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항복
1942년 2월 15일 아침에 퍼시발 중장은 민방위 사령관 심슨 소장으로부터 싱가포르의 물 공급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일본군이 13일에 저수지를 점령했지만 우들라이의 펌프장을 아직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 공급이 유지되고 있었다. 문제는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부서지는 것이었다. 수도관의 파손으로 12일부터 우들라이 펌프장에서 공급한 양의 1/3 만이 전달되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1/6로 줄어들고 나머지는 모두 누수되면서 저지대에만 물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병대를 주축으로 한 수리반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인원이 부족한데다가 도로가 잔해로 막혀 수리용 파이프 운반이 차질을 빚으면서 수리하는 속도가 부서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퍼시발 중장은 15일 오전 9시 30분에 포트캐닝에서 회의를 열었다. 북부, 서부 및 남부지구사령관, 말레이사령부 참모들, 민방위 사령관, 경찰청장 및 해협식민지 총독이 참석했다. 지구 사령관이 담당 구역의 전술적 상황을 보고한 후 민방위 사령관이 물 공급 문제를 보고했다. 그는 물 공급이 24시간 내로 끊길 것이며 일단 끊기면 전투가 없더라도 복구하는데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언급했다.
수도관 복구에 관한 견해는 너무 낙관적인 것이었다. 싱가포르가 함락된 뒤 일본군은 영국군 공병대와 행정청 직원들로 상수도 수리반을 만들어 최대한 지원해주는 대신 최대한 빨리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압력을 받은 수리반은 11시간 만에 200개의 망가진 파이프를 수리했다. 일본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런 살인적인 속력으로 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대의 건물에 물이 공급된 것은 5일 후였으며 10일이 지나서야 고지대의 건물에 물 공급이 시작되었다. 수압이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한 것은 6주가 지나서였다.
이어서 퍼시발 중장이 보급 상황을 설명했다. 군량은 며칠 분량이 남아 있었으며 민간 식량도 마찬가지였다. 소화기 탄약은 그럭저럭 남아 있었으나 야포탄의 부족은 심각했고 보포스 대공포의 탄약은 거의 떨어졌다. 연료는 자동차나 전차에 이미 들어 있는 분량을 제외하면 거의 떨어졌다. 가장 큰 위협은 물론 눈 앞에 닥친 단수 상태였다.
퍼시발 중장은 현 상태에서 일본군이 포위만 하고 있어도 보급 부족으로 결국 패배하며 만일 일본군이 총공격을 가하면 100만에 달하는 민간인에게 괴멸적인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지는 2개 밖에 없었다. 당장 총반격을 실시하여 대량의 군량미가 있는 부킷티마 지역을 탈환함과 동시에 일본군 야포를 몰아내어 포격으로 수도관을 부수지 못하게 만들던지 아니면 항복하는 길이었다. 지구 사령관들은 반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우울한 15분 간의 침묵이 흐른 후 퍼시발 중장이 항복을 결정했다.
퍼시발 중장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웨이벌 대장으로부터 항복 승인을 받은 상태였다. 처칠 수상이 포기한 것이었다. 전날인 14일에 퍼시발 중장이 단수 때문에 2-3일 이상은 저항이 불가능하다며 재차 항복 권한을 요청했을 때 웨이벌 대장은 군대가 마실 물이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우라는 냉정한 답변을 보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최후가 가까웠음을 느낀 웨이벌 대장은 즉시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 수비대의 장기 저항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이 전문을 읽은 처칠 수상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싱가포르에는 8만의 수비대 이외에도 100만 가까운 민간인이 있었다. 이들 민간인은 잘 조직되어 수비대에 보충병과 보급 및 정보의 원천이 되어 전투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포에 질려 웅성거리는 군중으로 적과 전투 중인 수비대의 커다란 부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 몇 달 이상 대규모의 적을 묶어둘 장기 저항의 희망도 없는데 100만의 민간인을 껴안은 대도시를 시가전의 아비규환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처칠 수상은 참모총장 브룩 장군의 동의를 얻어 웨이벌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귀관은 싱가포르에서 이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할 순간을 판단하는 유일한 사람이며 그에 따라서 퍼시발에게 명령하라. 참모총장 동의"
여기에 따라 웨이벌 대장은 15일 아침에 퍼시발 중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에서 그는 우선 최후까지 저항할 필요성을 언급한 후 저항이 완전히 불가능해졌을 때 저항을 중지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럴 경우 무기, 장비 및 차량을 모두 파괴하고 만일 탈출하려는 병사가 있다면 무장한 상태로 탈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퍼시발 중장과 그 부하들에게 감사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퍼시발 중장이 회의를 마치고 항복 절차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일본군은 공격을 지속했다. 제53여단의 좌익은 일본제5사단의 공격을 받아 브라델 도로 너머로 쫓겨났다. 제1말레이여단은 제18사단의 공격을 받아 알렉산드라 지역에서 밀려났다. 싱가포르 최대의 탄약창을 비롯하여 보급품 창고가 밀집한 알렉산드라 지역을 잃으면서 남아있던 탄약과 보급품을 모두 상실했다. 이제 영국군에게 남은 탄약은 단위부대가 보유한 분량이 전부였다.
15일 오전 11시 30분에 말레이사령부의 군정참모 뉴빅긴 준장, 식민장관 대리 프레이저, 그리고 통역 와일드 소령으로 이루어진 민군합동사절단이 백기를 내건 자동차를 타고 부킷티마 도로를 달려 일본제5사단 보병제21여단 정면으로 나아갔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의 보고를 받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정보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를 파견했다. 뉴빅긴 준장이 스기타 중좌에게 퍼시발 중장의 편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15일 오후 4시를 기하여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싶으니 일본측 사절단을 싱가포르로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기타 중좌는 와일드 소령에게
"항복을 하겠다면 정전한다. 항복할 의사가 있는가?"
하고 물었고 와일드 소령은
"있다."
고 대답했다. 당시 일본군은 '항복' 이라는 용어를 '무조건 항복' 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자 스기타 중좌는 야마시타 중장의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전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사령관은 귀군의 항복을 받아들이며 귀군 최고지휘관이 아래의 조건을 논의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원과 함께 2월 15일 18시(일본시간,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4시 30분)까지 지정한 장소로 와서 일본군 사령관과 회담하기를 요청한다.
아래
1.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항전 중지 및 무장 해제
2. 행정 및 경제기구는 현재의 활동을 지속하다가 요구에 따라 일본군에게 축차적으로 양도할 것
3. 함선, 항공기, 차량, 무기, 탄약, 양식, 연료, 자재 기타와 군용토지, 건물, 교통, 통신, 항만시설, 비행장 등과 지도, 서류 등을 손상, 파괴 또는 태우는 행위는 일본군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간주함
4. 일본군과의 충돌 회피에 만전을 기할 것이며 국지적 충돌 발생시 최고지휘관이 직접 중지 명령을 내릴 것
5. 미국인, 네덜란드인, 중경측 중국인을 즉시 감금하여 일본군에게 넘길 것
6. 감금 중인 일본인을 즉시 일본군에게 넘길 것
7. 아래에 요구하는 사항을 담당할 인원(주임외 약간의 보조인원)을 준비하여 일본 측이 제시하는 요구 사항에 즉시 응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아래
위원장, 육해군각위원, 항공, 경제, 행정, 위생, 노동, 연락위원>
야마시타 중장이 지목한 회담장소는 부킷티마 마을 북쪽에 있는 포드자동차공장이었다. 야포탄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국군이 시가전을 불사하면서 끝까지 저항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야마시타 중장은 약점을 드러낸 퍼시발 중장의 기를 꺾어 항복을 기정사실화하고자 강수를 두었다.
오후 1시에 돌아온 사절단은 퍼시발 중장이 직접 오라는 내용을 담은 일본군의 답서를 전달했다. 퍼시발 중장은 참모인 트란스 준장과 뉴빅긴 준장, 그리고 통역 와일드 소령과 함께 포드 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퍼시발 일행을 태운 차가 일본군이 제시한 시간보다 시간보다 30분 늦은 오후 5시에 포드 자동차 공장 입구에 도착하자 스기타 중좌가 맞이했다. 차에서 내린 퍼시발 일행은 커다란 백기와 유니언잭을 들고 회담장까지 걸어 가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받았다. 일본종군기자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백기를 들고 회담장으로 향하는 퍼시발 일행의 사진을 찍었다. 회담도 하기 전에 항복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백기를 들고 회담장으로 향하는 퍼시발 일행. 가장 왼쪽에 백기를 든 사람이 통역 와일드 소령, 유니언잭을 든 사람이 참모 트란스 준장, 이어서 스기타 중좌, 뉴빅긴 준장, 가장 오른쪽이 퍼시발 중장. 스기타 중좌를 뒤따르는 인물은 일본측 통역인 히시가리 기자.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
퍼시발 일행이 회담장으로 지정된 포드자동차공장 건물 1층의 회의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5분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거기서 오후 8시 30분을 기하여 전투를 중지한다는 내용의 항복문서(정식명칭은 영군에 대한 요구사항)를 받았다. 야마시타 중장은 일부러 10분간 퍼시발 일행을 기다리게 한 후 오후 5시 15분에 막료들과 함께 입장했다. 통역인 히시가리 기자가 야마시타 중장을 소개한 후 야마시타 중장이 퍼시발 중장의 건너편에 앉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항복 회담 전경. 가운데 앉은 사람이 야마시타 중장. 건너편에 앉아 손을 입에 대고 있는 사람이 퍼시발 중장.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ingapore)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야마시타 : 일본군 포로가 있습니까?
퍼시발 : 1명도 없습니다.
야마시타 : 억류된 일본인 민간인이 있습니까?
퍼시발 : 모두 인도로 이송했으며 그곳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처리했습니다.
야마시타 : 당면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항복문서)는 읽어 보셨습니까?
퍼시발 : 읽었습니다.
야마시타 : 거기 제시된 절차를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퍼시발 중장은 문서를 뒤적거리더니 치안 유지 병력 이야기를 꺼냈다.
퍼시발 : 싱가포르 시내는 혼란합니다. 비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1,000 명의 무장병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마시타 : 일본군이 진주하면 치안 유지를 위하여 각별히 마음을 쓰겠습니다.
퍼시발 : 영국군이 싱가포르 사정을 잘 아니 1,000 명의 무장병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마시타 : 일본군을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퍼시발 : 시내를 경비하고 비전투원을 보호해야 합니다.
야마시타 : 비전투원은 무사도 정신에 따라 보호할 것입니다. 대장부로서 말씀드립니다.
퍼시발 : 공백이 생기면 시내가 혼란해질 것입니다. 경비를 하면서 동시에 혼란에 대응하려면 영국군과 일본군이 협력해야 합니다. 이후에 1,000 명의 무장해제 여부를 결정합시다.
초조해진 야마시타는 고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야마시타 : 일본군은 공격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공격할 겁니다.
퍼시발 : 야간공격을 보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마시타 : 여기서 합의가 나오지 않는 한 공격을 실시할 것입니다.
퍼시발 :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야마시타가 씨근덕거리는 동안 퍼시발이 말을 이었다.
퍼시발 : 싱가포르 시내가 혼란하므로 1,000 명의 무장병이 필요합니다.
야마시타는 압박을 가하기 위하여 참모 이케야 대좌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마시타 : 야습 시간은 언제인가?
이케야 : 20시입니다.
통역 와일드 소령으로부터 대화 내용을 들은 퍼시발이 끼어들었다.
퍼시발 : 야습은 곤란합니다.
야마시타 : 영군은 항복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퍼시발 : 정전을 원합니다.
여기서 야마시타는 승부수를 던졌다.
야마시타 : 야습시각이 다가오는데 영군은 항복하지 않고 있다.
그러고는 통역을 기다리지도 않고 책상을 쾅 친 다음 몸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으로 퍼시발 중장을 가리키면서 거칠게 물었다.
야마시타 : 예스냐 노냐? 선택하라.
퍼시발 중장은 통역 와일드 소령을 흘낏 쳐다본 다음 대답했다.
퍼시발 : 예스. 1,000명의 무장병을 허용하는 조건입니다.
야마시타 : 알겠습니다.
이때 스기타 중좌가 재빨리 끼어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스기타 : 무장병 배치 문제는 당분간 우리 측이 요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문서에 서명하시지요.
서명을 하기 전에 퍼시발 중장은 야마시타 중장에게 민간인의 안전 보장과 우발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16일 날이 밝은 이후에 시내로 진입할 것을 요청했고 야마시타 중장은 받아 들였다. 이로써 55분에 걸친 회담이 끝났다.
오후 6시 10분에 서명된 항복문서(정식 명칭은 영군에 대한 요구사항)은 낮에 퍼시발 중장에게 전달했던 문서를 토대로 세부 사항을 꼼꼼하게 규정하여 3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일본군이 보도자료에 명시한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군은 2월 15일 오후 8시 30분(일본시간 오후 10시)까지 적대행위를 중단한다.
2. 영군은 2월 15일 오후 9시 30분(일본시간 오후 11시)까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
3. 제국육군은 싱가포르 치안 유지를 담당한 1,000명 이하의 인원에게 추후 통고가 있을 때까지 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4. 제국육군은 영군이 사소한 위반 행위라도 저지른다면 즉시 발포할 것이다.
야마시타 중장은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회담 당시 영국군이 시가전으로 끝까지 저항할까 봐 마음을 졸였으며 당시 야포탄이 부족하여 만일 영국군이 끝까지 저항했다면 일본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당시 영국군과 일본군의 보급 상황을 살펴보면 이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본군에게 야포탄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2월 15일 아침에 야포 1문당 200발 정도 남았다고 하는데 이는 2회 교전할 분량으로 장기전을 생각하면 턱없이 모자란 양은 맞다. 문제는 당시 영국군의 사정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군은 항복 당일인 15일에 싱가포르 최대 규모인 알렉산드라 탄약창을 상실하면서 남은 탄약을 모두 잃었다. 따라서 당시 영국군이 보유한 야포탄은 단위 부대가 보유한 것이 전부였다. 탄약창을 상실하기 전인 15일 오전 회의에서 퍼시발 중장이 야포탄이 매우 부족하다(very short)고 언급한 것을 돌아볼 때 항복 당시 영국군이 보유한 야포탄이 일본군보다 특별히 많을 리가 없다. 더하여 영국군의 식량은 2주일 치가 채 남지 않았으며 민간 식량은 1주일치 밖에 없었다. 항복 당일에는 물 공급마저 끊겼다.
반면 일본군의 보급 사정은 급속히 호전되고 있었다. 싱고라에서 싱가포르 섬에 이르는 제25군의 보급 체계에서 병목 구간은 조호르 해협이었다. 그런데 일본 공병대가 2월 15일에 둑길을 복구하는데 성공하여 15일 오후에는 트럭이 보급품을 싣고 싱가포르 섬으로 들어왔다. 싱고라에 이르는 철도는 3일 전인 12일에 이미 조호르바루역까지 연결된 상태였다. 따라서 만일 퍼시발 중장이 항복을 거부했다면 일본군은 싱고라에서 철도를 타고 조호르바루역까지 운반된 야포탄을 3,000대에 달하는 자동차에 실어 둑길을 건너 일선 부대에 전달함으로써 공세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포탄이 없어 일본군이 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사령부로 돌아온 퍼시발 중장이 싱가포르 수비대에 항복명령을 내리면서 1942년 2월 15일 오후 8시 30분을 기하여 총성이 멎었다. 이로써 말레이 전투는 일본군의 예상보다 30일이나 빠른 70일 만에 영국군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밤 퍼시발 중장은 ABDA 사령부에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물, 석유, 식량, 그리고 탄약이 사실상 고갈되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장병들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며 귀관의 도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우리는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적대 행위는 오후 8시 30분에 끝냈습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싱가포르로부터의 통신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