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반격 계획


1942년 2월 10일 아침에 ABDA 최고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마지막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웨이벌 대장은 도착하자마자 말레이사령관 퍼시발 중장과 함께 서부지구사령부를 찾아 벤넷소장과 회담했다. 그때 일본기가 서부지구사령부를 폭격했다. 폭탄 1발이 건물에 명중했으나 불발탄이어서 3명의 장군은 목숨을 구했다.


말레이 사령부로 돌아온 퍼시발 중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으로부터 제27호주여단의 철수로 인하여 제11사단의 좌익이 비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둑길 구역에 상륙한 일본군이 남하하여 요충지인 부킷티마를 공격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에게 3개 대대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들어 경주로 지역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부대는 그곳에서 서부지구사령부에 배속될 것이었다. 히스 중장은 제18사단의 각 여단으로부터 3개 대대를 차출하여 토머스 중령의 지휘 아래 경주로 지역으로 파견했다. 이 부대는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톰포스(Tomforce)라고 불렀다.


톰포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제18정찰대대, 제4노퍽대대(제54여단), 제1/5셔우드포레스트대대(제55여단), 제85대전차연대의 1개 포대, 제5야포연대의 1개 포대(11일부터), 통신 및 수송부대


퍼시발 중장은 또한 지휘의 편리성을 위하여 제27호주여단을 서부지구사령부에서 빼내어 제11사단에 배속했다.


10일 오후 2시 30분에 웨이벌 대장과 퍼시발 중장이 다시 서부지구사령부를 찾았을 때 벤넷 소장은 주롱방어선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요충지 부킷티마를 지키기 위하여 주롱방어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퍼시발 중장은 벤넷 소장에게 반격을 실시하여 주롱방어선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제27호주여단은 벤넷 소장의 지휘를 벗어나 제11사단에게 배속된다고 통고하고 서부지구사령부를 떠났다.


10일 오후에 일본군이 크란지 탄약창을 점령함으로써 영국군이 요긴하게 쓸 수 있었던 탄약이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웨이벌 대장은 10일 오후에 남아있던 공군 병력에게 모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말레이 항공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몰트비 소장을 ABDA 항공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최고사령관은 자바로 떠나기 전에 퍼시발 중장에게 주롱방어선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에 동원가능한 병력을 총동원하라고 명령한 후 항복은 불가하며 모든 부대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퍼시발 중장 이하 고위 장교들은 모두 최후까지 부하들을 이끌어야 하며 필요하면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바로 돌아온 웨이벌 대장은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냈다.


'싱가포르 전투는 잘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군은 침투 전술을 사용하여 섬의 서부에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퍼시발에게 가용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이 전선에서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기는 낮습니다... 주된 문제는 보충병의 훈련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일본군의 대담하고 뛰어난 전술과 제공권 상실로 인한 열등감입니다. 공격 정신과 긍정적 태도를 고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노력이 성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장 강경한 어조로 항복은 불가하며 모든 부대는 마지막까지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북쪽의 둑길 구역에서는 제11사단장 키 소장의 명령에 따라 10일 오후부터 제8여단(트롯 준장)이 반격을 개시했다. 제8여단의 선두인 갈월 대대는 120고지와 둑길을 내려다보는 95고지를 점령했으나 남서쪽의 168고지를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 그러자 트롯 준장은 제2/10발루치대대에게 11일 아침에 168고지 남서쪽, 만다이 마을 북서쪽의 130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트롯 준장은 이어서 오후 1시에 만다이 도로 14마일 이정표 지역에 있던 제2/30호주대대본부를 방문하여 램지 중령에게 즉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만다이 마을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직속상관인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으로부터 현 위치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던 램지 중령은 거부하고 맥스웰 준장을 통하여 명령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맥스웰 준장은 오후 3시에 제11사단장 키 소장으로부터 자신이 제11사단에 배속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음과 동시에 만다이 마을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제2/30대대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오후 7시에 만다이 마을 바로 남동쪽에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 키 소장은 이로써 만다이 마을과 교차로를 점령했다고 생각했으나 엄밀히 말해 제2/30호주대대가 마을 자체와 교차로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제2/30호주대대의 남쪽에 주둔하던 제2/26호주대대는 만다이 마을 남동쪽으로 몇 km 떨어진 290고지를 점령했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웨이벌 대장과 퍼시발 중장으로부터 주롱방어선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서부지구사령관 벤넷 소장은 급히 공격계획을 작성하여 오후 4시 5분에 배포했다. 계획은 3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1단계는 10일 오후 6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초아추캉 도로의 11마일 이정표 지역과 주롱 도로의 9마일 이정표 지역까지 전진한다. 2단계는 11일 오전 9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제1단계에서 확보한 지역에서 1,100m 정도 전진한다. 그리고 11일 오후 6시에 마지막 3단계 공세를 취하여 주롱방어선을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공격은 제12여단이 우익, 제15여단이 중앙, 제22호주여단이 좌익을 맡을 것이었으며 제44여단과 톰포스는 예비대였다. 제2/15야포연대가 제12여단을 지원하고 제5야포연대가 제15여단과 제22호주여단을 지원할 것이었다.


벤넷 소장의 계획은 서류상으로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10일 오후 6시 현재 서부지구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여단들은 북쪽의 제12여단을 제외하고는 제1단계 목표를 이미 점령하고 있거나 부근에 있어서 전투없이 무난하게 목표를 점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단들이 다음날 2단계 공격을 실시할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10일 저녁이 되었을 때 제12여단의 병력은 약 1,300명, 제15여단은 약 1,500명, 제22호주여단(제2/18호주대대, X대대, 메렛부대)은 약 1,10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모두 지쳐 있었다.(여단의 정수는 2,944명이다.) 원기왕성한 새 병력이 대량으로 보충되지 않는 한 대규모 공세는 불가능했다.

포병도 마찬가지였다. 경주로 마을에 있던 제5야포연대는 제15여단과 제22호주여단의 2단계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파레 도로 지역에 주둔 중이던 제2/15야포연대는 제12여단의 2단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부킷티마로 가야 했다. 10일 밤에 부킷티마를 향해 출발했던 제2/15야포연대는 도중에 일본군을 만나 밤새 도망다니다가 결국 11일 아침에 파레 도로 지역으로 되돌아왔다.

결론적으로 주롱방어선 탈환을 위한 공세는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일본군이 10일 밤에 선수를 쳤다.

Posted by 대사(PW)
,