제1/8펀자브대대를 배치한 상태였다. 재편성 과정에서 대부분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으로 채워진 펀자브대대는 근위보병제4연대의 제2 및 제3대대가 압박을 가하자 흩어져 버렸다. 펀자브대대의 붕괴로 니순 북쪽에 있던 제53여단이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제11사단장 키 소장이 남쪽의 제28여단으로부터 제2/9구르카대대를 빼내어 투입했다. 구르카대대는 일본군이 중요한 고지들을 차지하기 전에 제153야포연대 제499야포대의 지원 아래 반격을 실시하여 펀자브대대의 방어선을 되찾았다.


히스 중장은 12일 정오에 제11 및 제18사단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니순 북쪽에 있던 제53여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근위사단이 추격했다.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이 니순 교차로에 접근하자 제499야포대의 지원을 받는 제2/10발루치대대가 막아섰다. 제273대전차포대가 일본전차 3대를 파괴하자 일본군은 진격을 멈추었고 이 틈을 타서 제53여단은 니순 남쪽에 도달했다. 이후 제53여단이 후위를 맡는 가운데 제8 및 제28여단이 철수했다. 제53여단은 일본군의 추격을 막기 위하여 니순 남쪽에 남았으며 저녁 8시에는 니순의 탄약고를 폭파했다. 

13일 아침에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은 제53여단이 아직 니순 남쪽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위 격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제25군의 명령대로 파야레바 방면으로 서진하는 대신 제53여단을 포위하기 위하여 근위보병제4연대의 제2 및 제3대대를 남쪽으로 전진시켜 톰슨 도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정오가 되어서야 포위될 위험을 깨달은 제53여단은 황급히 철수했으며 일본군이 도로를 차단하기 직전에 빠져 나갔다.


13일 아침까지 껍데기만 남은 제18사단도 철수하여 마시포스와 합류했다. 남부지구의 병력들도 창이 요새를 폭파하고 철수하여 퍼시발 중장이 새로 설정한 최종 방어선에 도착했다.


(1942년 2월 11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9)


방어선 중앙에서는 일본제5사단이 좌익에 보병제9여단, 우익에 보병제21여단을 배치하고 12일 아침부터 마시포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에 일본전차가 경마장 마을에 나타났으나 제45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가 사격을 가하여 정지시켰다. 하지만 오후 들어 일본군의 압력이 거세지자 마시-베레스포드 준장은 아담도로-페레도로 방면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는 야포 및 고정식 해안포의 엄호를 받았으며 일본기의 공습과 기총소사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12일 저녁에 마시포스는 제3/17도그라스대대와 함께 최종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1942년 2월 11일 아침 현재 남서방어선 현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 360)


울루판단 도로를 지키던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12일 아침이 되자 과로로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상태로 하루종일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여단을 지휘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제2/18호주대대장 발리 중령에게 임시로 여단장 직을 넘기자마자 곯아떨어져 서부지구사령부로 실려갔다. 사령부에서 깨어난 테일러 준장은 여단에 복귀하려 했으나 서부지구사령관 벤넷 소장이 테일러 준장을 입원시키고 발리 중령을 정식으로 제22호주여단장으로 임명했다.

테일러 준장의 예상대로 일본제18사단은 보병제114연대를 죄익대로, 보병제56연대를 우익대로 삼아 12일 하루 종일 야포와 항공기의 지원 아래 병력이 약 800명으로 줄어든 제22호주여단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몇 군데에서 방어선을 뚫었으나 그때마다 호주군이 총검돌격으로 몰아내었다. 제22호주여단은 야포 지원 아래 12일 저녁까지 방어선을 지켰으나 오후 7시에 울루판단 도로를 굽어보는 요충지인 200고지가 보병제114연대제3대대에 점령당했다. 호주군은 야포의 화력 지원 아래 2차례에 걸쳐 결사적인 총검돌격을 실시했으나 탈환에 실패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발리 중령은 서부지구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철수 명령을 내렸다. 제22호주여단의 철수는 자정에 실시되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남쪽에 있던 제44여단은 방어선의 북쪽 일부가 제22호주여단이 지키던 127고지를 공격하는 보병제56연대와 교전했으며 밤이 되자 제22호주여단의 철수에 맞추어 최종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해안가에 자리잡은 제1말레이여단의 방어선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1942년 2월 12일 - 15일에 걸친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415)


1942년 12월 13일 아침이 되자 제53여단과 제1말레이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는 싱가포르 주변에 설정된 45km 길이의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제53여단은 정오까지 니순 남쪽에 있었으며 제1말레이여단은 파시르판장 능선의 서쪽 끝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방어선의 동쪽 끝은 제2말레이여단으로 칼랑 비행장에서 파야레바 활주로까지를 맡았다. 제11사단이 여기에서 우들라이 서쪽 1.6km 지점까지를 방어했다. 다음은 제18사단 영역이었다. 니순 남쪽에서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제53여단이 오후에 도착하여 브로델 도로 북쪽에 있는 중국인 공동묘지까지, 마시포스를 흡수한 제55여단이 아담 파크까지, 톰포스를 흡수한 제54여단(벡하우스 준장)이 부킷티마 도로까지 맡았다. 제2고든대대가 파레도로를 맡았고, 제8호주사단이 탕글린 역까지 담당했다. 제44여단이 부오나비스타 도로를 방어했고 이후 해안까지는 제1말레이여단이 맡았다. 제1말레이여단은 이외에도 파시르판장 능선의 서쪽 끝인 270고지, 소년원 도로를 굽어보는 125고지, 그리고 파시르판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제1말레이여단은 제2로얄대대, 제1 및 제2말레이대대, 제5베즈앤드허츠대대, 그리고 혼성공병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8호주사단장 벤넷 소장은 모든 호주군을 탕글린 막사에 집결시켰다. 그곳에서 최후까지 저항할 결심이었다.


이맘때쯤 싱가포르 수비대는 지휘관에 대한 믿음을 잃고 원래부터 낮았던 사기는 완전히 박살났다. 싱가포르 시내에서는 자포자기한 탈영병들이 약탈을 일삼았는데 숫자가 많고 무장을 하고 있어 헌병대도 속수무책이었다. 일부는 보트를 타고 싱가포르를 탈출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탈영병은 대부분 행정병이나 최근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보충병으로 훈련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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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항복권고문 투하


1942년 2월 11일 새벽이 되었을 때 서부지구사령부는 밤새 제12여단에게 벌어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다. 부킷판장이 뚫렸다는 소식을 들은 서부지구사령부는 11일 새벽 2시 15분, 톰포스 지휘관 토머스 중령에게 부킷티마와 부킷판장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마스 중령은 우익에 제4노퍽대대, 중앙에 제18정찰대대, 좌익에 셔우드포레스터대대를 배치했다. 제4노퍽대대는 255고지와 275고지를 점령했으나 더 이상의 진출은 불가했다. 결국 11일 정오가 되자 노퍽대대는 보병제11연대의 공격을 받아 275고지에서, 보병제42연대의 공격을 받아 255고지에서 쫓겨났다. 제18정찰대대의 공격은 부킷티마 역 부근에서 보병제21연대의 강력한 사격에 막혔다. 제2/29호주대대의 지원을 받은 셔우드포레스터대대는 주롱도로의 8마일 이정표까지 진출하여 부킷티마에서 370m 까지 접근했으나 오전 10시 30분에 보병제114연대에게 밀려났다. 토머스 중령은 오후 1시에 공격이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 톰포스가 상대한 일본군은 제5사단(보병제11, 제21 및 제42연대)과 제18사단(보병제114연대)의 4개 보병연대였다. 톰포스는 11일 오후에 경마장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제2/29호주대대는 별다른 명령을 듣지 못한 채 부킷티마 남쪽에 머물러 있었다. 11일 저녁이 되어 일본군에게 포위될 위험에 빠지자 제2/29호주대대는 남쪽으로 철수했으나 도중에 지속적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병력이 흩어졌다. 대대장 폰드 중령이 12일 아침에 서부지구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이끌던 병력은 본부중대의 일부 뿐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11일 오전 6시에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기관총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사임 도로에 있던 말레이 사령부를 나서 포트 캐닝과 부킷티마 도로를 시찰한 그는 오전 7시에 맥리치 저수지 서쪽에 위험한 간격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증원병으로부터 7개 중대를 차출하여 골프장 지역으로 파견했다. 또한 창이 지역에 있던 제2고든대대를 서부지구에 배속하고 북부지구와 서부지구의 경계선을 조정하여 경마장 동쪽을 북부지구에 편입시켰다.

경계선이 조정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11일 오전 9시에 부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부킷티마가 점령되고 제11사단의 좌익이 열렸기 때문에 적은 북쪽이나 서쪽으로부터 침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막기 위하여 제18사단으로부터 추가로 병력을 빼와야 했다. 히스 중장은 제18사단장 백위스-스미스 소장에게 톰포스에 이어 추가로 1개 여단 규모의 부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백위스-스미스 소장은 다시 부대를 만들고 제55여단장 마시-베레스포드 준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마시 포스로 불린 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캠브리지셔대대(제55여단), 제4서퍽대대(제54여단), 제5/11시크대대(남부지구), 제3기병연대 분견대, 제342야포대, 제100경전차중대


제100경전차중대는 12.7mm 기관총을 주무장으로 사용하는 5톤짜리 비커스 마크6 경전차 18대로 이루어졌으며 1942년1월 29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비커스 마크6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Light_Tank_Mk_VI)


제3군단의 직접 통제를 받는 마시 포스의 임무는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적을 톰슨 마을에서 막는 동시에 우들라이의 펌프장을 지키는 것이었다. 마시포스는 11일 오후에 맥리치 저수지 부근에서 편성되었다.


제11사단의 서쪽 측면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은 11일 오전 7시 30분에 부킷판장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7호주여단사령부의 기록에 의하면 명령의 출처는 퍼시발 중장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만일 퍼시발 중장이 명령했다면 제3군단장 히스 중장과 제11사단장 키 소장을 거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이들은 전혀 몰랐다. 따라서 히스 중장과 키 소장은 이 명령을 서부지구사령부가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벤넷 소장은 부인했다. 아마도 혼란 중에 퍼시발 중장의 명령이 지휘계통을 뛰어넘어 직접 제27호주여단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명령에 따라 제2/30호주대대는 남쪽의 제2/26호주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11일 오전 9시에 남하를 시작했다. 제2/30호주대대는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과 접촉하여 계속 전투를 치르면서 힘겹게 남하했다. 맥스웰 준장은 제2/10호주야포연대에 화력지원을 명령했으나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은 11일 새벽에 남쪽의 부킷티마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격 명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옥스 중령은 경마장 지역으로 후퇴하여 제27여단본부와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제2/26호주대대가 송수관까지 왔을 때 부킷판장 탈환 명령을 받았으나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목장 지역에 도달한 제2/26호주대대는 보병제11연대 소속의 일본군 약 2,000 명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았다. 전력에서 밀리는 제2/26호주대대는 적의 눈을 피하여 남하, 골프장 지역을 거쳐 탕글린으로 후퇴하여 제12인도여단의 잔존병과 만났다. 제2/26호주대대의 철수 도중 일본군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베른 대위가 지휘하는 A 중대는 낙오되었다.


한편 힘들게 합류 지점까지 남하한 제2/30호주대대장 램지 소령은 제2/26호주대대가 이미 철수했다는 걸 알았다. 단독으로 공격을 실시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 램지 소령은 저수지 지역으로 철수했다. 제2/30호주대대는 도중에 낙오한 제2/26호주대대 A 중대 약 70명을 만나 흡수했다. 저수지 지역에 도착한 램지 소령은 전화선을 깔고 있던 제27호주여단의 통신장교를 만나 며칠 만에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과 통화할 수 있었다. 맥스웰 준장은 적이 제11사단의 보급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톰슨 도로의 9마일 이정표 지역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제27호주여단이 받은 명령에 대해 모르고 있던 제11사단장 키 소장은 자신에게 배속되어 좌익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이 보고도 없이 이동해 버리자 당황했다. 키 소장은 제8여단장 트롯 대령에게 130고지 공격을 취소시키고 공격을 준비하던 제2/10발루치대대(파커 중령)를 만다이 도로의 13마일 이정표 지역에 보내어 사단의 좌익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제27호주여단이 제3군단의 좌익을 지켜주지 못하게 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해군기지 포기를 결심했다. 해군기지 포기는 11일 오후 6시에 이루어졌다. 제53여단은 니순 북쪽의 셈바왕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제8여단은 니순 교차로로 철수했고, 제28여단은 니순 남쪽에서 예비대 역할을 했다. 톰포스와 마시포스를 차출하여 껍데기만 남은 제18사단은 그 자리를 지켰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11일 오후에 제18사단장 벡위드-스미스 소장이 톰포스와 마시 포스를 방문했다. 그는 양 부대가 자리잡은 지형이 방어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후방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이 동의함으로써 톰포스와 마시 포스는 11일 저녁에 맥리치 저수지 - 경마장 - 경마장 마을을 잇는 선으로 철수했다. 우익은 마시포스, 좌익은 톰포스가 맡았으며 창이 지역에서 이동해 온 제2고든대대가 톰포스의 왼쪽에서 제22호주여단과 연결했다. 


제22호주여단은 제2/4기관총대대 병력들을 보병으로 지원받고 전장에서 탈출한 병사들을 끌어모아 재편성한 상태였다. 방어선은 철도-홀랜드 도로 교차점에서 200고지를 거쳐 소년원 도로-울루판단 도로 교차점까지 활 모양으로 휘어 있었다.

우익은 제2/20대대의 잔존병을 모아 만든 40명 규모의 혼성중대와 제2/29호주대대 D 중대가 지켰다. 중앙은 제2/4기관총 대대의 주력이 지켰다. 좌익은 로버트슨 중령이 제2/19대대의 잔존병에 기관총대대 병력을 더하여 지켰다. 방어선 바로 후방에는 영국대대와 몇몇 영국군 부대가 방어선을 지원했으며 제2/18호주대대는 예비대였다. 제22호주여단의 방어선은 11일 오후 내내 일본제18사단(보병제56 및 제114연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호주병사들은 저공비행하는 일본기로부터 지속적인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방어선을 지켰다.

제2/15호주야포연대와 제5야포연대는 간밤의 혼란을 극복하고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제22호주여단에 대한 공세를 좌절시키는데 포병이 큰 역할을 했다. 일단 일본군의 공격이 큰 인명피해를 남기면서 실패하자 제22호주여단의 방어선은 밤새 조용했다.


(1942년 2월 12일 - 15일에 걸친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415)


제22호주여단의 왼쪽에서는 제44여단이 소년원 도로-라자 도로 교차점까지 지역을 지켰다. 그 남쪽에서는 제1말레이 여단이 판장파시르의 해안까지 연결된 방어선을 지켰다. 제1말레이 여단에는 제18사단으로부터 제5베드퍼드셔대대와 허트퍼드셔대대의 2개 중대, 그리고 영국 및 인도 공병들로 이루어진 공병대대가 증원되어 있었다. 제44여단과 제1말레이여단은 12일 아침까지 공격을 받지 않았다.


11일 오후 8시에 퍼시발 중장은 담당 구역을 다시 재편했다. 12일 0시를 기하여 제3군단은 부킷티마 도로 서쪽을 담당했다. 제8호주사단(벤넷 소장)은 부킷티마 도로와 울루판단 도로 사이의 부대를 통제했다. 울루판단 도로에서 해안까지는 남부지구 소관이었다. 톰포스는 마시 포스와 합쳐져 제3군단의 지휘를 받았다.


11일에 일본기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이 퍼시발 중장에게 보내는 항복권고문을 담은 45cm 크기의 나무통 29개를 영국군 지역에 투하했다. 제25군 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가 초안을 잡고 야마시타 중장이 결재한 항복권고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항복권고문


대일본군사령관은 일본 무사도 정신에 의거하여 말레이 주재 영군사령관께 항복을 권고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군이 영국의 전통적 정신에 따라 고립된 싱가포르를 수비하면서 용전을 벌여 영군의 명예를 높인 점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전국은 이미 결정되어 싱가포르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저항은 시에 거주하는 다수의 비전투원들에게 직접 위해를 주면서 전쟁의 참상에 끌어넣을 뿐 귀군의 명예를 높이지 못할 것입니다.

본직은 각하가 우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무의미한 저항을 단념하셔서 속히 전 전선에 전투 정지를 명령하시고 동시에 아래 절차에 따라 속히 군사(軍使)를 파견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반대로 저항을 계속하실 경우에는 인도상 하기 어렵지만 아군에게 싱가포르에 대해 철저한 공격을 가하도록 명령하겠습니다.

본 권고를 마치면서 저는 각하께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아래


1. 군사는 부킷티마 도로를 전진한다.

2. 군사는 큰 백기와 유니언 잭을 게양하며 약간의 호위병과 동행할 수 있다.


소화 17년 2월 10일


대일본군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영군최고지휘관 퍼시발 중장 각하


퍼시발 중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문구는 정중했다. 야마시타 중장의 지적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부킷티마의 식량창고를 탈취당함으로써 퍼시발에게는 군대에게 14일 간 보급할 수 있는 식량만이 남았다. 싱가포르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와 펌프장은 일본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깨져서 물이 헛되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방수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기가 인구 밀집 지역에 소이탄 공격을 가한다면 끔찍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었다.


그러나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으로부터, 그리고 웨이벌 대장은 처칠 수상으로부터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처칠 수상은 민간인의 희생을 고려하지 말고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회답을 받지 못했다.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야마시타 중장의 항복권고를 알린 다음 자신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퍼시발 중장에게는 일본군 진지에 답신을 떨어뜨릴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그는 거부하는 답신을 보낼 수 없었다. 그날밤 퍼시발 중장은 부하들에게 중요한 군수품이 일본군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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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부킷티마 함락


일본제5사단의 보병제42연대는 10일 저녁에 초아추캉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제12여단(파리스 준장)을 공격했다. 11마일 이정표 지역을 지키던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는 일격에 패배하여 부킷판장을 통하여 도망쳤다. 부킷판장을 지키던 제2/29호주대대의 3개 중대가 하이드라바드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보병과 교전하는 동안 중형전차 1개 중대가 들이닥쳤다. 제2/29호주대대는 3대를 격파했으나 나머지 전차는 호주군을 무시하고 부킷판장을 통과하여 우드랜드 도로를 따라 부킷티마로 남하했다. 이어서 최소한 2개 대대가 넘는 일본군 보병의 공격을 받은 제2/29호주대대는 부킷판장 마을 동쪽의 언덕으로 밀려났다. 이후 제2/29호주대대의 3개 중대는 송수관을 따라 경주로 지역까지 남하하여 오전에 헤어졌던 대대본부 및 A 중대와 만났다. 대대 전체를 다시 장악한 제2/29대대장 폰드 중령은 재편성을 실시한 다음 제2/15호주야포연대를 호위하면서 남하했다. 11일 아침에 부킷치마 남쪽에서 토머스 중령을 만난 제2/29호주대대는 톰포스에 편입되었다.


이제 남하하는 일본군과 부킷티마 사이에는 아길대대만 남았다. 아길대대는 보유한 차량과 몇 개 남은 대전차지뢰를 사용하여 황급히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10일 오후 10시 30분에 일본전차가 들이닥쳤다. 아길대대는 대전차포 3문과 장갑차 1대로 반격하여 일본전차 1대를 파괴하면서 일단 전진을 막았다. 그러나 곧 전차제6연대의 주력이 도착하여 전차 약 50대가 보병과 함께 재차 공격하자 아길 대대는 패배하여 제12여단 사령부와 함께 우드랜드 도로 서쪽의 목장 지역으로 밀려났다.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기 직전에 제12여단의 참모 2명이 부킷티마에 주둔 중인 제2/4호주대전차연대에게 일본전차의 남하를 알리려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들은 도중에 연락 임무를 띄고 서부지구사령부에서 제12여단으로 향하던 프레이저 소령과 만났다. 참모들로부터 설명을 들은 프레이저 소령은 연락 임무를 잠시 밀어두고 참모들과 함께 제2/4호주대전차포연대를 찾았다. 프레이저 소령은 주롱도로와 우드랜드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남쪽으로 약 270m 떨어진 지점에 트랙터 3대로 길을 막아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제2/4호주대전차포연대를 배치했다.


일본전차대는 자정이 되어 부킷티마의 교차로에 도착한 후 더 이상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교차로 북쪽에 머물렀다. 보병제42연대제2대대가 전차를 보호하면서 부킷티마 교차로 부근에 주둔했다. 제3대대는 부킷티마의 북동쪽 고지를, 그리고 제1대대는 부킷티마의 북서쪽 고지를 점령했다. 이로써 일본군이 요충지 부킷티마를 점령했다. 또한 일본군이 주롱도로의 종점을 통제함으로써 아침의 역습을 위하여 이동 중이던 제15여단 및 제22호주여단의 전진부대들은 고립되었다.

11일 아침까지 일본군의 위력정찰대가 남쪽으로 부오나비스타 15인치 포대와 슬리피밸리 지역까지 돌아다녔는데 후자는 홀랜드 도로에 있던 서부지구사령부에서 지척이었다. 슬리피밸리 지역에 남하한 위력정찰대는 11일 새벽에 후퇴하는 병력에 대해 매복을 실시하는가 하면 소년원 도로 지역에 있던 제22호주여단사령부를 습격하기도 했다.


목장 지역으로 밀려난 아길대대는 11일 새벽에 일본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찰대가 보고한 일본군의 규모는 아길대대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제12여단장 파리스 준장은 자신의 사령부와 아길대대를 이끌고 송수관을 따라 골프장 지역을 거쳐 탕글린으로 후퇴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영국군의 우익에서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제22호주여단의 전방부대들은 반격을 위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X 대대는 자정에 제15여단의 남쪽에 있는 138고지에 도착했다. 더 남쪽에서는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메렛 부대가 목표인 85고지를 찾지 못하여 슬리피밸리에서 새벽까지 기다렸다.


X 대대는 행정병을 모아 만든 부대로서 3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했으며 무장도 빈약했다. 소총을 제외하면 대대의 화기는 기관단총 15정, 경기관총 8정, 2인치 박격포 5문, 3인치 박격포 2문에 지나지 않았다. 소총도 없어서 수류탄만으로 무장한 병사도 있었으며 브렌건캐리어도 없었다.(보병대대의 무장 정수는 기관단총 42정, 경기관총 50정, 2인치 박격포 16문, 3인치 박격포 6문, 브렌건캐리어 14대, 3인치 박격포를 실은 유니버설캐리어 7대이다.)


138고지에 도착한 X 대대는 즉시 방어선을 폈으나 11일 새벽 1시가 되자 지친 병사들은 대부분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에 일본제18사단이 주롱도로를 따라 진격해 왔다. 제18사단 좌익대의 선두인 제56연대제2대대는 척후를 통해 X 대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잘 조율된 공격을 실시했다. X 대대는 비오듯 쏟아지는 박격포탄과 함께 정면과 측면에서 기습을 받았다. 공격 초기에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이 대대본부 옆에 있던 드럼통에 맞아 불타는 석유가 주변을 밝혀 일본군의 공격을 도왔다. 자다가 기습을 당한 X 대대는 궤멸되었다. 본부 옆의 드럼통이 불타면서 일본군의 총탄이 대대본부 텐트로 쏟아져 대대장 보이스 중령과 부대대장 브래들리 소령이 전투 초기에 전사했다. 3명의 중대장 중 1명은 전사했고 1명은 부상을 입었다. X 대대원 중 소수만이 살아남아 소년원 도로까지 철수했다.


X 대대의 북쪽에는 제15여단이 주둔 중이었다. 여단장 코츠 대령은 11일 새벽 2시 30분에 후방인 부킷티마가 불타는 것을 보고 참모를 파견했다. 부킷티마로 접근하던 참모는 타고 있던 자동차가 일본전차의 사격을 받아 파괴되고 구사일생으로 걸어서 여단사령부로 돌아왔다. 참모로부터 부킷티마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코츠 대령은 자신이 고립되었음을 깨달았다. 코츠 대령은 새벽 5시 30분에 2단계 반격을 취소했으나 제2/9자츠대대는 이미 출발한 후였다. 자츠대대는 이후 복귀하지 못하고 전선 후방에 고립되어 있다가 싱가포르 항복과 함께 해산했다. 병사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으나 대대장 커밍 중령은 장교 몇 명과 함께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로 탈출했다.

제15여단 사령부는 부킷티마 북서쪽 1.6km 지점에 있었는데 11일 오전 6시에 부킷티마의 일본군(보병제42연대)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코츠 대령은 영국대대 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1942년 2월 11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9)


X 대대를 분쇄한 제18사단은 11일 오전 7시 30분부터 진격을 재개했다. 이제 제15여단은 부킷티마로부터 추격하는 보병제42연대와 주롱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제18사단 사이에 끼었다. 절박한 상황에 빠진 제15여단은 우선 오전 9시에 제18사단 우익대의 선두인 보병제114연대제1대대에게 백병전을 불사하는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뜻밖의 일격에 놀란 일본군이 움찔하는 사이 제15여단은 재빨리 후퇴했다.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코츠 대령은 부하들을 영국군, 호주군, 인도군으로 나누어서 따로 소년원 도로 방면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철수하는 도중에 완전히 흩어졌으며 결국 약 1,500명에 달하던 제15여단의 병력 중 소년원 도로에 도착한 것은 약 4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슬리피 계곡에 자리잡고 있던 메렛부대도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소년원 도로 방면으로 후퇴하다가 일본위력정찰대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수만이 소년원 도로 지역에 도달했다.


소년원 도로 지역에 있던 제22호주여단사령부는 11일 새벽에 부킷티마에서 남하한 일본군 위력정찰대의 공격을 받았다. 참모, 행정병, 통신병에다가 후퇴하여 부근에 막 도착한 병력까지 가용한 병력들이 총동원되어 백병전까지 불사하는 혈투를 벌였다. 결국 제2/18호주대대의 브렌건캐리어 3대가 달려온 오전 7시에야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정보참모 후튼 중위가 전사하고 여단 부관 빌 소령과 방어소대장 반스 중위가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위력정찰대는 부오나비스타 15인치 포대 부근까지 출몰했으며 따라서 일출과 동시에 포대를 폭파해야만 했다.


이로써 악몽의 밤이 끝났다. 만약 일본군이 작정하고 전차대와 함께 부킷티마 남쪽으로 진출했다면 제15여단의 바리케이드를 뚫었을 것이며 11일 해가 뜨기 전에 일본전차대가 싱가포르 시가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싱가포르가 그날 밤에 함락되지 않은 이유는 일본군이 부킷티마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진격을 멈춘 이유는 이미 목표 지역을 확보한데다가 야포의 진출이 늦어지고 해협을 건너는 보급이 한계에 달하여 탄약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기원절(일본의 건국기념일)인 2월 11일에 맞추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11일 날이 밝으면 퍼시발 중장에게 항복권고문을 보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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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반격 계획


1942년 2월 10일 아침에 ABDA 최고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마지막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웨이벌 대장은 도착하자마자 말레이사령관 퍼시발 중장과 함께 서부지구사령부를 찾아 벤넷소장과 회담했다. 그때 일본기가 서부지구사령부를 폭격했다. 폭탄 1발이 건물에 명중했으나 불발탄이어서 3명의 장군은 목숨을 구했다.


말레이 사령부로 돌아온 퍼시발 중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으로부터 제27호주여단의 철수로 인하여 제11사단의 좌익이 비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둑길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이 남하하여 요충지인 부킷티마를 공격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에게 3개 대대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들어 경주로 지역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부대는 그곳에서 서부지구사령부에 배속될 것이었다. 히스 중장은 제18사단의 각 여단으로부터 3개 대대를 차출하여 토머스 중령의 지휘 아래 경주로 지역으로 파견했다. 이 부대는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톰포스(Tomforce)라고 불렀다.


톰포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제18정찰대대, 제4노퍽대대(제54여단), 제1/5셔우드포레스트대대(제55여단), 제85대전차연대의 1개 포대, 제5야포연대의 1개 포대(11일부터), 통신 및 수송부대


퍼시발 중장은 또한 지휘의 편리성을 위하여 제27호주여단을 서부지구사령부에서 빼내어 제11사단에 배속했다.


10일 오후 2시 30분에 웨이벌 대장과 퍼시발 중장이 다시 서부지구사령부를 찾았을 때 벤넷 소장은 주롱방어선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요충지 부킷티마를 지키기 위하여 주롱방어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퍼시발 중장은 벤넷 소장에게 반격을 실시하여 주롱방어선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제27호주여단은 벤넷 소장의 지휘를 벗어나 제11사단에게 배속된다고 통고하고 서부지구사령부를 떠났다.


10일 오후에 일본군이 크란지 탄약창을 점령함으로써 영국군이 요긴하게 쓸 수 있었던 탄약이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웨이벌 대장은 10일 오후에 남아있던 공군 병력에게 모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말레이 항공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몰트비 소장을 ABDA 항공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최고사령관은 자바로 떠나기 전에 퍼시발 중장에게 주롱방어선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에 동원가능한 병력을 총동원하라고 명령한 후 항복은 불가하며 모든 부대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퍼시발 중장 이하 고위 장교들은 모두 최후까지 부하들을 이끌어야 하며 필요하면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바로 돌아온 웨이벌 대장은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냈다.


'싱가포르 전투는 잘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군은 침투 전술을 사용하여 섬의 서부에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퍼시발에게 가용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이 전선에서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기는 낮습니다... 주된 문제는 보충병의 훈련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일본군의 대담하고 뛰어난 전술과 제공권 상실로 인한 열등감입니다. 공격 정신과 긍정적 태도를 고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노력이 성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장 강경한 어조로 항복은 불가하며 모든 부대는 마지막까지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북쪽의 둑길 구역에서는 제11사단장 키 소장의 명령에 따라 10일 오후부터 제8여단(트롯 준장)이 반격을 개시했다. 제8여단의 선두인 갈월 대대는 120고지와 둑길을 내려다보는 95고지를 점령했으나 남서쪽의 168고지를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 그러자 트롯 준장은 제2/10발루치대대에게 11일 아침에 168고지 남서쪽, 만다이 마을 북서쪽의 130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트롯 준장은 이어서 오후 1시에 만다이 도로 14마일 이정표 지역에 있던 제2/30호주대대본부를 방문하여 램지 중령에게 즉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만다이 마을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직속상관인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으로부터 현 위치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램지 중령은 거부하고 맥스웰 준장을 통하여 명령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맥스웰 준장은 오후 3시에 제11사단장 키 소장으로부터 자신이 제11사단에 배속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음과 동시에 만다이 마을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제2/30대대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오후 7시에 만다이 마을 바로 남동쪽에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 키 소장은 이로써 만다이 마을과 교차로를 점령했다고 생각했으나 엄밀히 말해 제2/30호주대대가 마을 자체와 교차로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제2/30호주대대의 남쪽에 주둔하던 제2/26호주대대는 만다이 마을 남동쪽으로 몇 km 떨어진 290고지를 점령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웨이벌 대장과 퍼시발 중장으로부터 주롱방어선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서부지구사령관 벤넷 소장은 급히 공격계획을 작성하여 오후 4시 5분에 배포했다. 계획은 3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1단계는 10일 오후 6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초아추캉 도로의 11마일 이정표 지역과 주롱 도로의 9마일 이정표 지역까지 전진한다. 2단계는 11일 오전 9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제1단계에서 확보한 지역에서 1,100m 정도 전진한다. 그리고 11일 오후 6시에 마지막 3단계 공세를 취하여 주롱방어선을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공격은 제12여단이 우익, 제15여단이 중앙, 제22호주여단이 좌익을 맡을 것이었으며 제44여단과 톰포스는 예비대였다. 제2/15야포연대가 제12여단을 지원하고 제5야포연대가 제15여단과 제22호주여단을 지원할 것이었다.


벤넷 소장의 계획은 서류상으로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10일 오후 6시 현재 서부지구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여단들은 북쪽의 제12여단을 제외하고는 제1단계 목표를 이미 점령하고 있거나 부근에 있어서 전투없이 무난하게 목표를 점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단들이 다음날 2단계 공격을 실시할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10일 저녁이 되었을 때 제12여단의 병력은 약 1,300명, 제15여단은 약 1,500명, 제22호주여단(제2/18호주대대, X대대, 메렛부대)은 약 1,10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모두 지쳐 있었다.(여단의 정수는 2,944명이다.) 원기왕성한 새 병력이 대량으로 보충되지 않는 한 대규모 공세는 불가능했다.

포병도 마찬가지였다. 경주로 마을에 있던 제5야포연대는 제15여단과 제22호주여단의 2단계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파레 도로 지역에 주둔 중이던 제2/15야포연대는 제12여단의 2단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부킷티마로 가야 했다. 10일 밤에 부킷티마를 향해 출발했던 제2/15야포연대는 도중에 일본군을 만나 밤새 도망다니다가 결국 11일 아침에 파레 도로 지역으로 되돌아왔다.

결론적으로 주롱방어선 탈환을 위한 공세는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일본군이 10일 밤에 선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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